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뜨로츠끼주의냐 레닌주의냐? ― 1924년 11월 19일 전(全)쏘련 노동조합 중앙위원회에 있는 공산당 그룹 전체회의에서 한 연설

이오씨프 쓰딸린(Иосиф Сталин)

번역: 신재길(교육위원장)

동지들! 까메네프 동지가 상세한 보고를 한 후라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지 뜨로츠끼와 그 동료들에 의해 널리 퍼진 몇몇 기이한 이야기의 정체를 벗기는 것에 한정하겠습니다. 10월 봉기 및 뜨로츠끼가 봉기에서 한 역할, 10월 혁명의 준비 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레닌주의와는 양립될 수 없는 특수한 이데올로기로서의 뜨로츠끼주의와 뜨로츠끼의 최근 저작에서 나타난 당의 임무에 대해서도 언급하겠습니다.

 

1. 10월 봉기에 관한 몇 가지 사실

 

먼저 10월 봉기에 관한 것입니다. 당원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풍문은 전체중앙위원회가 1917년 10월 봉기를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10월 10일은 중앙위원회가 봉기를 조직하기로 결정한 날입니다. 처음에는 중앙위원 대다수가 봉기에 반대했는데 그 순간 한 노동자가 중앙위원회 회의에 뛰어들어 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봉기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에게 말하겠습니다. 어떤 결정이 내려져도 봉기는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위협을 받은 중앙위원회는 깜짝 놀라 봉기문제를 재상정하고 봉기를 조직할 것을 결정하였다고 합니다.

 

동지들, 이것은 단순한 유언비어만은 아닙니다. 유명한 존 리드의 책 ≪십일(十日)≫에 묘사되어 있습니다.1) 리드는 우리당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10월 10일에 있었던 우리당의 비밀회의의 경과에 대해 알 수가 없습니다. 결국 리드는 수까노프와 같은 이들이 퍼트리는 풍문을 취합한 것입니다. 뜨로츠끼분자들은 이 풍문을 수많은 소책자들을 통해 퍼트리고 반복했습니다. 시르킨(Syrkin)의 10월 혁명에 대한 최근의 소책자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뜨로츠끼는 최근에 출판한 저작에서 이런 유언비어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이 모든 것은 증명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이것들은 아라비안나이트와 같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당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일어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무시하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반대파나 당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수많은 유언비어를 조작하여 퍼트였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이것들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한 예로 우리는 존 리드의 잘못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것을 시정하고자 하는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뜨로츠끼가 신작을 발표한 이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이런 유언비어를 이용하여 청년들을 기를 쓰고 교육하려는 시도가 있으며 불행하게도 이미 이런 방면에서 효과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실을 밝혀 이 황당한 유언비어를 반박해야만 하겠습니다.

 

우리당 중앙위원회 1917년 10월 10일자 회의록을 봅시다. 회의 출석자는 레닌, 지노비에프, 까메노프, 쓰딸린, 뜨로츠끼, 스베르돌프(Sverdlov), 우리츠끼(Uritsky), 줴르진스끼(Dzerzhinsky), 꼴론따이(Kollontai), 부브노프(Bubnov), 소꼴니꼬프(Sokolnikov), 로모프(Lomov)입니다. 당면 정세와 봉기 문제를 토론하였습니다. 토론 이후 레닌동지가 제출한 봉기에 대한 결의가 표결되었습니다. 결의는 찬성 10, 반대 2로 채택되었습니다. 상황은 분명합니다. 중앙위원회는 10대 2로 봉기의 조직화를 위한 실천적 과업으로 즉시 나아갈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중앙위원회는 정치국이라 불리는 봉기를 지도할 정치중앙을 선출하였습니다. 정치국 성원은 레닌, 지노비에프, 쓰딸린, 까메네프, 뜨로츠끼, 소꼴니꼬프와 부브노프입니다.

사실은 이와 같습니다.

 

이 회의록은 몇 가지 유언비어의 거짓을 단번에 드러냅니다. 회의록은 중앙위원회 다수가 봉기에 반대했다는 유언비어를 논파합니다. 또 중앙위원회가 봉기문제에서 분열에 직면했다는 괴담도 거짓임을 폭로합니다. 회의록에 의하면 분명히 즉각적인 봉기에 까메네프와 지노비에프가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봉기에 찬성한 동지들과 동등하게 봉기의 정치지도기관에 선출되었습니다. 분열의 문제는 없었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뜨로츠끼는 단언합니다. 까메네프와 지노비에프는 10월 혁명 시기에 우리당의 우익이며 사회민주주의자와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우리당이 분열을 어떻게 피할 수 있었는가, 까메네프 및 지노비에프와의 의견 차이 기간이 어떻게 몇  일뿐 이었는가,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당은 어떻게 이들을 최고 중요 자리에 배치하고 봉기의 정치중앙에 선출 하였는가 등입니다. 레닌의 사회민주주의자에 대한 무자비한 태도는 우리당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은 알고 있습니다. 레닌은 한순간도 사회민주주의 정서를 가진 동지가 당내에 남아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만은 최고 중요 자리에 배치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당이 분열되지 않은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원인은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동지들도 볼셰비즘이라는 공동된 기초에 서있는 노련한 볼쉐비끼라는 점입니다. 공동된 기초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본문제에서 관점의 일치입니다. 러시아 혁명의 성격, 혁명의 동력, 농민의 역할, 당적 지도원칙 등에서 일치합니다. 이러한 공동의 기초가 없다면 분열은 불가피합니다. 분열은 발생하지 않았고 의견 차이는 단지 몇 일간만 지속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유일한 이유는 까메네프와 지노비에프가 레닌주의자이며 볼쉐비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10월 봉기에서 뜨로츠끼가 특별한 역할을 했다는 괴담을 봅시다. 뜨로츠끼주의자들은 뜨로츠끼가 10월 봉기의 고무자(鼓舞者)이며 유일한 영도자라는 유언비어를 전력을 다해 유포하고 있습니다. 소위 뜨로츠끼 문집 편집자인 렌츠너(Lentsner)는 힘을 아끼지 않고 이런 괴담을 퍼트리고 있습니다. 뜨로츠끼 자신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이 봉기에서 특별한 역할을 했다는 괴담을 확산시키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당과 중앙위원회, 당의 뻬뜨로그라드 위원회를 체계적으로 무시하고, 이 기관들이 봉기를 지도한 역할을 은폐함으로써 스스로를 10월 봉기의 중심인물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10월 봉기에서 뜨로츠끼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전혀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뜨로츠끼는 10월 봉기에서 어떤 특별한 역할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그는 뻬뜨로그라드 쏘비에뜨 위원장으로 응당 수행해야 할 당기관의 의지를 실행했을 뿐입니다. 수까노프 같은 속물에게는 이 모든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이, 진정 사실이 나의 견해를 완전히 실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1917년 10월 16(29)일에 연이어 계속된 당중앙위원회 회의의 회의록을 봅시다. 회의 참석자는 중앙위원회 성원에 뻬뜨로그라드 위원회 대표, 군사조직 대표,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 철도원 대표가 추가되었습니다. 참석자 중에는 중앙위원 외에도 끄릴렌꼬(Krylenko), 쇼트만(Shotman), 깔리닌(Kalinin), 보로다르스끼(Volodarsky), 쉴리야프니꼬프(Shlyapnikov), 라치스(Lacis), 기타 등등 모두 25명입니다. 봉기문제를 순전히 실제 조직화 측면에서 논의하였습니다. 레닌이 제출한 봉기에 대한 결의를 찬성 20, 반대 2, 기권 3으로 채택하였습니다. 봉기를 조직적으로 지도할 집행총사령부가 선출되었습니다. 이 총사령부에 누가 선출되었습니까? 스베르돌프, 쓰딸린, 줴르진스끼, 부브노프, 우리츠끼 5명입니다. 집행총사령부는 중앙위원회의 지시에 근거하여 봉기에 대한 일체의 실천을 지도하는 조직입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이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놀랄만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즉 “봉기의 고무자”이며,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유일한 영도자”인 뜨로츠끼가 봉기의 지도를 책임지는 집행사령부에 선출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뜨로츠끼의 특별한 역할에 관한 현재 유포되고 있는 견해에 부합될 수 있겠습니까? 수하노프(Sukhanov)나 뜨로츠끼주의자가 어떻게 말하든 이 모든 것이 다소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실 여기에는 어떤 것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뜨로츠끼는 10월 혁명 당시에 우리당내에서 비교적 새로운 인물이었기 때문에 당내는 물론 10월 봉기에서도 특별한 역할을 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모든 책임 있는 일꾼들과 마찬가지로 단지 중앙위원회와 조직의 의지를 수행하였을 뿐입니다. 뜨로츠끼가 중앙위원회의 의지를 위반하였다면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볼쉐비끼당의 지도 메카니즘에 익숙한 사람은 누구나 특별한 어려움 없이 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뜨로츠끼의 특별한 역할에 관한 이 이야기는 말 많은 “당” 험담꾼들이 꾸며내 퍼뜨린 괴담입니다.

