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배반당한 사회주의: 쏘련 붕괴의 배후(5)

로저 키란(Roger Keeran)과 토마스 케니(Thomas Kenny)

번역: 편집부

 

[차례]

서문

1. 서론

2. 쏘련 정치에서의 두 가지 경향

3. 제2경제

4. 약속과 예언, 1985-86

5. 전환점, 1987-88

6. 위기와 붕괴

7. 결론과 암시

8. 끝 맺음말 – 쏘련 붕괴의 설명들에 대한 비판

 

 

 

 

 

 

 

3. 제2경제 ― 하

사회화된 공식 경제 밖에서 일어났던 수단을 가리지 않는 대량의 부정한 돈벌이가 쏘비에뜨 몰락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첫째, 1980년대에 쏘련이 직면한 경제적, 정치적 문제를 발생시키고 악화시켜 개혁의 필요성을 야기한 원인이었다. 둘째, 고르바쵸프가 채택한 사상과 정책의 경제적 토대로 작용했다. 결국 이로 인해 쏘비에뜨 사회주의는 불행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고르바쵸프의 정책이) 표면적으로는 제2경제의 양성화에 이바지하고 심지어 안정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제2경제는 제1경제가 만족시키지 못했던 소비욕구를 충족시켰고 따라서 사회주의에서 재화의 양과 질에 대한 불만을 어느 정도 줄였다. 또한 개인의 기업심(企業心)에 수지맞는 배출구를 제공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체제를 직접적으로 거역할 수도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쏘비에뜨 당국은 제2경제에 신경 쓰지 않았고 제2경제의 불법행위를 근절하지 못했다. 이전에 언급했듯이, 쏘비에뜨 경제 교과서는 제2경제를 무시했다. <고스쁠란(Gosplan) 과학・경제 연구소>(꼬리아지기가 연구를 수행 한 곳) 소장이었던 발레리 루트가이저(Valery Rutgaizer)는 쏘련의 제2경제를 다룬 출판물이 1980년대 초반까지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했다.1) 쏘련 당국이 제2경제를 막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로스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60년대를 지나면서 쏘비에뜨의 그림자 경제는 이미 제도적으로 성숙했고, 그 범위와 규모가 눈에 띄게 커졌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흐루쇼프가 사형 제도를 부활시킬 정도로 격렬한 운동의 표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이전과 이후의 모든 ‘경제 범죄’를 반대한 운동과 마찬가지로, 불법 행위의 꾸준하고 빠른 증가를 막지 못했다. 오히려 그림자 경제는 비록 무언의 장려는 아닐지라도 점잖은 무시 때문에 브레즈네프(1964-82)하에서 범위를 넓히고 성장하여 번성하였다.”2)

 

점잖은 무시라는 증후는 명백한 불법적인 경제 활동에 대한 기소가 거의 없었던 것에서 나타났다. 1980년대 초, 투기 범죄(높은 가격으로 재판매하는)는 보고된 전체 범죄의 2%에 불과했다. 추산에 따르면, 실제 투기는 100배는 더 많았다.3) 돌이켜 생각해 보면, 쏘비에뜨 지도부가 실수한 것 중 불법적인 경제활동에 대해 무관심한 것만큼 그렇게까지 잘못된 것은 없었다. 적은 것이든, 일시적인 것이든 간에 쏘비에뜨 사회가 제2경제에서 얻은 모든 이득보다 그 대가가 훨씬 켰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제2경제가 제1경제를 훼손한 것이다. 제2경제는 일부 소비자의 욕구를 만족시키고 일정한 불만을 누그러트리는 동시에 욕구를 자극하고 불만을 증가시켰다. 꼬리아기나는 “제2경제는 소비시장의 부족을 완화하는 동시에 소비시장의 성장을 촉진시켰다”고 말하였다. 소비시장의 부족은 더 많은 경제범죄를 자극하고 “사회의 경제 및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했다.4) 더욱이 불법 경제가 커질수록 합법적인 경제 행위와 더 많이 충돌했다. 제2경제가 사회주의 영역의 시간과 물질을 훔치게 되자 사회주의의 효율성은 약화되었다. 아렉세예브는 “암시장으로 투입과 산출이 전용(轉用)되자 적어도 일부 기업들은 공식적인 실적이 떨어졌음에 틀림없다”고 말했다.5) 더 나아가, 제2경제는 경제계획의 뿌리를 침식했다. 만일 기업이 비공식 구매나 거래를 통해 자원의 잘못된 할당을 보완한다면, 계획자들은 미래의 할당량을 수정할 이유가 없게 된다. 제2경제의 피드백 메커니즘을 약화시키거나 파괴함으로써, 계획자들이 “매우 왜곡된 경제 지도로 쏘비에뜨 경제를 지휘하도록” 강요한 것이다.6) 결국 개인적 돈벌이가 소득 불평등과 이에 따른 질투와 분노를 증가시켰다. 이러한 모든 것을 볼 때, 제2경제는 쏘련 경제에 문제를 야기하고 악화시켰다.

