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활동가 교육 제안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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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욱 | 자료회원, 노동예술단 선언

[편집자 주]

박현욱 동지의 글은 2017년 11월 27일자로 공개된 민주노총 문화국이 작성한 문서 “다시 문화활동가 교육을 제안하며”(이하 제안서)를 비판한 글이다. 제안서 필자의 글이 그저 한 활동가의 고민이라면 이렇게 길게까지 지면을 할애해서 비판을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총 문화국에서 제안서를 작성하여 전국의 문화 활동가들에게 내용이 전달되었다는 것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맑스주의적 원칙에 근거한 박현욱 동지의 일관된 비판은 문예 운동을 고민하고 있는 여러 활동가들에게 시사점을 줄 것이다.

박현욱 동지가 본문에서 계급의 언어로 충분한 비판을 하고 있지만 몇 가지만 감히 보충해 본다. 제안서의 필자는 알뛰세와 스튜어트 홀 삐에르 부르디외 같은 저명한 이론가들의 발언을 여기저기에서 인용하고 있다. 맑스와 레닌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저명한 이론가들의 이름들에 한 번 유감을 표한다. 그러나 보다 유감스러운 것은 필자가 이들의 발언의 맥락을 충분히 내적으로 소화해냈다기 보다는 짜깁기식으로 자기 논리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안서의 필자는 주장한다. “민주주의란 그저 정치적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의식과 정신의 문제라고 합니다” ≪국가와 혁명≫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제안서의 필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상품의 생산, 유통, 소비를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필자에게 문제되는 것은 문화상품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집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데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된 대중문화가 단지 자본의 도구만은 아니라는 변론을 하는 데 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필자는 문화상품의 생산, 유통, 소비를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좌파’가 대중적 형식에 등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는 비판을 할 때 그는 사실상 소비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대중문화의 생산과 유통의 주체일 수가 있는가? 제안서에는 문화를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슬며시 사라져 있고 지엽적인 소비와 취향의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제안서의 필자가 인용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물질적인 실천행위다”라는 알뛰세의 언명에도 함정이 있다. 맑스가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에서 “이론도 대중을 사로 잡을때 그것은 물질적인 힘이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모든 이데올로기가 바로 물질적 실천행위라는 것으로 단순하게 귀결시키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모순관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계급투쟁의 동력으로 연결시킬 때 이데올로기가 변혁을 위한 물질적인 힘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점은 알뛰세도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으며 알뛰세는 이를 ‘지성에 대한 대중운동들의 우위’와 대중운동에 대한 지성의 조력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제안서의 필자는 이데올로기가 물질적인 힘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전제 조건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빈곤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변명을 물질적인 실천행위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알튀세가 언급하고 있는 대중과 대중운동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비판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문영찬 동지의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17)”(≪정세와 노동≫ 2016년 7⋅8 합본호)을 참고 하길 바란다. 무비판적 이론 수용은 지극히 위험하다. 알뛰세의 ‘이론적 실천’이라는 언명을 극단적으로 이끌고 나갔던 윤소영이 일제의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해 어떻게 면죄부를 주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자.

한편 현욱 동지의 비판은 세세한 부분에서 토론할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시 러시아의 물질적 토대가 자본주의라는 가공할 생산력 발전을 딛고 사회주의를 구축할 수 있을 만큼의 조건이 되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적 작용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한 것”이라는 구절에는 토론의 여지가 있다. 현욱 동지가 언급하고 있는 신경제정책은 러시아의 ‘후진성’보다는 오히려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전쟁과 적백내전에 의해 강요된 후퇴라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본격적인 사투를 위해 작성된 글이 아니라 활동가들 간의 긴급한 토론을 위해 작성된 문서에 이론적 엄밀함만을 요구하는 것은 다소 지나칠 수 있다. 그래도 지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소개할 때는 아쉬운 점에 대해 간략하게라도 언급을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현욱 동지의 글은 투박하지만 강력한 힘이 있다. 노동자 계급이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혁명에 대한 전망과 전투성을 상실해가는 시기에 강렬한 파토스를 담은 글은 보다 더 긴요하게 요청된다. 부디 이 글이 변혁적인 활동가들 사이에서 실천적 토론의 근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제안서 전문도 함께 게재한다. (최상철)

 

 

 

 

 

다시 문화활동가 교육을 제안하며

 

문화는 언제나 좁은 의미의 ‘문화예술’, ‘문화예술인들의 영역’으로만 간주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연구’라는 학문을 최초로 만든 영국의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은 “토대는 전적으로 ‘경제적’ 요소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 중 어떤 것에도 특권을 부여해서는 안 되는 여러 ‘구성적 요소’들(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요소)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요소들이 모두 함께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상부구조는 토대를 결정하고 토대는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라고 분석을 했습니다. 문화는 경제, 정치 등과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적 층위라고 본 것입니다. 알튀세도 토대가 상부구조를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자율성이 존재하고, 중층결정 된다고 보았습니다.

