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기획번역> 흐루쇼프가 거짓말했다 (6)

제5장 스딸린과 전쟁

번역: 노사과연 부산지회 연구팀

 

30. 스딸린은 전쟁에 대한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흐루쇼프:

스딸린이라는 단 한 사람의 손 안에 권력이 장악된 것은, 위대한 애국전쟁(the Great Patriotic War) 동안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전쟁 기간 동안과 전쟁이 끝난 후, 스딸린은 우리 국가가 전쟁 초기에 경험했던 비극은, 쏘련에 대한 독일의 “예상 밖의 (unexpected)” 공격의 결과라는 논리를 세웠다… 스딸린은 이러한 경고들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군사작전을 시작하지 않으려고, 이러한 종류의 정보에 대해 신뢰할 만한 내용이 없다는 지시를 내렸다… 모든 것은 무시되었다: 몇몇 군사령관들의 경고, 적군(敵軍)의 탈영병들의 신고들, 심지어 적의 공개적인 적대행위… 과연 이것이, 이렇게 특별히 중요한 역사적인 순간에 당과 국가의 수장이 보여준 경계의 예란 말인가?

독일은 정말로 쏘련에 대한 침략을 감행했으며, 그래서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올바른 흐루쇼프의 하나의 주장이다. (그러나: 역자) 그가 말하는 나머지 부분을 반박할 증거는 아주 많이 있다.

역시 공격은 발발했다. 육군원수 A. E, 골로바노프(Marshal A. E. Golobano-v)는, 모든 최고 군사령관들은, 전쟁 승리의 영광을 공유하듯이, 이에 대한 책임도 공유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쏘련 몰락 후 출판된 문서들은, 스딸린과 쏘련의 지도자들이 독일의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정보기관과 다른 출처로부터 나온 경고는 모순적이고 불확실한 것이었다는 내용을 보여준다. V. V. 꼬지노프(V. V. Kozhinov)는 정보를 평가할 때, 정확한 정보를 고의적인 허위정보나 단순히 잘못된 정보와 구분하는 문제들을 지적하며, 쏘비에뜨 지도자들이 이용가능했던 정보가 얼마나 모순적이었는가를 지적한다.

독일군은 쏘비에뜨 지도자들에게 거짓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 허위정보를 제공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육군원수 빌헬름 카이텔(Wilhelm Keitel)이 계획의 실행을 지시하는 1941년 2월 15일 날짜가 찍힌 상세한 명령서가 출판되었다.1)

꼬지노프가 지적하듯이, 여기에서 흐루쇼프의 비난은 그 자신의 논리와 상충된다. 역사학자들은 진주만 공격을 예측하지 못한 것 때문에 루즈벨트 대통령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나찌 공격의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예측하지 못한 것 때문에 스딸린을 비난하는 것은 “개인숭배”에 대한 희생양이 되는 것이고, 스딸린이 초인적인 능력들을 가지고 있고 불가사의하게 그 능력을 이용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믿는 것이다.2)

전시체제는 보편적으로 선전포고로서 이해되었기 때문에 쏘비에뜨는 전시체제를 포고할 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켰던 것이 바로 그러한 전시체제였다. 그것은 히틀러에게 선전포고를 할 기회를 줄 수 있었고, 히틀러와 연합국이 쏘련을 고립시키는 거래를 하게 만들 수 있었다. 1940년 작성된 “‘동방’ 작전(Operation ‘Ost’)”을 위한 계획에서 독일의 장군 마조르 마르크스(Maj-or Marks)는 “러시아인들은 우리를 (먼저) 공격하는 호의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라며 유감스럽다고 언급한다.3)

쏘련에 적대적인 히틀러와 ― 영국지배층의 많은 사람들이 원했던 ― 평화를 도모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영국은 히틀러가 쏘련에 적대하게 만들고 히틀러와 쏘련 둘 다 약해지는 것을 분명히 원했기 때문에, 쏘비에트는 영국의 경고를 신뢰할 수 없었다.

