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맑스주의 철학의 ‘수정’과 부르주아적 속류화―신재길 동지의 반론에 대한 비판

 

문영찬 | 연구위원장

 

 

 

1. 토대-상부구조는 이원구조다?

 

신재길 동지에 대한 이번 비판은 필자의 두 번째 비판이다. 그 사이 신재길 동지는 이전에 썼던 글을 ≪정세와 노동≫ 148호(2019년 2월호)에 발표했는데, 그 글은 신재길 동지의 맑스주의 철학의 수정이 어떠한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신재길 동지는 맑스주의는 사회를 이원구조로 본다. 생산관계인 토대와 이데올로기 관계인 상부구조로 본다1)고 하고 있다. 여기서 신재길 동지는 맑스주의가 사회를 이원구조로 본다고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오류이다. 토대와 상부구조 개념, 사적 유물론은 2원 구조가 아니라 1원 구조이다. 즉, 일원론이다. 이는 신재길 동지가 사적 유물론에 대해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며, 그의 사적 유물론에 대한 수정이 이러한 피상적 이해에 기초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면 사적 유물론이, 토대와 상부구조 개념이 왜 일원론인가에 대해 살펴보자. 사적 유물론에서 유물론이라는 개념의 역할은 그것이 일원론임을 말해 주는 역할을 한다. 왜 그런가? 우선 맑스가 사적 유물론을 정립했던 ≪독일 이데올로기≫의 구절들을 살펴보자.

 

이러한 역사 파악의 근거는 현실적 생산 과정을 그것도 직접적 생활의 물질적 생산으로부터 출발하여 현실적 생산 과정을 전개하는 것, 그 생산 양식과 연관된 그리고 그 생산 양식에 의해 산출된 교류형태를, 따라서 그 다양한 단계에 있어서의 시민사회를 역사 전체의 기초로서 파악하는 것, 그리고 시민사회를 그 행동에 있어서 국가로 표현하는 것, 이와 함께 종교, 철학, 도덕, 등등 등등의 의식의 각종 이론적 산물들과 형식들을 시민사회로부터 설명하고 또한 그 형성 과정을 시민사회로부터 추적하는 것 등에 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사태는 그 총체성 속에서 (그래서 또한 이들 다양한 측면들의 상호작용도) 표현될 수 있다.2)

부르주아지는 그들이 더 이상 하나의 신분이지 않고 하나의 계급인 까닭에, 더 이상 지방적으로가 아니라 전국적으로 자신을 조직하지 않을 수 없고 그들의 평균적 이해에 보편적 형식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공동체로부터 사적 소유의 해방을 통하여 국가는 시민사회와 나란히 있는, 그리고 시민사회 바깥에 있는 특수한 존재로 되었다. 그러나 국가는 부르주아들이 그들의 소유 및 그들의 이익을 상호 보장하기 위하여 대외적으로도 대내적으로도 필요로 하게 된 조직의 형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3)

국가란 지배 계급의 개인들이 그들의 공동의 이해를 관철하는 형태, 어떤 시기의 시민사회 전체가 총괄되어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모든 공동의 제도들이 국가에 의해 매개되어 하나의 정치적 형태를 가지게 된다는 결과가 나온다.4)

 

여기에 인용되어 있는 맑스의 구절들은 가공되기 이전의 맑스의 사고의 원형이다. 여기에 나와 있는 것은 일원론인가? 아니면 이원론인가? 첫 번째 구절에서 맑스는 물질적 생산에서 출발하여 그 생산양식에 의해 산출된 교류형태(이후 생산관계로 불리게 된 개념)를, 그리고 그에 따라 시민사회를 역사 전체의 기초로 파악하고 국가를 시민사회의 행동으로 파악하고 있다. 여기서 국가라는 상부구조는 시민사회의 행동, 즉, 시민사회의 산출물로 파악되고 있다. 이것은 시민사회(혹은 토대)와 국가에 있어서, 시민사회에 의해 규정되는 국가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두 번째 구절에서 국가는 시민사회 바깥에 존재하지만 시민사회 내의 지배계급인 부르주아들의 이해를 보장하기 위한 조직형태 이외의 것이 아니라고 명확히 규정되고 있다. 이 또한 시민사회(혹은 토대)가 국가의 본질을 규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 번째 구절에서는 국가는 시민사회의 총괄로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보면, 토대(혹은 시민사회)와 상부구조의 관계에 있어서 토대가 상부구조의 본질을 규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뿌리는 하나 즉, 토대 혹은 시민사회임을 알 수 있다. 일원론, 이원론, 이원구조 등을 말할 때의 그 원(元)자는 뿌리를 말한다는 것을 볼 때, 사회를 규정하는 근본 뿌리는 하나라는 것이 맑스의 구절들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렇게 경제적 토대(교류형태 혹은 시민사회)는 사회구성을 전체적으로 규정하는 유일한 뿌리로서 맑스에 의해 파악되고 있고 그런 점에서 이러한 역사파악이 사적 유물론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사적 유물론이라 할 때 유물론이라는 개념이 의미하는 바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질적 생산, 교류형태(생산관계)와 시민사회를 사회구성의 뿌리로 파악하는 것에 의해 맑스는 국가, 이데올로기 등등 사회를 구성하는 일체의 요소들을 통일시킬 수 있었고 이렇게 함에 의해 사태는 그 총체성 속에서 표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총체적인 파악을 맑스는 이후 사회구성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킨다. 토대와 상부구조의 통일로서 사회구성체! 사회구성체라는 개념은 맑스의 유명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 명료하게 쓰이고 있다. 한 사회구성체는 그것이 충분히 포용하고 있는 생산력들 모두가 발전하기 전에는 결코 몰락하지 않으며 … 이 사회구성체와 더불어 인간 사회의 전사는 끝을 맺는다.5) 여기서 사회구성체라는 개념은 맑스의 사회 이론, 사적 유물론의 핵심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심지어 맑스는 혁명을 사회구성체의 교체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혁명에 대한 온갖 비과학적인 인식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구성체 개념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즉, 토대와 상부구조 개념을 빼놓고 사회구성체를 논할 수 있는가? 사회구성체라는 개념은 사회를 유물론적으로 파악하는 개념이다. 즉, 경제적 사회구성체라는 개념은 토대와 상부구조 개념의 통일로서 성립하는 개념이다. 그런 점에 토대와 상부구조 개념은 하나의 비유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된다.

