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당한 사회주의: 쏘련 붕괴의 배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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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키란(Roger Keeran)과 토마스 케니(Thomas Kenny)

번역: 편집부

 

[차례]

서문

1. 서론

2. 쏘련 정치에서의 두 가지 경향

3. 제2차 경제

4. 약속과 예언, 1985-86

5. 전환점, 1987-88

6. 위기와 붕괴

7. 결론과 암시

8. 끝 맺음말 – 쏘련 붕괴의 설명들에 대한 비판

후주

 

 

 

 

 

 

2. 쏘련 정치에서의 두 가지 경향 ―

 

한편 레오니드 브레즈네프는 쏘비에뜨의 최고지도자로 부상했고 1982년까지 자리를 유지했다. 고르바쵸프와 그 일당은 쏘련의 모든 잘못에 대한 책임을 브레즈네프에게 전가했다. 이들은 브레즈네프의 좋지 않은 건강 및 사치스런 취향, 개인적인 자만심, 정치적 우유부단을 조롱하였다. 브레즈네프는 침체와 부패의 상징이 되었다. 브레즈네프에 대한 이런 평가는 불공평하지만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쏘비에뜨 역사학자인 드미뜨리 볼꼬고노프(Dmitri Volkogonov)에 따르면 브레즈네프는 무엇보다도 “평화롭고 조용하고 평온하며 갈등이 없는”것을 원했다. “개혁에 겁을 먹었다” 흐루쇼프의 직무 순환 정책을 “간부의 안정화”정책으로 대체하면서 구성원의 변화를 거부했다. 브레즈네프가 의장이었던 네 번의 당 대회에서 결함을 인정했으나 과감한 해결책에는 저항했다. 거기다 고령과 무능력으로 지도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1970년 이후 건강이 좋지 않던 브레즈네프는 자신도 누구보다 이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1976년에는 심각한 뇌졸중을 앓았고, 그 후 1982년 사망할 때 까지 여러 차례 심장마비와 발작을 일으켰다. 생애 마지막 5년 동안, 병으로 너무나 약해져서 국가나 당 생활에서 적극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면으로 대화할 수밖에 없었다.1)

 

브레즈네프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브레즈네프 하에서 쏘련이 겪은 대부분의 문제들이 흐루쇼프에서 기원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덮어버렸다. 브레즈네프는 쓰딸린의 특정 민족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거부하지 않거나 사회주의 합법성에 대한 초기의 침해에 대해 비난하지 않고 흐루쇼프의 극단적인 정책 중 일부를 뒤집었다. 중앙집중식 계획으로 돌아갔고, 임기제한제를 “간부 안정화”로 대체하였다. 공업과 농업 형식으로 분리된 당 조직은 단일 당 조직으로 대체했다. 대중적 입당은 엄격한 입당 기준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전인민의 국가”와 “전인민의 당”은 유지되었고 다른 의미를 부여받았다. ≪쁘라브다≫는 이 용어가 쏘련공산당이 “계급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오히려) 쏘련공산당이 노동계급의 당이었고 여전히 노동계급의 당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2) 또한 브레즈네프 정책은 국제연대에 대한 확고한 책임을 보여주었다. 미국과 대등한 군사적 지위를 달성했고, 동유럽과 쿠바의 사회주의국가 및 베트남, 니카라과, 앙골라, 아프가니스탄 등의 혁명투쟁과 남아공의 반인종차별 운동을 지원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브레즈네프는 쏘비에뜨 정치의 양 극단이나 경향 사이를 누비며 지나갔다. 쏘비에뜨의 작가 표도르 불라츠끼(Fedor Burlatsky)는 브레즈네프가 쓰딸린과 흐루쇼프를 “표절했다”고 말한다.3) 스티븐 코헨도 브레즈네프를 당내 대립되는 두 경향의 중간자로 평가한다.

 

흐루쇼프가 1964년에 실각할 때까지 공산당 내부에 적어도 세 가지 분파가 형성되었다. 하나는 반―쓰딸린주의 분파로 사회에 대한 통제의 보다 광범위한 완화를 요구했다. 다른 하나는 신―쓰딸린주의 분파로 흐루쇼프가 국가를 심각하게 약화시킨다고 비난하고 원상태로 회복할 것을 요구했다. 마지막으로 보수적인 분파로 탈―쓰딸린 이후의 당시 상황을 보존하는데 전념하여 이전으로 되돌아가려 하거나 앞으로 더 전진하고자 하는 주요 변화에 반대하였다. 이후 20년 동안 이 분파들의 투쟁은 다양한 분야에서 주로 암묵적이고 드러나지 않게 벌어졌다. 브레즈네프가 이끄는 다수파인 보수적 분파는 신―쓰딸린주의에 약간의 양보를 하면서 약 20년 동안 쏘련을 통치하였다. 개혁운동은 간신히 살아남아 1985년 고르바쵸프와 함께 권력을 잡았다.4)

 