 

홀은 또한 “문화는 한 사회 안에서 소극적이고 부차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적극적이고 일차적이며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어떤 의미에서 문화는 단연코 정치적이다. 특히 대중문화는 단순히 노동계급을 우롱하고 그들을 착취하는 데 쓰이는 자본주의의 도구가 아니다. 대중이 자본의 꼭두각시가 아닌 것처럼 대중문화 역시 지배이데올로기의 확성기 노릇만 하지 않는다. 대중문화는 협상과 저항이 동시에 일어나는, 따라서 끊임없이 투쟁이 필요한 살아 있는 정치적 공간이다. 따라서 모름지기 ‘좌파’라면 새로운 대중적 형식들에 단순히 등을 돌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게 아니라 대중문화가 지금 현재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앞으로는 무엇을 의미할 것인지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문화는 극히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문화적 텍스트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사회적 대립에서 한 편을 지지하게 됩니다.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는 영향을 주지 않는 예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모든 텍스트들은 궁극적으로 정치적이라고 했습니다.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관념들의 집합으로 볼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실천행위로 봐야한다는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는 바닷가의 휴가나 크리스마스 축제는 즐거움을 주고 사회질서의 일상적인 요구에서 해방시켜 주지만, 궁극적으로는 다음번 공식적인 휴가 때까지 힘을 되찾아 착취와 억압에 견뎌나가도록 본래의 질서 속으로 되돌려놓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를 지속시키기 위한 경제적 상황과 경제적 관계에 필요한 사회적 상황과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합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취향taste마저 이데올로기적인 범주로 판단했습니다. 문화의 소비가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계급의 차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회적 작용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미 배치된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상품이 어떻게 생산, 유통, 소비되는지, 그런 것들이 노동자계급에게는 어떻게 소비되는지, 노동자들의 의식과 삶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그에 대항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지, 문화산업의 현재와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그에 대비해서 노동자문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노동운동권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의 문화정책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현재는 어떻고,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민주주의란 그저 정치적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의식과 정신의 문제라고 합니다. 지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아온 욕망의 구조를 바꾸지 않은 채 권력의 담당자와 절차만 바꾼다고 사회가 진정 변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역사를 통해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사람들의 일상과 무의식 속에 알게 모르게 켜켜이 쌓인 욕망의 왜곡된 구조를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성취해야 할 변화의 지향점입니다. 욕망의 구조라는 말은 결국 문화라는 말과 다름없을 진대, 문화가 최후까지 추구되어야 할 변혁의 공간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때문일 것입니다.


 

문화활동가 교육 제안서 비판

 

 

1. 민주노총 문화국에서 2017년 겨울에 문화활동가들에게 제안한 문화활동가 교육은 그간 노동운동 내에서 ‘문화’라는 것이 단지 투쟁현장이나 집회에서 하는 공연 정도로 여겨지던 인식을 극복하고 이데올로기로서, 실천적 투쟁으로서 진지하게 고민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육을 제안하는 제안서(이후 제안서)의 내용은 그러한 취지에 부합하지 못 할 뿐더러 오히려 그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눈을 의심케 할 정도입니다.

 

제안서 원문에서도 문화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듯이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의 피지배계급을 지배할 수 있었던 강력한 힘이 (지배)이데올로기이며 문화는 그 자체가 바로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수의 자본가계급이 다수의 노동자계급을 지배할 수 있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머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노동자계급이 스스로를 해방하고 자본주의라는 착취질서를 끝내는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철학을 바르게 인식하고 실천적으로 발전시켜 자본가계급의 거짓된 지배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울 때만 가능합니다.

 

그렇게 지배계급인 자본가계급의 관념적, 형이상학적 이데올로기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으로 정립되어진 철학이 ‘사적유물론’입니다. 이는 현재 민주노총이나 노동운동 진영이 승인하고 있는 바이며 실제로 여러 교육프로그램에서 사적유물론을 기본 철학 교육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제출된 제안서는 그러한 사적유물론을 첫 문단에서부터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민주노총의 공식적인 교육제안서의 내용이 그러하다면 첫 번째로는 민주노총이 실천적 철학으로서의 사적유물론을 폐기했다고 이해될 수 있는 문제가 있고 두 번째로는 노동자계급 스스로가 자본가계급에 대항해 싸울 수 있는,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체로서 진실인 과학적 철학을 후퇴시켜서 결국 자본가계급의 계급지배를 더욱 강화하는데 일조하게 된다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러한 우려에 바탕하여 더욱 발전적인 논의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또한 문제의식이 제안서의 전반부에 집중적으로 자리잡고 있어서 이 글 역시 제안서 전반부에 대한 내용이 많은 비중을 차지고 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문화는 언제나 좁은 의미의 ‘문화예술’, ‘문화예술인들의 영역’으로만 간주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연구’라는 학문을 최초로 만든 영국의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은 “토대는 전적으로 ‘경제적’ 요소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 중 어떤 것에도 특권을 부여해서는 안 되는 여러 ‘구성적 요소’들(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요소)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요소들이 모두 함께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상부구조는 토대를 결정하고 토대는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라고 분석을 했습니다. 문화는 경제, 정치 등과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적 층위라고 본 것입니다. 알튀세도 토대가 상부구조를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자율성이 존재하고, 중층결정 된다고 보았습니다.