 

그렇다고 10월 봉기에 고무자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고무자이며 영도자는 레닌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레닌입니다. 봉기 문제를 결정할 때 중앙위원회가 채택한 결의안을 제출한 바로 그 레닌입니다. 뜨로츠끼의 주장과는 반대로 지하활동이 레닌이 봉기의 실질적 고무자가 되는 것에 지장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레닌의 지하활동에 대한 헛소문으로 봉기의 고무자가 당의 영도자 레닌이었다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을 가리려는 시도는 어리석고 가소로운 일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래도 10월 혁명기간에 뜨로츠끼가 훌륭하게 투쟁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예, 그렇습니다. 뜨로츠끼는 10월에 확실히 잘 싸웠습니다. 그러나 뜨로츠끼만 10월에 잘 싸운 건 아닙니다. 좌익 사회혁명당원들도 볼쉐비끼와 함께 잘 싸웠습니다. 요컨대, 적이 고립되고 봉기가 고조되는 승리하는 시기에는 잘 싸우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이 시기에는 후진적인 사람들도 영웅이 됩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끊임없는 승리의 연속이 아닙니다. 프롤레타리아 투쟁도 어려움에 처하거나 패배 합니다. 참된 혁명가는 봉기가 승리하는 동안에 용기를 과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혁명이 승리할 때 잘 싸우는 동시에 혁명의 퇴조기 때, 프롤레타리아트가 패배했을 때 용기를 발휘하는 사람입니다. 혁명이 불리하게 될 때, 적이 승리할 때 냉정을 잃지 않으며 위축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후퇴의 시기에 당황하여 갈팡질팡하지 않고, 비관에 빠져 낙담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좌익 사회혁명당원들도 10월 혁명기간에 볼쉐비끼를 지지하며 잘 싸웠습니다. 이 용감한 전사들이 브레스뜨 강화조약시기에 공황상태에 빠진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독일제국주의가 공격해오자 그들은 절망과 히스테리에 빠졌습니다. 10월 혁명시기에 잘 싸웠던 뜨로츠끼도 브레스뜨 강화조약시기에, 즉 혁명이 일시적으로 불리하게 되었을 때 충분히 지조를 지킬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좌익 사회혁명당원들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이는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입니다. 확실히 그 때는 어려운 순간이었습니다. 특별한 용기와 고도의 냉정함이 요구되는 시기였습니다. 갈팡질팡하지 않고 퇴각할 적절한 시기였습니다.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독일 제국주의의 타격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 군대를 벗어나게 할 적절한 시기였습니다. 농민예비역량을 보존하고 휴식을 취해 적을 타격하기 위한 새로운 힘을 축적할 적절한 시기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뜨로츠끼는 이 어려운 시기에 이러한 용기와 혁명적 지조(志操)가 부족하였습니다.

 

뜨로츠끼의 의견으론 10월 혁명 시기의 중요한 교훈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잘못입니다. 뜨로츠끼의 주장은 혁명 교훈에 대해 진실의 일부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교훈에 대한 진실의 전부는 혁명이 전진하고 있을 때뿐만 아니라 후퇴하고 있을 때, 적군이 우세를 점하고 혁명이 불리할 때에도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혁명은 10월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10월은 단지 혁명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봉기가 날로 고조되는 시기에 겁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후 혁명이 엄중한 시련을 만났을 때 두려워하는 것은 더욱 안 됩니다. 혁명 다음날 권력을 지키는 것이 권력 장악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브레스뜨 시기인 혁명이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한 때에, 거의 권력을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뜨로츠끼가 두려움에 빠졌다면 이것은 10월에 까메네프와 지노비에프가 범한 잘못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뜨로츠끼는 깨달아야 합니다.

10월 봉기에 관한 괴담 문제는 이러한 것입니다.

 

2. 당과 10월 혁명의 준비

 

이제 10월 혁명 준비 문제로 넘어갑시다.

뜨로츠끼의 말을 듣다보면, 3월부터 10월까지 준비기간 동안 볼쉐비끼 당은 제자리걸음만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부 모순으로 당은 좀먹고, 레닌을 모든 방면에서 가로막고 있어서 뜨로츠끼가 아니었다면 10월 혁명은 어떻게 끝났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뜨로츠끼로부터 당에 대한 이 이상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꽤나 재미있습니다. 뜨로츠끼 문집 제3권 서문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주요 무기는 당이다.” “당 없이, 당과 분리되어, 당을 우회하여, 당을 대신한 어떤 수단으로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승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보는 바와 같이 “혁명의 주요 무기”인 당이 쓸모없게 되었는데 “당을 우회”하여서는 승리할 수 없는 경우라면, 알라신도 우리당이 어떻게 승리하였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뜨로츠끼가 우리를 기괴하게 다루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우리 당에 관한 이 우스운 이야기는 뜨로츠끼의 일상적인 기이한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10월 혁명 준비의 역사를 기간별로 간단히 살펴봅시다.

 

1) 당의 신(新)방침 시기(3월-4월)

이 시기의 주요 사실은

 (ㄱ) 짜리즘의 전복

 (ㄴ) 임시정부 성립(부르주아 독재)

 (ㄷ) 노동자 병사 대표자 쏘비에뜨 출현(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

 (ㄹ) 이중 권력

 (ㅁ) 4월 시위

 (ㅂ) 권력의 1차 위기입니다.

 

이 시기의 특징은 부르주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및 농민의 독재가 동시에 함께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쏘비에뜨는 임시정부를 신뢰하여 임시정부가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자발적으로 부르주아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부르주아의 부속물이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두 독재 권력사이에 심각한 충돌은 없습니다. 반대로 “연락 위원회”2)도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 전환점으로 우리당 역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변화기입니다. 정부의 직접적 전복이라는 혁명전의 구정강(舊政綱)은 분명하고 명확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투쟁의 새로운 조건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정부를 직접 전복할 수는 없습니다. 정부가 조국방어주의자들의 영향아래에 있던 쏘비에뜨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은 정부와 쏘비에뜨 둘 다에 맞서 힘겨운 투쟁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임시정부의 정책을 지지할 수도 없습니다. 제국주의의 정부였기 때문입니다. 투쟁의 새로운 조건하에서 당은 새로운 방침을 채택해야 했습니다. 당(당의 다수)은 새로운 방침을 탐색했습니다. 쏘비에뜨를 통해 임시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독재’라는 낡은 구호에서 ‘즉시 권력을 쏘비에뜨로’라는 새로운 구호로 과감히 나아가려고 시도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러한 불철저한 정책의 목표는 평화에 대한 구체적 문제에 근거하여 임시 정부의 진정한 제국주의적 본질을 쏘비에뜨가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쏘비에뜨가 임시정부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하게 잘못된 입장입니다. 평화주의에 대한 환상을 낳고, 방어주의의 물방아에 물을 대주는 격이며, 대중의 혁명 교육을 방해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나와 당내 다른 동지들도 이러한 잘못된 입장을 지지하였습니다. 4월 중순에서야 레닌의 테제에 동의하고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새로운 방침이 필요하였습니다. 레닌은 새로운 방침을 당에 제출하였습니다. 그 유명한 4월 테제3)입니다. 이 테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모두 잘 알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당과 레닌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얼마나 오래 갔습니까?  2주가 안되었습니다. 뻬뜨로그라드 조직의 시(市)당 대표자회의4)에서 (4월 보름 이후에) 레닌의 테제를 채택하여 우리당 발전에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전(全)러시아 4월 대표자회의5)(4월 말에)는 뻬뜨로그라드 회의 결과를 러시아 전역에서 총괄하는 의미일 뿐입니다. 당원의 10분의 9가 당의 통일된 입장으로 단결하였습니다.