흐루쇼프의 일탈적 정책이 실패하고 브레즈네프가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저했음에도 불구하고 쏘비에뜨 경제는 지속적인 활력을 보여주었다. 1950년대 쏘련의 발전 속도는 대부분 선진국들의 두 배였다. 1950년에서 1975년 사이에 쏘련의 공업생산지수는 쏘비에뜨 수치에 따르면 9.85배, CIA 수치에 따르면 6.77배 증가했다. 반면에 미국은 2.62배 증가하는데 그쳤다.5) 세계 과학자의 4분의 1이 쏘련에 헌신했고, 쓰뿌뜨니끄의 발사는 쏘련의 과학적 성취를 상징했다. 임금과 생활수준은 꾸준히 상승했다. 대부분의 직업은 주 40시간을, 가장 힘든 일은 주 35시간을 일했다. 전반적인 연금 체계도 수립되었다. 소비재가 점점 더 늘어나면서 “쏘련과 미국의 경제 및 사회발전 수준의 격차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1980년대 중반에 쏘련은 세계 공산품의 20%를 생산했다. 혁명 당시에는 전체의 4%보다 훨씬 적었었다. 쏘련은 석유, 가스, 철 금속, 광물, 트랙터, 철근 콘크리트, 모직 제품, 신발, 사탕무, 감자, 우유, 계란 및 다른 제품들에서 세계를 주도했다. 수력발전, 화학제품, 기계, 시멘트 및 면제품의 생산은 미국에 버금갔다.6) 공업생산의 연간증가율은 1960-1965년에 4.7%, 1965-1970년에 5.8%, 1970-1975년에는 6.9%로 증가했다.7) 경제적 증진(增進)은 대부분 쓰딸린이 단행한 천연자원 및 중공업에 대한 집중투자 때문에 가능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러한 성장은 값싸게 이용할 수 있는 방대한 천연자원, 특히 석유, 가스, 석탄 및 철광석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성과는 1970년대에 들어와 주객관적 문제들로 인해 서서히 손상되었다. 객관적 문제는 세 가지가 두드러졌다. 첫째, 천연자원의 상대적 고갈로 가스 및 석유, 석탄의 체굴 비용이 증가했다. 둘째, 제2차 세계대전의 인구학적 결과로 인해 노동인구가 대폭 줄었다. 셋째, 새로운 컴퓨터 기술을 채택하려는 도전은 미국이 의도적으로 쏘련에 판매한 결함 있는 컴퓨터 칩으로 인해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러한 객관적 문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관적 문제였다. 정책의 문제, 특히 중공업에서 소비재로의 투자전환과 임금평준화였다. 그리고 브레즈네프가 마지막 몇 년 동안 계획과 인센티브 문제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결과로 1973년에서 1985년 사이에 공업생산 연간성장률은 여전히 긍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여러 연구에 의하면, 2.3%인 미국에 비해 4.6%로 훨씬 더 견실했다)8), 문제의 징후들이 나타났다. 1979년에서 1982년 사이에, 전체 공업생산량은 40% 감소했다. 농업생산량도 1978년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사회생산 효율성지표는 둔화되었다.” 1976년에서 1985년 사이에 볼가(Volga)지역의 석유생산은 감소했고, 마찬가지로 돈(Don) 석탄 매장지에서의 석탄 및 우랄 지역의 목재, 꼴라(Kola)반도의 니켈도 감소했다. 여러 연구에 의하면 생활수준 상승이 멈추었다.9)

 

브레즈네프의 중간적 입장은 민족문제에 대한 태도와 정책에도 반영되었다. 어떤 면에서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와 같이 자기만족적 성격을 드러냈다. 브레즈네프는 공화국들의 퇴보와 “쏘비에뜨 애국주의”의 고취를 찬양했다. “쏘비에뜨 민족국가들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단결되었다”고 선언했다.10) 서기장은 부패와 친족주의가 넘쳐나는 많은 공화국에 비(非)투쟁적 접근방식을 취했다. 예를 들어 우즈베끼스딴에서는 당 대표의 친인척 14명이 당 기관에서 일하면서 뇌물수수, 독단, 부정행위, 그리고 “악질적인 법률위반”을 횡행(橫行)한 것으로 알려졌다.11)

 

다른 면에서 브레즈네프의 접근법은 레닌 및 쓰딸린의 자세와 닮았다. 반동적 민족주의자들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여 사회주의 편에 서게 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우끄라이나와 그루지아에서 민족주의와 반러시아 감정을 부추긴 지도자를 교체했다. 또한 역사학자 이츠하크 브루드니(Yitzhak Brudny)가 러시아 민족주의자를 위한 “포용정책”이라 부른 것을 채택했다. 일부는 이 정책을 대러시아 우월주의에 영합하는 비맑스주의라고 보았다. 반면 다른 이들은 흐루쇼프의 자유화 및 시장개혁, 그리고 서구 세력의 침입에 대한 반감을 공유한 기초 위에서 러시아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당한 시도라고 생각했다. 이 계획은 러시아 애국주의에 호소하여 전쟁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심화하려는 노력과 흡사하다. 브루드니는 브레즈네프의 포용정책은 지속적 지지를 끌어내는데 결국 실패했다고 결론 내렸다. 왜냐하면 이 정책이 민족주의 지식인에게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체제에서의 물질적 지분”을 제공하려고 했기 때문이다.12) 이와 같이 브레즈네프의 민족정책과 그 결과는 뒤죽박죽이었다. 가장 좋았을 때 부하린, 흐루쇼프, 그리고 고르바쵸프에게 부족하였던 민족주의자들을 포용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즉 과거의 민족 감정과 싸우거나 러시아 민족주의 지식인을 설복하려고 하였다.