 

제2경제가 공산당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부패다. 일부 당 간부들의 부패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부하린과 흐루쇼프(다소의 손상은 입었지만)를 막아낸 당이 고르바쵸프를 극복하지 못한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부하린의 사상적 기반인 농민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당의 부패를 요구하지 않았지만, 제2경제의 기업가들은 요구했다. 간단히 말해서 불법적인 생산과 판매가 살아남고 번성하기 위해서 일부 당 간부와 정부 관리들에게 건네는 뇌물이 필요했고, 이러한 방식의 생산과 판매가 더욱 공고화되고 퍼지게 되자 더 많은 부패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시미스는어떠한 지하 기업도 정부 관리를 매수하지 않고는 만들어 질 수 없다. 한 달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7)

 

그로스만은 1979년에 부정부패 즉 “쏘비에뜨 관리들의 뇌물 수수”가 “극심하게 만연(蔓延)했고”, “상하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공식적 권력층”에 걸쳐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이전 쏘비에뜨 검찰이 실제 사례로 든 가장 하위층의 부패는 야채 저장창고의 책임자가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 해당 구역의 몇몇 당 간부와 정부 지배인에게 정기적으로 상납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8) 최고위층에서의 부패는 1970년대에서 1980년 초에 우즈베키스딴의 당 최고위와 정부관리 등이 수십억 루블을 착복하기 위해 면화작물의 크기를 “대범하고 교묘하게 조작한” 소위 면화 부정비리와 같은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브레즈네프의 사위를 포함해 “수천 명이 매수되었다.”9) 부정한 돈벌이의 종류는 지역에 따라 다양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캐비아, 그루지야의 와인과 보석, 발트해의 생선, 끼르기즈스딴의 고기. 그러나 어디서든 당의 부정부패를 필요로 하였다.10)

 

뇌물은 당의 최고위에까지 닿았다. 당국이 고인이 된 레닌그라드 당국자의 금고를 열었는데 그 속에서 프롤 꼬즐로프(Frol Kozlov) 소유의 값비싼 보석과 돈다발이 든 꾸러미를 발견하였다. 꼬즐로프는 흐루쇼프의 오른팔이자 부총리 겸 중앙 위원회 비서였는데 불명예 은퇴를 하였다. 보석과 돈다발은 불법 사업가들이 형사 고발되는 것을 막으려고 꼬즐로프의 영향력을 이용하기 위한 뇌물의 일부였다.11) 결국, 부패는 정점에 달했다. 1985년 체르넨꼬가 사망한 뒤 중앙위원회 위원들은 “지폐가 가득 찬 책상 서랍과 절반을 지폐로 채운 서기장 개인 비밀금고”를 발견했다.12)

 

