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정국과 노동자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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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수 | 편집위원

 

 

 

토론을 위한 이 발표문은 그 주제의 공통성과 연속성 때문에 내가 지난 1월에 발표했던 박근혜 정권의 몰락과 재벌, 노동자계급의 연속이자 보완이다. 그래서 당연히 이 글은 내가 그 글에서 얘기했던 바를 다시 확인하고 되살피면서 그 후의 정세변화를 반영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글이 발표되고 나서 꽤나 흥미 있는 비판・비난 하나가 앙칼지게 제기되었기 때문에, (지금 이 시기에 이 글을 써야 할 처지가 아니었다면, 그 글에서도 말했듯이, 진즉부터 예상되었던 그렇고 그런 비판이어서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하며 그냥 웃고 넘어가면 그만이었겠지만) 이 글에는 그 비판에 대한 답변도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아니, 글을 좀 수월하게 쓰기 위해서 오히려 저들의 비판을 주요 화제(話題)로 삼으면서 논의를 전개하기로 하자.

비판이란, 자칭 인류해방을 위한 노동계급의 전위 볼셰비키 그룹(이하, 자칭 볼셰비키 그룹)의, 채만수의 굴종적이고 해로운 정세 인식 비판이란 부제가 붙은 박근혜 퇴진투쟁에 담긴 사회동학과 노동계급의 원칙(http://bolky.jinbo.net/index.php?mid=board_FKwQ53&document_srl=4517)이다. (이 글을 좀 더 수월하고 논쟁적으로 쓸 수 있도록 때마침 자료를 제공해 준 자칭 볼셰비키 그룹에 감사를 표한다. 진심으로.)

 

 

만장일치의 탄핵

 

태극기와 성조기를 모시고 몽둥이를 흔들면서 대통령 박근혜 탄핵을 인용할 경우 내란・내전도 불사하겠다고, 헌재 판사들과 특별검사들의 신변까지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협박하던, 계엄령을 선포하여 탄핵을 요구하는 수십만・수백만 시위 군중을 짓밟아버리라는 수만 극우 군상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3월 10일 헌재는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하였다. 그것도 8:0 만장일치로! 그러니까, 박근혜 자신이 골라 임명한 재판관까지도 반대하지 못하고!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박근혜는 이러한 판결이 나오리라고 예상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언론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실제로, 탄핵 후 돌아가야 할 삼성동의 집의 보일러도 수리해놓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러한 관측을 뒷받침하고 있고, 또한 헌재 판결이 임박해올수록 극성을 떨었던 저 극우 군상의 난동도 박근혜로 하여금 그런 믿음을 갖게 했을 것이다. 헌재가 시류에 민감한 정치재판소임은 누구 못지않게 박근혜도 익히 알고 있을 터인데, 비록 100배는 뻥튀기했지만, 500만의 극우 군상이 탄핵 반대!, 탄핵시 내전!, 계엄령 선포!를 외치고 있어서, 적어도 3명은 기각 혹은 각하를 주장하겠지 하고 믿는 것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적어도 3명은커녕 1명도 탄핵에 반대하지 않았다. 아니, 반대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저들 헌법재판관들이 정의의 수호자들, 헌법의 수호자들이어서?

국가보안법 합헌 판결이라든가,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 등과 같은 저들의 과거의 판결들을 보면, 결코 그래서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정치적 판결이다. 그리고, 물론 직접적 증거가 아니라 전반적・역사적 맥락 속에서 유추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저들이 그렇게 판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필시, 자신의 정권의 명운이 풍전등화인데도, 500만 극우 군상이 그토록 목청 높여 요구했는데도 대통령 박근혜가 계엄령을 선포할 수 없었던 것과 동일한 이유, 동일한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대통령의 힘을, 그리고 당연히 헌재의 힘을 직접적으로 압도하는 어떤 힘, 어떤 손이 작용한 때문일 것이다.

헌재가 만약 탄핵을 기각 혹은 각하한다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형태의 대중의 폭발적인 분노・저항에 부딪혀 그 어떤 힘, 그 어떤 손은 어쩔 수 없이 계엄령 선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로 몰릴 것인데, 그것은 그들의 이해에 중대한 위협이 될 터이기 때문에 그들은 손 놓고 바라만 보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손의 어루만짐의 결과가 바로 8:0 만장일치의 탄핵!

저들 극우 군상이 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흔들어댔을 뿐만 아니라 으레 엄청나게 큰 성조기를 머리 위에 모시고 행진하곤 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저 어떤 힘, 어떤 손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이 대~한미국 사회의 성격을 인식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독법(讀法)이 특이한 혁명가들께서, 그 행티로 보아, 또 뭐라고 비판하고 나설지 몰라 덧붙이자면, 이러한 판단이 결코 탄핵을 요구한 수십만, 수백만 촛불 군중의 투쟁을 경시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오히려 바로 그러한 투쟁이 저 어떤 힘, 어떤 손을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강제했음을 확인하고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나는 지난번 글에서도 이렇게 썼다. ― 게다가, 11월 12일 이후에는 수십만, 수백만이 거리투쟁에 나서고 있는데, 어떻게 뒷감당을 하려고 계엄령을 발동, 학살의 참극을 벌이게 할 수 있겠는가?]

 

 

자칭 볼셰비키 그룹은 비뚤어진 방식으로 촛불혁명은 동시에 재벌의 반란임을 입증하고 있다

 

저들 자칭 볼셰비키 그룹“‘박근혜 퇴진 정국의 원인, 과정, 결과에 대한 미시(微視) 연구는, 즉 이번 탄핵정국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흥미로울 것이고 앞으로 누군가 해낼 것이라고 본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그 분석은 그것을 미시 연구라는 말로 포장하여 흥미 거리로 규정해버릴 문제가 결코 아니며, 앞으로 누군가 해낼 것이라고 본다며 태평스레 제쳐둘 문제도 아니다. 그 분석과 그에 대한 판단은 전개될 정세에 대한 판단, 그에 대한 대응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물론 저들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나의 글에 대한 비판… 굴종적이고 해로운 정세 인식 비판 운운하는 부제를 달고 있을 터이다. (다만, 정세 인식 운운과 그 미시(微視) 연구는 흥미로울 것이고 앞으로 누군가 해낼 것이라고 본다 운운이 어떻게 자가당착적인가를 인식할 능력은 없는 것 같지만.)

아무튼 정세의 구체적 분석, 저들의 표현으로는 그 미시 연구가 그렇게 전개될 정세에 대한 판단 및 그에 대한 대응과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지난번 글에서 계엄령 선포 가능성의 문제를 논했고, 그에 이어서 이번 촛불혁명시민혁명을 기획하고 연출한 것은 결국 재벌이며, 촛불혁명시민혁명은 동시에 재벌의 반란’”임을 대략 다음과 같이 추론했다.

 

… 사회가 즉 지옥으로까지 공공연히 자조될 때, 인민 대중이 그러한 지옥 같은 상황을 뒤집어엎기 위해서 일어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실제로도 노동자 인민은 그동안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투쟁들을 벌여 왔다.

그리고 그러한 투쟁이 벌어질 때마다 극우언론들은, 즉 세칭 조중동문이나 종편으로 불리는 재벌・족벌 언론과 공영방송들은 당연히(!) 이 투쟁들을 갖은 중상・모략으로 난도질했고, 저 국가 역시 당연히(!) 공권력 즉 경찰과 검찰, 법원, 국가정보원 등을 동원하여 잔인하게 탄압해 왔다. 당연히! 다름 아니라 그것이 바로 그들의 기능이요, 역할・본분이니까!

그런데, 그런데 이번의 촛불혁명, 시민혁명에서는 저들의 행동거지, 저들의 대응이 평소의 그것들과는 확연히, 정말 판이하게 다르다!

… 언론은 시위를 선동하고 경찰과 검찰, 법원은 그 시위를 보호・보장하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이 상황을 사실상 격발한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 경찰, 검찰, 법원. 저들이 누구인가? 저들은 이제까지 역대 정권의 온갖 패악과 온갖 범죄를, 민주주의의 파괴를,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낭자한 살인・학살들까지도 지지・옹위해 온 자들이다. 그것도 민주주의와 민주적 기본질서의 이름으로!

