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2월 26일: 96-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대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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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균 | 회원

1. 96-97년 총파업 투쟁

 

“신한국당의 노동법 개악안 기습 통과는 원인 무효다. 노동법 개악안 날치기 통과한 신한국당은 해체하고 김영삼 정권은 퇴진하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26일 새벽 신한국당이 단독으로 노동법 개악안을 기습 날치기 통과시킨 반민주적 폭거에 대항, 1천2백만 노동자들과 온 국민의 분노를 모아 26일 오전부터 산하 전 단위노조에서 즉각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한다.”

 

1996년 12월 26일 오전 7시 조금 넘어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이 ‘노동법 개악 저지를 위한 무기한 총파업 투쟁’을 선언 했다.

당시 집권 여당인 신한국당 단독으로 노동법・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 시킨 지 3시간이 채 안 된 시간이었다. 권영길 위원장의 총파업 투쟁 선언 이후 약 한 시간 후인 8시 30분부터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을 시작으로 민주노총이 총파업 투쟁을 돌입하게 된다. 88개 단위 노동조합의 145,000여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시작된 민주노총의 96-97년 총파업 투쟁은 그 다음날인 12월 27일에는 172개 노동조합에 21만 2천 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했으며, 곧 이어 28일에는 서울 지하철 노동조합, 29일 부산 지하철 노동조합의 파업 등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총파업 투쟁이 이어졌다.

신정 연휴가 마무리 된 1997년 1월 3일 오전 8시를 기해 돌입한 민주노총의 2차 총파업 투쟁은 자동차 연맹, 금속 연맹, 화학 노협 등 44개 노동조합 9만 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이후 6일에는 현총련 등 대 공장 노동조합과 사무노련, 전문노련, 건설노련 등 사무전문직 노동조합에서 파업 투쟁에 돌입했으며 7일에는 병원 노련과 방송사 노동조합 등이 파업 투쟁에 참여했다.

노동자들의 총파업 투쟁을 엄호하기 위하여 전국 36개 대학의 법학 교수 62명이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 안기부법은 법적 효과가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8일에는 환경운동연합, 경실련 등 14개 시민사회단체에서 기자회견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월 3일부터 전개된 2차 총파업 투쟁에 이어 1월 15일 제 3차 총파업 투쟁에 돌입한 민주노총은 민주노총 산하 지하철, 병원노련 등 공공부문 노동조합과 화물운송, 자동차, 현총련, 금속, 화학, 방송사, 신문사, 통신사 등을 포함하여 사무전문 기술직 노동조합이 모두 파업에 돌입했다.

3차까지의 총파업 투쟁에 돌입했던 민주노총의 경우 민주노총 자체 집계로 총 413개 노동조합과 37만 여 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한편 14일부터 2단계 파업에 돌입했던 한국노총의 경우 1월 15일 현재 산업별 1,650개 노동조합 40여 만 명의 조합원이 파업에 참여 하는 등 최대의 파업이 이날 전개되었다.

1월 17일 이후 민주노총은 투쟁본부 대표자회의를 통해 3단계 총파업 투쟁을 마무리 하고 2월 18일 4차 총파업 투쟁에 돌입할 것을 결정하고 그 때까지 전면 파업 투쟁 대신 수요 파업 투쟁으로 전환 할 것을 결의하였다. 수요 파업 전환 결정 이후 1회의 수요 파업을 끝으로 역사적인 96-97년 총파업 투쟁이 마무리 되었다.

1996년 12월 26일부터 1997년 1월 17일까지 전개된 민주노총의 총파업 투쟁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 표1)과 같다.

표1) 96-97년 총파업 투쟁의 진행 경과

1단계

(12.26~1.2)

오전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키로 하고 출근 직후 파업출정식, 권역별 규탄집회, 총파업 어려운 사업장은 비상총회, 전교조 단식수업, 화물노련 구간별 안전운행(시속 70km) 등 투쟁 지침, 1일차 금속, 자동차, 현총련 등 170~80개 노조, 20만 명 참가, 총파업 국민 지지 50% 상회

2단계

(1.3~1.14)

8일간의 총파업 진행 후 1차로 철도 등 공공부문의 경우 1.3~8까지 파업 중단, 1월 14일까지 날치기 노동법 백지화 하지 않으면 공공부문 파업재개 선언, 금속은 전국적으로 확산

3단계

(1.15~1.19)

1월 15일 388개 노조, 350,856명 참가, 전국 20개 지역에서 16만 명 집회시위, 백골단 투입과 최루탄 발사, 25일간 파업 전개

4단계

(1.20~2.28)

수요파업으로 전환, 2월 28일 107개 노조, 131,448명 참가

총 합

하루 파업에 참가한 노조 531개, 404, 054명, 누적 노조 수 3,422개, 누적조합원수 3,878, 211명, 1일 평균 163개 노조, 184,498명, 대규모 집회 30일간 150만 명(하루 평균 5만 명), 대국민 선전물 390만부

 

 

 

2. 96-97년 총파업 투쟁 왜 일어났는가?

