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10월 혁명과 러시아 공산주의자들 (중) ― 저서 ≪10월 혁명의 길에서≫의 서론

이오씨프 쓰딸린(Иосиф Сталин)

번역: 신재길(교육위원장)

 

 

 

 

<목차>

  1. 10월 혁명의 국내외 정세
  2. 10월 혁명의 두 가지 특징 ― 혹은 10월 혁명과 뜨로츠끼의 “영구”혁명론
  3. 볼셰비키가 10월 혁명 준비기에 취한 전술의 몇 가지 특징
  4. 세계혁명의 출발점과 전제조건으로서의 10월혁명

 

 

 

 

 


  1. 볼쉐비끼가 10월 혁명 준비기에 취한 전술의 몇 가지 특징

볼쉐비끼가 10월 혁명 준비기에 취한 전술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이 전술의 특히 중요한 몇 가지 특징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 특징들은 볼쉐비끼 전술을 다룬 대부분의 소책자에서 등한시되고 있다. 그래서 더욱 분명히 할 필요가 있겠다.

 

그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특징. 뜨로츠끼의 말을 듣다보면 10월 혁명을 준비하는 역사에는 단 두 시기 즉 정찰시기와 봉기시기만 있고 이외의 모든 것은 잘못된 주장에 기초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1917년의 4월 시위는 무엇이었던가? “예상보다 더 좌경적이었던 4월 시위는 대중의 정서 및 대중과 쏘비에뜨 다수파와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한 정찰(偵察)의 성격을 띤 공격이었다.” 그러면 1917년 7월 시위는 무엇이었던가? 뜨로츠끼의 견해는 “이번에도 사실상 운동의 새롭고 보다 높은 단계에서 보다 광범위하게 진행된 또 하나의 정찰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당의 요구로 조직된 1917년 6월 시위도 뜨로츠끼의 견해로는 응당 “정찰”이라 해야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볼쉐비끼는 이미 1917년 3월에 노동자 농민의 정치적 군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4월에도, 6월에도, 7월에도 이 군대를 봉기에 동원하지 않고 다만 “정찰”만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시의 “정찰 정보”가 유리한 “단서”를 제공하지 않은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직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런 생각은 우리당의 정치전술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고, 볼쉐비끼 혁명전술을 평범한 군사전술과 혼동한 것이다.

 

사실 이 모든 시위행진은 무엇보다 대중의 자연발생적 압력의 결과였다. 전쟁에 반대하는 대중의 격분이 거리로 터져 나온 결과였다.

 

사실 당시 당의 임무는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대중의 시위행진을 볼쉐비끼의 혁명적 슬로건에 따라 나가도록 방향을 정하고 지도하는 것이었다.

 

사실 1917년 3월에 볼쉐비끼는 정치적 군대가 없었으며 있을 수도 없었다. 다만 1917년 4월부터 10월의 기간에 있었던 계급투쟁과 충돌 과정에서 이와 같은 군대를 확보해 가고 있었다.(마침내 1917년 10월에 완료되었다.) 4월 시위행진, 6월과 7월 시위행진, 각 지역 및 시 두마 선거, 꼬르닐로프 반란에 대한 투쟁, 그리고 쏘비에뜨에서 승리하는 과정을 통하여 정치적 군대는 확립되었다. 정치군대는 군사군대와 다르다. 군 지휘부는 이미 준비된 군대를 가지고 전쟁에 나선다. 반면에 당은 투쟁과정 속에서, 계급충돌 속에서 군대를 형성한다. 대중이 스스로의 경험을 통하여 당의 슬로건과 정책이 옳다고 확신하는 그 만큼 군대는 형성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시위행진은 동시에 보이지 않던 세력관계를 드러내주어 정찰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정찰정보는 시위행진의 동기가 아니라 그 자연적 결과이다.

