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하반기 노사과연 <정치사상> 강좌 참여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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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빈 | 대학생

 

필자는 이번 강좌 시리즈에서 2~3강, 그리고 6~8강을 수강하였다. 이에 각 강좌에 대한 평을 쓰고자 한다.

 

2강 문재인 정권의 노동자 중시 정책의 실체(김태균)

문재인 정권이 말로는 친노동을 부르짖지만 실상은 그 반대라는 걸 이제 모두 알아가는 듯하다. 작금의 상황은 노무현 때를 방불케 한다. 자한당이나 진보인 체하는 민주당이나, 보수 양당은 친자본의 잇속을 충족시켜 주고 싶은 속내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그런데 왜 민주당 정권 하에 노동개악이 더 일사천리로 될까?

 

이와 관련해서 먼저 다른 얘기를 통해, 그 상황을 낳게 되는 논리의 맥락을 살피고 싶다. 박근혜가 허장성세이긴 해도 대선 때부터 복지를 내걸 수 있었던 건 박근혜에게 좌방 한계선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박근혜가 김정일을 만나고, 김정일을 칭찬해도 박근혜에게 ‘빨갱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박근혜이기에 (더 수월히) 가능한 대선 전략이었고, 때문에 박근혜가 복지를 잘 추진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또한 존재했다(물론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시점에서, 요행을 바라는 도박사의 심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비슷한 논리로, 문재인이 ‘우익’적인 행보를 보여도 ‘좌익’으로 여기는 심리가 존재한다. 이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새누리당을 이겨야 한다는 일념 하에 민주당에 무비판적 지지를 보낸 것의 부작용이다.

 

대중이 민주당을 진보라고 여기는 것과는 반대로, 그리고 문재인의 개인 성향이 과연 어떠냐에 상관없이, ‘국가는 지배 계급의 도구’라고 (마르크스의 말을 따라) 주장한 김태균에 의하면 정부는 자본가의 이익에 복무할 뿐이다.

 

김태균이 노중기(한신대 교수)를 비판한 게 인상적이었는데, 노중기는 지난 5월 토론회에서 최저임금 개악을 한 문재인 정부를 옹호했다. “문제가 결코 없진 않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잘 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난날 노중기가 노무현 정권 하에서의 ‘사회적 합의’를 비판했던 것에 비하면 보수화한 것이다. 김태균이 노중기에게 “노무현 때와 다른 게 없는데 왜 당신은 문재인을 옹호하느냐”라고 했더니 노중기가 “문재인 정부니까”라고 대답했다는 게 압권이다(필자는 그 이유를 민주당의 지지율이 올라야 정의당이 잘 된다는 논리의 영향이 아닐까 짐작한다. 실제로 지지율 등락을 살펴보면 그 논리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현상이 보인다. 노중기는 정의당원이다. 그 논리의 옳고 그름을 떠나, 정의당에서 이런 인식은 널리 퍼져있는 듯하다).

 

노중기의 이러한 주장은 김태균에 따르면 ‘국가는 지배 계급의 도구’라는 마르크스의 격언을 잊은 것이다. ‘국가는 지배 계급의 도구’라는 말을 ‘대통령’과 연관 지어서 생각해보면 ‘위치 실천 체계’의 사회상이 드러난다. 어떤 사람이 ‘왕’의 위치에 서면 ‘왕’이 되듯이 ‘대통령’의 위치에 서면 ‘대통령(지배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정부의 수장)’이 된다. 즉 누가 국가 수반의 자리에 오르든 역할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피지배 계급이 그걸 잊는다면 대통령이 지배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데 더 수월하다.

 

다만 이런 논리는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둘째로 ‘대통령’을 욕해야지 ‘문재인(개인)’을 욕하면 안 된다는 논리가 도출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문재인은 잘 하고 싶은데 어쩔 수 없다’는 주장을 김태균이 반박했는데 사실 강의에서 한 말들만을 종합해보면 본인의 논리 안에서는 반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문재인의 개인 심성이야 타인이 짐작하기 어려운 바가 있지만 전세계적인 경제 위기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부터 대통령도(어쩌면 오히려 대통령이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드러내준다고 본다. 하지만 그래도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상관없다고까지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토대에 대한 상부 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이라는 개념으로 주장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로이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으로 적절히 이론화할 수 있다고 보는데 다른 강의에 대한 평에서 종합하여 다루겠다.

