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10월 혁명과 러시아 공산주의자들 ― 상 저서 ≪10월 혁명의 길에서≫의 서론

이오씨프 쓰딸린(Иосиф Сталин)

 

번역: 신재길(교육위원장)

1)

 <목차>

1. 10월 혁명의 국내외 정세

 2. 10월 혁명의 두 가지 특징 ― 혹은 10월 혁명과 뜨로츠끼의 “영구”혁명론

 3. 볼셰비키가 10월 혁명 준비기에 취한 전술의 몇 가지 특징

 4. 세계혁명의 출발점과 전제조건으로서의 10월혁명

 

 

 

1. 10월 혁명의 국내외 정세

 

세 가지 국제 정세로 인해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비교적 쉽게 제국주의 사슬을 끊어 버리고 부르주아지 지배를 전복할 수 있었다.

 

첫째, 10월 혁명이 영국-프랑스를 한편으로 하고 오스트리아-독일을 다른 편으로 하는 주요 제국주의 집단 간의 격렬한 투쟁의 시기에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이 두 집단은 결사적으로 전쟁에 몰두하였다. 그래서 10월 혁명에 반대하는 투쟁에 진지하게 주의를 돌릴 시간도 물자도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10월 혁명에 엄청나게 중요했다. 제국주의 내부의 격렬한 충돌을 이용하여 혁명 역량을 강화하고 조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10월 혁명이 제국주의 전쟁 중에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전쟁에 지쳐 평화를 갈망하는 노동대중은 사태(事態) 전개논리 그 자체에 맞게 전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을 프롤레타리아혁명에서 찾았다. 이러한 사정은 10월 혁명에 극히 중요했다. 평화라는 강력한 무기를 장악하여, 쏘비에뜨 혁명을 혐오스러운 전쟁의 종결과 쉽게 연결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구의 노동자와 동구의 피억압 민족들 사이에 광범한 공감을 획득하였다.

 

셋째, 유럽에 강력한 노동운동이 존재하고 장기간 지속된 제국주의 전쟁으로 서구와 동구에 혁명적 위기가 성숙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정은 10월 혁명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중요했다. 세계 제국주의와의 투쟁에서 믿을 만한 국외 동맹자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 정세 외에도 10월 혁명이 쉽게 승리하게 한 국내의 호조건들이 있었다.

 

그중 주요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10월 혁명은 러시아 노동계급의 압도적 다수로부터 매우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둘째, 10월 혁명은 평화와 토지를 갈망하는 빈농과 대다수 병사들의 의심할 바 없는 지지를 받았다.

 

셋째, 10월 혁명은 선두에 지도적 역량으로서 믿을 수 있는 검증된 볼쉐비끼당이 있었다. 볼셰비키당은 다년간 형성된 경험과 규율에서뿐만 아니라 노동대중과 광범하게 결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강력하였다.

 

넷째, 10월 혁명에서 적들이 비교적 약했다.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상당히 유약했고, 지주계급은 농민 “반란”으로 몹시 기가 죽어 있었으며, 타협적 정당들(멘쉐비끼 및 사회혁명당)은 전쟁기간동안 완전히 파산하였다.

 

다섯째, 10월 혁명은 신생국가가 운용할 수 있는 광활한 지역이 있었다. 그래서 정세의 요구에 맞게 퇴각하고, 숨을 돌려 쉬며, 역량을 축적하는 등등의 일을 할 수 있었다.

 

여섯째, 10월 혁명은 반혁명과의 투쟁에서 식량, 연료, 원료 등의 충분한 국내 자원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국내외의 조건이 결합되어 10월 혁명이 비교적 쉽게 승리할 수 있는 독특한 정세를 조성하였다.

 

이것은 물론 10월 혁명의 국내외적 환경에 불리한 조건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컨대 10월 혁명은 상당히 고립되어 있었다. 가까운 국경 근처에 10월 혁명을 지지 지원할 쏘비에뜨 국가가 없다는 불리한 조건이 어찌 중대하지 않았겠는가? 예컨대 독일에서 일어날 미래 혁명은 이점에서 의심할 바 없이 유리한 조건이 될 것이다. 우리 쏘련과 같은 강력한 쏘비에뜨 국가를 이웃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국내에서 다수를 점하지 못한 불리한 점을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이 모든 불리한 점은 위에서 말한 10월 혁명의 특수한 국내외적 조건의 막대한 중요성을 더욱 분명히 할 뿐이다.

