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당한 사회주의: 쏘련 붕괴의 배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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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키란(Roger Keeran)과 토마스 케니(Thomas Kenny)

번역: 편집부

  

[차례]

서문

1. 서론

2. 쏘련 정치에서의 두 가지 경향

3. 제2 경제

4. 약속과 예언, 1985-86

5. 전환점, 1987-88

6. 위기와 붕괴

7. 결론과 암시

8. 끝 맺음말 – 쏘련 붕괴의 설명들에 대한 비판

후주

 

4. 약속과 예언, 1985-86 – 하

 

1986년 2월 쏘련공산당 제27차 당 대회에서 고르바쵸프는 아직 시험해 보지 않은 새로운 방향으로 개혁을 수행하고 있다는 최초의 징후를 나타냈다. 이 최초의 징후는 새로운 정책이 아니라 개혁 자체의 새로운 이데올로기였다. 고르바쵸프는 과거와의 연속성 대신 과거와의 단절을 강조하고 브레즈네쁘 시대를 침체기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국내외의 새로운 사태는 “전환점”이 되었고 “진정한 혁명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드로포프의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변화의 가속화”라는 용어를 “경제와 사회 발전의 가속화”라는 매우 애매하고 광범위하며 분쟁의 가능성이 있는 용어로 바꾸었다. 고르바쵸프는 누군가 방향전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때, 경제 분야에만 변화를 한정하지 말고, 업무 방식과 정치적 이념적 제도의 변화를 상상하라고 강조했다. 이 때 고르바쵸프는 우스코르니에(가속)를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1)이라는 말로 대체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었다. 4월에 고르바쵸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가 총체적 변화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6월에는 모든 사회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말했고, 7월에는 혁명을 의미한다고 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이러한 확대는 극적인 매력을 주었지만, 실질적인 위험도 포함하고 있었다. 즉, 이러한 용어의 변경은 안드로포프가 수행했던 개혁의 분명한 목표를 제거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의미는 장황하게 되었고, 개혁을 위한 개혁이 되었으며, 개혁의 목표는 빙빙 맴돌았고, 변화를 위한 변화가 되었다.2) 변화를 지도할 당의 단결과 목표도 훼손했다. 당 안팎에서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목표가 사회주의의 완성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목표가 민족분리주의, 사회민주주의, 시장사회주의, 자본주의 또는 단순한 개인적 치부였다.

 

또한 고르바쵸프는 글라스노스트(개방)의 의미를 교묘히 변화시켜 당의 전통적 역할과 비판 및 자기비판의 기능을 약화시켰다. 재임 첫해에는 고르바쵸프도 글라스노스트를 안드로포프가 사용한 의미로 사용했다. 당, 정부, 국가 및 공적 조직의 더 많은 개방성과 공공성을 의미했고, 비리와 비효율성에 대한 한층 강화된 폭로의 의미로 사용했다. 얼마안가, 고르바쵸프는 글라스노스트의 의미를 당과 여타 조직들을 통한 개방이라는 의미에서 당과 그 역사에 대한 비판의 개방으로 바꾸었다. 6월에 언론기관의 임원들을 만나, 부족한 부분에 대한 ‘개방적이고 구체적이며 건설적인’ 비판을 통해 개혁에 노력을 보태도록 요구했다. 곧바로 쏘베츠까야 로시야 신문은 모스크바 당대표인 빅또르 그리신을 비판했고, 고르바쵸프는 자기편인 보리스 옐친으로 교체했다.3)

 

고르바쵸프식 글라스노스트가 야기한 문제의 심각성은 1987년에 가서야 드러났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 기초는 이미 1985년 가을에 수행된 조치들에서 생겨났다. 요약하자면, 고르바쵸프는 지식인들과 미디어들이 당과 당의 역사를 비판하도록 부추겼다. 그리고 동시에 미디어에 대한 당의 역할과 영향을 줄였다. 사실은 당의 미디어에 대한 관리감독을 단순히 줄인 것만이 아니라, 쏘련공산당과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미디어를 넘겨주었다. 검열 완화와 출판 및 문화에 대한 보다 쉬운 접근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고 당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불안정으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섬세한 처리가 요구되었던 변화였다. 다른 많은 것들처럼, 글라스노스트에 대한 고르바쵸프식 접근은 무분별하고 신중하지 못했으며, 결국 당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극도로 무모하고 파괴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고르바쵸프의 회고록은 정직하지 않다. “글라스노스트는 우리가 처음에 한정하려고 했던 것 밖으로 터져 나왔고,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과정이 되었다.”4)고 주장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고르바쵸프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말과 행동으로 불안정을 키웠다. 미디어와 지식인들에게 현혹되어 이들의 동의와 협조를 얻으려 빈번히 만났으며, 당 밖에서 자신의 지지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그들에게 의존했다. 그들이 당과 당의 역사를 비판하도록 조장했으며, 이에 대한 어떠한 제한 조치도 거부했다. 제27차 당 대회에서 고르바쵸프는 무제한으로 비판의 길을 열어 주었다. “이제 문예와 예술비평이 나태하고 비굴한 태도를 버려야 할 때이다. … 그리고 비판은 사회적 의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5) 다음달에, 고르바쵸프와 리가체프는 대중미디어의 대표자와 만났다. 그리고 고르바쵸프는 말했다. “주적은 관료주의이고, 언론은 물러서지 않고 그것을 혹독하게 비판해야 한다.”6) 그로인해, 정말 이례적인 일이 발생한다. 당의 지도자이고 당과 정부를 개혁할 힘을 가진 서기장이 마치 근본적으로 책임이 없는 방관자처럼 조직 밖에서 조직에 대한 공격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공산주의적 관행의 주요한 수정이었다. 적어도, 당에 다시 활력을 주는 당과 정부의 결함을 다루는 전통적 방법인 집단비판과 자기비판은 약화되었다. 고르바쵸프는 외부의 비판을 최후의 조치라기보다 최우선으로 사용했다. 고르바쵸프가 당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다거나, 어떤 주목할 만한 반대와 마주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6년 6월에, 고르바쵸프는 한 작가 집단에게 “정직한 반대자”로써 활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마치 소비에트 지도자가 사회주의 개혁의 길잡이로서 낡고 이상화된 자유 민주주의적 환상을 들먹이는 것 같았다. 고르바쵸프는 말한다. “우리는 반대파(당)가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통제할 것인가? 비판과 자아비판을 통해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글라스노스트를 통해서이다.”7) 중요한 것은 말보다 행동이다. 반대를 부추기면서, 고르바쵸프는 체계적으로 대중 미디어에 대한 당의 통제를 약화시켰고 미디어들을 반사회주의자들에게 넘겨주었다.

