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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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찬 | 연구위원장

 

 

 

제4장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사조에 대한 비판

 

13. 이진경

 

이진경은 1980년대 맑스-레닌주의 운동을 했으나 쏘련 붕괴 후 그 운동을 청산하고 한국 사회의 운동에 청산주의를 확대시키는 역할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알튀세르 등을 도입하여 맑스-레닌주의에서 이탈하고 그러고는 푸코, 들뢰즈 등의 프랑스 철학을 보급해 왔으며 이들의 신좌파적 노선에 따라 계급투쟁 노선을 해체하는 길을 걸어왔다. 이진경은 쏘련의 붕괴라는 사태에 대해 과학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에 대한 고찰, 노동가치론에 대한 해체, 철학에서 물질개념이 사라진 유물론 등 맑스주의의 골간에 해당하는 원칙들을 해체해 왔다. 그는 이를 외부성에 의한 사유, 외부성에 의한 정치로서 코뮨주의라는 개념으로 합리화하고 있다. 이러한 이진경의 역정과 이론은 한국 사회에서 지금 존재하는 청산주의를 대표하고 요약하고 있다. 그러면 이진경이 밟아 온 길을 따라 가면서 그의 청산주의, 맑스주의의 원칙의 왜곡과 해체의 논리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진경은 쏘련 붕괴라는 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것은 이해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붕괴로 끝난 사회주의의 역사,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자본주의로 회귀하는 것으로 귀착된 사회주의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맑스주의자가 있을 수 있을까? 국가자본주의관료사회주의처럼 비-사회주의를 뜻하는 개념을 끌어들이지 않고, 다시 말해 사회주의를 사회주의로서 정의하고서도, 그 사회주의의 붕괴와 해체, 자본주의적 회귀를 이해할 수 있는 맑스주의자가 있을 수 있을까?1) 이와 같이 이진경은 쏘련의 붕괴라는 사태에 대해 그것을 맑스주의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그는 이에 대해 쏘련의 역사, 사회주의 사회의 내적 발전의 논리와 모순을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에 대한 재검토, 나아가 근대철학과 근대성에 대한 고찰로 나아간다. 이후 이진경의 전체적인 궤적은 쏘련의 역사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빠진 채로 맑스주의 자체의 모순, 한계 등을 규명하는 것으로 나아가는데 이렇게 역사에 기초하지 않은 관념적인 접근이 이진경으로 하여금 되돌릴 수 없는 청산주의의 길로 나아가게 했다.