 

3강 현대 자본주의의 임박한 위기(채만수)

채만수는 이번 강좌 시리즈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강사였다. 그 인기를 짐작하게 하듯 가장 많은 사람이 들으러 왔다(필자는 전 주에 다음 주는 더 재밌을 거라고 추천받은 바 있다). 강의를 하면서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좋은 분위기를 연출했던 채만수는 필자의 뇌리에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제목이 ‘임박한 위기’지만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에 의해 야기되는 ‘경제 위기’를 전반적으로 다뤘다. 이런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에게는 지병과도 같은 것이다. ‘공황론’은 이 글을 보는 사람이라면 익히 아는 것일 테니 구체적으로 다루진 않겠다. 필자가 채만수의 강의에서 눈여겨 본 것은 부동산에 대한 이론이었다.

 

수요와 공급 이론은, 공급이 많아지면 가격이 싸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게 통용되는 부분도 있으나 부동산에서는 아니다. 서울의 집값을 떨어뜨리기 위해 주택을 더 짓는다고 하는데, 채만수에 의하면 이건 부작용만 낳는다. 주택이 늘어나면 인구가 늘어나고, 인구가 늘어나면 상업 시설도 늘어나고, 결과적으로 땅값이 오르기 때문이다. 간단하면서도 기막힌 이 논리는 필자를 사로잡았다.

 

채만수가 집값 폭등에 대한 해결책으로 국영화를 주장한 것도 자신만만하게 내세울 수 있을 만한 해결책이라고 봤다. 물론 혹자는 국영화를 하면 더 큰 문제가 야기될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소련식의 방식은 무조건 패가망신한다는 기계적인 사고방식이 여기에 연루돼있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부동산에 대한 사회적 소유, 그것이 국영화가 아니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자본주의적 소유에 의한 부동산 문제를 자본주의가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국영화가 당면한 해결책이라는 건 부정하기 힘들어 보인다. 좌파가 자본가들의 소유를 걱정해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문제는 어떻게 ‘긍정적인’ 공적 소유로 전환하느냐 일 것이다.

 

또 하나 짚을 점은 ‘10년 주기설’에 대한 이론이다. 김성구(한신대 교수)는 10년 주기설을 주장하면서도 ‘왜 공황이 10년 주기로 오는지’는 설명되지 않고 있다고 했는데, 이에 관해선 채만수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채만수에 의하면 10년 주기로 공황이 오는 건 생산수단이 10년 주기로 마모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왜 하필 10년 주기로 마모되는지를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마찬가지다. 이걸 무심코 강의만 들으면 눈치 채지 못할 수 있는데 분명 채만수는 해명하지 못했다. 솔직히 좀 얼버무린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는데 강의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의 강의는 일품이었다. 끝으로 채만수의 강의에서 중요했던 점을 하나만 더 첨언하자면, 생산수단의 마모는 스스로 수명이 다하는 ‘물리적 마모’와 ‘도덕적 마모’가 있는데 도덕적 마모란 더 좋은 생산수단이 발명돼서 대체하는 것까지도 포함하는 (생활적) 개념이다. ‘5강 21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전망’에서 후속 강의로 해결책에 대한 내용을 강의한다고 했는데 필자의 사정으로 듣지 못해 아쉬웠다.

 

6강 철학의 근본문제와 지젝 비판(신재길)

이번에 들은 강의들 중에서는 가장 수준이 높은 강의였다. 다른 강사들의 역량 부족이 아니라, 다들 어느 정도 수준을 맞추려고 노력했는데 이 강의는 쉽게 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시간도 너무 길었고(그래서 청강생들의 집중력도 떨어진 듯하다) 정말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뤘기 때문에 사전 지식이 많이 없으면 듣기 쉬운 강의는 아니었다.

 

신재길은 필자에게 강의 ppt와 정세와 노동에 기고한 글(물질과 철학의 근본문제)을 미리 보내줬는데 각각에 대해 다루겠다.

