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키란(Roger Keeran)과 토마스 케니(Thomas Kenny)
번역: 편집부
[차례]
서문
1. 서론
2. 쏘련 정치에서의 두 가지 경향
3. 제2차 경제
4. 약속과 예언, 1985-86
5. 전환점, 1987-88
6. 위기와 붕괴
7. 결론과 암시
8. 끝 맺음말 – 쏘련 붕괴의 설명들에 대한 비판
후주
2. 쏘련 정치에서의 두 가지 경향-상1)
부하린은 매우 높이 평가되는 중요한 당 이론가이다. … 그러나 그의 이론적 견해가 완전한 맑스주의자로 간주될 수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V. I. 레닌2)
흐루쇼프는 본질적으로 부하린주의자였다. V. M. 몰로또프3)
안드로뽀프는 그 일에 대해 흐루쇼프의 편도 브레즈네프의 편도 분명히 아니었다. V. M. 몰로또프4)
1980년대 소련사회에 발생한 위기는 대부분 당의 위기에 기인(起因)한다. 쏘련 공산당에는 두 개의 반대되는 경향이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 대 소부르주아지, 민주주의 대 관료주의가 그것이다. 러시아 연방 공산당(Communist Party of the Russian Federation) 제4차 당 대회 강령(1997)5)
쏘련의 붕괴는 내부의 경제적 위기나 대중봉기 때문이 아니었다. 미하일 고르바쵸프 서기장 및 쏘련 공산당(CPSU) 지도부가 추진한 개혁 때문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쏘련에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고르바쵸프의 개혁은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대응이었다. 4장에서 쏘비에뜨 사회가 직면한 만성적인 문제를 세 가지 영역에서 검토할 것이다. 경제, 정치, 국제 문제이다. 모든 문제는 새로운 사태로 발전하여 80년대 초반에 더욱 심각해 졌다. 그러나 환자가 죽은 원인은 질병 때문이 아니라 치료법의 잘못 때문이었다. 따라서 치료법의 기원과 특성, 즉 고르바쵸프 개혁의 기원과 특성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질병이 의학적 질병보다 진단하기 쉽지 않다는 간단한 전제에서 시작하자. 사회적 질병에 대한 진단과 정의 및 질병에 대한 정책적 대응은 정치, 즉 상반된 가치관과 이해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나 쏘련이나 마찬가지다. 외부인들은 쏘련이 유일당 체제이기 때문에, 정치적 사고는 획일적이고 정치적 논쟁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쏘비에뜨 공산당은 혁명이전부터 둘 이상의 경향이나 추세를 가지고 있었다. 고르바쵸프는 자신의 정책을 완전히 새롭게 고안해 낸 것이 아니다. 니꼴라이 부하린, 니끼따 흐루쇼프 등에 의해 대표되던 당내 경향을 반영한 것이다.
고르바쵸프의 사상이 정치적으로 허공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듯이, 사회 경제적으로도 그 기반이 없는 것이 아니다. 즉 고르바쵸프의 사상은 사회 경제적 이해관계를 반영한다. 고르바쵸프의 1986년 이후의 개혁은 쏘련 사회에 있는 개인기업 및 “자유시장”과 관련된 사람들의 이익을 반영하고 있다. 이들은 기업가와 부패한 당 관료들인데 지난 30년 동안 증가해 왔다.
계속하기 전에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부하린, 흐루쇼프, 고르바쵸프의 접근법이 논리적으로 밀접한 연속관계가 있지만, 직면한 문제, 사회적 지지기반, 주장한 정책들은 달랐다. 예를 들어 1920년대에 개인기업에 관심이 있는 가장 큰 사회집단은 농민이었는데, 농민은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뚜렷이 구별되는 계급이었다. 1970년대에는 인구의 20%만이 농업에 종사했으며 그 중 대부분은 국영농장이나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농업노동자였다. 그래서 개인기업에 이해관계가 있는 사회적 집단은 제2 경제를 이루는 소(小)기업가로 되었다. 이러한 집단은 1920년대 초 신경제정책(NEP)하에서 성장하였다. 이들은 쓰딸린의 토지 집단화로 급격히 줄어들었다가, 흐루쇼프의 소위 자유화로 재등장하여, 브레즈네프의 안일한 대응으로 크게 증가했으며, 고르바쵸프의 개혁으로 급증하였다. 또 다른 차이점은 부하린이 부농(kulaks)을 옹호하며 활동하는 속에서 그리고 흐루쇼프의 다양한 정책 속에서 두드러졌던 농업문제가 고르바쵸프의 계획에서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고르바쵸프는 외교정책의 후퇴, 문화적 자유화, 당의 약화, 시장 주도권이라는 그의 선구자들이 결코 생각하지 않은 극단까지 나아갔다.
러시아 혁명에서, 두 계급이 승리함으로써 두 가지 대립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노동자 계급과 주로 농민인 소부르주아지이다. 1917년 쏘비에뜨 노동계급은 소수였고, 1917년 이후 수십 년 동안 수천만의 농민이 성장하는 쏘비에뜨의 새로운 노동계급을 구성하였다. 이 두 계급이 존속함에 따라, 이들의 계급적 이해를 두 가지 정치적 경향이 반영하였다. 1920년대에는 두 경향 모두 표면상으로는 사회주의 건설에 찬성했다. 노동자 계급은 공업을 급속히 발전시켜 노동계급을 강화하고 농업 집단화로 재산소유 계급을 약화시키는 정책, 특히 중앙집중식 계획경제에서 공산당의 역할을 강화하는 정책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소부르주아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유지하거나 혼합하여 사회주의를 천천히 건설하기를 선호했다. 예를 들어 사유재산 및 경쟁시장, 이윤자극 등을 보존하는 것이다. 모든 정치사상이 한 두 개의 범주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범주는 다양한 활동이 선회하는 중심축을 제공한다. 이는 신경제정책(NEP)에 관한 초기 논쟁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1920년 후반과 1921년 초반, 레닌과 혁명의 지도자들은 외국 침략자들을 격퇴하고 전쟁에서 평화적 건설로 관심을 돌렸다. “전시 공산주의”정책, 특히 많은 농민들을 멀어지게 한 잉여 곡물의 강제징발제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심각한 연료 및 식량, 운송수단의 부족과 싸워야 했고, 산업 및 식량 생산을 회복시키고, 노동자와 농민의 단결을 확실하게 해야 했다. 1921년 3월 볼쉐비끼 제10차 당 대회에서, 레닌은 이른바 신경제정책을 제안했다.6) 이는 “전략적 후퇴”였고,7) 재편성할 기회였으며 사회주의를 향한 미래의 전진을 위한 기반을 세우는 것이었다. 신경제정책 하에서 곡물 강제징발제는 현물세제로 대체되었다. 농민들은 자유거래를 통해 잉여농산물을 팔 수 있었고, 다양한 종류의 자본주의 기업이 존재할 수 있었다. 신경제정책으로 농민이 농산물을 더 많이 생산하도록 독려하고, 국가는 농산물에 세금을 부과하여 국영 공업을 활성화시키는데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곧바로 논쟁이 발생했다. “좌파”는 신경제정책을 자본주의에 대한 항복이라 하고 쏘비에뜨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했다. 한편 뜨로츠끼, 지노비예프, 부하린 등도 신경제정책이 너무 자본주의화 되고 자본주의에 너무 광범위한 양보를 한다고 생각했다. 레닌은 신경제정책이 위험하다는데 동의했다. 신경제정책이 “제한 없는 거래”를 의미하며, “자본주의로 돌아간 것을 의미한다.”8)고 했다. 그러나 레닌은 당이 이 위험을 관리하여 후퇴를 제한하고 일시적으로는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레닌이 우세했다.9)
1924년 레닌의 임종 무렵, 혁명은 국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여 공고히 했으며, 제국주의 침략세력과 국내 반혁명세력을 쳐부쉈다. 주요 기업을 국유화 했고, 토지는 농민에게 분배했으며, 공업과 식량생산은 회복되고 있었다. 원래, 모든 공산주의 지도자는 서유럽의 혁명 없이는 러시아 같은 후진농업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23년 독일 노동자 봉기의 패배와 함께, 유럽에서 어떤 혁명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이 분명해 졌다. 유럽 혁명을 기대할 수 없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 가지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레온 뜨로츠끼, 니콜라이 부하린, 그리고 이오씨프 쓰딸린이었다.