 

브레즈네프시대 말기에 많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누적되었다. 그러나 이 상황을 문제가 있다고 보는 개혁주의자들과 문제가 없다고 보는 브레즈네프 “보수주의자”가 양립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문제에 동일한 비중을 두는 것은 아니지만 당 지도부와 외부 전문가들 사이에는 생산성과 경제성장이 우려되는 상황이라는 전반적인 함의가 있었다. 브레즈네프 지도부는 1979년 10차 5개년 계획이 끝날 무렵에 이 문제를 다루었다.13)

 

한편으로 문제를 인식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문제의 기원을 설명하고 해결책을 궁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두 가지 문제이고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경제문제에 대한 분석은 전통적인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뉜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부하린과 흐루쇼프에 연결되는 진영과 레닌과 쓰딸린에 연결되는 진영이다. 전자는 경제문제가 지나친 중앙 집중화 때문으로 보았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분권화, 시장메커니즘의 활용, 그리고 특정 형태의 개인기업의 허용이었다. 모쉐 르윈(Moshe Lewin)은 1975년에 쓴 글에서 “1928-29년 부하린의 반(反)쓰딸린주의적 강령에 대한 구상(構想)을 현재의 개혁가들이 얼마나 많이 채택하였는지 알고 놀랐다.”고 말했다.14) 이런 경향의 쏘비에뜨 경제학자는 소수만을 대표했지만 주요 4대 학술기관 중 3곳을 장악했다.15) 이 진영의 주도적인 경제학자는 아벨 아간베갼(Abel Aganbegyan)으로 나중에 고르바쵸프의 핵심 조언자가 되었다.

 

경제학자들의 다수는 중앙 집중 계획 체계를 개혁하고 현대화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성장과 생산성 문제가 발생한 것은 계획과 경영 방법이 생산력의 발전과 보조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는 문제가 중앙 집중화 때문이 아니라 중앙 집중화가 되지 않아서 발생했다. 예를 들어 건설사업에서 공사를 마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거나 완성되지 못한 프로젝트가 넘쳐났는데 이는 중앙의 계획입안자가 지방 당국을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방차원에서는 제때에 완공할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엔지니어, 생산자, 건설자들 간에 충분한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공사는 지연되었다.16)

 

생산성은 종종 잘못된 경영 방법과 보상 체계 때문에 저하되는 경우가 많았다.17) 일부 주요 경제학자들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임금 인센티브를 이용하고자 했다. 이들은 쏘비에뜨의 속담인 “그들은 임금을 주는 척하고 우리는 일하는 척한다”는 생산적인 노동자가 더 많은 임금을 받는 쓰딸린의 임금 체계 때문이 아니라 임금 평준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980년 빅토르와 엘렌 펠로는 생산성 향상을 위한 방법에 대해 주요 경제학자들 사이에 벌어진 다른 논쟁을 소개했다. 펠로는 쏘련이 흐루쇼프 직후 생산성 저하에 직면하고 극복한 것에 주목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60년 초에 쏘련은 다시 광범위한 토론을 수행하여 경제 계획과 경영을 한층 더 현대화하고 개선하였다. … 과거의 경험은 쏘비에뜨가 당면한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준다.”18)

 

쏘련은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후 유리 안드로뽀프가 서기장이 되었을 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훌륭한 기회를 잡았다. 안드로뽀프는 탁월한 자질, 맑스―레닌주의 이론에 대한 확고한 기초, 풍부한 리더십 경험, 쏘련이 직면한 문제에 대한 폭넓은 이해, 그리고 개혁에 대한 명확하고 강력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시간이 없었다. 취임 3개월 만에 심각한 신장 이상을 일으켰고, 15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드로뽀프의 1년”(1983) 동안 고르바쵸프가 택한 결국 재앙이 된 것과 완전히 다른 전도유망한 개혁 방안을 보여주었다.

 

안드로뽀프는 1914년 스따브로뽈(Stavropol)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철도 노동자였다. 16살에 학교를 그만 두고 전신기사로 일했고, 볼가(Volga) 강에서 선원으로도 일을 했다. 1936년 부터 코소몰(Kosomol, 공산주의 청년동맹)의 여러 직책을 역임했고, 핀란드 국경에 있는 까렐로―피니쉬 자치공화국(Karelia)의 제1서기가 되었다. 전쟁 때 독일이 까렐리야를 점령하자 독일에 반대하는 빨치산투쟁에 참가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안드로뽀프는 까렐리야 공산당의 제2 서기장이 되었고, 1951년에는 중앙위원회에서 일하기 위해 모스끄바로 갔다. 1953년에 헝가리 주재 참사관을 지냈고 1954년에는 대사가 되었다. 1957년에서 1962년 사이에 다른 공산국가들을 상대하는 중앙위원회 국제부에서 일했다. 1962년에는 중앙위원회의 서기가 되었고 1967년에는 15년 동안 재임했던 KGB 의장이 되었다19)

 

안드로뽀프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력서보다 훨씬 더 인상적이다. 한창 때에 안드로뽀프는 쏘련공산당(CPSU)에서 세 명의 탁월한 인물과 함께 일했다. 까렐로―피니쉬 공화국에 있는 동안, 구 볼쉐비끼인 오토 꾸시넨(Otto Kuusinen)의 추종자가 되었다. 쿠시넨은 1905년부터 레닌과 전우(戰友)였고, 핀란드 공산당을 창당하였으며 안드로뽀프가 까렐리야 공산당의 제2서기였을 때 제1서기였다. 1964년 죽을 때까지 쏘련공산당의 중요한 인물이었고, 안드로뽀프의 능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확실히 도움을 주었다. 안드로뽀프가 헝가리 주재 대사로 있을 때에는 구 볼쉐비끼 몰로토프 외무인민위원 밑에서 일했다. 이 때 쿠시넨 다음으로 후견인이 된 미하일 수슬로프(Mikhail Suslov)와 가까워졌다. 수슬로프의 당 활동은 공산청년동맹에 가담했던 191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슬로프는 맑스 레닌주의의 경건한 연구가이며 쓰딸린,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시대의 사상적 지도자였다. 몇몇 (정치)평론가들은 안드로뽀프가 수슬로프를 모범으로 삼았다고 믿었는데, 안드로뽀프의 엄숙, 지성, 노동관이 수슬로프와 닮았기 때문이다. 1982년 수슬로프가 사망했을 때, 안드로뽀프가 당의 사상적 지도자의 자리를 대신했다.20)