그러한 저들이 갑자기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을 문제 삼으며 시민들의 시위를 선동하고 보호・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평소와는 판이하게 움직이고 있고, 그 배후는 누구일까? 저들이 노리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누가 뭐래도 이 사회,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독점자본가 계급, 보다 구체적으로는 미제국주의와 재벌이다. …

그런데 국정농단이라고 하지만, 농단당한 건 물론 그 국정 일반이 아니다. 감히 미제국주의의 이익을 농단할 인물・세력은 이 나라의 지배세력・지배계급 가운데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농단당한 건 재벌들의 이익일 뿐이다. …

이렇게 보면, 이번 촛불혁명시민혁명을 기획하고 연출한 것은 결국 재벌이며, 촛불혁명시민혁명은 동시에 재벌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는 저토록 언론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대중을 선동하고, 경찰・검찰・법원까지를 움직여 대중의 반정부 시위를 보호보장할 수 있는 어떤 세력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세인식이 저들 자칭 볼셰비키 그룹에게는 심히 굴종적이고 해로운 것인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꽤 넓은 지면을 할애하여 대대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는데, 그 비판이란 게 가히 가관이다. 아니, 자신들의 의도와는 거꾸로, 이번 탄핵 정국이 재벌에 의해 기획되고 연출된 것일 수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다만, 비뚤어진 언어로. 그리고 특기를 살려 왜곡과 횡설수설을 섞어서. 이렇게,

 

선생[나를 비꼬아 가리키는 소리다]으로서는 이 일련의 정치사태에 방아쇠를 당긴 것이 극우언론 중의 극우언론 조선일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지배계급 일부일 뿐 아니라, 중요 기둥 중 하나인 조선일보가, 이른바 촛불혁명이라는 인민의 격동을 불러오고 지배계급 전체의 이해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불합리를 해소하기 위해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스스로도 놀라운 결론에 이른다: 이 촛불혁명은 지배계급이 기획하고 연출한 것이다!

조선일보 등의 최순실 국정농단 보도가 이 정치사태를 격발했다는 것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밑줄은 인용자.)

 

자, 한편에서는 선생으로서는 이 일련의 정치사태에 방아쇠를 당긴 것이 극우언론 중의 극우언론 조선일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라면서, 다음에는 조선일보 등의 최순실 국정농단 보도가 이 정치사태를 격발했다는 것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뒷 발언은, 내가 지난번 글에서 우선, 혁명의 방아쇠를 당긴 공(功)이 극히 놀랍게도 분명 극우언론 중의 극우언론 ≪조선일보≫와 그 계열사인 종편 ≪TV조선≫에게 있다고 쓰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덧붙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을 것인데, 그렇게 명문(明文)으로 그렇게 쓰고 있음을 보면서도 선생[나를 비꼬아 가리키는 소리다]으로서는 이 일련의 정치사태에 방아쇠를 당긴 것이 극우언론 중의 극우언론 조선일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라니, 이 무슨 해괴한 독법(讀法)이며, 왜곡・모략인가?

이 해괴한 독법・왜곡・모략에는 물론 목적이 있다. 저들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즉, 조선일보 등의 최순실 국정농단 보도가 이 정치사태를 격발했다는 것은] 확실히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일상적 시기에는 거의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20주에 이르는 인민의 격동과 박근혜 탄핵, 조윤선, 김기춘, 이재용 등의 구속, 노동계급을 포함한 이른바 국민의 상당한 정치의식의 성장과 조직화 등을, 재벌이 의도하여 기획하고 연출했다는 것은 틀렸을 뿐만 아니라 해로운 사고이다.

 

그러면, 옳을 뿐만 아니라 이로운 사고는 무엇인가? 재벌이 아니라 조선일보 등이 앞뒤 가리지 않고 내지른 것이 이번 탄핵국면을 조성하기에 이르렀다는 게 저들의 판단으로는 옳을 뿐만 아니라 이로운 사고이다. 이를 내세우려는 것이 앞에서 지적한 저들의 해괴한 독법・왜곡・모략의 목적이다. 저들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박근혜 퇴진정국으로 폭발하기까지 그 저변엔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이 정권의 무능으로 인한 사회 갈등이 꾸준히 축적되고 있었다. … 다만 고도의 억압 체제 속에서 안으로 안으로만 사회 불만은 응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국사회는 폭발성 높은 인화물질이 차곡차곡 쌓였고 발화점 낮은 유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밥그릇 싸움에 소외된 조선일보 등이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불똥을 튀겼다. 지배집단 내에서만 내밀하게 전해지던 박근혜-최순실의 추문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삶의 여유가 조금 더 있는 중산층은 이 사회를 비교적 잘 인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추문은 그들의 인내의 둑마저도 터뜨렸다. 행동에 나서자, 반박근혜 정서는 압도적 다수가 되었고, 사회는 폭발했다. (밑줄은 인용자.)

 

위 인용문의 앞 문단은 … 이 정권의 무능으로 인한 사회 갈등이 꾸준히 축적되고 있었다 운운하는 참으로 노동자계급의 전위, 자칭 볼셰비키 그룹다운 인식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이 사회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생각・판단이다. 그리고 한국사회가 폭발성 높은 인화물질이 차곡차곡 쌓였고 발화점 낮은 유증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사실상 상수(常數)이다.

문제는 이번 상황을 조성하게 된 변수인데, 저들은 밥그릇 싸움에 소외된 조선일보 등이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불똥을 튀겼다라고 아주 명쾌히 정리해 버리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조선일보 등은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사태,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분을 참지 못하고 불똥을 튀겨 버린 것으로 된다. 과연 조선일보 등은, 혹은 지배계급 일부일 뿐 아니라, 중요 기둥 중 하나인 조선일보는 앞뒤 가늠하지 않은 채 이른바 촛불혁명이라는 인민의 격동을 불러오고 지배계급 전체의 이해에 반하여 행동하는 무골충(無骨蟲)들의 집단들일까? 사실상 그렇다고 단언하고 있는 저들을 믿어도 좋은 것일까?

게다가 저들은 밥그릇 싸움에 소외된 조선일보 등 운운하면서도, 단지 그뿐, 언제 어떻게 밥그릇 싸움에서 소외되었다는 것인지 일언반구도 없다. 당연히 일언반구도 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한편, 저들 자칭 볼셰비키 그룹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번 탄핵국면을 재벌이 기획・연출한 것일 수 없다는 증거로 제시한다.

 

박근혜 정권 몰락의 기획・연출자 재벌이라는 무고(誣告)를 받고 있지만, 재벌 역시 이번 격동으로 인해 상당한 손실을 입고 위기에 처했다. 지켜보는 눈들을 따돌리고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할 상속 문제가 세상에 까발려지고, 지금까지 한 번도 구속된 적이 없는 삼성의 총수가 구속 수감되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비난을 퍼붓는다.

 

재벌이 박근혜-최순실 체제의 피해자인 양 묘사하는 선생의 인식은 헌법재판소나 문재인 같은 체제 하수인들의 인식과 닮았다. [최순실 비선실세에 의해] 이익이 농단(채만수) 당한 재벌들이 조선일보 등을 앞세워 이번 거사에 나섰다고 선생은 설명한다. 하지만 특검에 따르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이재용 등은 최소 1천 388억 원의 국민연금 손실을 포함하여 최소 8천 549억 원의 이득을 얻었다(TV조선, 2017.03.01.). 그런데 지금 그 일들이 다 들통 나서 그 이득들을 토해내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고, 자신은 감옥에 갇혔다.

 

우선, 재벌이 박근혜-최순실 체제의 피해자인 양 묘사하는 … 인식은 헌법재판소나 문재인 같은 체제 하수인들의 인식과 닮았다면, 그것은 바로 이 사태를 재벌이 기획・연출했다는 간접적인 논거가 될 수 있을지언정 그 반대가 아니다. 왜냐하면, 지난번 글에서도 충분히 얘기했지만, 헌법재판소나 문재인 같은 체제 하수인들은 기본적으로 재벌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 인용문들의 다른 부분은 저들의 다른 논거와 함께 읽어야 그 객관적 의미를 알 수 있다. 자, 짚어가 보자.

