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맑스주의와 민족문제(상)*

 

이오씨프 쓰딸린(Иосиф Сталин)

번역: 신재길(편집위원)

 

* [편집부] 논문 ≪맑스주의와 민족문제≫는 1912년 말‒1913년 초에 빈에서 집필되었는데 민족문제와 사회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1913년에 잡지 ≪계몽≫ 제3‒5호에 쓰딸린의 서명으로 처음 발표되었다. 쓰딸린의 논문은 1914년에 ≪민족문제와 맑스주의≫라는 제목으로 쌍뜨뻬쩨르부르크의 <파도>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내무장관의 명령으로 이 소책자는 모든 공공 도서관과 일반 독서실에서 압수당하였다. 1920년에 이 저작은 민족인민위원회에서 민족문제에 관한 쓰딸린의 ≪논문집≫에 수록되어 출판되었다(뚤라, 국립 출판사). 1934년에 이 논문은 쓰딸린의 ≪맑스주의와 민족 식민지 문제, 논문 및 연설집≫에 수록되었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민족 강령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레닌은 그 시기에 민족문제를 뚜렷하게 내세우게 된 원인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맑스주의의 이론적 문헌들에서 이 사태와 사회민주당의 민족 강령의 제 원칙은 최근 이미 해명되었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쓰딸린의 논문이 최고이다). 1913년 2월에 레닌은 고리끼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에게는 한 사람의 훌륭한 그루지야인이 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및 기타 모든 자료를 수집하여 ≪계몽≫에 게재하기 위하여 중요한 논문을 집필하고 있습니다. 단지 토론을 위해 이 논문의 출판을 유보하자는 제안이 있었을 때 레닌은 강력하게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연히 우리는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논문은 대단히 좋다. 이 논문이 당면의 주요 쟁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트파의 떨거지들에게 원칙적 입장을 조금도 양보하지 못하겠다.(맑스 엥겔스 레닌 연구소의 문헌.) 쓰딸린이 체포된 직후인 1913년 3월에 레닌은 ≪사회민주주의≫ 편집부에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 우리에게는 끔찍한 검거가 있었습니다. 꼬바(Koba)가 체포되었습니다. … 꼬바는 민족문제에 관한 긴 논문(≪계몽≫에 게재하기 위하여)을 썼습니다. 좋습니다! 진리를 위하여 분트나 청산주의의 분리주의자와 기회주의자를 반대하여 싸워야 하겠습니다.(맑스 엥겔스 레닌 연구소의 문헌.)

 

 

 

 

 

러시아에서 반혁명 시기는 천둥 번개를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운동에 대한 환멸과 공동 [투쟁] 역량에 대한 신뢰에 균열을 가져왔다. 사람들은 밝은 미래를 믿었던 동안, 그들은 어느 민족을 불문하고 함께 싸웠다. 그것은 공통의 문제가 무엇보다도 선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마음속에 슬그머니 의심이 들면서 사람들은 민족 별로 각기 제 집으로 흩어져 가기 시작하였다. 누구든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하라! 민족문제가 최우선이다!

이와 동시에 국내의 경제생활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905년은 헛되지 않았다. 농촌에서 농노제의 잔재들은 또 한 번의 타격을 받았다. 기근 후 몇 해에 계속하여 풍작을 거두고, 그 뒤를 이은 산업호황은 자본주의의 진보를 촉진시켰다. 농촌에서의 계급 분화, 도시의 성장, 교역과 통신수단의 발전은 장족의 진보를 이루었다. 이것은 특히 국경 지역에서 그러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러시아의 여러 민족들의 경제적 결합과정을 촉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민족들은 어떤 움직임에 휘말려 들게 되었다…

당시 수립된 입헌제도 역시 민족들을 각성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대체로 신문과 일반도서가 증가되고, 출판과 문화 기관들이 얼마간 자유를 가지게 되었으며, 민족 극장이 증가된 것 등, 이 모든 것이 의심할 것 없이 민족적 감정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두마(Duma)와 그 선거운동 그리고 정치 그룹들은 민족들이 보다 활기차게 움직일 신선한 기회들을 가져다주었고 민족들이 움직일 새롭고 넓은 활동 무대를 제공하였다.

위로부터의 일어난 전투적 민족주의의 파고(波高)와 권력 당국자들에 의해 행해진 자유애호적인 변방지역들에 대한 일련의 억압적 조치들은 도리어 밑으로부터의 민족주의의 파도를 불러일으켰다. 이 민족주의는 때때로 노골적인 쇼비니즘의 형태를 취하였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시오니즘1)의 확산, 폴란드에서 쇼비니즘의 성장, 따따르인 사이의 범이슬람주의, 아르메니아인, 그루지야인, 우끄라이나인 가운데서 민족주의의 확산, 반유대주의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주민들의 일반적 편향 ― 이 모든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민족주의의 파고는 더욱더 거세어져서 노동자 대중을 집어삼킬 위험이 있었다. 그리하여 해방운동이 쇠퇴하면 할수록 민족주의의 꽃은 더욱더 활짝 피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사회민주당은 민족주의에 반격을 가하며 대중을 일반적 유행병으로부터 보호하는 고귀한 사명을 지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회민주당, 오직 이 당만이 국제주의라는 단련된 무기, 또 계급투쟁의 통일과 불가분성으로 민족주의에 맞서 그것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족주의의 파고가 더욱 거세어질수록 사회민주당은 러시아 내에 있는 모든 민족의 노동자들이 친선과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더욱 높여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민족주의 운동과 직접 맞서고 있는 변방지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누구보다도 확고한 신념이 요구된다.