레온 뜨로츠끼는 사회주의 세계혁명을 계속 추진하면서 국내의 사회주의 건설을 시도하자고 주장했다. 국내적으로, 그는 산업의 발전, 농업의 집단화와 기계화, 경제 계획의 확장을 주장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계혁명을 점점 더 단호하게 강조했다. 세계혁명이 러시아의 관료적 퇴보와 혁명적 열정의 상실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1925년 제14차 당 대회에서 뜨로츠끼와 좌익반대파는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신속한 공업화와 자립의 길이 채택되었다.10)
니콜라이 부하린은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방법에서 소부르주아지나 우익적 방안을 제시했다. 배링턴 무어는 레닌, 뜨로츠끼, 쓰딸린과는 달리 부하린이 주요한 조직적 책임을 져야 하는 고위직을 수행한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쁘라브다≫의 편집자이자 꼬민떼른의 서기인 부하린은 “사람보다는 상징(象徵)”을 다루었다. 그리고 이론가인 부하린의 “공산당안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극좌에서 극우”로 옮겨갔다. 1920년대에는 확고한 우익이었다. 부하린은 러시아가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뛰거나 신속히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무어는 부하린의 입장이 “서구 사회 민주주의적 점진주의와 매우 유사하다.”고 하였다. 부하린은 계급투쟁사상을 약화시켰다. 계급투쟁을 경쟁하는 이해 집단 간, 즉 국영기업과 개인기업 간, 협동농장과 개인농장 간의 평화로운 경쟁을 통해 우월성을 점진적으로 보여주는 사상으로 변질시켰다. 신경제정책의 창안자인 레닌이 신경제정책을 솔직하게 퇴각으로 여긴 반면, 부하린은 사회주의에 이르는 길로 보았다. 부하린은 신경제정책을 지속시키려 했고, 특히 꿀라끄(부농)에게도 개인기업을 허용하거나 심지어 장려하려고 했다. 신속한 공업화 및 농업 집단화, 농민에 대한 어떠한 강압도 반대했다. 대신에 농민에게 원하는 것을 제공해야한다고 말하면서 농민에게 “부자 되시오”라는 구호를 제시했다. 뜨로츠끼의 사회주의 세계혁명에 대한 헛된 희망을 어슴푸레 모방하면서 해외 비공산주의 단체로부터 쏘련에 대한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영국 노동조합과 독일사회민주당 및 중국민족주의자들로부터 지지를 얻고자한 희망은 1926-27년에 실패로 끝났다. 1927년 15차 당 대회는 부하린과 우익 반대파를 거부하고 농업 집단화를 촉진하는 정책을 채택하였다.11) (60년 후 고르바쵸프는 역사학자 스티븐 코헨이 쓴 부하린 전기를 읽었다. 고르바쵸프의 측근인 아나똘리 체르니예프(Anatoly Chernyaev)는 고르바쵸프가 부하린을 복권시키기로 결정했고, 부하린을 재평가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이데올로기를 재평가하는 수문을 열었다”12)고 했다.)
쓰딸린은 뜨로츠끼 및 부하린과의 논쟁과정에서 사회주의의 길을 향한 해결책을 밝혔다. 이는 4가지 주요 구성요소로 되어 있다. 첫 번째는 사회주의가 일국에서 건설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사회주의의 승리”가 “하나의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가능하다는 레닌의 1915년 사상을 반복한 것이다.13) 1920년대에 쓰딸린은 레닌의 생각을 강령으로 변환시켰다. 쓰딸린은 쏘련이 빠르게 공업화된다면, 서구 혁명 없이, 해외의 비공산주의 동맹세력의 도움 없이, 그리고 발전된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두 번째 요소이다. 공업화에는 재원이 필요하다. 공업자체에서 재원을 조달하기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해외에서 투자를 유치하기는 불가능 했다. 농업 생산량을 늘림으로써 재원을 조달해야했다. 따라서 신속한 공업화는 기계화 된 생산을 활용하는 대규모 집단농장화가 필요했다. 이것이 세 번째 요소이다. 공업 발전과 농업 생산의 균형은 네 번째 요소인 중앙 집중적 계획이 필요했다.14)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는 이 문제를 정식화하고 해결책을 제시한 것은 “쓰딸린의 정치적 천재성”을 증명한다고 했다. 이러한 사상으로 쓰딸린은 먼저 뜨로츠끼를 다음에는 부하린을 물리쳤다. 카가 지적한대로 쓰딸린은 혁명을 구해냈다. “레닌의 혁명이 있은 지 10년 만에 쓰딸린은 제2혁명을 이루어 냈다. 레닌의 혁명이 모래구덩이에 처박히는 것을 구해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쓰딸린은 레닌주의를 계승하여 완수했다.”15)
쓰딸린과 부하린의 정책 차이의 기저에는 보다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부하린은 계급투쟁이 단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수립될 때까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쓰딸린은 (많은 사람이 주장하듯이) 사회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계급투쟁이 일반적으로 격화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신경제정책에서 집단화로 이행할 때 계급투쟁이 특히 격렬해 질 것이라고 했다.16) 부하린은 농민, 시장, 자본주의에 양보하는 신경제정책을 장기적인 정책으로 보았다. 그러나 쓰딸린은 적당한 시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일시적 방편으로 보았다. 부하린은 1927-28년 곡물 위기 동안, 자유시장에 의지하여 농민에게 더 많은 소비재를 공급함으로써 더 많은 곡물을 생산하도록 장려하고자 하였다. 임박한 전쟁의 위협에도, 부하린은 농민들에게 불리한 영향을 미친다면 공업화를 가속화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쓰딸린에게 임박한 전쟁은 농민이 재정적으로 무리한 부담을 진다하더라도 공업화를 가속화시킬 원인이었다. 쓰딸린은 부하린을 “농민 철학자”로 치부했다.17)
부하린과 쓰딸린의 차이는 정치 경제 문제 외에 특히 민족 문제에도 스며있다. 레닌과 쓰딸린의 민족문제에 두드러진 특징은 민족문제를 매우 중요시 했다는 점이다. 레닌은 다양한 민족의 역사와 문제에 대해 여러 언어로 된 수십 권을 읽고, 수백 페이지의 노트를 작성했으며, 적어도 12번이상의 연설과 보고서, 책을 썼다.18) 레닌은 민족해방 투쟁의 중요성과 자결권에 관한 맑스주의 이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19) 쓰딸린 역시 민족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고 수많은 연설을 하고 보고서를 썼다.20) 게다가 쓰딸린은 혁명이후 민족분과 정치위원(인민위원이라고도 함, 장관급-역자)으로 복무했으며, 수많은 어려운 민족문제를 다루었는데 레닌과 견해가 종종 달랐다. 레닌 밑에서 1922년 쏘비에뜨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창설을 주도했고 15개 공화국과 수많은 자치지역을 포괄하는 연합에 관한 여러 가지 수정안 작성을 관장하였다. 쏘련은 쓰딸린 지도의 30년 동안 선진적인 러시아 공화국의 자원과 노하우를 사용하여 변경지역 공화국의 공업을 건설하고 농업을 기계화하며 교육과 문화적 수준을 높였다. 이러한 정책은 레닌이 “인민의 감옥”이라고 불렀던 제정 러시아 지역에서 체계적으로 억압 받았던 사람들에게 해방과 진보를 가져다주었다.21) 물론 이것이 모든 문제를 레닌과 쓰딸린이 해결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공업화과정에서 러시아 시민과 몇몇 변경지역 공화국을 지나치게 몰아붙이고 수로의 오염 등 부작용으로 인해 쓰딸린과 그 후계자들의 정책은 새로운 민족적 불만을 야기했다. 그럼에도 레닌과 쓰딸린이 민족문제에 보인 지대한 관심은 부하린, 흐루쇼프, 고르바쵸프가 보인 상대적 등한시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민족문제에 접근하는 두 경향의 차이가 중요한 것은 보다 심원한 차이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좌우경향은 정치 경제에서와 마찬가지로 투쟁에서도 구별된다. 레닌과 쓰딸린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의 방정식에서 하나의 중요한 독립변수로서의 민족주의에 맞서야 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억압받는 사람들의 민족적 염원의 중요성을 무시하거나 강대국 우월주의 및 편협한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무시한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위험에 직면할 것이다. 레닌과 부하린은 1914년과 1919년 사이에 민족문제로 중대한 논쟁을 했다. 부하린은 무계급적이고 비맑스주의라는 이유로 민족주의에 대한 호소를 일축했다. 그 결과 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해방운동의 고양을 예견하지 못했다. 반면에 레닌은 식민지 및 비(非)식민지의 민족주의는 혁명의 잠재력이 있으며,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진정으로 민족자결을 위해 싸운다면 억압받는 민족의 민족주의자는 대부분 농민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합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하린의 전기 작가 스티븐 코헨은 “부하린이 혁명세력으로서의 반제민족주의를 보지 못한 것은 제국주의를 근원적으로 다루는데 있어 가장 눈에 띄는 결점이다.”22)고 하였다. 차르제국에 억압당하는 민족들의 지지를 얻어 승리한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레닌이 정당하다는 점이 입증되었고 부하린은 자신의 견해를 바꾸었다.
