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 달의 역사] 1945년 11월 5일 ― 한국 최초 전국총파업을 조직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결성되다!!

 

 

오해영 | 회원

 

 

1945년 11월 5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결성되었다. 한국노동운동 사상 최초의 산별노조에 기초한 전국중앙조직이며 처음으로 전국총파업을 조직했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의 결성과 와해의 과정을 돌아보며 그 속에서 우리가 배워할 점과 경계해야할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평, 최초의 산별 전국노동조합

 

전평의 활동 시기는 남한에서 친미 자본가 정권이 수립될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와 민중의 이해가 관철되는 자주적 통일국가(인민권력)가 건설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던 정국이었다.

1945년 8월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은 노동자ㆍ민중(그 대다수는 농민)의 정치적 염원을 광범위하게 불러일으켰다. 이는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이후 인민공화국으로 전화)의 건설과 일본인 재산 접수, 소작인의 일인지주 토지 접수, 노동자의 공장접수로 나타났다. 그러나 38도선을 경계로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은 인민공화국의 활동을 탄압하는 한편, 일제 부역자를 행정기구에 등용하고 일본인 재산을 소수 지주와 친미세력에게 헐값에 분할하여 친미적 자본가계급을 육성함으로써, 남한에 반민중적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하려 하였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1945년 11월 5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의 결성대회가 열렸다. 이틀 동안 계속된 결성식에서 전국 노동조합 소속 노동자를 대표한 505명의 대의원이 참석하고 위원장에 허성택, 부위원장에 박세영과 지한종이 선출된다. 전평은 16개 산업별 노동조합(철도, 금속, 화학, 체신, 어업, 일반봉급자, 조선, 해원, 출판, 전기, 식료, 목재, 토건, 광산, 운수/이중 철도, 금속, 화학 순으로 중화학공업 노동자가 전평의 핵심조직)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산별노조는 주요 지방에 ‘산별지부’를, 공장에는 ‘분회’를 설치하였다. 이 분회조직은 출범 시 1,194개에서 한 달 만에 1757개 조합으로 확대되었으며, 가입노동자 21만 명에서 55만 명으로 성장하며 강한 조직력을 과시했다.

이처럼 전평이 해방 80여일 만에 다수 노동자를 조직한 전국조직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분석된다. 첫째는, 당시의 정치ㆍ경제상황 속에서 분출한 노동자 투쟁이다. 해방이라는 정치적 상황에, 심각한 경제 상황이 노동자의 투쟁에 불을 지폈다. 일본자본이 철수하자 수많은 공장폐쇄와 휴업으로 공장가동률이 떨어지면서 실업자가 40여만 명을 넘어섰다(북한이나 해외로부터 돌아온 노동자 60만여 명의 전재민을 합치면 완전실업자가 100만여 명을 넘는다). 여기에 미군정의 잘못된 식량정책으로 인해 쌀값이 폭등하였으며, 미군정의 통화남발 정책으로 물가가 폭등하였다. 더군다나 미군정은 인플레이션 억제라는 명목 아래 임금마저 동결했다. 노동자들은 실업, 생산 마비, 인플레이션, 식량 부족에 맞서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해산수당 요구투쟁, 임금인상투쟁, 공장접수ㆍ관리운동’ 등이 그것이다. 특히 공장접수ㆍ관리운동은 철수한 일본인 기업뿐만 아니라 조선인 소유공장까지 확대되었고 이 운동은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으로 발전하여 당시의 정치적 과제였던 인민권력 수립의 물질적(현장) 토대를 구축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둘째, 사회주의 세력의 적극적인 활동 때문이다. 1920년대 조선에 들어온 사회주의 사상은 노동자계급 내에 파고 들어가 20년대부터 활성화된 노동운동의 사상적ㆍ실천적 기초가 되었다. 30년대 일제의 폭압통치 아래서도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은 끊기지 않고 비합노조운동(적색노조운동)의 조직화와 투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30년대 비합노조운동과 사회주의세력의 활동은 해방이라는 정치적 공간에서 분출한 노동자의 투쟁과 맞물려 전평 건설의 주체역량이 되었다.

 

 

초기 전평의 운동노선

 

전평은 “노동자의 당면 일상이익을 위한 투쟁을 지도 조직하며 이 투쟁을 조선의 자주독립문제와 결부시켜”라고 밝힘으로써, 노동대중의 일상투쟁과 자주독립국가(인민권력) 수립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긴밀히 결합시키려 하였다. 그 실천요강으로 첫째,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세력의 단합 위에 진보적 민주주의에 입각한 조선의 완전 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에 적극 참가할 것, 둘째, 민족자본의 양심적인 부분과 협력하여 산업 건설을 함으로써 공황과 인플레이션을 극복할 것, 셋째, 이와 같은 운동을 통해서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하고 노동자 대중을 교육・훈련하여 자체 조직을 확대・강화할 것을 천명하고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국가 건설과 민중생활 확보를 위한 산업부흥 노선으로,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여러 국가들 간의 복잡한 정세 및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남북한의 자주적 인민국가 수립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낳은 오류였다. 그리고 전평이 일시적으로 미군정에 협력하여 산업 부흥운동을 하는 동안 미군정은 우익단체들을 내세워 대한노총1)(대한독립촉성노동총동맹)을 결성하며 전평을 없애기 위한 준비를 해나간다.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 그리고 전평의 와해 과정

 

