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노동사회과학연구소에 발을 들이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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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석 | 자료회원, 쎄미나 팀원

 

1. 나는 원래 맑스주의자가 아니었다

나는 맑스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물론 아직도 맑스주의자라고 말하기는 민망한 수준이다. 그렇지만 내가 추구하는 가정생활과 노동조합 활동, 그리고 연구소 학습 이 세 가지를 내 삶과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고 있다. 그만큼 어느 순간부터 노동사회과학연구소가 내 생활에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고 보면 되겠다.

미리 언급하거니와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다. 학창시절을 떠올려 보면, 무릇 좋은 글이라고 하면 서론, 본론, 결론으로 깔끔하게 나뉘는 데다가 자신이 펼치고자 하는 논리에 대해 근거 있는 자료가 뒷받침되어야 하며, 읽은 이를 설득할 수 있게, 또는 비슷한 말이겠지만, 독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관점을 바뀌게 할 수 있는 그러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직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세상이 바뀌지 않을 테니까.

어쨌거나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닌데, 그럼에도 내가 글을 쓰게 되는 이유는 첫째, 우리의 월간지 ≪정세와 노동≫에 실린 글들이 물론 논리정연하고 설득력 있는 글들이기는 하지만 다소 딱딱하고 필자 자신의 삶보다는 올바른 세상을 위한 철학, 과학, 자세에 대해 논하는 글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다소 딱딱한 느낌도 든다는 것. 둘째, 때때로 ≪정세와 노동≫을 읽다가 재미도 없고 잠도 오고 해서 나는 나의 이야기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서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읊어보게 되었다. 그만큼 ≪정세와 노동≫이 보통사람(?)에게는 진입 장벽이 높으며 수준 높은 글들이 주로 실린다고 느껴 왔었다. 마지막으로 2년 정도 연구소 동지들과 함께 학습하며 배워 오는 동안 제일 크게 고민했었고 앞으로도 고민해야 할 부분이 어떻게 하면 우리 연구소의 높은 진입 장벽을 다소나마 낮추어서 현장 간부, 조합원들에게 설득력 있게 접근할 것이며, 그중에 비교적 노동운동에 적극적인 선진 노동자 동지들이 연구소 학습에 함께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저냥 평범한 철도노조 조합원이자 평범한 한 가장을 도대체 누가, 어떻게, 노동사회과학연구소로 이끌게 되었는지? 또는 그 계기는 무엇인지 그의 생활을 따라가 보면 이후에도 혹시나 연구소 회원 모집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글을 써 보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점은 우리의 채 선생님께서 몇 달 전 쎄미나 후 뒤풀이에서 우리끼리 자위행위만 하면 뭐합니까?라는 말씀이 나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결코 학습투쟁의 중요성을 비하하고자 하는 뜻은 없다. 다만, 우리끼리 학습하고 우리끼리 토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투쟁의 현장에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노동의 현장에서 노동사회과학을 어떻게 올바르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평범한 소시민이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발자국을 음미해 보시기 바란다.

2. 여기로 걸어온 나는 누구인가?

나는 최광석이다.

현재 전국철도노동조합 부산지방본부 부산고속차량지부 총무부장, 부산고속차량정비단 현장에서는 CNC선반 차륜 가공 프로그래머이자 엔지니어다. 철도에 들어온 지는 12년이 되었고 그 이전에는 노동자가 200여 명쯤 되는 창원 ㅇㅇ기계공업에서 생산관리 업무를 했다. 대학 이전의 생활을 언급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생략하고, 졸업 후 입사한 공작기계 제조회사에서 나는 노조 조합원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철도처럼 유니언샵(입사와 동시에 자동으로 노동조합 가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노동에 대한 나의 관점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노조원 하고는 술자리도 안 되고, 친하게 지내도 안 되고, 그냥 노동조합 자체가 무섭고, 말도 안 통하고,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그러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나는 사측인 팀장의 지시를 받고 업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때때로 노동조합에서 파업을 하거나 직장 내에서 조합원들이 금속노조와 연대하여 집회를 가지면 퍼뜩 카메라를 들고 투쟁 현장을 몰래 촬영하다가 조합원들에게 잡혀 멱살을 붙들리게 되면 안 찍었어요!하며 불쌍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것도 나의 업무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나쁜 일인 줄 몰랐다. 직장 상사가 시켜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라는 작은 세계에서 이것이 외화된 노동인 줄은 당연히 몰랐고, 사측으로부터 정당성도 확보된, 험한 일이기는 했지만 당연히 수행해야 하는 일 정도로 여겼다. 직장 상사에게 잘 보여야 하고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않았겠는가? 최소한 그때까지는 나에게 노동조합이란 동의할 수도 없고 동의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존재였다. 아마 요즈음 대졸 신입사원도 그 당시의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환경이 사람을 지배한다는 말을 나는 믿기 때문에.