 

먼저 ppt는 철학의 역사, 그리고 각 철학자들에 대해 다루면서 실증주의와 협약주의에 대한 비판을 하고 대상, 현상, 경험의 층위를 구분하는 이론의 중요성을 설파했는데 이는 로이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 논의와 유사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신재길에게 확인해보니 비판적 실재론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강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실천’을 강조했는데 필자는 잠깐 동안 이게 라카토스의 ‘실용주의’랑 연관되는 게 아닌가 우려했는데 기우였다(그렇지만 신재길이 명확히 구분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쉽게 하려고 그런 거 같기도 하다). 그리고 지젝을 ‘현상주의자’라고 비판했는데 이게 ‘경험주의자’와 ‘실재론자’와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점들이 있는지 예시로 설명해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강의 이름에는 ‘지젝 비판’이 들어가 있는데 사실 지젝 비판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고 후반부에야 다뤘다. 아마 기고한 글에서 지젝을 비판하며 시작한 영향이 남아있어 제목을 그렇게 정한 듯하다. 결국 비중이 줄어든 건 쉽게 하기 위해서 철학의 역사에 대해 많이 말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강의 내용은 그토록 비판적 실재론과 판박이였는데 왜 다루지 않았냐고 하니 로이 바스카도 다른 사람들(칸트, 마르크스 등)에게 배운 것이다, 로이 바스카에게 영향을 받았어도 뿌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다고 했는데 그래도 추천 도서쯤으로 소개해줘야 청강생들이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1번에서 말한 대상, 현상, 경험이 비판적 실재론의 실재, 현실, 경험과 일치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꿈보다 해몽은 아닌지 의구심도 있다.

 

귀납과 연역 외에, 비판적 실재론의 초월론적 논증에 대해 다루지 않은 것도 아쉽다. 철학의 근본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확실한 것으로 한정해야 돼서 제외했다고 들었는데 별로 동의가 되진 않는다(귀납과 연역은 확실하다, 초월론적 논증은 불확실하다 둘 다. 그렇게 도식적으로 생각할 순 없다). 얘기를 쉽게 하기 위해서 뺀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도 ppt에 대해서는 딱히 비판할 지점이 없는데 ‘물질과 철학의 근본문제’에서는 유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신재길은 독자적으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철학의 근본문제들을 선정했다.

 

A: 물질과 의식의 관계 문제

B: 사람과 세계의 관계 문제

C: 존재와 무의 관계 문제

 

A는 고전적인 것이고, B는 주체사상에서 말한 걸 신재길이 갖다 쓴 것인데 B에서 문제가 있다.

 

1. ‘우리’는 사람인가?

B는 우리가 사람이라는 전제 하에 얘기하고 있다. 그런데 장자지몽(“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장자 꿈을 꾸는 것인가?”)이나 데카르트의 철학적 사유에서 알 수 있듯이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람이라는 것도 ‘확실하지 않다’. 그렇다면 B를 철학의 ‘근본문제’라고까지 할 수 있는가?

 

2. ‘무엇’이 사람인가?

옛날에 여자, 노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역사에서 흑인은 수학을 못한다고 해서 사람이 아니라고 했고, 인디언이 사람이냐는 논쟁이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현재는 고등 영장류에게 인권을 주자는 운동이 있기도 하다. 또한 우리가 우주인과 접촉하거나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개발된다면, 무엇이 인간이냐는 물음이 또 제기되지 않을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인간’이라는 것도 ‘역사적으로 일시적’인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게 초역사적인 사실일까? 이런 질문들을 고려할 때, B를 철학의 ‘근본문제’라고 하기엔 곤란하다.

 

3. 개와 세계의 관계?

이 ‘3. 개와 세계의 관계?’가 가장 효과적인 비판일 것이다. 만약 개가 “철학의 근본문제는 ‘개와 세계의 관계’다”라고 주장하면 어찌할 것인가? 물론 개가 그런 깊은 생각까진 못할 수 있겠지만, 종마다 B가 따로 설정될 위험이 있다. 사람이 제일 똑똑하니까 사람으로 설정해야 된다고 항변할 수도 있지만, 만약 우주인 중에 우리보다 똑똑하고 문명도 이룬 생물체가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우주인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면,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런 것을 ‘인공일반지능’이라고 부른다)이 개발됐다고 생각해보자. 그 인공지능이 “‘사람과 세계의 관계’가 철학의 근본문제라고? 흥, 웃기지 마라! 이제부턴 ‘인공지능과 세계의 관계’가 철학의 근본문제다.”라고 하면 어찌할 건가?