스딸린 숭배자가 아닌 육군원수 K. A. 메레뜨스꼬프(K. A. Meretskov)는 전쟁이 임박한 상황은 아주 복잡하고, 예측하기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그의 회고록은 1968년 흐루쇼프가 축출된 후에 출판되었다. 전쟁 후 스딸린에 의해 불명예스럽게 강등되었고 1957년 흐루쇼프가 스딸린을 공격하는 것을 도왔던 쥬꼬프(Jukov)는 스딸린하에서 쏘련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쏘련이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했다고 생각했다.

육군원수들인 바실레프스끼(Vasilevski)와 쥬꼬프는, 모든 부대들에게 국경을 따라 위치를 잡으라고 스딸린이 명령을 내렸어야 했는지 혹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지에 관하여 의견이 서로 다르다. 흐루쇼프가 축출된 후 1965년 바실레프스끼의 글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쥬꼬프는 (그렇게 했다면: 역자) 그것은 심각한 오류였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썼다.

흐루쇼프가 여기에서 그 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임박한 독일공격에 대한 가장 유명한 “경고”에 관하여 언급할 가치가 있다. 일본주재 독일 대사관에 있었던 유명한 쏘비에뜨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로부터 나온 그 유명한 경고는 흐루쇼프의 “해빙기” 동안에 날조된 것이라고, 최근에 매도당했다.

 

31. 보론뜨소프(Vorontsov)의 편지

흐루쇼프:

우리는 쏘비에뜨 영토에 대한 독일군대의 침입 위협과 관련된 이러한 정보가 우리의 군사정보와 외교정보로부터 역시 나오고 있었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지도부는 그러한 정보를 불신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에, 그러한 자료를 두려워하며 폐기하였고 보류하였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쏘비에뜨 군사수행원, 보론뜨소프 대령에 의해 1941년 5월 6일 베를린에서 보내온 정보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쏘비에뜨 시민 보제르(Bozer)는,,,해군수행원 대표자와 대화를 했는데 그 내용은,,, 히틀러 사령부의 어떤 한 독일 장교의 진술에 의하면 독일은 핀란드, 발트해 국가와 라트비아를 통하여 5월 14일 쏘련을 침략할 준비를 하고 있다. 동시에 모스끄바와 레닌그라드는 심하게 공습을 당할 것이고 낙하산부대들이 국경도시들에 착륙할 것이다…”4)

이 경우에서, 우리가 보론뜨소프의 편지 전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흐루쇼프가 고의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흐루쇼프는 이 편지에 대한 꾸즈네뜨소프(Kuznetsov) 해군대장의 평가를 생략했는데, 그것은 편지의 전체적인 의미를 바꾸어버린다. 흐루쇼프는, 해군이 이것은 쏘련 지도자들에게 혼동을 줄 의도를 가진 거짓정보였다고 결정을 내렸던 사실을 그의 청중들에게 고의로 감추었다! (부록을 보라)

보론뜨소프의 편지에 대한 흐루쇼프의 정직하지 못한 언급은 분명히 그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뽀스뻴로프 보고서에서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1956년 2월 18일 흐루쇼프 연설의 뽀스뻴로프-아리스또프의 초고에서나 그 연설초고에 대한 1956년 2월 19일의 흐루쇼프의 추가에서나 언급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어떻게 누구로부터 흐루쇼프가 그 편지를 얻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Doklad Khrushcheba≫의 편집자들은 그것을 재인쇄하지 않았고, 혹은 원본이 어디에서 출판되었는지도 확인하지 않았고, 혹은 어떤 방법으로든 그것에 관해 토론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 편지의 원본에 대해 모르고 있었을 수는 아마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요 군사잡지인 ≪Voenno-Istoricheskii Zhurnal≫ (NO. 2, 1992, 39-40)에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제르가 “쏘비에뜨 시민”으로 명확하게 확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보제르”를 독일 나찌 친위대 내부의 쏘비에뜨 스파이 슐츠 보이센(Schulze Boysen)과 동일시 한다.

마치 그들은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흐루쇼프의 거짓말을 은폐하기를 원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소위 권위 있다는 책의 편집자들이 고의적으로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론뜨소프의 편지와 같은 예들은, 비밀연설에서 왜 흐루쇼프가 거짓말을 하는지 그 가능한 동기들을 조사해야 할 필요를 우리에게 제기한다.