신경제정책이 진행되는 동안 쓰딸린은 1919년 이전 레닌이 직면하지 못했던 문제에 직면했다. 신경제정책은 소자본가의 성장을 촉진했다. 쓰딸린이 “중간계층”이라 부른 이들은 농민과 “도시의 소생산자”이다. 이 중간층은 “억압받는 민족”인구의 10분의 9을 차지했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호소에 특히 취약했다. 이 계층 속에서 민족주의의 성장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공고화에 실질적 위협이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반은 대부분 주요중심지인 공업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쓰딸린은 “신경제정책과 관련하여 성장하고 강조되고 있는 민족주의 경향에 대한 투쟁”을 촉구했다. 이에 쓰딸린에 대한 주된 반대자는 부하린이었다. 부하린는 1919년에 신경제정책을 반대했던 자신의 견해를 180도 바꾸어 받아들였다. 1923년에 부하린은 신경제정책과 신경제정책으로 인해 생겨난 소자본가를 지지했다. 게다가 이 계급 내에서 성장하는 민족주의에 대해 불간섭 정책을 주장했다. 쓰딸린은 부하린이 민족자결권을 부정하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으로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고 말했다.23) 그러나 여전한 것은 부하린이 민족주의를 충분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민족주의가 혁명에 대한 잠재적 지원세력이자 잠재적 위험세력임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의 발전을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들과의 투쟁에서 주저주저하였다.
쓰딸린은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다민족 국가를 건설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정책에도 문제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쓰딸린은 주변의 낙후한 민족들 사이에 있는 협소한 민족주의를 꺾어버리기로 결심했다. 거주민 전체를 이주시키고, 유대인을 세계 각지의 사람들로 구성된 “뿌리없는 세계주의자들”이라 공격했다. 그리고 러시아인이 당과 국가를 장악하도록 했다.24)
1930년대 중반부터 1953년 쓰딸린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5개년 계획을 통해 힘에 의한 집단화 및 신속한 공업화, 중앙집권 계획이 지배했다. 물론, 부하린과 다른 지도자들의 재판과 처형 및 수많은 일반 공산주의자들의 투옥(많은 경우 잘못이 없었다)은 반대 목소리가 비교적 없었던 것과 관련이 많다. 그러나 쓰딸린이 모든 다양한 사고를 제거하고 억압했기 때문에 쓰딸린의 견해가 지배했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쓰딸린의 접근 방식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것은 쏘련을 단기간에 반봉건 후진국에서 선진 공업국으로 이끈 명백한 성공에 기인한다.
바만 아자드(Bahman Azad)는 성과에 대해 간략히 요약한다. 처음 두 5개년 계획에서, 공업생산은 연평균 11% 증가했다. 1928년에서 1940년까지 공업부문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8%에서 45%로 성장했다. 1928년과 1937년 사이에, 중공업의 총생산량 점유율은 31%에서 63%로 증가했다. 문맹률은 56%에서 20%로 떨어졌다. 고등학교 및 전문학교, 대학교 졸업자수는 급증했다. 게다가, 이 시기에, 국가는 무료교육 및 무료의료, 사회보장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6년 후에는 국가가 미혼모와 많은 자녀를 둔 어머니에게 보조금을 지급했다. 아자드는 이러한 성과는 “인상적이며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25)
1941년에서 1953년 사이, 쏘련은 파시스트 독일을 물리치고 전쟁의 폐허에서 다시 일어났다. 1948년에 공업총생산은 1940년을 넘어섰고 1952년에는 2.5배가 넘었다.26) 쏘련은 원자탄을 개발해서 서구를 냉전의 교착상태에 빠지게 했다. 그러나 확실히 문제는 있었고 농산물은 심각하게 부족했다. 심지어 성취에 따른 개인적인 삶 및 생활수준, 사회민주주의, 집단지도에 관한 일정한 비용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이루어냈다.
흐루쇼프의 정책이 쓰딸린의 정책과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내에서 지속된 이데올로기적 차이와 논쟁을 인식해야만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게오르기 말렌꼬프(Georgi Malenkov)와 안드레이 쥐다노프(Andrei Zhdanov) 사이의 투쟁은 쏘련공산당 역사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둘 다 나무랄 데 없는 혁명가이다. 쥐다노프는 전쟁 전에는 당 이데올리기 작업을 이끌었고, 전쟁 중에는 레닌그라드의 독일군 포위공격에 대한 영웅적 저항을 책임졌다. 말렌꼬프도 전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가를 책임지고 있는 국가방위위원회 일원으로 당과 정부의 인사 및 운용을 책임졌다. 이들은 쓰딸린의 두 대리인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 전쟁 후 전망과 우선순위에 대해 의견을 달리했다. 쥐다노프는 국제평화에 대한 희망적 전망에 기초해서 당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생산과 기술적 노하우를 우선시해야 하지만 평화가 지속될 때는 이데올로기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더해 생활수준의 향상과 소비재의 증가를 강조했다. 예를 들어 쥐다노프와 동지들은 1946년과 1947년에 문학과 문화에서의 유약한 이데올로기 및 “개인농장”에 반대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쥐다노프의 표적은 우끄라이나 당대표인 흐루쇼프였다. 신입당원의 선발에서 나타난 부주의를 비판하고 흐루쇼프의 지도하에서 우끄라이나 역사에 관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출판된 것을 비판했다.
대조적으로 말렌꼬프는 국제적 위협이 여전히 남아있으므로 당의 우선정책은 기초공업의 발전과 군사력 강화에 두어야 한다고 믿었다. 공업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한 것은 확실히 쓰딸린을 찬성하고 부하린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나중에 흐루쇼프가 쥐다노프의 소비재 증가 우선정책을 그대로 흉내냈을 때, 말렌꼬프는 여전히 공업의 우선 발전을 강조했다.) 1946년 쓰딸린은 쥐다노프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1947년에 트루먼 독트린과 마샬 플랜의 미국 외교정책이 공격적인 반쏘 노선을 시사하자 말렌꼬프에 동의했다. 1948년 쥐다노프가 죽고, 가장 가까운 지지자들은 강등되었다. 그리고 이들 중 두 명은 반역죄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27) 공업과 군사력을 강화하는 정책은 여전히 우위를 유지했다. 쥐다노프-말렌꼬프 투쟁은 사회주의 발전방향에 대한 심각한 정치적 차이가 쓰딸린 하에서도 계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초기의 양극 경향과 비슷하다.28)
1953년 쓰딸린의 사망으로 인해, 사회주의 건설방향에 대한 정치투쟁은 전면화 되었다. 먼저 흐루쇼프가 당 수뇌가 되고, 말렌꼬프가 정부 수반이 되었다. 당의 지도집단은 쓰딸린의 억압을 물리치고 인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당 최고 간부회의는 모두 비밀경찰의 수장인 라브렌띠 베리야(Lavrenti Beria)를 체포하여 해임시킬 비밀계획에 흐루쇼프와 손을 잡았다. 베리야는 쓰딸린 사후 당의 최고지위를 갈망하고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과도한 억압과 동의어가 되었다.29) 중앙위원회는 정치범으로 투옥된 사람들을 석방하고 복권을 시작했다. 특히 최근의 희생자들인 소위 의사의 음모 관련자들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쓰딸린의 건강을 해치려는 음모로 기소된 의사들이다. 또 중앙위원회는 과거 억압을 평가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여기서는 처벌의 범위와 정도에서 정당한지의 여부를 판단하였다.30)
1956년 최고 지도자들의 단합은 쓰딸린 하의 억압을 다루는 흐루쇼프의 취급방법 때문에 틀어져버렸다. 흐루쇼프는 1956년 2월 20차 당 대회 마지막 날 자정에 4시간 동안 “비밀 연설”을 하였다. 쓰딸린의 “개인숭배”와 충실한 당원을 포함한 무고한 사람 수천 명의 구금, 고문, 처형에 대한 비난이었다. 중앙위원회가 투표로 이 연설을 전국적인 당회의 독회(讀會)에 회부했으나 중앙위원 일부는 이를 거부했다. 비아체슬라프 몰로또프(Vyacheslav Molotov)와 게오르기 말렌꼬프(Georgi Malenkov), 라자르 까가노비치(Lazar Kaganovich), 보로실로프(K. E. Voroshilov)는 흐루쇼프가 불공정하다고 생각했다. 쓰딸린의 긍정적인 공로를 인정하지 않고 일부 억압조치의 정당성도 무시했다는 것이다. 이 연설로 인해 동독과 헝가리에서 폭동이 촉발된 것으로 보이자 흐루쇼프에 대한 의혹은 강화되고 확산되었다. 6월, 중앙위원회는 흐루쇼프에 대한 반대를 표명했다. 쓰딸린의 권력 남용을 비난하는 동시에 업적도 인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31) 그후 흐루쇼프는 쓰딸린에 대해 보다 공평한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 흐루쇼프는 지도부의 반대자들에게 “우리 모두는 쓰딸린의 똥보다도 가치가 없는 존재들이다”고 말하였다.32) 그러나 흐루쇼프에 대한 반대는 곧 다른 논점에 묻혀버렸다.