이진경이 맑스주의 자체에 대한 재검토, 근대성에 대한 고찰을 통해 끄집어낸 것은 소위 주체생산양식이라는 것이다. 이진경은 쏘련 붕괴에서 드러난 것으로서, 인민들이 사회주의적이지 않았으며 사회주의(공산주의) 생산양식은 존재했지만 그에 맞는 사회주의 인민이 없었다고 보면서 이로부터 주체를 생산하는 문제를 검토해야 하며 그것은 주체생산양식이라는 개념으로 제기된다고 한다. 다소 길지만 이진경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결국 사회주의적 인민이든 자본주의적 인민이든 주체의 문제를 포착해야 하는 지대는 의식이나 생산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영역인 셈인데, 이를 우리는 프로이트를 따라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시 말해 사회적 주체에는 생산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요소가 있고, 그 요소가 의식에 비하면 차라리 일차적이고 결정적이며, 그것은 바로 무의식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맑스주의자가 맑스주의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역설에, 납득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를 제공한다. 즉 기존의 맑스주의에서는 주체 내지 인민을 무의식의 차원에서 다룰 수 있는 개념이 없었던 것이고, 무의식의 형성과 연관해 주체와 역사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이론이 없었던 것이다.2) 쏘련 해체 당시에 인민들이 사회주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은 맞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쏘련이 해체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는 공산당의 간부들이 쏘련 해체를 주도했으며 이들이 해체 후의 부르주아 사회의 지배층이 되었다는 것도 맞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이진경은 쏘련의 역사가 어디서부터 왜곡되기 시작했는지, 그러한 왜곡의 내적 논리는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에 의해 규정되는 주체라는 매우 안이하고 관념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객관과 분리된 채로 주체의 문제를 해결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린다는 것인가? 이렇게 엉터리 같은 접근을 이론적으로 보강하기 위해 이진경은 역사유물론을 왜곡하는데 역사유물론의 이중적 성격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맑스가 개척한 역사유물론의 대상이 이중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잘 알려져 있듯이 물질적 생산양식으로서 물질적 생산의 배치를 통해 파악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등이 이러한 배치를 통해 구성된 개념이란 것은 익히 잘 아는 바다. 다른 하나는 생활양식 혹은 활동양식으로서, 욕망의 배치를 통해 파악되는 것이다. 이는 양식화되고 일상화된 반복적 실천을 통해 개개인을 특정한 형태의 주체로 생산해 낸다는 점에서, 이를 우리는 주체생산양식이라고 부를 것이다.3) 이와 같이 이진경은 주체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을 끌어내기 위해 기존의 역사유물론에 대한 왜곡을 서슴지 않는다. 역사적 유물론의 이중성이라는 것은 물질적 생산양식과 구별되는 생활양식을 주체생산양식이라고 이진경이 자의적으로 파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 사회에서 생활양식은 물질적 생산양식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양식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은 맑스주의의 ABC이다. 노동자의 생활양식은 자본가에게 고용되는 것을 통해 임금을 받아 생활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생산양식과 생활양식은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진경이 생활양식으로부터 정식화하는 주체생산양식이라는 것은 이러한 현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소위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주체를 규정하기 위한 것이다. 주체의 생산을 개념화하기 위해서는 인간 내지 주체의 활동 내지 물질적 생활 자체의 생산을 생산양식으로 환원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하며, 결국은 무의식화된 활동방식으로서 생활양식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4) 이와 같이 무의식을 통해 규정되는 주체생산양식이라는 것은 주체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과는 거리가 멀다. 주체가 프로이트 혹은 니체적인 무의식 개념을 통해 규정된다는 것은 그가 현실로부터 탈출하여 몽상의 세계, 비과학의 세계로 날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일 따름이다. 주체는 과연 어떻게 생산되는가? 맑스가 말한 생활양식 혹은 광범위한 인간변혁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맑스는 혁명이 필요한 이유로 그것을 통해 객관세계의 변혁이 가능하다는 점뿐만 아니라 혁명을 통할 때만 광범위한 대중이 부르주아 사회에서 불가피한 모든 오점, 찌든 때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사회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바로 이 점, 객관세계의 변혁과 구별되어 주체의 변혁을 그 자체로 고찰하는 맑스의 접근이 이진경으로 하여금 주체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을 제출하게 했지만 그러나 이진경은 맑스를 피상적으로 이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는 혁명을 통할 때만, 즉, 객관세계를 변혁할 때만 주체가 변혁된다고 보았고 혁명을 통한 주체의 변혁을 광범위한 인간변혁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했다. 그러나 이진경은 이러한 접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에 의해 규정되는 주체의 생산이라는 관념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객관과 주체의 관계에 대해 유물론적인 접근을 해야만 한다. 객관세계의 변혁을 통하지 않는 주체의 변혁, 주체의 생산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아가 프로이트적, 니체적인 몽매한 무의식 개념을 핵으로 하는 주체생산양식이라는 것은 객관과 주체에 대한 올바른 접근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주체의 생산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진경의 주체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은 쏘련 붕괴라는 사태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 전혀 아니다. 또한 주체는 객관과 떨어져서는 결코 생산되지 않으며 객관세계를 변혁할 때만 비로소 주체도 변혁되고 생산된다. 객관세계의 변혁이 빠진 채로 아무리 무의식을 강조해 보았자 주체는 퇴보하고 타락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 유물론의 이중성이라는 개념은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을 해체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물질적 생산양식과 무의식의 주체생산양식으로 역사적 유물론을 이분화시키는 것은 물질적 생산양식에 의해 규정되는 주체, 그리고 그 생산양식을 변혁하는 주체라는 역사적 유물론의 의미를 혼란시키는 것이다. 맑스는 물질적 생산양식,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계급투쟁이라는 개념을 통해 객관세계와 주체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해명했고 이를 통해 맑스 이전의 역사에 대한 온갖 비과학적 관념을 청산하고 역사를 과학의 지반 위에 올려놓았다. 쏘련 붕괴라는 사태가 이러한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의 과학성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맑스의 과학적인 역사적 유물론은 이진경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쏘련 붕괴라는 사태, 쏘련의 역사를 해명하는 열쇠가 된다.

그러면 이진경이 왜곡시키는 또 하나의 맑스주의적 원칙, 이진경이 물어뜯으면서 해체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노동가치론, 잉여가치의 개념에 대해 접근해 보자. 이진경이 기계도 잉여가치를 생산한다고 주장하는 점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진경은 그러한 단순한 일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원천으로서 노동이라는 개념, 즉 노동가치설 자체를 해체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엉터리 같은 추론, 특히 변증법의 결여에 기초한다.