신재길 동지는 토대와 상부구조의 개념을 하나의 비유(즉, 과학적 개념이 아닌 것)라고 강변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사회구성체 개념 또한 하나의 비유라고 주장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신재길 동지가 맑스의 토대-상부구조 개념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러한 피상적인 이해에 기초하여 왜곡을 감행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2.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의 의미

 

신재길 동지는 토대-상부구조 개념이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독자성)을 설명하기에 부절적하며, 따라서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3층의 구조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6) 즉, 신재길 동지가 토대와 상부구조의 개념을 간단히 비유라는 말로써 청산하고 이를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으로 분해하는 것의 이유가 되는 문제의식은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 혹은 독자성이다. 그리하여 경제는 생산관계, 정치는 권력관계, 이데올로기는 세계관이라는 3분법을 성립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3분법은 경제와 정치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분리를 전제로 각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으며, 토대와 상부구조의 통일적인 일원론 대신 왜 3분법이 성립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러면 이러한 잘못된 접근 자체를 비판하기에 앞서 먼저 신재길 동지가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에 대해 살펴보자.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의 의미는 경제와 정치, 이데올로기의 3분법이 성립되어야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의 의미는 토대와 상부구조 개념에 입각할 때만 그 참다운 의미가 드러난다. 앞서 인용한 ≪독일 이데올로기≫의 구절에서 맑스는 물질적 생산과 시민사회를 기초로 한 국가 등을 설명하면서 총체성이라는 개념에 도달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회를 구성하는 제 요소들, 이들 다양한 측면들의 상호작용이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 혹은 자율성, 혹은 능동성이라는 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측면들의 상호작용의 하나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호작용은 단순히 생산관계, 권력관계, 세계관이라는 각 측면들의 특징을 서술한다고 해서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국가의 상대적 독자성의 근거,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독자성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파악해 들어가야 한다. 그럴 때만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의 의미가 정확하게 드러날 수 있다.

먼저 상부구조의 핵심인 국가 혹은 정치의 상대적 독자성에 대해 살펴보자. 맑스는 앞의 인용문에서 국가를 시민사회의 총괄로서, 그리고 시민사회의 행동으로서 파악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국가는 시민사회의 지배계급인 부르주아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라는 것이다. 그런데 맑스는 여기서 더 들어가고 있다. 맑스는 앞의 인용문에서 부르주아지는 그들이 더 이상 하나의 신분이지 않고 하나의 계급인 까닭에 … 그들의 평균적 이해에 보편적 형식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하고 있다. 또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의 다른 문장에서 바로 부르주아들은 계급으로서 지배하기 때문에, 법률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보편적 표현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7)고 하고 있다. 이를 종합해서 보면, 부르주아 국가는 토대와 시민사회의 규정력으로 인해 본질적으로 지배계급인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도구이지만 그 형식에 있어서 보편적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며, 국가의 상대적 독자성은 바로 이 점, 보편적 형식이라는 점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부르주아 국가가 취하는 공적 권력이라는 형태, 법률 등에서 보편적 이념으로서 자유와 평등 등의 승인이 바로 부르주아 국가가 취하는 보편성의 형식인 것이다. 이는 국가 혹은 정치의 내용은 부르주아지라는 지배계급의 지배도구이지만 그 형식은 공권력, 보편적 이념임을 말한다. 역으로 공적 권력이라는 형태, 자유, 평등 등의 보편적 이념은 국가의 내용이 아니라 한갓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르주아 국가의 경제적 토대로부터의 상대적 독자성을 보면, 즉, 경제적 토대에서 비롯되는 계급관계, 계급적 규정력으로부터 부르주아 국가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적으로만 자유롭고 그런 한에서 상대적 독자성을 갖는다. 이러한 접근은 신재길 동지가 정치의 영역을 추상적으로 권력관계로 파악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데, 신재길 동지가 정치에 대해 형식논리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독자성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마찬가지로 ≪독일 이데올로기≫로부터 이데올로기의 자립성 문제에 대한 맑스의 언급을 살펴보자.

 

우리는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인간들에서 출발하며, 또한 그들의 현실적 생활과정으로부터 이 생활 과정의 이데올로기적 반영들과 반향들의 발전을 표현한다. 인간들의 뇌 속의 환영들 또한 인간들의 물질적인, 경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그리고 물질적 전제들에 연결된 생활 과정의 필연적 승화물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도덕, 종교, 형이상학 및 그 밖의 이데올로기와 그에 상응하는 의식 형태들은 더 이상 자립적 가상을 갖지 않는다. 그것들은 아무런 역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어떠한 [자립적] 발전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과 자신들의 물질적 교류를 발전시키는 인간들이 이러한 자신들의 현실과 함께 또한 그들의 사유 및 그 사유의 산물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8)

 

지배계급의 사상들은 어떠한 시대에도 지배적 사상들이다. … 지배적인 사상들이란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들의 관념적 표현, 즉 사상들로서 파악된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9)

 

정치, 법, 과학 등등의, 예술, 종교 등등의 역사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10)

 

의식은 결코 의식된 존재 이외의 어떤 것일 수 없으며, 인간들의 존재는 그들의 현실적인 생활과정이다.11)

 

위에 인용한 맑스의 언명들은 한마디로 의식은 존재의 반영이므로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 자립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맑스는 심지어 법을 포함한 이데올로기들은 고유의 역사를 갖지 않는다고까지 했다. 이것만 보면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는 상대적 독자성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선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인류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맑스주의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또 레닌은 경제 투쟁, 정치 투쟁과 나란히 이데올로기 투쟁 혹은 이론 투쟁을 놓았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의 모순이다. 이데올로기는 결코 물질적 관계로부터 자립적 성격을 갖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관계를 비롯한 사회 전반의 영역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맑스는 법, 과학, 예술, 종교 등등의 역사를 부정했지만 실제로는 예술사, 종교사 등이 존재한다. 또 철학사는 철학의 중요한 하나의 분과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순적 현실에 대해 맑스는 일정한 해결의 방향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맑스의 언급을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인용해 보자. 비판이 아니라 혁명이야말로 또한 종교의 역사, 철학의 역사, 기타 이론들의 추동력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12) 즉, 맑스는 물질적 관계의 변혁을 의미하는 혁명이 이데올로기와 이론의 역사의 추동력, 발전의 추동력이라고 정식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는 자립적 성격을 갖지 않지만, 각 영역의 특성에 따라 일정한 매개를 통해 발전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철학의 경우 물질적 관계의 변혁 혹은 계급투쟁의 영향에 의해 발전하지만 그 발전은 물질적 관계의 직접적 반영이 아니라 철학의 근본문제인 물질과 의식의 문제를 축으로 하여 발전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러한 매개가 중요한데 매개의 중요성을 놓치면 이데올로기에서 속류 유물론으로 전락한다는 다음의 언급은 중요하다. 각각의 사회적 이론 혹은 예술 작품의 모든 내용적 요소를 매개적인 고리를 고려에 넣지 않고, 직접적인 경제적 토대로부터 이끌어 내고자 하는 시도는 사적 유물론의 속류화이다.13)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이데올로기 영역은 물질적 관계로부터 자립성을 갖지 않지만, 그 관계는 직접적인 반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각각의 영역에 고유한 매개를 거쳐서 반영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매개의 고리들이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독립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신재길 동지가 상부구조의 자율성의 하나의 예로 들었던 사회주의 국가에 의한 물질적 변혁에 대해 살펴보자. 상부구조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상대적 독립성을 갖는다. 그리고 그러한 상대적 독립성에 기초하여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데, 이는 역사가 물질적 관계에 의한 필연성을 갖고 발전하지만 그러한 역사는 인간의 실천이라는 매개를 통해 관철된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르주아 국가의 능동성과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능동성은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 국가는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의 반영이 일차적이기에 소위 공공적 정책이라는 것은 인민의 혁명성을 잠재우고 통제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회복지 정책이라는 것도 인민의 불만을 잠재우고 또 복지의 제공 과정을 통한 통제를 위한 것이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하버마스는 이러한 현상을 체계(국가와 경제의 영역)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 기술화라는 개념으로 파악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의 능동적 역할은 부르주아 국가와 비할 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국가의 일차적 역할은 계급을 폐지하는 것으로서 사회구성체 전체에 걸친 근본적 변혁을 수행하는 것인데, 이는 노동자계급이 지배계급으로 올라섰다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 건설 과정은 부르주아 국가가 인민의 혁명성을 거세하는 것과 달리 인간해방의 과정이고 인민의 능동성을 고양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데올로기의 능동성을 살펴보자.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인식에 있어서 중대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예술, 종교, 철학, 과학 등은 물질적 관계들이 인간의 인식에 반영되는 중요한 매개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각 영역은 치열한 계급투쟁의 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러한 투쟁은 물질적 관계의 직접적 반영이 아니라 철학에서 철학의 근본문제와 같이 매개를 통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물질적 관계의 이러한 매개를 통한 반영이 정확히 이루어질 때, 이데올로기의 각 영역은 계급투쟁에 중대한 공헌을 하게 되는 것이다.