시작은 철도노조 부터였다. 철도노조는 4만여 명의 조합원을 가진 전평 내 가장 강력한 공공부문 단위노조였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운수부 노동자 25% 감원, 월급제의 일급제로의 전환’을 중심 내용으로 하는 산업합리화정책을 발표한다. 이에 분노한 철도국 서울 공장노동자 3천7백 명은 1946년 9월 14일 ‘노동자대회’를 열어 ‘가족수당과 물가수당 인상, 일급제 반대, 식량배급 증대, 해고 반대,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였다. 부산 철도노동자의 투쟁을 시작으로 24일에는 전국 철도노동자 4만여 명이 파업에 동참해 남한의 전국 철도를 완전 마비시킨다. 같은 날 전평은 철도총파업을 확대시키기 위해 ‘남조선총파업투쟁 위원회’를 구성하여 “쌀을 달라, 임금인상, 공장폐쇄와 해고 반대, 노동운동의 절대자유 보장, 검거 투옥 중인 민주주의 운동가 석방과 지명수배 및 체포 철회” 등의 8개 요구를 내건다. 철도노조의 투쟁은 10월 초까지 전평 산하 각 산별노조로 확대된다. 전평 산하 조직노동자 25만 명 이상(전평 조합원의 50% 이상)과 미조직 노동자 5만여 명을 포함한 총 30여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하는 전국총파업이 조직된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9월 30일 기관총으로 무장한 3천여 명의 경찰과 대한노총, 극우청년단체(대한민청, 대한독청)를 동원해 용산 철도공장에서 농성 중인 철도노동자 총파업 본부를 습격하여 간부 16명과 1,200명이 넘는 노동자를 검거하고 2명 이상을 사살까지 한다. 남조선 총파업본부가 있던 영등포 노선피혁공장도 습격하여 9월 총파업을 철저히 파괴한다.

그러나, 10월 1일 대구지역에서 ‘쌀을 달라’는 요구 아래 일반 민중들이 대규모 항쟁에 돌입함으로써 9월 총파업은 10월 인민항쟁으로 발전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대구에서 시작한 민중들의 투쟁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제주도 등 남한 전역으로 확대되어 3ㆍ1운동 이후 최대의 민중항쟁으로 번지며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기라’는 요구로까지 발전한다. 그러나 이 투쟁마저 미군정의 탄압으로 결국 패배한다.

그 이후 전평은 1947년 3월 22일의 하루총파업(전평간부 석방, 1일 4홉의 쌀 배급, 피검중인 좌익지도부 석방,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겨라)을 조직했으며, 48년 ‘2.7 구국총파업'(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입국할 예정이었던 UN한국위원단 입국 반대투쟁), ‘5.8 단독선거 반대 총파업'(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5.10총선거 반대투쟁) 등의 전면적인 정치총파업을 조직한다. 그러나 산발적으로 일어난 파업과 시위는 총과 몽둥이로 무장한 경찰, 우익청년단, 대한노총의 즉각적인 폭력 진압으로 분쇄된다. 그리고 625를 거치며 전평은 완전히 와해되어 남한의 모든 노동조합운동은 대한노총의 통제 아래 들어와 계급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운동은 오랫동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전평이 남긴 유산과 과제

 

전평은 결국 와해되었지만, 한국노동운동사의 향후 과제와 궁극의 유산을 물려주었다.

전평은 서구 산별 조직과는 다르게 현장분회를 조직의 기초단위로 설정함으로써 조직체계상에서 현장에 뿌리박는 노조운동을 지향했다. 또 30년대 일제의 폭압적 탄압 아래서도 노동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적색노조(비합노조)운동의 성과를 계승해 협소한 노동조합주의에서 벗어나 인민공화국 수립이라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망을 제출함으로써, 계급적ㆍ변혁적 노동조합운동으로 자신을 정립했다. 9월 총파업투쟁을 조직함으로써, 해방 후 한국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이 사회변혁투쟁의 중심 세력임을 확인시켜주었다. 9월 총파업이 조직되자 농민, 학생, 도시소시민의 지지가 확산되고 결국에는 10월 민중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은 96-97 총파업투쟁과 같이 노동자계급이 중심에 선 민주주의투쟁ㆍ변혁투쟁의 상과 경로를 현실로 보여준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평의 긍정성은 현 단계 민주노조운동이 본받아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또한, 대규모 조합원을 바탕에 두고 힘 있게 출범한 전평이 완전히 와해되어가는 과정에서 범한 오류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현재 한국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국내 및 국제 정치 세력들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들 중 누가 진정으로 노동자・민중의 편에 선 세력인지, 누가 경쟁자고, 누가 적인지를 구분하여 투쟁의 방향을 바로 세워야 한다.

 

<참고문헌>

≪한국노동운동사 2≫, 안재성, 삶이 보이는 창.

≪강좌 한국근현대사≫, 역사학연구소, 풀빛.

노동자의 쉼터, 다음 카페.


1) 오늘날 한국노총의 전신으로 1946년 3월 10일 서울시천교당에서 결성되었다. 대부분 김구, 안재홍, 조소앙 등 우익 인사들과 우익청년당원으로 구성되었다. 결성당시 조합 대표도 아닌 개인 자격으로 참석한 노동자수는 48명에 불과했다. 위원장에 홍윤옥, 부위원장에 이일청, 고문으로 김구, 이승만이 추대되었다. 대한노총의 강령을 살펴보면 자본 친화적이었다. 강령 서두를 보면 ‘모든 번잡한 이론을 타파하고 민주정치 하에 만인이 갈망하는 균등사회를 건설하는 데 매진할 것’을 선언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민주주의와 신민족주의를 원친으로 건국을 기한다. 피와 땀을 아끼지 않고 노동자와 자본 사이의 친선을 기한다. 등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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