 

두 기관이 대중미디어를 통제했다. 1920년부터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Agitprop)는 편집자와 언론에 대한 최종적 권한을 가졌고, 1922년에 창설된 글라브리트(Glavlit)은 모든 출판물과 방송을 검열하고 인가했다. 1985년에 고르바쵸프는 알렉산더 야코플예프를 선동선전부 수장에 임명했다.8) 고르바쵸프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로서 그리고 그가 가진 지위를 이용해서, 야코플예프는 개혁의 전 과정을 통해 누구보다도 강력하고 파괴적인 위력을 휘둘렀다.

 

1923년에 태어난 야코플예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에 복무하면서 공산당에 가입했다. 전쟁이 끝나고 교육연구소에 있었다. 그러고는 야로슬라블에 있는 당에서 근무했다.9) 1956년부터 1960년까지 중앙 위원회 사회과학 아카데미에 다녔으며,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의 대학원생으로 1958-59년을 보냈다. 졸업 후, 중앙위원회 선전 부서에서 일했고, 1960년대 중반까지 라디오와 텔레비전 부문의 책임자로 있었다. 1965년에 그는 선전부의 제1차장이 되었는데, 1973년 한 폭로 사건으로 쫓겨날 때 까지 자리를 지켰다.

 

흐루시초프 하에서의 소위 지적 해빙기 동안에, 러시아 민족주의가 문학계에서 특히 인기를 끌었는데, 브레즈네프 하에서는 당내 분란을 야기할 정도로 발전했고, 여기서 야코플예프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73년에 야코플예프는 당 기관지가 러시아 민족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다고 신랄하게 질책했다. 야코플예프는 민족주의의 위험에 대항해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그의 민족주의에 대한 반대는 레닌보다는 부하린과 비슷했다. 게다가 그의 주장은 친서방적임을 분명히 드러냈다. 러시아의 민족주의는 서양에 적대감을 조장하는 반면, 러시아의 발전은 서양과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10)

 

야코플예프는 자신의 견해로 인해 브레즈네프 지도부와 멀어지게 되었고, 결국 해외로 전출되었다. 그는 영어권 국가로의 배치를 요청했고 캐나다 대사로 임명되었다. 캐나다 대사로 10년간 복무하면서 다른 정치국원보다 더 많은 서방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11) 1983년 고르바쵸프가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야코플예프와 1주일을 함께 보냈다. 한 달간의 이 여정 동안, 고르바쵸프는 모스코바에서 야코플예프를 유명한 국제관계 및 세계경제 연구소(IMEMO)의 책임자로 임명되도록 하였다.

 

그 후, 야코플예프의 출세는 화려했다. 1984년, 야코플예프는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1985년 고르바쵸프는 그를 중앙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임명했다. 이듬해 고르바쵸프는 그를 선전비서(장관)로 승진시켰다. 그때쯤에, 야코플예프는 언론과 문화 문제에 대한 권한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외교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12)

 