이진경은 맑스의 핵심적 테제를 공격하면서도 맑스주의의 포장을 걸치려 하고 있다. 이진경은 맑스의 노동은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 맑스가 이 주장을 통해 노동가치론을 부정했다고 왜곡하여 주장한다. 이진경은 노동이 노동력의 사용가치라는 맑스의 올바른 주장에서 출발하지만 사용가치란 질에 속하는 것인 반면, 가치는 양에 속하는 것이고 따라서 사용가치는 가치론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5)는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 가치가 양적인 측면이라면 사용가치는 질적인 측면이다. 그런데 질적인 측면은 양적인 측면과 독립적이다. 즉 노동이 사용가치이고 질적 성분인 한, 그것은 가치라는 양적 성분의 변화와 무관하다. 심지어 가치는 노동의 질과도 무관하다6)고 주장한다. 노동은 노동력의 사용가치로서 질이고 가치는 양인데 양과 질은 독립적이므로 노동은 가치의 실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이진경의 주장의 요지이다. 여기서는 많은 개념들이 혼동되고 있는데 하나하나 반박해 보자. 기존의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에서 가치의 실체는 응고된 노동이라고 승인되어 왔고 맑스의 ≪자본론≫ 또한 그러한 관점에서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개념은 맑스가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니라 아담 스미스, 리카르도 등에 의해 널리 승인되고 확립되었다. 가치가 응고된 노동이라는 것은 상품들의 교환에서 그 비교가 되는 척도는 각각의 상품의 생산에 들어간 노동시간이라는 것을 말한다. 아마포 한 필에 노동시간이 5시간 들어가고 맷돌 하나에 노동시간 20시간이 들어갔다면 아마포 4필과 맷돌 1개가 교환되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상품의 가치(교환가치)를 결정하는 척도, 그 실체는 노동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가치개념은 상품생산에 고유한 것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 발생 이전의 상품생산, 즉, 소상품생산에도 관철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이 과거의 상품생산과 다른 점은 노동력이 상품으로 되는 단계, 사회라는 점이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가치론은 새롭게 발전되었다.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의 재생산에 들어가는 노동시간, 즉, 노동력의 재생산비용이며 그러한 노동력이 상품으로 팔려서 자본가의 지휘 하에 노동을 할 때 가치가 형성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 대해 맑스는 노동력의 사용에 의한 가치의 형성에서 노동력의 재생산비용(임금)보다 더 많은 시간의 노동을 하게 될 때 이 잉여노동은 자본가의 몫이 되는 잉여가치가 됨을 밝혔다. 그런데 이진경은 이러한 점을 왜곡하면서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그는 노동력의 사용가치가 노동이라는 맑스의 올바른 주장에 대해, 양과 질의 개념을 비변증법적으로 사용하여 비틀어 버리고 있다.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 등 현대 프랑스 철학의 대부분은 변증법을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을 소개하는 데 열심이었던 이진경 또한 변증법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면 이진경과 반대로 변증법을 긍정하는 입장에서 노동가치론을 옹호해 보자. 먼저 양과 질은 서로 다른 개념이지만 상호 연관되어 있고 나아가 통일되어 있다. 즉, 양이 질을 규정하고 질이 양을 규정한다. 변증법을 모르더라도 화학이라는 학문을 조금만 알고 있다면 양과 질의 통일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진경의 논지의 대전제는 양과 질이 서로 독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과 질은 개념으로서는 서로 독립되어 있지만 현실에서는 양이 질을 규정하고 질이 양을 규정한다. 이진경은 가치는 양이라고 하는데 그 양을 규정하는 질은 무엇인가? 즉, 양을 갖는 가치의 내용, 질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이진경은 답변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는 양과 질을 독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맑스는 ≪자본론≫에서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동질적으로 파악되는 인간노동이 가치의 실체임을 말하고 있다. 인간노동이 추상적 인간노동으로 파악된다는 것은 수많은 서로 다른 구체적인 유용노동이 동일한 지반 위에서 파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두 만드는 노동, 양복을 만드는 노동은 서로 다른 구체적 유용노동이지만 그것은 인간노동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질로 파악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질의 기반에 서 있기 때문에 노동시간이라는 양의 개념이 성립하고, 비교가 가능하게 되고 노동은 응고된 노동이 되어 가치의 실체를 형성하게 된다.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질이 없다면 비교의 척도로서 노동시간이라는 양도 성립하지 못한다. 이렇게 양과 질은 통일되어 있으며 상호 규정한다. 양적인 질, 질적인 양으로서 도량이라는 헤겔의 개념은 이러한 현실의 양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청산하였기 때문에 이진경은 양과 질의 독립성이라는 비과학의 입장을 과감하게 주장하면서 이를 기초로 노동은 가치의 실체가 될 수 없다는 엉터리 주장을 했던 것이다.