 

이 특수한 조건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독일의 1923년 가을 사태를 분석하는데 있어 특히 명심해야 한다. 누구보다도 먼저 뜨로츠끼가 명심해야만 한다. 뜨로츠끼는 10월 혁명과 독일 혁명을 근거 없이 유비(類比, analogy)하여 독일 공산당의 현상적이고 허구적인 오류를 맹렬히 비난하기 때문이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하기는 쉬웠다. 1917년이 매우 독특하고 구체적인 역사적 정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을 지속하여 끝까지 철저하게 수행하기는 유럽국가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이미 1918년 초에 이점을 지적하였는데 그 후 2년 동안의 경험은 이런 생각이 올바르다고 충분히 실증하였다. 당시 러시아의 특수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제국주의 전쟁의 종결을 쏘비에뜨 혁명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다. 노동자 농민을 극도로 피폐화시킨 전쟁은 쏘비에뜨 혁명으로 끝났다. 2) 세계의 강력한 두 제국주의 강도 무리들 사이의 필사적 투쟁을 일정한 기간 동안 이용할 수 있었다. 이 두 무리는 쏘비에뜨를 반대하여 연합할 수 없었다. 3) 비교적 장기간의 내전을 버틸 수 있었다. 이는 어느 정도 국토가 넓고 교통수단이 빈약한 때문이다. 4) 당시 농민 속에 매우 격렬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운동이 있었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 당은 농민정당(사회혁명당인데 그 대다수는 볼셰비키에 매우 적대적이었다.)의 혁명적 요구를 받아들여 프롤레타리아 정권 장악을 통해 즉시 실현하였다. ― 이러한 특수한 조건이 현재 서유럽에는 없다. 게다가 이런 조건이나 유사한 조건이 쉽게 나타날 것 같지도 않다. 이러한 원인 때문에 ― 기타 많은 원인은 별도로 하고 ―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하기는 우리나라에서보다 어려울 것이다.”(제25권, p. 205을 보라)2)

 

레닌의 이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10월 혁명의 두 가지 특징 ― 혹은 10월 혁명과 뜨로츠끼의 “영구”혁명론

 

10월 혁명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혁명의 본질적 의미와 역사적 중요성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꼭 이해해야할 특징이다.

 

이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나라에서 탄생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농민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하에 프롤레타리아트와 근로농민대중이 동맹하여 세운 정권이라는 점이다. 둘째, 우리나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자본주의가 덜 발전한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한 결과 확립되었다는 점이다. 반면에 자본주의가 발달된 나라들은 자본주의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이것이 10월 혁명에 다른 특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 두 가지 특징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하다. 10월 혁명의 본질을 뚜렷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영구혁명”론의 기회주의적 본질을 훌륭하게 폭로하기 때문이다.

 

이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자.

 

도시와 농촌의 소부르주아 근로대중의 문제,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으로 이들 대중을 획득하는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권력투쟁에서 도시와 농촌의 근로인민이 누구를 지지하는가, 즉 부르주아지를 지지하는가 아니면 프롤레타리아트를 지지 하는가. 누구의 예비군이 될 것인가 즉 부르주아지의 예비군이 될 것인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예비군이 될 것인가. ― 이것이 혁명의 운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견고성을 좌우한다. 프랑스에서 1848년과 1871년 혁명의 실패는 주로 농민 예비군이 부르주아지 편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10월 혁명의 승리는 농민 예비군을 부르주아지에게서 빼앗아 프롤레타리아 편으로 획득하였으며,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에서 도시와 농촌의 광범위한 근로인민대중을 지도하는 유일한 세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10월 혁명의 성격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본질도, 우리 프롤레타리아 정권의 국내 정책의 특징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단지 “노련한 전략가”가 용의주도한 수완으로 “교묘하게” “선택”한 정부의 상층기관이 아니다. 주민의 한 부분이나 다른 부분의 지지에 “적절하게 의거하는” 것도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와 근로농민대중간의 계급동맹이다. 자본주의 전복과 사회주의 최종 승리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를 조건으로 하는 계급동맹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것은 농민 운동의 혁명역량을 “조금” 과소평가하거나 “조금” 과대평가하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10월 혁명의 결과로 생겨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본질이다.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정권의 성격, 프롤레타리아 독재 자체의 토대이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근로인민의 전위인 프롤레타리아트가 근로인민의 수많은 비프롤레타리아층(소부르주아지, 소기업주, 농민, 지식인 등)이나 이들의 대다수와 맺는 계급동맹의 특수한 형태이다. 자본에 반대하는 동맹, 자본의 완전한 전복과 부르주아지의 반항 및 복구 시도에 대한 완전한 진압을 목적으로 하는 동맹, 사회주의의 최종적 완성과 공고화를 목적으로 하는 동맹이다.”(제24권, p. 311을 보라)3)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적 역사철학적인 라틴어 용어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보다 단순한 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자본의 지배를 전복하기 위한 투쟁에서, 자본을 전복하는 과정에서, 승리를 지키고 공고화하는 투쟁에서,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제도를 창건하는 사업에서, 계급의 완전한 폐지를 위한 모든 투쟁에서, 오직 한 계급 즉 대체로 도시 노동자와 공장 노동자, 산업 노동자만이 임금 노동자와 피착취 대중을 지도할 수 있다.”(제24권, p. 336을 보라)4)

