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10월 혁명의 세계사적 의의(상)*

 

사키사카 이쯔로(向坂逸郞)

번역: 편집부

 

 

 

1. 머리말

 

1917년 10월 혁명의 소식이 일본에 알려졌을 때, 일본의 노동자계급 중에는 레닌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에게도 그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한 사람,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1880-1958])는 그전에 제2 인터내셔날 쉬투트가르트 대회의 의사록(議事錄)을 읽고, 레닌이라는 인물이 발언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이름의 세계사적 의의에 관해서 무언가 생각하는 바는 없었다. 일본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최대의 지도자[의 한 사람]인 이 사람에게조차 그러했기 때문에, 다른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알지 못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만큼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은 국제적인 시야가 부족했다. 그것은, 국제적인 사회주의 운동의 관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당시의 일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야마카와 히토시는 ≪자서전≫ 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러시아 혁명에 관해서는 특별한 루트가 있어 특별한 정보를 얻는 적이 없습니다. 신문에서 처음 알았기 때문에 그 범위밖에 처음에는 몰랐던 것입니다. 레닌이라는 것은 약 이름인가 무언가 하고 잘못 알았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레닌이라는 이름을 몰랐던 것이지요. 나는 제2 인터내셔날의 의사록을 가지고 있는데, 쉬투트가르트 대회인가, 그중에 레닌이 발언하는 곳이 몇 번 있습니다. 짧은 발언으로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다. 레닌은 무대 뒤에서 대단히 활약했지만, 의사록에는 그러한 것은 나타나 있지 않다. 아무튼 레닌이라고 하는 이름이 있었던 것 같았기 때문에 다시 찾아보았다. 그 정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인가를 몰랐던 것입니다. 아주 초기의 신문전보(新聞電報)에는 쌩디칼리스트 레닌이라든가, 브랑끼주의자 레닌이라는 식으로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빈약한 자료 때문에 누가 어떠한 주장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론적인 것을 처음 다소간 알았던 것은, 몇 년이 지났던가, 곤도 에이조(近藤榮藏)가 미국에서 돌아와, 나에게 미국의 플레너[?]라는 사람은 나중에 스파이가 된 인간이지만, 레닌이 쓴 것과 뜨로쯔끼가 쓴 것을 잘 편집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독재(フロレタリア革命とディクテータシップ)≫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며, 그 책을 곤도가 주었을 때였는데, 상당히 커다란 책입니다. 그것으로 처음으로 레닌이나 뜨로쯔끼의 사상의 내용을 대충 알았습니다.

그때까지는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혁명이 일어나 제정(帝政)이 무너졌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감격을 주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좀처럼 자료가 없었습니다. ≪사회주의연구≫ 등에 때때로 글을 쓴다든가, 다른 잡지에도 글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 [1874-1930]) 씨가, 아무래도 야마카와 히토시 쪽은 무언가 특별한, 결국 러시아 정부로부터라도 루트가 있어 자료를 얻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지만, 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라든가, 기타 다른 나라에서 출판된 신문기자의 여행기라든가, 그러한 것을 보고 겨우 알 정도였습니다.

러시아 혁명이 일본에 미친 영향은 컸지요. 내 자신이 받은 영향도, 생애 중에 가장 큰 영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혁명, 혁명이라고 하는 것을 노상 읽기도 하고 말하기도 해 왔지만, 혁명이란 어떠한 것인가, 어디에도 그러한 것은 없기 때문에, 정말 그것은 관념적인 것입니다. 이 혁명을 현실에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대단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단한 감격이지요. 영국 노동당의 아나이린 베봔(Aneurin Bevan, [1897-1960])은, 러시아 혁명의 보도를 처음 접했을 때 영국의 노동자들이 길거리에서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일본에서도 그대로였습니다. 나는 그 무렵 아라하타(荒畑[寒村], [1887-1981]) 군과 함께 하고 있던 노동조합연구회에서 러시아 혁명 이야기를 했는데, 눈물이 나서 도무지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만큼 감격을 주었던 것이지요.

우리뿐만이 아니고, 그 당시 사회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던 사람치고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때는 러시아 혁명 지지일색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그러한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코민테른이 만들어지기 전의 이야기인데, 그 후 차분해져 점차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山川均自傳≫, pp. 369-370.)