 

–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실천적 세계관으로서의 사적유물론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으며 그 이전에 ‘사회과학’이라는 개념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토대와 상부구조를 말하기 이전에 우선 ‘그들 중 어떤 것에도 특권을 부여해서는 안 되는 여러 구성적 요소들로 되어있다’라는 표현만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1. 만유인력은 뉴턴이 자신의 의지로 특권을 부여한 것?

 

과학적 법칙성은 누군가의 의지로 어떤 요소에 특권을 부여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당연히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 자체로 법칙이지요. 그러나 스튜어트 홀의 이 말은 그러한 요소들이 법칙 이전에 특정인의 ‘의지’문제라는 것인데요. 그렇다면 예컨대 만유인력의 법칙은 ‘뉴턴’의 ‘의지’라고 말해야 하나요?

예를 들어 인간은 10층 높이 건물 옥상에서 맨몸으로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지면 죽습니다. 그런데 홀의 말은 이것을 두고서 마치 ‘누구의 의지로 중력에 그런 특권을 부여했는가?’라고 항변하는 것과 같지요. 더 나아가 누구도 그렇게 ‘중력’이라는 특정한 요소에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특권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누군가 ‘그래 맞아 아무도 중력에 그런 특권을 부여할 수 없어. 난 그런 특권을 거부하겠어!’라 외치고 소위 ‘의지의 승리’론을 내세우며 10층에서 자유롭게 맨몸으로 뛰어내린다면. 당연히 그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습니다. 우리에게 과학적 철학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올바른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을 정립하지 못한다면 지배계급의 거짓에 속아 결국 10층에서 줄줄이 떨어지는 결과를 낳게 될 테니까요.

 

변증법을 체계화한 헤겔이라는 사람은 ‘필연 속에 자유 있다’라고 했지요.

즉 인간이 진정으로 억압과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그저 ‘의지’와 ‘감정’으로 ‘난 자유로울래’라고 선언하고 말 그대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이 자유를 속박하는지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필연적 법칙성을 제대로 파악하여 받아들일 때만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입니다.

앞서 말했듯 인간은 10층에서 맨몸으로 뛰어내리면 죽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인간은 10층이 아니라 더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낙하산이라는 것이 있지요. 즉 중력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은 자유를 획득했는데 그것은 ‘누가 중력 따위에게 나를 속박할 특권을 줬냐?’고 외치며 자기 마음대로 뛰어내려서 된 것이 아니지요. 떨어지면 죽는다는 중력법칙의 ‘필연성’을 객관적,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지 연구해서 낙하산을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더 자유롭게 하늘을 날기 위해 인간은 ‘양력, 중력, 항력, 추력’등의 물리적 요소들의 과학적 필연성을 연구했고 그를 바탕으로 ‘날 수 있다’는 자유를 획득했다는 의미입니다.

 

사회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적 토대가 상부구조를 선차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그러한 과학적 법칙성으로서의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지 인간의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2. 토대하고 싶은 요소들 다 모여라?

그럼 상부구조에는 뭐가 남죠?

 

또한 홀은 글에서 토대는 경제적 요소뿐만 아니라 여러 구성적 요소(사회, 정치, 문화)들로 되어있다고 서술합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요소들이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일단 사적유물론의 중요한 발견인 사회구성체로서의 토대와 상부구조를 말하고 있긴 합니다. 그러나 경제적 요소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문화 등이 다 토대이다라고 설명함으로써 사적유물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혹은 사적유물론에 대한 완벽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요소들이 다 토대의 구성 요소라면 도대체 상부구조를 구성하는 요소는 무엇인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사실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전부 토대가 되어버려서 상부구조를 구성할 요소가 없어지는 것일 테니까요) 더 나아가 ‘토대는 상부구조를 결정하고 상부구조는 토대를 결정한다’라는 아무 말 대잔치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먼저 토대도 상부구조를 규정하고 상부구조도 토대를 규정한다는 서술은 시쳇말로 ‘이꼬르 쌤쌤, 혹은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라는 식의 무의미한 말이 됩니다. 서로가 무차별적으로 규정한다면 굳이 사회구성체를 토대와 상부구조로 구분하여 그 두 가지의 요소와 성격을 나누어서 분석, 파악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니까요.