 

 

3. 사회이론에 있어서 방법론상의 오류

 

신재길 동지는 위와 같은 내용상의 오류만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재길 동지가 위와 같은 내용상의 오류를 범하는 데에는 방법론상의 오류 또한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이 점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신재길 동지가 토대와 상부구조 개념을 분해하여 그것을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로 환원하고 있는 데에 영향을 끼친 것은 일차적으로 알튀세르의 중층결정화된 모순 개념이다. 이에 대해 신재길 동지는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알튀세르가 아니라 바스카의 발현과 창발 개념이라고 하고 있다. 그렇지만 신재길 동지는 다음과 같이 자신이 알튀세르의 중층결정화된 모순 개념을 계기로 삼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여러 사회적 요소에 의해 사회적 현상이 규정되는 것을 중층결정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 심층에 경제가 있다고 설명되기도 한다. 이런 사고는 사회를 토대 상부구조라는 2층 구조에서 다층구조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준다.14) 즉, 신재길 동지는 알튀세르의 중층결정화된 모순이라는 개념을 계기로 토대-상부구조를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로 분해하는 자극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알튀세르의 비과학적인 중층결정화된 모순 개념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바스카의 발현과 창발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재길 동지가 알튀세르의 중층결정화된 모순 개념에 근거하지 않고 있다고 변명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신재길 동지 자신이 근거로 삼고 있다고 하는 바스카의 발현과 창발 개념에 대해 검토해 보자. 신재길 동지에 따르면 바스카의 이론은 물질의 구성요소들의 결합에 의해 구성요소에 없는 새로운 성질이 나타나는 것을 두고 발현이나 창발로 파악하는데, 이 개념이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을 나누는 개념으로서 역할하며 그중 물리학이 가장 심층을 이루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신재길 동지는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의 위계적 구분을 하고 그중 경제가 가장 심층을 이루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은 많은 문제점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발현 혹은 창발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지만, 자연과학에서 물리학, 화학, 생물학의 관계를 사회의 영역인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에 적용하는 것은 과학적인 방법이 아니다. 즉, 발현 혹은 창발이라는 개념과 무관하게 신재길 동지의 방법은 하나의 비유를 그대로 현실의 영역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는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관계가 왜 3층 구조로 나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착상을, 직관을 드러내는 것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비유 자체는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유가 의미가 있으려면 그것이 하나의 가설의 수준으로 발전해야 하는데 신재길 동지는 그러한 수준에 전혀 다가서지 못하고 자신의 하나의 착상을 그대로 현실에 적용한 것이다. 물론 신재길 동지는 자연과학의 영역에서의 개념들의 적용이기 때문에 그러한 적용이 과학적일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자연과학의 개념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사회의 영역에 적용할 때는 사회적 근거를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게 되고 그러한 비유를 기계적으로 사회에 적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신재길 동지는 토대와 상부구조의 사적 유물론을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로 분해하여 그것들의 통일성을 파괴하고 나서 다시금 관념적으로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통일시키기 위해 지배성과 집단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한 사회의 물질적 통일성을 가리키는 사적 유물론을 관념론적인 속류 부르주아 이론으로 전화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배성과 집단성 개념은 부르주아 사회 이론에 문을 활짝 열어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신재길 동지는 자신의 지배성과 집단성 개념이 진화인류학에 기반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부르주아들이 동의한다고 해서 과학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신재길 동지는 기본적인 것을 잊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에 있어서는 사회과학에 있어서 모든 이론에 계급적 각인이 찍힐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 신재길 동지는 전혀 무지한 듯이 행동한다. 사회과학은 계급적 당파성에 따라 이론이 갈릴 수밖에 없다는 것은 맑스주의자의 ABC 아닌가? 따라서 신재길 동지는 진화인류학이 어떤 계급의 당파성에 입각한 것인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학문에 있어서 당파성은 비단 사회과학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과학의 영역에서도 당파성은 각인될 수밖에 없는데, 예를 들면 양자 역학에서 양자적 현상에 대해 관념론의 입장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유물론의 입장을 취할 것인가가 논쟁이 된다. 유명한 아인슈타인-보어 논쟁 또한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의 한 예이고, 양자 역학의 주류 중의 한 명인 하이젠베르크가 플라톤 노선을 주장하는 것 또한 그 한 예이다.

신재길 동지는 당파성의 문제가 과학과 무관하다고 보는 것인지 궁금하다. 왜냐하면 맑스주의는 당파성과 과학성을 통일시켰다는 점에서 변혁의 이론이 되었던 것이고 수많은 노동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4. 모든 전쟁은 계급투쟁이라는 주장이 맑스주의다?

 

필자는 신재길 동지를 제외하고 맑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에게 전쟁은 기본적으로 계급투쟁이다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어떤 근거에서인지 모든 전쟁은 계급투쟁이라는 주장이 맑스주의라고 하고 있다. 신재길 동지가 맑스의 수많은 글 중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물론 80년대 운동에서 계급전쟁이라는 표현이 쓰였던 적이 있고 지금도 일부에서는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선동의 요소를 가미한 것으로서 엄밀한 과학적인 개념은 아니었다. 그러한 선동적 요소가 아니라, 이론으로서 과학으로서 전쟁과 계급투쟁의 개념은 질을 달리하는 것이다. 신재길 동지는 여러 우연적 매개적 요소를 들어낸다면 모든 전쟁은 결국 경제관계에 의해 규정받게 된다. 그래서 모든 전쟁은 기본적으로 계급투쟁이라고 한 것이다15)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많은 혼돈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전쟁의 원인이 경제관계라고 할 경우, 그것은 계급적 관계를 의미할 수도 있고, 계급적 관계가 아닌 경제적 원인에 의해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재길 동지는 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계급투쟁이 아닌 많은 전쟁들, 예를 들면 역사상의 많은 민족 전쟁, 종족 전쟁도 궁극적으로는 부의 획득 등의 경제적 원인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이러한 경제적 원인도 분명히 경제 관계에는 포함되지만 계급투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신재길 동지는 1차 제국주의 전쟁의 경우 그 자체로는 계급투쟁은 아니었다는 필자의 주장에 대해, 제국주의 전쟁의 결과 발생하는 식민지 민족해방전쟁은 계급투쟁이 아닌가라고 주장을 했다. 그러나 이는 앞뒤가 바뀐 주장이다. 레닌은 1차 대전 당시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이는 제국주의 전쟁을 계급투쟁으로 전화시키자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곧 계급투쟁이면, 제국주의 전쟁을 계급투쟁으로 전화시키자는 주장이 성립할 수 있는가? 전쟁과 계급투쟁이 다른 것이기에 질을 달리하기에, 전화시키자는 주장이 성립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전쟁에 경제적 원인이 있다는 것과 모든 전쟁은 계급투쟁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주장이며, 이를 혼동하는 것은 수많은 오류를 낳게 된다.