이것은 그 무렵 일본 사회주의자들의 사정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야마카와 히토시는 당연히 이 레닌의 위대함에 관하여 알고 있지 못했다. 단지, 레닌이라고 하는 러시아 사회주의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러시아 혁명의 최고 지도자로서 레닌이 나타난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본질이 조금씩 주로 (주로 미국으로부터의) 영어 문헌을 통해서 일본의 노동자계급이나 지식계급 사이에 이해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일본]에서는 1910년(명치 43년)의 고토쿠사건(幸德事件)1) 이래 사회주의 운동은 철저하게 탄압되었다. 일본어로 쓰인, 사회주의에 관한 건실한 문헌을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전에 있었던 문헌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졌다. 사람들은 사회(社會)라는 말을 무서워했다. 곤충의 사회라는 책조차 사회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서점에서 몰수되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빨갱이(赤, あか)주의자(主義者)라는 말로 사람들을 따돌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최근까지의 이야기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연합군의 병기창(兵器廠)이었고, 군수품 창고였다. 일본 자본주의는 이에 의해서 크게 돈벌이를 하고 발전했다. 드디어 독점자본이 일본의 경제와 정치를 제패(制霸)했다. 이 때문에 일본 자본주의의 모순이 물가등귀라는 형태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군국주의에 대한 연합국 측의 민주주의 전쟁이라고 선전되었다. 연합국 측은 이 선전으로 이 대전에서의 연합국 측의 제국주의적 의도를 은폐하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당연히 그 반대의 면[反面]을 육성했다. 국민의 민주주의적 요구의 고양(高揚)이 그것이다. 1917-18년은 특히 물가등귀가 격렬했던 해였다. 쌀값이 급격히 올랐다. 나는 그 1918년 9월에 대학에 진학하여 도쿄로 이사했는데, 하숙비가 매월 올라 수개월 사이에 금방 3배 정도로 되었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1918년은 쌀 소동(米騷動)의 해이다. 이 해 8월 3일, 도야마현(富山縣)에서 쌀 소동이 발발(勃發)하고, 그 후 1도(道) 3부(府) 32현(縣)에서 잇달아 일어나 자연발생적으로 전국적 규모의 폭동이 되었다. 이것은 통일적인 지도하에 수행된 봉기가 아니었다. 일반 국민의 불만을 목적의식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사회주의 정당이 당시 일본에는 없었다. 그러나 이 폭동이 그 무렵의 일본의 일반적인 민주주의 운동과 사회주의자들의 활동, 나아가 러시아 혁명에 의해서 조성된 이들 운동의 전진에 의한 공기(空氣) 속에서 발생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 폭동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고, 사회주의 정당의 목적의식적 지도가 없었기 때문에, 바꾸어 말하자면,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지도가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봉기는, 사회주의적 혁명으로 전화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국민의 민주주의적 요구를 충분히 전개시키는 데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앞서 독점자본의 정책의 모순과 더불어 국민의 민주주의적 요구가 고양되고 있었다. 노동조합의 설립과 노동쟁의의 발생이 두드러졌다. 1917년(대정 6년)에 무로란제강소(室蘭製鋼所)와 나가사키조선소(長崎造船所)에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나고, 1919년(대정 8년) 9월에 고베(神戶)의 가와사키조선소(川崎造船所)에서 대(大)파업이 일어나고 있다. 이 해 8월에는 우애회(友愛會, ゆうあいかい)가 대일본노동총동맹우애회(大日本勞動總同盟友愛會)로 이름을 바꾸어 근대적 노동조합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1878-1933])는 1916년(대정 5년) 헌정(憲政)의 본의(本義)를 설명하여 그 유종의 미를 다할 길을 논함(≪中央公論≫)을 발표했다. 이것은 일본의 민주주의 운동의 진전에 커다란 의의가 있었다.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 정치적 선언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보통선거권 요구 운동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요시노 사쿠조의 논문에서조차 민주주의 운동이 그 세계사적인 명칭인 민주주의(democracy)라고 불리지 못하고, 민본주의(民本主義)라고 일본스럽게 왜소화되고, 신성불가침한 것의 눈치나 보는 비굴한 명칭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데에 당시 일본의 사회적 정황이 드러나 있다. 일본 민주주의 운동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이 운동이 커다란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는 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민주주의의 한계도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1918년(대정 7년) 3월에 야마카와 히토시는 민주주의의 번민을 집필하여 요시노 사쿠조를 비판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야마카와 히토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비판은 그해의 그의 논문집 ≪사회주의의 입장에서(社會主義の立場から)≫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 청년들은 야마카와 히토시의 이 책에 수록된 논문에 의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상으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1915년(대정 4년),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1871-1933])는 ≪신사회(新社會)≫를 창간하면서, 이를 조촐한 깃발 올리기라고 하였다.

함성을 지르면서 용감하게 떨쳐 일어났다고 할 만한 거창한 깃발 올리기는 물론 아니지만, 닳아빠진 만년필 끄트머리에 자그마한 종이 깃발 하나를 꽂았을망정 어쨌든 깃발 올리기임엔 틀림없습니다. 우선 아쉬운 대로 한 무리의 패잔병이 산속 동굴에 몸을 피해 적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낭떠러지에 의지하여 고사리와 칡뿌리로 허기를 달래며, 오래 버틸 계책을 강구한다고 하는, 매우 초라한 모습이긴 하지만, 이는 가슴에 원대한 뜻을 품은 의로운 군대의 태도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바로 내일모레라도 하산하여 적의 대열에 역습이라도 시도해보겠다는 계획도 없으며, 또 그만한 능력도 없습니다. 이 점은 적군 제위께서도 당분간은 마음을 푹 놓으셔도 될 듯합니다. 다만 멀리 혹은 가까이 있는 동족들과 어렵사리 서로 연락하고 호응하며, 서로 격려와 위로를 주고받으면서 천천히 때를 기다리겠다는 결심만은 상당히 확고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들어박혀 겨우 지키기만 하는 이 산채마저도 반드시 소탕하고 씨를 말리겠노라며 적 대군이 부득부득 밀고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달리 도리가 없는 일, 깨끗이 한판 싸움으로 운명을 하늘에 맡길 수밖에.