또한 이 말은 제안서의 작성자 동지가 바로 뒤에서 인용한 알튀세의 말로 스스로 부정하게 됩니다. 알튀세의 말은 토대가 상부구조를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즉, 토대가 상부구조를 규정하나 그것이 전적인 것은 아니며 그러기에 상부구조 역시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다는 말이지요. 앞서 홀은 상호 규정(50 대 50)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알튀세는 기본적으로는 토대가 상부구조를 규정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위 제안서의 서술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문화를 이미 ‘토대’의 영역에 넣어 놓고서는 왜 굳이 상부구조도 토대에 규정력을 가진다는 말을 이어나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서술의 흐름은 결국 문화가 사회구성체에 큰 규정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으로 이해되는데 앞에서는 문화가 토대의 구성요소이니 그 자체로 큰 규정력을 미치고 있다고 하다가 뒤에서는 다시 상부구조도 토대에 규정력을 가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다시 ‘문화’가 상부구조이고 그러한 상부구조도 토대를 규정한다는 근거를 주장하고자 함이라 보여 지는데요. 그러다 보니 서술상의 혼란이 일어난 것이라 생각됩니다.

 

3. 물적 토대의 선차적 규정성과 상부구조의 능동적 반작용.

 

사적유물론은 철학상의 유물론과 변증법을 인간의 역사와 사회에 대입하여 파악한 과학으로서의 철학입니다.

유물론의 기본적인 관점은 물질이 의식에 선차적인 규정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근육과 뼈, 뇌 등의 물질적 존재가 선차적으로 존재해야 그에 따른 의식, 정신세계 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어릴 적 많이 들었던 ‘건강한 신체(물적 토대)에 건강한 정신(상부구조)’이라는 말이나 ‘수염이 석자라도(고귀한 의식이라도) 먹어야 산다(물질적 활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 등은 그 말의 의도와 상관없이 유물론적 관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문화를 대입하여 설명하자면 예를 들어 누군가의 문화와 의식이 뮤지컬을 매우 좋아하는 것이라고 가정했을 때 그가 아무리 의식적으로(문화적으로) 뮤지컬을 좋아한다 해도 그가 보고 즐길 수 있는 뮤지컬의 횟수는 그의 월급의 크기(물적 토대)가 선차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한 달 수입이 100만원도 채 안 되는 사람은 아무리 뮤지컬을 좋아한다고 해도 최소 10만원 이상하는 뮤지컬을 10편은커녕 5편도 볼 수 없는 게 현실이겠지요. 그러나 한 달 수입이 천만 원 정도 된다면 10편 아니라 20편도 볼 수 있겠지요. 즉 내가 즐기는 문화생활은 물질적 조건에 선차적으로 규정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전적으로 물질적 토대만이 의식을 100%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흔히 ‘의식의 능동적 반작용’이라고 하는데요, 이 부분이 알튀세가 말하는 ‘상대적 자율성’으로서의 토대에 대한 역규정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내 월급이 100만원(물질)인 사람이 뮤지컬을 너무너무 좋아한다면(의식) 그러한 의식이 100만원이라는 자신의 물질적 존재에 영향을 끼쳐서 더 많은 수입을 올리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되기도 하고(열심히 일을 한다거나 투잡을 뛴다거나 등) 그래서 실제로 뮤지컬을 보고 싶은 의식 때문에 수입이 150, 200만원으로 늘어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러한 의식의 능동적 반작용은 사실 유물론적 관점과 실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유물론적 관점을 인간의 사회에 대입하면 한 사회의 물질적 토대(경제적 관계나 생산력 등)가 그 사회의 상부구조(정치, 행정, 문화, 이데올로기 등등)를 선차적으로 규정한다는 사적유물론의 중요한 관점이 정립되는 것입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텐데요. 당연히 조선시대는 농경이 가장 중심적인 경제시스템이었기 때문에 그 시대의 정치, 문화, 이데올로기 등이 선차적으로 농업이라는 경제적 관계(토대)에 의해 규정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요? 중심적 문화나 정치적, 행정적인 시스템이 농업에 맞게 자리 잡고 있나요? 그렇지 않지요. 그럼에도 누군가가 ‘의식적’으로 우리의 전통은 농업이니 앞으로 문화나 행정도 농업에 맞게 이루어져야 하고 대중음악도 기본적으로 ‘농악’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필시 허경영 정도의 취급을 받게 되겠지요. 즉 아무리 의식이 그렇다할지라도 현재 사회의 토대가 농경이 아니니 결코 그 토대의 선차적 규정성을 넘어선 의식의 작용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당대의 경제적 관계 혹은 물질적 생산력이 당대 사회의 상부구조를 우선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이 사적유물론의 가장 기본이 되는 과학적 관점이며 이는 역시 타당합니다.