 

안드로뽀프의 이력은 대단한 용기, 침착함, 그리고 단호함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돋보였다. 먼저 빨치산으로서의 전시 임무였고 다음에 헝가리 대사가 된 것이다. 헝가리에서의 안드로뽀프 활동은 다소 불확실하고 모순된 증언도 종종 있지만, 그가 매우 험한 물살을 헤치고 성공적으로 항해를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헝가리 공산당은 인구의 대부분이 농민이고 가톨릭교도인 국가에서 사회주의를 세우려고 하고 있었다. 헝가리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은 기간을 포함하여 25년간의 파시스트 독재에서 이제 막 해방되었다. 1954년 안드로뽀프가 도착했을 때, 헝가리 공산주의자들은 내부 분열과 대중의 동요를 포함한 많은 문제들에 직면해 있었다. 1956년 10월 말에 헝가리 폭동이 일어났다. 파시스트 조직들이 대중의 불만을 이용하여 공산주의자들과 지지자들을 암살하고, 테러와 린치를 가했다. 이는 11월 초 쏘련군이 개입한 후에야 끝났다.21)

 

폭동이 한창일 때, 안드로뽀프는 모스끄바에서 파견한 아나스따스 미꼬얀(Anastas Mikoyan) 및 수슬로프와 함께 부다페스트의 쏘련 대사관에서 행동을 취했다. 이 세 사람은 마샬 게오르기 주꼬프(Marshall Georgii Zhukov)와 함께 쏘비에뜨의 대응을 지휘하였다, 헝가리 공산주의자들에게 조언을 하면서 결국 쏘련군을 움직였다. 폭동이 일어났을 때 헝가리 공산당은 분열로 진이 빠진 상태였다. 임레 나지(Imre Nagy) 총리는 점점 우익의 압력에 굴복하고 있었다. 안드로뽀프는 공산당원 중 대중적 신망이 있는 야노스 까다르(Janos Kadar)가 헝가리 당의 지도력을 장악하게 하였다. 그 후 20년 동안 카다르는 동유럽에서 가장 개혁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분권화, 이윤 분배, 협동 농장을 도입했고, 다양한 종류의 개인 기업을 허용했으며, 공산당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회복했다. 1957년 3월 헝가리를 떠난 안드로뽀프가 어떻게 헝가리 개혁을 평가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어째든 최악의 고비에서 카다르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안드로뽀프의 지혜와 화염 속의 냉정함은 수슬로프의 감탄을 자아냈다.22)

 

헝가리 사태 이후, 안드로뽀프는 다른 어려운 과제들을 처리했다. 1963년에는 중국과 팽팽한 협상을 벌인 수슬로프가 이끄는 대표단에 합류했다. 이 협상은 중국과 쏘련 사이에 있었던 최근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 KGB 수장이 되어 알렉산드로 솔제니찐과 같은 반체제 지식인들을압한 것에 대한 책임을 졌다. 안드로뽀프는 공개적으로압행동을 기꺼이 옹호하고 서구 정치평론가들과 예브게니 엡투셴코(Yevgeny Yevushenko, ※‘Yevgeny Yevtushenko’ 오기인 듯―역자) 같은 쏘련 지식인들의 비판을 이겨냈다.것은 반사회주의 분자들에게 언론을 넘겨준 고르바쵸프의 대실책을 피했어야 했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안드로뽀프는 또한 KGB 수장으로서, 고위직의 부패를 조사하는 용기와 신념을 보여주었다. KGB의 감시로 인해, 당 최고회의 간부회와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부패, 뇌물 수수, 횡령에 종지부를 찍었다. 게다가, 1981년에 안드로뽀프의 부관은암시장에 타고앉아 감미로운 개인생활을 즐기는 패거리” 일부를 폭로하고 체포했다. 이중에는 브레즈네프의 딸과 사위도 있었다. 서기장 가족의 범죄를 조사하는 것도 안드로뽀프는 당연하다고 보았던 것이다.23)

 

동시에 안드로뽀프는 다른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개성을 지녔다. 공식적 교육은 리빈스끄 기술학교와 당 간부 학교를 졸업하는 것에 그쳤지만, 안드로뽀프는 최고의 지성을 지녔고, 폭넓은 독서와 국제적인 문화 소양을 갖추었다. 헝가리 대사로 있는 동안, 그는 헝가리어를 배우고 헝가리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했으며, 주재국을 사로잡은 재주를 익혔다. 첫째 딸 이리나(Irina)는 모스끄바 극장의 유명한 배우 알렉산드로 필리뽀프(Alexander Filipov)와 결혼했고, 둘째 딸은 음악 잡지의 부편집자였다. 두 딸은 안드로뽀프와 예술가 및 예능인을 이어주었다. 그는 영어를 배우고, 미국 신문, 잡지, 소설을 읽고, 글렌 밀러(Glenn Miller)나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와 같은 음악가를 좋아했다. 고르바쵸프는 서구여행을 선호하는 반면, 안드로뽀프는 헝가리, 베트남, 조선, 외몽골, 유고슬라비아, 중국, 알바니아 등 사회주의 국가를 방문하는 것으로 여행을 제한했다. 행동에 자신감이 넘쳤고 조용하고, 말을 잘하고, 차분하고, 통제력 있고, 진지하였다. 브레즈네프 밑에서 상층부가 고령과 질병, 이완 등으로 인해 “레닌주의자의 규범”을 약화시키고 있을 때, 안드로뽀프는 조신(操身)하게 살았으며 일중독자로 널리 알려졌다.24)