만약 이 산채에 와서 합류하고자 하는 사람, 혹은 멀리서라도 이 고립된 군대를 지원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 서로의 전술과 전략의 차이에 대해서 지금은 깊이 다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저 대동(大同)의 정신에 따라 서로 상의하며 함께 길을 찾아 나가면 되는 일이라고 믿는 바입니다. (大正 4年 9月, 제2권 제1호.)

이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속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그것을 의식한 목소리였다.

이 잡지는 맑스주의를 사상적으로 선전하는 데에 많은 기여를 했다. 1919년(대정 8년)에는 주로 맑스주의를 이론적으로 연구하고 선전하는 잡지인 ≪사회주의 연구(社會主義硏究)≫가 창간되었다. 러시아 10월 혁명을 당시의 사회주의적 청년 인텔리겐챠에게 가르친 것은 이 두 잡지였다. 게다가, 주로 야마카와 히토시가 집필한 논문들이었다.

1920년대에 일본에서는 맑스주의의 운동과 연구가 급속하게 발달했다. 잡지 ≪신사회≫와 ≪사회주의 연구≫는 맑스-레닌주의의 이론적 연구와 함께,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사회의 실상과 발전에 관해서 일본의 노동자계급을 크게 계몽했다. 일본의 노동자계급과 인텔리겐챠는 이렇게 해서 차츰 사회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혁명에 관한 확신을 심화해갔다. 야마카와 히토시의 무산계급운동의 방향 전환(無産階級運動の方向轉換)[≪前衛≫ 1922년 7・8월 합병호]이라는 논문은 이러한 발전과정에서 획기적인 의미가 있었다. 맑스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자들에 대해서 노동자 대중과 결합할 것을 제창(提唱)했던 것이다. 일본 공산당도 이 무렵에 결성되었다.

1921년(대정 10년)에는 야마카와 히토시에 의해서 일본 최초의 ≪레닌전(伝)≫이 공간(公刊)되었다. 그 속에는 뜨로쯔끼의 전기(傳記)도 포함되어 있지만, 주로 레닌의 이론과 사람됨에 관해서 상세히 전했다. 이 무렵부터 우리는 러시아 공산당의 역사와 이론과 실천에 관한 저서나 논문에 접하는 일이 많아지고, 맑스주의의 정통 후계자 레닌에게서 배울 기회도 갖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완전한 패전으로 끝나면서, 독일어로 번역된 레닌 등등의 저서・논문의 수입이 증대했다. 독일의 인플레이션 때문에 독일 책을 싼값에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인들 속의 독일어 보급도는 그 무렵에 높아졌다. 학생들이나 젊은 학구파는 굶주린 사람들처럼 맑스・레닌의 이론을 향해 돌진했다.

러시아 공산당의 저서이나 팜플렛만이 아니라 Die Kommunistische InternationaleRussische Korrespondenz 등도 들어왔다. 독일어판 맑스-레닌주의 문헌들이 대하(大河)처럼 일본에 흘러들어 왔다.

나 자신에 관해서 말해도 좋다면, 나는 1922년 말 일본을 출발, 베를린으로 유학을 갔다. 이 무렵의 독일은 아직도 직접적으로 혁명적 정세에 있었다고 볼 수 있었다. 인플레이션은 1923년에 가장 격렬했고, 사회적 혼란은 심각했다. 나는 그 속에서 맑스-레닌주의를 공부하겠다고 생각했다.

또, 그 무렵 베를린에 온 가타야마 센(片山潜, [1859-1933])과 만날 기회가 있어 쏘비에트 사회주의의 현실에 관하여 많은 것을 게걸스럽게 학습했다.

이러한 사회상태 속에서 나는 맑스-엥엘스와 레닌을 읽었다. 맑스의 이론에 관해서 자기를 심화할 수 있었다. 1924년 레닌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독일 공산당 주최의 레닌 추도 대집회에 참가했다. 누군가에게서 소개받은 기억은 없지만, 제멋대로 들어간 것은 아닐 것이다.

1925년 5월,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 즈음의 일본은 대지진(1923. 9. 1.)의 피해로부터 회복되어, 맑스-레닌주의 정치운동은 분열되어 있긴 했지만, 노동조합・농민조합・무산정당의 운동이 다시 활발해지고 있었다. 부르주아지의 대변자들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이론투쟁도 대대적으로 수행되어 맑스주의는 일본의 논단(論壇)을 압도하는 기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문단에서도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여러 작품을 성대하게 내놓고 있었다. 쏘비에트 러시아의 역사학・경제학・정치학 문헌들이나 쏘비에트 문학작품들의 번역도 이루어졌다. 1926년 봄에는 처음으로 ≪레닌 저작집≫이 발간되어 레닌의 주요 저작들을 일본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일본에서 레닌 및 레닌주의 문헌이 풍부해져, 일본의 맑스-레닌주의의 이론적 수준도 높아졌다.