나아가 이진경은 노동은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맑스의 올바른 주장을 노동은 가치를 낳지 않는다라는 엉터리 주장으로 슬며시 바꿔치기한다. 예를 들면 ≪자본론≫ 1권의 전반부는 정치경제학의 가장 기초적인 영역인 가치론에 대한 비판이다. 특히 스미스와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에 대한 비판이 행해지고 있다. 그 핵심은 한 마디로 말해 노동은 가치를 낳지 않는다는 것이고, 따라서 노동가치란 개념은 잘못된 말이며, 나아가 그것은 자본주의의 비밀인 자본의 증식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7) 이진경은 맑스의 노동은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말과 자신의 노동은 가치를 낳지 않는다는 말을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은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노동 자체가 가치의 실체이기 때문에 노동 스스로는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맑스는 당시에 노동의 가치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기 위하여 노동은 가치를 갖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노동의 가치라는 개념 대신에 노동력의 가치라는 개념을 정립했고 노동력의 사용가치로서 노동이라는 개념을 세웠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이진경에게서는 뒤죽박죽이 되고 있다. 그 결과 노동이 가치의 실체이기 때문에 노동 자체는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맑스의 주장이 이진경에게서는 노동은 가치를 낳지 않는다라는 정반대의 주장으로 왜곡되고 있다.

이렇게 가치의 실체로서 노동이라는 개념을 부정하는 이진경은 기계 또한 잉여가치를 생산한다고 주장한다. 잉여가치는 절대적 잉여가치, 상대적 잉여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 잉여가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이 기계에 접속하는 것을 통해 자본가가 이윤을 얻게 되면 그것이 기계적 잉여가치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전형적으로 자본가의 관점을 대변하는 것인데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만이 아니라 기계, 불변자본이 이윤을 생산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푯대를 상실하면 이 사회에서 지배적인 부르주아적 입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진경은 예증하고 있다.

