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연 | 시인, 자료회원
우리는 왜 먼 곳의 학살만 기억하는가
아우슈비츠라는 말만 들어도
가스실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 냄새가 나는 것 같고
몸부림치며 벽을 긁은 손톱자국이 보이는 듯한데
경대병원으로 병문안 가던 삼덕동 어느 골목이나
여름 원피스 사러 현대백화점 가던 반월당 어디쯤에서
1946년 10월에 쌀을 달라, 친일경찰을 처단하라고 외치던
군중의 무리 속 누군가와 내 발자국이 똑같이 포개졌을지 모르고
그 발자국의 주인이 멀지도 않은 가창골에서 학살되어
가창댐 아름다운 수변공원 아래 수장되어 있는데
우리는 왜 먼 곳의 학살만 기억하는가
우리는 왜 남이 저지른 만행만 기억하는가
땅과 쌀과 밥그릇을 빼앗고
아비와 아들과 딸을 빼앗고
이름과 글과 생각을 빼앗고
한용운과 이육사와 윤동주를 빼앗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은 기억하면서
1950년 여름, 한 번에 서른 명씩 하루에 열 번
한 달 동안이나 쓰리코타에 실어간 사람들
해방 후 필요 없어진 무기 재료 코발트 광산을 다시 열어
수직굴이 가득 차도록 집어넣고 탄광을 봉한 후
육십 년이 넘도록 모른 척하고 있으면서
우리는 왜 남이 저지른 만행만 기억하는가
고개를 들고 보라,
먼 곳의 학살만 기억하고
남이 저지른 만행만 기억하는
우리가 만든 2014년을,
어느 한 군데 마음 놓고 숨쉴 수 있는
맑은 공기가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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