나는 나중에 ≪레닌전(伝)≫(1932년(소화 7년) 2월)을 공간했다. 이 책에는 문헌목록이 붙어 있는데, 그것은 이 책을 쓰기 위해서 직접간적으로 이용했던 것들이다. 주로 독일어로 된 문헌들인데, 그것들은 1923-25년 독일 유학 중에, 그리고 그 이후에 내가 모은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아마 레닌의 생애와 그 사업에 관해서 당시 우리 일본에서 독일어 문헌으로서는 모을 수 있는 최대한도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나는 레닌의 생애와 그 이론에 관한 저서들을 정리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때까지 그것을 하지 못했던 것은 러시아 문헌들을 읽을 만큼의 러시아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는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에 비하면, 동독에서 간행된 레닌 및 그 이론에 관한 자료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아졌다. ≪레닌 전집≫도 독일어판과 일본어판이 있다. 적어도 레닌의 이론에 관해서는 러시아 문헌이 없더라도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일본에서 맑스-레닌주의 연구를 러시아어 없이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님을 의미한다. 물론, 직접 러시아어 문헌에 의해서 연구하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다. 일본에서의 러시아어의 이해(理解)도 이제는 그 정도가 현저하게 높아져 있다.

 

 

2. 10월 혁명의 일반성

 

레닌은 맑스주의를 독일의 고전철학과 영국의 고전경제학, 프랑스의 사회주의의 정통 계승자라고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레닌주의는 맑스주의의 정통 계승자이다. 우리 일본에서는 처음에 레닌주의를 맑스주의의 러시아적 특수형태라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잘못된 견해가 있다. 러시아에서의 혁명운동과 사회주의 혁명의 형태는 물론 러시아 사회의 특수한 역사발전이라고 하는 객관적 조건에 따라서 결정되어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은 어떠한 나라에서나 동일한 형태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는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은 러시아적 특수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그 러시아 혁명은 이 특수형태 속에 사회주의 혁명의 일반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의 세계사적 의의를 관철하고 있다. 러시아 혁명이 만일 단지 러시아적일 뿐이었다면, 10월 혁명의 세계사적 의의도 또한 부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맑스는 1872년, 제1 인터내셔날 헤이그 대회 후 암스테르담 지부 주최의 공개 집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노동자는 새로운 노동조직을 수립하기 위해서 어느 날인가는 정치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노동자는 낡은 제도들을 유지하고 있는 낡은 정치를 뒤엎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그가, 그것을 소홀히 하고 경멸했던 옛 기독교도처럼, 지상의 천국을 잃으려 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경로가 어디에서나 동일하다고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나라들의 제도와 풍습, 전통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리고 내가 만일 당신들의 나라를 좀 더 잘 알았다면, 아마 홀란드 역시 추가했겠지만, 아무튼 미국이나 영국과 같이 노동자들이 평화적인 경로로 자신들의 목표에 도달할 수도 있는 나라들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모든 나라들에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 (改造社 판 ≪맑스-엥엘스 전집≫ 제7권의 3, p. 526. 맑스의 이 연설은 ≪Volks Staat≫[인민국가] 1872년 10월 2일 호에 의한 것이다.)2)

사회주의 혁명의 형태가 국가에 따라 동일할 수 없다는 사상을 엥엘스도 또한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 초안을 비판한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민의 대의기관이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있는 나라들, 인민 대다수의 지지를 획득하자마자 원하는 바를 합헌적으로 할 수 있는 나라들에서는 낡은 사회가 새로운 사회로 평화적으로 성장이행해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프랑스와 미국 같은 민주주의 공화국들이나, 목전에 임박한 왕조의 매수가 연일 신문에서 논해지고 있고 이 왕조는 인민의 의지에 무력한 영국과 같은 군주국이 그렇다. (新潮社 판 ≪맑스-엥엘스 선집≫ 제9권, p. 163.; [MEW, Bd. 22, S. 234.;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6권, p. 347.])

맑스와 엥엘스는 사회주의 혁명의 형태를 일정하여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무장봉기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레닌은 10월 혁명에 관해서도 모든 권력이행이 무장봉기와 내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당시 국가권력은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 자유의지에 따른 상호 간의 합의에 기초하여 임시정부와 쏘비에트는 국가권력을 분담하고 있었다. 쏘비에트는 자유로운, 즉 외부로부터의 어떤 권력에도 예속되지 않은, 무장한 노동자와 병사 대중의 대표단들이었다. 무기들이 인민의 수중에 있었다는 것, 인민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권력이 없었다는 것, 바로 거기에 사태의 본질이 있었다. 전체 혁명에 평화로운 전진발전의 길을 열고 보증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모든 권력을 쏘비에트로라는 표어는 이 평화로운 발전의 길에서의 다음의 제1보, 즉각 내디딜 수 있던 일보의 표어였다. 그것은, 2월 27일부터 7월 4일까지 가능했고 또한 당연히 아주 바람직스러웠던, 혁명의 평화적 발전의 표어였지만, 이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레닌 전집≫ 제21권, pp. 36-37, 독일어 판.; [1981년 현재의 독일어판 ≪레닌 전집(Lenin Werke)≫ 제25권, SS. 181-182.])