매우 충동적이고 이따금 변덕스런 흐루쇼프의 사회주의 건설방향은 대개 부하린 및 쥐다노프와 비슷했고 고르바쵸프의 전조가 되었다. 이러한 건설방향은 이데올로기, 농업, 외교, 경제, 문화, 당 운영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쏘련공산당의 역사에서 어떤 이념이 갖는 역사적 일관성은 중요하다. 하지만 개별 정책은 구체적 시기의 구체적 조건에서 사회주의를 방어하고 얼마나 전진시켰는가라는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흐루쇼프가 평화공존을 추진하고 지상군을 감축한 것은 흐루쇼프의 이념적 경향이 무엇이든 간에 대개는 적절하고 성공적인 정책이라 평가된다. 하지만 흐루쇼프의 다른 정책들은 매우 의심스럽다. 흐루쇼프가 1957년 당에 대한 장악력을 공고화하기 전에도 몰로또프와 다른 이들이 흐루쇼프의 주요정책에 반대했었고, 1964년 흐루쇼프가 실각된 후에는 많은 정책이 뒤집혔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사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고르바쵸프에 와서 다시 꽃피게 된다.
흐루쇼프의 정책과 이를 비판한 몰로또프의 정책(마찬가지로 고르바쵸프의 정책과 이를 비판한 예고르 리가체프의 정책)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론 실천에서는 때때로 강조점이 같아지기도 하지만 이념의 양극단을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흐루쇼프는 공산주의로 가는 빠르고 쉬운 길이 있다고 믿었다. 반면에 흐루쇼프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좀 더 장기적이고 어려운 길을 예상했다. 흐루쇼프는 대외적으로는 미국 및 그 동맹국과의 “대결 완화”를, 국내적으로는 “정치적 긴장 완화”와 “소비자 공산주의”를 모색했다.33) 흐루쇼프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대외적으로는 계급투쟁의 지속과 국내적으로는 각성(覺醒)과 규율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흐루쇼프는 쓰딸린에게서 잘한 점보다 잘못한 점을 더 많이 보았다. 몰로또프 및 다른 사람들은 잘한 점을 더 많이 보았다. 흐루쇼프는 여러 가지 서구의 자본주의적인 정책을 사회주의에 통합하려고 하였다. 즉 시장 메커니즘, 분권화. 사적 생산, 막대한 비료에 의존한 옥수수 경작, 소비재에 대한 투자 확대 등을 선호했다. 몰로또프는 중앙 집중 계획 및 사회적 소유의 강화와 우선적 공업 발전의 지속을 선호했다. 흐루쇼프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및 프롤레타리아 전위인 공산당의 개념을 확대하여 노동자 이외의 인민을 노동자와 동등한 기반위에 위치시키고자 하였다. 흐루쇼프의 비판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흐루쇼프는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고 1938에서 1949년까지 우끄라이나 당서기를 역임했다. 이 때 농업문제 권위자가 되었고 쓰딸린을 보좌하여 국유 공업에 농업을 종속시키는 일을 했다. 우끄라이나에서의 흐루쇼프의 지도는 당의 비판을 받았고, 쓰딸린도 이에 동의했다. 너무 많은 사람, 특히 농민을 당에 받아들여 당의 버팀목을 느슨하게 했고, 협소한 우끄라이나 민족주의를 묵인했기 때문이다.34) 1949년 당서기가 되어 모스코바로 이주해서도 농업과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국가 농업 정책국장으로 지방을 자주 방문한 쓰딸린 정치국의 유일한 성원이었다.35) 1945년 이후 흐루쇼프의 농업정책은 당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1953년, 흐루쇼프는 일련의 정책을 시작했다. 이는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흐루쇼프는 새로운 생산방식의 원천으로서 뿐만 아니라 쏘비에뜨의 성취에 대한 비교 표준으로서 서구 국가를 바라보도록 장려했다. 또 자원을 공업에서 농업으로 이동시켰다. 농업생산을 장려하기 위해 신경제정책 유형의 수단으로 되돌아갔다. 작은 개인 토지에 대한 세금을 줄이고, 개인소유 가축에 대해서는 세금을 없앴다. 시골과 도시에서 인민들이 개인 소유의 소, 돼지, 닭을 기르고 개인 텃밭을 경작하도록 장려하였다. 흐루쇼프는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영감이 갑자기 떠올랐다. 1954년 1월,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의 황무지 수백만 헥타르를 경작하기 위한 전국적인 캠페인을 제안했다. 그해 30만 명의 지원자가 황무지 개간 캠페인에 합류하여, 1300만 헥타르의 새 토지를 경작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1400만 헥타르의 경작지가 늘어났다.36)
흐루쇼프는 또한 생활수준을 높이는데 새로운 강조점을 두었다. 전시의 궁핍화 이후, 아무도 쏘비에뜨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문제는 방법과 비용이었다. 흐루쇼프의 반대자에 의하면 흐루쇼프의 방식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투자 우선순위를 중공업에서 경공업 및 소비재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흐루쇼프가 서기장에 취임한 첫해에 중공업에 대한 투자는 소비재보다 단지 20%만 넘어섰다. 전쟁 전에는 70%를 넘었었다.37) 우선순위의 이러한 변화는 쓰딸린의 1952년 경고에 직면했다. “생산수단의 우선적 생산을 중단하면 우리는 지속적 성장의 가능성을 파괴하게 된다.”38) 장기적으로 볼 때 우선순위 변경은 흐루쇼프 자신이 기획한 서구를 뛰어넘는 목표의 뿌리를 침식했다. 둘째, 흐루쇼프의 반대론자들은 흐루쇼프의 강조가 쏘련을 소비재를 놓고 미국 및 서유럽과 경쟁관계에 빠뜨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쏘련이 아마도 승리할 수 없는 싸움일 것이다. 독일의 공산주의자 한스 홀츠는 후에 사회주의 목표를 자본주의와의 물질적 경쟁으로 낮춘 것은 “이데올로기 영역”을 포기한 것이라고 말했다.39) 5년이나 10년 안에 서구를 따라잡고 뛰어넘으려는 목표는 “서구의 소비 방식을 중심으로 한 욕구와 갈망을 자극했다”는 것이다.40) 이 슬로건은 쏘비에뜨 인민들에게 “사회체제 간의 경쟁은 삶의 목표를 넘는 것이 아니라 소비 수준을 넘는 것”이라는 견해를 갖게 했다.41) 간단히 몰로토또프는 “흐루쇼프는 부르주아 근성의 인물이다”고 말했다.42)
