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1987년 9월 3일, 4일(7, 8, 9 노동자 대투쟁의 마무리 현대중, 대우차 노동자의 투쟁)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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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7, 8, 9 노동자 대투쟁이 전개된 지 30년이 흘렀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노동자 대중 투쟁이었던 87년 노동자 대투쟁. 30년 전 9월은 바로 노동자 대투쟁이 마무리되는 달이기도 하다. 7월부터 3개월 동안 진행된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울산에 있는 현대엔진 노동조합 창립 총회일인 7월 5일부터 시작되었다. 87년 7월 5일이 무슨 날인가? 7월 5일은 바로 한 달 전인 87년 6월 9일 서울 연세대 정문에서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뒤 머리를 맞아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 열사가 돌아가신 바로 그날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전두환 군사정권의 견찰인 전투경찰에 의해 이한열 열사가 돌아가신 날 바로 그날,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가 새롭게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7월 5일 이한열 열사가 돌아가시던 바로 그날 울산에서부터 전국으로 노동자의 함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3개월 동안 총 3,241건의 노동자들의 투쟁이 전개되었고, 하루 평균 44건의 파업과 투쟁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또한 노동자 대투쟁 직전인 87년 6월 현재 2,449개의 노동조합과 906,000여 명의 노동조합 조합원에서,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마무리된 이후인 87년 12월 말 현재 3,532개의 노동조합으로 그리고 1,170,000명의 노동조합 조합원으로 급성장한 영웅적 투쟁이었다. 그리고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한 개의 공장이나 하나의 지역이 아니라 전 산업과 전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최대 규모의 대중 투쟁이었으며 노동악법의 틀을 넘어 선파업 후협상이라는 투쟁의 기풍을 만들었던 투쟁이었다. 또한 파업 투쟁 그 자체가 공장 안에서 전개되는 투쟁에서 공장에서 거리로, 시민과 함께하는 대중적 투쟁이었다. 이한열 열사가 돌아가신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조합 창립으로부터 시작된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바로 그간 공돌이 공순이라 천대받던 노동자들이 시민 사회에서 시민권을 획득한 투쟁이었던 것이다.

한국 전쟁 이후 최대 규모로 전개되었던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1987년 9월 3일 울산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과 9월 4일 부평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폭력적으로 진압되면서 서서히 그 기세가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9월 3, 4일 양일간에 걸쳐 진행된 현대중공업과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진압 과정을 당시의 상황을 기사화했던 ≪경향신문≫을 통해 확인해 보자. 1987년 9월 4일자 ≪경향신문≫은 1면을 통해 아래와 같이 진압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현대・대우 분규 계속 과격화. 난동 근로자 180여 명 연행. 주동 선동자 모두 구속. 대검 지시 방화 감금 행위 강제 진압

 

경찰은 4일 새벽 최근의 노사분규 후 처음으로 과격 분규 현장에 경찰력을 투입, 방화 파괴 도로 점거 등 난동을 벌여온 울산 현대중공업 근로자 86명,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 근로자 1백여 명 등 모두 186명을 연행, 조사를 펴고 있다. 정관용 내무부 장관은 이날 오전 경찰을 투입,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에서 1백명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사무실 등에서 86명 등 모두 186명의 근로자들을 연행한 것과 관련해 정부는 앞으로 노사분규 현장에서 근로자들이 방화파괴 인질 감금 등의 각종 불법 난동 행위를 할 때는 사업장 안팎을 막론하고 사업주의 요청이 없더라도 공권력을 투입, 주동자와 적극 가담자를 모두 연행해 엄격하게 법을 적용해 처벌 하겠다고 말했다.

정 장관은 정부는 그 동안 노사문제는 노・사간에 호혜 및 자율 해결을 원칙으로 각종 노사분규가 원만히 수습될 것을 기대해 왔으나 지난 2일 울산 현대중공업 근로자들이 시내에 진출, 시청에 난입해 공공시설물을 파괴 방화하고 도로를 점거하는 등으로 시민 생활에 큰 불편을 끼쳤고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 근로자들은 사장 등 중역진 18명을 불법 감금하고 도로를 점거 차단하는 등 극도의 극렬양상을 보여 4일 새벽 울산과 부평에 경찰력을 투입해 주모자등 186명을 연행했다고 밝혔다.