 

32. 독일군인

“비밀연설”에서, 곧바로 흐루쇼프는 “경고들”이라는 이 주제로 되돌아왔다:

다음과 같은 사실이 역시 알려져 있다: 히틀러 군대에 의한 쏘련 영토의 침략 전날 밤에, 어떤 한 독일 시민이 우리의 국경을 건너와서 독일군들이 6월 22일 밤 3시에 쏘련에 대한 공격개시명령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스딸린은 이것에 관한 정보를 즉시 받았지만, 심지어 이 경고조차 무시되었다.

흐루쇼프의 이 진술은 역시 거짓이다. 최근까지 비밀이었던 보론뜨소프의 편지와는 달리 독일군인의 이야기는 흐루쇼프의 청중들 속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문제의 그 군인은 알프레드 리스코우(Alfred Liskow)였다. 그의 경고는 결코 무시되지 않았다. 그는 6월 21일 오후 9시에 탈영을 했고, 6월 22일 오전 3시 10분에 전화로 보고되었는데, 이때는 나찌 침입 40분 전이었다. 그러므로 흐루쇼프가 말했던 것처럼, 스딸린은 “즉시 보고를” 받지는 않았고 그가 그것을 “무시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역시 없다. 리스코우의 소대장인 슐츠(Shulz) 중위는 그의 부하들에게 임박한 침략의 “저녁을 향하여”(pod vecherom)에 대하여 말을 했었다.

리스코우는 모스크바로 보내졌다. 1941년 6월 27일 그의 이야기가 쁘라브다(Pravda)에 실렸다.5) 그의 이야기가 담긴 소책자, 사진, 쏘비에트 측으로 탈영하라는 독일군에 대한 호소문이 만들어졌다. 한 설명에 의하면 한 단위의 (쏘련: 역자) 부대가 (독일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역자) 즉시 다리를 파괴하고 방어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몇 시간 후 독일의 공격으로 모두 몰살당했다.6)

1960년에 쓰여진 그의 회고록에서, 흐루쇼프 자신은 독일군인의 경고가 무시되었다는 주장을 반복하지 않았다.

 

33. 처형된 사령관들

흐루쇼프:

스딸린의 의심 때문에 그리고 중상모략을 통하여 1937년―1941년 사이에 많은 군사령관들과 정치 일꾼들은 쓰딸린에 의해 몰살당했고, 이는 특히 전쟁 초기에 매우 비통한 결과들을 초래했다. 이 기간 동안, 탄압은 말 그대로 중대와 대대 지휘관 수준에서부터 고위 군 간부들까지 확대되면서 시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 스페인과 극동에서 군사적인 경험을 축적했던 지도자들이 거의 완벽하게 청산되었다.

흐루쇼프는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다음과 같은 ― 이후에 그와 다른 사람들이 주장했던 ― 내용들을 암시했다:

• 1937년 6월 11일 육군 원수 뚜하체프스끼(Tukhachevsky)와 그와 함께 고발당해 처형당한 일곱 명의 다른 사령관들은 무죄이다 ― 그들은 정부를 전복할 음모를 꾸미고 독일과 일본을 위해 간첩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었다.

• 너무나도 많은 군사령관들이 처형되거나 해임되었기 때문에 쏘련의 군사적 준비는 심하게 피해를 입었다. 처형되거나 해임된 군지휘관들은, 그들을 대치한 사람들에 비해서, 더욱 교육이 잘되어 있었고 군사적 경험이 더 많았다.

조사는 이 진술들의 오류를 입증했다. 사실들은 완전히 다르다.

1. 쏘련의 종말 이후, 뚜하체프스끼와 다른 사령관들이 혐의대로 유죄였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많은 양의 증거들이 출판되었다. 흐루쇼프 시대 이후로 이러한 사령관들은 쏘련에서 그리고 쏘련 이후의 현재의 러시아에서 영웅으로 간주되어왔다. 이것과 1936년-1938년 사이의 재판과 조사에 대한 자료들이 오늘날 보관되어 있는, 대통령 기록보관소를 관리하는 정부는 단지 이 문서들의 적은 부분들만 공개했고, 관변 역사학자들은 여전히 이 사령관들이 유죄였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나 심지어 이 적은 문서들은 그들이 유죄였다는 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보여준다. 예를 들어, 최근에 출판된(2006년 2월) 1939년 4월 26일의 자백-심문에서 예조프는 군사적 음모들에 가담하고 있는 세 개의 독립된 부분을 완전히 확인시켜주었다: 육군원수 A. I. 예고로프(A. I. Egorov)가 이끌었던 “주요 군사 지도자들”로 구성된 그룹 하나; 가마르니끄(Gamarnik), 야끼르(Iakir)와 우보레비치(Uborevich)가 이끌었던 뜨로츠끼주의자 그룹 하나; 뚜하체프스끼가 이끌었던 “장교들의 보나파르트주의자 그룹” 하나.7)