 

신재길과 뒤풀이에서 이런 얘기들을 나눴을 때 신재길은 ‘3. 개와 세계의 관계?’를 듣고 나서 B를 ‘의식이 있는 존재와 의식이 없는 존재의 관계’로 수정했다. 지적을 수용한 것은 훌륭하지만, 그렇게 수정했을 때도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의식이 있는 존재와 의식이 없는 존재의 관계’와 ‘의식이 있는 존재와 세계의 관계’는 다르다. 후자는 ‘세계’가 ‘의식이 있는 존재’도 포함하고 있다(신재길이 애초에 ‘세계’를 어떻게 정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세계관은 굉장히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후의 의문이 남는다. ‘의식이 있는 존재와 의식이 없는 존재의 관계’와 ‘의식이 있는 존재와 세계의 관계’ 중, 어느 쪽을 명제로 삼아야 되는가라는 물음이야말로 바로 ‘철학의 근본문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닐까(이는 과학이 ‘자연과학’까지로 한정해야 되는가, ‘사회과학’도 포함해야 하는가라는 자연주의 논쟁과도 연결되는 것인지 모른다)?

 

C: 존재와 무의 관계 문제

이건 신재길의 독창적인 문제제기라고 하는데(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헤겔도 비슷한 얘기를 한 것 같은데 ‘철학의 근본문제’라고까지는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이건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고 필자는 말했다. 다음은 ‘물질과 철학의 근본문제’에서 발췌한 것이다.

 

“존재와 무의 통일로서의 물질은 모순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와 무의 통일은 어떤 것이 그저 있기도 하고 동시에 없기도 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철수가 지금 여기에 있기도 하고 동시에 없기도 하다거나, 살아 있기도 하고 죽어 있기도 하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모순율에 위배된다. 존재와 무의 통일은 무가 존재에 동일한 주어적 위상에서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는 다만 술어적으로, 즉 존재의 본질을 규정하는 속성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철수는 지금 이곳에 있지만 지금 이곳에서 벗어나는 무화(無化)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철수는 살아 있지만 죽어가는 소멸의 속성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형식논리학과 변증법의 접점을 논하는 것이다. 이는 정말 놀라운 논변이다. 예를 들어 유신론자 중에 가끔 ‘신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궤변을 펴는 사람이 있다(양자역학을 들먹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궤변을 변증법을 통해 합리화하려 들면 뭐라 말해야 될지 궁색해질 수도 있다. 이럴 때 써먹을 수 있는 게 방금 발췌한 신재길의 주장인 것이다. “존재는 주어고 무는 술어다.” 다시 음미해도 정말 뛰어난 논변이다.

 

7강 장애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신재길)

장애의 사회적 모델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다뤄졌다. 필자가 앞서 다뤘던 비판적 실재론을, 철학이 사회 운동 내에서 이론의 정립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냐는 실례로써 장애의 사회적 모델과 관련지어 논지를 펼 수 있겠다. 신재길과 필자는 비판적 실재론의 중요성에 대해서 공감하고 있으며 신재길이 따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가 장애 운동에 관해 암시한 운동 방법도 이와 맞닿아 있다고 여겼다.

 

비판적 실재론의 내용을, 지금의 논의와 관련된 부분으로만 한정해서 얘기한다면, 사회(세계)는 층위가 나누어져 있고 구조 지어져 있으며 분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층위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토대와 상부구조를 떠올리는 게 이해하기 쉽다. 구조는 다들 대충이라도 이해하고 있겠지만, 여기서는 상부에서의 현상이 하부에서의 영향을 받아, 특정 현상이 일어나기 쉬워지는 거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분화되어 있다는 건 어떤 한 사건에 대해 여러 가지 다양한 기제들이 있을 수 있으며, 따라서 일원론적으로 보기 어려울 수 있다는 걸 나타내는 개념이다.

 

왜 층위를 나누는 게 중요하냐면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일으키며 생기는 창발성 때문이다. 산소와 수소가 결합해 물이 되면 물에는 산소와 수소의 특성으로만 환원할 수 없는 새로운 특성이 생기듯이, 층위가 달라지면 새로운 특성(예를 들면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이 생긴다. 그리하여 상부 구조가 토대에 영향을 끼치는 일까지도 가능한 것이다.

