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제목만 <자본론> 세미나 후기

 

유영민 | 부산지회 회원

 

* 경건하게 쓸려니 힘들어서 평소 SNS에 쓰던 그대로 독백체로 씁니다. 다소 거슬리더라도 이해하시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노동사회과학연구소 부산지회와의 인연이 4년쯤 된 것 같애. 그 인연은 곧 채만수 전 소장님과의 자본론 세미나를 함께 한 시간과 같아. 노사과연을 맨 처음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지만 기억에 남아있지 않아. 부산지회 회원들 기타 강습을 하게 되면서부터 기억에 남아있어.

 

그리고 이후 함께 공부하자는 제안을 여러 번 받았었어. 이제야 대놓고 편하게 말하는데, 솔직히 많이 귀찮았어. 30년 세월을 이 바닥에 구르면서 맑스 레닌 원전 한번 안 읽고 자본론 전권은 아니라도 단행본 개괄서 몇 번 정도야 안 봤을까. 그리고 난 부산지역 민주노조 운동 초기부터 개겨 왔던 사람 중에 하나야. 전노협 부산노련 창립 노조 중에 하나였던 풍산노조 동래지부 노조 발기인이며 초대 쟁의부장, 본조 기획국장을 거쳐 1994년도에 짤렸어. 이 사람들이 대체 어디서 뭘 하다 와서 나보고 공부하자고 저러나, 나에 대해서 뭘 얼마나 알기에 저러지 하는 좀 우스운 마음도 있었어.

 

성의를 못 이겨 한번 참석했는데 채만수 전 소장님의, 세미나 사이사이와 뒤풀이 시간에 해주시는 사회 전반에 걸친 내공 깊은 말씀에 매료되었어. 7,8년 전쯤에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찾아 2박3일씩 집중수행을 했던 수행선원의 지도 법사님이 하셨던 말씀이 있어. “안개 속을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습기가 옷에 밴다. 수행도 그렇게 꾸준히 해야 하고 그런 속에 머물도록 하라”는 말씀.

 

난 그렇게 자본론 보다는 채만수 전 소장님의 “말씀”에 끌렸어. 농담 삼아 편하게 표현하면 본 안주보다 찌개다시에 더 끌렸다는 얘기.ㅎㅎ 그렇다보니 자본론 후기를 쓰라고 하는데 별로 쓸게 없어. 비유는 비유일 뿐이고 좀 투박하게 비유하면 이렇다. 부산에만 50여년을 살고 있는 내게 해운대 갔다 온 소감을 써보라는 얘기 비슷한.

 

열심히 공부한다는 자부심은 좋다. 하지만 본인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공부도 안하고 과학적 전망 따위 하나 없는 듯이 느껴지게 하는, 그런 낌새라도 내비치는 건 활동가로서는 빵점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쉽게 와 닿을 수 있다.

 

직접적인 예를 한번 보자. 어느 날 누군가가 1789년도에 뭔 일이 있었는지 아냐고 묻더라. 뭔 초딩도 아닌데 연도 하나 달랑 외워 와서 자랑 할라고 하나 생각했다. 난 프랑스 대혁명 말고 뭐가 있었지? 설마 그걸 물어보는 건 아니겠지 생각했다. 근데… 당황과 함께 어이없음.

 

연도가 뭐가 중요한가. 인류 진보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고, 현재를 사는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계승 확대발전시킬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야지.

 

맑스도 말하지 않았나. 지금까지의 철학은 세계를 분석만 했지만 중요한건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 인류 진보 관점에서 과학적인 세계관과 체계적인 이론 틀을 정립해야 하는 건 기본. 더 중요한건 그 기본 기둥을 올바로 세워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편하게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활동가’의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어.

 

자신이 옳고 많이 아는 양하는 자부심도 좋지만, 그것이 조금만 잘못 비치면 “그래 니 잘났다”가 되면 어떤 얘기도 안 먹혀. 사람은 이성보다 감성에 마음이 움직인다는 사실은 상식이잖아.