 

단지 지배계급은 지배계급, 피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이라는 단순하고 기계적인 사고로 선생은 이 사회를 분석한다. 그리하여 지배계급 일부가 (결과적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자, 애초에 모든 것이 지배계급 기획과 연출이라는 음모론적이고 피해망상적인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내가 단순하고 기계적인 사고로 … 이 사회를 분석…하여 지배계급 일부가 (결과적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자, 애초에 모든 것이 지배계급 기획과 연출이라는 음모론적이고 피해망상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참으로 가소롭고 특이한 독법에서 나오는 망발이다. 내가 재벌의 반란이라고 말한 것이야말로 지배계급 일부가 (결과적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에 반하여, 그리고 심지어는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이해에 반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을 지적한 것 아닌가? 저들이야말로 나의 글에 자신들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는 데에 발끈하고, 속된 말로, 헤까닥하여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자, 애초에 모든 것이 지배계급 기획과 연출이라는 음모론적이고 피해망상적인 결론에 이르는 것 운운하고 나서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 피해망상적인 결론에 이르[고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지배계급의 일부 운운하다가도 갑자기 내가 재벌의 기획과 연출이라고 말한 것을 지배계급 기획과 연출 하고 바꿔치는 것도 사실은 자신들의 평소의 지배계급은 지배계급, 피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이라는 단순하고 기계적인 사고 습관의 부지불식간의 표출 아니겠는가?)

그들의 발언을 더 들어보면,

 

자본주의 세계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둘러싼 자본가와 노동계급 사이의 모순이 가장 근본적이지만, 그 외에도 다층적이고 다각적으로 수십 갈래의 모순이 중첩되어 얽히고설킨 고도의 복잡계이다.

 

지당한 말씀이다.

 

그리하여 사회구성원들은 자기정체성을 항상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에서 찾지는 않는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일관되게 계급적으로 각성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계급 갈등은 일찌감치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노동계급에 속했다 하더라도 일상적 개인 대부분은 몰계급적이거나 계급 배신적인 의식 속에 살아간다. 심지어 노동계급의 정치조직들마저도 계급의 역사적 대의를 거스르는 행위를 종종 한다. 이런 일들은 계급적 각성 정도가 상대적으로 더 높은 지배계급 내에서도 일어난다. 피지배계급의 도전 앞에서는 단일한 이해를 갖지만, 그들 내부는 다층적이고 다양한 이해관계로 갈라져 있고, 그들 나름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다툰다.

조선시대 지배계급은 여러 파당으로 갈라져서 자기 목숨만이 아니라 삼족의 명운을 걸고 싸웠다. 여당 국회의원도 지내고 수 십 억을 뇌물로 쓸 정도로 재력가였던 성완종은 지배계급 내 이전투구에서 패배하자, 지배집단의 비밀을 폭로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히고 본인은 자살했다. 트럼프의 당선 전후 미국 지배계급이 분열하고 서로 시끌벅적하게 싸우고 있다는 소식이 연일 뉴스에 오르고 있다.

 

여기까지도 지당하신 말씀이다. 다만, 지난번 글에서 내가,

즉자적으로만, 즉 경제적・사회적 지위라고 하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100만, 200만 시위 대오는 어쩌면, 단지 수십만이 아니라, 거의 태반이 노동자들로 채워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자계급의 의식적 일원으로서 노동자계급의 주도 하에, 그 지휘 하에 모여 싸우지 못하고,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주도・지휘 하에 모여 싸우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표상되고 있는 것이고, 그 투쟁은 (소)시민혁명으로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등등이라고 쓰고 있는 데에는 입을 꾹 다문 채, 가소롭게도

 

사회구성원들은 자기정체성을 항상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에서 찾지는 않는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일관되게 계급적으로 각성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계급 갈등은 일찌감치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노동계급에 속했다 하더라도 일상적 개인 대부분은 몰계급적이거나 계급 배신적인 의식 속에 살아간다.

 

운운하며 가르치려 드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건 그렇고, 저들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런 일들은 지배계급이 의도하고 기획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지배계급의 자기모순과 그로 인한 체제 불안이 일상적으로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상당히 많은 사례가 있었고 심지어 필연적인 것이다.

 

이런 일들은 지배계급이 의도하고 기획한 것이 아니다? 참으로 자칭 인류해방을 위한 노동계급의 전위 볼셰비키 그룹다운 발언 아닌가? 단지 지배계급은 지배계급, 피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이라는 단순하고 기계적인 사고에 뼛속까지 젖은 자들의 발언 말이다. 재벌과 같은, 혹은 자칭 볼셰비키의 의견을 존중하자면, 조선일보 등과 같은, 혹은 지배계급 내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는, 지배계급분열하고 서로 시끌벅적하게 싸우고 있는 자들이 그런 일들을 지배계급이 의도하고 기획한 것인지가 문제인데도, 뜬금없이 이런 일들은 지배계급이 의도하고 기획한 것이 아니다 운운하면서 자신들의 가소로운 주장을 정당화하려 들고 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다. 아무튼 귀중한 말씀을 더 들어보자면,

 

2월 혁명 직전, 지배계급 일파에 살해된 숨은 권력자 라스푸틴 이야기는 지금의 사태를 이해하는 데에 상당한 암시를 준다.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에서 묘사하는 다음 이야기에서, 라스푸틴을 최순실이나 우병우로, 짜르는 청와대로, 지배계급은 조선일보로 바꿔 읽어도 재미있을 것이다.

 

유산 지배계급은 이해관계, 관습, 비겁함의 측면에서 짜르 체제를 완전히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라스푸틴이 없는 짜르를 원했다. 그러자 짜르는 지금의 나를 그대로 인정할지어다.라고 이들에게 응답했다. … 시베리아의 예수 라스푸틴 때문에 이 모든 고통을 겪고 있다고 이들은 느끼기 시작했다. 견디기 힘든 불길한 징조들이 파도처럼 지배계급을 덮쳤다. … 혁명 전에는 최상층 계급들조차 야당이 되었다. 호화 살롱과 클럽에서 정부의 정책은 가혹하고 적대적으로 비판되었다. … 그리고 이들의 지위 때문에 우스개 이야기들과 악의에 찬 과장된 이야기들을 일반인들은 대단히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시성 행위가 위험하다는 생각은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최상층 부위의 뇌리에 떠올랐다.― 상권, 5장 무혈쿠데타에 대한 논의 (밑줄은, 자칭 볼셰비키 그룹.)

 

흥미 있는 이야기에 감사한다. 그런데 왜 이야기 속의 지배계급조선일보로 바꿔 읽어도 재미있을 것인데, 재벌로 바꿔 읽을 수는 없는 것일까? 역시, 저~ 앞에서 인용했던 것, 즉 삼성의 이재용 구속으로 대표되는 것 같은, 재벌 역시 이번 격동으로 인해 상당한 손실을 입고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자칭 볼셰비키 그룹은 앞에서 지배계급 일부가 (결과적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운운하셨다. 결국 자칭 볼셰비키 그룹은, 한편에서는 지배계급 일부가 (결과적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으로 나를 공박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재벌 역시 이번 격동으로 인해 상당한 손실을 입고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들어 재벌이 그런 일을 벌였을 리 만무하다고 나를 공박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저들은 이렇게도 얘기한다.

 

자본주의는 그리고 체제 모순이 곪을 대로 곪은 이 제국주의 시대의 자본주의는 사회구성원들의 격동을 주기적으로 선동한다. 모순으로 인한 갈등의 축적과 그 폭발은 의도적 기획의 산물이 아니다. 지배계급의 의식에서 벗어난 객관적인 사회 현상이다. 이렇게 위기에 처하면 그 사회 지배집단 내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분열이 노골화된다. 극심해진 압력에 못 견딘 지배 집단 일부는 (결과적으로) 자기 계급의 이해에 반하는 돌출적 행동을 하고, 그로 인해 스스로 큰 상처를 입히며 심지어 혁명이라는 역사의 전진에 기여하기도 하는 것이다. (밑줄은 인용자.)

 

다만, 조선일보 등은 그럴 터이지만, 한국의 재벌만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 이것이 저들의 주장이다!

이렇게 해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신들의 의도에 반해서 이번 탄핵 정국이 재벌에 의해 기획되고 연출된 것일 수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저들 논법의 자가당착, 자의성을 걷어내면, 조선일보로 바꿔 읽어 보라는 저들의 요구를 재벌로 바꿔 읽어 보라는 요구로 대체 못할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한편, 저들은 밥그릇 싸움에 소외된 조선일보 등이 운운하면서도 그 증거는 일언반구 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거니와, 사실 저들이 어설프게 시도한 것은 일반적・추상적 논의로 구체적 정세분석을 대체하려 한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려니와, 위에서 본 것처럼 저들은 일반적・추상적 논의조차 자의적, 자가당착적으로 전개했을 뿐이다.