 

앞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상관없다고까지 볼 수는 없다고 말했는데, 이런 층위를 구분하는 논리가 없다면 ‘구조 결정론’에 빠지기 쉽다. 평면적으로 사고하는 게 아니라 입체적으로 사고하는 게 필요한 것이다. 필자가 지금 강사가 그런 오류에 빠져 있었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개념은 ‘국가는 지배 계급의 도구’뿐만 아니라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 계급의 사상이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처럼 딱 그 말만 들으면 오해하기 쉬운(그래서 더 많은 얘기를 자세히 들어봐야 되는) 정식화가 많은데 이론가가 본인은 오류에 빠져있지 않아도 남들에게 설명할 때는 잘 설명해야 되는 필요성이 있다. 이럴 때 비판적 실재론의 개념을 사용하면 용이하다. 자기 자신의 이론에 대해서도 명확히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그래서 로이 바스카는 철학을 ‘과학의 조수’라고 말했다).

 

장애의 사회적 모델에 비판적 실재론을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비판적 실재론은 자연적 요인(여기서는 주로 생물학적 요인이 되겠다)을 무시하고 사회적 요인만 강조하는 ‘사회구성주의’에도 반대한다(그런 협약주의는 비유물론적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장애인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리의 함정에도 빠지지 않는 게 비판적 실재론의 강점인 것이다. 말하자면 ‘장애’에 대해 말할 때는 ‘사회적 층위’가 중요하고, ‘생물학적 층위(손상)’은 부차적이다. 그렇지만 ‘손상’에 대해 말할 때는 ‘생물학적 층위’가 중요하고, ‘사회적 층위’는 부차적이다. 휠체어가 있고 문턱 같은 게 없다고 해서 ‘생물학적 손상’이 없는가? 반대로 ‘생물학적 손상’을 인정한다고 해서 ‘장애’를 합리화할 수 있는가? 즉, 이건 층위를 나눠서 사고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걸 안 하고 사회적 층위와 생물학적 층위를 섞어버리는 평면적인 사고를 해버리니까, 이를테면 ‘장애를 치료해도 괜찮은가? 차별적인 사고방식이 아닌가?’ 같은 엉뚱한 질문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왜 ‘손상’을 치료하면 안 되는가(너무 나이브하게 얘기하긴 했지만, 층위를 나눠서 생각하는 사고의 필요성은 전달됐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어떤 신체를 ‘손상’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도 어느 정도는 사회적 시선의 세례를 받았을 수 있긴 하다. 그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손상’을 그렇게 사회구성주의적으로 바라보는 건 비유물론적일 수 있다는 점은 지적해두고 싶다)?

 

끝으로 정리하자면 사회 이론을 구성할 때 맨 아래의 층위에는 ‘자본주의’를 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위에는 각각 이론적 이데올로기의 층위, 실천적 이데올로기의 층위, 집단 행위의 층위, 개인 행위의 층위가 있으며 각 층위마다 ‘상대적 자율성(비판적 실재론의 명명으로는 발현적 속성, 출현적 힘)’이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상관없다고까지 볼 수는 없다고 한 건 그래서다. 장애에 관해서 말하자면 ‘장애인은 열등하다’는 이론적 이데올로기가 있을 수 있고, ‘장애인에게는 최저임금을 적게 줘도 된다’는 실천적 이데올로기가 있을 수 있고, ‘최저임금을 적게 받고 일하는 장애인들’이라는 집단 행위가 있을 수 있고, ‘최저임금을 적게 받고 일하는 장애인 개인’이라는 개인 행위가 있을 수 있다. 아까 얘기했듯이 사회에는 다양한 기제가 있기 때문에(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환원론적인 논리로 장애인들의 처지를 구성할 수는 없다. 이제 각 층위마다 반대되는 경향, 상대적 자율성이 있다는 의미가 이해될 것이다. 장애인은 어떠한 자율성도 없는 존재가 아니다(마찬가지로, 사회적 시선이 집중되는 대통령 개인이라도 자율성이 없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구조와 하부의 층위들을 무시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철학이 사회 운동의 훌륭한 조수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7강 후기를 마치겠다.