정 장관은 이 같은 정부의 공권력 개입은 국법 질서를 지니고 국민생황을 보호가기 위해 불가피 했다고 말하고 앞으로도 정부는 평화적 노동쟁의에 대해서는 자유적・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기대하고 적극 중재하겠으나 방화 파괴 도로 점거 등 시민생활에 불편을 주고 국법 질서를 어기는 난동 행위에 대해서는 사업 장 안이든 밖이든 가리지 않고 사업주의 요청이 없더라도 적극 개입 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6.29 선언 이후 4일까지 노사분규와 관련해서 경찰에 검거된 사람은 총 1,268명으로 이중 110명이 구속되고 나머지는 불구속 112명 즉심 165명, 훈방 631명, 선도위 및 관계 기관이첩 2명, 계속 조사 중 249명 등이다. 또 구속자중 110명의 혐의 내용별로 보면 외세개입 혐의 22명, 위장취업 28명, 폭력난동 60명이다. 대검찰청은 4일 노사분규 현장에서의 파괴 방화 등 극렬 행위주동자 및 적극 가담자와 이를 선동해 외부 인상에 대해서는 전원 구속하라고 전국 검찰에 지시했다. 대검은 또 가두에서 극렬시위와 관공서 등 공공건물에 대한 파괴 방화 점거는 물론 회사 내 에서 회사간부 감금 방화 기물 파괴 등의 극렬한 범법행위에 대해서도 공권력을 투입 강제 진압하는 등 강력히 대처키로 했다.

 

위의 기사 내용을 보면 7 ,8, 9 노동자 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이 보여주었던 투쟁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우선적으로 노동자 대투쟁은 기본적으로 법을 뛰어넘는 즉 악법은 어겨서 깨트리는 투쟁의 과감함을 가지고 전개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리고 또한 파업 투쟁 그 자체가 공장 안에서 전개되는 것뿐 아니라 시내로 진출하여 6월 항쟁에서 성장한 민주 시민들과 함께했음을 확인할 수가 있으며, 시청 등 지자체와 경찰서를 포함한 공공시설 등 부르주아 국가 폭력 기구를 상대로 한 투쟁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또한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보여준 중역진 18명 감금 및 도로 점거 차단 등 사용자에 대한 분노와 함께 가두에서의 투쟁이 대단히 전투적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구속자 현황 혐의를 보면 외세 개입 22명과 위장취업 28명 등이 있는데 결국 치열한 연대 투쟁과 함께 7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학생출신 노동자들의 역할이 노동자 대투쟁의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어쨌든 9월 3일과 4일에 걸쳐 진행된 현대중공업과 대우자동차에 대한 공권력 침탈은 거대하게 타올랐던 7, 8, 9 노동자 대투쟁의 마무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 대투쟁은 6.29 선언 이후 7월 5일부터 8월 초순까지는 비교적 원만하게 시작되었고, 8월 중순부터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1985년부터 2년 동안 3만여 명이던 노동자가 16,000명으로 정리해고 되고 임금이 동결되는 등 극심한 노동자 탄압에 분노하고 있던 거제의 대우조선이 노동자 대투쟁의 한복판인 8월 8일 노동조합 결성을 촉구하는 파업 투쟁에 이어 8월 9일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초대 위원장이 회사에 회유됨으로써 새롭게 새 노조를 결성한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14일부터 파업 투쟁과 함께 옥포, 장승포 등지에서 가두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와중인 8월 22일 옥포 관광호텔 앞에서 파업투쟁과 행진을 전개하고 있던 대우조선 노동자들을 상대로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했고, 이때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열사가 최루탄을 흉부에 맞고 병원으로 이송 중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8월 28일 대우조선 종합운동장에서 이석규 열사의 민주국민장을 치른 뒤 광주로 향하던 장례 행렬을 경남 고성에서 가로막고 시신을 탈취하여 남원으로 빼돌리고 장례 행렬을 무력으로 강제 해산시키면서 7, 8, 9 노동자 대투쟁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전면적 폭력 탄압이 시작되었다.

8월 28일 이석규 열사 장례식에 대한 폭력 탄압에 이어 9월 1일부터 시작된 서울택시 총파업 및 가두 투쟁에 대한 강제해산과 연행으로 그리고 9월 3일 울산의 현대중공업과 9월 4일 부평의 대우자동차에 대해 각각 강제진압을 감행함으로써 한국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노동자 투쟁이었던 7, 8, 9 노동자 대투쟁이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점거농성과 파업을 중심으로 한 투쟁방식이 바뀌었을 뿐이지 노조 건설은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이로써 노동자들은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을 통한 연대조직의 건설을 추진하게 되었고, 이는 지역별 노동조합 협의회 건설로 이어졌다. 87년 12월 마산창원지역노동조합총연합(이하 마창노련) 창립을 시작으로 진주, 서울, 인천, 전북 등을 거쳐 89년 11월 대구지역노동조합연합(이하 대구노련)까지 16개 지역에서 지노협이 건설되었다, 16개 지노협을 중심으로 한 연대투쟁은 이후 1990년 전국 조직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노협)로 그리고 1995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 건설로 이어지게 된다.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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