 

지금 7년이 지났습니다. 뜨로츠끼는 볼쉐비끼들의 과거 이견(異見)을 악의적으로 즐기면서 마치 볼셰비즘 안에 두 개의 분파가 있어 서로 투쟁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첫째, 뜨로츠끼는 뻔뻔스럽게 문제를 과장하고 부풀립니다. 볼쉐비끼 당은 의견 차이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당이 당원들에게 다른 의견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갱단이지 혁명 정당은 아닐 것입니다. 알다시피 그 전에도 예를 들어 제3차 두마 시기에도 우리는 의견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당이 단결하는데 지장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셋째, 볼쉐비끼들의 과거 의견 불일치에 대해 현재 몹시 고소해 하고 있는 뜨로츠끼 자신이 그 당시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소위 뜨로츠끼 문집 편집자인 렌츠너는 억지주장을 합니다. 뜨로츠끼가 미국에서 보낸 편지(3월)가 레닌의 4월 테제의 기초가 된 먼 곳에서 온 편지6)(3월)를 “완전히 예비했다”고 합니다. 확실히 “완전히 예비했다”고 했습니다. 뜨로츠끼는 이런 유추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감사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첫째, 뜨로츠끼의 편지는 레닌의 편지와 근본사상에서나 결론에서나 전혀 다릅니다. 뜨로츠끼의 편지는 반(反)볼쉐비끼 구호인 “짜르가 아니라 노동자 정부”를 전적으로 전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는데  이는 농민은 혁명에 참가하지 말라고 고취하는 것입니다. 둘째, 렌츠너의 말이 사실이라면 레닌이 귀국한 다음날부터 뜨로츠끼를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합니까? 레닌이 뜨로츠끼의 “짜르가 아니라 노동자 정부”라는 구호가 “아직 영향을 상실하지 않은 농민운동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라고 한두 번만 말한 게 아닙니다. 뜨로츠끼의 구호는 “노동자 단독으로 권력을 장악한다는 어린애 놀이”7)같은 것입니다. 이를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레닌의 볼쉐비끼 테제와 뜨로츠끼의 “권력 장악 놀이”같은 반(反)볼쉐비끼 방안과 어떤 공통점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몽블랑 봉(峰)과 초라한 오두막을 비교하는 사람들의 열정을 자극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렌츠너는 우리 혁명에 대한 낡은 괴담 더미에 미국에서 보낸 뜨로츠끼의 편지가 레닌의 먼 곳에서 온 편지를 “예비했다”는 또 다른 괴담8)을 덧붙여야 했겠습니까?

성실한 바보가 적보다 더 위험하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닙니다.

 

2) 대중의 혁명적 동원 시기(5월-8월)

이 시기의 주요 사실은

 (ㄱ) 뻬뜨로그라드에서의 4월 시위와 “사회주의자”가 참가한 연립정부의 성립

 (ㄴ) “민주적 평화” 구호를 내걸고 러시아 전역의 주요 중심지에서 벌어진 메이데이 시위

 (ㄷ) “부르주아 장관 타도”라는 주요 구호 하에 진행된 뻬뜨로그라드 6월 시위

 (ㄹ) 러시아군의 6월 공세와 패배

 (ㅁ) 뻬뜨로그라드 7월 무장 시위, 까제뜨 당원의 장관 사임.

 (ㅂ) 반혁명 군대의 전선에서 소환, 쁘라우다 편집부 파괴, 반혁명세력이 쏘비에뜨에 대항하는 투쟁의 개시와 께렌스끼가 이끄는 새로운 연립정부의 성립

 (ㅅ) 무장봉기에 대비하여 구호를 제출한 제6차 당 대회

 (ㅇ) 반혁명 국무회의와 모스끄바 총파업

 (ㅈ) 꼬르닐로프의 뻬뜨로그라드 진공 실패, 쏘비에뜨의 활성화, 까제뜨 당원의 사임과 “집정내각(執政內閣)”의 성립 등입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위기의 첨예화입니다. 쏘비에뜨와 임시정부간의 불안정한 세력균형은 깨졌습니다. 세력균형은 좋든 나쁘든 이전 시기에 존재했습니다. 이중 권력은 양측 모두에게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연락위원회”라는 흔들리는 건물은 결국 종말을 고하였습니다. “권력 위기”와 “각료 교체”가 이 당시 가장 유행하던 말이었습니다. 전선의 위기와 후방의 붕괴로 인해 양극단이 강화되었고, 조국방어파 타협분자들은 양측에서 압력을 받았습니다. 혁명이 활발해 지자 반혁명도 활발해졌습니다. 또 반혁명이 혁명을 자극하여 혁명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새로운 계급에게 권력을 이전하는 문제가 당면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당에 의견 차이가 있었습니까? 예, 있었습니다. 그러나 뜨로츠끼가 당내에서 “우익”과 “좌익”을 찾아내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는 단지 실천상의 문제였습니다. 다시 말해, 활발한 정당 생활과 실제 정당 활동이 있는 곳에서는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그런 의견 차이입니다. 뜨로츠끼는 뻬뜨로그라드에서의 4월 시위가 중앙위원회의 의견 차이를 야기했다고 주장하나 이는 잘못입니다. 중앙위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완전히 일치했습니다. 중앙위원회는 볼쉐비끼가 쏘비에뜨 및 군대에서 아직 소수인 때에 임시 정부 각료를 체포하려고 시도한 일부동지들을 비난하였습니다. 뜨로츠끼가 수하노프에 근거하지 않고 믿을 만한 자료에 근거해서 10월 혁명의 “역사”를 쓴다면, 자신의 주장이 잘못이라고 수긍할 것입니다.

 

뜨로츠끼는 “레닌의 발의에 근거해서” 6월 10일 시위를 준비하려는 시도가 중앙위원회의 “우익”에 의해 “모험주의”로 책망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완전 잘못입니다. 뜨로츠끼가 글을 쓸 때 수하노프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6월 10일 시위가 레닌의 완전한 동의하에 연기되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게다가 레닌이 유명한 뻬뜨로그라드 위원회 회의에서 한 긴 연설을 통해 시위 연기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도 알 것입니다.(뻬뜨로그라드 위원회 의사록9)을 보시오)

 

뜨로츠끼가 7월 무장 시위와 관련해서 중앙 위원회의 “비극적” 의견 차이를 말하는 것은 완전 잘못입니다. 뜨로츠끼가 중앙위원회 지도부의 일부 성원이 “7월 사건을 유해한 모험 행위로 간주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야말로 날조입니다. 뜨로츠끼는 당시에 중앙위원회 위원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쏘비에뜨 위원일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뜨로츠끼는 중앙위원회가 7월 시위를 적의 역량을 탐색하는 수단으로 간주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중앙위원회(와 레닌)는 시위가 봉기로 전환하기를 바라지 않았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때는 수도의 쏘비에뜨가 아직 조국방어주의자들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부 볼쉐비끼가 7월 실패로 낙담했을 수는 충분히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 체포된 볼쉐비끼 중에 일부가 심지어 우리 대오를 떠날 준비도 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부터 중앙위원회 일원으로 여겨지는 어떤 가상(假想)의 “우익”을 유추하는 것은 부끄러운 역사 왜곡입니다.