쏘련의 고위 경찰간부인 알렉산드르 구로프(Alexander Gurov)는 흐루쇼프에서 고르바쵸프에 이르는 당내 부정부패의 확대는 불법 경제 및 조직적 범죄의 확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조직적 범죄는 1960년대 니끼따 흐루쇼프 권력기에 소위 해빙기라고 불렸던 쏘비에뜨 체제의 개방기가 되자마자 생겨나게 되었다. … 쓰딸린 체제하에서는 강력한 조직적 범죄 집단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 그 이후에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익힌 것은 약탈자의 도덕률이었다. 당연히 그것은 전적으로 [당] 관료의 이익을 위해 작동했다. 예를 들어, 이미 1974년에 당 고위 인사들이 포함된 무역 마피아가 모스크바에 있었다. 당시에 나를 포함해 어떤 사람이라도 그림자 경제의 위험에 대해 경고했었다면, 너그러운 사람은 웃었을 것이고 정부는 우리를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되었다. 정부가 그림자 경제를 용인한 것이다. 우리는 그 원인에 대해 고민해야만 한다. 조직적 범죄는 흐루쇼프 하에서 시작되어 브레즈네프 때 발전하였고, 고르바쵸프 시대에는 우리나라에서 실질적으로 매우 강력한 존재가 되었다.”13)

 

공산당의 여러 정치적 문제점은 부패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비록 모든 원인과 결과가 한 가지인 것은 아니지만, 당의 낮은 규율, 이념의 취약함, 형식주의, 냉소주의 및 정치력의 부재가 부패와 얽혀 있었다. 일부 공산당원과 정부 관리들은 부패로 인해 사적 기업에 중요한 지분을 갖게 되었다. 관리들은 사적인 상거래나 생산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을지라도, 사실 그들은 자신들만의 불법적 돈벌이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2경제가 쏘비에뜨 사회주의에 여러 문제를 야기하는 심각한 원인이 되었을 때,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도 똑같이 녹슬었고 문제가 심각했을지라도, 사회주의를 무너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 고르바쵸프에 와서 점점 더 제2경제 기업가들의 이익을 반영했고, 결국 사회주의는 무너졌다. 고르바쵸프가 1986년 이후 추구했던 방향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제2경제로부터 직접적으로 유래했다. 첫째로, 위에서 언급한 모든 이유들 때문에, 제2경제는 사회주의적 능률, 계획의 효과 그리고 당의 고결함에 커다란 냉소주의를 만들어냈고 확산시켰다. 고르바쵸프는 점점 이 냉소주의를 부당하게 이용하였고 심지어 부채질까지 하였다. 결국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둘째로, 신생 쁘띠 부르주아 계급이 나타남으로서, 제2경제는 사회주의를 삼켜버릴 사적 탐욕을 가진 계층을 사회주의 안에서 만들어냈다. 이들은 고르바쵸프의 시장 지향적이고 사유재산 추구 정책의 지지층이 되었다.

 

당 지도부는 이 계층의 이데올로기적 위험을 대개는 과소평가했다. 심지어 그러한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앞서 언급한 프롤 꼬즐로프의 사례는 자기만족적 위선에 경종을 울린 셈이다. 꼬즐로프가 자본가들을 보호하면서 비밀리에 자신의 주머니를 불려가던 바로 그 때, 그는 “어떠한 기회주의적인 경향도 당내에 번식할 수 있는 기반이 더 이상 쏘비에뜨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쏘비에뜨 제22차 총회에서 뻔뻔스럽게 말했다.14)

 

사회 전반에 걸쳐 불법적, 사적 돈벌이는 쁘띠 부르주아의 가치를 증진시키며 사회주의의 정당성을 훼손했다. 다른 한편 지하 경제는 기업가들을 위한 교육의 장이 되었고, 시장에 우호적인 대중 의식을 형성했으며, “시장개혁을 위한 여론을 끌어내는데 도움을 주었다.”15) 다른 한편으로는 지하경제 및 지하경제에서 비롯한 모든 것은 일부 사람들이 “사기 저하의 위기”라고 하는 현상을 불러왔다. 불법행위, 빼돌리기, 시간 속이기, 뇌물수수, 부정부패, 공공연한 블라뜨(blat, 연줄을 이용해서 비공식적으로 이익을 챙기는 것을 의미하는 러시아 속어―역자) 내지는 “경제 특혜”16) 그리고 불평등의 증가는 사회체제의 공정성에 대한 믿음을 근본적으로 훼손시켰다. 가장 품질이 좋은 상품은 암시장으로 흘러들어가 버리고 이로 인해 물자부족 현상이 가중되자 시스템의 공능(功能)에 대해 의문이 던져졌다. 이렇게 제2경제는 상반된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자본을 위한 제단을 만들어 내는 한편, 사회주의의 가치를 난도질 하였다. “경제적 불법과 부패의 만연이 쏘비에뜨 체제가 주민들에게 최소한의 물질적 급부(給付)을 주고 있는지 또는 사회주의 원칙과 규칙에 따라 사회주의 경제가 관리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고 그로스만은 말했다. 한편 “제2경제는 사회에서 돈의 힘을 길러” 공산당과 힘을 겨루게 되었다.17)

