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뮨주의 선언인가 청산주의 선언인가? – 이진경 등의 ‘코뮨주의 선언’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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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찬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

1. 머리말

이진경 씨 등이 ‘코뮨주의 선언’을 제출했다. 자극적인 제목의 이 책은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기존의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와는 무언가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런데 선언이라고 하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일목요연하게 제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진경 씨 등은 ‘코뮨주의 선언’을 통해 자신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잘 전달하고 있으나 새로운 정치적 ‘선언’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느낌을 준다. 이는 이진경 씨 등이 ‘코뮨주의 선언’을 통해 새로운 대안적 이념을 제기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며 단지 기존의 사회주의 이념을 청산하고 해체하는 데 기여하고 있을 뿐이라는 의혹을 준다.

고병권 씨는 대중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말하고 있다. 흐름으로서 대중이 대중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며 기존의 민중, 계급이라는 것은 대중의 흐름이 정체되어서 형성된 것으로서 ‘대중의 죽음’이라고 한다. 즉, 기존의 사회주의 운동은 대중을 죽은 상태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병권 씨가 제기하는 것 중 새로운 것은 대중을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뿐이고 현실적으로는 민중, 계급이라는 사회주의 운동의 골간을 해체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진경 씨는 소박하게도 적대적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우정의 정치학을 논하고 있다. 기존의 맑스주의 정치학은 파시즘과 똑같이 적대의 정치학이었으며 그것은 이제 우정의 정치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대하는 계급 간에도 우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자본가 한 사람 한 사람 뜯어보면 선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이 개인적 운동이 아닌 바에야 계급적 이해를 떠나서 우정을 논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나아가 이진경 씨는 레닌의 전위개념을 비판하면서 기존의 전위 개념을 해체하고 전위는 아방가르드와 같은 개념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고병권 씨는 소유에 대해 논하면서 핵심적으로 20세기 사회주의가 달성한 국유는 전혀 노동자계급의 해방이 아니었으며 억압의 체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논하려면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어떤 것이고 어떠해야 하는지를 실사구시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간단하게 국유 자체는 노동자의 해방과 무관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청산주의로서는 맞는 것이지만 새로운 정치적 ‘선언’의 무게감으로서는 많이 부족한 느낌을 준다.

이들의 이러한 청산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청산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이들은 헤겔과 맑스의 변증법은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게 세계를 보는 모든 관점을 스피노자에 의지하고 있다. 특이성 혹은 특이점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변증법의 질, 양, 상호 연관 등의 개념을 대체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이들의 사상적 뿌리에 해당하는 들뢰즈 등의 철학에서 기인한다. 스피노자는 변증법이 구체화되고 정립되기 이전의 유럽의 철학자이다. 그에게서는 아직 철학적 개념들이 정확히 분화하기 전의 개념들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이들이 이렇게 스피노자에 의지하는 것은 변증법을 통하지 않고서도 세계를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변증법을 통하면 보다 과학적이고 정확한 파악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스피노자에게 의존하려는 것은 이들이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혹은 두려워하고 있다는 혐의를 준다.

이진경은 가치가 인간의 노동만이 아니라 기계에서도 창출된다는 헛소리를 했다. 이진경이 이렇게 주장한 것은 휴머니즘을 청산했기 때문이다.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은 더 이상 타당하지 않고 자연도 코뮨에 포함되어야 하며 인간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휴머니즘 없는 코뮨주의를 구상한다. 그러나 이는 휴머니즘에 대한 역사적 파악을 놓치는 것이다. 휴머니즘이 진보적이었던 것은 중세의 신학적 질서에 맞서서 인간의 해방을 외쳤다는 것에 있다. 따라서 현대에서 휴머니즘은 더 이상 진보성이 없다. 그러나 휴머니즘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지양되어야 한다. 즉, 인간해방이라는 대의는 구체화되어야 하고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가치의 생산도, 휴머니즘 자체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지양되는 것이라면 인간만이 가치의 생산의 담당자라는 것은 유지될 필요가 있다.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은 좋으나 최소한의 과학적 상식을 폐기하면 그야말로 헛소리의 행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헛소리는 사회에 대한 이해에서 정점에 달한다. 이른바 전체주의에 대한 반성으로서 제기된 ‘타자의 철학’이라는 것을 검토하면서 이들은 타자성이 유지되면서 공동체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대단히 관념론적인 접근이다. 적대적인 사회에서 자본가계급을 타도하여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쟁취하는 것에 의해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기 때문에 타자성이라는 개념이 유지되어야 하고 새로운 공동체는 이러한 타자를 포함하여야만 한다는 것인데 이는 전형적으로 사회에 대한 관념론적인 접근이다. 이들은 사회 변혁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을 주장하는데 그것도 관념론적으로 말이다. 이들이 말하는 타자성의 철학을 주장한 원래의 사람인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은 ‘초월’을 말하는데 전형적으로 형이상학적인 접근이고 결국은 신학에 대한 승인으로 흐른다. 우리는 타자성이 아니라 적대하는 사회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고 적대, 계급을 폐기하는 투쟁을 해야 하며 그리하여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사회 전체의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타자라는 개념은 폐기되어야 하고 대신에 전체와 개인의 변증법적인 통일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의 본질은 한마디로 청산주의이다. 기존의 20세기의 맑스-레닌주의 운동을 천박하게 이해하고서는 그것들을 과감히 청산하고 자신들의 관념적인 헛소리로 운동을 대체하는 것이다. 이진경 씨는 한때 맑스-레닌주의 전위조직 운동을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쓴 글들을 볼 때 그의 지금의 주소는 청산주의이고 한편으로 그가 맑스-레닌주의를 얼마나 천박하게 이해했었는가를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는, 과학은 그렇게 간단히 청산되지 않는다. 상황의 힘이,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의 모순이, 운동을 재생시키고 있다. 사회주의 운동은 과학이다. 이진경 씨 등의 이러한 청산주의 선언에 맞서 이들을 비판하면서 우리가 수호해야 하고 또 새롭게 정립해야하는 과학은 무엇인지를 찾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면 이진경 씨 등의 ‘선언’의 순서를 따라 하나하나 짚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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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Sep 16th, 2013 | By | Category: 〈노동사회과학 제3호〉 맑스 레닌주의와 사회주의의 쟁점 | 조회수: 2,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