 

후기를 쓰자하니 별로 쓸건 없고 어떻게 분량을 채워야 하나 좀 고민했어. 재미는 없고 무용담 비슷한 지 자랑일지도 모르지만 내 얘기를 좀 해보기로 했어. 놀기 좋아하고 밤무대 딴따라를 꿈꾸던 날라리 “공돌이”에서 어떻게 ‘노동자’로 변화해갔는지 ‘썰’을 풀어 볼려고 해.

 

1987년 6월이 내 삶의 변곡점이었어. 그 이전까지만 해도 ‘데모’하면 대학생들이나 하는 줄 알았지. 촌에서 찐쌀 팔아 대학 보내놨더니, 못된 송아지 엉덩이 뿔난 듯이 데모나 하고 지랄한다고 생각했던 우익 청년이었지.

 

근데 티비로만 봤지만 6월 항쟁은 그것이 아니었어. 그리고 뒤이어 789 노동자 대투쟁을 역시 티비로만 봤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꿈틀거림을 느꼈어. 내가 다니던 풍산금속은 인천 부평, 경주 안강, 울산 온산, 부산 동래 이렇게 4개 공장이 있었어. 울산 온산 공장에서 노조가 설립되는 모습도 티비에서 봤어. 표현이 좀 거시기 하지만 그 때 기억나는 내 기분은 이랬다. “어? 촌놈들도 노조 만드는데 부산에서는 뭐하지?”

 

그때부터 혼자 서점에 들러 노동조합법, 근로기준법 따위를 보기 시작했지. 그 즈음 운명이 그렇게 당겼는지 모르지만 또 다른 일이 생겼어.(글적인 표현이다. 난 신이나 운명 따위는 원래부터 안 믿었다.^^)

 

고딩 친구가 데모 주동으로 감옥에 있는데 면회 한번 가자는 연락이 왔어. 난 실업계였지만 그 친구는 인문계 출신으로 재수 끝에 부산대학교에 다니는 걸로 알고 있었지. 많이 의외였어. 엉덩이에 뿔난 놈만 데모하는 줄 알았는데 그 친구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거든. 말수도 적고 남 얘기 조근조근 다 경청하고 난 뒤, 끝에 가서야 자기 의견을 담담하고 조용하게 말하던 선비 스타일의 친구. 그랬던 친구가 단순 가담도 아니고 주동자로 감옥에 있다고 하니 많은 생각에 잠기게 했어. 친구들과 모여서 함께 면회 갈 날짜 잡느라 시간 보내는 사이 그 친구는 출소를 했어.

 

만나러 간 장소가 생경했어. 풍물하는 지하 연습실. 입구부터 생전 첨보는 풍경. 만장과 걸개그림들, 그리고 이런저런 포스터… 부산에서 운동하는 사람이면 모두 다 아는 <극단 일터>. 당시 이름은 놀이패 일터. 친구는 거기 초대 대표를 맡고 있었어.

 

친구에게 말했어. 내가 다니는 공장에도 노조를 만들어 볼려고 하는데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 그 친구는 예전 그 성격대로 별 말이 없이 책 한권을 주더라. ≪전태일 평전≫.

 

이런 삶이 있었구나 했어. 노동자, 아니 그때는 “근로자”로 나도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지라 뭔 어떤 엄청난 각성의 계기가 된 것은 아니었어. 2,3일 만에 후다닥 읽고 돌려주러 갔지. 이번에도 역시 친구는 별 말없이 또 한권의 책을 주더라. ≪공장의 불빛≫.

 

똥물사건으로 유명한 동일방적 노조투쟁기. 내 생애 책 보고 울었던 기억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아. 두세 번 울었던 기억이 남아있어. 그 뒤로도 몇 번 더 그 친구에게 “책 지도”를 받았던 것 같은데 더 이상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아.

 

88년 여름이 됐어. 공장의 친한 친구들에게 슬쩍 떠봤지. “야! 우리도 노조 한번 해보지 않을래?” 친구들 하는 말, “제대 말년에 떨어지는 낙엽도 피해 댕긴다는데 일단 제대나 하고 보자”(실지로 몇 년 후 병역 특례병들의 해고로 큰 문제가 됨)

 

당시 병역 특례는 5년 복무였어. 그 5년이 공장 근무 기간이 아니고, 신체검사 받고 서류심사 다하고 편입되면서 5년. 당시에는 시골 출신은 신검도 늦어서, 나 같은 도시 출신은 6년 늦으면 7년 정도 근무를 해야 했어.