그러나 모든 사회민주주의자가 다 그 임무를 감당해 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변방지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그러하였다. 과거에 공통의 임무들을 강조했던 분트는 이제 그 자신의 특수하고 순전히 민족적인 목적들에 우위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분트는 안식일을 준수할 것유대어를 승인할 것이라는 투쟁구호를 자신의 선거운동에서 선언하기까지 했다. 까프까쓰가 분트의 뒤를 따라갔다. 원래 나머지 까프까쓰 사회민주주의자들처럼 문화적 민족자치를 거부했던 까프까쓰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한 부분이 이제 이것을 당면 요구로 내세우고 있다. 민족주의적 동요를 외교적으로 승인한 청산주의자 협의회에 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이로부터 민족문제에 대한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견해가 아직은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민족문제에 대한 진지하고 전면적인 토론이 필요하다. 투철한 사회민주주의자는 민족주의적 혼란에 대해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이든 간에 확고하고 끈질기게 대항해야 한다.

 

 

1. 민족

 

민족이란 무엇인가?

민족이란 우선 공동체, 즉 사람들의 일정한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인종적인 것도 종족적인 것도 아니다. 현대 이딸리아 민족은 로마인(Romans), 튜턴인(Teutons), 에트루리아인(Etruscans), 그리스인(Greeks), 아랍인(Arabs) 등으로부터 형성되었다. 프랑스 민족은 갈리아인(Gauls), 로마인(Romans), 브리튼인(Britons), 튜턴인(Teutons) 등으로부터 구성되었다. 다양한 인종과 종족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영국, 독일 및 다른 민족도 마찬가지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이란 인종적(racial) 공동체도 아니고 종족적(tribal) 공동체도 아니며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람들의 공동체인 것이다.

반면에, 키루스[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창건자: 역자]나 알렉산더 제국은 그들이 비록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왔고 다른 종족과 인종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민족이라고 일컬을 수 없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민족이 아니라 이런저런 정복자의 승리나 패배에 따라 뿔뿔이 흩어지기도 하고 함께 모이기도 하는 여러 집단의 임시로 느슨하게 연결된 혼합체였다.

그러므로 민족이란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혼합체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견고한 공동체인 것이다.

그러나 공고한 공동체가 다 민족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역시 견고한 공동체들이지만, 아무도 그들을 민족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민족 공동체와 국가 공동체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국가는 공통의 언어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지만, 민족 공동체는 다른 무엇보다 하나의 공통의 언어 없이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는 점이다. 오스트리아의 체코 민족과 러시아의 폴란드 민족이 만약 각각의 공통된 언어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민족으로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국가적 통일성(integrity)은 그들의 국경 내부에 다수의 서로 다른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물론 우리는 사람들의 구어(口語)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공식화된 정부 언어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언어의 공통성은 민족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이것은 서로 다른 민족이 항상 어느 곳에서나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한다거나 하나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의 민족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민족마다 공통 언어를 갖지만, 서로 다른 민족이 반드시 다른 언어를 쓰는 것은 아니다! 몇 개의 언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민족은 없지만, 이것이 똑같은 언어를 쓰는 두 개의 민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영국인과 미국인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들이 하나의 민족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노르웨이인과 덴마크인, 영국과 아일랜드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예컨대 영국인과 미국인은 그들의 공통 언어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의 민족을 이루지 못하는가?

첫째, 그들은 함께 생활하지 않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이란 오직 장기간의 주기적인 교류의 결과로써만, 그리고 대대로 내려오면서 함께 살아 온 결과로서만 형성된다. 그러나 장기간의 공동생활은 공통된 지역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영국인과 미국인은 이전에는 같은 지역인 영국에 거주했고 하나의 민족을 이루었다. 이후에, 영국인들 중 일부가 영국으로부터 새로운 지역, 미국으로 이주했고, 그 새로운 지역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미국 민족으로 형성하게 되었다. 지역의 차이가 서로 다른 민족을 형성케 하였다.