 

 

죽 쑤어 개 주고 있다

 

이른바 탄핵정국은 권력재편기・권력투쟁기의 일부였으며, 탄핵이 확정된 지금은 그 권력의 재편을 둘러싼 투쟁이 더욱 가열차게 전개되고 있다. 투쟁하던 촛불 대중은 뒷전의 구경꾼으로 밀리고, 소위 대권을 거머쥐려는 야심가들과 그 종자(從者)들이 전면에 나서 있는 점이 탄핵정국과 크게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지난번 글에서 촛불혁명시민혁명은 동시에 재벌의 반란임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 투쟁이 노동자들이 아니라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주도 하에 전개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를 확인해야 했던 이유는 그 투쟁의 결과 어떠한 계급적 이해관계가 형성・관철될 것인가를 가늠하면서, 그러한 정세・조건 속에서 노동자계급은 무엇을 획득해야 하는가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렇잖아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환상적 혹은 소망적 현실인식을 따라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복창하고 있는 마당에, 탄핵정국승리로 마무리될 때 그러한 환상은 더욱 짙어질 것인바, 이를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탄핵정국에서의 투쟁은 그 당장의 결과로서만 판단하자면, 기본적으로 죽을 쑤어 개에게 줄 수밖에 없는 투쟁이었다. 승리하더라도 주권은 여전히 자본과 제국주의에 있고, 따라서 모든 권력 역시 그들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는 투쟁이었다. 무엇보다도 노동자계급이 그 투쟁을 주도할 어떤 능력도 없다는 점, 그리하여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주도 하에 시민으로서 투쟁에 참가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그럴 수밖에 없는 근거였다. 재벌이 탄핵정국을 기획・연출한 것도 계급 역관계에 기초한 바로 그러한 타산, 즉 박근혜 정권을 훅 날려버려도 그 다음 정권이 더욱더 친재벌적 정권이면 친재벌적 정권이지 그 반대일 수 없다는 타산에 따른 것임도 지적하였다.

그리고 바로 상황이 그랬기 때문에 나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 (소)부르주아가 주도하는 (소)부르주아 혁명의 최대 성과가 (소)부르주아 권력임은 정한 이치이며, 그것은 결코 호오(好惡)의 문제도, 소망이나 의지의 문제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도 오늘날 정세는 그렇게 전개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정세가 그렇게 전개된다고 해서 그 정세 속에서 노동자계급이, 더 널리는 노동자・민중이 예전과 똑같이 정치적 무권리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난번 글에서 말한 것처럼, 설령 최대 성과로서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이 성립된다 하더라도, 그들 역시 노동자계급을 무권리 상태에 묶어두기 위해서 진력을 다하겠지만, 노동자들이 사실상 그 주를 이루는 대중은 더 이상 과거의 대중, 무기력한 대중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회변혁을 위한 노동자당임을 자임하는 사람(들)조차 무비판적으로 내뱉고 있는 소부르주아의 근거 없는 선언, 즉 권력은 민중들의 것임을 몸소 확인했다1)와 같은 것은 결코 아니지만, 지금 광장이라는 정치적 공간은 어느 때보다도 활짝 열려 있고, 인민 대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하게 분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렇다면 이른바 촛불혁명이라는 이 특수한 정국에서 노동자계급은 무엇을 쟁취해야 하는가, 노동자・민중의 당면 요구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문제를 제기한 후,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계급과 노동자계급 운동을 불구로, 기형으로 만드는 원인들과 조건들을 제거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당면의 과제・요구여야 하고, 쟁취해야 할 목표여야 한다. 현 정세에서 쟁취해야 할 당면 목표는, 무엇보다도, 국가보안법을 위시한 반민주・파쇼악법들과 그 제도・기구・관행・인물들을 폐지・척결하여 말 그대로의 민주주의, 특히 사상・학문・언론・결사・통신의 비밀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위시한 저 음습한 반민주・파쇼악법들과 그 제도・기구・관행・인물들, 그리고 그에 의한 사상・학문・언론・결사・통신의 비밀의 자유의 합법적・파쇼적 억압이야말로 노동자계급을 불구의 계급, 기형의 계급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야말로 심지어 노동자계급 내에서조차 종북주의 운운하는 자들이, 아니 사실은 저들 극우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대는 저 종북종북주의라는 무기를 애초에 벼려낸 자들이 목청을 높이며 대거 행세하게끔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야말로 노동자들이 역사와 사회의 진실에 접근하는 것을 불가능하게끔 하고, 그럼으로써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의 발전을 가로막고,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의 정치조직, 자신들의 정당을 갖지 못하도록 억압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정치적] 불구의 계급, 기형적인 계급으로 만들고 있는 원인이자 조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는,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가 없이는, 어떠한 노동자운동도 불가능하다2)는 엥엘스의 가르침을 인용했다.

 

 

자칭 볼셰비키 그룹의 왜곡과 모략

 

그런데 우선 나의 이러한 인용이 저들 자칭 볼셰비키 그룹의 특이한 독법으로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며, 민주주의가 주어지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말라는 듯이! 이 부르주아 체제 속에 가만히 있으라! 읽히는 모양이다. 이렇게 말한다.

 

선생은 자신의 패배주의적 주장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엥겔스를 인용한다. 맑스주의의 위대한 창시자 엥겔스는 그렇게 불려 나와 스딸린주의 2단계 혁명론의 증인이 된다. 선생의 주장은 이렇다: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가 없이는, 어떠한 노동자운동도 불가능하니, 지금 노동자정부나 혁명정당을 제기하는 것은 현실감각을 상실한 자들의 주장이다. 지금은 민주적 권리 획득에 전념해야 한다. 그 민주적 권리가 확보된 뒤에 노동자운동 즉, 노동자정부나 혁명정당 운동을 전개하자.

엥겔스의 저 명제를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 등 민주주의 투쟁은 노동계급에게도 중요하다.라는 뜻으로 읽는 것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선생의 해석처럼, 혁명정당 건설과 노동자정부 등 계급적 요구는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의 확보 뒤에나 가능하다.라는 뜻으로 읽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선생의 해석은, 1865년 프로이센과 2017년 한국이라는, 사회구성체의 성격마저도 이질적인 전혀 다른 두 상황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역시 예의 횡설수설, 그리고 비열한 왜곡, 비방・모략! ― 도대체 누가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가 없이는, 어떠한 노동자운동도 불가능하니, 지금 노동자정부나 혁명정당을 제기하는 것은 현실감각을 상실한 자들의 주장이다. 지금은 민주적 권리 획득에 전념해야 한다. 그 민주적 권리가 확보된 뒤에 노동자운동 즉, 노동자정부나 혁명정당 운동을 전개하자고 주장했단 말인가? 누가 혁명정당 건설과 노동자정부 등 계급적 요구는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의 확보 뒤에나 가능하다고 주장했단 말인가? 이것이 저들의 비판 속에서도 변증법을 2번이나 언급하는 등, 입에 변증법을 달고 사는 자들의 변증법적 독법이런가!

내가 지난번 글에서 저들을 현실과 상관없이 급진적・혁명적으로 사고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했던 것은, 내가 비판의 소재로 삼은 11월 19일자 전단을 저들이 다음과 같이 끝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공동체, 환경, 성평등, 인종평등, 평화 등의 가치와 가장 친화적인 유일한 계급이다. 노동자 정부를 통해서만 박근혜ㆍ최순실 정권이 더욱 악화시킨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그럴 기반은 지금 당장 갖추어져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 정치노선을 지니고, 대중적 지지를 받는, 혁명적 노동자당이 우리에게 없다. 노동계급과 피억압인민의 간절한 요구를 실현하고 도탄에 빠진 삶을 끝장 낼 혁명적 노동자당 건설에, 이 눈부신 대의에, 선진노동자와 먼저 깨달은 청년들이 적극 참여하기를 바란다.

정부의 비리와 부정과 전횡을 낱낱이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자!

박근혜 정권을 타도하자!