최고 간부회(당시에는 정치국으로 알려졌던)의 몰로또프와 다른 성원들은 흐루쇼프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반대했다. 흐루쇼프의 정책은 쓰딸린의 격하, 국제적 계급투쟁의 경시, 개인 농업생산의 장려, 황무지 개간, 공업의 분권화, 중공업의 경공업으로의 전화 등이다.43) 예를 들어, 몰로또프와 다른 성원들은 기후문제와 기반시설 부족으로 황무지의 대규모 경작은 재앙을 초래할 것이고 이미 경작되고 있는 지역에 황무지에 사용되는 자원을 투여하면 더 많은 생산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반대파는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조치들을 지지했지만 우선순위의 급격한 변화에는 반대했다. 반대파는 2년 동안 커져서 1957년 5월 두 정책에 대해 행동에 착수했다. 첫째는 공업 분권화에 대한 흐루쇼프의 결정이었다.44) 둘째는 흐루쇼프가 3,4년 만에 서구를 뛰어 넘기 위해 우유, 고기 및 버터 생산에서 “눈부신 도약”을 요구한 연설이었다.45) 흐루쇼프의 손자의 말에 의하면 흐루쇼프는 이렇게 해서 “공산주의로 도약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흐루쇼프조차 말년에 “잘못된 생각”이라고 평가했다.46)
1957년 6월 18-21일의 4일간의 최고간부회 회의와 그 직후의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흐루쇼프와 반대파의 결정적인 대결이 벌어졌다. 흐루쇼프의 서기장 해임을 위한 전초전으로 반대파는 흐루쇼프의 경제정책 특히 농업정책과 국가계획을 분권화하려는 생각을 맹공격했다.47) 몰로또프와 다른 성원들은 투자 우선순위를 공업에서 농업으로 바꾸는 것, 소비재에서 서구를 서둘러 따라잡고자하는 성급함, 황무지의 개간, 농업제한의 완화, 경제의사결정의 탈집중화에 반대했다. 반대파의 관점에서 볼 때, 흐루쇼프의 정책은 원칙적으로 잘못되었고 경제적 혼란을 가져올 것이었다. 몰로또프는 황무지 개간 프로그램을 “모험”이라고 하고 이로 인해 공업에서 자원을 빼앗아 갈 것이라고 말했다. 말렌꼬프는 소비재가 아니라 철강제품, 철, 석탄, 석유가 서구를 능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렌꼬프는 “우리 맑스주의자들은 공업에서 시작하는데 익숙하다”고 하고, 흐루쇼프의 계획을 “우익 농민 편향”이라 부르고 이 “기회주의적” 조치는 쏘비에뜨 인민이 신속한 공업화에 관심을 덜 갖게 할 것이라 했다.48)
반대파는 최고간부회에서 7대3(중립1)로 다수를 차지했다. 흐루쇼프에 대한 해임이 임박했다는 말이 새어나가자, 중앙위원회 모스크바 위원들(흐루쇼프가 승진시킨 사람이 많았다)이 최고간부회에 몰려들어 중앙위원회 소집을 요구했다. 6일 간 계속된 중앙위원회의 급조한 회의는 흐루쇼프를 지지하고 중앙위원회와 최고간부회에서 몰로또프, 말렌꼬프, 까가노비치를 추방하는 것으로 끝났다.49)
흐루쇼프는 자신이 “반당파”라 부른 반대파에 승리한 후 7년 동안 큰 저항 없이 통치했다. 이 기간 흐루쇼프의 정책과정은 두 가지 점이 특징적이다. 첫째는 일부 정책을 바꾸기도 하고 동요하기도 하였지만 흐루쇼프는 국내 정책진행의 주요요소를 밀고나갔다는 점이다. 그것은 군비 삭감, 쓰딸린 공격, 계획의 분권화. 국가 트랙터 사업소의 해체, 미국 농업 방법의 모방, 황무지 개간, 소비재 진흥, 지적 문화적 제한의 자유화, 계급투쟁 및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전위당의 이데올로기적 경시 등이다. 둘째는 흐루쇼프의 모든 주요 국내 정책은 의도한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흐루쇼프의 전기 작가 윌리엄 터번은 “흐루쇼프는 너무 자주 나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고 말했다.50)
1961년 22차 대회에서, 흐루쇼프는 쓰딸린에 대한 공격을 맹렬히 다시 시작했다. 흐루쇼프의 반쓰딸린주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고르바쵸프의 전조가 되었다. 첫째, 흐루쇼프는 쓰딸린에 대한 공격은 과장되고, 일방적이며, 불완전했다는 점이다. 둘째, 쓰딸린에 대한 비난은 정치적 종파주의로 귀결되었다는 점이다. 흐루쇼프의 쓰딸린 공격은 많은 부분 왜곡되었다. 예를 들어, 흐루쇼프는 쓰딸린이 1924년 갑자기 등장했다고 암시했다. 그러나 쓰딸린은 1898년 그루지아 철도노동자들 사이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1924년에는 이미 확고한 혁명적 신뢰를 획득하고 있었다. 흐루쇼프는 레닌의 유언장에서 쓰딸린의 무례함을 비판한 부분을 인용했지만 탁월한 지도자로서 칭찬한 부분은 무시했다. 1956년에 흐루쇼프는 쓰딸린이 당 지도자들을 탄압했다는 근거 없는 의혹에 주력했다. 제17차 당 대회 대표의 절반과 중앙위원회 성원의 70%가 죽었다고 주장했다. 쓰딸린의 전기 작가 켄 카메론은 “흐루쇼프의 주장을 믿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51)(학자들이 최근에 공개된 쏘련 문서 보관소를 이용해서 1921년에서 1953년까지 총 사형 집행 수를 799,455명으로 계산했다. 이는 보버트 콘퀘스트 등 반쏘 학자들이 추산한 수백만 명에 훨씬 못 미치는 수치이다.)52) 또한, 흐루쇼프는 억압에 대한 명백한 원인이 된 파괴행위의 증거를 무시했다. 흐루쇼프는 제2차 대전 중 잘못된 군산전략과 전횡적 지도에 대해 쓰딸린을 비난했다. 그러나 게오르기 주꼬프 장군은 이를 반박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흐루쇼프가 쓰딸린을 철저하고, 면밀하며, 균형 있게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기는커녕 쏘련역사에서 쓰딸린을 지워버리고, 쓰딸린의 역할에 대한 논의를 거의 중단시켰다.53) 그래서 흐루쇼프는 예고르 리가쵸프의 말대로 “너무 많은 빈 공간들”로 역사를 남겨두었다.54)
쓰딸린에 대한 흐루쇼프의 공격은 역사왜곡이었다. 더욱이 종파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흐루쇼프는 쓰딸린에 대한 기괴하고 왜곡된 이미지를 조작해 낸 후, 흐루쇼프는 쓰딸린에 대한 비난에 합류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쓰딸린의 방식들을 부활시키기를 원한다고 비난했다. 1961년, 흐루쇼프는 쓰딸린에 대한 공격과 자신의 반대파들의 행위를 명시적으로 연계시켰다. 흐루쇼프는 반대파를 “몰로또프 및 까가노비치, 말렌꼬프가 이끄는 종파주의”라 불렀다. 이들이 “새로운 모든 것에 저항하고 개인숭배 하에서 지배적이던 해악적 방법을 부활시키려 한다”고 주장했다.55) 몰로또프 등은 흐루쇼프의 정책과 쓰딸린을 다루는 방식에 반대했지만 쓰딸린의 억압통치로 돌아가고자 하지는 않았다. 반공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하는데 “쓰딸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듯이, 이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았지만 흐루쇼프도 자신의 반대자들을 중상모략(中傷謀略)하기 위해 그 발상을 차용했다.