이진경은 화폐에 대해서도 엉터리 주장을 한다. 이가치의 실체는 노동이라는 주장을 부정하는 이진경은 가치법칙에 대해서도 왜곡된 주장을 한다. 즉, 가치법칙은 곧 잉여가치법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이진경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자율주의의 네그리 또한 그렇게 주장한 바가 있다. 네그리는 가치법칙=잉여가치법칙이며 따라서 가치법칙을 폭파시켜야 한다는 무정부주의적 주장을 했는데 이진경 또한 가치개념을 그르치면서 가치법칙=잉여가치법칙이라고 주장한다. 이진경이 이해하는 가치개념 혹은 가치법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증식된 가치의 기원, 아니 가치 자체의 기원은 노동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노동의 가치화이다. … 가치화과정은 노동이라는 사용가치를 가치라는 양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증식된 가치를 획득하는 과정이다.8) 여기서 이진경은 가치의 기원에 대해 가치화라는 동어반복을 말하고 있다. 이는 이진경이 가치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데 이렇게 가치개념을 그르치고 있기 때문에 이진경은 가치화증식된 가치를 획득하는 과정이라고 엉터리 주장을 한다. 이는 가치법칙과 잉여가치법칙을 동일시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진경의 이러한 주장은 단순 소상품생산에서는 가치화는 이루어지지만 증식된 가치의 획득은 없다는 간단한 반증으로 반박될 수 있다. 단순한 소상품생산은 상품생산이라는 점에서 판매를 위한 생산이지만 고용된 노동력이 없기 때문에 노동력의 상품화가 없다. 이 과정에서 노동은 상품에 응고되어 가치를 형성하지만 고용노동이 없기 때문에 가치의 증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이진경이 가치법칙이 곧 잉여가치법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인데 이진경이 이러한 오류를 범하는 이유는 상품생산 일반과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진경은 다음과 같이 상품생산과 화폐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생산물이 상품이 되려면, 이미 본 것처럼 경제학적 의미의 가치 개념이 성립하려면, 일반적 등가물인 화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화폐는 시장에서 상품교환이 확대되고 발전하여 나타나는 게 아니라, 다시 말해 상품교환의 발전을 통해 발생하는 게 아니라, 화폐가 있으므로 인해 비로소 생산물이 상품으로 교환될 수 있음을 뜻한다.9) 이러한 이진경의 입장은 그가 ≪자본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정치경제학의 ABC를 모르는 헛똑똑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는 ≪자본론≫에 나오는 가치형태의 발전, 화폐의 발생사를 길게 논하지만 응고된 노동으로서 가치라는 개념을 부정하기에 화폐의 발생이 가치형태의 발전의 역사의 귀결이라는 점, 화폐가 가치를 갖는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화폐는 가치를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코 가치를 갖지 않는 초월적인 어떤 대상(화폐)을 통해서만 상품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두고 맑스는 물신주의라고 했다.10) 화폐는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이러한 주장은 이진경이 가치개념의 이해에 실패하고 있는 것의 자연스런 귀결이다. 응고된 노동으로서 가치개념이 없다면 화폐가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진경은 상품교환의 발전의 산물로서 화폐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가 있음으로써 상품교환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전형적으로 상품-화폐관계에 대한 속류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화폐의 발생 이전에 장구한 기간의 상품교환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보더라도 맑스가 ≪자본론≫에서 전개한 가치형태의 발전은 그 자체가 상품교환의 역사이며 화폐가 발생하기 이전의 상품교환의 성격과 단계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상품 A와 상품 B의 교환은 그것이 아무리 단순하고 우연할지라도 자신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표현하는 측과 자신이 상대방의 가치를 표현해 주는 등가물의 측으로 나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개된 가치형태, 일반적 가치형태, 그리고 화폐형태(즉 화폐의 발생)는 단순하고 우연한(화폐가 개입되지 않은) 상품교환에 내재한 모순의 발전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가치형태의 발전과 화폐의 발생사에 대한 이해는 응고된 노동으로서 가치라는 개념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또한 화폐가 등가물이라는 것은 화폐 스스로 응고된 노동이라는 가치를 가지고 있음(지폐가 아니라 화폐로서 금과 은을 생각해 보라)을 전제하는 것이다. 가치의 증식으로서 자본의 운동, 축적에 대한 이해는 이와 같이 상품-화폐의 관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전제하는 것인데 이진경은 이러한 기본적 인식에서 실패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가 가치법칙과 잉여가치법칙을 동일시하고 나아가 기계도 잉여가치를 생산한다는 허황된 주장(정확히 자본가계급의 입장에 부합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진경이 이렇게 노동가치론을 해체하려 하는 시도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변혁의 주체로서 노동자계급이라는 테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기존에 맑스주의에서는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다른 모든 계급은 자본주의 발전의 결과 해체, 몰락하지만 노동자계급(프롤레타리아트)은 대공업의 고유한 산물로서 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발전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유일한 혁명적 계급이라고 파악되었다. 이를 기초로 맑스주의의 전략, 전술에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라는 개념이 성립되었고 이는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전형적으로 실현되었다. 그런데 노동가치론을 부정하는 이진경은 그러한 부정에 기초하여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이론적 위상을 해체한다. 먼저, 이진경은 노동자계급이라는 개념과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을 분리한다. 노동자계급은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존재한다는 점에서 부르주아계급의 일부로 파악된다.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부르주아지는 계급으로서 존재하는 유일한 계급이며 자본주의의 착취와 억압으로 인해 형성되는 무산자들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비계급으로 파악된다. 해체로서, 비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이러한 발상에 대해 이진경은 그것을 맑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의 내용에 근거한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면 먼저 맑스의 주장 자체를 인용해 보자. 뿌리 깊은 굴레에 얽매여 있는 한 계급, 결코 시민 사회의 계급이 아닌 시민 사회의 한 계급, 모든 신분들의 해체인 한 신분, 자신의 보편적 고통 때문에 보편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특수한 부당함이 아니라 부당함 그 자체가 그들에게 자행되기 때문에 어떤 특수한 권리도 요구하지 않는 한 영역, 더 이상 역사적 권원을 증거 삼을 수 없고 단지 인간적 권원만을 증거 삼을 수 있는 한 영역, 독일 국가제도의 귀결들과 일면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전제들과 전면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한 영역, 마지막으로 사회의 모든 영역들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그리하여 사회의 모든 영역들을 해방시키지 않고는 해방될 수 없는 한 영역,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완전한 상실이고 따라서 인간의 완전한 되찾음에 의해서만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는 한 영역의 형성에 [있다]. 하나의 특수한 신분으로서의 사회의 이러한 해체는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이다.11) 여기서 맑스는 사회의 해체로서 프롤레타리아트, 완전한 상실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따라서 인간의 완전한 되찾음 즉, 인간해방을 통해서만 해방될 수 있는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식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이진경은 상실로서, 해체로서 프롤레타리아트, 그리고 하나의 신분이라는 구절을 근거로 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이 아니라 비계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진경의 이러한 입장은 청산주의라는 색안경을 끼고 있지 않다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진경은 계급이라는 단어가 그렇게도 무서운 모양이다. 계급이라고 부르든 계층이라고 부르든, 혹은 신분이라고 부르든,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의 해체이고 인간의 완전한 상실이고 따라서 정치적 해방을 넘어서는 인간 해방을 통해서만 해방될 수 있고 나아가 사회의 다른 모든 영역을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스스로 해방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맑스의 주장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워질 수 없는 혁명성의 근거이며 이러한 성격은 부르주아 사회 자체가 규정하고 생산하는 것이다.

비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이진경은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특정한 적극적 규정이나 요건을 전제하지 않으며 단지 기존의 신분이나 계급적 규정의 상실만으로 충분히 귀속될 수 있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극히 다양하고 이질적인 기원이나 경로, 형태를 갖는 사람들의 집합이다.12) 이러한 이진경의 주장의 현실적인 의미는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적 통일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질적인 존재의 집합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이러한 주장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러한 주장은 자율주의의 다중 개념과 유사하다. 그런데 이렇게 계급적 통일성이 부정되면 계급투쟁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계급투쟁을 떠난 저항의 이론을 펼치는 신좌파들, 푸코, 들뢰즈 등의 주장과 이진경의 주장은 이렇게 맞닿아 있다.