 

그해 특례 제대(편입 해제)하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다른 부서에서 노조 설립준비가 있었고 내게도 연락이 왔어. 내가 일하던 부서에 ‘청심회’라는 70명 쯤 되는 특례병들의 친목모임이 있었고, 난 부회장만 2년 연속으로 맡고 있어 그런 연고로 연락이 왔던 것.

 

11월초 퇴근 후 어느 교회였어. 당시는 몰랐지만 부산지역에서 알만한 이는 다 아는 목사님의 교회. 32명 발기인의 만장일치로 지도부가 꾸려지고 다음날 식당에 대자보와 유인물로 노조 결성을 알리며 노조 가입을 받기 시작했지. 3천명쯤 되는 공장이지만 식당은 하나뿐이고, 그 옆에 너른 아스팔트 광장이 있었어. 노조 설립투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민주광장으로 명명됐지.

 

아무도 이끌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나눠준 노조 결성을 알리는 유인물을 들고 광장에 앉기 시작해. 누군가는 앞에서 뭐라도 해야 했지. 어느 사이엔가 내가 그 대오 앞에 서서 뭐라고 떠들고 있어. 지금의 내가 돌아보면 그때는 확실히 신이 좀 들렸던 것 같애. ㅎㅎㅎ

 

홀라송, 늙은 노동자의 노래, 농민가를 부분 개사한 노동가, 임을 위한 행진곡. 그 때 아는 노래는 그게 전부였어. 그나마 그것도 다 아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지. 선거를 통해 초대 집행부가 들어서고, 어설프기 짝이 없던 내게 쟁의부장 맡아달라고 한 이유는 그것 하나였어. 사람들 잘 몰고 다닌다고… 난 사실 문화부장이나 교선부장 같은 거 하고 싶었는데. ㅎㅎㅎ

 

쟁의부장은 투쟁의 선봉이기에 인상도 좀 투사형이 되어야 생각했는데, 내 인상이 그런 인상하고는 거리가 멀었어. 당시는 20대라 피부도 제법 뽀사시 했고. ㅎㅎㅎ

 

어느 투쟁 사업장에 지원투쟁 가서 쟁의부장이라고 소개했더니, 배시시 웃으며 “제비 부장”이 더 어울린다는 소리도 들었던 씁쓸한 기억이 …ㅋㅋㅋ

 

그 즈음 때마침 부산노동자협의회(부노협)가 주관하는 제2기 노동자학교 교육 일정이 있었어. 10강 정도로 3개월 일정이었던 걸로 기억해. 모든 교육이 귀에 쏙쏙, 스펀지에 물 빨려들듯 스며들었어. 참고로 부노협의 주요 멤버로는, 후일 노무현 정권때 청와대 비서관 했던 정윤재, 한진 크레인 고공투쟁의 김진숙, 좀 의외겠지만 세월이 좀 흐른 뒤에 ‘아우성’이라는 성교육 강사로 유명해진 구성애 씨 등이 있었어.

 

그리고 졸업 여행도 갔었어. 그 졸업여행이 거제도 삼성조선 유령노조 타격투쟁. 그때 처음으로 꽃병도 던져보고,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최루탄 포염 속에 갇혀보는 체험도 해봤지. 정말 멋진 졸업여행이었어.ㅎㅎㅎ

 

그 2기 노동자 학교 졸업식 때, 지금도 내 일생의 영광으로 간직하고 있는 순간이 있었어. 자랑스런 “노동자”로 당당하게 살아가겠다는 선서 비슷한 걸 내가 학생 대표로 했거든. 그때부터 빼도 박도 못 하는, 일단 혼자라도 해방된 노동자가 된 거지. ㅎㅎㅎ

 

그 뒤로 내 다니는 공장에도 풍물패 만들고 곧이어 기타반, 노래패를 조직했어. 다른 민주노조 사업장에 기타반 강사로 나가기 시작했고, 강습하던 사업장 노래패를 묶어서 부산지역 노동자 노래패 연합도 만들었어. 각 사업장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강습하면서 하루도 못 쉬고, 또 주말 주일에는 집회 아니면 노조 간부 수련회 기타 등등. 그땐 20대였기에 가능했던 것 같애.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불가능했던 일정.