흐루쇼프의 쓰딸린에 대한 처리방법은 고르바쵸프로 넘어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고르바쵸프는 흐루쇼프가 불완전하게 남겨둔 역사적 공백을 채우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고르바쵸프는 쓰딸린에 대해 흐루쇼프가 한 것보다 훨씬 더 일방적인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결국 고르바쵸프도 흐루쇼프처럼 쓰딸린에 대한 공격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쓰딸린 공격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비난 공격하면서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제거했다. 1988년 니나 안드레예바(Nina Andreyeva) 사건(제 5장 참조)이 일어났을 때 고르바쵸프는 흐루쇼프를 그대로 흉내내어 반대파가 쓰딸린 체제를 부활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흐루쇼프의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접근방식의 특징은 무엇이든 신속하고 쉬운 해결책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쏘비에뜨 농업을 10년 동안 혼란에 빠뜨린 정책의 기초였다. 황무지 개간 캠페인이 이러한 혼란의 중심 출발점이었다. 10년 동안 수만 대의 트랙터와 콤바인 및 수십만의 지원자들이 프랑스, 서독, 잉글랜드를 합친 것과 맞먹는 토지를 개간했다. 캠페인 첫해에 곡물 생산량이 1,000만 톤 증가했다. 하지만 이는 개간지가 아닌 기존 경작지의 수확량이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해에는 가뭄이 들어 어디나 생산량이 나빴다. 이듬해인 1956년은 쏘련 곡물생산의 절반정도를 개간지에서 수확하는 예외적인 한해로 캠페인이 성공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수확하고 저장하고 운반할 장비 부족으로 많은 부분 소실되었다. 그 이후로는 1956년과 같은 수확량을 거두지 못했다. 1957년은 1956년보다 40% 감소했고, 1958년에는 8% 적었다. 계속 1956년에 못 미쳤고, 1963년과 1964년에는 완전히 망했다. 제럴드 메이어(Gerald Meyer)는 황무지 캠페인에 대한 논문에서 흐루쇼프가 자연조건의 유리함을 과대평가하고 비용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진단했다. 짧은 식물의 생장기, 불충분하고 고르지 못한 강우량, 강풍, 조잡한 휴경 정책 등으로 인해 빈번한 가뭄, 광범한 토지 침식, 비옥도의 저하, 비용의 상승을 초래했다.56) 정책으로서 황무지 캠페인은 재앙이었다.
흐루쇼프의 다른 세 가지 농업정책의 발의도 결과가 좋지 못했다. 그 중 두 가지는 생산의 빠르고 쉬운 증가는 서구의 경험을 모방하고 따라하는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옥수수 증산 캠페인은 가축사료를 위해 옥수수를 재배하는 미국의 선례에 따라 가축생산을 늘린다는 생각에 기초해 있었다. 반 휴경 캠페인은 화학비료 사용을 장려하여 작물이나 휴경지 순환을 대신하고자 하였다. 두 정책 모두 쏘련이 처한 자연 및 여타 조건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흐루쇼프가 구상하였던 만병통치약은 결코 될 수가 없었다.57)
흐루쇼프 임기 중 가장 극단적인 세 번째 정책은 집단농장에 트랙터와 기타 기계류를 공급하는 국영 기계 트랙터 사업소를 해체한 것이다. 집단농장은 트랙터 사업소에 의존하고 있던 농용(農用) 장비를 갑자기 구입하고 스스로 보수 유지해야만 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흐루쇼프의 조치는 쏘비에뜨 경제에 대한 쓰딸린의 마지막 주장을 거부한 것이다. 쓰딸린은 쏘비에뜨 발전방향이 (집단농장 보다는) 국가부문의 강화에 있다고 했다.58) 실제로도 흐루쇼프의 이 정책은 또 다른 대실패를 낳았다. 정책변화로 인해 3개월 만에 대부분의 트랙터 사업소가 사라졌다. 심지어 흐루쇼프의 동조자들조차도 이 정책이 농업 생산성을 심각하게 감소시키고 경제에 장기적 피해를 주어 완전히 실패할 것으로 여겼다.59)
농업과 마찬가지로 공업에 있어서도 흐루쇼프는 심각한 문제점에 직면했지만 의심스러운 해결책에 의존했다. 사회주의 하에서 중앙계획은 주로 생산의 규모와 성격을 결정한다. 계획은 자본주의 시장의 호황과 불황 사이클을 제거했지만 그 나름의 어려움이 있었다. 계획은 경제가 점점 커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더욱더 어려워졌다. 1953년에 공업 기업 수는 20만개에 달했고 계획의 목표물은 5000개에 달했다. 이는 1930년대 초의 300개, 1940년의 2500개에서 늘어난 것이다. 이 때 영국의 경제학자 모리스 돕은 “과도한 중앙 집중화”는 독창성과 기술혁신을 막고, 자원을 낭비하며, 공급에 병목 현상을 일으키고, 계획의 “순전히 양적 성취”에만 골몰하여 헛된 생산을 하는 기업에게는 상을 주면서 양심적 기업은 처벌한다고 주장했다.60) 흐루쇼프는 경제방향을 소비재중심으로 바꿈으로써 이미 어려워진 계획 작업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알렉 노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택, 농업, 소비재, 상업 등이 모두 중요한 문제가 되었고 심지어 우선순위가 되었다. 그래서 계획수립이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몇 가지 우선순위에 기반한 시스템(이점은 서구의 전시경제를 닮았다)은 목표가 희석되거나 증가하게 되면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61)
흐루쇼프는 중앙 계획의 문제점을 벗어나는 쉬운 방법을 찾았다. 극단적 분권화 및 시장 경쟁과 같은 자본주의적 방안을 적용하는 것이다. 1957년 5월, 흐루쇼프는 30개 이상의 중앙 기획 부처를 폐지하여 100개가 넘는 지방 경제 위원회로 교체하였다. 결과는 뻔했다. 생산과 공급의 조정은 예전보다 더 어려워졌고 지방이익이 국가목표를 대체했다. 흐루쇼프에 공감한 것으로 알려진 메드베제프는 분권화가 “무정부주의”를 야기하고, “책무(責務)가 중복되고 비슷하며 소실(消失)되었다”고 말했다.62) 1961년에 흐루쇼프는 17개의 대규모 경제지역으로 계획구역을 재편성하여 통합해야만 했다. 이렇게 해도 분권화의 피해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쏘련 경제의 성장은 1950년대 전반보다 후반이 더 느렸고, 1950년대 보다 1960년 전반이 더 느렸다.63) 당은 1964년 흐루쇼프를 교체한 후 20개의 중앙 계획 부서를 재 설립하고 보다 많은 공장 자치와 결합시키려고 하였다.64)
흐루쇼프의 정책은 가끔 나중에 문제가 될 씨앗을 뿌리곤 했다. 아마도 우끄라이나 부르주아 민족주의를 대하는 이전의 모호한 태도가 비판받은 것에 대한 과잉반응으로 종종 민족적 감수성을 잃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중앙아시아를 방문한 후에 경솔하게도 모든 아시아 공화국을 하나로 통합하자고 제안했다.65) 덜 극단적인 입장에서 보면, 국가가 민족문제를 해결하고 “쏘비에뜨 민족 정체성” 달성을 목표로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진 쏘련의 현존하는 민족 정체성을 “완전한 통합”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바람직하지만 이상적인 쏘비에뜨 민족 정체성의 주창은 반대 효과를 가져왔다. 민족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민족 감정을 자극한 것이다. 역사학자 이츠하크 브루드니에 따르면, 흐루쇼프의 접근법은 현존하는 민족문제를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주변의 비(非)러시아 민족에서나 중앙의 러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나 협소한 민족주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66)
흐루쇼프가 지식인을 사로잡고 고르바쵸프의 글라스노스트의 선구가 된 정책은 검열의 완화였다. 흐루쇼프의 “해빙”은 일시적이고 에피소드로 끝났지만 쏘련의 과거를 비판하는 현대 예술 및 영화, 시, 소설 등을 한동안 광범위하게 개방하였다. 해빙기 동안 이전에 금지되었던 두진체프(Dudintsev)의 ≪빵으로만 살 수 없다≫와 쏠체니친의 ≪이반 제니소비치의 하루≫등이 출판되었다.67) 이러한 개방정책은 쏘비에뜨 학계에 부르주아 경제사상이 확산되는 어쩔 수 없는 밑바탕이 되었다. 메드베제프에 따르면 이미 1953-54년에 “서구의 영향력이 경제의 많은 분야에 침투하기 시작했다”68)
흐루쇼프가 제기한 국제관계, 당, 국가,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를 포함하는 다른 많은 문제들로 인해 당시 쏘련 내외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견해가 새로운 상황에 맑스-레닌주의의 창조적 적용인지 기본원칙의 잘못된 수정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본 연구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흐루쇼프의 생각이 일관된 사회민주주의적 경향이며, 나중에 문제가 될 씨앗을 뿌렸고, 고르바쵸프의 더욱 극단적인 견해와 정책에 대한 선례가 되었다는 점이다.