 

공산주의자들은 안드로뽀프의 문제 장악력, 개혁 구상, 변화의 단호한 실행에 희망을 걸었다. 미국 학자인 스티븐 코헨은 안드로뽀프가 브레즈네프 정치국에서 “가장 개혁적”이며, 정통 공산주의자들이 현명하게 개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유일한 정치국 일원이었다고 말했다.25) 예고르 리가쵸프는 “안드로뽀프는 일반적인 일을 구체적인 업무로 변환시키는 진정한 리더의 덕목을 갖춘 드문 인재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국가 발전 전망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있으며 고르바쵸프와 달리 “즉흥적이고 부주의한 접근”을 싫어했고 동시에 “깊이 있고 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사회주의의 개혁을 계획했다.”고 말했다.26)

 

쏘련이 봉착한 문제에 대한 안드로뽀프의 분석과 정책제안은 1982년 11월과 12월 그리고 1983년 6월에 중앙위원회에 제출한 세 번의 연설과 1983년에 쓴 맑스 서거 100주년 기념논문에서 볼 수 있다. 당연히 안드로뽀프는 경제 문제에 집중했다. 1982년은 노동 생산성과 경제 성장에 있어 쏘련 역사상 최악의 기록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4년간 연이은 흉작이었다.27) 안드로뽀프는 서기장으로서 행한 첫 번째 중앙위원회 연설에서 재임 중 단기간에 수행할 개혁안을 내놓았다. “더 많이 일하면 더 나은 삶을 이룬다.”라는 제목의 이 연설은 쏘련이 당면하고 있는 주요 경제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였다. 비효율, 낭비, 생산성 저하, 노동규율의 결여, 생활수준의 느린 증가, 소비재와 서비스의 부족과 낮은 품질―특히 주택, 보건 및 식품에서 나타나는 문제이다. 소비 문제의 본질을 밝히는데 있어서, 안드로뽀프는 흐루쇼프와 차이를 보였다. 안드로뽀프는 생활수준이 더 많은 소득과 더 많은 물질을 얻기 위한 서구와의 단순 경쟁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사회주의적 생활수준은 “의식과 문화 수준의 향상”, “적당한 소비”, “합리적인 절제”, 양질의 공공 서비스와 “도덕적이고 심미적인 자유시간의 적절한 사용” 등에서 훨씬 더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28)

 

안드로뽀프의 견해에 의하면 불충분한 계획과 구태의연한 관리, 과학기술 혁신의 실패, 집중적인 생산방식이 아닌 분산적 생산방식에의 의존, 그리고 노동 규율의 결여가 경제 문제의 원인이었다. 이에 안드로뽀프는 “과학적 기술적 진보의 가속화[uskorenie]”를 요구했고 컴퓨터 기술의 적용을 통한 생산의 현대화를 예상했다. 그 외에도 “자원의 낭비”를 시정할 수 있는 에너지위원회 설치를 요구했다.29)

 

또한 안드로뽀프는 쏘련 상층에서는 “계획과 경영의 근본적 개선”에 의해 그리고 기층에서는 인센티브와 규율의 개선을 통해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0)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관리가 보다 작고 단순해질 필요가 있었다.31) 안드로뽀프는 현재의 계획 및 관리방식이 대개는 효율성 및 컴퓨터, 로봇 및 유연한 기술의 도입을 방해하고 있어서 산업 계획에 새로운 생산 방법의 도입이 지연되고 있다고 인식했다. “계획 방식”과 “물질적 인센티브”의 변화에서 한 가지 보장해야 할 것은 “새로운 기술을 과감하게 도입하는 사람이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32) 안드로뽀프도 일부 전문가들이 지나친 중앙 집권화 때문에 경제 문제가 발생했고 그 해결책은 기업과 집단 농장, 국영 농장에 더 많은 독립성을 부여해야 함을 인정했다. 안드로뽀프는 흐루쇼프와 까다르 하에서의 분권화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분권화가 지역주의와 불평등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분권화를 전면 거부하지는 않았다. 다만 후에 고르바쵸프가 수용했던 무분별한 분권화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오히려 안드로뽀프는 “신중을 기하고, 실험을 해야 하며, 사회주의 형제국들의 경험을 따져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떤 독립성의 확대도 “더 큰 책임감과 국민 전체의 이익”33)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산성 증대와 상품과 서비스의 양과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안드로뽀프는 더 높은 규율과 더 좋은 인센티브를 제안했다. 특히 안드로뽀프는 나태한 노동, 결근, 만취, 야간부업, 무책임 등에 맞서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런 잘못을 저지른 이들은 임금 삭감, 직위 해지, “도덕적 위신”34)을 떨어뜨리는 “직접적이고 가차 없는 방식”에 처해져야 했다. 1983년 초에 당국은 “오퍼레이션 트롤(Operation Trawl)”에 있는 “상점, 바 그리고 사우나탕에서 결근자를 내쫒았다.”35) 언론이 더 높은 규율을 위한 캠페인에 참여했고 안드로뽀프는 이러한 캠페인을 모스끄바의 기계공장에 적용했다.36) 공공장소에서 만취해 있거나 근무지를 이탈하여 쇼핑이나 목욕탕에 가는 행위를 처벌할 것을 제안했다. 조레스 메드베제프에 따르면, 안드로뽀프의 노력, 특히 낭비 절감 노력은 “즉각적이고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신문에서 식량 산업에서의 무능하고 비효율적인 농장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37)

 