 

사회주의 안에서 반사회주의 사상과 가치관의 발전에 주목한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의 기원을 진단하거나 해결책을 모색하는데 있어서 그리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나중에 고르바쵸프의 주요 보좌관이기도 했던 게오그기 샤흐나자로프(Georgy Shakhnazarov)는 1978년 자신이 쓴 미래학적 에세이에서 “부와 그에 따르는 이익”을 위한 난투극에 진정한 근원을 두고 있는 “쁘띠 부르주아 사상의 속물근성”이 성장하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불평등과 계급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계급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쁘띠 부르주아 사고방식이 되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퇴보는 고립적인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 널리 퍼져있는 전염병 같은 것으로 사회 전반에 대한 침범을 의미한다.”고 특별히 언급했다.18)

 

샤흐나자로프가 1970년대 쁘띠 부르주아적 사고방식에 주목했다면, 1980년대 초에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신의 의제를 가진 이익집단으로 구체화되었다. 이것은 제2경제가 사회주의와 모순되는 사회구조, 이념의 물질적 기반으로서 역할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는 조직적 범죄의 세계였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반체제 인사, 소수민족 및 종교 운동가, 반대파, 망명자, 저항주의 작가와 예술가들 그리고 사미즈다뜨(samizdat) 출판물(쏘비에뜨의 비(반)합법 출판물-역자)”의 세계이다. 제2경제와 서구는 이와 같이 (사회주의를) 대체하고자 한 사회구조에 “많은 물질적 지원”을 제공했다. 특히 고르바쵸프 시기에 그랬다. 그들의 깃발에 새겨 넣은 것은 쁘띠 부르주아적 표어인 자유 즉 종교 선교의 자유, 이민의 자유, 일하지 않을 자유, 돈을 벌 수 있는 자유, 다른 사람을 착취할 수 있는 자유, 무엇이든 표현하고 출판할 자유이다. 역사가인 프레드릭 스타(S. Frederick Starr)에 의하면 “많은 분야에서 인가되지 않은 비공식 그룹과 네트워크가 생겨났다. 1980년대 중반에는 수만 개가 존재했으며, 일부는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설립되었지만 또 다른 일부는 공공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존재했다.” 이러한 단체들은 계급투쟁, 희생적 행위, 공민(公民)의 가치 또는 국제노동계급의 연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특권(freedom), 개인주의, 탐욕을 조장했다. 스타가 지적했듯이, “이 모든 동요는 1985년 고르바쵸프가 집권하기 전에 시작되었다.”19)

 

주목할 만한 예를 들자면 소끼르꼬(V. Sokirko)가 1981년에 설립하여 이끌었던 경제자유수호라는 단체이다. 경제자유수호는 제2경제의 합법화를 위하여 공공연한 캠페인을 벌였다. 특히 사적 기업 활동을 불법화한 러시아 쏘비에뜨 형법 제153조의 폐지를 위해 선동했다. 쏘련 최고 쏘비에뜨 법무위원회에 이 조항의 폐지를 요구했다. 경제자유수호는 이 조항으로 인해 생긴 사건들을 기록하고 편집자들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것을 폭로하는 저널을 발간했다. 또한 실제 사건을 가지고 모의재판을 벌였는데, 여기서는 배심원들이 당국이 유죄판결한 사람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고스쁠란(Gosplan, 쏘비에뜨의 국가계획위원회-역자)의 발레리 루트가이저에 의하면, 경제자유수호 운동은 심지어 기소를 멈추게 할 정도로 “제153조에 대한 일반대중의 불신임 분위기”를 조성하였다.20)