물론 그러한 상부구조가 능동적으로 토대를 역규정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역사적으로는 러시아 혁명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물질적 토대가 자본주의라는 가공할 생산력 발전을 딛고 사회주의를 구축할 수 있을 만큼의 조건이 되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적 작용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한 것이고 그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실제로 그 혁명의 주체들도 그럼에도 당시 토대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사회주의가 가능한 물적 토대로 나아가기 위해 부분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제시스템(네프 등)을 유지했었던 것이지요. 즉, 상부구조가 능동적으로 토대에 규정력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토대가 상부구조를 선차적으로 규정한다는 전제 위에서 가능한 것이지요. 그럼에도 홀의 말은 토대가 상부구조를 선차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토대와 상부구조가 상호 규정한다고 말함으로써 사적유물론을 부정하고 심지어 상부구조의 요소들을 모두 토대에다 집어 넣음으로써(본문에서 ‘토대’라는 말과 ‘기초적 층위’라는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데요, 이에 대한 설명은 굳이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토대와 상부구조의 구분을 전혀 의미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홀은 또한 “문화는 한 사회 안에서 소극적이고 부차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적극적이고 일차적이며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어떤 의미에서 문화는 단연코 정치적이다. 특히 대중문화는 단순히 노동계급을 우롱하고 그들을 착취하는 데 쓰이는 자본주의의 도구가 아니다. 대중이 자본의 꼭두각시가 아닌 것처럼 대중문화 역시 지배이데올로기의 확성기 노릇만 하지 않는다. 대중문화는 협상과 저항이 동시에 일어나는, 따라서 끊임없이 투쟁이 필요한 살아 있는 정치적 공간이다. 따라서 모름지기 ‘좌파’라면 새로운 대중적 형식들에 단순히 등을 돌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게 아니라 대중문화가 지금 현재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앞으로는 무엇을 의미할 것인지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4. 능동적인 체제의 노예.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위 홀의 말에 동의 되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대중문화 역시 정치적 공간이며, 좌파라고 한다면 대중문화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부분은 현재의 문화활동가들 역시 깊이 있게 고민해야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대중문화의 성격을 밝히고 있는 부분에서는 인식상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깊이 있게 고민하기 위해선 그것의 정체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요.

 

우선 ‘대중’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무작위성을 담고 있습니다. 즉 노동자계급 대중뿐만 아니라 수많은 노동대중과 자본가, 소자본가 등 모두를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대중문화는 단순히 노동계급을 우롱하고… 착취를 위한 자본의 도구가 아니다’라는 말은 그런 측면에서 타당해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글의 맥락이 결국 ‘대중문화는 자본의 도구가 아니다’라고 규정함으로써 사실상 그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현실을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것들은 단 한 가지 요소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당연히 여러 가지 요소들이 포함된 채로 존재하게 되지요. 가령 예를 들어 우리가 하얀색이라고 표현하는 것들도 자세히 보면 모두 조금씩 다른 색감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약간의 파란색이 도는 하얀색도 있고 약간 어두운 하얀색도 있고 더 밝은 하얀색도 있습니다. 그렇다하여 그러한 것들을 ‘하얀색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여러 가지 색감의 요소가 있다하더라도 그 요소들 중에서 지배적인 것이 무엇이냐가 그 성격을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요소가 되지요.

이는 앞에서 말했던 변증법의 ‘양질 전화’ 법칙이기도 합니다. 약간 파란색이 돌지만 분명 하얀색이라는 질을 가지고 있던 색깔에 파란색의 양을 더 증가시키면 어느 순간 더 이상 하얀색이라는 질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게 되고 그 때부터는 파란색이라는 질로 전화 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 경우에도 당연히 그 파란색에는 하얀색이라는 요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중문화는 당대 사회를 사는 대중의 여러 가지 상태와 문화, 이데올로기들이 그 요소로서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그 대중문화가 가지는 지배적이고 본질적인 성격일 것입니다.

 

홀은 ‘대중은 자본의 꼭두각시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꼭두각시라는 표현은 당연히 적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식적인 측면에서 스스로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자본주의를 사는 대중은 분명히 자본주의의 체제와 구조에 종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다수 대중은 어릴 적부터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경쟁에 내몰립니다. 주된 이유는 그래야지만 좋은 직장을 얻게 되고(자본의 선택) 안정적인 경제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랬다고 끝이 아닙니다. 취직이 되고 나서도 짤리지 않기 위해 혹은 더 높은 직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끝없이 자본주의라는 체제에 자신을 맞출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을 흔히 ‘임금 노예’라고 하지요. 고대의 노예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그런 임금노예가 되는 길을 스스로(이 부분을 능동적으로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선택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스스로 끝없이 노력한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대다수 노동대중은 그렇기 때문에 ‘꼭두각시’까진 아닐지 몰라도 사실상 자본주의 체제에 자신을 맞추어야지만 살아갈 수 있는 말하자면 ‘능동적인 체제의 노예’가 되기를 강요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혹시나 해서 다시 말씀드리는데 어디까지나 그것이 지배적이고 선차적인 규정이지 1%의 에누리도 없이 완전히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니 또다시 ‘그렇다면 의식의 능동적인 반작용을 부정한다는 것이냐?’라고 반문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5. 당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 ― 칼 맑스

 

우리가 99%다. 기억하시겠지만 2007년 미국발 공황 이후 월가 점거시위를 하던 미국 민중이 외치면서 한국에서도 적잖이 유행을 했던 말입니다.