선전선동부의 책임자로서, 야코플예프는 주요 인사와 절차에 있어 완전한 변화를 야기한 몇몇 지도적 지위에서 일했다. 그는 작가와 영화제작자들의 창작조합이 문화에 대한 자유주의적 방법을 채택하도록 강요했고, 고르바쵸프의 몇몇 열렬한 지지자를 지도부에 앉혔다. 예를 들어, 1985년 12월에 러시아공화국 작가조합 회의에서, 야코플예프는 시인 예브게니 예브뚜센꼬에게 금지된 작품의 출판을 위해 제한을 완화하도록 부추겼다. 1986년 4월에, 영화 제작자 조합대회에서, 야코플예프는 자기편인 엘옘 끌리모쁘를 제1서기에 사적으로 추천하고 선출했다. 또한 야코플예프는 끼릴 라브로쁘를 극장 노동자 조합의 위원장에 성공적으로 선출시켰다. (야코플예프가 러시아 작가 조합의 위원장을 지명하려는 유사한 시도는 실패했다.)13) 야코플예프는 또한 의심의 여지없이 글라브리트에 주요한 변화를 야기했다. 1985년 후반 혹은 1986년 초반 경에, 정치국의 어떠한 심의도 없이, 글라브리트는 출판의 전통적인 관리 감독을 포기했다. 그리고 이 권한은 출판사와 신문사의 편집자들에게로 넘어갔다.14) 편집자들이 출판물 내용에 대해 새로운 권한을 갖게 되자, 야코플예프는 빠르고 광범위한 변화를 열렬히 지지하거나 당에 비판적이고 반대하는 인사를 주요 신문과 잡지의 편집자와 새로운 문화 관직에 임명하기 시작했다. 이들에는 노비 미르(주요 문예월간), 즈나미야(저널), 아가뇩(대중 발행 주간지), 모스코브스키 노보스티(신문사), 소베츠카야 쿨투라(신문사) 보프로시 리테라투리 등의 편집자들이 포함되어 있고, 유리 보로노프를 중앙위원회 문화부의 책임자로, 바실리 자카로프를 문화부 장관으로 만들었다.15) 머지않아 보리스 옐친의 열성지지자가 된 유리 아파나시예프는 모스크바 국립 역사기록 보관소장이 되었다. 이들은 곧 쓰딸린과 당을 비판하고 너무 성급하고 극단적인 개혁 조치를 추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고르바쵸프와 야코플예프는 글라스노스트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의 행동과 말에서 글라스노스트를 지지하는 편집자와 지식인들이야 말로 개혁을 시도하는 데 있어 최고의 조력자이며, 이들이 당과 정부를 비판하고 쓰딸린을 공격해야 잠재적인 반대자들을 수세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생각을 때때로 드러냈다. 1985년에, 야코플예프는 쓰딸린의 전시 정책을 비판하면서 아나스타샤 미코얀의 회고록 출간을 허가했다.16) 1986년 9월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방송된 크라스노다르 연설에서 고르바쵸프는 정부와 당을 향한 공격에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개혁의 적을 각 부처의 관료주의와 당의 보수주의라고 규정했다. 그는 “당은 인민에 봉사하는 것이며, 임무수행이 특권은 아니다. 이것을 잊은 사람들에게 다시 일깨우고자 한다.”고 말했다. 처음으로 “민주화”를 요구했다. 메드페데프에 따르면, 이 연설은 “돌풍”을 일으켰다.17) 그것은 비난, 특히 쓰딸린에 대한 비난의 수문을 열었다. 서방에서처럼 쓰딸린에 대한 비난은 종종 레닌과 사회주의에 대한 공격을 은폐했다.

 

1986년 이전에는 쓰딸린에 비판적인 작품들을 금지했었다. 1984년에 30대의 억압된 본능을 다룬 영화인 텐기쯔 아블라쩨의 “포카야니예(후회)”는 관람이 제한되었다. 로이 메드페데프에 따르면, 고르바쵸프가 좋아했던 이 영화의 상연은 “단순한 문화적이 아닌 정치적 전환점”이었다.18) 또한 모스코바에서, 미카일 샤트로프의 반쓰딸린 연극, “디쿠타투라 쏘베스티(양심의 독재)”은 레닌스크 콤소몰 극장에서 상연했다.19)

 

리가체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쵸프는 아나톨리 리바코프의 ≪아르바트의 아이들≫의 출간을 직접 승인했다.20) 작가조합 위원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비 미르는 1987년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 출간하기 시작했다.21) 또 다른 신호로, 고르바쵸프는 반체제 인사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망명을 끝냈다.22) 서방의 많은 이들이 이러한 움직임을 환영한 반면, 모스크바에 거주하던 공산주의 저널리스트 마이크 다비도는 “역사상 그 어떤 집권당도, 쏘련공산당의 지도자들이 했던 것처럼, 말 그대로 대중 매체를 그 자신을 파괴하고 이를 주도한 국가에게 넘겨준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23)

 

게다가 제27차 당 대회 후에, 고르바쵸프는 당 개혁에 있어 안드로포프의 노선에서 이탈했다. 글라스노스트와 마찬가지로, 당 개혁에 있어서도 고르바쵸프의 이탈은 1987년 이전까지 분명하지 않았고, 순전히 암시적 미사여구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역사학자 그레이엄 길에 따르면, 당이 심각한 문제―몇몇 공화국에서의 부패와 그리고 의리 및 굴종, 보신주의에 기반한 간부정책―에 봉착했다는 공감대가 당 안팎에서 존재했다. 안드로포프를 따라서, 고르바쵸프는 엄격함과 투명성, 규율을 요구했다. 당 대회는 더 많은 개방과 비판, 자기비판, 책임, 집단성을 제공하는 새로운 규칙을 채택했다. 그러나 고르바쵸프는 이러한 결정을 실행하는데 실패했다. 대신 1986년 9월에 그는 당에게 “스스로를 개혁하라”고 요구함으로써 다른 방향으로 빗나갔다. 당 대회가 사회의 개혁과 당의 강화를 요구했던 반면에, 고르바쵸프는 초점을 당의 개혁과 “민주화”로 전환했다. 당 리더십에 대한 첫 불만의 소리는 이 지점에서 생겨났다.24)

 

한편 이념과 정치에서 나타난 것과 비슷하게, 고르바쵸프는 외교정책에서도 모호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분야에서,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1987년까지 심지어 그 이후에도,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소비에트의 지원이 급격히 중단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조짐들이 나타났다. 여기서도 노선의 변화는 미사여구로부터 시작됐다.