안드로뽀프는 흐루쇼프 하에서 일어난 임금평준화를 강력하게 반대하였는데, 이는 “일한 만큼 먹는다.”는 근본적인 사회주의 원칙의 위배라고 했다. 생산성 증가가 임금인상에 동반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임금은 수요를 자극하여 충분히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생산품 부족 및 암시장과 같은 “극도의 폐해”를 초래한다고 믿었다. 인센티브는 좋은 성과에 대한 보상 이상의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센티브를 통해 노동의 질을 높이고 협동농장 및 전 인민적 계획과 활동에 참여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38)

 

국제관계에 있어서, 안드로뽀프는 고르바쵸프의 외교정책을 나타내는 일종의 후퇴와 일방적 양보를 좋아하지 않았다. 안드로뽀프는 평화공존과 전쟁방지 정책을 지지했지만, 국제관계는 여전히 계급투쟁의 원리가 지배한다고 주장했다.39) 1970년대에는, 제국주의자들이 “반체제” 및 “인권”문제를 제기하고 자유 유럽 라디오 방송 및 자유 라디오 방송 등을 증가시킴으로써 사실상 쏘련에 대한 심리전 및 이데올로기 투쟁을 강화했다고 거듭 경고했다.40) 서기장으로서 첫 연설에서는 쏘비에뜨 외교정책은 “틀림없이 이전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밝혔다.41) 당시에 아프가니스탄이 국제적 투쟁의 지렛대가 되어있었다. 안드로뽀프는 흔들리지 않았다. 서기장이 되기 몇 개월 전에도 쏘련공산당은 국제적 의무에 충실했으며 앞으로도 계급적 형제국들과 결속을 다지고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일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42) 서기장이 된지 며칠 만에 파키스탄 대통령에게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국과 손잡지 않은 척 속이는 행위를 그만두라고 말하고는 “쏘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지지할 것이다“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43)

 

안드로뽀프는 미국과 평화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새로운 시도를 할 여지는 없었다. 안드로뽀프는 쏘련―미국 관계가 최악의 상황일 때 취임했다. 즉 카터 때 시작되어 레이건 때 더 악화된 상황이 한창인 때였다. 이를 미국 주재 쏘련 대사인 아나똘리 도브리닌(Anatoly Dobrinin)은 “신 냉전”이라 했다.44) 레이건이 쏘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르고 전략 방위 구상45)을 발표한 후에, 쏘비에뜨와 미국의 관계는 안드로뽀프가 ‘전례 없는 대결’이라고 부르는 상태에 이르렀다.46) 안드로뽀프의 미국에 대한 태도는 “평화는 제국주의자들에게 구걸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적의 쏘비에뜨 군대에 의해서만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는 확신에 기초하고 있었다.47) 결과적으로 안드로뽀프는 레이건의 일방적인 “제로 옵션” 제안(후에 고르바쵸프에 의해 받아들여진)을 거절했다. “제로 옵션”은 쏘련은 유럽에 배치한 모든 중거리 미사일을 철수하는 것이지만 미국은 서유럽 중거리 미사일을 제외하고 유럽의 중거리 미사일 배치를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안드로뽀프는 일방적인 양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쏘련의 “일관된 경험”은 “제국주의자에게 굽실거려서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48) 대신에, 안드로뽀프는 쏘련은 더 이상의 군비확충은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엄격한 평가를 바탕으로 다수의 군축 제안을 했다.

 

짧은 임기 동안, 안드로뽀프는 미국과의 협상에서 유연성과 주도권을 보여 주었다. 완전히 결렬된 지 2년여 만에 워싱턴과 고위급 회담을 재개해 냈다. 레이건이 도브리닌과 처음 만나 모스끄바 주재 미국 대사관에 피신한 펜타코스탈(Pentecostals―성령의 힘을 강조하는 기독교 교파―역자) 교인들에게 출국비자를 내줄 것을 제기했을 때, 안드로뽀프는 이를 허용하고 출국 비자를 내주었다. 더욱이 안드로뽀프는 레이건이 군사적 우세에 의지하고, 핵 선제공격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여겼지만, 군 협상대표에게 회담에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카터 이후 단절되었던 기밀 통신 채널을 재개했다. 또한 도브리닌에게 관계개선 의지를 보이는 레이건의 어떠한 신호도 놓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미국과 대화하려는 안드로뽀프의 노력은 끝내 수포로 돌아갔다. 1983년 9월, 쏘비에뜨 전투기가 착오로 한국 여객기를 격추시켰을 때 레이건 대변인은 웅변조의 야단법석을 떨었고 관계를 개선할 가능성은 사라졌다.49)

 

안드로뽀프는 당 규준(規準), 인선(人選), 민주주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민족문제도 언급했다. 그는 당이 부패, 뇌물 수수, 횡령 등을 용인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레닌주의자의 규범”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리가쵸프에 따르면 안드로뽀프가 서기장이 된 후에 “모든 사람들의 노동시간이 연장되었다.”50) 또한 브레즈네프의 “간부의 안정성” 정책을 폐지하여 늙고 무능한 간부를 내쫒고 젊고 능력 있는 당원과 국가 관리를 받아들였다. 그의 첫 번째 조치 중에 하나는 경제 분야에서 지속적인 병목 현상을 빚어 온 운송부 장관 교체였다.51) 민주주의를 향상시키기 위해 당회의의 지나친 형식주의를 공격하고 각본대로 하는 수동성을 끝장내라고 요구했다.52) 리가쵸프에 따르면 안드로뽀프가 작업장에서의 주도성(initiatives)을 가로막는 장애를 제거할 것을 요구하고 “집단노동과 공장에서 당과 정부의 결정에 대한 예비 토론”을 도입했다.53) 1983년 6월에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이데올로기 임무를 증진시키기 위한 토론에 몰두했다.54)

 