피지배계급 대중이 99%다. 그것은 사실이고 가슴 뿌듯해지는 말이지요. 하지만 또한 서글퍼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99%인데 왜 1%의 지배계급을 여전히 이기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99%인 것이 당연한데 왜 굳이 그 사실을 구호로까지 외치면서 확인해야 하는가?

이는 앞서도 말했듯이 그 1%가 99%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간단히 확인 가능한 일입니다. 대다수가 노동자인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을 뽑는다면 노동자 대통령이 뽑히는 것이 물리적으로 당연한 일일 텐데 그런 일은 이상하게도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대다수 노동자 대중 심지어 매우 급진적인 노동운동의 활동가라 할지라도(이 글을 쓰고 있는 저까지 포함해서)자본가계급의 지배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러하기에 자본가계급의 지배체제인 자본주의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 사적유물론을 정립한 칼 맑스는 ‘당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대중의 지배적 의식)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자본주의적 의식)’이며 이는 ‘당대사회의 물질적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이 이데올로기 생산수단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당대 대중의 지배적 생각을 흔히 ‘여론’이라고 하지요. 그 여론을 생산 형성하는 지배적인 기구는 미디어입니다. 그 미디어를 누가 소유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입니다. 그나마 상당히 진보적(심지어 좌파적이라고까지 불리는)이라고 불리는 미디어들조차 사실은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형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촛불정국에 큰 영향을 미친 J방송사의 경우라 할지라도 촛불투쟁의 중심에서 싸웠던 민주노총의 얘기나 그 때문에 부당한 옥살이를 하고 있는 한상균 위원장에 대한 문제의식을 진지하게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을 본 적 있나요?

부분적으로 노동자들의 투쟁 얘기를 다룬다 할지라도 그들의 논리는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가 수호되는 한에서, 말하자면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래에서, 노동자들의 체제 변혁적 성격을 가두는 한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현실이지요.

사실은 조금 더 나아가자면 그렇게 노동자들의 투쟁을 부분적으로 다루는 것이 오히려 노동자들의 터져 나오는 분노를 흡수하여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혁명으로 발전하려는 경향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기에 노동자들에겐 오히려 더욱 반동적인 역할로 작용하기도 합니다.(이는 제안서 원문에 나온 알튀세 ‘휴가’ 얘기와 같은 맥락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나마도 지금의 미디어 환경이 과거와 달리 더 많은 대중이 스스로 생산하고 어느 정도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까지 발전(이것은 사적유물론상의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부분과 닿아 있습니다)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공고히 하는 기관으로서 미디어만큼 중요한 곳이 바로 학교이지요. 길게 설명할 것 없이 학교라는 곳 역시 기본적으로 아주 어릴 적부터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교육하고 또한 자본주의 체제에 적합한 인간형을 길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란 본질적으로 지배계급 즉, 자본가 계급의 관리기구이지요. 따라서 이데올로기 형성에 매우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많은 국가 기관들 역시 자본의 관리자 역할을 수행하며 그에 따른 이데올로기 형성(문화 정책적으로도)에 주도적인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중문화는 기본적으로 그런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지배이데올로기)를 본질적으로 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의 유행을 생각해봅시다. 강남스타일이 돈없고 가난한 민중의 스타일일 리는 만무하지요.

그래서 우리 문화활동가들이 주목해야할 지점은 ‘대중문화가 지배이데올로기의 확성기 노릇만 하지 않는다’는 점이 아니라 ‘지배계급이 어떻게 대중적 이데올로기를 형성해나가고 그것이 어떻게 대중문화에 투영되며 그를 통해 지배적 힘을 유지・강화하는가’여야 합니다.

또 말씀드리지만 물론 여기에도 의식의 능동적 반작용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황기의 암울한 현실에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절망적인 젊은 세대들의 아픔은 대중문화에도 투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게는 그러한 것들이 그들을 힘들게 하는 이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포자기(요즘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그룹의 노래 중에 ‘탕진잼’을 반복하는 노래를 참고하시라), 혹은 막무가내식의 분노 표출(티비에까지 나온 모그룹의 노래 중에 “내게 돈을 주는 그대여(자본)… 죽어 버려라 죽어 버려라~”를 반복하는 노래를 참고하시라)로 그치고 있다는 점임입니다.