 

레닌은 우익 기회주의의 본질을 근본적인 원칙들을, 특히 즉각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서 계급투쟁의 원칙을 희생하는 것과 사회주의로의 빠르고 쉬운 전진을 찾으리라는 희망으로 계급의 적과 불필요한 타협을 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것은 고르바쵸프가 따르기 시작했던 노선과 아주 흡사했다. 1985년 4월, 그가 변하기 전에, 고르바쵸프는, “제국주의”를 국제적 긴장을 조성하고 사회주의 국가들을 전복하려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에 제국주의, 자본주의 국가, 민족 해방과 같은 말들은 세계가 아닌 고르바쵸프의 연설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25) 제27차 당 대회의 연설에서, 제국주의는 단 한번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언급에서 등장했다.26) 마침내, 고르바쵸프는 “새로운 사고”가 외교의 탈이념화를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즉, 계급 중심의 이념을 평화와 협력이라는 영원한 인간의 가치를 우선하는 이념으로 대체했다.27) 한편 이러한 미사여구의 방향전환은 정책으로 미묘하게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고르바쵸프는 평화와 군비축소에 대한 대담하고 새로운 계획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는 일방적으로 쏘련의 핵실험을 멈추고 유럽을 겨냥한 중거리 미사일 수를 줄였다. 그는 제네바에서 레이건을 만나 미소관계를 회복했고, 전략무기 50% 감축안 같은 새로운 제안을 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국제적 긴장을 감소시키고 고르바쵸프는 국제적 찬사를 받았지만, 크렘린 외부 사람들은 거의 주목하지 못한 어려움이 있었다. 즉, 고르바쵸프는 어떠한 대가도 얻지 못한 채 미국에 양보만 하는 문제 있는 경향을 보였다. 이 경향은 1986년 초에 새로운 형태로 나타났다. 1981년 이후로, 레이건 행정부는 군비를 획기적으로 늘려왔다. 반면에 제로옵션이라고 알려진 새로운 군비축소를 제안했다. 제로옵션은 앞으로 미국이 유럽에 미사일을 배치하지 않는 대가로 쏘련이 돈과 에너지를 쏟아 부은 유럽배치 미사일들을 해체할 것을 요구했다. 사실, 제로 옵션은 레이건 행정부의 군비축소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현존하는 무기의 감축 없이 쏘련의 실질적인 감축을 요구하는 터무니없는 일방적인 생각이었다. 레이건 행정부가 쏘련에 실질적 제안을 하지 않고도 평화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세계 여론을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고르바쵸프는 이전 쏘련의 거부를 뒤집고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레이건 행정부도 놀랐다.28) 1월 15일 연설에서, 고르바쵸프는 2000년까지 핵무기의 완전한 제거를 제안했고 제로옵션에 동의했다.29) 고르바쵸프가 양보를 한정하고, 군축회담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거나, 미국 측의 양보를 이끌었더라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고르바쵸프의 양보는 미국과 상호간의 타협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극적인 반전이 있은 9개월 후에, 고르바쵸프는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레이건을 만났다. 그리고 정상회담에서 레이건은 공허한 약속만을 했고 SDI(전략방위구상)에 대한 어떠한 양보도 거절했다.30)

 

게다가 1985년 말과 1986년 초에, 고르바쵸프는 쏘련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개입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물론 완전한 철군은 2년 후 간접평화협정31) 체결 후 실행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쏘련 군대의 개입은 1979년에 시작되었다. 그 전 해에 권력을 잡은 아프가니스탄 민주당(PDPA)은 쏘련에게 CIA의 지원을 받는 군벌들의 공격을 막아줄 것을 반복적으로 요청했다. PDPA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낙후된 지역을 현대화하려고 시도하면서, 토지를 재분배하고, 종교적 자유를 증진시키며, 여성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했고, 글을 모르는 인구의 90%를 위한 문맹퇴치 운동을 시작했다. 즉각적으로 지방의 군벌들은 무장저항에 나섰다. 그들은 시골소녀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암살함으로써 반혁명을 개시했다.32) CIA는 군벌들에게 자금과 무기를 제공했는데, 이는 쏘련의 개입보다 앞섰고 쏘련을 의도적으로 도발한 것이었다. 카터 대통령의 국가 안보 보좌관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우리는 그들(쏘련)이 (개입)할 가능성을 고의적으로 높였다”고 말했다.33) 이 CIA 지원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비밀 작전이 되었다.34)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그리고 체르넨코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쏘련의 원조를 제국주의에 대항한 국제주의적 연대로 보았다.35)

 