 

고르바쵸프가 집권하기 이전에 제2경제의 이념적 영향력이 공산당과 쏘비에뜨 정부 내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1980년대 초에 불법경제에 대한 두 가지 대조적인 접근법이 있었다. 하나는 안드로뽀프가 제2경제를 연구하기 위해 설립한 두 개의 연구소, 즉 쏘비에뜨 검찰청의 연구소와 쏘비에뜨 내무부의 연구소에서 우세한 접근법이었다. 이 두 기관은 개인의 노동을 두 가지 범주로 분류하였는데, 하나는 합법적이고 사회에 이익이 되는 노동이고 다른 하나는 불법적이며, 부당한 수입을 낳는 노동이다. 두 기관 모두 두 번째 노동인 “그림자 경제”를 사회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노동은 “합법적인 방식의 단점”과 법 집행 실패의 결과로 보았다. 따라서 “개인 노동에 대한 통제와 모니터링을 강화”하는 투쟁이 필요하고 보았다.21)

 

다른 접근법은 발레리 루트가이저가 이끄는 고스쁠란 과학・경제 연구소의 입장이다. 고르바쵸프가 결국 수용했던, 이 접근법은 그림자 경제의 대부분을 합법적이고 유용한 것으로 여겼다. 이 연구소는 이전의 불법적이던 사적 경제 활동을 합법화하기 위해 “경제 체제의 전환”을 목표로 하였다. 연구소 멤버들은 초기에 제2경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임대차계약의 활용과 생활협동조합을 준비할 것을 논의했고, 고르바쵸프는 이 행동방침을 따랐다. 이러한 준비는 사유화와 시장화를 향한 길에서 중간 정착지가 되었다.22)

 

과거의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1980년대 초에도 공산당은 여러 가지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 문제에 직면했다. 과거에도 앞으로 나아갈 길을 자본주의의 수용 또는 자본주의 사상과의 결합으로 보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 이 접근법은 숨겨진 채 잠재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쁘띠 부르주아 계층의 은밀한 성장과 당과 국가의 부패로 인해 드러났으며, 자본주의로, 자유시장으로, 사적이윤으로, 자유기업으로 그리고 부르주아의 “자유”를 향한 운동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의미에서 1987년 고르바쵸프의 우편향과 그 이후 쏘비에뜨의 해체는 역사적으로 부하린/흐루쇼프 정책과 제2경제의 신생 쁘띠 부르주아 계급이 결합한 산물이라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제2경제가 부르주아 사상의 토대를 제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 지층은 (사회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 것은 아니다. 잠재적 불만이라는 넓은 바다위에 떠 있었다. 사회주의의 성과는 도시화된 교육받은 거대한 인테리겐챠 층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화이트칼라로 정신노동자였다. 이 인테리겐챠 중 일부는 1950년대 이후로 시행된 임금 균등화로 불이익을 받았다고 느꼈다. 예를 들어 의사, 교사, 기술자 및 관리자의 소득은 대체로 숙련 노동자에 비해 낮았다. 여행 및 커뮤니케이션의 증가로 인해 인테리겐챠는 서양의 지식인보다 자신들이 낮은 생활수준에 있다고 느꼈다. 게다가 1980년대까지 인테리겐챠는 고위직에 과도한 세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공산당원은 적어도 절반이 인테리겐챠였고 지도부는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23)

 