신재길 동지는 경제의 집약집중이 정치이고 정치의 연장이 전쟁임을 인정한다면, 당연한 논리로서 전쟁은 본질적으로 계급투쟁의 결렬한 양상임을 인정해야 한다16)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각각 올바른 두 명제를 기계적으로 연결시킨 형식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수학에서 A이면 B이다 그리고 B이면 C이다가 성립할 경우, A이면 C이다가 성립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고안한 삼단논법인데 지금도 초등수학에서는 증명의 하나의 방법으로 쓰인다. 그런데 이 삼단논법은 중세의 스콜라학에서 그 남용이 심하여, 근대 철학이 발생, 발전하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말이 되지 않는 것을 기계적으로 삼단논법을 적용하여 마치 진리인 양 행세하는 것이 그 당시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신재길 동지의 명제를 검토해 보자. 정치는 경제의 집중이라는 레닌의 명제는 정확한 것이다. 여기에는 경제가 정치를 규정한다는 유물론적 관점, 그리고 경제관계 내의 모순, 계급관계가 정치에 반영된다는 변증법적 관점이 깔려 있다. 그리고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는 명제는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로 전쟁에 대한 과학적 입장이다. 이전에 전쟁은 하늘이 노해서 일어난다는 등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의 이 명제 이후 비로소 전쟁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문제는 각각 올바른 두 명제를 합친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명제가 언제나 올바른 명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삼단논법은 일종의 형식논리인데, 형식논리는 논리의 형식의 올바름 여부만 따지는 것이지 내용적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단논법이 논리의 형식을 따지는 것을 넘어서서 내용적 판단을 하는 것으로 이행할 경우, 언제나 그 명제의 참이 성립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구체적인 경우에 구체적으로 올바름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재길 동지는 그러한 구체적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삼단논법이기 때문에 올바른 명제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는 레닌과 클라우제비츠의 변증법적 명제를 기계적인 형식논리로 전화시키는 후퇴이며, 그에 따라 모든 전쟁은 계급투쟁이라는 기괴하고 엉터리 같은 주장이 나온 것이다.

 

 

5. 물질이 인식론적 개념이라는 것의 의미

 

그러면 사적 유물론, 사회이론에 대한 접근을 마무리하고, 철학에서 신재길 동지의 왜곡에 대해 비판해 보자. 철학의 근본문제 … 철학적 탐구의 현실적 출발점17)이라는 명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물질과 의식의 대립 중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라는 철학의 근본문제가 세계관의 문제를 비롯한 이론적 탐구의 관건적 중추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재길 동지가 철학의 근본문제를 수정하여 그것을 인식론, 존재론, 방법론 등 세 개의 철학의 근본문제로 갈라놓는 것은 철학적 탐구의 출발을 가로막고 혼란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에 대해 과연 그러한가를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신재길 동지가 철학의 근본문제를 수정하여 제출한 물질과 철학의 근본문제(≪정세와 노동≫ 119호(2016년 1월호))라는 논문은, 인식론적 딜레마에서 출발하여 실천 개념 그리고 사람과 세계의 존재론 그리고 방법론 등의 궤적을 그리며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글은 유물론과 관념론을 오락가락하며 많은 오해와 혼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을 그냥 무시하고 방치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맑스주의의 세계관과 원칙들을 공격하는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혼란이기 때문이다. 즉, 신재길 동지의 혼란은 엄정한 비판을 통해 극복되어야 하고, 그 과정을 통해 철학의 근본문제를 중심으로 한 맑스주의의 세계관과 원칙들, 이론적 탐구의 전망을 정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재길 동지는 레닌의 물질 개념 즉, 물질은 의식으로부터 독립한 객관적 실재라는 개념에 대해, 그것이 인식론적 개념이므로 따로 인식론과 구분되는 존재론에서 철학의 근본문제를 세워야 하고, 그것은 사람과 세계의 문제라고 하고 있다. 위와 같은 정의를 내포하는 레닌의 물질 개념이 인식론적 개념이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물질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흔히 쓰는 개념이고, 산과 강, 바다, 돌과 풀 등을 가리켜 물질의 일종이라 말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면 레닌의 위와 같은 물질에 대한 정의는 왜 인식론적 개념이라 불리는 것일까? 레닌의 정의는 물질에 대한 정의를 의식과 관련지어, 보다 정확하게는 의식과 대립시켜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의 근본문제 차원의 정의이며 또 물질과 의식을 절대적으로 대립시켜서 물질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인식론적 개념이다. 만약 의식으로부터 독립한 객관적 실재로서 물질이라는 규정을 인식론적 범주를 넘어 현실 세계, 존재론적 범주에까지 확장하면 그것은 세계에 대한 이원론이 된다. 즉, 데카르트처럼 사유실체와 연장실체(물질적 실체)라는 이원론이 된다. 그러나 현실세계, 존재론적 범주에서 의식은 뇌라는 물질의 하나의 성질이며, 그러한 의식과 물질은 세계의 물질적 통일성에 기초하여 통일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세계는 운동하고 있는 물질일 뿐이다라는 말도 성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레닌이 정의한 물질 개념의 인식론적 성격에 대한 대략적인 묘사이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여기서 더 나아가 물질 개념은 인식론적 개념일 뿐이므로 존재론적인 철학의 근본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레닌의 주장을 오해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레닌은 위와 같은 물질에 대한 정의를 내린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정의를 보충하고 있다. 물론 물질과 의식 간의 대립은 극히 국한된 범위 내에서만 ―이 경우에 있어서는 무엇이 일차적이고 무엇이 이차적인가 하는 인식론상의 근본문제의 범위 내에서만― 절대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범위를 넘어서면 이 대립은 물론 상대적인 의미밖에 없는 것이다.18) 여기서는 레닌 자신이 정의한 물질 개념에서 물질과 의식의 대립의 절대성은 인식론적 범위 내에 국한되는 것이고, 인식론적 범위를 넘어서면 물질과 의식의 대립은 상대적이라는 정식화가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레닌의 이 정의에 대해 신재길 동지는 물질과 의식의 대립이라는 철학의 근본문제는 단지 인식론상의 문제일 뿐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레닌은 분명히 인식론상의 범위 밖에서 물질과 의식의 대립이 상대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인식론상의 범위 밖의 물질과 의식의 문제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물질과 의식의 문제 혹은 대립이 존재론의 영역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의식은 뇌라는 물질의 성질이다라고 할 경우, 그것은 의식과 물질의 관계를 존재론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다만 그때의 의식과 물질의 관계는 인식론상에서와 달리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대립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철학의 근본문제가 인식론상의 근본문제로 불리지 않고 철학의 근본문제로 불리는 이유도, 물질과 의식의 문제가 단지 인식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실재 차원에서 존재론적 차원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의 근본문제의 존재론적 성격에 대해 쏘련의 철학자 오이저만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관계에 관한 물음은 무엇보다도 존재하는 것의 본질, 즉 본성에 관한 물음이다. 누군가가 세계란 무엇인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경우, 이 물음들은 반드시 물질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들로 구체화될 수밖에 없다. 정신-물질 관계는 객관적인, 우리의 의식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관계이다. 이것이 철학의 근본물음의 존재론적 부면이다.19) 즉, 철학의 근본문제인 정신(의식)-물질의 대립은 객관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존재론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이저만이 이러한 인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인식론과 존재론의 통일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이 오이저만과 신재길 동지의 결정적 차이이다. 신재길 동지는 레닌의 물질 개념에 대한 오해에 기초하여 존재론상의 철학의 근본문제를 찾고 그를 위해 인식론과 분리된 존재론으로 나아간다.