1917년 2월 27일은 러시아에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날이다. 1917년 7월 4일에는 께렌쓰끼 정부가 레닌그라드의 노동자 시위운동을 깨부수고, 노동자・병사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부르주아 국가권력이 동요상태에 있고, 부르주아지의 임시정부와 쏘비에트의 자유의지에 기초하여 양분되어 있었다. 쏘비에트는 무장한 노동자들과 병사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무기는 노동하는 인민의 수중에 있어서 외부로부터의 권력이 인민을 억압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는 러시아의 사회주의로의 전진에는 평화로운 발전의 길이 있었고, 이를 보증하는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무력을 가진 인민의 쏘비에트였으며, 거기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러시아의 혁명과정 속에서 그러한 시기를 보았다. 일정한 조건이 존재하는 곳, 결국 노동자계급과 농민계급에 권력이 집중하는 곳에서는 국가권력의 평화적 이행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조건이 없어짐과 동시에 이러한 권력이행의 가능성도 없어진다. 물론 레닌은 당시 러시아의 객관적인 조건과 주체적인 조건 하에서 이러한 전망을 한 것이어서, 어느 나라의 사회주의 혁명에나 이러한 조건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조건이 더 광범하게, 사회주의 혁명을 무장봉기와 내란 없이 달성하도록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역사적 조건의 차이에 따라서 발생한다.

그러나 맑스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노동자계급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사회에 도달한다. 사회주의 사회를 실현시키지 않고는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적대적인 모순의 발전이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 이를 입증했기 때문에 맑스주의는 과학적 사회주의인 것이다. 또한 이 적대적 모순은 그것이 적대적 모순이기 때문에 계급투쟁이라고 하는 형태로 전개되지 않고는 발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투쟁의 지양으로서밖에는, 즉 사회주의 혁명으로서밖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주의 혁명은 계급투쟁의 정점(頂點)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에 관해서 말하자면, 근대 사회의 계급들의 존재를 발견한 공로도, 그 계급들 사이의 투쟁을 발견한 공로도 나에게 속하지 않는다. 나보다 오래 전부터 부르주아 역사 서술가들은 계급투쟁의 이 역사적 발전을 서술해왔고,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이 계급들의 경제적 분석을 서술해왔다. 내가 새롭게 한 것은, 1. 계급들의 존재는 생산의 일정한 역사적 발전단계와 결부되어 있을 뿐이라는 것, 2.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로 귀결된다는 것, 3. 이 독재 자체는 모든 계급을 폐지하고 계급 없는 사회로 가는 이행기를 형성할 뿐이라는 것을 입증한 것이었다. (칼 맑스, 맑스가 뉴욕의 요제프 바이데마이어에게(1852. 3. 5.), 新潮社 판 ≪맑스-엥엘스 선집≫ 제4권, p. 40.; [MEW, Bd. 28. SS. 507-508.;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2권, p. 497.])

이것은 맑스의 유명한 말이다. 현대의 계급 및 계급투쟁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결부되어 발전하고, 이 계급투쟁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로 필연적으로 발전한다. 사회주의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의 실현이다. 그리고 이 계급독재는 계급대립이 없는 사회로 발전한다. 사회주의 혁명의 이러한 일반성은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사회의 실현과 발전에 그대로 관철되고 있다.

역사적 발전의 이 일반론을 아는 것만으로는 사회주의 혁명가가 아니다. 일반성은 반드시 특수성을 통해서 실현되고, 필연성은 반드시 우연성을 통해서 관철된다. 러시아 사회에 특수한 역사성은 일반적・역사적 발전이 현실화되는 형태이다. 또한 러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힘은 러시아의 역사적 사정과 국제적 관계들 속에서 관철되었다. 혁명의 필연성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을 은폐하는 복잡한 사정들은 우연적인 요소이다.

우리의 역사적 필연성이나 사회주의 혁명의 일반성에 대한 이해는 사회주의 혁명가에게 있어서 불가결한 것이다. 이것만으로는 우리를 사회주의 혁명가이게 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사회주의 혁명가는 역사의 필연성과 일반성을 이해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이를 둘러싼 현실의, 그때 그곳의 역사적 형상들을 분석하고, 거기에서 역사적・특수한 법칙들을 발견하여 노동자계급을 이것에 혁명의 주체로서 일으켜 세우는, 요컨대, 이것에 적응시키는 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

맑스・엥엘스의 세계관에 관한 레닌의 이해는 극히 높아서, 오늘날까지 그를 뛰어넘은 사람은 아직 나타나고 있지 않다. 게다가, 그가 러시아의 역사적 특수성을 이해하고,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과정에서 나타난 수많은 우연적인 (혁명의 필연적인 역사적 흐름에서 보면, 우연적인) 장애들을 해결・극복해가는 방도를 터득해간 모습은 경탄할 만하다. 천재라고 할 수밖에 없다.