따라서 지역의 공통성은 민족의 한 가지 특징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지역의 공통성은 그 자체만으로 민족을 이루지 못한다. 이것과 아울러, 민족은 민족의 다양한 부분들을 하나의 단일한 전체로서 결합시키는 내부의 경제적 연계를 필요로 한다. 영국과 미국 사이에는 그러한 연계가 없었고 그래서 두 개의 다른 민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각 지방이 그들 사이의 분업과 교통수단의 발달 등의 결과로서 경제적 전일체로 상호 연결되지 않았다면, 미국인들은 하나의 민족이라 불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가령 그루지야인을 예로 들어 보자. 개혁 이전 시기의 그루지야인들은 같은 지역에서 살았고 또 동일한 언어로 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엄밀하게 말해서 한 민족을 이루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러 개의 단절된 공국(公國)으로 갈라져 있어서 공통의 경제생활을 할 수 없었으며 수 세기를 두고 서로 싸웠으며 페르시아인과 투르크인을 부추겨서는 서로를 파멸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어떤 운 좋은 제왕이 나서서 공국들을 일시적으로 우연히 통일해 본 일은 있었지만 그것도 기껏해야 표면적이며 행정적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제후들의 변덕과 농민들의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이내 해체되어 버렸던 것이다. 경제적으로 분산되어 있는 그루지야에서는 이와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루지야는 19세기 후반기에 와서야 민족으로서 출현하였다. 그 당시에는 농노제도의 붕괴와 국내 경제생활의 발전, 교통수단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발생이 그루지야의 각 지방 간에 분업을 확립하고 공국들의 경제적 고립성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공국들을 하나의 전일체로 연결하여 놓았다.

봉건 제도의 단계를 거쳐 왔고 자국 내에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기타 민족들에 대하여서도 역시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즉, 경제생활의 공통성경제적 연계는 민족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전부는 아니다. 앞서 말한 내용 외에도, 민족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정신적 기질의 특성을 또한 고려하여야 한다. 민족들은 그들의 생활 조건뿐만 아니라 민족 문화의 특성으로 드러나는 정신적 기질에 의해서도 역시 구별된다. 영국, 미국 그리고 아일랜드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세 개의 구별되는 민족을 구성하는 것은, 그들이 상이한 생활 조건에 따라 대대로 내려오면서 형성된 특수한 심리적 성격에 적지 않게 기인한다.

물론, 심리적 성격 혹은 민족성이라 불리는 것 자체는 관찰자에게 포착되지 않는 어떤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의 민족에 공통된 문화의 특성을 표현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확실한 것이며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민족성이란 한번 고정되어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라 생활 조건의 변화에 따라 변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개개의 주어진 시기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민족의 면모(面貌)에 그 흔적을 남기게 된다.

그러므로 문화의 공통성을 표현하는 심리적 기질의 공통성은 민족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민족의 모든 특징을 말하였다.

민족이란 언어, 지역, 경제생활 그리고 문화로 표현되는 심리적 기질 등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발생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람들의 공고한 공동체이다.

모든 역사적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민족 역시 변화의 법칙을 따르고, 그 자신의 역사, 그 시작과 끝을 가진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위의 특징 중에서 어느 하나를 분리하여 그것으로 민족을 규정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더욱이 이러한 특징들 중에 단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민족은 더 이상 민족이 되지 못한다.

공통의 민족성을 가진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이 공통의 민족성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서로 다른 지역에 살며,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면 그들은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러시아의 유대인, 갈리시아(Galician)의 유대인, 미국의 유대인, 그루지야(Georgian)의 유대인 그리고 까프까쓰(Caucasian) 고원의 유대인이 그런 경우인데 우리 생각으로는 그들은 하나의 민족을 구성하고 있지 않다.

이번에는 지역이나 경제생활의 공통성을 가진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이들도 언어와 민족성의 공통성이 없다면 하나의 민족을 이루지 못한다. 예를 들면, 발트(Baltic) 해의 게르만인과 레트인(Letts)이 그 경우이다.

마지막으로, 노르웨이인과 덴마크인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들은 다른 특징들이 없기 때문에 하나의 민족이 못 된다.

오직 이 모든 특징들을 다 구비하였을 때만 그것은 민족이 된다.

민족성이 민족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본질적 특징이고 다른 모든 특징들은 민족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정확히 말하면 민족의 발달을 위한 조건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컨대, 이것은 R. 쉬프링어(Springer)에 의해 주장되었던 견해이며, 특히 오스트리아에서 민족 문제에 관한 사회민주주의 이론가로 잘 알려진 O. 바우어(Bauer)의 견해이다.

그들의 민족 이론을 살펴보자.

쉬프링어에 따르면, 민족은 비슷하게 사고하고 동일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의 연맹체이다. 그것은 더 이상 지역(Scholle)과 무관한[쓰딸린의 강조] 현대인의 문화적 공동체이다. (R. 쉬프링어, ≪민족문제≫, Obshche-stvennaya Polza 출판사, 1909년, p. 43.)

즉 비슷하게 사고하고 동일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의 연맹체는 비록 그들이 연결되지 않았더라도, 또 그들이 어디에서 살고 있더라도 무관하게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이다.

바우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그는 묻는다. 그것은 사람들을 하나의 민족에 결속시키는 언어 공동체인가? 그러나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은 … 동일한 언어를 쓰지만 하나의 민족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공통의 언어를 갖지 않는데도 하나의 민족이다. (O. 바우어, ≪민족문제와 사회민주주의≫, Serp 출판사, 1909년, pp. 1-2.)

 

그렇다면 민족이란 무엇인가?

 

민족이란 상관적 성격공동체(relative Charaktergemeinschaft)이다. (바우어, 같은 책, p. 6.)