맑스는 해체, 상실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보면서 이를 통해 인간해방이라는 개념을 끌어냈다.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근원적 혁명성에 다가가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단결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 신좌파, 그리고 이진경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 이질성을 보고 계급적 통일의 불가능성을 본다. 맑스의 주장과 이진경의 주장 사이에 일말의 공통점이라도 찾을 수 있는가? 전혀 불가능하다.

이렇게 노동자계급,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치적으로, 이론적으로 해체하고 있는 이진경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공장 프롤레타리아트와 거리의 프롤레타리아트로 나눈다. 이는 현재 신자유주의로 인한 정규직과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자의 구분과 대략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분열은 자본에 의해 강요된 것인데 이진경은 아예 이러한 분열을 이론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진경은 거리의 프롤레타리아트로 규정되는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자를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로 부른다. 이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는 겉으로는 불안정 노동자에 천착하는 듯하지만 실은 혁명성의 담지자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부정하고 해체하고 분열시키는 용어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나아가 전 세계에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발전은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지배전략에 의해 강요된 노동자계급의 분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열을 극복하고 단결을 이룰 때만 가능하며 자본주의에 맞서는 변혁전략은 바로 이러한 전망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이렇게 청산주의, 해체의 길을 걸은 이진경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내용을 검토해 보자. 먼저 철학에서 이진경은 기존의 유물론과 관념론에 대한 이해를 수정한다. 그는 기존의 유물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물론이란 구체적인 사유의 과정에서 사용되는 어떤 방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세계의 물질성이나 객관성에 대한 믿음의 문제와 결부된 것처럼 보인다.13) 이진경은 기존의 유물론을 물질성에 대한 믿음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때의 유물론은 구체적 사유과정의 방법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이는 청산주의 전의 이진경이 얼마나 유물론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한때 맑스-레닌주의자였던 이진경은 유물론을 사유의 방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취급했었는가 보다. 그러나 1980년대 운동에서도 세계관이라는 개념은 분명히 쓰이고 있었다. 세계관이라는 개념을 승인한다면 그것은 유물론을 사유과정에서 가장 근원적인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진경은 유물론이 구체적 사유방법이 아니라 물질성에 대한 믿음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이진경 스스로 자기 머리로 하는 사고과정 없이 단지 믿음으로 운동했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피상적 운동,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과감한 청산!