 

8강 변증법적 논리학의 재정립을 위하여(문영찬)

문영찬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정리하는 데 있어서 정말 탁월하다. 설명도 이해하기 쉽고 훌륭하게 잘 한다. 필자가 비판할 부분은 없다. 특히 추상적 보편과 구체적 보편을 구분한 게 백미였다. 전체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철학을 잘 제시한 것 같다. 다만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영역을 넘어서, 후반부의 비트겐슈타인을 평한 부분에 있어서는 몇 가지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들이 있다.

 

먼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어느 정도 정리할 필요성이 있는데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한 것을 필자 식대로 설명해보겠다. 예를 들어 ‘책상’이란 단어는 책상이란 사물을 가리켜서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도덕’, ‘정의’란 단어는 이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말한 것이다. 젊은 나이에 이렇게 해놓고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내가 다 끝냈다 하고 시골로 하산해버렸다.

 

비트겐슈타인이 유명해진 건 러셀이 그를 굉장히 칭찬해서인 것도 큰데(그런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유명한 이유를 소련의 붕괴에서 찾는 문영찬의 논리는 시대의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1889년생이고 1951년에 죽었고 생전에 유명해졌는데 사후에 재발견되었다고 하더라도 비약이 지나치다. 사후에 재발견된 거라고 보기도 힘들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은 너 같은 사람이 해야 된다’고 응원하며 철학자가 되려고 하지도 않았던 비트겐슈타인을 철학의 길에 들여놓게 만들었고, 나중에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보고는 ‘내가 할 일이 없다’며 은퇴하기까지 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문제가 있고, 한계와 비판거리가 있다는 건 필자도 동의한다. 그런 지점들을 문영찬은 적절히 비판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하면 청강생들은 왜 비트겐슈타인이 유명한지 알 수가 없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데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예를 들어 칸트를 비판하지만 칸트를 멍청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완고하고 고집불통인 사람’ 취급만 받고 대화가 안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책 한 권 읽고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 전체적인 비판을 하는 것(특히 사람 자체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도 동의할 수 없다. 초기 비트겐슈타인과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분명 다르고 문영찬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등의 이론에 대해 알지 못했다. 문영찬은, 일단 비트겐슈타인은 틀렸고 그래서 비판해야 된다는 전제를 달고 학습을 한 게 아닌가?

 

비트겐슈타인이 자기 철학을 ‘유아론’이라고 하고, 그렇지만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 부분에 있어서도 필자는 문영찬과 생각을 달리 한다. 필자는 비트겐슈타인이 다른 사람이 흔히 쓰는 의미 그대로의 유아론, 즉 ‘세계는 나밖에 없고 나의 세계’라고 한 의미와는 좀 다를 것이라고 본다. 정말 그게 맞는다면 왜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나? 필자의 깜냥으로는 비트겐슈타인이 자기가 죽고 난 뒤의 세계는 없을 것이라고 본 거 같지도 않다(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했겠는가? 그런 식의 유아론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왜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초기 비트겐슈타인을 따라서 학파를 만들었는가?).

 

필자의 의견은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철학자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데, 사람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본다는 것, 다른 말로하면 ‘사회구성주의’인데, 구성주의가 사회가 아닌 개인에 적용된 것을 말한 게 아닐까 싶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임정빈의 언어, 문영찬의 언어, 이런 개인들의 언어, 달리 말하면 (나의) 사고가 세계를 구성한다는 걸 유아론이라고 칭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각자마다의 세계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이건 필자의 해석이다.

 

문영찬은 비트겐슈타인이 책에 유아론이라고 썼으니까 문자 그대로의 유아론이라고 봐야 된다고 하는데 비트겐슈타인 스스로가 뭐라 설명해야 될지 모른다고 말한 부분을 갑자기 무시한다. 역시 일단 비트겐슈타인은 틀렸고 그래서 까야 된다는 전제를 달고 있다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그러니 해석의 방향이 부정적인 방향으로의 확증 편향으로 흐른 게 아닐까. <노/사/과/연>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Jan 6th, 2019 | By | Category: 2018년 12월/ 2019년 1월 합본호 제147호, 정세와노동, 회원마당 | 조회수: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