 

이것이 레닌이 제출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론이다.

 

10월 혁명의 특징 중 하나는 이 혁명이 레닌이 제출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론의 모범이라는 점이다.

 

어떤 동지는 이 이론이 전적으로 “러시아적” 이론으로 러시아의 조건에만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전혀 옳지 않다. 레닌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도하는 비프롤레타리아 근로대중을 말할 때 러시아 농민만을 염두에 둔 건 아니다. 최근까지 러시아의 식민지였던 쏘련 변방의 근로대중도 염두에 두었다. 레닌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런 민족대중과의 동맹이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고 지칠 줄 모르게 주장했다. 레닌은 민족문제에 대한 여러 논문과 코민테른 대회의 연설에서도 누차 말하였다. 세계 혁명의 승리는 선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와 종속국 식민지 피억압민족간의 혁명적 동맹, 혁명적 블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피억압 근로대중, 주로 근로농민대중이 없는 식민지란 무엇이겠는가? 식민지 해방이란 그 본질에 있어 금융자본의 억압과 착취에서 비프롤레타리아 근로대중을 해방시키는 문제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이로부터 레닌의 프롤레타리아독재 이론은 단순히 “러시아적” 이론이 아니라 모든 나라에 반드시 적용해야할 이론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볼쉐비즘은 단지 러시아적 현상이 아니다. 레닌은 “볼쉐비즘은 모든 나라를 위한 전술의 모범이다”(제23권, p. 386을 보라)5)라고 했다.

 

이상이 10월 혁명의 첫 번째 특징의 구체적 성격이다.

 

10월 혁명의 이 구체적 특징에서 볼 때 뜨로츠끼의 “영구혁명론”은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

 

1905년에 뜨로츠끼가 가졌던 입장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말하지 않겠다. 1905년 뜨로츠끼는 농민을 “간단히” 무시하고, “차르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 정부”라는 구호, 즉 농민을 혁명에서 배제하는 구호를 제출하였다. 능란한 말솜씨로 “영구혁명”을 옹호하는 라제끄(Radek)조차 1905년 당시 “영구혁명론”이 현실과 동떨어진 “허공으로의 비약”이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모든 사람이 이 “허공으로의 비약”에 대해 재론할 가치가 없다고 인정한다.

 

또한 전쟁기간인 1915년에 뜨로츠끼가 가졌던 입장에 대해서도 길게 말하지 않겠다. 당시 뜨로츠끼는 “권력투쟁”이라는 논문에서 “우리는 제국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제국주의는 “부르주아 민족을 낡은 정부에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를 부르주아 민족에 대립시킨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뜨로츠끼는 농민의 혁명적 역할은 축소될 수밖에 없으며, 토지몰수 구호의 중요성은 이전과 같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알다시피 레닌은 이 논문을 분석하고서 “농민의 역할”을 “부정”하는 뜨로츠끼를 규탄하였다. “사실상 뜨로츠끼는 러시아의 자유주의적 노동자 정객들을 도와주고 있다. 이들은 농민의 역할에 대한 ‘부정’을 농민을 혁명적으로 고무시키는 것에 대한 거부로 이해한다.”(제18권, p. 318을 보라)6)라고 하였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뜨로츠끼의 최근저작을 보는 것이 오히려 좋겠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확립되어 뜨로츠끼가 “영구혁명론”을 검토하고 그 과오를 시정할 기회가 있었을 때 쓴 저작을 보자. 뜨로츠끼가 1922년에 쓴 ≪1905년≫의 “서문”에서 “영구혁명”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구혁명론’으로 알려진 러시아 혁명 발전의 성격에 관한 필자의 견해는 바로 1905년 1월 9일과 10월 파업사이에 형성되었다. 이 난해한 용어는 러시아 혁명의 당면 목표가 본질상 부르주아적 일지라도 이 목표에 머무를 수 없다는 사상을 표현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는 당면한 부르주아적 과업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정권을 장악한 후에는 혁명을 부르주아적 범위에 제한할 수 없다. 반대로 프롤레타리아 전위는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 정권을 잡자마자 봉건적 소유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공격해야 한다. 그럴 경우 혁명 투쟁 초기에 프롤레타리아트를 지지했던 부르주아 집단은 물론 프롤레타리아트가 정권을 잡도록 지원한 광범위한 농민대중과도 적대적 충돌을 하게 될 것이다. 농민이 압도적 다수인 낙후된 나라의 노동자 정부라는 모순된 지위는 오직 국제적 범위에서, 세계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무대에서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강조는 인용자 ― 쓰딸린)7)