 

그러나 그 성격, 이 경우에 민족성이란 무엇인가?

민족성은 하나의 민족에 속한 사람들을 다른 민족에 속한 사람들과 구별하는 기질들의 총합, 하나의 민족을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하는 육체적 정신적 성격의 복합체이다. (바우어, 같은 책, p. 2.)

물론 바우어는 민족성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사람들의 성격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운명에 의해 규정된다. … 민족이란 다름 아닌 운명의 공통성을 지닌 공동체이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활 수단을 생산하고 자기의 노동생산물들을 분배하는 조건에 의해 규정된다. (바우어, 같은 책, pp. 24-25.)

 

이제 우리는 바우어가 말하는 가장 완전한 민족의 정의에 다다랐다.

 

민족이란 운명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성격의 공통성으로 묶어진 사람들의 총체(Gesamtheit)이다. (바우어, 같은 책, p. 139.)

 

이것은 결국 지역, 언어 및 경제생활의 공통성과의 필수적 연관을 떠난, 운명의 공통성에 기초한 민족적 성격의 공통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우에 민족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경제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서로 다른 지역에 살며, 대대로 내려오면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어떠한 민족의 공통성이 있을 수 있는가?

바우어는 유대인들이 비록 공통의 언어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민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서로 완전히 떨어져 있고, 다른 지역에 살며, 다른 언어를 쓰는 그루지야의 유대인, 다게쓰딴의 유대인, 러시아의 유대인과 미국의 유대인들 사이에 어떠한 운명의 공통성과 민족적 응집력이 있겠는가?

위에서 언급한 유대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루지야인, 다게쓰딴인, 러시아인, 미국인들 속에서 경제적ㆍ정치적인 생활을 같이하고 있고, 그들과 똑같은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그들의 민족성에 뚜렷한 흔적을 남겨 놓게 된다. 만일 유대인들에게 어떤 공통점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종교, 공통의 조상, 그리고 민족성의 약간의 잔재들이다. 이 모든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화석화된 종교의식과 사라져 가는 심리적 잔재들이 그들을 둘러싼 살아 있는 사회적ㆍ경제적ㆍ문화적인 환경보다 더 강력하게 이들 유대인들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고 어떻게 진정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오직 이러한 가정 위에서만 유대인들이 하나의 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우어의 민족과 유심론자들의 신비적이고 자기만족적인 민족정신과 무엇이 다른가?

바우어는 민족의 변별적 특징(민족성)과 그들의 생활 조건을 분리하여, 양자 사이에 통과할 수 없는 장벽을 세웠다. 그런데 민족성이 생활 조건의 반영이 아니고 무엇이며 환경으로부터 받은 영향의 응축물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민족성을 말할 때 그것을 낳은 지반으로부터 분리시켜 고립된 한낱 민족성 그 자체에만 국한시키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나아가,18세기 말과 19세기 초반, 미국이 여전히 뉴잉글랜드로 알려져 있던 때, 영국 민족과 미국 민족을 구별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물론 그것은 민족성은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인은 영국인으로부터 유래되었고, 영어라는 언어뿐 아니라, 물론 그들이 그렇게 쉽사리 버릴 수 없는 영국인의 민족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조건들의 영향 아래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독특한 성격을 자연스럽게 발달시켜 왔다. 아직은 다소 공통적인 성격이 있다고 해도 그들은 당시에 이미 영국인과 분명히 다른 민족을 형성했다! 하나의 민족으로서 뉴잉글랜드는 당시 민족으로서의 영국과 명백하게 달랐는데, 이는 그것의 독특한 민족성 때문이 아니며, 영국과는 다른 그 환경이나 생활 조건들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민족을 구별하는 유일한 특징이란 없다는 점이 명백하다. 오직 여러 특징들의 총합만이 존재하는데, 민족을 비교할 경우에 때때로 하나의 특성(민족성), 혹은 다른 특성(언어), 혹은 이따금씩 제3의 특성(지역, 경제적 조건들)이 보다 뚜렷이 부각될 뿐이다. 민족이란 이 특성들이 모두 결합된 것이다.

민족을 민족성과 동일시하는 바우어의 견해는 민족을 그 토대로부터 떼어내고 이를 보이지 않는 자기충족적인 힘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그 결과 민족이란 것이 살아서 활동하는 민족이 아니라 어떤 신비하고 포착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이 되고 만다. 거듭 말하건대, 예를 들어 그루지야인, 다게쓰딴인, 러시아인, 미국인 그리고 여타의 유대인으로 구성되는 유대 민족, 즉 (그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게 된 이래)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지구의 다른 곳에 거주하고 서로 보지 못하고 평시거나 전시거나 간에 같이 행동하지 못하는 그 구성원들이 어떤 종류의 민족이란 말인가?!

이건 결코 민족이 아니다. 사회민주당은 이런 종이 껍데기 민족을 위하여 민족 강령을 작성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민주당은 오직 행동하고 운동하는 살아 있는 민족만을 다루는데, 그것은 민족이 행동하고 움직이기에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우어는 역사적 범주인 민족을 인종학적 범주인 종족과 명백히 혼동하고 있다.