자신의 부정직함을 희석시키기 위해, 흐루쇼프는 1957년 뚜하체프스끼와 다른 사람들 대부분을 “복권”시켜주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1962년까지 그들의 유죄문제를 조사할 위원회를 설치하지 않았다.8)

2. 흐루쇼프와 흐루쇼프 시대 이후에 나온 반공주의 역사학자들은 1937년—1938년 사이 처형되고 해임되었던 군사령관들의 숫자와 비율을 엄청나게 과장했다. 이 주제에 대해 훌륭한 연구들이 흐루쇼프 시대에 존재했고, 오늘날까지 이 주제에 대한 좋은 연구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처형되고, 체포되고, 해임된 장교들을 대체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승진시킨 결과 군사훈련과 심지어 전쟁 경험의 수준 ― 적어도 제1차 세계대전에서 경험을 한 ― 은 증가했다.

이 주제들에 관한 최근의 러시아 출판물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요약들은 다음과 같은 곳에 올라와 있다:

• Gerasimov, G. I. “Destvitel’noe vliyanie repressy 1937-1938 gg. Na ofitserskiy korpus RKKA. Rossiskiy Istoricheskiy Zhurnal No. 1, 1999. Also at http://www.hrono.ru/statti/2001/rkka_repr.html

• Pykhalov, Igor’. Velikaya Obolgannaya Voyna. Moscow: “Yauza”, “Eksmo”, 2005 Ch. 2: “Byla li ‘Obezglavlena’ Krasnaya Armiya?” Also at http://militara.lib.ru/research/pyhalov_i/02.html

육군원수 꼬네프(Konev)는, 1965년 꼰스딴띤 시모노프(Konstantin Simono-v)와 대화를 하면서, 흐루쇼프에게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흐루쇼프 자신은 끼에프(우끄라이나) 군사지구에서 대부분의 사령관들을 “몰살”시킨 데 대해 직접적인 책임이 있었다. 볼꼬고노프(Volkogo-nov)는 1938년 3월 날짜로 된 흐루쇼프의 지시를 인용한다. 러시아어로 편집된 긴 판본이 여기에 번역되어 있다 (부록을 보라); 훨씬 더 짧은 판본은 영어로 편집되어 있는데, 드미뜨리 A. 볼꼬고노프(Dmitrii A. Volkogonov, ≪Stalin: T-riumph and Tragedy.≫ (NY: Grove Weidenfeld, 1991), P. 329.를 보라.

34. 전쟁초기의 스딸린의 “전의 상실”

흐루쇼프:

전쟁초기에 심각한 재앙과 패배를 겪으며,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스딸린이 절망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그 시기의 한 연설에서 그는 말했다:

“레닌이 창조했었던 그 모든 것을 우리는 영원히 잃어버렸다”

이 연설 후에 스딸린은 오랫 동안 사실상 전쟁 작전을 지시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완전한 거짓말이고, 그리고 흐루쇼프는 그것을 알고 있어야 했다. 전쟁초기의 수주일 동안에(그리고 그 이후에도) 스딸린과 함께 일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고위직에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흐루쇼프 자신은 그 당시의 모든 시기 동안 우끄라이나에 있었다. 그래서 스딸린이 말했거나 행동했던 것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었다.