 

레닌은 10월의 봉기에 선행하는 사건들을 분석하고 그 사건들을 4월에서 7월에 일어난 사건들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의 정세는 이전의 4월 20-21일, 6월 9일, 7월 3일과는 전혀 다르다. 이전에 일어난 일은 자연 발생적 흥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당은 이러한 흥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거나(4월 20일), 평화적 형태에 제한하고자 애썼다(6월 9일과 7월 3일). 당시에는 아직 쏘비에뜨가 우리 편이 아니었다. 농민은 아직 리베르단-체르노프의 길에 기대를 걸고 있었고 볼쉐비끼의 길(봉기)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인민 대다수는 우리 편이 아니었고, 봉기는 시기상조였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제21권, p. 345를 보라) 1)

 

“정찰”만으로는 큰일을 해낼 수 없다.

 

문제는 분명히 “정찰”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당은 10월 혁명 준비기 동안 쭉 대중적 혁명운동의 자연발생적 고양에 의지하였다는 점,

2) 당은 자연발생적 고양에 의지하면서 동시에 운동에 대한 유일적 지도를 유지했다는 점,

3) 운동에 대한 유일적 지도로 인해 당은 10월 봉기를 위한 대중적인 정치적 군대를 쉽게 편성한 점,

4) 이런 정책으로 인해 하나의 당 즉 볼쉐비끼당의 지도하에서 10월 혁명의 모든 준비가 진행될 수 있었던 점,

5) 볼쉐비끼당이 10월 혁명의 준비를 진행함에 따라 10월 봉기의 결과 정권을 하나의 당 즉 볼쉐비끼당이 장악하였다는 점이다.

 

요컨대, 하나의 당 즉 공산당의 유일적 지도가 10월 혁명 준비의 기본요인이고, 10월 혁명의 특성이며, 10월 혁명 준비기의 볼쉐비끼가 취한 전술의 첫 번째 특징이다.

 

증명할 필요도 없이, 볼쉐비끼 전술의 이러한 특징이 없었다면 제국주의 환경 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승리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점에서 10월 혁명은 1871년의 프랑스 혁명보다 유리했다. 프랑스에서는 당시 공산당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두 개의 당이 혁명의 지도권을 양분하고 있었다.

 

둘째 특징. 이와 같이 10월 혁명의 준비는 하나의 당 즉 볼쉐비끼당의 지도하에 진행되었다. 그러면 이 지도는 어떻게 수행되었으며 어떤 노선에 따라 진행되었는가? 이 지도는 타협적 정당들을 고립시키는 노선에 따라 즉 사회혁명당과 멘쉐비끼를 고립시키는 노선에 따라 진행되었다. 혁명이 폭발하는 시기에는 타협적 정당이 가장 위험한 집단이다.

 

레닌주의의 기본적인 전술원칙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을 승인하는 것이다.

1) 혁명이 폭발하는 시기에는 타협적 정당들이 혁명의 적에 대한 사회적 지원세력으로 되는 가장 위험한 세력이라는 것,

2) 이 당들을 고립시키지 않고서는 적(짜르나 부르주아지)을 전복할 수 없다는 것,

3) 그러므로 혁명준비기의 주요한 예봉은 이러한 당들을 고립시키는 것에 돌려야 하며, 이러한 당에서 광범한 노동 대중을 떼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짜르와의 투쟁기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준비기(1905-1916년)에 짜리즘의 지원세력으로서 가장 위험한 세력은 자유주의적 군주주의 정당인 입헌민주당(Cadet)이었다. 왜냐면? 타협적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입헌민주당은 짜르와 인민의 다수인 전체농민과의 타협을 꾀하는 당이었다. 자연히 당은 입헌민주당에 주요타격 방향을 돌렸다. 입헌민주당을 고립시키지 않고서는 짜르에게서 농민을 분리시킬 수 없고, 짜르와 농민이 분리되지 않고는 혁명의 승리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볼쉐비끼 전략의 이러한 특징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볼쉐비끼가 지나친 “입헌민주당 공포증”에 걸려있다고 비난하였다. 볼쉐비끼의 입헌민주당과의 투쟁은 주된 적인 짜르에 대한 투쟁을 “가로 막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은 정당하지 않다. 이들은 볼쉐비끼 전략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볼쉐비끼 전략은 주된 적에 대한 승리를 쉽게 하고 앞당기기 위해 타협적 당을 고립시킬 것을 요구한 것이다.

