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의 역사] 한국전쟁? 또는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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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영 | 회원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

 

한국전쟁의 기원, 즉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가하는 문제처럼 오늘날 골치 아픈 문제도 드물 것이다. 전쟁에 직접 책임이 있는 남과 북에게는 이 문제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분명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남과 북은 모순되는 견해를 지니고 있다. 세계사에서 하나의 동일한 역사적 사건이 이토록 정반대로 설명되는 경우도 보기 힘들 것이다.

 

단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전쟁이 각 당사자 간의 첨예한 이해대립이 폭발한 과정이었고 또한 국제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만큼 결코 1950년 6월 25일 당시와 한반도 내부의 정세에만 국한해서는 문제를 정확히 해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각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즉, 전쟁에 관련된 모든 나라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고 또한 각 당사자 간의 이해관계 대립이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 주의를 돌릴 필요가 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1949년 한 해 동안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역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일대 사건이 계속 발생하고 있었다. 그해 8월에 쏘련은 핵무기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미국과 군사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미소 간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이와 더불어 중국 대륙에서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쫓겨나고 그 대신 공산당이 지도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같은 해 10월에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 공산당의 등장으로 본래 중국 대륙을 발판으로 쏘련을 봉쇄함과 동시에 아시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했던 미국의 꿈은 일거에 무산되고 말았다. 사태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바야흐로 혁명의 불길이 전 아시아 대륙으로 번져가는 대격변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로부터 미국은 패전국인 일본을 아시아의 후방 병참기지로 전환하고 한반도, 타이완, 베트남을 각각 군사적 진공을 위한 교두보로 삼으며 최종적으로 중국 대륙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전략방침을 수립한다. 즉 일본의 재무장,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미군사기지 설치를 둘러싼 미국과 아시아 민족 간의 끊임없는 충돌은 미국에 의해 연출되는 장기간에 걸친 대형 드라마를 구성하는 각각의 장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차이로 전혀 무관한 듯이 보이는 개개의 사건들이 실은 하나의 의도와 논리 아래 서로 밀접히 얽혀 있는 셈이다.

 

 

일본의 병참기지화

 

미국이 애초에 기대를 걸었던 중국이라는 보루가 허물어지자 일본은 아시아의 병참기지라는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본래 일본의 군수산업은 전쟁 도발의 근원을 없애기 위해 군수산업 시설 전부를 미국이 몰수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9년 4월 16일 일본인의 조세를 군수품 생산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하는 「대충자금 특별회계법」이 일본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이러한 법률적 뒷받침 아래 미국은 일본의 군수산업을 재생시키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했다.

 

한편 미 8군이 전투훈련에 돌입하고 일본 전역을 병참기지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가 취해지는 가운데,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기 위한 정치적 조치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즉 미국은 모종의 대규모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일본인들의 효과적인 협력을 필요로 했고, 이를 보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의 군국주의적 망령을 부활시키고자 기도했던 것이다. 또한 일본 내 좌익 세력을 탄압했다. 맥아더는 일본의 병참기지화 정책에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일본공산당에 대해 불법화 조치를 단행했다.

 

기록상으로 볼 때 한국전쟁은 말할 필요도 없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개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마치 마른하늘에서 날벼락 치듯이 갑자기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보면 전쟁은 적어도 이미 4・3항쟁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여순 봉기와 전면적인 유격전을 거치면서 최소한 10만 이상의 희생자를 양산하면서 치러진 적대적인 두 세력 간의 대규모 무력충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쟁이었다고 보아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또한 1950년 6월 25일 본격적인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훨씬 전부터 38선에서는 남북한 군대 간의 대소규모 충돌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화염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불길이 지펴지고 있었다 하겠다.

 

 

38선을 사이에 두고 전개된 남북한 군대 간의 대소규모

무력충돌

 

1949년 5월 5일 춘천에 주둔하고 있던 보안부대 2개 대대의 요원들이 북한으로 넘어간 일이 발생하였다. …… 이 사건의 영향을 상쇄시키기 위하여 남한의 정부와 언론은 얼마 전에 있었던 개성 전투에서 북한 진지를 향해 ‘생사를 건 돌격으로 사망한 10인의 용사’의 죽음을 부각시켰다. 또한 남한군은 변절을 가장하여 북한 경비대를 유혹하면서 5월 7일 의정부 일대에서 그들을 습격하려고도 하였다. 그러던 중 남한의 한 부대가 ‘북한으로 수 킬로미터까지’ 침투하였으며 ‘몇 군데의 마을에 폭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북한은 5월 18일에 38선에서 남쪽으로 수십 킬로 떨어진 백천 근처를 수개 중대의 경비대가 공격함으로써 응답하였다.

 

심각한 전투상황이 소규모 부대의 교전 형태로 1949년 6월 내내 계속되었다. 6월에는 남한의 호림부대 소속 게릴라 중대가 북한으로 기습침투를 강행하는 도중에 북한 경비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9월에 평양에서 열린 재판에 대한 북한 측의 선전을 언급하는 미국 측에 따르면, 남한 게릴라 부대는 그 작전 영역이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동해안의 원산만 북방을 공격목표로 삼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남한의 국방장관은 7월 17일에 “국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단 하루에 양양과 원산을 완전히 장악하리라고 확신한다.”라고 기자단에게 발표하면서, 동해안에 대한 기습을 성공적으로 감행할 수 있는 남한의 능력을 언급하였다.