그러면 여기서 인식론과 존재론의 통일성의 의미를 조금 더 구체화해 보자. 맑스의 다음의 언급은 인식론과 존재론의 통일에 대한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 의식은 결코 의식된 존재 이외의 어떤 것일 수 없으며, 인간들의 존재는 그들의 현실적 생활과정이다.20) 의식은 의식된 존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맑스의 언급은 인간의 인식과정을 의미하는 의식과 존재 즉, 객관적 실재 사이의 통일을 보여 주고 있고 또한 의식과 존재 중에서 존재가 일차적이라는 유물론 관점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인간의 인식이 존재, 외적 세계의 반영이라는 유물론적 인식론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인식과정을 의미하는 인식론과 존재, 외적 세계를 의미하는 존재론은 의식은 의식된 존재라는 의식의 본질에 의해 통일의 근거가 주어지는 것이다. 또한 인식론과 존재론의 통일은 이 세계의 물질적 통일성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오이저만이 철학의 근본문제인 정신(의식)과 물질의 관계에 대해 인식론적 영역을 넘어 존재론적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과학적인 접근이다. 그러면 이에 대한 신재길 동지의 입장을 검토해 보자.

만약 물질과 의식의 관계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물질물질의 속성을 직접 비교하는 꼴이 된다. 존재론적으로 전혀 공통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의식은 물질의 한 속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물질의 객관성의 문제는 존재론적 물음이 아니라 인식론적 물음에 한정지어야 한다.21) 여기서 신재길 동지는 물질과 의식은 존재론적으로 전혀 공통성이 없기 때문에 비교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존재론적으로 물질과 의식이 전혀 공통점이 없다는 것은 물질과 의식이 존재론의 영역에서 절대적으로 대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오류이다. 레닌은 물질과 의식의 절대적 대립은 인식론의 영역에서만 한정되는 것이고 인식론의 영역을 넘어서서는 물질과 의식의 대립은 상대적으로 된다고 했다. 이러한 레닌의 언급은 물질과 의식의 대립이 존재론의 영역에서는 상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존재론의 영역에서 물질과 의식이 절대적으로 대립한다면 그것은 곧 데카르트와 같은 이원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닌의 의견을 따른다면 존재론의 영역에서 물질과 의식은 전혀 공통점이 없다는 신재길 동지의 주장은 근거를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존재론의 영역에서 물질과 의식의 대립의 상대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서 예로 든 의식은 뇌라는 물질의 성질이라는 명제 또한 물질과 의식의 상대성을 의미한다. 이 명제에서는 의식이 물질의 파생물이라는 점이 드러나 있어서 의식과 물질은 절대적 대립을 하지 않는다. 또 인간이 노동을 통하여 어떤 물질적인 대상을 개조한다고 해 보자. 그 경우 물질은 노동이라는 의식적 행위, 즉, 의식에 의해 조종당하고 개조되고 변형된다. 이 경우에 물질은 의식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고 다만 상대적으로만 독립되어 있을 따름이다. 또한 인간이 어떠한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실행하여 어떤 대상을 개조했을 경우 개조된 대상과 최초의 목표를 비교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이 경우 인간은 최초의 목표라는 의식과 개조의 결과 나타난 대상이라는 물질을 비교하게 된다. 즉, 존재론의 영역에서 의식과 물질의 비교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의식과 물질은 존재론의 영역에서 비교할 수 없다는 신재길 동지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재길 동지는 자신의 잘못된 주장을 밀고 나가기 위해 물질의 선차성 문제는 인식론적 문제도 아니고 존재론적 문제도 아니다. 이는 철학사의 문제이다22)라고 강변을 한다. 이러한 신재길 동지의 주장은 사실 극도의 주관주의를 보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물질과 의식의 문제가 인식론에 국한되고 존재론에서 별도의 철학의 근본문제를 찾아야 한다는 것에 사로잡혀 최소한의 과학적 접근을 포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인식론에서 물질의 선차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맑스와 같이 의식은 의식된 존재에 다름 아니다는 입장을 의미한다. 즉, 의식은 외적 세계, 존재의 반영이라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 인식론에서 물질의 선차성의 문제이다. 그러나 신재길 동지는 이를 부정하고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유물론적 인식론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신재길 동지는 물질의 선차성은 존재론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존재론에서 물질의 선차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의식과 물질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 존재하게 되었는가, 발생하게 되었는가를 의미한다. 과거 과학이 미발달되었을 때, 의식과 물질 중 어느 것이 먼저 존재했는가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은 지구상에 의식을 가진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으며 (즉, 물질인 지구가 의식보다 먼저 존재했으며) 또한 의식은 지구가 식으면서 적당한 조건이 만들어졌을 때, 물질적 요소의 화학작용을 통해 단백질이 만들어져 생명이 탄생하고 그 생명의 진화의 결과 발생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것이 존재론적 의미에서 물질의 선차성의 의미인데, 신재길 동지가 이러한 관점을 부정하는 것은 스스로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에 대해 판단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실제로는 신재길 동지가 유물론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신재길 동지는 물질은 의식으로부터 독립한 객관적 실재라는 레닌의 명제에 대해 동의하는데, 이는 유물론을 실질적으로 부정하는 가운데 레닌의 명제에 대해 형식논리적 동의를 표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6. 철학의 근본문제와 철학의 본성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인식론과 존재론은 통일된 것이다. 그리고 인식론과 존재론의 구분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인식론과 분리된 존재론으로 나아가고 그리고 그 존재론의 영역의 철학의 근본문제로서 사람과 세계의 문제를 제기한다. 사람과 세계 관계 문제라는 존재론적 문제틀에 물질과 의식의 관계 문제가 포괄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물질과 의식의 관계세계와 사람의 관계가 포함되지도 않는다.23) 그러나 이렇게 인식론과 분리된 존재론을 추구하는 것은 형이상학으로 빠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통일되어 있는 인식론과 존재론을 분리시켜서 인식론과 분리되어 나온 존재론은 그 현실적 토대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식론과 분리되지 않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사람과 세계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즉, 사람과 관계하는 세계는 자연이거나 사회이거나이다. 그중에서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는 자연과학을 통해 파악된다. 사람이 자연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측면, 그리고 사람이 자연에 영향을 끼쳐 자연을 개조하는 것 모두는 자연과학의 영역이 된다. 그리고 사람과 사회와의 관계는 사회과학으로 파악된다. 경제학, 언어학, 역사학, 심리학, 사회학 등 많은 사회과학들의 본성은 사람과 사회와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이 형이상학적으로 신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존재론적으로 파악된 사람과 세계의 문제이다. 이것을 그 자체로 소위 철학의 근본문제로 삼을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식론과 분리된 존재론, 물질과 의식의 관계를 떠난 것으로서 존재론, 사람과 세계의 문제는 인간의 가치, 인간의 실존, 등등의 형이상학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식론과 존재론을 원리적으로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과거의 사변적 형이상학으로 후퇴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론적 측면과 인식론적 측면을 구별하더라도 그 구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24) 여기서 인식론과 존재론의 구별의 절대성과 상대성의 문제가 중요하다. 인식론과 존재론의 구별이 상대적이라면, 존재론의 영역에서 물질과 의식의 문제와 별도로 철학의 근본문제를 설정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다. 이 경우는 인식론과 존재론이 통일성 속에서 구별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인식론과 존재론이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경우는, 존재론의 영역에서 신재길 동지처럼 철학의 근본문제를 별도로 설정하게 된다. 그러나 인식론과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존재론이라는 것은 사변적 형이상학임이 이미 위에서 밝혀졌다.