증명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전략이 없었다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10월 혁명준비기에는 각종 투쟁세력의 무게중심이 새로운 지점으로 이동하였다. 짜르는 사라졌다. 입헌민주당은 타협 세력에서 제국주의 지배세력으로, 통치세력으로 전환되었다. 이제 투쟁은 짜르와 인민 사이가 아니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제국주의 지원세력으로서 가장 위험한 세력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당인 사회혁명당과 멘쉐비끼였다. 왜냐면? 당시 이 당들이 타협적 당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제국주의와 노동대중 사이에 타협을 꾀하고 있었다. 자연히 볼쉐비끼는 이들 당에 주요 타격 방향을 돌렸다. 이들 당을 고립시키지 않고서는 제국주의와 노동대중을 분리시킬 수 없고, 제국주의와 노동대중이 분리되지 않고는 쏘비에뜨 혁명이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볼쉐비끼 전략의 이러한 특징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볼쉐비끼가 사회혁명당과 멘쉐비끼를 “지나치게 증오하여” 주된 목적을 “망각”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10월 혁명 준비기 전체를 볼 때 오직 이와 같은 전술만이 볼쉐비끼가 10월 혁명의 승리를 보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말해 준다.

 

이 시기의 특징은 근로농민 대중이 가일층 혁명화된 것이다. 농민은 사회혁명당과 멘쉐비끼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났고 이들 당에서 이탈하여, 나라를 평화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하고 철저한 혁명세력인 프롤레타리아트 주위에 곧바로 결집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는 사회혁명당과 멘쉐비끼를 한편으로 하고 볼쉐비끼를 다른 편으로 하여 근로 농민 대중을 전취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이 투쟁의 운명은 연립내각 시기, 즉 께렌스끼 집권 시기에 결정 났다. 이 시기에 사회혁명당과 멘쉐비끼는 지주의 토지몰수를 거부했고, 전쟁을 계속하려 애썼으며, 전선에서는 6월 공세를 취했고, 병사들에 대한 사형제를 도입했다. 그리고 꼬르닐로프 반란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이 투쟁의 이슈를 결정했고 볼쉐비끼 전략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사회혁명당과 멘쉐비끼를 고립시키지 않고서는 제국주의 정부를 전복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정부를 전복하지 않고서 전쟁을 끝내기는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사회혁명당과 멘쉐비끼를 고립시키는 정책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정책임이 판명되었다.

 

요컨대 사회혁명당과 멘쉐비끼를 고립시키는 것이 10월 혁명 준비사업의 기본 지도노선이었다. ― 이것이 볼쉐비끼 전술의 둘째 특징이다.

 

증명할 필요도 없이 볼쉐비끼 전술의 이러한 특징이 없었다면, 노동계급과 근로농민대중의 동맹은 공중누각(空中樓閣)이 되었을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볼쉐비끼 전술의 이러한 특징에 대해 뜨로츠끼가 “10월 혁명의 교훈”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셋째 특징. 이렇듯 당은 10월 혁명의 준비사업에서 사회혁명당과 멘쉐비끼를 고립시키는 지도노선을 따랐다. 즉 이들로부터 노동자 농민의 광범한 대중을 분리시켜 획득하는 노선을 취했다. 그런데 당은 이 고립화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떤 형태로, 어떤 슬로건 하에서 실현하였는가? 쏘비에뜨 정권을 위한 대중의 혁명운동의 형태로, “모든 권력을 쏘비에뜨로!”라는 슬로건 하에서, 쏘비에뜨를 대중 동원기관에서 봉기기관, 권력기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조직으로 전환시켜내기 위한 투쟁에 의해 실현하였다.

 

볼쉐비끼가 멘쉐비끼와 사회혁명당을 고립시키는 사업을 쉽게 할 수 있고, 프롤레타리아 혁명 사업을 전진시킬 수 있으며 수백만 노동대중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승리로 이끌 사명을 띤 기본조직상의 지렛대로 포착한 것이 쏘비에뜨였다. 어째서 다름 아닌 쏘비에뜨였는가?