스딸린의 사무실에 출입하며 같이 사업을 추진하던 사람들의 업무일지가 현재 출판되어 있다. 전쟁의 바로 첫날부터 스딸린이 극도로 활동적이었음을 업무일지는 보여준다. 물론 그 자료를 흐루쇼프는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감추었다: 역자). 1941년 6월 21-28일의 업무일지는 ≪Istoricheskii Arkhiv≫ No.2, 1996, pp. 51-54에 출판되었고, 스딸린의 지속적인 활동을 문서로 입증하고 있다. 우리는 손으로 쓴 원본의 팩시밀리 복사본을 온라인에 올려 놓았다.9)

육군원수 쥬꼬프는 스딸린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훔친 것이 적발당하여, 스딸린은 전쟁 후 그를 강등시켰다. 쥬꼬프는 1957년 흐루쇼프가 “스딸린주의자” 말렌꼬프, 몰로또프, 까가노비치를 축출했을 때 그를 지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쥬꼬프는 스딸린에 대해 커다란 존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회고록에서 흐루쇼프의 주장을 반박했다.

꼬민떼른의 불가리아 대표인 게오르기 디미뜨로프(Georgi Dimitrov)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1941년 6월 22일 아침 7시에 끄레믈린에 소환되어 갔을 때, 거기에는 뽀스끄레비쉐프(Poskrebyshev, 스딸린의 비서), 육군원수 띠모쉔꼬(Timoshenko), 해군제독 꾸즈네뜨소프(Kuznetsov), 쁘라브다 편집인이며 군대의 정치위원회 수장인 레프 메끌리스(Lev Mekhlis), 내무인민위원회 수장인 베리아가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스딸린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놀라운 차분함, 굳센 결의, 자신감.”10)

스딸린이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흐루쇼프의 거짓말을 돕기 위하여, 냉전시기의 스딸린 전기작가들은 6월 29일, 30일의 업무일지에는 스딸린의 사무실에 들어간 방문자가 없다는 사실을 포착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때 스딸린이 정신적으로 무너져버렸음이 틀임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심지어 쏘비에뜨 반체제 역사가이고 맹렬한 반(anti)-스딸린주의자인 로이 메드베데프(Roi Medvedev)조차도 이것을 거짓말이라고 한다. 흐루쇼프의 주장은 “완전한 위조다”라고 메드베데프는 말한다11). 그러나 조나단 루이스(Jonath-an Lewis)와 필립 화이트헤드(Phillip Whitehead) (1990), 앨런 블록(Alan B-ullock)(1991)의 스딸린 전기들과 제2차세계대전에 관한 옥스퍼드 백과사전(1995)에는 흐루쇼프의 주장이 나타난다.

스딸린은 6월 22일부터, 29일과 30일을 포함하여 계속 매우 활동적이었다. 6월 29일에는 띠모쉔꼬와 쥬꼬프를 포함한 장군들과 쓰딸린과의 유명한 논쟁이 일어났다. 미꼬얀(Mikoian)은 이것을 꾸마네프(G.A. Kumanev)에게 설명했다(≪Riadom so Stalinym≫, pp. 28-29). 역시 6월 29일 스딸린은 빨치산 전쟁에 관하여 중요한 지령을 정식화하고 결재했다. 최고 쏘비에뜨, 인민위원회, 당중앙위원회가 국가방어위원회를 형성한다는 법령이 발표되었다.

드미뜨리 볼꼬고노프(Dmitri Volkogonov) 장군과 빠벨 수도쁠라또프(Pavel Sudoplatov)장군은 흐루쇼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데에 동의 했다. 두 사람 모두 스딸린에게 적대적이었고, 1990년대에 그들이 쓴 책들에서 볼꼬고노프는 극도로 적대적이었다.

 

35. 무능한 지휘관 스딸린

흐루쇼프:

스딸린은 전선에서 전개되는 실제 정세를 이해하는 것과 지극히 거리가 멀었다. 이것은 당연한데, 왜냐하면 애국전쟁 전시기 동안, 어떠한 전선도 방문한 적이 없고, 전선의 정세가 안정된 시기에 모쯔하이끄(Mozhaik) 고속도로에 잠깐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해방된 도시도 방문한 적이 없다. 온갖 종류의 환상으로 가득찬 많은 문학작품들과 수많은 그림들이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역자) 사태를 칭송하기 위해 바쳐졌다. 동시에, 스딸린은 작전을 간섭하고 있었고, 주어진 전선의 실제 정세를 고려하지 않아 도움이 되지 않고 거대한 인적 손실을 초래할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흐루쇼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반면, 흐루쇼프의 실각 이후, 쥬꼬프 원수는 스딸린이 지극히 유능한 군사지도자라고 생각했다라고 저술했다. 바실레프스끼(Vasilevsky) 원수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흐루쇼프의 이 부분의 서술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면서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골로바노프(Golovanov) 원수는 스딸린을 최고의 능력을 가진 지휘관이라고 말했다.