고르바쵸프는 1985년 4월에 취임했을 때,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적 원조를 강화했다. 이것은 그가 처음부터 전쟁을 부도덕하거나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은 확실한 증거다.36) 하지만 1985년 가을 고르바쵸프는 쏘련의 책임으로부터 후퇴하기 시작했다. 먼저 제네바에서 레이건에게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타협이 가능하다고 신호를 보냈다.37) 그리고 나서 1986년 2월 제27차 당 대회에서 아프간 전쟁을 제국주의 탓으로 돌리긴 했지만, 고르바쵸프는 최근의 패배주의적 속내를 드러냈다. 과거의 지도자들처럼 아프가니스탄을 제국주의의 희생양으로 보지 않고, “끔찍한 손상”이라고 언급했다.38) 고르바쵸프 생각의 실질적인 전환점은 1986년 10월 레이캬비크 정상회담 이후에 분명해졌다. 고르바쵸프와 참모들은 미국이 무기 통제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려면 쏘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쏘련이 이런 결정을 한 실제 이유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성공이 협력적인 국제 환경을 요구한다는 믿음이었다. 쏘련의 기록 보관소를 연구하고 있는 사라 멘델슨(Sarah Mendelson)에 따르면, 철군결정은 국내의 대중 압력이나 전쟁의 패배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짜 이유는 페레스트로이카 성공은 국제적 협력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포기해야 한다는 고르바쵸프의 믿음 때문이었다.39) 1986년 11월 13일에 정치국 회의에서, 서기장은 말했다, “우리는 이미 아프가니스탄에서 6년간 전쟁을 해왔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접근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20-30년 동안 거기에 있어야 할 것이다.”40) 11월 이후에, 쏘련의 상층부에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다음 달에 고르바쵸프는 아프간의 지도자 나지발라(Najibullah)에게 쏘련은 1988년에 철군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쏘련의 행동은 미국의 개입 완화 및 아프간에 대한 중립과 동시적인 것이었다. 야코블로프에 따르면, 이 회의 직후에, 고르바쵸프는 글라스노스트를 이용하여 철군에 반대하는 몇몇 쏘비에트 지도자를 퇴출시키기로 결정했다.41) 멘델슨이 분명히 밝힌 대로 도덕성도 패배도 대중적 압박도 소비에트 정책 변화의 원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페레스트로이카의 제단 위에 국제주의적 연대를 희생시킨 고르바쵸프의 의지였다.

 

비록 국내외 정책에 대한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는 조짐이 1985년 가을부터 시작되었지만, 이러한 정책의 궁극적인 위험은 그 당시보다 시간이 지나서야 명백해졌다. 1985년 당시에 고르바쵸프가 향했던 곳은 분명치 않았다. 그 신호들은 모순적이었다. 무엇보다도, 고르바쵸프는 여전히 레닌주의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고 사회주의를 완벽하게 하는 것에 대해 말했다. 그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수정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며 단지 그것을 새로운 세계 상황에 적용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의 신호를 보낼 때조차, 실제로 아프리카 민족회의에 대한 쏘련의 지지를 증가시켰다.42)

 

고르바쵸프의 우경화의 결정적 요소는 많은 재량이 가능한 이념과 정치, 외교정책에서 미묘하고 머뭇거리며 처음 등장했다. 1986년에는 경제정책에서도 나타났다. 고르바쵸프의 경제적 발상의 문제점은 중앙 계획과 국유화의 약화에 있었다. 이를 제27차 당 대회에서 언급했다. 고르바쵸프는 기업의 자율성을 옹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기업이 자신들의 이익에 기초하여 스스로 운영을 완전히 책임져야한다. 중앙의 경제 단체들은 일상의 관리업무에서 벗어나서 장기적인 계획과 과학적 리더십에 집중해야한다. 기업은 다른 기업들에게 요구된 계획량을 초과하는 제품을 판매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기업은 그 직원들의 임금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그리고 그 임금은 판매로부터 나와야 한다. 중앙 계획이 후퇴함에 따라, 공화국, 지역, 도시, 구역은 계획에서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들은 근본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고르바쵸프는 당 대회에서 혁신은 “인민전체의 이익에 대한 확실한 우선권”의 희생도 아니고 계획적 지도 원칙의 후퇴도 아니며, 단지 “방법”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장담했다.

 

게다가 고르바쵸프는 당 대회 연설에서 국유가 아닌 소유권과 심지어 사유기업에도 문호를 개방했다. “협동소유”는 “사회주의 생산에서 그 가능성이 소진되지 않았다.”고 그리고 “공공시설과 협동기업의 성장에 최대한의 지원이 이루어져야한다”고 말했다. 이 말이 진정한 협동조합에 적용된다면 올바르다. 그러나 고르바쵸프가 의미했던 “협동기업”은 사유기업이었지, 그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고르바쵸프는 “부가소득을 위해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에게 위협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제2경제의 사유기업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43) 사실이 이러한데도, 고르바쵸프는 사회주의 경제를 도둑질하고, 뇌물을 받고, “은밀히 개인소유의 사고방식”을 발전시킨 사람들의 “불로소득”을 비난하며 물 타기를 했다.

 

그는 “실질적인 사회주의의 강화가 개혁의 최고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44) 이렇게 하여 고르바쵸프는 사유재산을 옹호하는 새로운 시책들을 표리부동한 말과 자가당착의 개념으로 은폐했다.