 

이것이 뜨로츠끼가 말한 “영구혁명론”이다.

 

이 뜨로츠끼의 인용문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레닌저작의 위 인용문과 단지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뜨로츠끼의 “영구혁명론”과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사이의 심원한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초를 프롤레타리아트와 근로농민층과의 동맹이라고 말한다. 뜨로츠끼는 “프롤레타리아 전위”와 “광범위한 농민대중”과의 적대적 충돌로 간주한다.

 

레닌은 착취당하는 근로 대중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를 말한다. 뜨로츠끼는 “농민이 압도적 다수인 낙후된 나라의 노동자 정부라는 모순된 지위”를 본다.

 

레닌에 의하면 혁명 역량은 러시아 자체의 노동자 농민 속에 있다. 뜨로츠끼에 의하면 혁명의 필요한 역량은 오직 “세계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무대”에만 있다.

 

그런데 만일 세계혁명이 지체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우리 혁명에 희망이 있을까? 뜨로츠끼는 어떤 희망도 없다고 한다. “노동자 정부의 모순된 지위는 오직 … 세계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무대에서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계획에 의하면 우리 혁명에 남아있는 유일한 전망은 세계 혁명을 기다리다 자체모순 속에서 시들어 가며 썩어 없어지는 것이다.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무엇인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프롤레타리아트와 근로농민대중과의 동맹에 의거하여 “자본의 완전한 전복” 및 “사회주의의 최종적 완성과 공고화”를 목적으로 하는 정권이다.

 

뜨로츠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무엇인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광범위한 농민 대중”과 “적대적 충돌”을 일으키며, 이 “모순”의 해결을 오직 “세계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무대”에서만 찾는 정권이다.

 

이 “영구혁명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상을 부정하는 유명한 멘쉐비즘 이론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영구혁명론”은 농민운동의 혁명적 능력을 단순히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영구혁명론”의 농민운동에 대한 과소평가는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상을 부정하는 방향의 선두에 서있다.

뜨로츠끼의 “영구혁명론”은 멘쉐비즘의 변종이다.

 

이것이 10월 혁명의 첫째 특징에 관한 문제이다.

 

10월 혁명의 둘째 특징의 성격은 어떠한 것인가?

 

레닌은 제국주의, 특히 전쟁시기의 제국주의를 연구하여 자본주의 나라들의 경제적 정치적 불균등 발전 법칙, 비약적 발전 법칙을 발견하였다. 이 법칙에 따르면, 기업이나 트러스트, 산업이나 국가는 불균등하게 발전한다. 발전의 일정한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어떤 트러스트나 산업부문, 국가가 항상 앞서나가고, 다른 트러스트나 산업부문, 국가가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발전은 단속(斷續)적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나라의 발전은 중단되고 다른 나라의 발전은 비약적으로 진행된다. 발전 속도가 떨어진 나라가 기존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분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當然)”하다.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나라가 새로운 지위를 요구하는 것도 그 만큼 “당연”하다. 이런 상황에서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군사적 충돌은 불가피하다. 예를 들어 반세기 전 독일은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후진국이었다. 일본은 러시아에 비해서 후진국이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20세기 초에 독일과 일본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독일은 프랑스를 따라잡고서 세계시장에서 영국을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일본도 러시아를 압박하고 있다. 최근의 제국주의 전쟁은 이러한 모순 속에서 일어났다.

 

이 법칙의 출발점은 다음과 같다.