 

1949년 8월 초에 어부로 가장하고 인천항을 출발한 남한의 해군 선박은 8월 11일에 대동강 어귀의 해안 군사시설을 폭격하였다. 또한 6일 후에 6척의 소해정에 승선한 남한 기동 부대가 북한의 몽금포 군항을 공격하여 북한 선박 1척을 나포하고 4척을 격침시켰던 사건은 실로 심각한 것이었다. 이 공격에서 전직 해군이었던 국방장관의 명령을 직접 받은 남한 측 지휘관 이용운은 해군의 지위계통을 전적으로 무시하였던 것이다.

 

남한의 38선 도발에 대한 북한의 선전이 계속되는 중에, 북한군 2개 대대가 여전히 38선 북방의 운파산에 위치하고 있던 남한군 진지를 밀어붙였다. 만약 전쟁이 발생한다면 남한군이 포위될 지역인 옹진반도에서 계속되는 전투와 관련하여, 미 군사고문단은, 이 노출된 반도에서 퇴각하도록 남한 군부에 압력을 가하였다. 남한의 병력은 2개 대대 정도로 축소되어 있었고 백인엽 대령이 사태를 진전시키라는 명령과 함께 신임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지시에도 불구하고 백인엽 대령은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12월 중순에 북한군 진지를 기습 공격하였다. 간단히 운파산을 재탈환하고, 백인엽은 북한의 성급한 대항 공격을 유도하였다. 여기에서 북한군 1개 대대가 남한의 매복 공격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 같은 충돌은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어떤 경우는 확실히 지역사령관, 특히 남한군 지휘관의 주도로 발생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거의 통제하지 않았다. 때로는 그 지휘관들이 정치지도자의 직접 명령을 수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미 군사고문단 단장 로버트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의 의견으로는 38선 북방에 위치하는 소규모 남한기지의 존재가 각 사건의 원인인 것 같다. 지휘관들의 침공, 병력 증강, 군수품…… 등에 관한 야단스러운 외침이 그 특징을 형성한다. 남한은 북한을 침공하고 싶어 하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만약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모든 고문단은 관계를 끊고 ECA(미국 대외원조기구)의 통로는 잠겨버릴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전쟁의 발발

 

6월 25일 새벽, 전쟁의 포성이 38선을 무너뜨리면서 3년간에 걸친 대혈전의 막이 오른다. 전쟁 발생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UP 통신의 보도는 이렇다. “한국 38선에서 일요일 새벽에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침공하여 왔음을 전함.” 그러나 당일 북의 내무성은 두 차례에 걸친 공식 보도를 행했다. “오늘 6월 25일 이른 새벽 남조선 괴뢰정부는 38도선 전역에 걸쳐 38도선 이북지역으로 불의의 진공을 개시하였다 …… 38도선 이북지역으로 1~2km까지 침입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비대는 오늘 6월 25일 이른 새벽 38도선 부근 전 지역에 걸쳐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불의의 공격을 개시한 남조선 괴뢰정부의 소위 국방군의 침공을 요격하고 가열찬 방어전을 전개한 결과 적의 진공을 좌절시켰다. 인민군 부대와의 합동작전으로 공화국 경비대는 38도선 이북지역으로 침입한 적을 완전히 격파하고 반격전으로 들어갔다. 6월 25일 현재 공화국 인민군과 경비대는 다수의 지역에서 38도선 이남지역으로 5~10km까지 전진하였다. 전투는 계속되고 있다.”

 

전쟁 개시 당시 남한 군대의 병력 중 3분의 2가 한강 이북에 배치되어 있었다. 미 군사고문단 단장인 월리엄 로버트 준장이 ‘아시아에서 가장 막강한 규모’라고 단언했던 남한 군대는 개전이 되자 맥없이 허물어졌다. 한편 28일 새벽, 육군참모총장은 한강 인도교 폭파를 명령한다. 그러나 한강교가 폭파되는 순간에도 남한의 주력 군대는 여전히 한강 이북에 머물러 있었고 대부분의 중화기나 장비, 보급품도 역시 운송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폭파를 연기하고 3개 사단의 병력과 군사장비는 충분히 한강을 건널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결국 군대의 병력과 군사장비의 결정적 약화를 초래하고 만 한강교의 성급한 폭파는 통상적인 군사상식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던 것이어서 많은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문제의 이 사건은 남쪽에서 의도적으로 전쟁을 도발한 증거로 제시되기도 했다.

 

“유엔 시찰반이 보고했던 것처럼 …… 미 군사고문단이 생각하기를 이승만의 군대가 사보타지를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로 왜 형편없이 붕괴하고 패주했는가? 이것은 북한군을, 한국 내에 깊이 끌어들여 그 위협을 이용해서 미국의 개입을 확실히 한다고 하는 최고부의 군사적 음모와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북한군에 의한 한국군의 탄약, 보급품, 군장비의 포획은 북측의 쾌진격을 가능케 했다. 이러함에도 퇴각하는 한국군에 의해 보급품이 파괴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 본토로부터 대규모 부대가 투입되기 전, 즉 전쟁 초반의 양상은 단연 북한군의 우세로 나타났다. 이렇게 된 결정적 요인은 북한군이 군대 수와 화력에서 우위에 있었다기보다는 한국군이 문제의 한강교 폭파와 그에 뒤이은 병사들의 대거 이탈로 그 대열이 급격히 와해 되어버린 데 있었다. 이미 6월 29일 정찰비행을 마친 존 처치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국 군대는 약 8,000명으로 절망적이었지만 현재는 숫자가 늘어 2만 5,000명 규모의 병력이 되었다. 그래도 10만 명의 병력 중에서 4분의 3이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이러한 한국군 병사들의 이탈과 함께 남한 지역 민중의 의미 있는 지원이 북한군의 초반 승리를 가능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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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Jul 10th, 2018 | By | Category: 정세와노동, 회원마당 | 조회수: 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