의심할 여지없이, 안드로뽀프는 쏘련과 쏘련공산당이 직면한 문제를 이해하였기에 심도 있는 개혁에 착수했다. 서구의 몇몇 작가들은 안드로뽀프가 은밀한 자유주의자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렇게 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55) 안드로뽀프의 말이나 행동 어디에서도 1987년 이후 고르바쵸프가 따랐던 노선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안드로뽀프는 단순히 맑스와 레닌의 말을 인용하고 당 노선에 따른 것이 아니다. 당은 당 지도자가 뛰어나기를 기대한다. 안드로뽀프는 1964년에서 1983년 사이의 연설로 주목을 받았다. 맑스―레닌주의 사상을 당면한 문제에 창의적으로 적용하고, 어려운 정책을 과감하게 옹호하며, 서구의 비난을 설득력 있고 세련되게 반박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고르바쵸프가 가장 동요한 부분에서, 안드로뽀프는 가장 확고한 신념을 나타냈다.

 

어김없이 안드로뽀프는 사민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제2경제에 대해 고르바쵸프보다 강경하게 다루었다. 안드로뽀프는 쓰딸린이 사회주의적 합법성과 당내 민주주의를 위반한 것에 대해 심하게 비난했지만, 혁명의 정당성과 혁명을 힘으로 방어할 필요성에 찬성했다.56) 또 제2경제의 발현에 대해 조금도 호감을 갖지 않았다. 안드로뽀프에게 있어서 쏘비에뜨 생활에는 “자본 축적”, “인민재산 약탈”, “사익 추구”를 위한 공적 지위 남용 등은 있을 수 없었다.57) 사적 탐욕이 사회주의적 이익을 위해 이용되거나 장려될 수 없다. 사적 탐욕은 사회주의가 극복해야 할 부르주아 가치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저서에서 안드로뽀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바꾸는 것은 … 단순하지 않은 길고 다면적인 과정이다. 설사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확고하게 성립되었다 하더라도 일부 사람들은 사회를 착취하고 다른 사람을 착취하면서 자신의 풍요를 추구하는 개인주의적인 습관을 여전히 유지하고 드러낼 것이다.”58)

 

민족문제에 있어서, 안드로뽀프는 이전 서기장의 자기만족적 낙관론과 이후 고르바쵸프의 무관심과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안드로뽀프는 사회주의가 민족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민족적 구분이 계급 구분보다 훨씬 오래 지속되고 경제적, 문화적 발전에 따라 민족적 자각이 증대한다고 주장했다. 민족문제는 “발전된 사회주의에서도 여전히 해결해야할 문제”라고 말했다.59) 민족은 민족적인 편협함, 자부심, 배타성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민족적 감수성을 침해하는 과거와 현재의 정책을 수정할 것을 촉구했다.60) 구체적으로 안드로뽀프는 당과 정부기관 안에 “모든 민족을 적절히 대표하도록 보장하는” 일종의 “적극적인 조치”를 요구했다.61) 공산주의 지도자의 이러한 요구는 매우 평범한 듯이 보이지만, 민족문제를 다루는 고르바쵸프의 갈팡질팡하는 모습과는 명백히 대조적이다. 1980년대 중반에 분출한 민족주의적 정서는 고르바쵸프의 무지만큼이나 안드로뽀프의 통찰력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안드로뽀프의 개혁에 대한 접근이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공산주의 지도자로서, 그는 건강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갖추었다. 역사학자 드미뜨리 볼꼬고노프 같은 부정적인 사람들은 안드로뽀프의 방침이 “효과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공정하게 말해서, 안드로뽀프는 사회전체를 개혁하기엔 너무 짧은 단 15개월 만에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재임기간 동안 절반의 시간은 병원 침대 신세였음을 감안하면 그의 업적은 더욱 인상적이다. 그러나 후계자는 안드로뽀프가 시작한 것을 계속할 능력이 부족했다. 볼꼬고노프는 후임 서기장인 꼰스딴찐 체르넨꼬(Konstantin Chernenko)가 “당과 국가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비젼도 없고, 훈련되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했다.62)

 

안드로뽀프의 경제실험 중 몇 가지는 이후에 지속되었지만 다른 개혁 사상들은 구상단계에 머물렀고, 어떤 것들은 시작조차 못했다. 대부분의 경제정책은 체르넨꼬가 재임한 2년 동안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브레즈네프 통치 하에서 악화되었던 경제, 당 그리고 국제 관계의 대부분의 문제들이 방치되었다. 고르바쵸프가 1985년에 서기장이 되었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그가 개혁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고르바쵸프가 선택한 개혁 방향은 계속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아마도 신임 서기장 자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1) Dmitri Volkogonov, Autopsy for an Empire(제국의 해부) (New York, London, Toronto, Sydney, Singapore: The Free Press, 1998), 262, 264, 302, 320, 324; Peter Kenez, A History of the Soviet Union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쏘련의 역사 시작과 끝)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215, 217; Roy Medvedev, “브레즈네프: 정치 스케치―초상화,”, Leonid Brezhnev: The Period of Stagnation(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침체의 시기) (Moscow: Novosti Press, 1989), 6, 9.

2) Breslauer가 인용한 Pravda, 64.

3) Fedor Burlatsky, “Brezhnev and the End of the Thaw(브레즈네프와 해빙의 끝),”, Leonid Brezhnev: The Period of Stagnation(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침체의 시기), 38.

4) Stephen F. Cohen and Katrina vanden Heuvel, Voices of Glasnost(글라스노스트의 목소리) (New York: W. W. Norton, 1989), 20.