 

뜨로츠끼가 꼬르닐로프 반란 기간에 당의 상층부 일부가 임시 정부를 지지하기 위하여 조국방어주의자들과 블록을 형성하는 쪽으로 기울었다고 말한 것은 잘못입니다. 여기서는 당연히 뜨로츠끼를 잠 못 들게 하는 가상의 “우익”을 말합니다. 뜨로츠끼가 틀린 것은 뜨로츠끼의 말을 반박하는 그 당시 당 중앙기관지 같은 문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뜨로츠끼는 레닌이 중앙 위원회에 께렌스끼를 지지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서신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뜨로츠끼는 레닌이 보낸 편지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레닌은 편지에서 의도적으로 앞서 나가고, 범할 수 있는 잘못을 미리 제기하고, 당에 경고하여 잘못을 방지할 목적으로 사전에 이러한 잘못을 비판합니다. 때로는 “작은 일”을 확대하여 보여주고, 침소봉대하기도 합니다. 이는 모두 교육이 목적입니다. 당의 지도자는 특히 지하활동을 할 수 밖에 없을 때에는 당연히 이래야만 합니다. 자신의 전우들보다 더 멀리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실수에 대해 심지어 “사소한 일”일지라도 경종을 울려야 합니다. 그러나 “비극적” 의견 차이의 존재를 이러한 레닌의 편지(레닌은 이러한 편지를 수없이 썼습니다.)에서 유추하여 공공연히 떠드는 것은 레닌의 편지를 이해하지 못하며 레닌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뜨로츠끼가 때때로 과녁을 빗나가는 데는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꼬르닐로프 반란동안 중앙 위원회에 의견 차이는 없었습니다. 전혀 없었습니다.

 

7월 실패 이후 중앙위원회와 레닌 사이에 쏘비에뜨의 운명(運命)문제로 확실히 의견 차이가 발생했습니다. 알다시피 레닌은 쏘비에뜨 밖에서 봉기를 준비하는 작업에 당의 관심을 집중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쏘비에뜨에 미련을 두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레닌은 조국방어주의자들이 쏘비에뜨를 더럽히고 쓸모없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중앙 위원회와 제6차 당 대회는 보다 신중한 노선을 취했습니다. 쏘비에뜨가 활성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근거는 없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꼬르닐로프 반란은 중앙 위원회와 당 대회 결정이 옳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의견 차이는 당에 별로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나중에 레닌은 제6차 당 대회가 택한 노선이 옳았다고 인정했습니다. 뜨로츠끼가 이 의견 차이를 포착하여 “터무니없이” 과장하지 않은 점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일치단결된 당, 혁명적으로 분기(奮起)하는 대중의 중심 ― 이것이 그 당시 우리당의 모습입니다.

 

 3) 공격을 조직하던 시기(9월-10월)

이 시기의 주요 사실은

 (ㄱ) 민주회의 소집 및 까데츠와 연합한다는 사상의 파산

 (ㄴ) 모스끄바와 뻬뜨로그라드 쏘비에뜨가 볼쉐비끼 편으로 넘어감

 (ㄷ) 북부지역 쏘비에뜨 대표자회의10) 개최, 뻬뜨로그라드 쏘비에뜨의 군대 철수 반대 결정

 (ㄹ) 봉기에 대한 중앙위원회 결정 및 뻬뜨로그라드 쏘비에뜨의 혁명군사위원회 설치

 (ㅁ) 뻬뜨로그라드 수비대의 뻬뜨로그라드 쏘비에뜨에 대한 군사 지원 결정, 혁명군사위원회의 정치 체제 구축

 (ㅂ) 볼쉐비끼 무장 역량 활동 개시, 임시정부 구성원 체포

 (ㅅ) 뻬뜨로그라드 쏘비에뜨 혁명군사위원회 권력 장악, 쏘비에뜨 제2차 대표자회의에서 인민위원회 성립(成立) 등입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위기의 급속한 격화, 대경실색(大驚失色)한 지배 집단, 사회혁명당과 멘쉐비끼의 고립, 그리고 대다수 동요분자들이 볼쉐비끼에 투신한 것입니다. 이시기 혁명적 전략의 특색을 특별히 언급해야겠습니다. 그 특색은 혁명 공격의 모든, 거의 모든 조치(措置)가 방어적 형태를 가장하여 진행된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뻬뜨로그라드에서 군대의 철수를 거부한 것은 혁명적 공격의 중요한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이 공격은 뻬뜨로그라드를 외적(外敵)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한다는 구호 하에 수행되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혁명군사위원회의 성립은 임시정부를 공격하는데 있어 훨씬 더 중요한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지역 군사령부의 행동에 대한 쏘비에뜨의 감독을 확립한다는 구호 하에 실현되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수비대가 혁명군사위원회와 쏘비에뜨 정치위원 망조직에 공개적으로 전향한 것은 봉기의 시작을 알리는 징표였습니다. 하지만 이번 조치는 발생할 수 있는 반혁명으로부터 뻬뜨로그라드 쏘비에뜨를 보호한다는 구호 하에 진행되었습니다. 이를테면 혁명은 방어라는 가면을 쓰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유부단하고 동요하는 분자들을 혁명의 궤도에 쉽게 끌어들이기 위해서입니다. 이 시기의 연설, 기사, 구호는 겉으로는 방어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매우 공격적이었습니다.

 

이시기 중앙위원회에 의견 차이가 있었습니까? 예, 있었습니다. 매우 중요한 차이였습니다. 봉기에 대한 의견 차이는 이미 말했습니다. 이 의견 차이는 중앙위원회 10월 10일과 16일 회의록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말한 것을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다음 세 가지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예비의회 참여 문제, 봉기에서 쏘비에뜨의 역할 문제, 봉기의 날짜 문제입니다. 뜨로츠끼는 자신이 중요한 인물임을 나타내기 위한 열망에 “무의식적으로” 뒤의 두 문제에 관해 레닌을 왜곡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이 세 가지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예비의회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는 심각한 성격의 것입니다. 소위 예비의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부르주아지를 보좌하여 쏘비에뜨를 배제하고 부르주아 의회주의제도의 기초를 다지는 것입니다. 혁명이 이미 성숙된 상황에서 예비의회가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사변(事變)은 이 목적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예비의회 자체는 꼬르닐로프 반란의 유산(流産)이었습니다. 하지만 멘쉐비끼와 사회혁명당이 예비의회를 추진한 것은 분명히 부르주아 의회제도가 목적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쉐비끼가 예비의회에 참여하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프롤레타리아트가 예비의회의 진면목을 볼 수 없도록 기만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이것이 레닌이 서신에서 예비의회 참여 지지자들을 혹독하게 규탄한 이유입니다. 예비의회 참여는 엄중한 오류였습니다.