 

–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 직전의 노동자 민중의 상태

 

96년 12월 26일부터 해를 넘긴 1997년 2월 말일까지 진행된 민주노총의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반대를 위한 총파업 투쟁은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개별 자본가를 상대로 임금인상 등 경제적 이해와 요구를 걸고 96-97년 전개한 투쟁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상대로 그것도 노동 관련법 및 민주주의 확장을 위해 노동악법 및 안기부법 철회를 요구 조건으로 걸고 전국적으로 전 산업적으로 전개된 최초의 정치적 총파업 투쟁이었다.

그러나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이 갑자기 신한국당이 노동법,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시킨 것에 분노하여 전개된 투쟁만이 아니다.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이 전개된 1996년 말은 한 마디로 노동자 민중의 삶이 최악이었으며 이러한 삶의 고통에서 신한국당이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시킴으로서 분노에 불을 지핀 결과일 뿐이었다.

한국의 노동자 대중은 지난 30여 년 동안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그리고 노태우로 이어져 오는 군사정권의 막무가내 식 개발독재로 인해 비록 1만 불 이상의 높은 국민소득을 달성했지만 연간 2,500시간이 장시간 노동(세계 8위)과 높은 산업재해율(세계 4위)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 이전 5년간 물가가 35% 인상이 되었으며 국민생활불안지수도 1991년 이후 최악의 상태였다. GDP 규모로 세계 11위라 하지만 사회복지는 세계 115~122위에 머물러 있는 상태였고,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 중 30%와 24%가 각각 교육비와 주거비로 실질 임금은 최악의 생태로 달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주거 상황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1965년 노동자 자가 보유율은 64%였으나 30년이 지난 1995년에는 50%로 떨어진 상태였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없지만, 1996년 12월 26일 신한국당의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가 없었더라도 노동자 민중의 대중적 반란은 예고가 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 날치기 노동법의 경과

 

1993년 세계화를 기치로 출범한 김영삼 정권은 근로자 파견법과 공공자금관리기금법 제정을 시도했다. 당시 노동조합에만 허용하고 있었던 ‘근로자 공급사업’을 고용관계가 있는 노동자를 타인의 지휘, 명령 하에 사용케 하는 ‘근로자 파견사업’과 분리하여 ‘근로자 파견사업’을 합법화 하겠다는 의도로 중간착취를 합법화 하려는 시도였다.

김영삼 정권과 함께 자본가 집단(경총)은 근로기준법에서는 변형근로시간제 도입, 월차 및 생리휴가 폐지, 휴일 및 야간 근로 수당 할증료 25%로 인하, 시간제 근로자의 근로기준법 적용 배제, 노동조합법에서 해고 효력을 다투는 자의 조합원 자격 불인정, 직접 근로관계를 맺지 않는 자의 사업장 내 조합 활동 금지, 노조 위원장의 직권조인 인정, 인사경영사항의 협약금지, 노조 전임자 임금부지급, 노동쟁의조정법에서는 무노동 무임금, 정치파업 금지, 직장폐쇄명시, 냉각기간 연장 등을 주장했다.

 

– 김영삼 정권의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권은 출범과 동시에 ‘OECD 조기가입’, ‘세계화’의 기치를 내걸며 ‘신경제계획 5개년’을 발표했다. OECD 조기가입 관련한 진행결과를 보면 1996년 3월 가입신청서 제출, 10월 경 가입 결정, 11월 국회비준을 거쳐 12월 11일 OECD에 가입원서를 제출이었다. 또한 OECD에 가입원서를 제출하면서 김영삼 정권은 조건부로 대대적인 자본의 규제를 완화하고 국회에서의 ‘정리해고제’ 통과를 걸었다.

이를 위해 김영삼 정권은 1996년 4월 24일 ‘노사관계개혁방안 보고대회’를 통해 ‘신 노사관계 5대 원칙’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신 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했다. ‘신 노사관계 구상’의 내용을 보면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그리고 경총이 참여하는 대통령 직속 노개위 발족을 통해 자본의 대대적인 규제완화 및 정리해고제 등 노동시장유연화에 대한 법제화를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합의하고 이를 국회에서 법제화 한다는 의도였다.