 

쏘비에뜨란 무엇인가?

 

레닌은 일찍이 1917년 9월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쏘비에뜨는 새로운 국가기관이다. 먼저 이 기관은 노동자 농민의 군대를 담보로 한다. 이 군대는 낡은 상비군처럼 인민과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민과 최대한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군사적 측면에서 예전의 군대에 비할 바 없이 강력하고 혁명적 측면에서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이 기관은 대중 즉 인민의 대다수와 아주 밀접한 결속을 담보로 한다. 이 결속으로 인민이 쉽게 통제하고 갱신할 수 있다. 과거의 국가기관에는 이와 비슷한 것은 전혀 없었다. 셋째로, 이 기관의 구성원은 인민의 의지에 따라 선출되고 소환된다. 관료주의적 형식은 없다. 따라서 어떠한 과거의 기관보다도 민주적이다. 넷째로, 이 기관은 다양한 종류의 직업들과 튼튼한 연계를 담보로 한다. 그래서 관료제가 없이도 매우 다양하고 가장 심각한 개혁들을 용이하게 실행할 수 있다. 다섯째로, 이 기관은 전위, 즉 피억압 계급인 노동자 농민의 가장 의식적이며 가장 열정적인 선진 부분의 조직을 담보로 한다. 피억압 계급의 전위는 계급대중을 궐기시키고 교육하며 훈련시켜 이 기관을 거대한 대중 전체의 기관으로 만든다. 이러한 계급은 지금까지 정치에서나 역사에서나 완전히 소외되어 있었다. 여섯째로, 이 기관은 의회제도의 장점과 직접민주주의의 장점을 결합시킬 수 있다. 즉 인민의 대표로 선출된 대표가 입법기능과 행정기능을 결합시킬 수 있다. 부르주아 의회제도와 비교해 볼 때 이것은 민주주의 발전에서 세계사적 의의를 갖는 진일보인 것이다. …

혁명적 계급이 인민적 창조력으로 쏘비에뜨를 만들어 내지 않았다면 러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희망이 없었을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프롤레타리아트는 낡은 국가기관으로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고, 새로운 국가기관을 곧바로 조직할 수도 없는 까닭이다.”(제21권, p. 258-259를 보라) 2)

 

바로 이렇기 때문에 볼쉐비끼는 10월 혁명을 조직할 임무와 새롭고 강력한 프롤레타리아 국가 기관을 창설할 임무를 용이하게 하는 조직상의 기본 고리로 쏘비에뜨를 틀어 쥔 것이다.

 

내적 발전의 견지에서 본다면 “모든 권력을 쏘비에뜨로!”라는 슬로건은 다음 두 단계를 거쳤다. 첫째 단계(볼쉐비끼의 7월 패배 이전까지 즉 이중권력시기)와 둘째 단계(꼬르닐로프 반란의 실패 이후)이다.

 

첫째 단계 동안, 이 슬로건의 의미는 멘쉐비끼와 사회혁명당 및 입헌민주당의 동맹을 깨는 것이고, 멘쉐비끼와 사회혁명당으로 이루어진 쏘비에뜨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며(이 때 쏘비에뜨는 사회혁명당과 멘쉐비끼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야당(즉 볼쉐비끼)에게 자유로이 선동할 권리를 주는 것이며, 쏘비에뜨 내에서 여러 당들이 투쟁할 수 있는 자유였다. 볼쉐비끼는 이러한 투쟁을 통하여 쏘비에뜨를 장악하여 혁명의 평화로운 발전과정 속에서 쏘비에뜨 정부의 구성을 교체하는데 성공할 것이라 기대했다. 물론 이 계획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의심할 바 없이 이 계획이 독재를 확립하는데 필수적 조건들을 준비하도록 도왔다. 이 계획으로 멘쉐비끼와 사회혁명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그들의 반혁명적 강령을 실행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 당은 그 본질이 폭로되고, 고립되었으며, 대중과의 분리를 촉진하였다. 그러나 볼쉐비끼의 7월 패배로 이런 발전은 중단되었다. 장군들 및 입헌민주당의 반혁명 세력이 우세를 점하고, 사회혁명당과 멘쉐비끼는 반혁명의 품속으로 던져졌다. 이러한 사정으로 당은 부득불 “모든 권력을 쏘비에뜨로!”라는 슬로건을 일시적으로 철회하고 새로운 혁명적 고양기에 다시 제출하였다.