민주당을 포함한 자본주의 정치가들은 문제의 해결사가 아니라, 역할 놀음을 번갈아 하는 또 다른 책임자일 뿐이다. 자본주의 정치인들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배격하자!

세 자본가 정당과 친자본주의 시민단체를 배제한 <노동인민 시국대책회의>를 조직하자!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자!

노동자 혁명정당을 건설하자!

 

보다시피, 엥겔스의 저 명제, 즉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 등 민주주의 투쟁은 노동계급에게도 중요할 뿐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1865년 프로이센과 2017년 한국이라는, 사회구성체의 성격마저도 이질적인 전혀 다른 두 상황을 동일시하는(?) 시대착오라고 생각해서인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고는 곧바로 세 자본가 정당과 친자본주의 시민단체를 배제한 <노동인민 시국대책회의>를 조직하자!커니,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자!커니, 노동자 혁명정당을 건설하자!커니 하고, 그야말로 혁명적으로 비약하고 있다. 이러한 전단을 보고, 현실과 상관없이 급진적・혁명적으로 사고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한 것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그런데 이번 비판에서 저들은 이러한 비약을 아주 흥미롭게 정당화한다. 우선, 자신들은 소수의 사회주의 선전그룹이지만, 현실감각이 없는 무책임한 몽상가가 아니며, “‘노동자정부혁명정당 건설을 지금의 역관계 속에서 당장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제기하는 것도 아니고, 노동계급의 계급적 각성의 중요성과 앞으로의 목표를 분명히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며, 그리고 그 점 역시 분명하게 이야기해 왔다며, 다음 구절들을 제시하고 있다.

 

노동자는 공동체, 환경, 성평등, 인종평등, 평화 등의 가치와 가장 친화적인 유일한 계급이다. 노동자 정부를 통해서만 박근혜・최순실 정권이 더욱 악화시킨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그럴 기반은 지금 당장 갖추어져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 정치노선을 지니고, 대중적 지지를 받는, 혁명적 노동자당이 우리에게 없다.―11월 19일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의해 작동되는 사회를 통해서만 인민의 평화롭고 유복한 삶이 보장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급적 이해에 온전히 복무하는, 노동계급과 인류의 역사적 실천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계승한 노동자정당이 필요하다. 물론 그 길은 쉽지 않은 길이며 멀고 험난하다. 그러나 유일한 길이다.―12월 10일 (밑줄은 모두 자칭 볼셰비키 그룹.)

 

스스로가 밑줄을 쳐 강조하고 있는 사실들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 그들로서는 현실감각이 없는 무책임한 몽상가가 아닌 증거인 모양이다. 그러나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가 몽상가가 아니라, 결여되어 있는 그것(들)을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를 비현실적으로 사고하는 자가 몽상가이다. 그러면 저들 자칭 볼셰비키 그룹은 그것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다고, 혹은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하는가? 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당면 과제와 장차의 목표 사이에 괴리가 없도록 하기 위해, 달리 말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그때그때 우리의 행위가 원칙과 목표에 이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자와 후자는 일직선의 시야 속에 함께 들어와야 한다. 마치 농구선수가 공과 골대를 일직선 위에 놓고 슛을 하듯이. 둘 중 하나에 치우쳐 근시나 원시가 되면, 양 극단의 기회주의에 빠지게 된다.

 

혹은, 지금 시기에는 노동자정부, 혁명정당 같은 요구를 결코 내걸지 않아야 하고, 다만 민주적 권리 요구로 우리의 투쟁을 제한하여야 한다고 선생은 믿는다고, 예의 자칭 볼셰비키 그룹변증법적 독법으로 왜곡하고 비방하면서, 그리고 이런 패배적이고 대중추수적 결론에 권위를 부여해 보려고 위대한 맑스주의 공동 창시자 엥겔스를 오종종한 민주주의자로 소환하여 인용하지만, 현재의 당면과제와 궁극적 목표의 일치라는 문제는 사실 너무도 기초적인 삶의 지혜이다라고 한 수 훈계하고 가르치신 후에, 독자들은 다음의 일화만으로도 이 문제를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믿는다며, 다음 글을 인용한다.

 

어린이는 눈 덮인 운동장을 꼿꼿하게 일직선으로 걸어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걸어가다가는 발을 멈추고 서서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가 어느 정도로 똑바른가를 검토해 보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 어린이가 걸어간 발자국은 부분적으로는 곧았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여러 곳에서 바른편으로 또는 왼편으로 굽어 있었다. … 저 어린이의 세심한 주의에도 불구하고, 발자국이 곳곳에서 구부러진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저 어린이가 만일 운동장 저편에 서 있는 큰 포플러나무나 또는 전신주를 일정한 목표로 삼고 그것만을 향하여 한결같이 걸어갔더라면 저 어린이의 발자국의 줄은 매우 곧게 되었을 것이다. 그 어린이는 앞을 향하여 곧게 나가려고 치밀하게 주의를 했었지마는 먼 앞에 움직이지 않는 일정한 큰 목표를 세우는 슬기가 아직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초설에 붙여서」, 류달영

 

참으로 놀랍고 놀랍다! 노동자 정부를 통해서만 박근혜・최순실 정권이 더욱 악화시킨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그럴 기반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도 그 정치노선을 지니고, 대중적 지지를 받는, 혁명적 노동자당을 획득하는 것이, 계급적 이해에 온전히 복무하는, 노동계급과 인류의 역사적 실천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계승한 노동자정당을 건설하는 것이 농구선수가 공과 골대를 일직선 위에 놓고 슛을 하는 것에, 어린이눈 덮인 운동장을 꼿꼿하게 일직선으로 걸어가 보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니 말이다. 그리하여, 당면 과제와 장차의 목표 사이에 괴리가 없도록 하기 위해, 달리 말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그때그때 우리의 행위가 원칙과 목표에 이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자와 후자는 일직선의 시야 속에 함께 들어 오도록 하기만 하면 되는 듯이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아가 운동장 저편에 서 있는 큰 포플러나무나 또는 전신주를 일정한 목표로 삼고 그것만을 향하여 한결같이 걸어 가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고 계시니 말이다!

그런데, 예컨대, 눈 덮인 운동장에서 목표를 보고 똑바로 한결같이 걸어가기만 하는 것처럼, 노동자계급이 혁명적 노동자당을 건설해가는 도정에는 어떤 장애물도 없단 말인가? 그렇게 평탄하고 낭만적인 코스란 말인가? 그런데도 혁명적 노동자당 건설이라는 목표를 향해 투쟁하다가 스러져간 수많은 선배 열사들은 그토록 쉬운 걸 깨우치지 못했단 말인가? 그렇게 쉬운 것도 깨우치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에 그 숱한 목숨들만 낭비했던 말인가?

참으로 뜨로츠끼주의자들답다! 정치적으로 결의만 하고, 선언만 하면, 러시아 사회의 저 뿌리 깊은 관료주의를 청산할 수 있다는 듯 왜장쳤던 저 뜨로츠끼 주의자들 말이다!

참고로, 어쩌면 저들 자칭 볼셰비키 그룹 말고는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이겠지만, 이 세상에는 사표(師表)로 삼아야 할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표로 삼기는커녕 비판하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람도 있다. 그러면, 저들 자칭 볼셰비키 그룹이 사표로 삼아 우리를 훈계하려 들고 있는 저 류달영은 어떤 인물인가?

류달영. 그는, 후에 극우 새마을운동의 모태가 되고 모형이 되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재건국민운동본부의 본부장이자, 그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새마을운동본부로 개편되자 그 고문으로 추대된 인물이다. 과연 저들 자칭 볼셰비키 그룹이 사표로 삼기에 딱 제격인 인물 아닌가!

그건 그렇고, 내가 엥엘스를 인용한 것을 자기들 특유의 변증법적 독법으로 왜곡・비방한 후에 그러한 해석은, 1865년 프로이센과 2017년 한국이라는, 사회구성체의 성격마저도 이질적인 전혀 다른 두 상황을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데에 대해서는, 우스개 삼아 이렇게 묻는 것으로 가볍게 지나가자. ― 귀하들은 1917년 혁명 전 혹은 혁명 당시의 러시아와 2017년 한국의 사회구성체의 성격을 동일시하시기에 당시 뜨로츠끼의 되지도 않은, 유아독존적인 헛소리를 금과옥조시 하시는지? 혹은, 주로 19세기의 경쟁적인 자본주의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그리하여 (국가)독점자본주의3) 시대와는 분명 그 성격이 많이 다를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맑스의 ≪자본론≫은 어떻게 해석하시는지?