평화적인 권력 이행의 시기가 흘러갔음을 간파하고, 1917년 11월 7일([구력(舊曆)] 1917년 10월 25일)에는 노동자・농민・병사의 무장봉기를 지령한 두뇌의 번뜩임, 브레쓰뜨-리또프스크 강화(講和)에서 보여준 결단력, 그것은 보통사람의 사고력과 의지력을 절(絶)하고 있다. 맑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엥엘스는 조르게[Friedrich Adolph Sorge(1828-1906)]에게 보낸 편지[1883. 3. 15.] 속에서, 아무튼, 인류는 머리 하나만큼, 그리고 그것도 오늘날 인류가 가진 가장 중요한 머리 하나만큼 낮아졌다[MEW, Bd. 35, S. 460.]고 말하고 있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이 날에 현대의 인류는 그가 가진 가장 중요한 머리 하나만큼 낮아졌음을 느끼고 있다. 더욱이 이 머리는 아직 보충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를 한탄하고 있어 봐도 소용이 없다. 각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아무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용기를 가지고 그 임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맑스・엥엘스・레닌의 세계관을 올바로 이해할 뿐만이 아니라, 이 천재들이 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세계와 일본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들을 분석하고, 그에 기초하여 일본의 사회주의 혁명의 실현을 기약하는 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작업이다. 우리의 평범한 능력을 가지고서라도 그것을 할 수밖에 없다. 천재의 출현을 기다릴 만큼 어리석어서는 안 된다.

레닌의 러시아 혁명 지도는 우리에게 무한히 풍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을 그대로 베끼라는 것이 아니다. 레닌이 분석하고, 주체적으로 활용했던, 러시아 혁명에 숨어 있는 역사적 법칙을 일본의 객관적・주체적 조건에 활용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일본에 평화로운 권력 이행의 조건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늘날의 국제 정세가 전쟁을 저지하고 평화공존 투쟁이 더욱더 유리하게 전개될 현실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 우리나라[일본]처럼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근로대중의 결집된 힘에 의해서 일정한 민주주의적 조건을 유지할 수 있는 곳에서는,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이 노동자계급의 조직을 주도적인 힘으로 하여 일반 근로대중의 결집에 성공하고 있는 경우에는, 국가권력의 평화적 이행을 실현할 역사적 조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조건이 있는 곳에서는 국가권력의 평화적 이행은 내적 법칙성을 가지고 있고, 역사적 필연으로 되어 있다.

주어진 객관적 조건의 필연성을 주체적인 혁명 행동으로, 평화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내란으로가 아니라 평화적으로 전화시킬 수 있다. 사회주의 혁명에 만국 공통의 일정부동(一定不動)한 전형(典型)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객관적 조건이 무력혁명인가, 조직적 행동에 의한 혁명인가를 결정한다. 무장봉기에 의할 것인가, 조직력을 토대로 할 것인가는 우리의 희망이나 자의(恣意)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권력의 평화적 이행을 단순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하는 이론으로부터는 상대방이 취하는 태도 나름이라는 결론밖에는 없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이 사회주의 운동의 어디에 주력을 기울여야 할 것인가를 명백히 할 수 없다. 무력의 결집과 일상적인 무력훈련 없는 무장봉기가 넌쎈쓰인 것처럼, 노동자계급을 중핵으로 한 근로계급의 일정한 조직력의 성장을 예상하지 않는 국가권력의 평화적 이행은 있을 수 없다. 혁명행동의 필연이란, 수수방관하고 있어도 사회주의 사회가 온다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발전의 내적 법칙성을 주체적 행동으로 전화하는 것이다. (社會主義協會 ≪勝利の展望≫3)에 의함.)

여기에서 우리는 평화적 권력 이행이라는 필연성의 실현을 사회주의 혁명의 일본적 형태라고 생각하고 있다. 일본 자본주의에 본질적인 계급투쟁의 정점이라고 생각한다. 투쟁이기 때문에 폭력이 없을 수는 없다. 그 힘의 토대는 주로 조직된 노동자계급을 중핵으로 농민계급, 기타 근로자계급이다. 그 조직력의 발휘이지 무장봉기에 의한 내란이 아니라는 차이가 있다. 이는 맑스・엥엘스・레닌에게서 배운 것이지만, 그들의 말을 공식적으로 그대로 베낀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 혁명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이 혁명의 형태는 그 나라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서 다르다.

사회주의 혁명의 이러한 형태변화의 원인은 10월 혁명에 의해서 국제적인 제국주의 체제가 돌파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해서 파씨즘이 결정적으로 분쇄된 결과 생긴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성립이다. 자본주의 속에서 세계전쟁을 불가능하게 할 수 있는 체제와 아직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하고 있지 않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노동자계급의 대두, 예전의 식민지・반식민지에서의 민족독립의 성공, 혹은 독립운동의 강화이다.

패전에 의한 일본 파씨즘의 붕괴와 민주주의적 헌법의 성립은 일본에서 평화적 권력 이행으로의 길을 열었다.