그러나 바우어는 스스로 그의 주장이 가진 약점을 분명히 느끼고 있다. 자기 저서 서두에서 그는 유대인이 단연코 민족이라고 주장한 반면(같은 책, p. 2), 그 저서의 마지막에 가서 그는 스스로 정정하여,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유대인들을 다른 민족에 동화시키기 때문에 그들(유대인들)이 민족으로서 존립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같은 책, p. 389)라고 자신의 견해를 수정한다. 바우어에 따르면, 그 원인은 유대인들이 배타적인 거주지역을 갖지 못한(같은 책, p. 388) 때문인 것 같다. 이에 반해, 예를 들어 체코인은 그러한 지역을 갖고 있으므로 바우어의 견해에 따르면 민족으로서 살아남을 것이다. 요컨대 [유대인이 민족으로서 존립 불가능한: 역자] 원인은 영토의 부재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바우어는 유대인 노동자들이 민족자치를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다(같은 책, p. 396).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지역의 공통성이 민족의 특성 가운데 하나임을 부인하는 그 자신의 이론을 무의식중에 뒤집어엎고 말았다.

그런데 바우어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는 그의 저서의 서두에서 유대인은 공통의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으나 그럼에도 하나의 민족이다라고 명확하게 단언한다. 그러나 그는 130쪽에 이르자 방향을 바꿔서 의심할 여지없이, 공통의 언어가 없이는 민족은 존재할 수 없다(같은 책, p. 130)[쓰딸린의 강조]라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바우어는 언어는 인간의 상호교류의 가장 중요한 도구이다(같은 책, p. 130)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와 동시에 그가 증명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 즉 언어의 공통성의 의의를 부인하는 그 자신의 민족 이론이 갖는 불합리성을 무의식중에 증명하였다.

따라서 관념론적인 실로 엮어 놓은 이 같은 이론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반박하고 있다.

 

 

2. 민족 운동

 

민족은 역사적 범주일 뿐 아니라,특정 시대, 자본주의가 발흥하는 시대에 해당되는 역사적 범주이다. 봉건제의 청산과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은 동시에 사람들이 민족으로 형성되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서유럽의 경우가 그러하다.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이딸리아인 등은 봉건적 분산성에 대해서 승리하는 자본주의의 의기양양한 전진의 시기에 민족으로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 경우에 있어서 민족의 형성은 동시에, 그 민족들이 독자적인 민족국가로 전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영국 민족, 프랑스 민족, 그리고 다른 민족들은 동시에 영국 및 기타 국가들을 의미한다. 아일랜드는 이러한 과정의 예외로 남아 있지만 일반적 상황을 바꾸지는 못한다.

동유럽에서는 사태가 약간 다르게 진행되었다. 서구에서는 민족들이 국가로 발전했던 반면, 동구에서는 몇 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 다민족 국가들이 형성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가 그런 경우이다. 오스트리아에서 게르만인은 정치적으로 가장 발달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오스트리아 내의 제 민족들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시키는 일을 담당했다. 헝가리에 있어서 국가 조직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은 마자르인―헝가리 민족들의 중핵―이었으며 헝가리를 통합한 것도 그들이었다. 러시아에서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강력하고 잘 조직된 귀족적 군사관료제를 가지고 있던 대러시아인들이 민족들을 통합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것이 동유럽에서 전개된 양상이었다.

이 독특한 국가 형성 방법은 봉건제가 아직 청산되지 않은 곳, 자본주의 발달이 미미한 곳, 뒤쳐져 있는 민족들이 스스로를 아직 경제적으로 완전한 민족으로 결합시킬 수 없었던 곳에서만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동유럽 국가에서도 발달되기 시작했다. 상업과 통신수단들이 발달하고 있었다. 대도시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민족들은 경제적으로 통합되어 가고 있었다. 자본주의는 뒤쳐져 있던 민족들의 평화로운 생활 가운데에서도 발생하여 그들을 일깨우고 그들을 행동하도록 고무시키고 있었다. 출판과 극장의 발달, 의회(오스트리아)와 두마(러시아) 활동은 민족감정을 강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신흥 인리겐찌야들은 민족이상에 충만되어 이러한 방향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뒤쳐져 있다가 이제야 독자적인 생활에 눈뜬 민족들은 이제는 그들 스스로 독립적인 민족국가를 형성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국가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지배민족의 지배계층으로부터 매우 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그들은 너무 늦었던 것이다! …

이렇게 하여 오스트리아 안에서 체코인, 폴란드인 등이 민족을 형성해 갔다. 크로아티아인 등은 헝가리에서 그렇게 했으며, 레트인, 리뚜아니아인, 우끄라이나인, 그루지야인, 아르메니아인 등은 러시아에서는 그렇게 했다. 서유럽에서 예외적이었던 것(아일랜드)이 동구에 있어서는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서유럽에서 아일랜드는 이 예외적인 처지에 대하여 민족 운동으로 대응했다. 동유럽에서도 자각한 민족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유럽의 청소(靑少)한 민족들을 투쟁하도록 추동한 상황은 이와 같이 조성되었다.