2년 6개월 정도 근무하다가 나와 맞지 않는 일이라 생각하고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그 기간 동안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일은 단지 회사 선배이기도 한 아내를 만나서 연애하고, 이후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성공이라면 성공일 것이다. 아내를 만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공이기 때문에 그렇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서는 공무원이나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아마도 그때는 젊은 혈기가 왕성했었나 보다. 지금 같이 결혼해서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면 결코 감행할 수 없는 모험이고, 결국 회사와 타협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소심한 소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연구소에 공부하러 오는 일은 내 죽을 때까지 없지 않겠는가? 여하튼 무슨 배짱으로 그와 같은 과감한 결정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참 잘한 결정이라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부산 본가로 복귀하였지만 부모님은 내게 눈치를 한 번도 주시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결코 잘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사실 부모님은 나에게 단 한 번도 공부 좀 하라고 닦달하신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 어려운 시기에 회사를 왜 그만두었느냐 따져 묻지도 않으셨다. 내 쪽에서 오히려 약간 놀랐던 것이 애가 회사를 그만둔 이유가 있었겠지 뭐하는 무관심하다 싶을 정도의 느낌을 주셔서 이 분들은 회사를 때려치운 아들이 걱정도 되지 않으신가?하고 생각될 정도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에게 부모님은 내가 무슨 일을 벌이든 그저 내 결정을 존중하고 묵묵히 밀어주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분들이 나의 부모님이다.

도서관에 별을 보고 등하교하며 열심히 공부했지만 이놈의 공무원 시험이 한동안 없었다. 하릴없이 세월이 지나가는 가운데 2004년 철도청이 철도공사로 전환되는 시기에 2천여 명 신규직원을 뽑는 소식을 듣고 두어 달 그 시험에 매진하여 합격할 수 있었다.

3. 철도 노동자가 되고 뭔가 이상해졌다

철도 입사 직후 여전히 나는 노동조합에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니언샵1)의 특성상 노조 당연가입과 이후 지부장과의 면담과 노동조합 교육 시간이 주어졌는데, 지부장의 신규 조합원 교육과 면담을 통해 노동조합의 필요성과 의미를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사람의 첫인상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가 보다. 이전 직장에서의 지부장(위원장이라고 칭하기도 했다)은 주로 무서운 인상이고 말도 잘 못한다고 느꼈었는데, 철도에 들어와 보니 지부장이 마치 사측의 높은 사람처럼 인상도 푸근하고 웃는 표정에다 언변도 능수능란했었다.

 그리하여 부산차량사업소라는 곳에서 차량정비 업무로 철도생활을 시작했는데 그곳이 철도 노동조합 내부에서도 아주 투쟁적이고 강성노동조합이기로 유명했었다. 일례로 파업투쟁을 마치고 현장에 복귀하면 조기 복귀자, 또는 관리자들은 면목이 없어 하거나 미안해했고, 우리는 그 투쟁분위기 또는 기세를 몇 달간은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만큼 단위 지부에서 노동조합의 힘은 위력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업장이 그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역, 시설, 전기 사업소 등은 분산 사업장이라서 관리자들의 목소리가 높고 조합 탈퇴율도 높은 것이 현실이다.

요점은 노동조합원으로서의 나의 직장생활은 대체로 쉬운 편이었다는 것, 선배 조합원들과 함께 같이 갔다가 같이 돌아오기만 하면 되었고 이런 조건에서는 차라리 독자적인 관점을 가지고 파업을 불참한다거나, 파업 중도에 복귀하는 행위가 파업에 참가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아주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실제 파업현장에서 얼마나 복귀하고 싶었던지 3층 높이에서 뛰어내려 몸을 다치면서까지 복귀를 감행한 용감한(?) 조합원도 있었다.

4. 김형균 선배

내가 김형균 동지를 만난 것은 2011년쯤으로 생각된다. 2009년 허리디스크 수술을 했는데 경과가 그다지 좋지 않아서 병원에 누워있기를 5개월 정도, 재활 운동을 두어 달, 이후 2년 까까이 만성 통증으로 고생을 했다. 당시의 나는 정신적ㆍ신체적으로 회사, 가정생활을 포함해서 모든 일에 그야말로 자신감을 잃어버렸었고 심지어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던 시기였다. 내 인생의 암흑기였다. 퇴원이후 현장 근무는 무리라고 부서에서 판단했었고, 나 역시 현장근무에 자신이 없어,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앉은 채로 오래 근무하다보니 허리가 더 악화되는 것 같아 결국 다른 현장부서로 이동을 희망했고, 부산정비창에서 김형균 동지를 만났다.