 

 

3. 피억압 민족의 해방과 자유

 

맑스・엥엘스 사후 레닌은 어떤 맑스주의자보다도 민족문제의 해결방법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러시아 혁명과 함께 러시아에서는 현실적으로 이것을 해결했다. 러시아는 100개 이상의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10월 혁명 후 이를 미동(微動)도 하지 않는 통일국가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지도(指導)는 혁명 전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이것은 민족문제에 대한 레닌의 올바른 이해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국주의의 특수한 세계사적 문제는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한 식민지 및 반식민지의 착취와 억압의 강화와, 식민지 및 반식민지 민족의4) 이에 대한 독립과 자유의 투쟁이다. 아시아・아프리카 및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민족문제는 진보적인 당파들・사상가들 사이에서 중대한 모습을 띠기에 이르렀다.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자의 지도자들인 칼 레너(Karl Renner, [1870-1950])나 오토 바우어(Otto Bauer, [1881-1938])의 민족문제에 관한 저서(≪민족문제와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1911년)가 문제로 되었다. 칼 카우츠키(Karl Kautsky, [1854-1938])의 ≪민족성과 국제성≫(1908년)은, 이론적으로 반드시 잘못되어 있지는 않지만, 복잡한 세계적 민족문제 해결의 지침으로서는 불충한 것이었다. 쓰딸린의 ≪맑스주의와 민족문제≫(1913년)는, 레닌의 협력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라고 하는데, 민족문제 해결의 올바른 지침을 제시하였다.

레닌은 민족문제에 관해서 대단히 많은 논문을 쓰고 있다. 러시아나 폴란드 등등에서의 특수한 민족문제의 해결만이 아니라, 이 문제 해결의 일반적으로 올바른 지침들이다. 레닌은 맑스・엥엘스의 민족문제에 관한 논문들을 진지하게 연구했다.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은 스스로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맑스의 말은 민족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자의 태도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레닌의 민족문제 해결에 대한 태도는 맑스의 이 말을 종횡으로 구사하는 그의 능력에 의해서 자유롭게 응용・적용되고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카우츠키에게 보낸 편지(1882년 9월 12일자) 속에서 엥엘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견해로는 본래의 식민지들, 즉 유럽의 주민들에 의해 점령된 나라들인 캐나다, 남아프리카, 호주는 모두 독립할 것이다. 그에 반해서, 지배받고 있을 뿐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나라들인 인도, 알제리, 그리고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스페인의 속령들은 우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넘겨져 가능한 한 신속하게 독립을 향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과정이 어떻게 발전할지는 말하기 어렵다. 인도에서는 아마 혁명이 일어날 것이고, 거의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해방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떤 식민지 전쟁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해방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온갖 파괴가 없이는 진행되지 않겠지만, 그러나 그러한 일은 어떤 혁명에서나 불가피하다. 똑같은 일이, 예컨대, 알제리나 이집트 같은 다른 곳에서도 역시 일어날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은 우리에게는 분명 최선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본국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우선 유럽이 재조직되고 북아메리카가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거대한 힘과 실례를 제공하기 때문에 반(半)문명국들은 모두 저절로 그것을 따르게 될 것이다. 경제적 필요만으로도 그렇다. 그러나 이들 국가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적 조직으로 될 때까지 어떠한 사회적・정치적 단계들을 거쳐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오늘 우리는 단지 상당히 무익한 가설만을 세울 수 있을 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단지 하나만은 확실하다. 즉,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 자신의 승리를 파괴하지 않고는, 어떤 종류의 축복도 다른 민족에게 강제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물론 다양한 종류의 방어전쟁들을 결코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新潮社 판 ≪맑스-엥엘스 선집≫ 제4권, p. 179.; [MEW, Bd. 35. SS. 357-358.;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pp. 526-527. 다만, ≪… 저작 선집≫의 번역은 반대의 뜻으로까지 오역된 부분이 있다.])

그 후의 역사 발전은, 개개의 사실에서는, 여기에서 엥엘스가 말하고 있는 바와는 다르다. 그러나 또한, 오늘날 사회주의 국가, 특히 쏘비에트 러시아가 취하고 있는 민족정책은 엥엘스가 말하고 있는 바와 전혀 다르지 않다. 본래의 식민지들, 즉 유럽의 주민들에 의해 점령된 나라들…은 모두 독립할 것이다. 그에 반해서, 지배받고 있을 뿐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나라들인 인도, 알제리, 그리고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스페인의 속령들은 우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넘겨져 가능한 한 신속하게 독립을 향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 과정이 어떠한 형태로 발전하는가는, 지금 이것을 말하기는 어렵다. 엥엘스는 보통의 언어로, 지금 지구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식민지 독립과정을 이렇게 적확(的確)하게 말하고 있다. 나아가, 인도는 영국 자본의 지배에 대하여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을 해방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결코 식민지 전쟁에 종사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해방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민족자결권은 어느 민족이나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엥엘스는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우선 사회주의 국가 체제가 태어날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제국주의 시대의 정치・경제의 중대한 변화를 알 수 없었던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러나 선진 사회주의 국가 체제는 아마 엥엘스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완성된 사회주의 국가 체제는, … 그것은 거대한 힘과 실례를 제공하기 때문에 반(半)문명국들은 모두 저절로 그것을 따르고 있다. 그동안에 많은 모순과 이반(離反)은 있지만, 역사의 대국적인 흐름은 이를 극복하며 전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엥엘스는 … 단지 하나만은 확실하다. 즉,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 자신의 승리를 파괴하지 않고는, 어떤 종류의 축복도 다른 민족에게 강제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맑스와 엥엘스가, 사회주의 혁명을 무력 또는 기타 강제적인 방법으로 다른 민족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제2차 대전] 종전 후, 쏘련군이 일본에 사회주의 혁명을 강요해올 것을 염려하여 군비(軍備)의 필요성을 말한 사람들에게 나는 엥엘스의 이 말을 원용하여 강하게 반대했다.