 

1) “자본주의는 극소수 ‘선진’국이 세계인구의 대다수를 식민지로 삼아 억압하고 금융적으로 질식시키는 세계체제로 되었다.”(레닌의 “제국주의” 불어판 서문, ≪전집≫, 제19권, p. 74을 보라)8)

 

2)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한 세계적으로 두 세 개의 강력한 강도들(미국, 영국, 일본)은 이러한 약탈물을 나누어 갖고, 약탈물을 나누기 위한 전쟁에 전 세계를 휘몰아 넣는다.”(같은 곳을 보라)

 

3) 억압적 금융지배 세계체제의 내적 모순은 악화되어 군사적 충돌을 불가피하게 한다. 이런 군사적 충돌은 혁명이 제국주의 세계 전선을 쉽게 뚫을 수 있게 하고, 개별 나라가 이 전선을 돌파할 수 있게 한다.

 

4) 이러한 돌파는 제국주의 전선의 사슬이 비교적 약한 곳, 즉 제국주의 방위가 가장 약하고 혁명이 가장 쉽게 발전할 수 있는 지점이나 나라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5)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승리의 가능성은 매우 높으며 거의 확실하다. 설사 이 나라가 자본주의적 의미에서 덜 발전한 나라이고, 다른 나라들이 자본주의를 유지하며 더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일지라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상이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의 간략한 기초이다.

 

10월 혁명의 둘째 특징은 무엇인가?

 

10월 혁명의 둘째 특징은 이 혁명이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론을 실천에 적용한 모범이라는 것이다.

 

10월 혁명의 이 특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혁명의 국제적 성격도, 거대한 국제적 위력도, 독특한 대외 정책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제 및 정치의 불균등 발전은 자본주의의 절대 법칙이다. 이 법칙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는다. 사회주의는 우선 몇몇 자본주의 나라에서, 심지어 한 나라에서도 독립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 이러한 나라의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사회주의 생산을 조직할 것이다. 그리고 곧 바로 나머지 자본주의 세계에 반대하여 나설 것이다. 다른 나라의 피억압 계급을 자기의 대의에 끌어들여 자본가들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키고, 필요하다면 착취계급과 그 국가를 반대하여 무력까지도 사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공화국이 후진국에 대한 다소 끈질기고 완강한 투쟁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 하에서 민족들의 자유로운 연합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제18권, p. 232-233을 보라)9)

 

각국의 기회주의자들은 단언한다. (자신들의 이론에 따라서, 혁명이 어디에선가 일어난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오직 산업이 발달한 나라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산업이 발달되면 될수록 사회주의가 승리할 가능성은 더 많다. 그래서 이들이 보기에 일국에서, 더욱이 자본주의가 덜 발달된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레닌은 전쟁 시기 훨씬 이전에 제국주의 국가들의 불균등 발전 법칙에 기초하여, 비록 자본주의가 덜 발전한 나라라 하더라도 사회주의가 승리할 수 있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론을 제기하여 기회주의자들을 논박하였다.

 

알다시피 10월 혁명은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론이 정확하다는 것을 완전히 실증하였다.

 

뜨로츠끼의 “영구혁명론”은 레닌의 일국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이론에 비추어 볼 때 어떤 문제가 있는가?

 

“우리 혁명”(1906년)이라는 뜨로츠끼의 소책자를 살펴보자.

 뜨로츠끼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직접적 지원 없이는 정권을 유지할 수 없으며 일시적 지배를 장기적인 사회주의 독재로 전환시킬 수 없다. 이는 한순간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10)

 

이 인용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나라에서, 즉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승리는 “유럽 프롤레타리아트 국가의 직접적 지원 없이는”, 다시 말해 유럽 프롤레타리아트가 정권을 획득하기 이전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론”과 “한 자본주의 나라에서 단독으로” 사회주의의 승리가 가능하다는 레닌의 테제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겠는가?

 

명백히 어떤 공통점도 없다.

 

뜨로츠끼의 이 소책자는 1906년에 출판되었다. 우리 혁명의 성격을 규정하기 어려웠던 때이다. 그래서 이 소책자는 의도하지 않은 오류를 가지고 있고, 후기 뜨로츠끼의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가정하자. 그럼 뜨로츠끼의 다른 저서인 “평화강령”을 검토해 보자. 이 책은 1917년 10월 혁명 전야에 출판되었고, 현재(1924년) “1917년”이라는 책에 편입되어 재출판 되었다. 이 소책자에서 뜨로츠끼는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론 즉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승리이론을 비판했다. 그리고 유럽합중국이라는 구호로 레닌의 이론에 대항했다. 뜨로츠끼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승리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사회주의의 승리는 유럽의 주요국(영국, 러시아. 독일)에서 승리하여 유럽합중국으로 연합해야 가능하고 그렇지 않다면 전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단적으로 “러시아나 영국의 혁명은 독일의 혁명 승리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뜨로츠끼는 말한다.