2001년 러시아 연방 공산당 중앙 위원회(CPRF)의 빅또르 뜨루쉬꼬프(Victor Trushkov) 위원은 여기서 제시한 쏘비에뜨 붕괴에 대한 분석을 보완하는 견해를 제공했다. 뜨루쉬꼬프는 “세계 수준의 착취자들”이 존재하는 한 쏘비에뜨에서의 자본주의 복구라는 위험성이 항상 남아 있지만, “외부 압력”은 오직 “자본주의 복구를 욕망”하는 세력이 “사회주의 체제 내부”에서 발전했을 때에만 치명적 위협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한 세력이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80년대 실질적 무계급 사회라는 쏘비에뜨 영상(映像)”이 “현실과 너무나 동 떨어져 있었는지”를 인정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뜨루쉬꼬프는 두 개의 준(準) 부르주아 층이 형성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첫 번째 부르주아 층은 “영세 소매업 계통”이다. 이 소매상들은 “간신히 합법성”을 유지했고 국가에 속한 자원의 유용에 의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업을 하는 벽돌공, 택시운전사 그리고 소규모 생산자들 사이에선 이러한 영세 소매업이 비교적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두 번째 부르주아 층은 “사적 도매업”이다. 이는 유사 경제형태로 존재했는데 “경제적 힘은 [소매업에 비해]훨씬 더 켰다. … 일부 연구원들에 의하면 사적 도매업의 매출량이 국가적 수준이었다.” 1987-88년에 고르바쵸프가 소매업과 도매업을 합법화하기 시작했을 때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을 찾았고, 이로부터 훨씬 더 많은 시장화와 사유화에 대한 압력을 가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국가영역을 좀먹기 시작했다. 뜨루쉬꼬프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르바쵸프-야꼬블레프가 협잡하여 부르주아 방식을 도입하기 시작하자, [국가] 기구의 중요한 부분에 이미 사유 재산 형태로 활동하는 경쟁자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국가 재산을 착복할 특권적 지위(권력의 특권)를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24) 이러한 방식으로 제2경제와 고르바쵸프의 개혁은 사회주의 배반의 변증법에 불을 붙였다.

(다음 호에 계속)


1) Rutgaizer, 6.

2) Grossman, “Subverted Sovereignty” 31.

3) Alexeev, 255-256.

4) Treml and Alexeev, 238.

5) Alexeev, 260.

6) Alexeev, 261.

7) Simis, 179.

8) Congress(의회), Joint Economic Committee(공동 경제위원회), Soviet Economy in a Time of Change(변화하는 시대의 쏘비에뜨 경제), 그로스만의 “Notes on the Illegal Private Economy and Corruption(불법적인 사적 경제와 부패에 대한 비망록)”이라는 제목의 리포트, 96th Cong., 1st sess., 1979, Committee Print, p. 840-841.

9) Grossman, “Subverted Sovereignty,” 32.

10) Pryce-Jones, 51-55, 377-83.

11) Simis, 47-48.

12) Grossman, “Subverted Sovereignty,” Andrei Grachev(안드레이 그라체프)를 인용한 부분, 34.

13) Stephen Handelman(스테판 한델만), Comrade Criminal: Russia’s New Mafiya(악의 동료:러시아의 새로운 마피아)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5), 56.

14) John and Margrit Pittman(존과 마그리트 피트만), Peaceful Coexistence: Its Theory and Practice in the Soviet Union(평화공존: 쏘련의 이론과 실천)에서 재인용,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64), 69.

15) Alexeev, 261.

16) Alena V. Ledeneva, Russia’s Economy of Favour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17) Gregory Grossman, “The Second Economy of the USSR(쏘련의 제2경제),” Problems of Communism(공산주의의 제 문제) Vol. XXVI, No. 5 (September-October, 1977): 25-40.

18) Georgy Shakhnazarov, The Destiny of the World(세계의 운명) (Moscow: Progress, 1978), 121-122.

19) S. Frederic Starr(프레드릭 스타), “A Usable Past(유용한 과거),”, Alexander Dallin(알렉산더 달린)과 Gail W. Lapidus(게일 라피더스) 편집, The Soviet System from Crisis to Collapse(쏘비에뜨 체제의 위기에서 붕괴까지) (Boulder: Westview Press, 1995), 14-15.

20) Rutgaizer, 19-22.

21) Rutgaizer, 7, 10-13.

22) Rutgaizer, 7-10.

23) John Gooding(존 구딩), Socialism in Russia: Lenin and his Legacy(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레닌과 그의 유산, 1890-1991) (New York: Palgrave, 2002), 208.

24) Victor Trushkov(빅토르 뜨루쉬꼬프), “The Place of the Restoration of Capitalism in the Historic Process,(역사적 과정에서 자본주의 복구 지점)” International Correspondence(국제 통신) (English language edition), 2(2000), 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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