이진경은 유물론으로부터 물질 개념을 제거하고 그 대안으로 외부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비록 나중에 다시 끌어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물질이란 말로부터 유물론을 해방시켜 주지 않고서는 유물론에 대한 적절한 정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물질이라는 말 없이 유물론을 정의하는 것, 그러나 물질 없는 유물론이라는 역설적 문구에 멈출 순 없다. 실제로 사유의 방법으로, 변혁을 사유하는 무기로 유물론을 벼리어내기 위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정의를 찾아야 한다. 미리 결론부터 말하면, 유물론이란 외부에 의한 사유 혹은 외부를 통한 사유로 정의되어야 한다.14) 이진경은 기존의 유물론을 물질에 대한 믿음으로 규정하고서는 물질을 제거하고 외부라는 개념으로 유물론을 재정의하고자 한다. 과연 물질 개념과 외부 개념의 차이는 어떠한 것일까? 물질성을 부정하고 외부성을 도입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계속 이진경의 주장을 추적해 보자. 우리는 맑스의 역사유물론이 바로 이러한 유물론의 정의에 부합한다고 믿는다. 유의할 것은 거기서 역사라는 말은 어떤 것의 본질을 규정하는 조건들의 집합, 따라서 그것이 달라지면 그 본성 역시 달라지는 조건들의 집합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어떤 것의 본성이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통상 역사라고 불리는 외부 조건들에 기대고 있음을 표현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유물론에서 역사란 바로 이런 외부성과 관련된 말이지, 우리가 통상 표상하는 식의 역사, 즉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사실들의 시계열적 집합이 아니다. 따라서 유물론은 처음부터 항상-이미 역사유물론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역사유물론이란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과학의 한 종류가 아니라, 외부에 의해 사유하는 방법을 지칭하는, 맑스에 의해 명료화된 유물론 자체의 이름이다.15) 모든 것의 본질은 그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의해, 어떤 것이 만나고 접속하는 외부에 의해, 그 외부와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 외부라는 개념이 유물론에 결정적이라는 것은 여기서 다시 분명해진다. 맑스의 역사유물론은 단지 본질이나 원리가 기대고 있는 현실적 조건이나 역사를 고려하고 주목하는 유물론이 아니라 본질이나 원리 자체가 외부에 의해 결정되고 달라진다고 보는 유물론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항상 그 외부에 의해 사유하는 사유방법이다.16) 이진경은 유물론에서 물질 개념을 제거하고 외부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유물론은 곧 역사유물론이라 하고 또 그러면서 역사는 시간적 계열이 아니라 외부적 조건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진경의 문제의식이 집중되어 있는 외부성 혹은 외부적 조건에 천착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내적 원리 혹은 공리에만 주목하면서 외적 조건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고 현실주의적이지 못한 것이다. 이진경이 이렇게 외적 조건, 외적 연관관계의 의미 자체를 강조하는 것에 멈춘다면 이진경은 그릇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진경은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외부성 개념으로 물질성이라는 개념을 대체하고 있고 나아가 유물론은 외부성으로 해석되는 역사유물론 자체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의 수정 혹은 왜곡이 있다. 첫째, 역사유물론은 곧 외부성의 유물론이란 것은 맑스의 역사유물론에 대한 수정이다. 맑스의 역사유물론은 역사를 단지 외적 조건의 문제로 파악하지 않는다. 역사는 단지 사유의 외적 조건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이고 현실이고 변화이고 주체들의 얽힘이다. 나아가 인간의 역사는 그 물질적 성격으로 인해 자연사의 일부이며 따라서 필연성의 영역에 자리 잡고 있고 그에 따라 역사의 발전법칙이라는 개념이 성립한다. 그런 점에서 역사유물론을 단지 외부에 의한 사유로 파악하는 이진경의 사고와 맑스의 사고는 천양지차이다. 둘째, 유물론은 곧 역사유물론이라는 이진경의 주장은 맑스주의의 세계관인 변증법적 유물론을 묵시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이진경의 외부성의 철학이 청산주의적 성격을 띠는 핵심적인 지점이다. 체계적으로도 그렇고 논리적으로도 외부성의 철학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부정하는 것이다. 외부성의 철학에서는 내적 모순이라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다. 역사에서 그리고 (자연)세계에서 내적 모순이라는 개념은 그 모든 변화와 운동을 설명하는 고리가 되는데 외부성의 철학에서는, 외적 조건의 문제를 일차적으로 사고하는 관점에서는 내적 모순 개념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모든 본질은 그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일정한 일리가 있다. 즉, 모든 대상, 물질은 주변의 제 물질, 대상과의 상호연관의 관계에 있고 그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이진경이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맑스의 주장을 이러한 외부성 철학의 근거로 드는 것은 그럴 듯하다. 그러나 인간, 그리고 모든 대상, 물질은 상호연관에 의해 규정되면서도 스스로는 내적 모순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적 모순에 의해 그 대상의 존재와 운동이 근본적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외부적 조건, 제 대상의 상호연관은 그러한 내적 모순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외적 모순 혹은 조건이 된다. 이러한 것이 현실세계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진경은 외부성, 외적 조건, 상호연관들에만 주목하며 외부성이라는 개념으로써 물질 개념을 청산하고 내적 모순의 개념을 묵시적으로 부정한다. 이 점은 이진경이 푸코, 들뢰즈와 같이 변증법을 부정하는 관점을 갖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 준다. 외부성의 철학이 단지 열려진 태도, 외적 조건의 문제, 외적인 상호연관의 문제를 천착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청산주의가 아니라 좋은 것이다. 그러나 외부성의 철학이라는 이름 하에 물질 개념이 청산되고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세계관이 청산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이렇게 청산주의적인 외부성의 사유, 철학에 기초하여 이진경은 혁명의 문제에서 결정적으로 그릇된 주장을 한다. 혁명, 그것은 주어진 조건에서, 주어진 원리나 법칙에서 벗어나는 이 편위적인 힘이 표현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처음부터 존재하는 원리의 외부, 법칙의 외부, 일자의 외부, 필연성의 외부이다. 혁명을 사유한다는 것은 바로 이 또 하나의 외부를 사유하는 것이고, 바로 그 외부를 통해서 새로운 삶을, 새로운 운동을 사유하는 것이다.17) 편위라는 개념은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원자들의 운동이 일직선으로 낙하하는 운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선으로 빗겨나가는 운동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편위, 사선운동을 통해 우연적인 운동과 원자의 결합이 이루어지면서 다양성이 가능하게 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혁명은 단지 이러한 우연적인 요인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 이진경은 필연성의 외부로서 혁명을 사고하기에 편위, 우연성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안이하고 비과학적인 것이다. 혁명을 단지 사고한다는 것과 혁명에 주체로 참가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르며 그것은 의식인가, 현실성인가의 차이와 같다. 의식을 넘어선 현실로서의 혁명은 그에 대한 과학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현실성, 물질성, 역사성으로서 혁명을 사고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성의 외부로서 혁명이라는 개념은 공상에서는 가능하지만 현실성을 가질 수 없다. 현실에서 혁명은 우연성 속에 관철되는 필연성에 근거해야만 한다. 그러한 근거 없이는 주체의 의식적 행위는 성립할 수 없다. 필연성에 근거한 전략은 현실의 혁명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의 착취와 억압에 찌든 민중의 입장에서 자본주의의 외부를 사유한다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필연의 외부로 규정되면 그것은 억압으로부터의 탈출은 될지언정, 억압에 맞서는 변혁운동은 아니다. 변혁운동이 되려면 외부성의 사유를 넘어서서 필연성의 영역에 진입해야만 하며 필연과 우연의 통일을 이루어내야 한다.