 

꼬르닐로프 반란의 실패는 둘째 단계를 열어 놓았다. “모든 권력을 쏘비에뜨로!”라는 슬로건이 다시 당면 슬로건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이 슬로건의 의미는 첫째 단계와 달랐다.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이제 이 슬로건은 제국주의와의 완전한 단절과 볼쉐비끼로의 권력의 이양을 의미했다. 볼쉐비끼가 이미 쏘비에뜨의 다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슬로건이 의미하는 바는 봉기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는 혁명의 직접적 방법이었다. 게다가 이 슬로건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조직하고 그것에 국가형태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했다.

 

쏘비에뜨를 국가권력의 기관으로 전환시키는 전술은 헤아릴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닌다. 이 전술이 수백만 노동대중을 제국주의로부터 분리시켰고, 제국주의의 도구로서의 멘쉐비끼와 사회혁명당을 폭로하였으며, 대중들을 직접적인 길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이끌었다.

 

요컨대 쏘비에뜨를 국가권력 기관으로 전환시키는 정책은 타협적 정당을 고립시키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승리하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 이것이 10월 혁명 준비기 볼쉐비끼 전술의 셋째 특징이다.

 

넷째 특징, 볼쉐비끼가 당의 슬로건을 광범한 대중의 슬로건으로 혁명을 전진시키는 슬로건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던 원인과 방법, 전위나 노동계급 대다수뿐 아니라 인민의 대다수에게 당 정책의 정당성을 확신시킬 수 있었던 원인과 방법을 취급하지 않고는 상황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혁명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 혁명이 인민의 수백만 대중을 포괄하는 진정으로 인민적 혁명이라면, 올바른 당 슬로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혁명이 승리하자면 또 한 가지 필수 조건이 요구된다. 그것은 바로 대중 자신이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이 슬로건의 정당성을 확신하는 것이다. 오직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당의 슬로건이 대중 자신의 슬로건이 된다. 오직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혁명이 진정한 인민적 혁명이 된다. 볼쉐비끼가 10월 혁명 준비기에 취한 전술의 특징 중 하나는 대중이 스스로의 경험으로 당 슬로건의 정당성을 쉽게 느끼고 검증하고 깨닫게 하였다는데 있다. 이는 대중들을 자연스럽게 당 슬로건으로 ― 말하자면 바로 혁명의 문턱까지 ― 이끌어 가는 경로와 전환점을 정확히 결정한데 기인한다. 다시 말해서 당에 대한 지도와 대중에 대한 지도를 혼동하지 않은 것이다. 당에 대한 지도와 대중에 대한 지도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볼쉐비끼 전술의 특징은 당에 대한 지도의 과학이며 또한 수백만 노동대중에 대한 지도의 과학이라는 점이다.

 

볼쉐비끼 전술의 이 특징을 보여주는 생생한 실례는 제헌의회의 소집과 해산의 경험이다.

 

알다시피 볼쉐비끼는 쏘비에뜨 공화국이라는 슬로건을 이미 1917년 4월에 내세웠다. 알다시피 제헌의회는 부르주아 의회이다. 쏘비에뜨 공화국이라는 원칙에 근본적으로 모순된다. 볼쉐비끼가 쏘비에뜨 공화국을 향해 나아가면서 동시에 제헌의회의 즉각 소집을 임시정부에 요구한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볼쉐비끼가 선거에 참가했을 뿐 아니라 볼쉐비끼 자신이 제헌의회를 소집한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볼쉐비끼가 봉기를 수행하기 한 달 전에 낡은 제도에서 새로운 제도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쏘비에뜨 공화국과 제헌의회의 일시적 결합을 고려한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일어났다”.