1995년 출범한 민주노총은 김영삼 정권의 노개위에 5개월 동안 8차례 회의에 참가 했고 10월 1일 9차 회의에서부터 불참을 했다. 민주노총 불참 이후 11월 7일 14차 전원회의에서 공익위원 안을 중심으로 정리해고제 입법화를 중심으로 한 노동관계법 개정 요강이 확정되었다.

 

– 민주노총의 노개투 준비과정

 

1996년 8월 12일 1차 대표자회의를 통해 민주노총은 민주노총 산하에 노개투 투쟁본부를 구성할 것을 결의하고, 9월 3일 2차 대표자회의 결정에 근거하여 군사독재정권의 독소조항 철폐와 자주적 단결권 보장이 최우선 과제임을 노개위에 전달하였다. 이후 10월 2일 3차 대표자회의를 통해 조합원 리본, 차량스티커 제작, 노개위 불참 이유 신문 광고, 각 연맹 상근자 중앙 상황실 파견, 10월 4~9일까지 전국적 농성 투쟁, 거점 텐트 농성, 10월 10일~30일 단위노조 총력투쟁 결의대회, 11월 10일 전국 노동자 전야제와 본 대회 10만 명 조직화, 11월 15일 총파업 투쟁 결의와 이에 따른 단위 사업장 쟁의발생 결의와 결과서 11월 10일까지 총연맹 제출을 결정하였다. 이 결과 338개 노조 268,444명의 노동자들이 쟁의발생 결의하고 이를 민주노총에 보고하였다.

이어 11월 9일 4차 대표자회의에서 노동법 개정이 연기될시 11월 13일 전국적인 철야농성과 11월 15일 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총파업을 결정하기로 결의하였고, 11월 15일 5차 대표자회의에서는 김영삼 정권이 공익위원안보다 후퇴한 정부안을 확정하고 10일간의 입법예고와 12월 초 국회 상정 및 11월 12일 전경련이 복수노조 허용과 제3자 개입 금지 철폐 반대 의지를 재확인 하고, 전면적 투쟁에 돌입할 것을 결정하였다. 민주노총은 11월 19~23일 전국 단위노조 총회, 총연맹 차원의 쟁의발생신고(11월 19일), 가맹 조직별 2개조로 광화문 정부청사 투쟁을 11월 19~20일까지 진행하고 신한국당 당사 항의 투쟁, 총파업 조직화를 위한 중심 사업장 회의를 11월 21일 개최, 투쟁 기금 모금 및 11월 말 전국 단위노조 대표자 결의대회, 12월 4일 전국적 총파업 투쟁 찬반투표를 위해 11월 말부터 12월 3일까지 전국 단위노조 철야 농성과 총파업 찬반투표 조직화와 12월 2일부터 7일까지 전국 단위노조 준법 투쟁을 결정하게 된다.

이후 11월 26일 6차 대표자회의에서는 11월 29일 전국 단위 노조 대표자 구속 결단식, 민주노총 안을 지지하지 않는 정당 반대 정치선언, 1노조 1교육에 이어 1노조 1실천(머리띠 매고 작업, 작업 중 노동가요 부르기, 넥타이 풀고 일하기, 사복 출근 등), 11월 한 달 동안 ‘전진 마침내 승리’의 전국 순회공연 배치, 11월 18~23일 전경련 항의 투쟁, 11월 18일~30일까지 국회의원에게 노동법 개정 촉구 엽서 보내기 등을 결정하였다.

이후 12월 20일 7차 대표자회의를 통해 노동 개악안 강행 처리 시 즉각 총파업 돌입을 결정하고, 12월 23일 8차 대표자회의에서 총파업 돌입일자는 위원장에게 위임할 것을 결정하였다. 12월 24일부터 31일까지 전국 단위노조 대표자 및 간부는 비상대기 및 12월 26일 단위노조 중식시간 비상조합원 총회를 결정하는 등 김영삼 정권과 자본의 노동악법 강행 처리 시 총파업 투쟁을 준비해 왔다. 

3.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에 대한 민주노총 자체 평가

 

민주노총은 “노개투 총파업 보고서”를 통해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에 대해 자체 평가를 진행했다.