김형균 동지에 대해서는 현장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통해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다. 뭔가 노동조합에서의 위치가 높고, 강성이고, 민주노총과 깊은 연관이 있고 등등. 같은 부서로 내가 발령을 받고 한솥밥을 먹게 된 후 나는 그에 대한 첫 느낌은 이랬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항상 바빴는데 틈만 나면 pc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었다. 좋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때만 해도 노동조합 활동을 잘 하는 사람은 일도 잘한다고 생각했기에. 항상 글을 읽는 것 아니면 문서 작성하는 모습. 그게 그를 본 나의 첫 인상이었다.

나 역시 독서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 당시의 나의 독서 수준은 태백산맥, 이승만, 안창호, 박헌영, 이현상 평전류 또는 독립운동,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이외수, 이문열, 공지영 등이 쓴 속류 한국문학도 즐겨 읽었다.

아무튼 틈틈이 책을 읽는 나를 눈여겨봤는지 어쨌는지, 김형균 동지는 자신도 허리 수술을 했다면서 몸살림 운동인가를 가르쳐 주었고 나는 다소 근엄하면서도 진지하게 그 운동을 열심히 따라 하였다. 그만큼 나는 통증으로부터 탈출이 절실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부서에서 근무한 지 두어 달이 지나자 허리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던 나에게 그는 문현동에 몸살림 운동을 하는 모임이 있다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나는 순진하게 따라다니며 몇 사람들 만났는데, 몸살림 운동이라는 것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때 즈음 나는 그로부터 ≪노동자 교양경제학≫이라는 책 한 권을 받았는데 책 원가에 30% 세일을 하여 준다고 했었다. 첫 느낌은 이거였다.

양장본임에도 불구하고 책이 되게 싸구나!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뭐 이런 책이 다 있나?라는 느낌이었다. 대학 교수를 노골적으로 신랄하게 비판하는 대목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대학 교수의 말은 무조건 논리적이며 신뢰할 수 있다는 대중 일반의 그릇된 관념을 깨부수는 장면이 다소 독선적이고 거북하게 느껴졌지만 필자는 뭔가 확신이 있겠지하며 읽었던 것 같다. 자본주의가 곧 민주주의를 뜻하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먹고사는 경쟁체제에 익숙해 있었던 나에게 그 책은 거부감도 컸지만 그래도 한 가지 매력은 필자의 주관적 관점을 강요하는 데 논점을 두기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모순점들 세밀하게 근거를 들어 폭로해 나간다는 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해도는 50%를 크게 넘지 않았던 것 같았고, 간간히 김형균 동지의 특강을 들었지만 그 설명에 부분적으로 이해는 했지만 늘 그렇듯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파묻혀 있던 나였기에, 세상이 ≪노동자 교양경제학≫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되어야만 한다는 확신을 가지지는 못했다. 스스로 노동자이면서도 계급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무지막지한 이데올로기 공세가 가장 큰 이유겠지만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는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철도 노동자였고 노동조합활동에 적극 참여하기는 했으나 간부 활동은 하지 않고 있어서인지 노동조합을 책임 있게 이끌고 가야하겠다는 생각이나 의지는 아직 없었다.

직장 생활에서 큰 변화를 가지게 된 계기가 본사 국제철도 전문가 과정 6개월을 수료하였고(나는 영어회화는 잘하는 편이었다) 곧바로 본사 해외사업단으로 발령받아 근무를 시작했다. 동료들은 부러워했지만 나는 힘든 시기를 보냈다. 계급이 엄존하는 세계였던 것이다. 복병이었다. 일반적으로 큰 회사의 본사는 직장 생활에 삶의 무게중심을 두는 사람들로 대부분 구성되어 있고 실제 그렇게 느껴졌다. 모르긴 해도 밖에서 나는 철도공사 본사 해외 사업팀에 근무한다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또는 그것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자랑거리가 되는 그러한 삶을 그들은 꿈꾸는 것은 아닐까?

부산-대전을 오가며 기러기 아빠 생활을 몇 달간 하면서 말로만 듣던 이산가족의 현실을 몸소 경험했다. 현장근무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큰 변화를 요구하는 환경이었고 남은 직장 생활을 어떻게 방향을 잡을지 결정지어야 했다. 나는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었다. 직장생활이, 이렇게 외화 된 노동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부분이 되어야함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해외사업단 자체는 아주 cool하게 나를 현장으로 돌려보내주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현장으로 추락했다. 나의 복귀를 가장 반겨준 사람은 김형균 동지였다. 지금 생각하면 웃고 넘기지만 그 당시는 소위 우울증 또는 대인기피증으로 한동안 힘들었다.