 

당 대회 이후, 고르바쵸프의 경제개혁에 대한 자가당착은 계속되었다. 고르바쵸프는 한편으로, 불로소득 처벌법을 지지했고 상품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새로운 국가통제기관의 설립을 지지했다. 다른 한편, 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결국 사유 경제 활동을 촉진하는 경제 자유화 3단계에 착수했다. 8월에, 해외 투자를 포함하여 국영기업의 해외 경제 활동을 허용했다. 10월에, 일종의 생산협동조합을 합법화했는데, 그것은 실제로 단지 사기업의 위장 형태였을 뿐이다. 11월에, 사유 경제활동의 범위를 조금 넓혔다.45) 이러한 조치는 제2경제의 쁘띠부르주아층을 증가시켰는데 이는 불길한 징조였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고르바쵸프는 더 나아간 자본주의 지향 정책을 위한 기반을 넓혀갔다.

 

고르바쵸프의 첫 2년 동안 좌익 반대파의 목소리가 나타나지 않은 원인은 고르바쵸프 정책의 자가당착적 성격과 당 지도부 대부분이 가지고 있었던 개혁에 대한 강한 열망 때문이었다. 예고르 리가체프(Yegor Ligachev)가 추구한 노선은 좌익 반대파가 더디게 발전한 예이다. 1920년에 시베리아에서 태어난 리가체프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공장에서 일했다. 모스크바에서 항공 엔지니어가 된 후에, 리가체프는 노보시비르스크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될 전투기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1944년에 공산당에 가입한 후에, 지위가 올라가 1959년에는 노보시비르스크 구역의 수장이 되었다. 1961년부터 1965년까지 모스크바의 중앙위원회에서 일했다. 그리고 나서 스스로의 요청으로 톰스크 지방당의 당수가 되었다. 그리고 17년 동안 그 자리를 유지했다. 리가체프는 브레즈네프 시대가 침체기라는 지나친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브레즈네프 시대 동안 톰스크에서의 성취를 자랑스럽게 제시했다. 리가체프는 “나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했다. 역사학자 스티븐 F. 코헨은 최근에 리가체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술을 전혀 마시지 않고, 자부심이 강하고, 열심히 일하며, 스캔들이 없는 가정적인 사람이다. 지방 공업과 농업을 현대화 했고 새로운 기업들을 발전시켰으며, 톰스크의 역사적인 목조 건물들을 보존하고, 예술을 후원했고, 필요한 곳이면 어디서든 당의 독점적 이익을 지켰다.” 1983년에, 서기장 안드로포프는 리가체프를 모스크바로 데려왔고, 거기서 고르바쵸프와 마찬가지로 정치국의 개혁성향을 가진 구성원중의 한 명이 되었다.

 

개혁의 첫 단계 동안에, 리가체프는 최고 지도자들 중에 가장 철저하고 흔들리지 않는 레닌주의자를 대표했다. 그는 당 간부로서 고르바쵸프 다음으로 당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직책을 맡기도 했다. 리가체프는 고르바쵸프 개혁의 일반적인 취지를 지지했다. 그는 개혁이 오래전에 시행됐어야 했고, 단지 안드로포프가 계획한 방향을 부활시킨 것으로 믿었고, 그 과정을 충실히 따르는 것으로 여겼다. 열성적인 개혁주의자로서, 리가체프는 고르바쵸프의 정책이 우익으로 치우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더구나 그중 일부를 스스로 더 발전시켰고, 나중에 후회했다. 예를 들어, 리가체프는 오곤요크(Ogonyok)의 편집자 선출을 도왔는데 그는 나중에 모든 편집자들 중에서 가장 반당적인 편집자의 한 명이 되었다. 게다가, 리가체프는 언론에 의해 추진되는 급속한 개혁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나중에 인정했다. 1986년이 되어서야 야코블레프에게 언론의 통제권을 이양한 것이 “큰 실수”라는 것을 깨달았다.46)

 

1986년 말에, 고르바쵸프의 개혁은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좌익으로도 우익으로도 보였다. 또는 두 가지 얼굴을 다 가지기도 하였다. 좌익의 얼굴을 하고 우익으로 나아갔다. 어떤 조치들은 실패했지만, 일부는 전망을 보여줬다. 정책의 궁극적 방향과 운명은 막연했지만, 정치국과 대중은 고르바쵸프를 지지했다. 그런데 12월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위기가 발생했다. 다가올 좀 더 심각한 문제를 예견하듯 카자흐스탄에서 극단적 민족주의가 갑자기 분출했다. 위기는 고르바쵸프의 약점을 분명히 드러냈다. 고르바쵸프는 자신이 러시아 지방 출신임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주변부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민족적 이해를 계속 무시했다. 역사학자 엘렌 드엔코스(Helene D’Encausse)는 “그는 민족적 민감성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1956년 이래 실행 중이었던 민족 대표에 대한 규칙을 냉담하게 무시했다.”고 말했다. 브레즈네프 하에서, 정치국은 공화국의 지도자였던 세 명의 비러시아계 구성원들을 포함한 반면에, 고르바쵸프 하에서는 정치국에 비러시아계 공화국 지도자로는 우크라이나의 쉐르비츠키 단 한 명이었다. 더욱이, 브레즈네프 하에서, 정치국원과 예비국원은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공화국과 조지아의 코카서스, 그리고 두 개의 슬라브국인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를 대표했지만, 고르바쵸프 하에서는 “모든 무슬림공화국과 코카서스는 정치국에서 사라졌다.” 심지어 세바르드나제(Shevardnadze)를 제외하고 지도자들 중 누구도 변방의 공화국에서 의미 있는 경험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드엔코스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변방의 국가들은 무시와 경멸을 느꼈다.47)