투쟁은 확실히 모든 민족과 민족 사이에서가 아니라 지배민족과 뒤쳐졌던 민족들의 지배계급들 사이에서 시작되어 격화되었다. 투쟁은 대개 지배민족의 대부르주아지에 대항한 피억압민족의 도시 소부르주아지에 의해(체코인과 게르만인), 혹은 지배민족의 지주에 대항하는 피억압민족의 농촌 부르주아지에 의해(폴란드의 우끄라이나인), 아니면 지배민족의 지배귀족에 대항하는 피억압민족의 민족적 부르주아지 전체에 의해(러시아의 폴란드인, 리뚜아니아인, 우끄라이나인) 수행되었다.

부르주아지가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흥 부르주아지에게서 주요한 문제는 시장 문제이다. 그들의 목적은 상품을 팔고 다른 민족의 부르주아지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열망은 그들 자신의 국가, 그들의 국내 시장을 확보하는 것이다. 시장은 부르주아지가 민족주의를 배우는 최초의 학교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개 시장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배민족의 반(半)봉건적이고 반(半)부르주아적인 관료는 체포와 금지라는 그들 자신의 방법으로 투쟁에 개입한다. 지배 민족의 부르주아지―크든 작든 간에―는 보다 신속하게 결정적으로 그들의 경쟁자를 다룰 수 있다. 여러 세력이 결속하고 일련의 제한적인 조치들이 외국인 부르주아지에 대해 취해지고 조치들은 탄압책으로 넘어간다. 투쟁은 경제적 영역에서 정치적 영역으로 확산된다. 이동의 자유에 대한 제한, 언어의 탄압, 선거권의 제한, 학교 폐쇄, 종교 탄압 등이 경쟁자의 머리 위에 덧씌워진다. 물론 그런 조치들은 지배민족의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특별히 지배관료층이라는 특수집단의 목적을 추구한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보면 그것은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든 러시아에서든 간에 이 문제에 있어서는 부르주아 계급과 관료층은 같이 손잡고 나아간다.

모든 면에서 탄압받는 피억압민족의 부르주아지는 자연히 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그들은 모국의 하층민에게 호소하고 그들 자신의 문제가 민족 전체의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조국을 부르짖기 시작한다. 그들은 조국의 … 이익을 위하여 동포들 속에서 군대를 모집한다. 하층민 또한 부르주아지의 호소에 항상 무관심한 것은 아니어서 그들은 부르주아지의 깃발 주위로 모여든다. 위로부터의 탄압은 하층민에게도 영향을 미치어 그들의 불만을 일으킨다.

이리하여 민족운동이 시작된다.

민족운동의 힘은 민족의 광범한 계층인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이 그에 가담하는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깃발 아래 결집하는가 안 하는가의 여부는 계급 모순의 발달 정도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화와 조직화의 정도에 달려 있다. 계급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자신의 확고한 깃발이 있으므로 그들은 부르주아지의 깃발 아래 모일 필요가 없다.

농민들에 관한 한, 민족 운동에서 그들의 참여는 주로 탄압의 성격에 달려 있다. 만일 아일랜드의 경우와 같이 탄압이 토지에 영향을 준다면, 그때 농민 대중은 즉각 민족 운동의 깃발 아래로 모여든다.

다른 한편 예를 들어, 그루지야에는 심각한 러시아 민족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데, 이는 원래 대중들 가운데 그러한 민족주의를 부채질할 러시아 지주와 러시아 대부르주아지가 그곳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루지야에는 반아르메니아 민족주의가 있다. 이는 그곳에 있는 아르메니아인 대부르주아지가 아직 채 강화되지 못한 그루지야 소부르주아지를 압박하여 그들을 반아르메니아 민족주의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인들에 의해, 민족 운동이 대중적 성격을 획득하면서 더욱더 확대되어 가는가(아일랜드와 갈리시아에서처럼), 아니면 시시한 말다툼과 간판을 위한 싸움으로 전락하여 일련의 사소한 충돌로 바뀌는가(보헤미아의 일부 소도시처럼)가 결정된다.

물론 민족 운동의 내용이 어느 곳에서나 동일할 수는 없다. 즉 그 내용은 전적으로 운동이 제기하는 다양한 요구들에 의해 결정된다. 아일랜드에서는 운동이 토지분배 운동의 성격을 지니며 보헤미아에서는 언어운동의 성격을 지닌다. 어떤 곳에서는 시민의 평등과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고, 다른 곳에서는 자기 민족의 관리를 채용하거나 그들 자신의 의회를 설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민족 운동의 다양한 요구는 민족 일반을 특징짓는 다양한 측면들(언어, 지역 등)을 흔히 보여 주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아무 데서도 바우어의 모두 포괄하는 민족성에 관한 요구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당연하다. 왜냐하면 민족성 그 자체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이어서 J. 쉬트라서(Strasser)가 올바르게 지적한 바와 같이 정치가는 그것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J. Strasser, ≪노동자와 민족(Der Arbeiter und die Nation)≫, 1912년, p. 33.)