문화활동가들이 더욱 착목해야할 부분은 그러한 본능적 분노 표출들이 어떻게 대중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인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게 할 수 있을 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어야 하며 그를 위해선 무엇보다 사회구성체에 대한 ‘의지론’이 아닌 ‘과학적’인식이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문화는 극히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문화적 텍스트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사회적 대립에서 한 편을 지지하게 됩니다.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는 영향을 주지 않는 예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모든 텍스트들은 궁극적으로 정치적이라고 했습니다.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관념들의 집합으로 볼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실천행위로 봐야한다는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는 바닷가의 휴가나 크리스마스 축제는 즐거움을 주고 사회질서의 일상적인 요구에서 해방시켜 주지만, 궁극적으로는 다음번 공식적인 휴가 때까지 힘을 되찾아 착취와 억압에 견뎌나가도록 본래의 질서 속으로 되돌려놓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를 지속시키기 위한 경제적 상황과 경제적 관계에 필요한 사회적 상황과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합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취향taste마저 이데올로기적인 범주로 판단했습니다. 문화의 소비가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계급의 차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회적 작용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미 배치된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상품이 어떻게 생산, 유통, 소비되는지, 그런 것들이 노동자계급에게는 어떻게 소비되는지, 노동자들의 의식과 삶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그에 대항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지, 문화산업의 현재와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그에 대비해서 노동자문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노동운동권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의 문화정책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현재는 어떻고,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6. 멀리 있는 목적지를 가기 위해선 나침반부터 고쳐야 합니다.

 

이 부분의 문제의식은 상당수 동의 되며 실천과제에 대한 제시 역시 적절하다고 보여집니다. 부분적으로 제기할 부분은 있으나 읽는 분들의 피로도를 감안하여 크게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라면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문화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정작 노동자계급의 실천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찰이 없이 자본이 무엇을 할 것인지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제안서의 전반부에서 사적유물론을 부정하고 있는데 어떤 도구로 자본의 허구적 이데올로기를 밝혀 낼 것이며 어떤 무기로 싸울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본의 문화 정책 등 그것을 알아야 함을 호소하기 전에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철학에 대한 깊이 있고 책임감 있는 고찰과 그를 공고히 하기 위한 노력을 우선적으로 주문해야 한다고 봅니다.

 

 민주주의란 그저 정치적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의식과 정신의 문제라고 합니다. 지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아온 욕망의 구조를 바꾸지 않은 채 권력의 담당자와 절차만 바꾼다고 사회가 진정 변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역사를 통해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사람들의 일상과 무의식 속에 알게 모르게 켜켜이 쌓인 욕망의 왜곡된 구조를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성취해야 할 변화의 지향점입니다. 욕망의 구조라는 말은 결국 문화라는 말과 다름없을 진대, 문화가 최후까지 추구되어야 할 변혁의 공간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때문일 것입니다.

 

 

7.노동자의 욕망의 구조? 짤리지 않고 일하려는 욕망?

더 많은 임금을 받으려는 욕망? 정규직 되려는 욕망?

 

제안서의 이 부분에 도달해서는, 사실 황망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문화 그리고 계급지배를 체제화 하는 첨병으로써의 문화,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 토대와 상부구조를 논하다가, 결국 인간 개인의 욕망(?)구조의 문제로 귀결되는 이 논리 전개를 사실 저로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논리전개의 당황스러움은 차치하고 그 내용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제안서 필자의 주장은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 막는 것은 우리 개개인이 마음속에 자리잡은 왜곡된 욕망의 구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앞선 문단에서 이데올로기는 관념의 집합이 아니라 물질적 실천이라는 인용을 해놓고선 그 다음 문단에서 결국 마음속에 자리잡은(관념적인) 욕망이 근본적인 문제이고 그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결국 운동은 도덕의 문제다?) 만약 이 주장대로라면 노동자들이나 노동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사회과학과 철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고민할 것이 아니라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빠르게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제안서 필자가 말하는 바 ‘변혁’을 이루어내는 길이 되겠지요.

그러나 무소유, 무욕의 가르침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 족히 수천 년은 되고 온갖 도덕성을 가르치는 성인들의 가르침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는 아직 계급지배, 착취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가진 욕망이나 관념적 도덕의 문제 이전에 그것을 선차적으로 규정하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지요.

 

우선은 왜곡되어 있다는 욕망이 예컨대 무엇인지 밝혀주셨으면 하지만 그 내용이 나와있지 않으니 나름대로 추측해볼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일단 욕망은 인간의 삶과 역사를 오랜 세월 발전시켜온 원동력이기 때문에 욕망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고 보이진 않습니다. 제안서의 필자도 ‘왜곡된’ 욕망의 구조라고 했으니 추측컨대 가령 자신이 더 많은 임금을 받으려는 욕망을 위해 다른 노동자의 저임금에 눈을 감는다거나 정규직이 자신의 고용을 유지하려는 욕망으로 비정규직의 해고에 등을 돌린다거나 하는 것들이 있을까요? 그리고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탕진잼’을 외치며 과소비를 한다거나 혹은 퇴폐적인 문화를 향유한다거나 하는 것 등을 들 수 있을까요?