1) 제헌의회 사상이 광범한 주민대중 사이에 인심(人心)을 얻은 사상의 하나였고,

2) 제헌의회 즉각 소집이라는 슬로건이 임시정부의 반혁명적 본질을 폭로하는데 도움을 주고,

3) 제헌의회 사상을 인민대중의 안중에서 떨어내기 위해서는 대중이 토지, 평화, 쏘비에뜨 정권에 대한 요구를 가지고 제헌의회라는 장벽에 다가가서, 현실의 생생한 제헌의회와 맞부딪쳐 볼 필요가 있었고,

4) 오직 이렇게 해야만 제헌의회의 반혁명적 본질과 그 해체의 필요성을 대중 스스로의 경험에 의해 쉽게 깨닫게 할 수 있으며,

5) 이 모든 것은 제헌의회를 제거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서 쏘비에뜨 공화국과 제헌의회가 일시적으로 결합할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었으며,

6) 이러한 결합이 만약 모든 권력이 쏘비에뜨로 넘어간 상황에서 실현된다면, 제헌의회는 쏘비에뜨에 종속되어 쏘비에뜨의 부속기관으로 전화되고 고통 없이 소멸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볼쉐비끼의 이러한 정책이 없었다면 제헌의회가 그렇게 순조롭게 해산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에 “모든 권력을 제헌의회로!”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아간 사회혁명당과 멘쉐비끼의 행동이 그토록 수치스럽게 실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증명할 필요도 없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1917년 9-11월에 러시아 부르주아의회, 즉 제헌의회 선거에 참가했다. 우리의 전술이 옳았는가 옳지 않았는가? … 우리 러시아 볼쉐비끼는 1917년 9-11월에 러시아에서 의회주의가 정치적으로 폐물이 되었다고 간주할 권리를 어떤 서유럽 공산주의자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가? 당연히 그렇다. 문제는 부르주아 의회의 존속 기간의 길고 짧음이 아니다. 광범한 노동인민대중이 쏘비에뜨 제도를 채택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의회를 해산시키기 위해(혹은 해산을 허용하도록) 얼마나 준비(사상적, 정치적, 실천적으로)되어 있는가에 있다. 1917년 9-11월에 러시아는 여러 가지 특별한 조건하에 있었다. 그래서 도시의 노동계급과 병사, 농민이 쏘비에뜨 제도를 채택하고 가장 민주주의적인 부르주아 의회조차 해산시킬 만큼 잘 준비되어 있었다. 이는 전혀 다툴 수 없는 사실이며 확고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쉐비끼는 제헌의회를 보이코트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하기 이전이나 이후에나 선거에 참가하였다.”(제25권, p. 201-202를 보라) 3)

 

제헌의회를 보이코트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쏘비에뜨 공화국이 승리하기 이전 몇 주간이라도 심지어 승리 이후에도 부르주아 민주주의 의회에 참가하는 것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후진적 대중에게 왜 의회를 해산해야 하는지를 입증해 보이기가 쉽고 의회를 해산하는데 용이하며 부르주아 의회주의를 정치적 폐물로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같은 곳을 보라)

 

뜨로츠끼가 볼쉐비끼 전술의 이런 특징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헌의회와 쏘비에뜨의 결합“이론”을 힐퍼딩주의라고 코웃음 치는 것은 주의할 만하다.

 

“봉기의 슬로건이 제기되고 쏘비에뜨의 승리가 확실한 조건에서 제헌의회의 소집과 결부된 이러한 결합을 허용하는 것은 쏘비에뜨를 제헌의회의 부속물로 만들어 버리는 힐퍼딩 파의 전술과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유일한 혁명적 전술이라는 것, 이 문제에 있어서 몇몇 동지들의 오류가 일정한 조건 하에서의 “국가권력의 결합형태”에 대한 레닌과 당의 전적으로 정당한 견해를 비방할 아무런 근거도 그에게 주지 않는다는 것을 뜨로츠끼는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제21권 p. 338를 참조) 4)

 

볼쉐비끼가 제헌의회에 관해 취한 이런 특별한 정책이 없었다면 볼쉐비끼는 수백만 인민대중을 자기편으로 획득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이 대중을 획득하지 못했다면 10월 봉기를 의미심장한 인민혁명으로 전환시키지 못 했을 것이다. 이 점을 뜨로츠끼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뜨로츠끼가 심지어 볼쉐비끼의 문장 중에 나타나는 “인민”, “혁명적 민주주의” 등등의 어구조차도 맑스주의자에게는 적당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코웃음 치는 것은 흥미롭다.