다시 그건 그렇고, 한편 저들은 내가 지난번 글에서 언론・출판・사상・통신비밀・집회・결사의 자유 등 민주주의의 획득・확장이 당면 과제로서 중요한 걸 가리켜, 헌법을 준수해달라고 부르주아들에게 얼마나 조아리는지 보기 민망할 정도이다라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그 비난의 직접적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나의 지난번 글 속의 다음 구절들이다.

 

부르주아 정치꾼들, 부르주아 정당들의 저러한 약속을, 민주주의를 철저화하겠다는 저러한 약속들을 가능한 한 많이 받아내야 하고, 그 약속들을 이행하도록 요구하고 강제해야 한다. 저 헌법 제37조의 개폐(改廢)를 요구하고 강요해야 한다. 자신들이 헌법전에 써놓은 자유와 권리의 실질을 보장하도록 요구하고 강제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위시한 일체의 반민주적・파쇼적 법률의 개폐와 그 제도・관행・기구・인물들의 폐지・척결을 요구하고 강제해야 한다. 저들은 자신들이 헌법전에 써놓은 사상・학문・언론・집회・결사・통신의 비밀의 자유 등등을 문자 그대로, 철저하게 보장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 자유와 권리는 다름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요구일 뿐 아니라 본래 (소)부르주아의 자유이고 권리이자 요구이기도 하기 때문일 뿐더러, 이러한 조건들, 이러한 기간을 이용하여 노동자계급은 저들에게 민주주의를 보장하도록 요구하고 강요해야 하며, 선진노동자들은 반드시 민주주의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을 노동자들에게 기필코 각인시켜 내야 한다. (3군데 생략표시를 굵은 글씨로 강조하고 그 밑에 밑줄을 그은 것은 이번에 저들 자칭 볼셰비키 그룹비판으로부터 재인용하면서 재인용자인 내가 강조한 것이고, 나머지 밑줄은 모두 자칭 볼셰비키 그룹.)

 

이 인용문 어디에서 헌법을 준수해달라고 부르주아들에게 조아리고 있단 말인가? 요구하고 강제하는 것이 조아리는 것이란 말인가? 더구나 형식논리상으로도 헌법 제37조의 개폐(改廢)를 요구하고 강요하는 것이 어떻게 헌법을 준수해달라고 … 조아리는 것일 수 있단 말인가? 말로 어떻게 표현했든, 실제로는 조아리는 것으로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라고 항변하실지 모른다.

멋대로 생각하고 멋대로 지껄이는 것이야 저들의 자유이지만, 우선 저들이 그 종파주의적 선전・비난을 위해서 상대방의 글을 어떻게 인용하는가를 보자. 저들 자칭 볼셰비키 그룹은 위에서 보는 것처럼, 나의 글을 3군데를 생략하면서 인용하고 있는바, 첫 번째는 저들은, 그 단행 시기에만 이견을 보이고 있을 뿐, 이구동성으로 개헌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이 계제에, 소위 권력구조뿐 아니라, 인민 대중의 자유와 권리 조항을 헛껍데기로 만들고 있는 저 헌법 제37조의 개폐(改廢)를 요구하고 강요해야 한다 중에서, 밑줄 친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두 번째는, 지금 광장이라는 정치적 공간은 어느 때보다도 활짝 열려 있고, 인민 대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하게 분출하고 있다. 이런 조건 하에서는 저들은 자신들이 헌법전에 써놓은 사상・학문・언론・집회・결사・통신의 비밀의 자유 등등을 문자 그대로, 철저하게 보장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기 어렵다 중에서, 밑줄 친 부분을, 그리고 세 번째는, 왜냐하면, 그들 자유와 권리는 다름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요구일 뿐 아니라 본래 (소)부르주아의 자유이고 권리이자 요구이기도 하기 때문일뿐더러, 앞으로도 수개월이 남은 대선까지의 기간은 저 야심가들이 대중에 아부해야 할 기간이지 그 요구를 억압할 수 있는 기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에서, 역시 밑줄 친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이 얼마나 교활하고 악랄한, 아니 저 자칭 노동자계급의 전위 볼셰비키 그룹다운 정직한 인용인가!

그렇게 자칭 노동자계급의 전위 볼셰비키 그룹다운 정직한 인용에서도 물론 헌법을 준수해달라고 부르주아들에게 조아리는 곳을 찾을 수 없지만, 저들이 교활하게 생략한 부분들은 저들이 종파주의적 악의에서 얼마나 글의 뜻을 왜곡・날조하고 있는지가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자칭 볼셰비키 그룹은 엥엘스로부터 다음을 인용한다.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하고 그것을 헌법과 법률에 표현한다는 것은,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무기를 쥐어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지는, 태어날 때부터 과거의 신분들에 대립하여 인권을, … 보통 직접 선거권,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의 자유, 소수 주민 계급에 대한 일체의 예외법의 폐지 등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게 요구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 그러나 만약 부르주아지가 자기 자신에 충실하지 않게 된다면, 자신의 계급적 이해와 그로부터 나오는 원칙을 배신한다면? … 하나의 길은,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행동하도록 몰아붙이는 것, 즉 가능한 한 그들을 강제하여 …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제공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이 인용문에서도 역시 요구강제에 밑줄을 긋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해서 하는 말씀은 사뭇 다르다. 이렇게,

 

부르주아에게 요구하고 부르주아를 강제한다. 왜? 그 요구들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부르주아적 요구이고 그 요구를 실현하는 것은 그들 부르주아의 계급적 필연이기 때문에. 1865년 프로이센에서 이러한 태도는 과학적이고 노동계급적이었다.

그런데 선생은 자본주의가 세계화된 지 100년도 더 넘어 썩어문드러져 있는 2017년 한국에서, 봉건왕정이 아직도 건재하던 시절의 태도를 반복하라고 가르친다.

 

참으로 과학적이고 노동계급적인 태도요, 논법이다! 묻건대, 현재와 같은 파쇼체제 하에서 이번 탄핵정국과 같은 특별한 조건하에서 헌법과 법률 등을 보다 민주주의적으로 개폐하도록 요구하고 강제하여 다소라도 그것을 획득할 수 있다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무기를 쥐어주는 것일 수 없단 말인가?

그리고 맑스와 엥엘스의 다음과 같은 호소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말씀하실는지?

 

소부르주아 대중은 …[투쟁에서는 주저하고 우유부단하고 빈둥거리지만: 인용자]… 승리가 결정되자마자 그것을 스스로 독점하고, 노동자들에게는 진정하고 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며, 소위 지나침을 방지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승리의 과실로부터 배제한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로 하여금 이를 못하게 할 힘은 노동자들에게 없지만, 그러나 무장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하는 것을 어렵게 할 수 있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지배가 처음부터 몰락의 씨앗을 품고 나중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에 의해서 그들을 축출하는 것을 현저하게 용이하게 할 조건을 강요할 힘은 있다. 노동자들은 충돌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투쟁 직후에도 무엇보다도 우선 진정시키려고 하는 부르주아지의 기도를 최대한 저지해야 하고, 그들의 현재의 테러리스트적인 미사여구를 실행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혁명적인 흥분이 승리 직후에 다시 억압되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 투쟁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투쟁 후에도 노동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요구와 나란히 자신의 고유한 요구를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는 민주주의적 부르주아가 정부를 그 수중에 장악할 준비에 착수하자마자 노동자들을 위한 보장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들은 꼭 필요한 경우에는 이 보증을 강요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일반적으로 새로운 지배자로 하여금 가능한 한 모든 양보와 약속을 확약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이는 그들을 웃음꺼리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4)

 

아차! 나의 이러한 질문들은 상대를 잘못 본 잘못된 질문들이다. 왜냐하면, 저들 자칭 볼셰비키 그룹께서는 놀랍게도 이렇게 단정하고 계시니까!

 

민주주의는 아직 획득되지 않은 미래의 과제인가? 천만에! 1865년에 엥겔스가 말한 그 민주주의 즉, 부르주아 정치체제와 권리들은 이미 백년도 더 전에 획득되었다. 부르주아들은 이미 백 년도 더 전에 세계 모든 곳에서 자신들의 보통 선거권, 공화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쟁취하고 확립했다.