이진경은 자신의 이러한 청산주의적 사고를 코뮨주의 운동이라는 개념으로 정식화한다. 그러나 그때의 코뮨주의는 계급투쟁을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도래하는 무계급사회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로부터 탈주선을 그리는 외부로서 코뮨의 형성을 의미한다. 즉, 계급투쟁을 통해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운동과 그러한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내에서 자본주의의 외부를 꿈꾸는 공동체로서 코뮨의 형성이다.

그리하여 이진경은 계급투쟁을 대신하여 감각의 정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의식(화)의 정치학과 감각(화)의 정치학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다. 의식(화)의 정치학은 인민들의 지성에 대한 신뢰 속에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폭로하여 그들의 의식을 진리로 일깨우고 의식화시킴으로써 올바른 정치적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고 본다. … 반면 감각(화)의 정치학은 정치의 문제, 집합적인 행동의 문제란 일차적으로 의식이 아니라 감각의 문제고, 중요한 것은 의식을 일깨우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집합적인 어떤 감각을 형성해 내는 것이라고 보는 그런 정치학일 것이다.18) 의식을 축으로 하는 계급투쟁을 부정하고 나면 남는 것은 감각밖에 없을 것이다. 필연성, 법칙성, 역사의 발전법칙이라는 것은 너무 무거우므로 그런 의식적 쟁점에 얽매이지 않고 대중을 감각화를 통해 조직하고 동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밖에는 덧붙일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진경은 1980년대 광주학살의 영향이 지배적이던 시절에 운동을 시작하고 반제반파쇼 운동 나아가 맑스-레닌주의 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쏘련이 붕괴되자 청산주의의 선두에 서기 시작했는데 알튀세르의 보급, 푸코와 들뢰즈 등의 프랑스의 신좌파 철학을 소개하는 데 열심이었다. 신좌파는 계급투쟁을 떠난 저항의 이론을 꿈꾼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계급투쟁 노선의 청산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이진경의 역사적 궤적과 논리적 귀결 또한 이러한 청산주의이다. 자본주의로부터 탈주선을 그리는 코뮨주의 운동이라는 것은 겉보기에 솔깃하지만 계급투쟁을 떠난 코뮨은 공상적이거나 아니면 자본주의의 보완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신좌파적 논리, 계급투쟁 노선의 청산의 흐름을 청산해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 자본주의, 그리고 그에 맞서는 노동자계급의 전략의 문제를 다시금 시야에 넣어야 할 때다. [노/사/과/연]

 

 

 


1) 이진경, ≪맑스주의와 근대성≫, 그린비, p. 21.

 

2) 같은 책, p. 28.

 

3) 같은 책, p. 142.

 

4) 같은 책, p. 145.

 

5) 같은 책, p. 87.

6) 이진경, ≪자본을 넘어선 자본≫, 그린비, pp. 121-122.

 

7) 이진경, ≪맑스주의와 근대성≫, p. 122.

 

8) 이진경, ≪자본을 넘어선 자본≫, pp. 128-129.

 

9) 같은 책, p. 90.

10) 이진경, ≪미-래의 맑스주의≫, 그린비, p. 132.

 

11) 맑스,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서설, ≪맑스 엥겔스 저작 선집≫ 제1권, 박종철출판사, p. 14.

 

12) 이진경, ≪미-래의 맑스주의≫, p. 240.

 

13) 같은 책, p. 19.

 

14) 같은 책, p. 20.

 

15) 같은 책, pp. 20-21.

 

16) 같은 책, pp. 43-44.

 

17) 같은 책, p. 50.

18) 이진경, ≪대중과 흐름≫, 그린비, p. 97.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Apr 22nd, 2017 | By | Category: 2017년 04월호 제132호, 이론 | 조회수: 368

댓글 한 개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24)”

  1. 보스코프스키말하길

    여성 가수 정확하게 여성 독창 가수원(솔로 아이돌의 번역어로 제시) 중에도 이진경(이선빈)이 있고 야구선수 중에도 이진경(모두 94년생 다만 가수는 1월로 조기(빠른)생 야구선수는 11월생)이 있는데 이들이 운동을 한다고 해도 지적하신 이진경처럼은 안 하겠지요^^
    무엇보다 한국사회는 다른 사회들처럼 ML(M) 당을 정식으로 형성하기 전에 종료해 버린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이번에도 다른 사회에서라도 변동이 발생해야 이런 당을 형성할 수 있을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