 

“유럽합중국 슬로건에 반대하는 어느 정도 구체적이고 유일한 역사적 원리는 스위스에서 출판된 ‘사회민주주의자’(당시 볼쉐비끼 중앙기관지 ― 쓰딸린)에 다음과 같이 정식화 되었다. ‘경제 및 정치 발전의 불균등성은 자본주의의 절대법칙이다’ 이로부터 ‘사회민주주의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승리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개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유럽합중국 건설을 선결조건으로 하지 않는다. 각국의 자본주의 발전은 불균등적이다.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불균등성 자체가 매우 불균등적이다. 영국이나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는 자본주의 수준이 같지 않다. 그러나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나라들과 비교하면 이들 국가는 모두 자본주의 ‘유럽’으로 사회혁명을 할 만큼 성숙되었다. 어느 나라도 자기의 투쟁에서 다른 나라의 혁명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은 기본사상이다. 이 사상을 반복하는 것은 유익하고 필요하다. 국제적 공동행동의 사상이 소극적인 방관(傍觀)주의로 바뀌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나라를 기다리지 않고 한 나라의 토대위에서 투쟁을 시작하고 계속한다. 우리의 선도적 투쟁이 다른 나라의 투쟁을 자극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만약 다른 나라를 자극하지 못한다면 (역사적 경험과 이론적 추론이 입증하듯이)절망적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 혁명이 보수적 유럽에 맞서 저항을 계속해야 한다거나 사회주의 독일이 자본주의 한 가운데서 고립되어 있다면 이는 절망적인 것이다.”11)

 

보다시피 우리 앞에 유럽의 주요국에서 사회주의의 동시 승리라는 이론이 놓여있다. 이 이론은 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승리라는 레닌의 혁명이론을 원칙적으로 배척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사회주의 완전 승리를 위해, 구제도 회복을 완전히 저지하기 위해 몇몇 나라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 노력이 필요하다. 유럽 프롤레타리아트가 우리 혁명을 지지하지 않았다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총공격을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러시아 혁명이 유럽 혁명운동을 지지하지 않았다면 유럽 혁명운동은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수립된 이후 발전한 속도로 발전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지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가 우리 혁명을 지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럽 노동자들이 우리혁명에 공감하는 것, 제국주의자들의 간섭책동을 막아내고자 하는 결의 ― 이 모든 것이 지지이고 실질적 도움이 아닌가? 의심할 나위 없이 그렇다. 유럽 노동자뿐 아니라 식민지 및 종속국의 지지와 도움이 없었다면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궁지에 몰렸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지지와 도움이 우리 붉은 군대의 위력 및 사회주의 조국을 수호하려는 러시아 노동자 농민의 결의와 결합하여 제국주의자들의 공격을 격퇴하는데 충분하였는가? 그리고 중요한 건설 사업에 필요한 조건을 확보하는데 충분하였는가? 그렇다. 충분하였다. 이러한 공감이 점점 커지는가 아니면 작아지는가? 확실히 커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주의 경제의 조직화를 밀고나가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반대로 서유럽 노동자 및 동유럽 피억압민족을 지원하기 위해서도 유리한 조건이 있는가? 그렇다 있다. 이는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7년이라는 역사가 웅변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미 노동고조(勞動高調)가 힘찬 물결로 일렁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러시아 혁명이 보수적인 유럽에 맞서 견딜 수 없으리라는 뜨로츠끼의 주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일 뿐이다. 첫째로, 뜨로츠끼는 우리 혁명의 내부역량을 올바로 통찰하지 못했다. 둘째로, 뜨로츠끼는 서구 노동자와 동구 농민이 우리 혁명에 보내는 정신적 지지의 무한한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셋째로, 뜨로츠끼는 오늘날 제국주의를 좀먹고 있는 내적 허약증을 알지 못했다.

 

뜨로츠끼는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론을 비판하는데 정신이 팔여 1917년에 출판되고 1924년 재판된 “평화강령”에서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논거를 산산 조각냈다.