 

뜨로츠끼가 생각하듯이, 예비의회 참여 지지자들이 “노동 계급 운동”을 “사회민주주의 궤도로 이끌기” 위한 목적으로, 즉 유기적인 결합을 목적으로 예비의회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11)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거짓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당은 항의의 표시로 예비의회에서 보란 듯이 철수함으로써 이 오류를 “신속하게” 극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이 오류를 신속하게 시정함으로서 우리당은 생명력과 혁명적 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뜨로츠끼 문집 “편집자”인 렌츠너의 서술 중에 끼어들어간 약간의 부정확성을 바로 잡도록 합시다. 예비의회문제에 대한 결정이 내려진 볼쉐비끼 그룹 회의에 관한 것입니다. 레츠너는 이번 회의에 보고자가 두 명 까메네프와 뜨로츠끼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은 4명이 있었습니다. 두 명은 예비의회 보이코트를 지지했고(뜨로츠끼와 쓰딸린) 두 명은 예비의회 참여를 지지했습니다. (까메네프와 노긴)

 

뜨로츠끼는 봉기 형태 문제에 대한 레닌의 태도를 다룰 때 훨씬 더 부정확합니다. 뜨로츠끼에 따르면, 레닌은 당이 10월에 “쏘비에뜨와 관계없이 그리고 쏘비에뜨를 배제하고” 집권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말합니다. 그런 다음 뜨로츠끼는 자신이 레닌에 덧붙인 이 터무니없는 말을 비판합니다. 뜨로츠끼는 “신이 나서 날뛰다가” 마침내 짐짓 겸손한 체하면서 말합니다. “그것은 실수였을 것이다.” 뜨로츠끼는 여기서 레닌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봉기에서 쏘비에뜨의 역할에 대한 레닌의 견해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레닌이 쏘비에뜨를 등지고 권력을 장악하려 한 것이 아니라 뻬뜨로그라드나 모스끄바 쏘비에뜨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수많은 문서를 인용할 수 있습니다. 뜨로츠끼는 왜 레닌에 대한 이 이상한 괴담을 만들어내야만 했을까?

 

뜨로츠끼가 봉기의 날짜 문제에 대한 중앙위원회와 레닌의 입장을 “분석”할 때도 조금도 정확해지지 않았습니다. 10월 10일의 유명한 중앙위원회 회의를 설명하면서, 뜨로츠끼는 이 회의에서 “봉기가 10월 15일 이전에 실시되어야 한다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중앙 위원회가 10월 15일을 봉기 날짜로 정했다가 10월 25일로 연기함으로써 스스로의 결정을 위반한 것이 됩니다. 이것이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그 기간 동안 중앙위원회는 봉기에 대한 두 개의 결의안만 통과시켰습니다. 하나는 10월 10일에 다른 하나는 10월 16입니다. 이 결의안들을 봅시다.

 

10월 10일 중앙위원회 결의안:

 

“중앙위원회는 러시아혁명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힌다. 국제 정세(독일 해군의 봉기, 이것은 세계 사회주의혁명의 전(全)유럽에 걸친 발전의 최고 표현이다. 다음은, 제국주의자들 사이의 강화(講和)12)의 위협, 이것은 러시아 혁명을 압살할 목적이다.)와 군사 상황(뻬뜨로그라드를 독일군에 넘기려는 러시아 부르주아와 께렌스끼 및 그 일당의 의심할 여지없는 결정), 프롤레타리아당이 쏘비에뜨에서 다수를 획득한 사실, 게다가 농민의 봉기와 인민의 우리당에 대한 신뢰(모스끄바에서의 선거),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2차 꼬르닐로프 반란을 위한 명백한 준비상황들(뻬뜨로그라드에서 철군, 까자끄를 뻬뜨로그라드로 급파, 까자끄에 의한 민스끄의 포위 등등) – 이 모든 일은 무장 봉기를 일정에 올려놓았다.

그러므로 중앙위원회는 분명히 밝힌다. 무장 봉기는 불가피하고 완전히 무르익었다. 모든 당 조직은 이러한 관점에서 일체의 실질적인 문제를 토론하고 결정하고 지도해야 한다.(북부지역 쏘비에뜨 대표자대회, 뻬뜨로그라드에서의 철군, 모스끄바와 민스끄에서의 인민의 발동(發動) 등등)”13)

 

 10월 16일 책임일꾼이 참석한 중앙위원회 결의안:

 

“회의는 중앙위원회 결의안을 전적으로 환영하며 완전히 지지한다. 전체 조직과 모든 노동자 병사에게 호소한다. 철저하고 일사분란하게 무장 봉기를 준비하라. 회의는 이 목적을 위해 중앙위원회가 설치한 총사령부를 지지한다. 중앙위원회와 쏘비에뜨가 유리한 시기와 적절한 공격 방법을 제때에 제시할 것이라고 확신한다.”14)

 

여러분은 봉기 날짜와 중앙위원회 결의안에 대한 뜨로츠끼의 기억이 뜨로츠끼를 배신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뜨로츠끼는 단언합니다. 레닌은 쏘비에뜨의 합법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레닌은 10월 25일 정권을 탈취한 전(全)러쏘비에뜨 대표자대회의 중대한 의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10월 25일 이전에 권력을 탈취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레닌은 10월 25일 이전에 권력을 장악할 것을 제안한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반혁명분자들이 뻬뜨로그라드를 일순간 포기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고양되는 봉기는 많은 피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이 중요했습니다. 둘째, 뻬뜨로그라드 쏘비에뜨가 봉기 일자(10월 25일)를 공개적으로 정하여 공포한 잘못은 공개된 봉기 일자 이전에 실제로 봉기를 거행하는 것 외에 시정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레닌은 봉기를 기술로 간주했기 때문에 (뻬뜨로그라드 쏘비에뜨의 부주의로) 봉기 날짜를 알고 있는 적들이 확실히 준비하리라는 것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적을 앞지를 필요가 있었습니다. 즉 공개된 날자 전에 봉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레닌이 서신에서 날자(10월 25일) 물신성(物神性)에 빠진 사람들15)을 통렬히 비판한 이유입니다. 사변(事變)은 레닌이 전적으로 옳았음을 보여줍니다. 알다시피 봉기는 전(全)러 쏘비에뜨 대표자회의 이전에 거행되었습니다.16) 알다시피  전(全)러 쏘비에뜨 대표자회의 개막전에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쏘비에뜨 대표자회의가 아니라 뻬뜨로그라드 쏘비에뜨 혁명군사위원회가 권력을 탈취했습니다. 쏘비에뜨 대표자회의는 단지 권력을 뻬뜨로그라드 쏘비에뜨로부터 넘겨받았을 뿐입니다. 이것이 쏘비에뜨 합법성의 중요성에 대한 뜨로츠끼의 장광설이 요점을 완전히 빗나간 이유입니다.

 

역동적이고 강력한 당은 부르주아 지배를 맹렬히 공격하고 타도하는 혁명적 대중의 선두에 서 있었습니다. – 이것이 당시 우리당의 위엄(威嚴)이었습니다.

이상이 10월 혁명 준비에 관한 괴담의 내막입니다.

 

3. 뜨로츠끼주의냐 레닌주의냐?

 

위에서 뜨로츠끼와 그 추종자들이 퍼트린 10월 혁명과 10월 혁명 준비에 관한 반당(反黨)적 반레닌적인 괴담들을 다루었습니다. 이 괴담들을 폭로하고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의문에 생깁니다. 무엇 때문에 뜨로츠끼는 10월 혁명과 그 준비, 레닌과 레닌의 당에 대한 이 모든 괴담이 필요했을까? 무슨 목적으로 뜨로츠끼는 반당적 저작을 새로 발표했을까? 당이 논쟁을 원하지 않는 지금, 당이 수많은 긴급한 임무로 바쁜 지금, 경제 재건을 위해 당의 일치단결이 필요한 지금, 오래된 문제에 대한 새로운 투쟁이 필요치 않은 지금, 이 새로운 저작의 의도와 임무, 목적은 무엇인가? 어떠한 목적으로 뜨로츠끼는 당을 새로운 논쟁으로 끌고 들어갈 필요가 있었는가?