이것이 대체적인 민족 운동의 형태와 특징들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발흥하는 자본주의의 조건하에서 진행되는 민족 투쟁은 부르주아 계급 상호 간의 투쟁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간혹 부르주아지는 민족 운동에 프롤레타리아트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며, 그때 민족 투쟁은 표면상 전 민족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상일 따름이다. 본질에 있어서 이는 언제나 부르주아적 투쟁이며 주로 부르주아지의 이익과 이윤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족 억압정책에 대항해 투쟁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 이동의 제한, 선거권 박탈, 언어 억압, 학교 폐쇄 등의 탄압은 부르주아지보다 더하지는 않을지라도 그에 못지않게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이런 상태는 종속민족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적 능력이 자유롭게 발전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만약 집회와 강의에서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고 학교가 폐쇄된다면, 따따르인(Tatar)이나 유대인 노동자들의 정신적 능력을 충분히 개발하는 것에 대해 진정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 억압정책은 다른 측면에서 보아도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업에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광범한 계층의 시선을 사회적 문제, 즉 계급투쟁의 문제로부터 민족문제, 즉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공통적인 문제로 돌린다. 또 이는 이익의 조화를 거짓으로 선전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이익을 제거하고 노동자들을 정신적으로 노예 상태에 묵어 두기 위한 훌륭한 토양을 제공한다. 이는 모든 민족의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는 사업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한다. 만일 폴란드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여전히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정신적 속박 상태에 놓여 있다면, 만일 그들이 여전히 국제 노동운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면, 이는 주로 당국의 오랜 반폴란드 정책이 이러한 속박의 토양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의 해방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런데 탄압정책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압박하는 체제로부터 민족들을 서로 대립시키는 선동체제, 거의 살육과 약탈의 체제로 나아간다. 물론 후자의 체제는 어디서나 항상 가능한 것이 아니며, 그것이 가능한 곳―기본적인 시민의 권리의 부재한 곳―에서 이는 자주 소름 끼칠 정도로 나타나고 노동자들의 단결의 과업을 자칫하면 피와 눈물 속에 잠기게 한다. 까프까쓰와 남부 러시아는 수많은 예들을 제공해 준다. 분할하여 지배하라 ― 이것이 선동정책의 목적이다. 또 이런 정책이 성공하는 곳에서,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엄청난 해악이 되며 국내에서 모든 민족의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한다는 과업에 심각한 장애로 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들이 어느 민족에 속하든지 간에, 모든 노동자 동지들이 하나의 단일한 국제적 군대에 완전히 통합되고, 부르주아지에의 정신적 속박으로부터 신속하고 최종적으로 해방되며, 그리고 그들의 정신적 능력을 충분하고 자유롭게 개발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은 민족과 민족을 서로 대립시키는 모든 형태의 선동정책뿐만 아니라 가장 졸렬한 형태에서 가장 교묘한 형태까지 모든 형태의 민족 탄압정책에 맞서 싸우고 또 계속 싸울 것이다.

그래서 모든 나라의 사회민주당은 민족자결을 선언하는 것이다.

민족자결권은 민족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또 그 누구도 민족의 삶을 강제로 간섭할 권리, 학교와 다른 시설을 파괴하고 관습과 풍습을 더럽히고 언어를 억압하고 권리를 침해할 권리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것은 사회민주당이 민족의 온갖 관습과 제도를 지지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민주당은 어떤 민족의 압제에 대해서도 맞서 싸우면서, 오직 민족 자신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민족의 권리만을 지지할 따름이며 동시에 그 민족의 유해한 풍습과 제도로부터 민족의 근로계층이 벗어날 수 있도록 그것에 반대하여 선동할 것이다.

민족자결권은 민족이 그 생활을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마련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민족은 자치의 기초 위에 자신의 생활을 마련할 권리를 지닌다. 민족은 다른 민족과 연방 관계를 맺을 권리를 지닌다. 민족은 분리의 권리를 갖는다. 각 민족들은 주권을 가지며 모든 민족은 평등권을 가진다.

이는 물론 사회민주당이 민족의 그 어떤 요구든지 다 지지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민족은 구제도의 낡은 질서를 회복할 권리도 갖는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민주당이 특정 민족의 어떤 기관에 의해 취해진 그런 결정에 동의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옹호하는 사회민주당의 의무와 다양한 계급들로 이루어진 민족의 권리는 서로 다른 별개의 문제이다.

민족자결권을 위한 투쟁에서, 사회민주당의 목표는 민족 억압정책을 종식시키고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민족들 사이의 분쟁의 지반을 제거하고 그 분쟁을 약화시켜 이를 최소한도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야말로 계급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과 부르주아지의 정책을 본질적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민족들 간의 투쟁을 격화시키고 부추기며 민족 운동을 계속 전개하며 첨예화시키려고 애쓴다.

이것이 바로 계급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의 민족적 깃발 아래 결집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것은 또 바우어가 옹호하는 이른바 진화적 민족 정책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자신의 진화적 민족 정책을 현대 노동자계급의 정책과 동일시하려는 바우어의 시도(바우어의 저서, p. 166)는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을 민족들 간의 투쟁에 순응시키려는 시도이다.