 

36. 1942년 하르꼬프(Khar’kov)

흐루쇼프:

이 문제와 관련하여, 스딸린이 전선에서의 작전을 어떻게 지휘했는가를 보여주는 특징적인 하나의 사실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대회장에 바그라먄(Bagramian) 원수가 출석해 있다. 그는 일전에 서부전선 사령부의 작전참모였고, 내가 말하려는 것을 확증해줄 수 있다. 하르꼬프 지역에서 예외적으로 심각한 정세가 우리 군대에 전개되었을 때…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우리가 예상했었던 최악의 것이었다. 독일군은 우리 군대의 집결지들을 포위했고, 그 결과 우리는 수십만의 군대를 잃었다. 이것이 스딸린의 군사적 “천재”이다: 군사적 “천재”가 우리에게 치르게 했었던 것은 이런 것이다.

이것은 틀릴 뿐만 아니라 ― 대부분의 장군들은 스딸린을 비난하지 않는다 ― 몇몇 사람들은 흐루쇼프 자신이 비난받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라는 주제에 대한 기념비적인 글에서, 저자 세르게이 꼰스딴띠노프(Sergei Konstantinov)는 스딸린에 대한 흐루쇼프의 언급에 대한 많은 군사지도자의 반응을 요약했다. (부록을 보라) 학술원 회원 삼쏘노프(A.M. Samsonov)에 따르면 쥬꼬프는 흐루쇼프의 설명에 동의하지 않았다. 쥬꼬프는 회고록에서 스딸린을 비난하기는 했지만, 오직 부분적으로만 비난했다.12)

우리가 본 것처럼(위의 35번과 부록을 보라), 바실레프스끼 원수는 하르꼬프 방어에 대한 흐루쇼프의 언급을 직접적으로 거짓말이라고 했다. 자신의 무기들을 어떻게 만들어내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조언과 로켓발사기 견본과 설계도가 흐루쇼프와 끼르뽀노스(kirponos)장군에게 주어졌다고 그는 말한다. 오류는 사실상 스딸린에게가 아니라 흐루쇼프에게 있었다고 바실레프스끼는 말한다. 역사가 바딤 꼬쯔히노프(Vadim Kozhinov)는 흐루쇼프가 이 이야기를 말렌꼬프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해서 이용했다고 지적한다13). 또한 이미 3년 동안 우끄라이나 서기장으로서, 흐루쇼프는 사전에 확실하게 총을 준비했어야 했다는, 분명한 관점을 회피하기 위해 이용했다.

흐루쇼프의 축출 이후 발행된 ≪위대한 애국전쟁에 관한 짧은 역사(The Sh-ort History of the Great Patriotic War)≫ 1970년 판, pp. 164-5)에서는 이러한 관점을 견지하고, 스딸린이나 국가방위위원회가 아니라 전선의 지휘관을 비난한다. 이것은, 뽀르뚜갈스끼(Portugalskii) 등등이 저술한 띠모쉔꼬 전기를 포함하여 많은 자료들에서 인용하고 있는 1942년 6월 26일 스딸린의 편지와 내용이 일치한다. 그곳에서는 바그라먄뿐만 아니라 띠모쉔꼬와 흐루쇼프 자신을 비난한다.

“비밀연설” 앞부분에서, 흐루쇼프는 “이러한 생각에 반대하거나 혹은 자신의 관점과 입장의 올바름을 입증하려 시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지도부로부터 제거되고 이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절멸을 당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흐루쇼프는 심지어 그것에 대한 단 하나의 예도 제시하지 않았다. 띠모쉔꼬 원수는 17년, 흐루쇼프는 18년, 바그라먄 원수는 29년 만큼 스딸린보다 오래 살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관점“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아무도 처벌을 받지 않았고, 더군다나 “절멸”되지도 않았다.