“노개투 총파업 보고서” 머리말을 통해 위원장은 “지난 1년은 모든 역량을 노동법 개정 투쟁에 바친 1년 이었고(중략) 1년 내내 계속된 노동법 개정 투쟁은 마침내 건국 후 최초의 전국 총파업 투쟁(중략) 세계 노동계를 뒤흔든 정치 총파업은 너무 장대하고 위대한 투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민주노총은 노개투 총파업 투쟁의 의의를 ① 날치기 노동법 저지, 법 개정・구속 철회 등 정권의 후퇴를 이끌어 냄, ② 민주노총의 조직력을 확대・강화하고 산별 노조 건설 토대 구축, ③ 민주노총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 강화, ④ 조합원 정치의식 강화, 노동자를 민주주의 투사로 각인시켜 정치세력화 토대 구축, ⑤ 노동자 총파업 투쟁이 범국민적 투쟁을 선도하고 투쟁의 확산을 가져옴, ⑥ 강・온 겸비한 투쟁전술과 다양한 투쟁 형태의 개발과 전술에 있어 풍부한 경험과 교훈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민주노총은 노개투 총파업 투쟁의 한계와 향후 과제에 있어 ①조직력과 투쟁력에 있어 결정적인 위력 부족(민주노총 노조 조직률 16.5%, 165만 명 중 민주노총 50만 명이 23일간의 총파업 투쟁), ② 노동자 정치역량의 한계(여당이 우위, 야당 지역 정당화와 보수화), ③ 범국민운동이 강화되었으나 민주노총 결합도 취약, 명실상부한 범 국민운동본부로 발전하지 못함, ④ 조직간 편차 드러났고, 탄압에 대한 대처 부족, ⑤ 파업 전술과 지도력과 내용 부족, ⑥ 정치적으로 각성된 열성간부, 조합원들을 단련시킬 사업과 틀이 필요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4.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남겼는가.

 

– 87년 노동자 대 투쟁 이후 노동시장유연화를 중심으로 한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전국적 대응 투쟁으로서의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

 

87년 7월 5일 현대미포조선 노조 창립을 시작으로 3개월 동안 진행된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 전쟁 이후 최초의 대중적 노동자 투쟁이자 노동조합의 광범위한 설립과 함께 노동자 대중이 시민권을 획득한 투쟁이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세계적으로 몰아치고 있던 신자유주의적 광풍은 한국 자본가 계급에게 있어 자본가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87년 노동자 대 투쟁을 통해 노동자에게 빼앗긴 현장의 권력을 되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던져 주었으며 이러한 절박함은 90년 건설된 전노협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함께 93-94년 전개된 노・경총 임금합의 등 사회적 합의를 통한 민주노조운동 진영의 포섭 전략이었다. 그러나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운동 진영은 자본과 정권의 노・경총 입금합의를 밑으로부터 분쇄하고 오히려 한국노총 탈퇴 운동을 통해 광범위한 민주노총 건설 토대를 구축하였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10여 년 동안 지속된 자본과 정권의 현장 재탈환 움직임은 93년 출범한 김영삼 정권의 ‘세계화’와 ‘신경제 계획 5개년’을 통해 구체화 되었고 이에 대한 본질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자본의 규제를 최대한 해제하는 것으로 노동자들을 맘대로 해고 할 수 있는 정리해고제와 중간착취를 합법화 하는 근로자 파견제의 합법화였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단위 노조의 민주화 투쟁과 90년 전노협에 이어 95년 민주노총 건설로 이어진 한국 민주노조운동 진영의 전국적・계급적 조직 건설 투쟁은 곧 바로 자본과 정권의 노동시장유연화를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대응 투쟁이었고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은 바로 이러한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전국적・계급적 대응 투쟁이었다.

 

– 그러나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은 김영삼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가 세계 자본주의 위기 국면에서 자본가 계급이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은 1997년 2월 말일을 기점으로 마무리 되었다. 신한국당의 날치기 통과로 인해 발생한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은 단지 노동법・안기부법의 날치기 통과를 저지한다는 점을 넘어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공세적 대응으로 확장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하지 못했다. 결국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 1년 뒤인 1997년 12월 IMF 외환위기와 1998년 김대중 정권에 의해 입법화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 파견제 입법화에 맞서는 투쟁으로까지 확장되지 못함으로 인해 한국 노동시장이 ‘비정규직’과 ‘맘대로 해고’ 사회가 도래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안일한 판단, 결국 지속되는 사회적 합의주의 공세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은 노동시장유연화를 주 내용으로 노동관계법을 입법화 하는 과정에서 전개된 투쟁이다. 결과적으로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을 통해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을 철회했지만 이 과정에서 김영삼 정권이 취한 사회적 합의주의 즉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할 필요가 있다.