 

물론 실천적인 측면에서 그런 행위들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고 비판을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런 의식적 노력이 부분의 변화를 일으키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현상들을 극복하고자 함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마음 속에 자리잡은 욕망의 구조를 ‘의식적’으로 바꾸어내는 것이 ‘본질’이라는 주장은 비과학적일 뿐더러 근본적인 변혁을 위한 관점으로서도 맞지 않습니다.

 

사실 결국 욕망의 구조 문제라는 관념적 결과로 제안서가 마무리 되는 것은 제안서 전반부에 나온 인식의 결과로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앞서서 사적유물론이 부정되었기에 그 결과가 형이상학적 관념론으로 결론지어지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8. 다시 공상에서 과학으로 ― 엥겔스

 

그래서 다시 토대와 상부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인간의 욕망(구조)이 왜곡되었다는 것은 당연히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선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예를 들어 그러한 왜곡된 욕망으로서 정규직이 비정규직의 해고나 차별에 눈감고 있거나 조장하는 것을 들어보겠습니다. 사실 간단합니다. 절대로 자신이 평생 해고될 일이 없고 평생 안정적인 생활이 충분히 가능할 만큼 임금을 받는 것이 보장되어 있다면 비정규직 혹은 비정규직이 아니라도 타인의 해고를 조장하거나 묵인할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자리(예컨대 정규직 일자리)에 들어오는 것이 지금처럼 하늘의 별따기 정도의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가 차별 받는 것을 좋아하거나 조장, 내지 방조하려 할까요? 더러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경향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미우나 고우나 같은 곳에서 일하는 동료가 고통을 받거나 잘려나가는 것을 보면 마음이 좋을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즉 욕망의 구조가 왜곡되는 본질적인 이유는 인간의 마음속이 아니라 사회적 토대에서 찾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현재의 생산관계가 공황기의 자본주의이고 극도의 고용불안과 상시적 구조조정에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생활을 해야 하는 존재가 노동자이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의식이나 양심 이전에 자신과 자신 가족의 생존을 지켜야 하는 의식이 먼저 자리잡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피지배계급으로서의 민중에겐 그 무엇보다 무서운 곳이 지배계급의 폭력기구인 ‘포도청’이었기에 생겨난 말이지요. 즉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자신의 목구멍’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양심적이고 훌륭한 의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결국 자신의 목구멍으로 음식을 넘기지 못하면 굶어야 하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일상적인 해고로 그 무서운 목구멍이 어떻게 날아가는지 똑똑히 지켜본 노동자들에겐 제안서 원문의 표현대로 왜곡된 욕망이 아니라 살 떨리는 공포가 의식, 무의식 속에 ‘켜켜이’ 쌓여 나가게 되는 것이지요. 당연히 그러한 공포는 ‘나와 내 가족이 생존하기 위해선 네가 짤릴 수밖에 없어’라는 의식으로 지배되어 비정규직 혹은 타인의 해고나 차별에 대해 눈을 감거나 조장하거나 하는 행동이 발생하게 되지요. 그런데 여기에다 대고 ‘결국 너희들 마음 속에 자리잡은 욕망이 문제이니 마음을 고쳐먹어야 해’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요. 노동력이 팔리지 않으면 굶어 죽어야 하는 임노동관계와 상시적 고용불안이라는 물적(경제적)토대가 집단의 의식(상부구조)을 우선적으로 규정하니까요.

 

예컨대 왜곡된 욕망을 퇴폐적, 자극적 문화의 향유라는 측면으로 본다 해도 본질은 똑같습니다. 자기 가치를 실현하는 가장 행복한 과정으로서의 노동이 자본주의 사회에선 임금노예로 임금 받기 위해 억지로 행하는 노동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행복과 자기 만족을 실현할 요소를 상당히 박탈 당해있지요. 그러다 보니 그러한 소외를 충족시키기 위해 더욱 자극적이고 퇴폐적인 요소를 찾고 향유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사실 왜곡된 것은 인간 마음 속 욕망 이전에 인간 마음 밖에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적 토대, 즉 ‘자본 임노동 관계’라는 생산관계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네 마음 속 욕망을 바꾸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우리의 욕망을 왜곡되게 만드는 이 생산관계(토대)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을 함께 부수어 버리자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밝혔듯이 참으로 좋은 취지로 제안된 문화활동가 교육이 더욱 그 취지에 맞게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쓴 글이니 모쪼록 그 의미가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더 많은 토론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다시 공상에서 과학으로.

 

 

2017년 12월 8일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Apr 5th, 2018 | By | Category: 이론, 정세와노동 | 조회수: 303

댓글 한 개 “문화활동가 교육 제안서 비판”

  1. 보스코프스키말하길

    윤소영에 대한 비판문은 이 윤소영을 비판한 김갑수를 폭로한 문서를 준비했습니다. 정말 사상, 주의 측면에서 너무나 어이없는 상황들의 연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