 

본래, 카자흐스탄 문제는 고르바쵸프에 의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카자흐스탄 분쟁은 뿌리가 깊다. 수년간의 이민으로 인해 카자크인들은 자신의 공화국에서조차 소수(40%)가 되었다. 지역 지도자를 육성하고 2개 국어 상용을 장려하는 정책은 목표에 미치지 못했다. 러시아어는 공용어로 남아 있었다. 그 결과 카자크인들은 자신의 영토에서도 외부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러한 불만이 불쏘시개를 제공했다면, 고르바쵸프가 불길을 당겼다. 그는 민족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단순히 인식하려하지 않았다. 민족적 민감성에 매우 둔감했다. 그해 초 제27차 당 대회에서, 그는 민족적 차별과 좌절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드엔코스가 “의례적 수사”라고 한 말만 되풀이 했다. 글라스노스트는 사람들에게 비판할 자격을 주었고, 고르바쵸프의 고압적인 자세는 비판할 거리를 주었다. 카자크 중앙위원회의 서기 절반을 추방한 후에, 1986년 12월에 고르바쵸프는 카자크 출신 서기장 딘무하메드 쿠나에프(Dinmukhamed Kunaev)를 카자흐스탄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러시아인 제나디 콜빈(Gennadi Kolbin)으로 교체했다. 이것은 커다란 실수이거나 무시무시한 규모의 계산된 도발이었다. 만 명의 학생들과 사람들은 민족주의 슬로건―“카자흐스탄을 카자크인에게 오직 카자크인에게”―을 가지고 거리로 나왔고, 공공건물과 당 본사를 공격했다. 폭동은 군대가 진압해야 했다. 드엔코스에 따르면, 고르바쵸프는 쏘련 역사상 최악의 민족적 봉기를 유발했던 것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그 뒤의 연설에서 그는 “민족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불쾌감과 심지어 사실에 대한 이해 부족”을 드러냈다.48)

 

알마 아타(Alma−Ata)의 거리에 깨진 유리 조각들은 개혁이 가고 있는 방향의 문제점을 반영하고 있었다. 고르바쵸프는 안드로포프의 선례로부터 출발했을 때, 그는 잘 준비된 계획 없이 혁명적인 변화를 장려했다. 흐루쇼프와 부하린까지 되돌아가 당 개혁파 전통의 낡은 사고까지 수용했다. 이러한 사고는 지식인 및 제2경제에서 이득을 얻은 기업가와 당 관료의 이익을 반영했다. 고르바쵸프는 덧붙이고 꾸며내며 관례적 수사로 은폐하여, 교묘하게 전통적인 맑스-레닌주의 이념을 버리기 시작했다. 정치와 이념에서, 고르바쵸프는 비판과 자기비판의 전통적인 개념과 서방 자유주의 언론 모델의 고르바쵸프 버전인 글라스노스트에 대한 당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외교에서, 그는 끝이 없는 인간가치와 일방적인 양보 정책을 위해 계급투쟁과 국제주의적 연대 및 평등과 호혜 정책을 희생물로 삼았다. 경제개혁에서, 고르바쵸프는 중앙 계획에서 기업 자율과 시장으로, 국유기업에서 협동기업과 사유기업으로, 제2경제의 억제에서 자유화로의 전환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환대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좌절과 반대에 부딪쳤을 때, 고르바쵸프는 “앞으로 나아가 벗어나려고” 돌진하는 불안한 경향을 보였다.49) 그것은 위험하고 미지의 길이었다. 알마 아타의 폭동은 이 길이 무시무시한 결과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다음 호에 계속) <노/사/과/연>


1)미하일 고르바쵸프(Mikhail Gorbachev),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7차 당대회 정치보고서 (Political Report of the CPSU Central Committee to the 27th PartyCongress)≫ (Moscow: Novosti,1986), 4-5, 26, 29, 40-46, 49, 86.

2) 네일 로빈슨(Neil Robinson), ≪이데올로기와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
(Ideology and the Collapse of the Soviet System)≫ (Aldershot, England and Brookfield, Vermont: Edward Elgar Publishing Company, 1995), 107-111.

3) 깁스(Gibbs), 23, 28-29, 33.

4) 고르바쵸프(Gorbachev), ≪회고록≫, 210.

5) 고르바쵸프(Gorbachev), ≪정치 보고서≫, 111.

6) 깁스(Gibbs), 37.

7) 존(John)과 캐롤 개라드(Carol Garrard), ≪소비에트 작가협회(Inside the Soviet Writers’ Union)≫(New York: Free Press, 1990), 205.

8) 깁스(Gibbs), 5-6, 8.

9) 알렉산더 야코플예프(Alexander Yakovlev), ≪맑스주의의 운명(The Fate of Marxism)≫(New Haven and London: Yale Unversity Press, 1993), x.