국제관계에 있어 흐루쇼프는 평화공존을 강조했다. 사회주의 세계의 성장으로 힘의 균형이 바뀌었기 때문에 투쟁의 주요형태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의 “평화로운 경쟁”으로 이동했고 사회주의로의 “평화로운 이행”이 가능해졌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중국은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다.69)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흐루쇼프를 변호할 여지는 있다. 첫째, 평화공존론은 냉전이 절정일 때 나타났다. 이 때 미국은 매우 막강하였고 호전적인 반쏘 반혁명 대외정책을 통해 쏘련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 정책은 쏘련이 본질적으로 팽창주의적이고 세계를 침략하고 전복하려고 한다는 주장으로 정당화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흐루쇼프의 평화공존론은 제국주의의 주장에 대한 강한 항변이었다. 쏘련을 향해 전쟁을 추진하던 세력을 약화시켰고 국제평화운동을 강화하였다. 둘째, 이 문제에 대한 흐루쇼프의 사고는 완전히 새로운 견해는 아니었다. 쓰딸린은 죽기 전 여러 인터뷰에서 평화공존 정책을 강조했고, 전쟁불가피론을 거부했었다.70) 셋째, 실제로 흐루쇼프는 해외에서 사회주의 방어를 축소하지 않았다. 1956년 헝가리 반혁명에 개입하고 1962년 쿠바를 방어하기 위해 미사일을 보냈다. 사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절정일 때, 즉 쿠바 혁명의 운명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을 때 흐루쇼프는 미사일을 철수하기 전에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약속할 것을 고집했다.71) 더욱이 흐루쇼프는 제국주의에 맞서 독자적으로 분투하는 중국(단교 이전까지), 이집트, 인도 등에 많은 물질적 원조와 기술적 지원을 제공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역사학자 월리엄 커비는 1953년에서 1957년 사이에 중국에 대한 쏘련의 지원을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술이전”이라고 칭했다.72) 흐루쇼프는 평화공존 정책이 적절하고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냉전을 포기하겠다는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너무 믿었다. 미국은 흐루쇼프의 군비축소 및 쏘비에뜨 군대의 일방적 감축에 화답하지 않았고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하려고 하지도 않았다.73) 흐루쇼프는 1960년에 자신의 평화공존 정책이 진정으로 파탄 난 것을 알았다. 예정된 4강 정상 회담 직전까지 미국은 U-2정찰기를 쏘련 영공에 침투시켰다. 쏘련이 U-2정찰기를 격추시켜 조종사 게리 파워스의 신변을 확보할 때까지 미국은 이를 부인했다. 흐루쇼프는 “미국이 제국주의적 의도를 갖고 있고 군사력을 가장 중시한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말했다.74)
흐루쇼프는 당과 국가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제안했다. 쏘련공산당은 노동계급의 전위에서 “전(全)인민”의 전위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전(全)인민의 국가”로 변했다는 생각이다. 사회주의 발전의 어느 시점에서 그런 전환이 올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문제는 쏘련이 그 시점에 도달했는지의 여부이다. 작가 바만 아사드는 이러한 생각이 계급투쟁의 초월에 대한 환상과 국가관료와 같은 특정사회집단에 대한 신뢰성에 대한 환상이 장기적으로 좀먹어 들어간 결과라고 시사했다.75) 물론 이런 초(超)계급투쟁론과 전인민국가론은 노동계급 안에 있는 이해관계의 차이를 무시한다. 아무래도 사회주의 사회가 노동계급의 이익에 기여해온 이래 이런 견해는 사회주의 발전을 측정하는 기준을 애매하게 했다. 더욱이 이런 견해는 임금 차별 철폐와 같은 까다로운 임금평등화 정책을 수반했다. 사회주의 발전의 일정 수준에서 임금평등화는 실현되어야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임금평등화는 동기(動機)을 저하시키고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경향이 있었다.
흐루쇼프는 당 운영 방식을 몇 가지 변경하여 당의 지도적 역할을 약화시켰다. 1957년에, 흐루쇼프는 자신이 우끄라이나에서 했던 전례에 따라 당의 문호를 개방하여 당원을 대규모로 확대했다. 이는 계급구별이 사라졌다는 흐루쇼프의 생각과 관련이 있다. 쏘비에뜨 시민의 “압도적 다수”가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이다.76) 또한 흐루쇼프는 당직자의 임기를 제한하기 위해 선거를 통해 당직자의 3분의 1을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또 당을 초기 형식인 농업부문과 공업부문으로 나누었다. 표면상 당을 활성화시킨다는 목적에도 불구하고 대량입당, 임기제한, 당의 분할 등의 조치는 다양한 방법으로 당을 약화시켰고 많은 반대를 낳았다. 흐루쇼프 이후 이러한 착상은 포기되었다.77) 나중에 고르바쵸프는 비슷한 생각을 품었다. 고르바쵸프는 쏘련공산당을 두 개로 나눈 뒤 약화시켜 완전히 폐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964년 집단지도부는 흐루쇼프를 해임 했다. 흐루쇼프 시대는 끝났다. 하지만 흐루쇼프로 상징화된 경제 자유화 및 정치 민주화에 대한 생각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생각은 역사학자 존 구딩(John Gooding)이 “대안 전통”이라 부른 것 속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도 이 대안 전통을 옹호하는 자들이 있었다. ≪신 세계(Novy Mir)≫의 편집자인 알렉산더 뜨바르도프스끼(Alexander Tvardovsky)와 쉬비낀(V. Shubikin), 니꼴라이 뻬뜨라꼬프(Nicolai Petrakov), 알렉산더 비르만(Alexander Birman), 로이 메드베제프, 안드레이 사하로프(Andrei Sakharov), 발렌띤 뚜르친(Valentin Turchin), 따찌아나 자슬라프스까야(Tatyana Zaslavskaya), 미하일 샤뜨로프(Mikhail Shatrov) 등과 같은 경제학자 및 사회학자. 물리학자. 역사학자, 극작가들이다. 이들 지식인은 대부분 공산당에 남아 레닌을 존경하고 사회주의를 신뢰했다. 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적 시장 및 경영, 정치 형태를 사회주의에 접목시키고자 하였다. 이들은 현 체제를 공격하기보다는 공산당 지도부를 설득하여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결국 고르바쵸프에 와서 실현되었다.78)(다음 호에 계속)
1) 분량관계상 2장은 두 번에 나누어 연재합니다. 이번호는 흐루쇼프시대를 다룹니다.(역자)
2) Dmitri Volkogonov(드미뜨리 볼꼬고노프), Stalin: Triumph and Tragedy(쓰딸린:승리와 비극), New York: Grove Weidenfeld, 1988, p. 80.
3) Albert Resis, ed.(알버트 레시스 편), Molotov Remembers: Inside Kremlin Politics(몰로또프의 회상: 끄레믈린 정치의 이면), Chicago: Ivan R. Dee, 1993, p. 360.
4) 레시스, p. 408.
5) “Socialism in the Soviet Union: Lesson and Perspectives, From the Program of the Fourth Congress of the Communist Party of the Russian Federation 20 April 1997(쏘련 사회주의: 교훈과 전망, 러시아 공산당 제4차 당 대회 강령, 1997년 4월 20일)”, Nature, Society, and Thought(자연, 사회, 그리고 사상), (2000년 5월 2일), p. 421.
6) Lenin Collected Works, ed. Yuri Sdobnikov(유리 스도브니꼬프 편),
vol. 32,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75, pp. 165-240.
7) Lenin Collected Works, vol. 33, p. 63.
8) Lenin Collected Works, vol. 32, p. 218.
9) Vladimir I. Lenin: A Political Biography(블라지미르 레닌: 정치적 전기),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43, pp. 242-259.
10) Barrington Moore, Jr.(배링턴 무어 2세), Soviet Politics—The Dilemma of Power(쏘비에뜨 정치―권력의 딜레마),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51, 위의 책. 98-102.
11) Moore, pp. 102-108.
12) Anatoly Chernyaev, My Six Years with Gorbachev(고르바쵸프와 함께 한 6년), University Park: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2000, pp. 138-139.
13) Kenneth Cameron(케네쓰 카메론), Stalin: Man of Contradiction(쓰딸린: 모순적인 인간) Toronto: New Canada Publications, 1987, p. 30.
14) Moore, pp. 108-113.
15) E. H. Carr, Studies in Revolution, New York: Grosset & Dunlap,
1964, pp. 214-215.
(≪혁명의 연구≫, 김현일 옮김, 풀빛, 1983, p. 169.)
16) Joseph Stalin, “The Right Deviation in 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쏘련공산당 내의 우익적 일탈),” Leninism: Selected Writings(레닌주의: 선집),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42, pp. 98-101.
(한국어판 ≪스탈린 선집1≫, 전진, 1988, p. 133-336.)
17) George Katkov(게오르게 까뜨꼬프), The Trial of Bukharin(부하린 재판), New York: Stein and Day, 1969, pp. 55-60.