 

뜨로츠끼는 이 모든 것이 10월 혁명을 “연구”할 목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그러나 당과 당의 지도자 레닌을 모욕하지 않고는 10월 혁명의 연구가 불가능합니까? 봉기를 조직하고 거행한 당과 당의 최고 지도자의 위신을 파괴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것이 무슨 종류의 “역사”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10월 혁명을 연구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10월 혁명의 연구 방법이 아닙니다. 문제는 10월 혁명의 역사기술 방식이 아닙니다. 분명히 여기에는 다른 “속셈”이 있습니다. 모든 자료에 근거해 볼 때, 이 “속셈”은 레닌주의를 뜨로츠끼주의로 대체하기 위한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고 뜨로츠끼의 저작은 이를 위한 또 하나(더구나 또 하나)의 시도입니다. 뜨로츠끼의 “긴급한” 필요는 당의 명성과 봉기를 거행한 간부들의 명성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는 당의 명성을 파괴한 후 레닌주의의 명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전환하기 위한 속셈입니다. 레닌주의의 파괴는 뜨로츠끼주의를 “유일한” “프롤레타리아”(웃지 마시오) 이데올로기로 몰래 끌고 들어오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물론(오! 당연히) 레닌주의 깃발을 내걸고 수행될 것입니다. “가능한 고통 없이” 몰래 끌고 들어오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뜨로츠끼의 최근 발표한 저작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뜨로츠끼의 이러한 작품들로 인해 뜨로츠끼주의 문제를 날카롭게 제기하게 된 이유입니다.

 

그러면 뜨로츠끼주의란 무엇입니까?

뜨로츠끼주의는 세 가지 특징이 있는데 이로 인해 레닌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을 발생시킵니다.

이러한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 “영구(永久)”[부단(不斷)] 혁명론입니다. 그러나 뜨로츠끼가 해석한 영구혁명은 무엇입니까? 빈농을 혁명 세력으로 간주하지 않는 혁명입니다. 뜨로츠끼의 “영구”혁명은 레닌이 말했듯이 “농민 운동을 건너 뛰고”, “권력 장악 놀이를 하는 어린애 장난”같은 것입니다. 영구 혁명론이 왜 위험합니까? 그 이유는 이런 혁명을 실행하려고 시도한다면 필연적으로 실패하는데 있습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동맹군 즉 빈농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 분리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레닌주의가 왜 1905년 이후 뜨로츠끼주의에 반대하여 투쟁했는지 보여줍니다.

 

뜨로츠끼는 이 투쟁의 관점에서 레닌주의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뜨로츠끼는 레닌주의를 “반혁명적 특징”을 지닌 이론으로 간주합니다. 뜨로츠끼가 레닌주의에 분개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당시 레닌주의가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독재 사상을 옹호 지지한데 있습니다. 뜨로츠끼는 레닌주의에 분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갑니다. “이제 레닌주의의 전체 구성 체계는 거짓과 날조 위에 세워져 있으며 그 자체 내에 스스로를 좀먹는 독소를 가지고 있다.”(1913년 췌이제(Chkheidze)에게 보낸 뜨로츠끼의 편지를 보시오.) 보다시피 두 개의 노선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둘째, 뜨로츠끼주의는 볼쉐비끼의 당성(黨性), 당의 통일성, 기회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불신합니다. 조직 영역에서 뜨로츠끼주의는 혁명가와 기회주의가 단일 정당 내에서 공존할 수 있고 다양한 크기의 집단을 구성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여러분은 뜨로츠끼의 8월 블록의 역사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블록은 마르토프주의자, 소환주의자, 청산주의자, 뜨로츠끼주의자의 평온한 연합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당이라고 사칭했습니다. 알다시피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당”이 추구한 목적은 볼쉐비끼 당을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우리가 의견 차이”를 보인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 본질은 다음과 같습니다. 레닌주의는 8월 블록의 제거가 프롤레타리아당 발전을 보장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뜨로츠끼주의는 이 연합을 “진정한”당을 설립하는 기초로 간주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보다시피 두 개의 노선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셋째, 뜨로츠끼주의는 볼쉐비끼 지도자의 신임(信任)을 부인하며, 위신(威信)을 파괴하고자 하고, 명예(名譽)를 훼손하고자 합니다. 레닌주의 지도자나 당 중앙기관을 불신하는 문제에서 뜨로츠끼주의와 비교될 수 있는 분파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뜨로츠끼는 레닌을 “러시아 노동운동의 모든 후진성을 악용하는데 전문적인 착취자”(같은 책)라고 평가합니다. 이러한 레닌에 대한 뜨로츠끼의 “우호적” 비평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그리고 이것은 뜨로츠끼가 표현한 “우호적” 비평 중에서 가장 “우호적” 비평도 아닙니다.

 

어떻게 이러한 추잡한 재고품을 등에 지고도 뜨로츠끼가 10월 운동 기간에 볼쉐비끼 대오에 머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뜨로츠끼가 자신의 재고품을 포기(실제로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뜨로츠끼가 그러한 “수술”을 하지 않았다면, 그와의 진정한 협력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8월 블록 이론 즉, 멘쉐비끼와의 통합 이론은 혁명으로 산산이 조각났고 거부되었습니다. 볼쉐비끼와 멘쉐비끼 사이에 무장 투쟁이 격화되고 있는데 어떻게 통합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뜨로츠끼는 이 이론이 쓸모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같은 불행이 영구 혁명론에도 “일어났습니다.” 볼쉐비끼 중에 어느 누구도 2월 혁명이 일어난 다음날 즉시 권력을 장악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볼쉐비끼가 레닌의 말을 빌리자면 “권력 장악을 가지고 놀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뜨로츠끼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쏘비에뜨안에서 영향력 확대를 위해 투쟁하고, 농민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볼쉐비끼 정책을 뜨로츠끼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뜨로츠끼주의의 세 번째 특징(볼쉐비끼 지도자에 대한 불신)은 처음 두 가지 특징이 분명히 파산해 버렸기 때문에 후퇴해야만 했습니다.

 

뜨로츠끼는 이미 변변한 그룹도 없이 군대를 잃은 정치적 외톨이로 볼쉐비끼에 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뜨로츠끼가 자신의 재고품을 벽장에 숨겨 놓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뜨로츠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로부터 배울 점은 무엇입니까? 오직, 한 가지 있습니다. 레닌주의와 뜨로츠끼주의의 장기적인 협력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뜨로츠끼주의가 오래된 자신의 재고품을 완전히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뜨로츠끼가 완전히 레닌주의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뜨로츠끼는 10월 혁명의 교훈에 대해 썼습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교훈 외에 10월 혁명의 교훈이 한 가지 더 있다는 것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방금 말한 교훈이며 뜨로츠끼주의에게는 가장 중요한 교훈입니다. 뜨로츠끼주의가 이 10월 혁명의 교훈을 배워야만 합니다.

 

하지만 명백히 뜨로츠끼주의는 이 교훈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알고 보니 10월 운동 중에 벽장에 숨겨 두었던 뜨로츠끼주의의 오래된 재고품을 다시 반출하여 판매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시장이 확대된 것을 알고 희망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의심할 바 없이 뜨로츠끼의 신간은 뜨로츠끼주의를 회복시키고, 레닌주의를 “패퇴 시키며”, 뜨로츠끼주의의 모든 특징을 몰래 끌어들여 배양하려는 기도입니다. 새로운 뜨로츠끼주의는 낡은 뜨로츠끼주의를 단순히 반복하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뜨로츠끼주의는 낡은 뜨로츠끼주의에 비해 너무 초라하고 곤경에 처해있으며,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온화하고 형식적으로 온건합니다. 그러나 본질상 낡은 뜨로츠끼주의의 온갖 특징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뜨로츠끼주의는 레닌주의에 감히 호전적으로 대항할 수는 없었습니다. 레닌주의라는 공통된 깃발 밑에서, 레닌주의를 해설하고 증진시킨다는 구호 밑에서 활동하기를 선호했습니다. 이것은 뜨로츠끼주의가 연약하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뜨로츠끼가 레닌의 사망과 동시에 출현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레닌이 살아있을 동안은 이러한 위험한 조치를 취할 용기가 감히 없었을 것입니다.