 

그런데 혹시 이 소책자도 시대에 뒤떨어지고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현재의 뜨로츠끼 견해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최근 저작, 즉 러시아 일국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승리한 이후에 쓴 글을 보자. 예를 들어 소책자 “평화강령”의 1922년 신판에 쓴 “후기”를 보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평화강령’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국의 범위 내에서는 승리할 수 없다고 반복했다. 이 주장을 우리 쏘비에뜨 공화국의 5년간에 걸친 경험이 논박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부당하다. 노동자 국가가 일국에서 그것도 후진국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저항을 계속해온 사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엄청난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힘은 보다 더 발전되고 보다 더 문명화된 국가라면 진실로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 및 군사적 의미에서는 국가를 유지하였지만 사회주의 사회 수립에 도달하지 못했고 도달하려는 시작도 못했다. … 다른 유럽국가에서 부르주아지가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는 한 우리는 경제적 고립국면을 타파하기 위해 부득불 자본주의 세계와 타협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타협은 기껏해야 우리의 경제적 재난을 약간 완화시키고 한두 걸음 나가는데 도움을 줄 뿐이다. 아무래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실질적 증진은 오직 유럽의 주요국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한 이후에라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강조는 쓰딸린)

 

뜨로츠끼가 이렇게 말한 것은 명백히 실제상황과 어긋나더라도 “영구혁명론”을 최종적 파산으로부터 구하려는 집요한 시도이다.

 

뜨로츠끼의 말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주의 사회수립에 “도달하지 못했을”뿐 아니라 “도달하려는 시작도 못 하였다”는 것에 귀결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 세계와 타협”하려는 기대가 있었는데 그 타협도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주의 경제의 실질적 증진”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유럽의 주요국에서” 승리하기 전에는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유럽에서 아직까지 어떠한 승리도 없다. 그러면 러시아 혁명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길 밖에 없다. 썩어 없어지든지 아니면 부르주아 국가로 타락하든지.

 

뜨로츠끼가 근래 2년 동안이나 우리 당의 “타락”에 관해 말한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뜨로츠끼가 작년에 우리나라의 “멸망”을 예언한 것도 전혀 놀랄 일은 아니다.

 

이 기괴한 “이론”과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승리”에 관한 레닌의 이론이 어떻게 서로를 용납할 수 있겠는가?

 

이 기괴한 “전망”과 신경제정책으로 우리가 “사회주의 경제의 기초를 건설”할 수 있다는 레닌의 전망이 어떻게 서로를 용납할 수 있겠는가?

 

이 “영구적인” 절망과 예컨대 레닌의 다음과 같은 말이 어떻게 서로를 용납할 수 있겠는가?

 

“사회주의는 이제 먼 미래의 문제가 아니다. 혹은 추상적 신기루나 우상(偶像)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낡고 잘못된 우상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사회주의를 일상생활에 끌어들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나아갈 바를 찾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임무이고 우리시대의 임무이다. 다음과 같은 확신을 표하면서 말을 마치고자 한다. 이 임무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전의 임무에 비해 아무리 생소할지라도, 또 아무리 많은 어려움을 불러오더라도 어떻게 하든 ― (미래의) 어느 날이 아니라 수년 내에 ― 우리는 일심 단결하여 기어코 이 임무를 해내고야 말 것이다. 그리하여 신경제정책 하의 러시아는 사회주의 러시아로 될 것이다.”(제27권, p. 366를 보라)12)

 

뜨로츠끼의 “영구적인” 절망과 예컨대 레닌의 다음과 같은 말이 어떻게 서로를 용납할 수 있겠는가?

 

“실로, 모든 대규모 생산수단에 대한 국가의 지배, 국가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트, 이러한 프롤레타리아트와 수천 수백만 소농 및 영세농과의 동맹, 농민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확고한 지도 등등 ― 이것들로 인해 협동조합만으로도, 오직 협동조합만으로도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데 충분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예전에 협동조합을 장사꾼이라고 얕잡아 보았고 신경제정책 하의 지금도 어떤 측면에서는 역시 얕잡아 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것들은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아닌가? 이는 아직 사회주의 사회의 수립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데 필요하고도 충분한 모든 것이다.”(제27권, p. 392를 보라)13)

 

명백하다. 이 두 관점은 서로 대립되며 어떤 식으로도 조화될 수 없다. 뜨로츠끼의 “영구혁명론”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레닌의 이론을 부인하고, 반대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레닌의 이론은 “영구혁명론”을 부인한다.