 

레닌, 이 의심할 수 없는 맑스주의자가 프롤레타리아 독재 승리 한 달 전인 1917년 9월에도 “모든 권력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영도하는 혁명적 민주파에게 이양할 필요성”(제21권, p. 198를 보라) 5)을 썼다. 뜨로츠끼는 이것을 망각했음에 틀림없다.

 

레닌, 이 의심할 수 없는 맑스주의자가 관료-군사적 국가기구의 분쇄는 대륙에서 모든 진정한 인민혁명의 선결조건이라고 한 쿠겔만에게 보낸 맑스의 유명한 편지(1871년 4월) 6)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뜨로츠끼는 이것을 망각했음에 틀림없다.

 

“관료-군사적 국가기관의 파괴는 ‘모든 진정한 인민혁명의 선결조건’이라고 한 맑스의 극히 심오한 지적은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이 ‘인민’혁명이라는 개념을 맑스가 썼다는 것은 이상해 보인다. 러시아의 플레하노프분자와 멘쉐비끼, 맑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쓰뜨루베의 추종자들은 맑스의 이 표현을 아마 ‘잘못 쓴 글’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맑스주의를 아주 빈약한 자유주의로 왜곡한다. 때문에 이들의 맑스주의에는 부르주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과의 대립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도 전혀 생기 없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

유럽에서 1871년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인민의 다수를 차지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 인민의 다수를 운동으로 이끌었던 ‘인민’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을 다 같이 포용하는 경우에만 가능했다. 당시에는 이 두 계급이 ‘인민’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 두 계급은 연합하고 있었다. 모두 ‘관료-군사적 국가기관’에 의해 억압 멸시 착취당하였기 때문이다. 이 기관을 파괴, 분쇄하는 것 ― 이것이 ‘인민’, 인민의 다수, 즉 노동자 농민 대다수의 진정한 이익이다. 이것이 빈농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유로운 동맹의 ‘선결조건’이다. 이 동맹 없이 민주주의는 견고할 수 없으며 사회주의로의 변혁은 불가능하다.”(제21권, p. 395-396를 보라) 7)

 

레닌의 이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요컨대, 대중을 혁명적 위치로 인도함으로서 당의 슬로건이 옳다는 것을 대중 스스로의 경험에 근거하여 납득시키는 능력은 수백만 노동인민을 당의 편으로 획득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 이것이 10월 혁명 준비기 볼쉐비끼 전술의 넷째 특징이다.

(다음 호에 계속) 노사과연

 


* J.V. 쓰딸린의 저서 ≪10월 혁명의 길에서≫는 1925년 1월과 5월 두 번에 걸쳐 발간되었다. 이 책에 들어 있는 논문과 연설은 쓰딸린 ≪전집≫ 제3권에 수록되어있다. 쓰딸린은 1924년 12월에 이 서론을 끝냈으나, ≪10월 혁명의 길에서≫에만 전문을 발표하였다. 이 서론은 보통 ≪10월 혁명과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전술≫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선집과 단행본 외에 ≪레닌주의의 제 문제≫의 모든 판에 실려 있다. 일부는 “연방주의에 반대하여”라는 논문의 주해로 쓰딸린 ≪전집≫ 제3권에 수록되어 있다.

1)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6, p. 210.

2)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6, p. 104.

3)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31, p. 59.

4)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6, p. 200.

5) 같은 책, p. 22.

6) ≪맑스 엥겔스 저작 선집≫ 제4권, 박종철출판사.

7)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5, pp. 42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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