레닌은, 엥엘스의 이 편지의 진정한 의미를 참으로 잘 이해하고 있었다. 레닌은 분리의 자유를 수반한 민족독립의 자결권에 관해서. 사회주의 발전도상에서의 그 의의를 자주 명백히 하였다. 다른 민족을 압박하는 민족에 소속된 노동자계급이, 그 지배계급으로부터 다른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달성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해방을 성취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레닌은 각 민족의 국제적 연대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달성해야 할 의무임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독립한 각 민족이 자유로운 연방을 형성하는 것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자유로운 연방관계는 독립한, 다른 어떠한 민족에게도 지배받지 않는 민족국가로서 비로소 형성할 수 있다.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한 프롤레타리아트는 결코 식민지 전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로워질 수밖에 없다.

레닌은 맑스주의의 희화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에 관하여(1916년) 속에서 민족자결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 정부에게 식민지로부터 퇴거할 것을 요구할 때, ―즉, 선동적 구호가 아니라 정확한 정치적 표현으로 식민지에 진정한 자결권인 완전한 분리의 자유를 줄 것을 정부에 요구할 때―, 그리고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우리 자신이 무조건적으로 이 권리를 실현하고 이 자유를 줄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결코, 분리를 권고하려 하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민족들의 민주주의적 접근과 융합을 용이하게 하고 촉진하려 하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정부에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고, 우리 자신이 정부를 구성하자마자 그것을 수행하려는 것이다. 몽골인・페르시아인・인도인・이집트인과의 접근 및 융합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며,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우리의 이익이라고 생각하는바,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유럽의 사회주의는 안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후진적이며 억압받고 있는 이들 인민에게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뛰어난 표현을 쓰자면― 사심이 없는 문화적 원조를 제공하기 위해서, 즉 그들이 노동을 경감하기 위한 기계의 사용으로, 민주주의로, 그리고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우리가 몽골인, 페르시아인, 이집트인, 그리고 예외 없이 모든 억압받는,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 민족들을 위해서 분리의 자유를 요구할 때, 그것은, 결코 우리가 그들의 분리에 찬성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강제적인 접근과 융합에 반대하여 자유롭고 자발적인 접근과 융합에 찬성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 때문이다! (≪レーニン全集≫ 제23권, pp. 68-69.; [Lenin Werke, Bd. 23, SS. 61-62.])

민족자결과 민족들의 자유로운 결합의 변증법이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그것은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자는 스스로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하는, 맑스주의의 민족문제 해결의 열쇠를 보여주고 있다. 레닌과 그의 지도하에서 이루어진 민족정책은 이 이론을 쏘비에트 러시아에서 구체적으로 훌륭하게 실현하여 보여주었다. (다음 호에 계속)  [노/사/과/연]

 
 


* 이 글은 사키사카 이쯔로(向坂逸郞)의 “十月革命の世界史的意義”(≪唯物史觀≫ 제5호, 1967년)를, 向坂逸郞 ≪資本論と現代≫(法政大學出版局 , 1970년)에서 번역한 것이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역자의 간단한 보충 등은 각괄호([ ]) 속에 넣었으며, 역자의 주는 *표를 붙여 각주로 처리하였다. (인터넷에는 미주로 표시하였다.) 필자 사키사카 이쯔로(向坂逸郞, 1897-1985)는 노농파 맑스주의자로서 일본 사회당 좌파의 핵심적인 이론적 지도자였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오류랄까, 동의하기 어려운 점들도 없지 않으나, 10월 혁명 100주년을 맞아 참고 자료의 하나로 번역한다. 2회에 걸쳐 연재한다.

 

 


 

1) 고토쿠사건(幸德事件): 1910-11년(명치 43-44년), 무정부주의자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 1871-1911. 1. 24.) 등이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의 암살을 계획・기도했다고 메이지 정부가 날조, 고토쿠를 필두로 한 전국의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을 체포, 기소, 사형판결하여 12명을 처형한 사건. ‘대역사건(大逆事件)’이라고도 한다.

 

2)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모든 나라들에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는 ≪맑스-엥엘스 저작집(Marx Engels Werke)≫에는 “이것이 진실이라면, 대륙의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우리 혁명의 지렛대는 폭력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우리는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MEW, Bd. 18, S. 160.; 박기순 역, “헤이그 대회에 관한 연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박종철출판사, p. 160.)로 되어 있다.

 

3) 社會主義協會 ≪勝利の展望≫: 사회주의협회는 일본 사회당의 좌파가 1950년대에 ‘노농파 맑스주의’를 내걸고 조직한 연구집단으로서, ≪勝利の展望≫은 1967년 사회주의협회 제8차 대회에서 채택된, 자신들의 기본이념을 천명한 문건. 일본에서의 이른바 “국가권력의 평화적 이행”의 가능성 혹은 심지어 그 필연성 여부의 문제는 이후 사회주의협회 외부에서는 물론 그 내부에서조차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4) “식민지 및 반식민지 인민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제국주의의 식민지 및 반식민지 지배는 식민지 및 반식민지 토착 지배계급의 제국주의와의 동맹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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