5. 노동사회과학연구소와 어려운 책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연구소를 부산역 근처인 중앙동으로 옮겼을 때 김형균 동지 손에 이끌려 다시 방문을 했던 것 같다. 거기서 김형균 동지는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전 6권을 꺼내 놓으며 쎄미나 참가를 제안했다. 당시 그 자리에는 연구소 회원이 아닌 몇몇의 다른 동지들도 있었는데, 김형균 동지는 현장 간부들의 학습투쟁의 중요성을 열변했었고, 다들 한숨을 쉬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리 그래도 이 두꺼운 책을 6권이라니…)

나는 아직도 내가 왜 그 쎄미나에 참여하기를 승낙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김형균 동지는 또다시 책값을 30% 깎아 주었고, 이왕 구입한 책 읽어는 보자는 마음에, 펼쳐 읽기 시작했다.

어려웠다. 너무나 어려웠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검은 것은 글이요 흰 것은 여백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세상에 이렇게 어려운 책도 있는가? 싶은 생각이었다. 쎄미나에 참여하기 위해 책을 3번씩 읽곤 했었다. 왜냐하면 3번 읽고도 모르는 내용은 나의 이해 수준을 넘어서는 글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1800년대 당시 유럽에서는 그런 난해한 스타일의 글들이 유행했었는가? 아니면 번역이 엉망인가? 아니면 내가 바본가?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요즘에 쓰여지는 글들과는 차원이 다르고 150년이나 지났는데 요즘 세상에 견주어 보면 맞기는 한 건가? 하며 쎄미나 초반에는 관둘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쎄미나를 참여하지 않고서 독학으로 이해하기에는 평균수준의 지적 능력을 가진 노동자에게는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쎄미나의 가장 큰 장점은 동료들과 함께한다는 것이었다. 내공이 상당한 동지들이 주위에 많았다.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갈 때도 귀찮아하지 않고 진지하고 알기 쉽게 학습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한 동지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비교적 결석하지 않고 순조롭게 쎄미나에 임하고 있는 것 같다. 동지들에게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6. 머리부터 가슴까지의 거리가 멀다

글을 서서히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다.

여담이지만 Armway라는 다단계 판매 사업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거기에 교육에 다녀온 내 친구가 전해 주는 이야기인데, 교육이 끝나면 한 명씩 나와서 발표를 한다고 했다. 나도 열심히 해서 Diamond가 되고 싶어요!, 열심히 하면 불가능한 게 없는 것 같아요, 우리 아이들도 엄마가 더 열심히 해서 공짜로 보내주는 해외여행을 가고 싶대요. 등등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란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단체든지 수기를 쓰라고 하면 ㅇㅇ을 알게 된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에요!라고 쓰는 글이 진부하지만 1등을 먹지 않는가?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변증법을 배우고 과학적 이론을 제시하여 사회변혁을 꿈꾸며,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발굴, 지도해 나가야 하는 선진 노동자이지 않은가? 따라서 나는 비록 노동사회과학연구소를 통해 학습하고 지도받는 일이 지금까지는 행복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연구소를 Armway의 Diamond처럼 찬양하는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연구소를 통해 과학적 이론을 배우면서도 항상 의심해 보며 현실과 현장에 적용할 여지와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내가 연구소를 나오는 이유이다.

아! 이제 어렴풋이 알겠다! 내가 연구소에 다니는 이유를.

논리는 빈약하겠지만 글을 써 보면서 내가 연구소에 왜 오는지 조금씩 구체적으로 깨달아 나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맑스-엥겔스의 이론과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따르고 싶지는 않다. 그것이 바로 맹종이니까. 시간이 지나 언젠가는 연구소에 나가는 이유가 지금과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열심히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나 혼자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산 연구소에서 2년여간 학습하고 뒤풀이도 하면서 작게나마 동지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은 것 같아서 보람차다. 비록 지금은 조촐한 인원의 쎄미나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언젠가는 신규 회원들로 북적북적 입추의 여지가 없는, 자리싸움에 언성이 높아지는, 그러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가 되었으면 좋겠다.


1) 사용자가 종업원을 고용할 때는 자유이나, 일단 채용이 되면 반드시 노동조합에 가입해야 하며 조합으로부터 제명ㆍ탈퇴한 자는 회사가 해고해야만 한다는 것을 정한 노동협약상의 조항. 즉, 근로자가 노동조합원의 자격을 취득하지 않거나 자격을 상실하였을 때 사용자로 하여금 당해 노동자와의 고용관계를 종식하도록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노동조합의 유지ㆍ확대를 기하려는 제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Nov 16th, 2017 | By | Category: 정세와노동, 회원마당 | 조회수: 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