5) Victor and Ellen Perlo, Dynamic Stability: The Soviet Economy Today(다이나믹한 안정: 오늘날의 쏘련경제)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80), 331.

6) Abel Aganbegyan, The Economic Challenge of Perestroika(뻬레스뜨로이까의 경제적 도전) (Bloomington and Indianapolis: Indiana University Press, 1988), 45, 52-53, 90.

7) Victor and Ellen Perlo, 275.

8) Victor Perlo, Super Profits and Crises: Modern U.S. Capitalism(초과이윤과 위기: 현대 미국 자본주의)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88), 491.

9) Aganbegyan, The Economic Challenge of Perestroika, 3, 23, 67, 71.

10) Leonid Brezhnev, We Are Optimists: Report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to the 26th Congress of the CPSU(우리는 낙관주의자다: 쏘련공산당 제26차 대회에 중앙위원회가 제출한 보고)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81), 57.

11) Ligachev, 211-212, 219.

12) Brudny, 15-17.

13) Victor and Ellen Perlo, 284.

14) Moshe Lewin, Political Undercurrents in Soviet Economic Debates(쏘비에뜨 경제 논쟁에서의 정치적 진의)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5), xiii.

15) Anders Aslund(안더스 오슬런드), Gorbachev’s Struggle for Economic Reform(경제 개혁을 위한 고르바쵸프의 투쟁) (Ithaca,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89), ix, 4.

16) Perlo, 260-280.

17) Perlo, 260-280.

18) Perlo, 282, 284.

19) Zhores Medvedev, Andropov(안드로뽀프) (New York and London: W. W. Norton, 1983), 17-54; Martin Ebon(마틴 에본), The Andropov File(안드로뽀프 파일) (New York et al.: McGraw-Hill, 1983), 272-273.

20) Ebon, 17-22, 70-71, 86-92, 109.

21) Ebon, 64-74; Zhores Medvedev, 32-40; Herbert Aptheker(허버트 앱테커), The Truth About Hungary(헝가리의 진실) (New York: Main-stream Publishers, 1957), 184-246.

22) Ebon, 64-74; Zhores Medvedev, 32-40.

23) Ebon, 70-71, 32, 24, 104; Zhores Medvedev, 32-40, 64-65.

24) Ebon, 22, 24, 27, 29, 65.

25) Zhores Medvedev에서 재인용, 87.

26) Ligachev, 27.

27) Zhores Medvedev, 146; Ebon, 119.

28) Yuri Andropov, “더 많이 일하면 더 나은 삶을 이룬다.”(1982, 11, 22), Ebon, 139-249;

 Y. V. Andropov, Sixtieth Anniversary of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쏘비에뜨 사회주의 공화국 60주년 기념), (1982, 12, 21), (Moscow: Novosti, 1983);

Yuri Andropov, Analysis of the Existing Situation and Landmarks for the Future(실존상황과 미래의 길잡이에 대한 분석), (June 15, 1983), (Moscow: Novosti, 1983);

 Yuri Andropov, “칼 맑스의 가르침과 쏘련 사회주의 건설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1983), A Reader on Social Sciences(사회과학 독본) (Moscow: Progress, 1985), 395-419.

29) Martin Ebon, The Andropov File: The Life and Ideas of Yuri Andropov General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of the USSR(안드로뽀프 파일: 쏘련공산당 서기장 안드로뽀프의 삶과 사상) (New York, St. Louis, San Francisco, Toronto and Mexico: McGraw-Hill Book Company, 1983), 239-249.

30) Andropov, Analysis(분석), 12.

31) Andropov, Analysis, 17.

32) Ebon이 인용한 Andropov, 241.

33) Ebon이 인용한 Andropov, 241.

34) Ebon이 인용한 Andropov, 241.

35) Ebon, 136-137.

36) Zhores Medvedev, 134.

37) Medvedev, 131-133.

38) Andropov, “Karl Marx’s Teaching(칼 맑스의 가르침),” 407.

39) Ebon, 186.

40) Ebon, 173, 174, 193, 205, 208.

41) Ebon에 수록된 Andropov, 246.

42) Ebon, 238.

43) Andrei Gromyko(안드레이 그로미꼬), Memoirs(회고록) (New York, et al.: Doubleday, 1989), 247.

44) Anatoly Dobrynin(아나똘리 도브리닌), In Confidence(은밀하게) (New York: Times Books/Random House, 1995), 444.

45) 미국의 우주 방위 전략, 속칭 스타워스 계획 (역주)

46) Jonathan Harris(조나단 해리스), The Public Politics of Aleksandr Nikolaevich Yakovlev, 1983-1989, The Carl Beck Papers in Russian and East European Studies(알렉산드르 니꼴라예비취 야꼬블레프의 공공정책, 1983-1989, 칼 벡의 러시아 및 동유럽 연구논문), No. 901 (Pittsburgh: University of Pittsburgh Center for Russian and East European Studies, 1990), 12.

47) Dobrynin이 인용한 Andropov, 512.

48) Ebon, 234.

49) Dobrynin, 478.

50) Ligachev, 148.

51) Ebon, 118

52) Andropov, Analysis, 18.

53) Ligachev, 28.

54) Andropov, Analysis.

55) Ebon, 26.

56) Ebon, 152, 201, 166, 168, 199.

57) Ebon, 192, 203, 219, 230.

58) Andropov, “Karl Marx’s Teaching,” 400-401.

59) Andropov, Sixtieth Anniversary, 11-21.

60) Andropov, Sixtieth Anniversary, 18.

61) Andropov, Sixtieth Anniversary, 18-19.

62) Volkogonov, 332, 370,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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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Mar 20th, 2018 | By | Category: 번역, 정세와노동 | 조회수: 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