1993년 김영삼 출범 이후 93-94년 노・경총 임금합의부터 시작된 한국의 사회적 합의주의는 1996년 김영삼 정권의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통한 노동법 개악이 비록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을 통해 철회되었다. 하지만 1998년 김대중 정권의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정리해고제와 근로자 파견제(적용 사업장 확대)의 입법화 그리고 2006년 노무현 정권의 노사정 대표자회의를 통해 비정규직(1년에서 2년)법과 근로자 파견제(적용 사업장 무제한) 입법화 등으로 사회적 합의주의가 관철되었다. 한국의 사회적 합의주의의 역사는 정리해고제, 근로자 파견제 그리고 비정규직의 입법화 과정의 역사였다.

특히 김영삼 정권의 93-94년 노・경총 임금합의를 제외한다면 95년 민주노총 출범 이후 96년 김영삼 정권의 노개위, 98년 김대중 정권의 노사정위원회, 06년 노무현 정권의 노사정대표자회의는 모두가 동일하게 자본과 정권의 사회적 합의주의에 참여를 주장했던 민주노총 지도부에 의해 민주노총의 참여가 결정되었고 결과론적으로 민주노총이 참여와 불참을 반복하다가 결국 노동법 개악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자주성’, ‘민주성’ 그리고 ‘변혁지향성’은 평가 과정에서 자본과 정권의 사회적 합의주의 공세에 대한 명확한 평가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 왜곡된 평가를 통해 형성된 노동자 정치세력화

 

민주노총은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을 평가하면서 한계 중 하나로 노동자 정치 역량의 부재를 평가하였다. 평가와 함께 당시 위원장이었던 권영길 위원장은 국민승리21을 창당하면서 9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87년 노동자 대 투쟁 이후 계급적 산별노조 건설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양대 과제 중 한가지인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그리고 노동자 정치 역량의 부재에서 ‘노동자 정치역량’이 ‘진보적 제도정당’으로 왜곡되면서 이후 민주노조운동에 있어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진보적 제도정당’으로 정의가 된다. 이러한 왜곡된 평가로 인해 ‘국민승리21’,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으로 이어지는 각종 ‘진보적 제도정당’ 건설 사업이 민주노총의 주요과제로 제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은 정치사상의 자유를 억누르는 ‘배타적 지지 방침’으로 나타났다.

 

– ‘국민파’에 의해 개량화 된 민주노총

 

95년 출범한 민주노총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전노협과 업종회의 그리고 대 공장 등 세 가지 경로로 발전해온 한국의 민주노조운동 진영을 하나로 모아내면서 87년 노동자 대 투쟁을 통해 획득한 ‘자주성’, ‘민주성’ 그리고 ‘변혁지향성’이라는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가치관을 계승해온 과정이었다. 그러나 출범과 동시에 민주노총은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을 제창하면서,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과정에서 형성된 ‘자주성’, ‘민주성’ 그리고 ‘변혁지향성’과 이를 계승한 90년 전노협의 ‘노동해방・평등세상을 위한 비타협적 노동운동론’을 무력화 하면서 개량주의로 흐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은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 과정에서 김영삼 정권의 노개위 참여로 나타났으며 총파업 투쟁의 과정에서 수요 파업으로의 전환 등 다양한 형태의 개량적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한 명확한 평가가 없이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에 대한 평가가 진행되면서 이후 98년 김대중 정권의 노사정위원회 참여 및 06년 노무현 정권의 노사정 대표자회의 참여 등 민주노총의 타협적 모습에 대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5.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과 현재

 

세계 자본주의 경제위기의 한복판에 있는 2017년 한국 자본주의는 촛불 투쟁을 통해 새로운 문재인 정권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은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과 마찬가지로 세계 자본주의 경제위기로부터 한 치도 자유롭지 못하며, 세계 자본주의 경제위기에서 한국 자본가 계급을 구출해야 되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고 있다.

역대 정권과 마찬가지로 노사정위원회 제안, 노동시간 단축을 빌미로 근로기준법 개악 의도, 무기계약직 또는 자회사를 통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출범한지 반년밖에 안된 문재인 정권의 정책은 이곳저곳에서 역대 부르주아 정권과 별반 다름이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롯한 이석기 의원 등 양심수 석방에 대한 태도와 사드 배치와 투쟁하는 노동자에 대한 태도는 문재인 정권의 계급적 본질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실례이기도 하다.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이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전국적 계급적 대응 투쟁이었다. 그렇다면 이를 계승하기 위한 한국 민주노조운동 진영의 태도는 문재인 정권에 대한 계급적 태도를 분명히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의 원칙, 노개위, 노사정위원회, 노사정대표자회의에 대한 계급적 원칙 그리고 국민파에 의해 개량화되었던 민주노총을 계급적으로 강화하는 이 모든 노력이 바로 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을 현재에 재현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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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Feb 9th, 2018 | By | Category: 정세와노동, 회원마당 | 조회수: 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