여기서 존재의 문제, 존재론의 영역에서 별도로 철학의 근본문제가 필요하다는 신재길 동지의 입장을, 철학의 본성은 무엇인가라는 점에서 보다 근원적으로 비판해 보자. 다소 길지만 이에 대해 두 개의 인용문을 인용해 보자.

 

근대 이후 발전하는 과학이 존재하는 대상 영역들에 대한 탐구를 전담하게 되면서 철학은 더 이상 사변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탐구할 수도, 탐구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오히려 철학은 존재와 그것을 표현하는 모든 범주들을 존재(물질)와 사유(의식)의 관계라는 틀을 통하여 다시 고찰하게 되었고, 바로 이것이 철학의 고유한 본성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철학은 대상 세계에 대한 탐구를 두고 개별 과학과 경쟁할 수 없으며, 그 경쟁을 고집하던 사변적 형이상학은 붕괴되었다. 그러나 철학이 패배하는 순간 철학은 자신의 정체를 뚜렷하게 깨닫게 되었으며, 세계관, 방법론, 당파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철학이 새롭게 정립되었다. 철학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으며, 존재(물질)와 사유(의식)의 관계에 대한 물음의 밖에서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탐구를 진행시키는 것은 적어도 철학적 반성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철학은 여러 과학들 위에 군림하는 특별한 과학이 아니라, 순수한 세계관이며, 존재에 대한 탐구는 실증과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엥겔스의 주장은 철학의 폐기 선언이 아니라 철학의 본성에 대한 자각의 선언이다.25)

철학적 탐구란 최소한의 추상능력과 자기반성 및 개념적 분석을 전제로 한다. 이것이 철학의 독특한 본성이며, 물질-의식 관계가 철학의 근본문제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인식론과 존재론을 대립시키거나 인식론을 실천과 대립시키는 것은 문제를 왜곡하는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바로 그러한 대립의 통일을 바탕으로 성립한 것이며, 다시 그 통일을 근본문제라는 틀에 비추어 봄으로써 그러한 통일의 이론적 의의를 철학적으로 체계화시켰던 것이다. … 엥겔스의 정식화 이후에 변증법적 유물론이 이 물음을 철학의 근본문제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고, 이를 토대로 철학사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철학이 자신의 본성에 대한 대자적 이해에 도달했음을 뜻한다.26)

이 두 개의 인용문은 1980년대 철학논쟁에 대한 글로서 철학논쟁을 거치며 한국 사회의 운동에서도 철학의 본성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인용문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존재의 영역, 존재론의 영역은 그 자체로는 더 이상 철학의 영역이 아니라 실증과학의 영역이 되었다는 점이다. 사변적 형이상학이 실증과학에 패배함에 따라 철학은 철학의 근본문제, 즉, 물질과 의식 관계의 틀 내에서 존재에 대한 철학적 탐구와 철학적 반성을 하는 것을 자신의 본성으로 깨달았으며, 존재에 대한 탐구는 실증과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엥엘스의 언명은 철학의 패배선언이 아니라 철학의 본성에 대한 자각의 선언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재길 동지가 다시금 존재론을 인식론에 대립시키는 것을 기초로 존재론 영역에서 철학의 근본문제를 시도하고 있는 것은 철학의 본성에 위배되는 것이며, 그것은 다시금 철학을 사변적 형이상학으로 후퇴시키는 것임이 드러나고 있다. 즉, 철학의 근본문제, 물질과 의식 관계 밖에서의 존재에 대한 탐구는 그것이 소위 사람과 세계의 문제라 할지라도 사변적 형이상학으로의 후퇴인 것이다.

그러면 신재길 동지가 세 번째 철학의 근본문제로 들고 있는 방법론의 영역에서의 존재와 무의 문제를 비판해 보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번 첫 번째 비판에서 지적한 바가 있었는데, 신재길 동지는 그에 대한 답이 없었다.