새로운 뜨로츠끼주의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 “영구”혁명 문제 대하여.

 

새로운 뜨로츠끼주의자들은 “영구”혁명론을 공개적으로 방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10월 혁명이 “영구”혁명 사상을 완전히 확인했다고 단순히 주장합니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합니다. 즉, 레닌주의의 중요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10월 혁명기 이후, 전쟁 이후에 나온 부분이다. 반대로 10월 혁명이전, 전쟁 이전 부분은 잘못된 것이고 받아들일 수 없다. 이렇게 뜨로츠끼주의자들은 레닌주의를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전쟁 이전의 레닌주의는 “낡고” “쓸모없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 사상인 레닌주의이고, 새로운 전쟁 이후의 레닌주의는 뜨로츠끼주의 요구에 적응한 레닌주의라는 것입니다. 뜨로츠끼주의자들은 레닌주의의 분열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레닌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받아들일 수 있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러나 레닌주의는 서로 다른 요소들이 결합된 절충적 이론이 아니며, 따라서 부분적으로 분할 될 수 없습니다. 레닌주의는 전일(全一)적 이론입니다. 1903년에 태어나, 3번의 혁명 테스트를 거쳤으며, 지금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투쟁 깃발로서 한 단계 더 발전하고 있습니다. 레닌은 말합니다.

 

“볼셰비즘은 1903년 이래 정치사상과 정당으로 존재한다. 볼쉐비끼의 전체 역사만이 볼쉐비끼가 프롤레타리아 승리에 필요한 철의 규율을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수립하고 유지할 수 있었는지를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17)

 

볼셰비즘과 레닌주의는 하나입니다. 하나의 사물을 나타내는 두 개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레닌주의를 두 부분으로 나누는 이론은 레닌주의를 파괴하여 뜨로츠끼주의로 대체하기 위한 이론입니다.

당이 이 기괴한 이론을 용인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2) 당성 문제에 대하여

 

낡은 뜨로츠끼주의는 멘쉐비끼와의 통합 이론(그리고 실천)으로 볼쉐비끼 당성을 파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이미 굴욕적으로 파산했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당성을 파괴하기 위해 오늘날의 뜨로츠끼주의는 새롭고 자극적이지 않으며 흡사 “민주적인” 이론을 창안했습니다. 이 이론은 베테랑 당 간부와 젊은 당원을 대립시키는 이론입니다. 뜨로츠끼주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당은 단일하고 전일적인 역사가 아닙니다. 뜨로츠끼주의는 우리당의 역사를 가치가 다른 두시기로 나눕니다. 10월 혁명 이전과 10월 혁명 이후입니다. 우리당의 역사 중 10월 혁명 이전은 적절하게 말하자면 역사가 아니라, “역사 이전”이라고 합니다. 즉 가치가 없거나 잘 해야 역사를 준비하는 그리 중요치 않은 시기입니다. 그러나 10월 혁명 이후 시기는 당의 참된 진정한 역사라 합니다. 10월 혁명 이전 시기는  “낡은”, “역사 이전”, “중요하지 않은” 간부들의 당이고, 10월 혁명 이후 시기는 새롭고, 진정한, “역사적인” 당이라는 것입니다. 증명할 필요도 없이 이렇게 당사(黨史)를 나누는 기이한 방법은 우리당의 신구 간부들의 통일을 가로 막아 볼쉐비끼 당성을 파괴하려는 계획입니다.

당이 이 기괴한 이론을 용인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3) 볼쉐비끼의 지도자 문제에 대하여

 

낡은 뜨로츠끼주의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 없이 레닌의 명성을 공개적으로 파괴하려 했습니다. 새로운 뜨로츠끼주의는 훨씬 신중합니다. 새로운 뜨로츠끼주의는 레닌을 찬양하고 칭송하면서 낡은 뜨로츠끼주의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 필요가 있겠습니다. 당은 레닌이 무자비한 혁명가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또한 신중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레닌은 무모한 사람을 싫어했습니다. 레닌은 종종 뜨로츠끼 본인을 포함하여 테러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을 단호하게 막았습니다. 뜨로츠끼는 ≪레닌에 대하여≫라는 저작에서 이 문제를 언급합니다. 뜨로츠끼가 묘사한 레닌의 모든 활동은 “기회 있을 때 마다 테러가 불가피하다는 사상을 사람들에게 주입하는 것입니다.” 피에 굶주린 볼쉐비끼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레닌이라는 인상을 창조해 냈습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 뜨로츠끼는 이런 황당하고 근거 없는 과장이 필요했을까요?

당은 레닌이 모범적인 당원임을 알고 있습니다. 레닌은 집단 지도체제를 통하지 않고 단독으로 문제를 결정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신중하게 연구하고 조사하지 않고 갑자기 문제를 결정하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뜨로츠끼도 자신의 책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뜨로츠끼가 묘사한 것은 레닌이 아니라 조용한 사무실에서 중요한 문제를 영감에 의존해 결정하는 중국 관리였습니다.

우리당이 제헌의회의 해산 문제를 어떻게 결정했는지 알고 싶습니까? 뜨로츠끼의 말을 들어 봅시다.

 

“레닌이 말했다.

‘물론 제헌의회는 해체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좌익 사회혁명당은 어떨까?’

그 때 노인 나딴손(Natanson)이 우리의 불안을 진정시켰다. 나딴손은 우리와 ‘논의하기 위해’ 왔다고 첫마디 하고는 말했다.

‘우리는 아마도 제헌의회를 무력으로 해산시켜야 할 것이다.’

레닌이 소리쳤다. 

‘브라보! 옳소! 그런데 당신네 사람들이 동의하겠습니까?’

나딴손이 대답했다.

‘우리 중 일부가 동요하지만, 결국 동의 할 겁니다.’”

 

이것이 뜨로츠끼가 역사를 쓰는 방식입니다.

당이 최고군사위원회 문제를 어떻게 결정했는지 알고 싶습니까? 뜨로츠끼의 말을 들어 봅시다.

 

“내가 매번 참모부를 방문한 후 블라지미르 일리치에게 말했다.

‘우리가 진정으로 경험이 풍부한 군사 전문가가 없다면, 이 혼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들이 배신한다면….’

‘그들 각자에게 정치위원을 배치합시다.’

레닌이 소리쳤다.

‘단호하고 솜씨 있는 두 명을 보내는 게 더 좋겠소. 우리 대오에 분명히 단호하고 솜씨 있는 공산당원이 있을 것이오.’

이렇게 최고군사위원 구조가 생겨났다.”

 

이것이 뜨로츠끼가 역사를 쓰는 방식입니다.

왜 뜨로츠끼는 레닌을 경멸하는 이런 ≪아라비안나이트≫같은 이야기가 필요한 것일까? 이것이 당 지도자인 V. I. 레닌을 찬양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당은 레닌이 우리시대의 가장 위대한 맑스주의자이며, 심오한 이론가이자, 가장 경험이 풍부한 혁명가였음을 압니다. 블랑키주의의 그 어떤 요소도 레닌에게는 이질적인 것입니다. 뜨로츠끼도 자신의 책에서 이 측면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뜨로츠끼가 묘사한 레닌은 거인 레닌이 아니라 난쟁이 블랑키스트였습니다. 10월 혁명의 날에 “쏘비에뜨와 무관하게, 쏘비에뜨를 배제한 체 직접 집권하도록” 당에 충고하는 레닌입니다. 그러나 뜨로츠끼의 진술은 조금의 진실도 없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왜 뜨로츠끼는 이러한 노골적인 … 부정확한 서술이 필요했을까요? 이게 레닌의 명성을 “조금이라도” 파괴하려는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새로운 뜨로츠끼주의의 특징입니다.