국가보안법이 있으니 한국은 아직 아니지 않느냐고? 천만에! 헌법전에 써 놓은 것처럼 이 체제는 이미 민주공화국이다. 빛 좋은 개살구일지라도, 부르주아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는 자신들이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참아줄 만한 수준만큼(엥겔스) 보장되었다. 특히 부르주아에게! 지난 20주 동안 우리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수십 년 이래 최고치로 누렸다. 그리고 마지못해서였지만, 이 체제는 그것을 합법이라고 인정했다.

 

게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완전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기대하고, 만족스러운 수준의 민주주의에 이르지 못하면 어떠한 노동자운동도 불가능하니 당장은 민주주의 투쟁에(만) 집중하라는 생각은 맑스주의가 아니며, 부르주아에 굴종하는 민주주의 물신론자의 생각일 뿐이라고 또 한번 왜곡과 비방의 예기(藝技)를 발휘한 후 이렇게 설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어느 나라건 예외 없이, 지배계급인 자본가계급의 통치 질서를 의미한다. 피억압인민에게는 어느 나라건 예외 없이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참아줄 만한 수준만큼만 보장된다. 민주주의의 원조라 여겨지는 미국이, 자국에서조차 얼마나 심각하게 인민의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침해하는지를 보라. 테러방지법이 대표적이다. 서유럽이나 북유럽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마찬가지이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특히 부르주아에게 “‘자신들이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참아줄 만한 수준만큼(엥겔스) 보장되었으니, “‘헌법전에 써 놓은 것처럼 이 체제는 이미 민주공화국’”이란다. 게다가 지난 20주 동안 우리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수십 년 이래 최고치로 누렸거니와, 마지못해서였지만, 이 체제는 그것을 합법이라고 인정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라는, 자본주의에서는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이니 그렇게 참고 만족하라는 구역질나는 설교다. 부르주아지가 봉건 귀족이나 왕조로부터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투쟁에 나서면, 그것을 강제하여 떡고물을 얻어먹어야 하지만,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지로부터는 어떤 민주주의적 권리도 쟁취할 수 없으니 현재에 만족하라는 숙명론의 극치이다! 그리고 그 실천적 의미는, 저들이 아무리 한편에서 혁명 운운해봤자, 절망적 체념주의 그것이다!

같은 논리라면, 예컨대 신자유주의적 노동법 개악은 자본주의 국가라면 사실상 어느 나라에서나 예외 없이 벌어지고 있는 세계적 현상인데, 왜 그에 맞서 싸워야 한단 말인가?

이뿐이 아니다. 이렇게 외치고 있다.

 

부르주아 지배가 확고할 때 그들은 여러 자유조치들을 내놓으며 민주주의를 확대한다. 왜냐 하면 갈등 조정 비용이 가장 싸게 드는 효율적 국가운영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에 처할 경우 주저없이 거두어들인다. 파시즘은 그 극단의 형태이다. 그러면, 그럴 때마다 노동계급은 사회주의를 향한 계급의 근본적 이해 추구를 유보하고, 다시 민주주의자로 돌아가서 민주주의 회복(결국 자본주의의 회복)을 위해 부르주아와 더불어 싸워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주장이다.

 

참으로 가관 아닌가? 누가 노동계급은 사회주의를 향한 계급의 근본적 이해 추구를 유보하고 파시즘과 싸우라고 했던가? 파시즘과 싸우자는 주장은 노동자계급에게 계급의 근본적 이해 추구를 유보하라는 주장인가? 물론 저들 자칭 볼셰비키 그룹, 뜨로츠끼주의자들의 변증법으로는 그렇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민주주의 회복결국 자본주의의 회복이라니? 물론 이 또한 저들의 변증법에서는 그렇겠지만!

여기에서, 내가 민주주의의 획득・확장의 중요성을 당면의 과제로 제기한 것 등에 대하여 저들이,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의 민주주의 문제를 위와 같이 해석하면서,

 

현재의, … 노동자계급의 정치적・조직적 역량으로는 분명 언감생심 바랄 수 없는 목표들(선생)노동자정부 혁명정당 등은 결코 제기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당면의 과제・요구오직 국가보안법을 위시한 반민주・파쇼악법들과 그 제도・기구・관행・인물들을 폐지・척결하여 말 그대로의 민주주의, 특히 사상・학문・언론・결사・통신의 비밀의 자유를 획득 즉, 헌법 제37조의 개폐(改廢)를 요구하고 강요하는 것이어야 하는가? (밑줄은 인용자.)

 

따위로 왜곡하는 것 또한 저들의 예의 변증법적 독법의 표현이자 왜곡・모략임을 지적해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하는 것, 즉

 

민주적 권리 획득 투쟁 역시 전략적 목표 아래에 배치해야 한다. 이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민주적 권리를 제약하는 근본원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 요구를 노동자정부혁명정당이라는 요구와 맞세우고, 전자가 성취된 뒤에나 비로소 제기할 수 있는 과제로 후자를 유보하는 것은 맑스주의가 아니며, 모든 악의 원흉인 자본주의 지배자들을 은폐하는 계급 이반이다. (밑줄은 인용자.)

 

따위로 얘기하는 것 또한 저들의 예의 변증법적 독법의 표현이자 왜곡・모략임을 지적해두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부르주아 정치꾼들, 부르주아 정당들의 저러한 약속을, 민주주의를 철저화하겠다는 저러한 약속들을 가능한 한 많이 받아내야 하고, 그 약속들을 이행하도록 요구하고 강제하자는 선생의 주장은 결국 또 민주주의 파괴자인 자본가계급 정치인들을 민주주의 구원자로 만드는 것이다. 버릇처럼 반복되는 계급협조주의이다.

지배계급 입장에서는 참으로 고맙고 편리한 노선이다. 사상・학문・언론・집회・결사・통신의 비밀의 자유 등을 침해하면, 자신들의 명운을 위협하는 노동자정부 요구나 혁명정당 건설 작업을 미루고, 그럴 듯해 보이는 자본가 정치인 꽁무니나 좇게 만들 수 있으니.

 

참으로 제멋대로이다!

그런데 또 저들은 이 제멋대로의 지껄임을 발판 삼아 이렇게 말씀을 이어간다.

 

선생은 이런 노골적인 2단계 혁명론 비판에 대해 독점자본의 악질적 반공모략을 좌익적 언사로 포장하여 떠들어대는 데에는 유달리 유능한 혁명가들의 비난이라고 말한다.

어떤 근거로 그 비판이 독점자본의 악질적 반공모략이라는 것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모든 비판을 종북 좌빨로 모는 어떤 지배집단의 행태와 상당히 닮았다는 것은 확실히 느껴진다. 더욱 분명한 것은, 이렇게까지 끓어오른 에너지가 문제의 근원으로 향하는 것을 한사코 가로막는 것을 보면서 그 독점자본이 상당히 기특해 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방식으로 쓰딸린주의적 2단계 혁명론이 해롭고 위험한 노선이라는 것을 본인 스스로 또 다시 증명하고 있다.

 

어떤 근거로 그 비판이 독점자본의 악질적 반공모략이라는 것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 쓰딸린주의적 2단계 혁명론 (비판) 운운하는 자들을 내가 왜 독점자본의 악질적 반공모략을 좌익적 언사로 포장하여 떠들어대는 데에는 유달리 유능한 혁명가들’”이라고 하는지를 정녕 모른단 말인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뻔한 거짓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저들 뜨로츠끼주의자들과 소위 좌익공산주의자들이 독점자본의 반공・반쏘 모략을 좌익적 언사로 화려하게 포장하여 노동자들과 노동자들의 전우가 될 수도 있는 젊은 지식인들을 오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혹은 보다 객관주의적으로 말하자면, 적어도 내가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와 저들 자칭 볼셰비키 그룹 간의 오랜 인연이라면 인연, 악연이라면 악연 때문에 저들이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저들은 뻔한 거짓말로 눙치면서, 그런 태도가 모든 비판을 종북 좌빨로 모는 어떤 지배집단의 행태와 상당히 닮았다 운운하며 중상・모략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물론 저들 뜨로츠끼주의자들의 장기의 하나이지만.