스딸린에게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드미뜨리 볼꼬고노프는, 흐루쇼프가 “비밀연설”에서 세월이 매우 많이 흐른 뒤라 잘못 기억했거나, 혹은 단지 거짓말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시사한다.

 

37. 스딸린은 지구본을 가지고 군사작전들을 계획했다

흐루쇼프:

나는 바실레프스끼에게 전화를 해서 부탁했다: “알렉산더 미하일로비치(Alexander Mikhailovich14)), 지도를 가져가요” ― 바실레프스끼는 여기에 출석해 있다 ― “그리고 스딸린 동지에게 전개되고 있는 전황을 보여줘요.” 스딸린이 지구본을 가지고 작전들을 계획한 것을 우리는 지적해야 한다. (장내가 술렁인다.) 그렇다, 동지들, 그는 지구본을 가지고 그 위에서 전선을 추적하곤 했다. 나는 바실레프스끼 동지에게 말했다: “지도 위에서 전황을 그에게 보여줘요..”

흐루쇼프의 연설 전체에서, 이것은 아마도 가장 명백한 거짓말이다. 이 발언을 옹호한 사람은 여지껏 아무도 없다. 많은 권위자들이 이를 논박하고, 몇몇은 분개한다. 몰로또프뿐만 아니라 군사 지도자들로부터의 인용문을 독자들에게 권한다.

 

38. 스딸린은 쥬꼬프를 경시했다

흐루쇼프:

스딸린은 군사 지도자로서 쥬꼬프 동지를 평가하는 데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그는 종종 쥬꼬프에 대한 나의 견해를 물었다. 그때 나는 대답했다: “나는 오래 동안 쥬꼬프를 알고 지내고 있다; 그는 훌륭한 장군이고 훌륭한 군사 지도자이다.”

전쟁 후에 스딸린은 쥬꼬프에 대해 온갖 종류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당신은 쥬꼬프를 칭찬했다. 그러나 그는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전선에서의 개개의 작전 전에 쥬꼬프는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하곤 했다고 한다: 그는 흙을 한 줌 집어서 냄새를 맡으며 말하곤 했다. ‘우리는 공격을 시작할 수 있다’, 혹은 그 반대로 ‘계획했던 작전은 수행될 수 없다.’” 나는 당시 말했다. “스딸린 동지, 나는 누가 그런 말을 지어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쥬꼬프 원수의 군사적 재능과 역할을 최소화할 목적으로 스딸린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지어냈을 가능성이 있다.

스딸린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다른 어느 누구도 듣지 못했다. 여러 저자들이 인용한 쥬꼬프 자신의 언급에 의하면, 스딸린은 자신을 강등시켰지만, 결코 모욕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주꼬프의 언급은 아마도 흐루쇼프의 이 부분에 대한 직접적인 질책인데, 왜냐하면 주꼬프가 그런 말을 한 어떤 다른 이유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전쟁 동안 독일군에 의해 막대하게 파괴된 국가를 재건하는 데 쓰여져야 할 독일전쟁의 전리품을, 쥬꼬프가 대규모로 훔치고 있었다는 것이 전쟁 후에 적발되었을 때, 스딸린은 실제로 주꼬프를 강등시켰다.15) 모든 사람이 전후 쥬꼬프의 강등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러나 그 이유를 상세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흐루쇼프는 아마도 여기서 쥬꼬프에게 알랑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후 수년 동안, 투표를 통해서 자신을 직책에서 몰아내려는 “스딸린주의자들”인 말렌꼬프, 몰로또프, 까가노비치, 쉐삘로프를 물리치는 데 도움을 얻고자, 쥬꼬프가 필요했다. (5장 끝) <노사과연>


1) 1941 god. Dokumenty, V. 2-kh kn. Kn. 1. Moscow, 1998, pp. 661-664. 문서는 “Ukazanie Shtaba Operativnogo Rukovodstva O Meropriiatiiakh Dezinformat-sii.”이다.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은 주소에 올려놓았다. http://chss.montclair.edu/english/furr/research/germandisinfo. html

2) 흐루쇼프가 여기에서 직접 그 의문에 관하여 발표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 붉은 군대(Red Army)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가장 큰 패배로 고통 받았고, 6월 22일 후 독일군들이 쏘련으로 가장 성공적 침공을 수행했던 — 서부전선의 사령관 드미뜨리 빠블로프(Dmitri Pavlov) 장군이 사실 독일군에게 이익을 주는 음모적인 패배에 대해 유죄였다는 좋은 증거가 지금 출판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 의문에 대하여 몇 가지 인용들과 전기문들이 그곳의 러시아어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3) 1941 god v 2-kh knigakh. Kniga pervaia (Moscow:MFD, 1998) p. 154.