새로운 뜨로츠끼주의의 위험은 무엇입니까? 뜨로츠끼주의는 비프롤레타리아적 요소들의 중심점 및 집합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뜨로츠끼주의는 전체적인 내적 내용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약화시키고 와해시킵니다.

여러분은 물을 것입니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합니까? 뜨로츠끼의 신간과 관련하여 당의 당면한 임무는 무엇입니까?

뜨로츠끼주의는 지금 볼쉐비끼의 위신을 파괴하고 그 토대를 와해시키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당의 임무는 이데올로기적 경향으로서의 뜨로츠끼주의를 매장하는 것입니다.

반대파에 대한 억압적 조치와 분열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지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우리당은 강력하고 강대합니다. 어떤 분열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억압적 조치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억압적인 조치가 아니라 부활하는 뜨로츠끼주의에 맞선 광범위한 사상 투쟁입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논전(論戰)을 원하지도 않았고 이를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뜨로츠끼주의는 반(反)레닌주의 선언으로 우리를 강제하고 있습니다. 자! 동지들! 우리는 준비가 됐습니다.

 

                                       ≪쁘라브다≫, 제269호

                                           1924년 11월 26일


1) 존 리드, ≪세계를 뒤흔든 열흘≫, 책갈피, 2005, p. 55-56.

2)“연락 위원회”는 스테끄로프, 수까노프, 필리포프스끼, 스코벨리프(후에 체르노프와 체리셀리)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멘쉐비끼와 사회혁명당이 좌지우지한 뻬뜨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대표 쏘비에뜨 집행위원회가 1917년 3월 7일에 설립하였다. 임시정부와 연락을 구축하고 정부에 “영향”을 행사하며 그 활동을 “통제”할 목적이었다. 실제로 “연락 위원회”는 임시정부의 부르주아정책을 수행하는 것을 도왔고 모든 권력을 쏘비에뜨로 이전하기 위한 적극적인 혁명 투쟁을 하지 못하도록 노동 대중을 제지했다. 멘쉐비끼와 사회혁명당 대표가 임시 정부에 들어간 1917년 5월까지 존재했다.

3)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4, p. 21.

4) 러시아사회민주당(볼) 뻬뜨로그라드 시(市)당 대표자회의는 1917년 4월 14-22일(4월 27일-5월 5일)에 개최되었다. 출석 인원은 57인이었다. 레닌과 스딸린도 진행에 참가했다. 레닌이 임박한 정세를 보고하였다. 보고는 4월 테제에 기초하였다. 쓰딸린은 레닌의 보고를 결의안으로 작성할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5) 볼쉐비끼당의 제7차 전러시아 대표자회의에 관해서는 ≪쏘련공산당약사≫, 1952, 모스끄바, P.291-96를 참고. (역자: 한국어는 ≪소련공산당사≫ 제2권, 포노말료프 엮음, 거름, 1991, p.174-180를 참조. 단 ≪쏘련공산당약사≫는 쓰딸린 시대의 것이며 포노말료프 판 ≪소련공산당사≫는 브레즈네프 시기의 것임에 유의하라.)

6)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3, p. 295-343.

7)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4, p. 48.

8) 이런 괴담 중에는 뜨로츠끼가 내전 승리의 “유일한” 혹은 “주요한 조직자”로 널리 알려진 풍문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동지들, 진상을 밝히기 위해 이 풍문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야겠습니다. 내전에서 뜨로츠끼가 주요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승리로 이끈 조직자의 고귀한 영광은 일개인이 아니라 우리나라 선진 노동자들의 집단체인 러시아 공산당에 돌아가야 합니다. 아마도 몇 가지 예를 드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알다시피 꼴챠끄와 제니낀은 쏘비에뜨 공화국의 중요한 적입니다. 이 두적을 물리치고서야 우리나라는 마음 놓고 숨 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군대는 뜨로츠끼의 계획과는 반대로 진격하여 꼴챠끄와 제니낀 이 두적을 쳐부수었습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해줍니다.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1) 꼴챠끄에 관해

   1919년이었습니다. 우리군대는 꼴챠끄를 향해 진격하여 우파(Ufa)근처에서 군사행동을 취하였습니다. 중앙위원회가 회의를 하였습니다. 뜨로츠끼는 벨라야강(우파 근처)에서 진격을 멈추고, 우랄지역을 꼴챠끄 손에 남겨둔 채 군대의 일부를 동부전선에서 철수시켜 남부전선으로 이동시킬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중앙위원회는 뜨로츠끼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공장과 철도망이 있는 우랄지역을 꼴챠끄의 손에 맡겨서는 안 되었습니다. 꼴챠끄는 우랄에서 재기를 꾀하기 쉬워서 다시 병력을 규합하여 볼가강에 진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꼴챠끄를 우랄산맥 너머 시베리아 대초원으로 몰아낸 연후에야 병력을 남쪽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중앙위원회는 뜨로츠끼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뜨로츠끼는 사직서를 냈습니다. 중앙위원회는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뜨로츠끼 계획을 지지했던 최고 사령관 바체띠스는 사임했습니다. 새로운 최고 사령관은 까메네프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뜨로츠끼는 동부전선의 임무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2) 제니낀에 관해

   1919년 가을이었습니다. 제니낀에 대한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마몬또프(마몬또프에 대한 공격)에 대한 “강철 포위환”은 확실히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제니낀은 꾸르스끄를 점령했고, 오렐에 접근 중이었습니다. 뜨로츠끼는 중앙위원회에 소환되었습니다. 중앙위원회는 상황이 위급하다고 파악하여, 남부전선에서 뜨로츠끼를 새로운 군 지휘관으로 교체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새로운 군 지휘관은 남부전선의 임무에 뜨로츠끼가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고, 뜨로츠끼는 남부전선의 임무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군이 로스또프-온-돈과 오데사를 점령할 때까지 남부전선에서의 작전은 뜨로츠끼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사실을 반박해 보십시오. (쓰딸린 주)

9)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5, p. 79.

10) 북부지역 노동자 병사 대표쏘비에뜨 대표자대회는 1917년 10월 24-26(11-13)일 볼쉐비끼 지도 아래 뻬뜨로그라드에서 열렸다. 대표들은 뻬뜨로그라드, 모스끄바, 끄론슈따뜨, 노브고로드, 레발, 헬싱포르스(헬싱키), 비보르끄와 다른 도시들에서도 참석했다. 94명의 대표가 참석했으며, 그중 51명이 볼쉐비끼였다. 대회는 모든 권력을 중앙과 지방의 쏘비에뜨에 즉각 이양해야한다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농민들에게 쏘비에뜨로의 권력 이양을 위한 투쟁을 지지할 것을 호소하고 쏘비에뜨 자체는 적극적인 작전에 착수하며 혁명을 군사적으로 방어할 혁명군사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촉구하였다. 대회는 북부지역 위원회를 설치하고 그것에 전(全)러쏘비에뜨 제2차 대표자회의 소집을 준비하는 일과 모든 지역 쏘비에뜨 활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일을 맡겼다.

11) “볼쉐비끼는 사회 혁명당과 멘쉐비끼의 음모를 폭로할 것을 목적으로 이 회의에 참가했다” ≪소련공산당사≫ 제2권, 거름 1991, p. 210.

12) 확실히 이것은 “단독 강화”일 것이다. ― 쓰딸린

13)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6, p. 190.

14) 같은 책, p. 193-194.

15) 뜨로츠끼는 봉기를 제2차 전러시아 쏘비에뜨 대회 소집까지 연기할 것을 주장했다. ≪소련공산당사≫ 제2권, p. 212.

16) 레닌의 제안에 따라 봉기는 10월 24일, 즉 쏘비에뜨 대회 개최일 하루 전에 시작되었다. 봉기의 사령부는 스몰느이에 설치되었고 봉기를 직접 지휘하려고 레닌이 여기에 도착했다. 같은책, p. 215.

17)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31, p.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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