신재길 동지는 운동과 변화를 가리키는 변증법의 영역이 의식과 물질 관계에서는 반영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반영하는 방법론의 영역에서의 근본문제로서 헤겔 대논리학의 출발점을 이루는 존재와 무의 문제를 제기했다. 신재길 동지의 입장을 인용해 보자. 물질 의식의 근본문제의 유물론적 대답은 물질이 의식으로부터 독립한 객관성과 의식에 대한 선차성이다. 그러나 이 대답으로는 변증법이 이론적으로 규명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조적 유물론과의 차이도 찾아지지 않는다.27) 신재길 동지는 철학의 근본물음인 물질과 의식의 관계 자체가 변증법에 대해 전혀 언급하는 바가 없고, 심지어 물질과 의식 관계만으로는 관조적 유물론과의 차이도 찾아지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물질과 의식이라는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신재길 동지의 이러한 파악은 그가 유물론적 인식론을 거부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유물론적 인식론인 반영론은 의식이 외적 세계, 존재를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외적 세계의 인간의 인식에 대한 반영 과정은 많은 매개를 필요로 하며 결정적으로는 실천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은 실천을 하는 만큼 외적 세계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고 정확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실천은 인식의 토대가 된다. 유물론의 이런 인식론을 따른다면, 물질-의식 관계가 관조적 유물론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신재길 동지의 주장은 근거를 잃는다. 또한 물질 자체가 자신의 본질적 속성으로 운동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물질, 외적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필연적으로 운동과 변화의 요소에 대한 인식을 포함하게 된다. 그리고 운동과 변화의 요소에 대한 인식은 곧 인식의 변증법적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신재길 동지는 이러한 점을 보지 못하고 거꾸로 물질-의식 관계로부터 변증법의 영역을 분리시킴으로써 변증법에 대한 인식을 가로막는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물질의 운동과 그것의 인식에의 반영을 가리키는 것인데, 신재길 동지처럼 물질로부터 운동을 분리시키면(물질-의식관계로부터 변증법을 분리시키면) 그것은 변증법을 형이상학으로 전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증법을 별도로 철학의 근본문제의 영역으로 하자는 신재길 동지의 시도는, 그 의도와 정반대로 물질과 운동의 분리를 통하여 비변증법, 형이상학을 제기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재길 동지의 변증법에 대한 인식은 관념적으로 흘러서 변증법의 영역에서 근본문제로 헤겔적인 존재와 무를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맑스, 엥엘스에 의해 성취된 유물론적 변증법을 다시금 신비화된 헤겔적인 변증법으로 후퇴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와 반대로 유물론적 변증법의 근본문제는 추상적인 존재와 무가 아니라 물질과 운동의 통일성이다. 물질과 운동의 통일성은 고대 유물론에 의해 직관적으로 파악된 바가 있고, 근대에 이르러 데카르트 등에 의해 파악된 바가 있으며, 변증법적 유물론이 성립함에 의해 공고화된 것이다. 물질과 운동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통일되어 있으며 운동은 물질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인식은 근대과학의 기반을 이루는 것이었고 또 이론적으로는 유물론적 변증법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었다. 유물론적 변증법의 여타의 모든 범주들은 물질과 운동의 통일성이라는 범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운동을 물질로부터 분리시킴에 의해 변증법을 형이상학으로 전화시키는 신재길 동지의 이러한 오류는, 레닌의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실재로서 물질이라는 명제에 대해 단지 형식논리적 동의에 그치고 물질의 선차성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의미를 부정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7. 철학에 실천 개념을 도입한다는 것의 의미

 

신재길 동지는 위에서 살펴본 맑스주의 철학의 근본원칙에 대한 수정을 실천 개념을 매개로 수행했다. 그런데 이렇게 실천 개념을 매개로 맑스주의 철학을 수정하려는 시도는 신재길 동지가 처음이 아니라, 1950ㆍ60년대의 동구 실천 논쟁에서 이미 존재했었다. 쓰딸린이 탄핵된 후 권력을 잡은 수정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인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수정을 시도했었다. 그 주요 고리로서 실천 개념이 등장했는데, 주관과 객관의 통일을 의미하는 실천 개념을 물질, 의식과 같은 근본 범주로 놓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물질과 의식의 대립,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을 흐리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을 변혁성이 거세된 자연이론과 사회이론으로 전화시키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수정주의적 시도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었는데, 이러한 비판에 밀려 수정주의자들은 실천 개념을 철학의 중심범주로 놓고자 하는 시도에서 후퇴하고 대신에 물질과 의식이라는 철학의 근본문제의 해결은 실천개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 점은 신재길 동지가 실천 개념을 매개로 맑스주의 철학을 수정하는 출발점과 동일하다. 그러면 동구 실천 논쟁에서 직접 인용해 보자. 첫째, 물질과 의식의 관계라는 문제는 사회의 실천적 삶의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둘째, 이 문제는 실천이 포함되는 경우에만 이론적으로 파악되고 해결될 수 있다.28) 이러한 문제의식 즉, 물질과 의식의 관계라는 철학의 근본물음이 실천 개념이 포함되는 경우에만 이론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맑스-레닌주의자들의 다음과 같은 비판을 대치시켰다. 철학이 사회적 실천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맞지만 실천 범주로부터 출발하지는 않는다.29) 이러한 대립구도의 의미를 살펴보면, 물질과 의식이라는 철학의 근본문제의 생성과 그에 대한 인식은 실천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는 정확한 것인데 철학의 근본문제가 정식화되었던 독일고전철학이 형성되었던 것은 단지 이론적 탐구만이 아니라 산업혁명,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적 혁명, 근대 부르주아계급의 대두라는 사회적 격동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이 당파적 성격을 띠는 것 또한 사회의 계급분열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은 쉽게 추론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철학의 근본문제의 인식이 실천과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물질-의식 관계의 사회적 실천과의 관계와 달리, 물질-의식 관계에서 어느 것이 선차적인가라는 철학의 근본물음의 해결이 실천 개념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며 잘못된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동구의 원칙적 맑스-레닌주의자들은 실천 개념은 철학의 출발점이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 철학의 근본문제의 해결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주관과 객관의 통일, 물질과 의식의 상호작용을 의미하는 실천 개념을 도입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이에 대해 레닌은 물질과 정신이라는 인식론의 두 개의 궁극적 개념에 대해 그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라는 정의 이외에는 어떠한 정의도 본질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들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본질적으로 한 개념을 그보다 더 포괄적인 다른 개념 속에 포섭시킴을 의미한다30)고 했다. 레닌이 여기서 물질과 정신 중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라고 정의한다는 것은 두 개념 중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물질과 정신과 같은 궁극 개념이 아닌 하위 개념에서 정의는 한 개념에 다른 개념을 포섭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민들레는 식물이다라고 할 경우, 민들레라는 개념을 식물이라는 개념에 종속시키는 식이다. 그러나 물질과 정신과 같은 궁극 개념에서는 이러한 포섭관계를 통한 정의는 불가능하고 단지 선택을 통한 정의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물질과 정신 중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의 근거의 문제가 될 경우, 그 근거는 실천 개념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회적 실천이다. 예를 들면 과학과 실험, 생산 등이다. 그리고 인류는 그러한 사회적 실천을 통해 자연이 일차적인가 아니면 정신이 일차적인가의 문제를 수천 년이나 사고해 왔던 것이다.