4) “22 iiunia 1941 goda. Moglo li vse byt’ po-inomu?” (“June 22, 1941: Coul-d it have all been otherwise?”), Krasnaia Zvezda June 16 2001. Online at

http://www.redstar.ru/2001/06/16_06/4_01.html

5)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은 주소에 올려놓았다.

http://chss.montclair.edu/english/furr/research/liskowpravda062741.pdf

6) 역자주: 리스코우의 경고를 받고, 독일 침략에 대응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전선의 상황을 서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7) 나는 에조프의 이 자백-심문을 다음과 같은 주소에 올려놓았다.

http://chss.montclair.edu/english/furr/research/ezov042639eng.html (Russian text:../ezovru.hyml). 그것에 대한 완전한 참고문헌상의 자료는 그곳에 있는 기사의 맨 앞에 있다.

8) 뚜하체프스끼(Tukhachevsky)와 그와 함께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되었던 다른 사령관들이 혐의대로 유죄였다는 증거들은 엄청나게 많이 있다. 저자와 모스끄바의 역사학자인 블라디미르 L. 보브로프(Vladimir L. Bobrov)는 전체적인 “뚜하체프스끼 사건”의 의문에 관하여 장기간의 연구를 준비하고 있다.

9) 이 자료들은 http://www.hrono.ru/libris/stalin/16-13.html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고르 삐하로프(Igor Pykhalov)의 저서 ≪중상모략을 당한 위대한 전쟁(Velikaya Obolgannaya Voina)≫의 10장 “스딸린의 무기력하게 무너졌는가? (스딸린은 굴복하고 말았는가?)”에서 이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온라인에는 http://militera.lib.ru/research/pyhaiov_i/10.html에 있다.

원본복사본에 대한 팩시밀리본은 http://chss.montclair.edu/english/furr/research/stalinvisitors41.pdf에 있다.

≪Istoricheskii Arkhiv≫ No.2, 1996, pp.의 해당 페이지들은 http://chss.montclair.edu/english/furr/research/stalinvisitors41_istarkh96.pdf에 있다.

10) The Diary of Georgi Dimitrov, ed. Ivo Banac (Yale u.p., 2003), p. 166.

11) R. Medvedev, Z. Medvedev. The Unkown Stalin (Woodstock, NY: The Overlook Press, 2003), p. 242.

12) 그렇지만 쥬꼬프는 스딸린에게 매우 화가 났었다 ― 스딸린은 그가 독일 전리품을 품쳤다는 이유로 그를 강등시켰다. 이것은 ≪Voennie Arkhivy≫ 1993, pp. 175 ff에 충분히 기록되어 있다: 쥬꼬프의 자백에 대해서는 pp. 241-244를 보라. 흐루쇼프는 이것을 알았고, 그것을 무효로 했는데, 의문의 여지없이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13) Vadim Kozhinov, Rossiia. VekⅩⅩ(1939-1964). Moscow: Algoritm, 1999, p.75. 유리 에멜리아노프(IUrii Emel’ianov)는 “MifⅩⅩ S’ezda”. Solo No. 3,2000. Cf.에서 같은 내용 더 많이 언급한다. http://stalinism.newmail.ru/emelian2.htm

14) 역자주: 바실레프스끼의 전체 이름이 알렉산더 미하일로비치 바실레프스끼(Alexander Mikhailovich Vasilevsky)이다.

15) 자세한 내용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공식적인 잡지 Voenniye Arkhivy Rossii 1, 1933, pp. 175-245.에 발표되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잡지의 다른 호들은 없다. 이 특별한 페이지의 팩시밀리는 다음 주소에서 받아볼 수 있다: http://chss.montclair.edu/english/furr/research/zhukovtheft4648_var9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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