10) 이츠하크 브루드니(Yitzhak Brudny), ≪러시아의 재탄생: 러시아 민족주의와 소비에트 국가, 1953-1991(Reinventing Russia: Russian Nationalism and the Soviet State, 1953-1991)≫ (Cambridge, Mass. and London: Harvard University Press, 1998), 94-100

11) 로버트 카이저(Robert Kaiser), ≪어째서 고르바쵸프가 나타났는가(Why Gorbachev Happened)≫(New Y ork, London, et al.: Simon & Schuster, 1991), 111.

12) 개라드(Garrard), 198-199; 브루드니(Brudny), 197; 해리스(Harris), 20.

13) 개라드(Garrard), 202, 207.

14) 깁스(Gibbs), 39; 브루드니(Brudny), 197-198.

15) 개라드(Garrard), 201.

16) 개라드(Garrard), 199.

17) 로이 메드페데프(Roy Medvedev)와 기우리에또 치에사(Giulietto Chiesa), ≪변화의 시기: 러시아의 변화에 대한 내부자 시각 (Time of Change: An Insider’s View of Russia’s Transformation)≫(New York: Pantheon, 1989), 27-28.

18) 메드페데프(Medvedev)와 치에사(Chiesa), 29-32.

19) 메드페데프(Medvedev)와 치에사(Chiesa), 32.

20) 깁스(Gibbs), 44.

21) 개라드(Garrard), 202; 메드페데프(Medvedev)와 치에사(Chiesa), 32.

22) 메드페데프(Medvedev)와 치에사(Chiesa), 35.

23) 다비도(Davidow), 21-22.

24) 그레이엄 길(Graeme Gill), ≪단일 정당 시스템의 붕괴(The Collapse of a Single-party System)≫(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28-29.

25) ≪이번 쏘련공산당 27차 당 대회를 기념하여(For the Forthcoming
XXIIth CPSU Congress)≫, 24-25. (역주: XXIIth는 XXVIIth의 오기인 듯)

26) ≪제27차 당 대회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 보고서(Political Report of the CPSU Central Committee to the 27th Party Congress)≫, 86.

27) 미하일 고르바쵸프(Mikhail Gorbachev), ≪페레스트로이카: 우리나라와 세계를 위한 새로운 사고 (Perestroika: New Thinking for Our Country and the World)≫(New York et al.: Harper & Row, 1987), 144-147.

28) 피츠제럴드(Fitzgerald), 323.

29) “1986년 계획 : 미하일 고르바쵸프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의 성명서”, ≪프라우다(Pravda)≫ (1986년 1월 16일), 쏘련 출판부의 복사물(1986년 2월 15일), 5-20.

30) 피츠제럴드(Fitzgerald), 364-365.

31) 역주: 1988년 2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유엔의 중재로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사이의 간접평화회담이 개최되었다. 고르바쵸프 서기장은 이 회담에서 양측이 합의에 이르면 쏘련군을 철수시킬 것을 약속, 4월 아프가니스탄 평화협정이 조인되었다.

32)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진실 : 문서, 사실, 목격자 보고서≫(Moscow: Novosti, 1981); 필립 보노스키(Phillip Bonosky), ≪아프가니스탄-워싱턴의 비밀전쟁≫(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2001).

33) 판카지 미센(Pankaj Mishen)이 인용한 브레진스키, “아프가니스탄 만들기” ≪뉴욕 도서 리뷰(The New York Review of Books)≫ (November 15, 2001), 20.

34) 사라 멘델슨(Sarah Mendelson), ≪변화 과정: 사상, 정치,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쏘련의 철수≫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8), 69.

35) 멘델슨(Mendelson), 60-61, 73-76.

36) 제리 호프(Jerry Hough)가 참고한 쏘련 외무정보국장 블라디미르
끄리치꼬쁘(Vladimir Kryuchkov)의 변역되지 않은 회고록, ≪쏘련 민주화와 혁명, 1985-91≫(Washington, D.C.: Brookings, 1997), 193.

37) 피츠제럴드(Fitzgerald), 323.

38) 미하일 고르바쵸프, ≪제27차 당 대회 중앙위원회 정치보고≫(Moscow: Novosti, 1986), 86.

39) 멘델슨(Mendelson), 112.

40) 멘델슨(Mendelson), 112.

41) 멘델슨(Mendelson), 112-113.

42) 블라드미르 수빈(Vladimir Shubin), ≪ANC(아프리카 민족희의):
모스크바에서의 전망≫(Bellville, South Africa: Mayibuye Books, 1999), 340.

43) 고르바쵸프, ≪제27차 당 대회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보고≫,

41-57.

44) 고르바쵸프, ≪제27차 당 대회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보고≫,

41-57.

45) 그레고리 그로스만(Gregory Grossman), “전복된 주권: 소비에트 지하운동단체의 역사적 역할”, 스티븐 코헨 (Stephen S. Cohen) 외 편집,

≪빛의 끝에 있는 터널≫(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1998), 28.

46) 리가체프(Ligachev), 96, 100, 여러 곳에.

47) 드엔코스(D’Encausse), 10-12.

48) 드엔코스(D’Encausse), 4, 9, 23-27, 31-33, 40-41.

49) 디아고스티노(D’Agostino), 174.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Nov 13th, 2018 | By | Category: 2018년 10・11월 제146호, 번역, 정세와노동 | 조회수: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