그러면 실천 개념을 출발점으로 한 신재길 동지의 맑스주의 철학 수정의 경로를 살펴보자. 맑스주의는 근대철학의 근본문제인 인식론적 문제를 실천 개념을 인식론에 도입함으로써 해결한다. … 그런데 실천 개념이 철학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자마자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철학의 근본문제인 존재와 사유 물질과 의식 관계에서 실천 개념이 논리적 정합성을 찾지 못한 것이다.31) 여기에는 신재길 동지의 혼란한 사고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하나하나 실타래를 풀어 보자. 먼저 실천 개념이 철학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중심적 위치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앞서 동구 실천 논쟁에서 보았듯이,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다. 철학의 근본문제의 해결에서 주관(의식)과 객관(물질)의 통일을 의미하는 실천 개념은 철학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혼란시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의 근본문제의 해결은 실천 개념의 도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오랜 기간의 과학과 생산, 계급투쟁 등의 사회적 실천을 기초로 한 선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점을 레닌은 정신과 물질과 같은 인식론의 궁극의 개념은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라고 정의 내리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파악했던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신재길 동지가 혼동하고 있는 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규명해 보자. 맑스는 분명히 실천을 철학에 도입했고 그를 통해 철학에서 거대한 변혁을 이루어 냈다. 먼저 사변적 철학이 철학과 실천을 대립시키는 것을 극복하고, 혁명적 실천을 철학 내에 포섭함에 의해 철학과 정치의 통일을 이루어 내고 맑스주의 철학은 변혁의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실천 개념은 맑스주의 철학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 실천 개념은 맑스주의 철학에서 인식론의 중심범주이다. 즉, 맑스는 실천 개념을 인식론에 통일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실천은 한편으로 인식의 토대가 된다. 마오쩌둥의 경우는 실천-인식-재실천-재인식이라는 정식을 ≪실천론≫에서 수립하기도 했다. 그리고 맑스주의 철학,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인 반영론에서 실천은 주체가 외적 세계, 객관세계를 주동적으로 인식해 가는 매개고리가 된다. 반영은 외적 세계의 수동적 반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실천을 하는 만큼만 인식의 폭과 깊이가 확대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맑스주의 철학에서 실천은 인식론의 중심범주로서 역할한다.

그러나 신재길 동지는 이와 달리 맑스가 실천 개념을 통해 철학의 근본문제를 해결했다고 오해하고 있고 또 이를 기초로 실천 개념은 물질과 의식 개념에 포섭되지 않으므로 실천 개념을 기초로 한 존재론 상의 철학의 근본문제로서 사람과 세계의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나아갔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실천 개념이 물질과 의식 개념에 포섭되지 않는다는 것은 신재길 동지의 독단이다. 물질과 의식이 인식론 상의 궁극개념이라는 것은 인간과 세계를 비롯한 이 세계의 일체의 존재 범주를 추상한 결과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관(의식)과 객관(물질)의 통일을 의미하는 실천이라는 범주는 당연히 의식-물질 개념의 하위 범주가 된다. 신재길 동지가 이를 부정하는 것은 철학적 추상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실천 개념의 논리적 정합성은 신재길 동지의 생각과는 달리 맑스주의 철학에서 인식론의 중심범주로 주어진다. 이를 부정하고 실천 개념을 기초로 인식론과 분리된 존재론을 추구하는 것은 앞서 보았듯이 사변적 형이상학으로 빠지는 길이다.

그러면 신재길 동지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소위 인식론적 딜레마에 대해 살펴보자. 한국 사회에서 인식론적 딜레마라는 표현을 유행시킨 사람은 이진경이다. 1990년대 쏘련이 무너지고 청산주의가 유행하던 시절에 이진경은 ≪철학과 굴뚝청소부≫라는 대중적인 철학 서적을 썼다. 그 책에는 한편으로 맑스주의를 왜곡하고 청산하는 것을 기초로 근ㆍ현대 철학사에 대한 왜곡이 담겨 있다. 바로 이 책에서 이진경은 소위 인식론적 딜레마라는 것을 제기한다. 데카르트의 사유실체와 연장실체(물질적 실체)의 이원론에서 발생하는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의 일치의 불가능성이 인식론적 딜레마의 현실적인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진경은 이러한 문제를 확장하여 철학적 인식론에서 주관과 객관이라는 대립구도 자체를 딜레마로 상정했다. 이렇게 되면 인식과 대상의 일치의 불가능성이 사유실체와 연장실체라는 이원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과 대상의 구분 자체에서 발생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는 허구적인 문제이다. 소위 데카르트 이전에도 심지어 고대철학에서도 인식과 대상의 일치의 문제, 진리의 문제는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의 경우 인간은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얇은 박리상을 감각을 통해 받아들여서 인식한다고 생각했다. 이 경우 데모크리토스는 나름대로 인식과 대상의 일치의 근거를 사고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진경이 말하는 소위 인식주관과 객관의 분열의 문제는 데카르트 이전에 이미 발생했던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결코 근대철학의 딜레마로 불릴 수 없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근대철학의 딜레마, 소위 인식론적 딜레마라는 것은 허구적인 것이다. 그러한 딜레마는 인식과 대상의 분리, 주관과 객관의 구분에서 비롯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데카르트와 같은 이원론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자신의 일원론을 세우면서 데카르트와 같은 인식론의 딜레마가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이진경의 이런 허구적인 문제설정을 그대로 수용하여, 그를 기초로 실천 개념을 매개로 한 맑스주의 철학 수정의 길을 걸은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인식론과 분리된 존재론이라는 형이상학을 도입하는 것이었고, 물질과 분리된 운동을 통해 변증법을 형이상학으로 전화시키는 퇴보를 가져왔을 뿐이다.  노사과연

 

 


1) 신재길, “헤겔과 맑스주의 국가론의 철학적 방법론적 기초에 대하여,” ≪정세와 노동≫ 제148호(2019. 2.), p. 72.

2) K. 맑스ㆍF. 엥엘스, ≪독일 이데올로기≫(≪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이하 ≪저작 선집≫) 제1권), 박종철 출판사, p. 220.

3) 같은 책, p. 260.

4) 같은 곳.

5) K. 맑스, ≪저작선집≫ 제2권, p. 478.

6) 신재길, “문영찬 연구위원장의 ‘비판’에 대한 반론”, ≪정세와 노동≫ 제147호(2018. 12./2019. 1.), p. 42.

7) K. 맑스ㆍF. 엥엘스, 앞의 책, p. 262.

8) 같은 책, p. 202.

9) 같은 책, p. 226.

10) 같은 책, p. 262.

11) 같은 책, p. 202.

12) 같은 책, p. 220.

13) 녹두 편집부 편, ≪세계철학사 III―사적 유물론≫, 녹두, p. 271.

14) 신재길, “문영찬 연구위원장의 ‘비판’에 대한 반론”, 앞의 책, p. 47.

15) 같은 책, p. 51.

16) 같은 책, p. 50.

17) T. I. 오이저만, ≪철학의 근본문제≫, 세계, p. 50.

18) V. I. 레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아침, p. 155.

19) T. I. 오이저만, 앞의 책, p. 71.

20) K. 맑스ㆍF. 엥엘스, 앞의 책, p. 202.

21) 신재길, “물질과 철학의 근본문제”, ≪정세와 노동≫ 제119호(2016. 1.), p. 71.

22) 같은 곳.

23) 같은 책, p. 72.

24) 김재기, “후기: 철학, 철학사 그리고 철학의 근본문제”, ≪철학의 근본문제≫, p. 419.

25) 같은 책, p. 404.

26) 같은 책, p. 419.

27) 신재길, “물질과 철학의 근본문제”, 앞의 책, p. 73.

28) A. 코징,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대상과 구조 및 서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실천 논쟁≫, 이선일 편역, 거름, pp. 200-201.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문영찬, “동구 ‘실천’논쟁에 대한 평가”, ≪정세와 노동≫ 제33호(2008. 3.)를 참조하라.

29) G. 헤르츠베르크, “유물론과 실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실천 논쟁≫, p. 125.

30) V. I. 레닌, 앞의 책, p. 153.

31) 신재길, “물질과 철학의 근본문제”, 앞의 책, p.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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