 

우리 혁명의 역량과 능력을 믿지 않는 것,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역량과 능력을 믿지 않는 것 ― 이것이 “영구혁명론”의 근원이다.

 

지금까지 “영구혁명론”의 하나의 측면만을 지적해 왔다. 대개 농민 운동의 혁명적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제 합당하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다른 측면을 보충해야 한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힘과 능력도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

 

뜨로츠끼 이론과 일국에서 더욱이 후진국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는 “서유럽의 주요국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먼저 승리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멘쉐비끼의 일반적 이론 간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본질상 전혀 차이가 없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뜨로츠끼의 “영구혁명론”은 멘쉐비즘의 변종이다. 요즘 우리 출판계에 얼빠진 외교관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영구혁명론”을 몰래 들여와서 레닌주의와 서로 용납될 수 있는 듯이 팔아먹고 다닌다. 물론 이들도 영구혁명론이 1905년에는 타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뜨로츠끼의 잘못은 1905년 당시 영구혁명론을 적용할 수 없는 상황에 적용하려고 시도하여 너무 앞서나간 데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 예컨대 1917년 10월에는 완전히 타당한 이론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외교관들 중에 라제끄가 가장 중심적 인물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전쟁은 토지와 평화를 갈망하는 농민이 소부르주아 당들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전쟁은 농민이 노동계급과 전위당인 볼쉐비끼의 지도를 받게 했다. 그리하여 노동계급과 농민의 독재가 아니라 농민에 의거한 노동계급의 독재가 가능하게 하였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뜨로츠끼가 레닌에 반대하여 제출한 주장(즉 “영구혁명론” ― 쓰딸린)은 사실상 역사발전의 두 번째 단계임이 증명되었다.”

 

이는 말마다 왜곡이다.

 

전쟁이 “노동계급과 농민의 독재가 아니라 농민에 의거한 노동계급의 독재가 가능하게 하였다”는 말은 옳지 않다. 실제로 1917년 2월 혁명은 부르주아 독재와 특이하게 엉킨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가 실현된 것이다.

 

라제끄가 쑥스러워 입에 올리지 못한 “영구혁명론”은 1905년에 로자 룩셈부르크와 뜨로츠끼가 제출한 것이 아니다. 사실은 빠르부스와 뜨로츠끼에 의해 제출되었다. 10개월이 지난 이제야 자신의 잘못을 고치고 빠르부스는 “영구혁명론”을 제출하여서는 안 되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라제끄는 빠르부스의 동반자인 뜨로츠끼도 역시 공평하게 비난해야 한다.

 

1905년 혁명에 의해 파기되었던 “영구혁명론”이 “역사발전의 두 번째 단계” 즉 10월 혁명 시기에 와서 정당한 것으로 입증되었다는 것은 옳지 않다. 10월 혁명의 전체 과정과 발전은 “영구혁명론”이 완전히 파산하였다는 것과 레닌주의의 기초와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감언이설과 얼빠진 외교술로는 “영구혁명”과 레닌주의 사이에 놓여있는 거대한 심연을 메울 수 없다. (다음 호에 계속)


1) J.V. 쓰딸린의 저서 ≪10월 혁명의 길에서≫는 1925년 1월과 5월 두 번에 걸쳐 발간되었다. 이 책에 들어 있는 논문과 연설은 쓰딸린 ≪전집≫ 제3권에 수록되어있다. 쓰딸린은 1924년 12월에 이 서론을 끝냈으나, ≪10월 혁명의 길에서≫에만 전문을 발표하였다. 이 서론은 보통 ≪10월 혁명과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전술≫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선집과 단행본 외에 ≪레닌주의의 제 문제≫의 모든 판에 실려 있다. 일부는 연방주의에 반대하여라는 논문의 주해로 쓰딸린 ≪전집≫ 제3권에 수록되어 있다.

2)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김남섭 옮김, 돌베개, 1992, p. 67, 68.

3)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9, p. 381.

4) 같은 책 p. 420.

5) 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허교진 옮김, 소나무, 1991, p. 104.

6)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1, p. 420.

7) Leon Trotsky, 1905, http://www.marxists.org, p. 4.

8) 레닌, ≪제국주의론≫,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1988, p. 33.

9)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1, www.marx2mao.com, p. 342-344.

10) Leon Trotzky, Our Revolution, New York, Henry Holt And Company

1918, p. 136―137.

11) Leon Trotsky, “The Program of Peace ― The Socialist United States of Europe”, https://www.marxists.org, p. 11.

12)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33, p. 443.

13)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33, p.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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