18) V. Y. Zevin(제빈), “Lenin on the National and Colonial Questions(민족 및 식민지 문제에 있어서의 레닌),” Lenin the Great Theoretician(레닌 위대한 이론가),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70, pp. 307-308.
19) V. Zotov(조또프), Lenin’s Doctrine of National Liberation Revolutions and the Modern World(민족해방혁명과 현대세계에 대한 레닌의 정책),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83, p. 15, 21.
20) 쓰딸린, Marxism and the National and Colonial Question(맑스주의와 민족 식민지 문제),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34.
21) Albert Nenarokov and Alexander Proskurin(알베르뜨 너나로꼬프와 알렌산드르 쁘로스꾸린), How the Soviet Union Solved the Nationalities Question(쏘련이 민족문제를 해결한 방법), Moscow: Novosti Press, 1983, p. 11.
22) Stephen Cohen, Bukharin and the Bolshevik Revolution(부하린과 볼쉐비끼 혁명), New York: Knopf, 1973, pp. 35-38.
23) 쓰딸린, pp. 185, 177, 168-170.
24) Yitzhak M. Brudny(이츠하크 브루드니), Reinventing Russia: Russian Nationalism and the Soviet State, 1953-1991(러시아 재창조: 러시아 민족주의와 쏘비에뜨 국가, 1953-1991), Cambridge, Mass. and London: Harvard University Press, 1998), p. 42.
25) Bahman Azad, Heroic Struggle Bitter Defeat,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2000, pp. 92-95.
(한국어판,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채만수 역, 노사과연, 2013, p. 109-111.)
26) Leonard Shapiro(레오나르드 샤피로), 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쏘련공산당), New York: Vintage Books, 1971, p. 515.
27) Werner G. Hahn(베르너 G. 한), Postwar Soviet Politics: The Fall of Zhdanov and the Defeat of Moderation, 1946-1953(전후 쏘비에뜨 정치: 쥐다노프의 몰락과 온건파의 패배, 1946-1953), Ithaca and 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1982, pp. 12-13, 19-27.
28) Hahn, pp. 32-33, 45-57, 182-184.
29) William Taubman(윌리엄 타우브만), Khrushchev: The Man and His Era(흐루쇼프: 인물과 시대), New York and London: W. W. Norton, 2003, pp. 250-255.
30) Roy A. Medvedev and Zhores Medvedev(로이 A. 메드베제프 조레스 메드베제프), Khrushchev: The Years in Power(흐루쇼프: 권력의 세월), New York: W. W. Norton, 1978, 67-71.
31) Roy A. Medvedev and Zhores Medvedev, p. 71.
32) Taubman, 324.
33) Carl Linden(칼 린덴), Khrushchev and the Soviet Leadership(흐루쇼프와 쏘비에뜨 지도부) Baltimore and London: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0, p. 224.
34) Hahn, 47.
35) Roy Medvedev, Khrushchev, London and New York: Blackwell and Doubleday, 1982, p. 32.
36) Roy A. Medvedev and Zhores Medvedev, p. 35, pp. 58-60.
37) Maurice Dobb(모리스 돕), Soviet Economic Development Since 1917(1917년 이후 쏘비에뜨 경제의 발전), New York: New World Paperbacks, 1965, p. 317, p. 332.
(한국어판 ≪소련경제사≫, 형성사, 1989, p. 371)
38) Joseph Stalin, Economic Problems of the U.S.S.R.(쏘련 경제의 제문제),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52, pp. 21-22.
(한국어판 ≪스탈린 선집 2≫, 전진, p. 244.)
39) Hans Heinz Holz(한스 하인츠 홀츠), “The Downfall and Future of Socialism(사회주의의 몰락과 미래),” Nature, Society, and Thought(자연, 사회, 그리고 사상), 5, no. 3 (1992), passim(여러 곳).
40) Holtz, p. 105.
41) Holtz, p. 105.
42) Resis, p. 391.
43) Giuseppe Boffa(쥬세페 보파), Inside the Khrushchev Era(흐루쇼프 시대의 내부), New York: Marzani and Munsell, 1959, p. 108.
44) Boffa, p. 110.
45) Roy A. Medvedev and Zhores Medvedev, p. 75.
46) Alexei Adzhubei quoted by Linden(린덴이 인용한 알레세이 아드쥐베이), p. 225.
47) Roger Pethybridge, A Key to Soviet Politics: The Crisis of the ‘Anti-Party’ Group(쏘비에뜨 정치의 열쇠: ‘반당’그룹의 위기),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62), pp. 93-98.
48) Resis, 345-347; Molotov and Malenkov quoted by Pethybridge(페씨브리지가 인용한 몰로또프와 말렌꼬프), pp. 98-99.
49) Pethybridge, p. 95, pp. 103-109; Shapiro, p. 569.
50) Taubman, xix.
51) Cameron, p. 130.
52) Michael Parenti(마이클 파렌티), Blackshirts & Reds(검은 셔츠와 레즈)≫ (San Francisco: City Lights Books, 1997), 76-80.
53) “Secret Speech of Khrushchev Concerning the ‘Cult of the Individual,’(흐루쇼프의 ‘개인숭배’에 대한 비밀연설), The Anti-Stalin Campaign and International Communism(반쓰딸린 운동과 국제 공산주의),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56, pp. 2-89; Cameron, pp. 121-137, p. 170.
54) Yegor Ligachev, Inside Gorbachev’s Kremlin(고르바쵸프 끄레믈린의 내부), (New York, Pantheon, 1993), p. 284.
55) Cameron, p. 123.
56) Gerald Meyer, “The Virgin Lands Project, 1953-1963: Khrushchev’s Panacea for the Soviet Union’s Agricultural Crisis(황무지 개간 프로젝트, 1953-1963: 쏘련의 농업위기에 대한 흐루쇼프의 만병통치약)” M.A. thesis(문학석사 학위논문), City College of the City University of New York, 1969.
57) Meyer, pp. 35-37.
58) Joseph Stalin, pp. 16-17.
59) Roy A. Medvedev and Zhores Medvedev, pp. 85-88.
60) Dobb, pp. 372-377. 한국어판, pp. 415-423.
61) Alex Nove(알렉 노브), An Economic History of the USSR, New York: Viking Penguin, 1984), 358. 한국어판은 ≪소련경제사≫, 창비, p. 399.
62) Roy A. Medvedev and Zhores Medvedev, pp. 106-107.
63) Dobb, p. 321, p. 324. 한국어판, p. 359, p. 362.
64) Dobb, pp. 329-330. 한국어판, p. 368.
65) J. P. Nettl(네틀), The Soviet Achievement(쏘비에뜨의 성취), Norwich, England: Harcourt, Brace & World, 1967, p. 236.
66) Brudny, pp. 42-43.
67) Roy A. Medvedev and Zhores Medvedev, p. 73, p. 148.
68) Roy A. Medvedev and Zhores Medvedev, p. 43.
69) A Proposal Concerning the General Line of the International Communist Movement(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총노선에 대한 제안), 북경: Foreign Language Press, 1963, pp. 5-36.
70) 쓰딸린, For Peaceful Coexistence: Postwar Interviews(평화공존을 위하여: 전후 인터뷰),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51.
71) 반면에, 쏘련의 대외 정책이 충분히 반제국주의이지 않다고 비판하던 중국은 이 대치 기간 동안 조용히 방관자로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 단지 쏘련을 큰소리로 비난할 뿐이었다. O.B. Borisov and B. T. Koloskov(보리소프와 꼴로스꼬프), Sino-Soviet Relations(중소 관계),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75, p. 173.
72) Taubman, pp. 336-337, 450-451, 609-610. ; Kirby quoted by Taubman(타우브만이 인용한 커비), p. 337.
73) Shapiro, p. 575.
74) Linden, p. 224.
75) 아자드, 128-131. (한국어판, pp. 148-156.)
76) George Breslauer(조지 브레슬라우어), “Khrushchev Reconsidered(흐루쇼프의 재검토)”, Stephen F. Cohen et al.(스테판 코헨 편), The Soviet Union Since Stalin(쓰딸린 이후의 쏘련),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0, p. 56, p. 59.
77) Roy A. Medvedev and Zhores Medvedev, 151, 153.
78) John Gooding, Socialism in Russia: Lenin and his Legacy, 1890-1991(러시아 사회주의: 레닌과 그 유산, 1890-1991), New York: Palgrave, 2002, pp. 187-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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