 

 

탄핵 후 정세와 노동자계급

 

다시 말하지만, 주지하는 것처럼, 대통령 박근혜의 탄핵은 되돌릴 수 없이 확정되었고, 이른바 대권을 사냥하는 수십 명 야심가들과 그 종자들은 가히 피 터지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물론 그 대부분이 부르주아와 그 부속물들이다. 그리고 이른바 공정한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야말로 민주주의의 요체라고 믿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 즉 여러 이름의 시민단체들로 뭉친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또 그들대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예컨대, 대선 전에 선거법을 개정하라!고.

그런데 노동자계급의 목소리는 사실상 들리지 않고 있다. 지난번 글에서도 지적했지만, 한국 노동자계급의 기형성・불구성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 불구와 기형의 주요 원인은 국가보안법을 축으로 하는 파쇼 체제이지만, 민주주의는 (소)부르주아적인 것이다라거나, 혹은 심지어 민주주의 회복은 결국 자본주의의 회복이라는, 저 자칭 볼셰비키 그룹과 같은 혁명가들의 오래고 끈질긴 설교도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의 그런 구역질나는 설교는 (소)부르주아적인 것 운운 따위의 자못 계급적인 언어로 포장되어 있지만, 전혀 몰계급적인 것이고, 구체성을 잃은 것이며, 기만적인 것이다. 그 내용과 형식은 다소 다를 수 있어도 민주주의는 누구보다도 노동자계급에게야말로 절실히 필요한 것이고, 부르주아지의 민주주의 투쟁이 반봉건 투쟁의 일환이었던 것처럼, 민주주의를 획득하고 확장하려는 노동자들의 투쟁은, 저 자칭 볼셰비키 그룹의 비뚤어진 변증법적 독법처럼 노동자계급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을 유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문제 해결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투쟁의 일환을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동화된, 저들 자칭 볼셰비키 그룹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세계화된 지 100년도 더 넘어 썩어문드러져 있는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의 민주주의적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이때, 민주주의적 권리를 위한 노동자들의 요구와 투쟁은 해방을 위한 노동자계급 고유의 요구・투쟁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 70년간에 이르는 투쟁에도 불구하고 파쇼적 억압 때문에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혁명적 정당 하나조차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보다, 한국 노동자계급의 그러한 기형성, 정치적 불구성보다 그 어떤 무엇이 더 노동자계급에게 있어 민주주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줘야 하겠는가?!

비록 재벌의 기획・연출에 따라, 그리고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주도 하에, 그리고 노동자들이 노동자의 정체성이 아니라 시민의 정체성으로 동원되어 촛불혁명이 이루어졌지만, 그 시민의 절대 다수가 이 사회의 계급구조상 사실은 노동자였다는 사실은, 그리고 그들이 승리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또 그리고 유력하게 대권을 노리는 야심가들과 그 집단들이 당분간은 그들 시민 즉 노동자들에게 아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사실은 노동자계급으로서는 쉽사리 만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이다. 요구와 강제, 투쟁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획득・확장하고,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의 해방이라는 궁극적 목적 해결을 위해 한 발 더 전진하는, 전진해야 할 절호의 기회이다.

그리고 그 민주주의의 획득과 확장은 무엇보다도 파쇼 악법들을, 특히 헌법상의 인민 대중의 자유와 권리 조항들을 헛껍데기로 만들고 있는 저 헌법 제37조 제2항, 즉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 운운하는 조항을 개폐하는 것이어야 한다. 헌재가, 재판소들이 아무리 정치적이라고 할지라도 저 헌법 제37조 제2항이 없이는 국가보안법 등의 파쇼 악법들을 합헌이라고 판결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러한 합헌 판결 없다면, 국가정보원 등 각종 파쇼 기구들이 노동자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마구 짓밟을 수도, 나아가 그 기구들 자체가 존속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적어도 마구 짓밟기도, 존속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권을 사냥하고 있는 부르주아 정치가들도, 공정한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야말로 민주주의의 요체라고 생각하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도, 조만간 예정되어 있는 개헌과 관련하여, 권력구조의 개편에만, 즉 권력 나눠먹기에만 관심이 있을 뿐, 이러한 민주주의, 즉 노동자 인민의 자유와 권리의 획득과 확장엔 사실상 관심이 없다. 아니,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노동자 인민과 관련한 한 파쇼적 억압체제가 지속되고 강화되기를 내심 바라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계급적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보다도 민주주의를 내세우던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 역시, 파쇼적 억압체제를 온존시켰을 뿐만 아니라, 1987년의 6월 민주화 대투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서 노동자들이 획득했던 자유와 권리를 억눌렀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간접적이지만 입증된다.

따라서 민주주의, 자유와 권리를 위한 노동자 자신들의 투쟁만이 그 획득, 그 확장을 보장하는 것이며, 대중의 투쟁을 통해서 광장을 열고, 권력재편기를 만들어낸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그를 위한 투쟁을 강화하고, 그리하여 민주주의를, 자유와 권리를 획득하고 확장해야 할 때, 확장할 기회이다.  [노/사/과/연]

 

 

* 지난 3월 25일 정기총회에 앞서 열렸던 3월 월례 연구토론회의 발제문입니다.

 


1) 김태연 투쟁연대위원장, 인적 청산에 그쳐서는 안 돼, 재벌체제 해체 투쟁 어떻게 할 것인가?, 사회변혁노동자당 편 ≪변혁정치≫ 제41호, 2017. 3. 15.; 참고로 김 위원장이 말하는 재벌체제 해체 투쟁재벌의 국가・사회 지배체제 해체 투쟁이 아니라, 말하자면, 재벌 가족의 독점기업집단 지배체제 해체 투쟁, 혹은 소위 족벌체제 해체 투쟁이다. 지금은 자기의 자리를 찾아간, 즉 민주당의 문재인 대선 캠프에 합류한 김상조 교수 등의 재벌 개혁론 혹은 재벌 해체론과, 즉, 극히 반동적인 것인데도 이 사회에서는 진보적인 것으로 선전되고 있고 칭송되고 있는 재벌 효율화・합리화론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지 자못 궁금하다.

 

2) F. 엥엘스, ≪프로이쎈의 군사문제와 독일의 노동자당≫(1865), MEW, Bd. 16, S. 75; 최인호 역, ,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3권, 박종철출판사, 1993, p. 57.; 참고로, 언론의 자유는 당연히 사상・학문의 자유와 통신의 비밀의 자유를 전제하고 있다.

 

3) 주지하는 것처럼, 저들 뜨로츠끼주의자들은 제국주의자들 못지않게, 그리고 제국주의자들과 함께 악마화한 스탈린주의를 구실로 내세운 반쏘주의 때문에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인정할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즉 가당찮게도 레닌의 계승자를 자처하면서도 바로 그 레닌이 애초에 그 특징을 밝히며 규정한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예의 반쏘주의 때문에 인정할 수 없는 숙명을 지닌 자들이기 때문에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하는 대신에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표기하였다.

 

4) 1850년 3월의 중앙위원회의 동맹원에의 호소문, MEW, Bd. 7, SS. 249-250.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Apr 22nd, 2017 | By | Category: 2017년 04월호 제132호, 정세 | 조회수: 648

댓글 한 개 “탄핵정국과 노동자계급*”

  1. 보스코프스키말하길

    한때 저들 IBT(국제 포이십유기/볼셰비키 경향)는 이전에 노정협의 후보전술인가하는 문서를 가지고도 ‘비판적 지지’라고 왜곡 비난한 바 있습니다. 비록 제 4 국제당(인터내셔널)의 핵심이고 위내사특 만덕이/에르네스트 (에즈라) 만델 정도를 제외하면 가장 덜 적대적인 파이지만 여전하게 극복대상의 주의를 지닌 이상 한계 이상의 단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언급한 헌법의 조항은 과거에 입시 공부를 위시한 고등학교 시절에 공공복리를 제외하자는 의견을 들은 바 있고 누군가는 공공복리는 도달목표이지 제한이유가 아니라는 언사도 들은 바 있지만 공공복리를 조항에서 삭제한다고는 해도 여전하게 악법에 대한 (한정) 합헌과 같은 판결 결과 자체는 그대로 나올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소위 사회변혁 노동자당의 소위 해체론이 개혁론과 유사하다는 것은 노정협에서 노정신 또는 현장신문 최근간호에서 비판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