 

기억을 더듬으면 92~3년 무렵이었던 거 같애. 집회에서 알게 된 동지에 이끌려 ‘사회당추진회(사추위)’에 가입하게 돼.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그 친구가 참 진국이었거든. 그 때 사추위 회원들과 공부다운 공부를 좀 했던 거 같아. 노동자학교 끝나고 같은 반 동지들과 6개월 정도 소모임하면서 공부를 더 하긴 했는데 리더가 없으니 공부가 잘 안됐어. 그래도 안 하는거 보다야 나았겠지만 별로 성과는 없었던 기억이야.

 

사추위 활동(활동이래야 같이 공부하는 거) 하는 중에 좌파 정치단체 통합 논의가 있었어. 민중회의와 통합해서 ‘민중정치연합’이 됐지. 민중회의 대표셨던 오세철 교수님이 대표를 맡으셨고. 난 민중회의 회원들과도 대부분 친했어. 어쩌면 거기서 먼저 회원하라고 했으면 했을 거야. 사추위 출신과 민중회의 출신 간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있었어. 활동 방식에도 좀 차이가 있었고, 불필요한 감정싸움도 없잖아 좀 있었지만 좋은 점도 있었어. 서로 무식하다는 말 듣기 싫어서 빡시게 공부했거든. ㅎㅎ

 

그 무렵이 조금 지나고 난 노조 재건투쟁에 들어갔어. 90년도 9월 옥쇄파업이 3500여 공권력 침탈로 무너지고, 2천여 조합원이 사측의 극악한 탈퇴공작으로 13명으로 줄었어. 그나마 나를 제외한 12명은 유령노조로 유지하려는 떡대 좋은 특전사 해병대 출신의 구사대들. 어찌어찌 비밀리에 조합 가입서 200여장을 받아 본조에도 알렸지.

 

근데 바로 그때 난데없이 나를 조합원 자격이 없는 청원경찰로 발령을 내. 당연히 못 간다고 개겼고 결국 짤렸지. 뒤에 노무과 직원한테 직접 들은 얘긴데, 내가 지부장 출마한다는 소문 때문에 무리수인걸 알면서도 발령을 냈다더만.

 

어쨌던 그때부터 개인적인 고난의 행군은 시작돼. 그 뒤에 해고무효 소송을 진행하면서 대선 국면에 <국민승리21 부산본부> 문예위원회 조직 책임를 맡게 돼. <극단 새벽>에서 지금도 상임연출을 하고 계시는 이성민씨를 위원장으로 모시고 난 간사 역할을 했지. 짧았지만 그 때가 참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아있어. 그런 거 보면 내 체질은 딴따라가 맞긴 했었나봐. ㅎㅎㅎ

 

그 이후 딱 20년이 흘렀어. 분량도 어느 정도 찼는 것 같아 이 정도까지만 할래. 노사과연을 알게 된 건 행운으로 생각해. 정확히 말하면 채만수 전 소장님을 알게 된 것. 굳이 꼭 그렇게 말해야 되겠냐고 장난스럽게 버럭 할 부산지회 회원도 있겠지만..ㅎㅎㅎ

 

사실 부산지회 회원들 하나같이 다들 사람들이 참 좋아.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 두뇌는 공감 능력과 체계화 능력이 동시에 극대화 될 수 없다더군. 제로섬 게임처럼 한쪽이 발달하면 다른 한쪽은 다소 위축된다더만. 이렇게만 말해도 다들 머리 좋으니 알아들을 걸로 생각해.

 

끝으로 나도 노사과연에 손톱만큼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참 좋겠어. ^^

 

P.S 혹시 글이 너무 무성의하고 장난처럼 보이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스타일이 좀 그렇다는 걸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 <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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