본질적으로 부르주아 운동으로서의 민족 운동의 운명은 자연히 부르주아지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다. 민족 운동의 최종적 소멸은 오직 부르주아지의 멸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오직 사회주의의 지배 아래서만 완전한 평화는 수립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도 민족 투쟁을 최소화하고 그것을 뿌리에서부터 와해시키며, 가능한 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손실을 입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예컨대 스위스와 미국에서 나타난 바다. 이렇게 되려면 나라를 민주화하고 민족들이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3. 문제의 설정

 

민족은 자기의 운명을 자유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민족은 물론 다른 민족들의 권리를 유린하지 않으면서 마음대로 생계를 꾸릴 권리가 있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만일 민족의 대다수, 누구보다도 특히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고려한다면 민족은 바로 어떻게 생계를 마련해야 하며 그 장래의 헌법은 어떤 형태를 취하여야 할 것인가?

민족은 자신의 일을 자주적으로 처리할 권리를 갖는다. 심지어 분리 독립할 권리조차 갖는다. 그러나 이것은 민족이 어떠한 조건하에서든지 그렇게 해야 한다거나, 자치 혹은 분리 독립이 어느 곳에서나 항상 민족에게, 즉 그 대다수인 근로계층에게 유리하리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민족으로서 남까프까쓰의 따따르인들이 그들의 의회에 모여, 지주들과 이슬람 율법학자들에게 굴복하여 구제도를 복구하고 국가로부터 분리 독립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 자결에 관한 조항의 뜻에 따르면, 그들은 전적으로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이것이 따따르 민족의 근로계층을 위한 것인가? 사회민주당은 지사들과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민족문제의 해결에서 대중들에 대한 지도력을 획득할 때 무관심하게 바라만 볼 수 있겠는가? 사회민주당은 사건에 개입하여 민족의 의사에 일정하게 영향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회민주당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 제안, 따따르 대중들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제안을 갖고 앞에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떤 해결책이 근로대중들의 이해에 가장 부합될 것인가? 자치, 연방제, 아니면 분리 독립인가?

이 모든 것은 그 민족을 둘러싸고 있는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들에 의하여 해결되는 문제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건들이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시기에 정확했던 결정이 다른 때에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

19세기 중반에 맑스는 러시아령 폴란드의 분리에 찬성하였는데 그는 옳았다. 왜냐하면 당시 그것은 고급문화를 파괴하는 하급문화로부터 고급문화를 해방시키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에 문제는 이론적인 것, 학술적인 문제였을 뿐 아니라 실천적인 것, 실제적 현실의 문제였다…

19세기 말에 폴란드 맑스주의자들은 이미 폴란드의 분리에 반대하는 선언을 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옳았다. 왜냐하면  50년을 경과해 오는 동안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러시아와 폴란드를 더욱 밀접하게 만드는 격심한 변화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시기 동안, 분리의 문제는 실천의 대상으로부터 국외의 지식인 이외에 그 누구도 흥미를 갖지 않는 학술적 논쟁의 문제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폴란드의 분리 문제가 다시 유행될 수 있는 일정한 국내외적 정세가 조성될 가능성을 조금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로부터 민족문제의 해결은 오직 발전하고 있는 역사적 조건들과의 연관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어진 민족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조건들이 특정 민족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미래의 정치체제는 어떤 형태 취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열쇠이다. 그래서 매 민족마다 문제를 고유하게 해결하는 것이 요구될 수 있다. 만약 문제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이 요구되는 데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민족문제에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족문제를 해결하려는 매우 광범하지만 극히 피상적인 ―분트에게서 유래하는― 방법에 대한 우리의 단호한 반대를 표명해야만 한다. 그것은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과 남부 슬라브 사회민주당에서 취하는 손쉬운 방법을 말하는 것인데 그들은 민족문제를 이미 해결하였으니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 당들을 그저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말하자면 오스트리아에 대해서 옳은 것은 러시아에 대해서도 모두 옳다는 것이 전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경우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하고 또 결정적인 것이 간과되고 있다. 즉 일반적으로 러시아의 구체적 역사적 조건들, 특히 러시아 안에서 살고 있는 매 민족들의 생활상의 구체적 역사적 조건들이 간과되고 있다.

예를 들어, 유명한 분트 분자 V. 꼬쏘프쓰끼(Kossovsky)가 말한 것을 들어 보자.

 

분트 4차 대회에서 문제[즉, 민족문제: 쓰딸린]의 원칙에 대해 토론할 때, 대회 참가자의 한 사람이 남부 슬라브 사회민주당의 결의안의 정신에 입각하여 문제를 처리하기를 제안하였는 데 그것은 전반적인 찬성을 얻었다. (꼬쏘프쓰끼, ≪민족문제≫, 1907년, pp. 16-17.)

 

그 결과 민족자치를 대회가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다만 그뿐이다! 러시아의 실제 상황들에 대한 어떤 분석도 없고, 러시아 내 유대인들의 생활 조건에 대한 어떤 연구도 없었다. 그들은 먼저 남부 슬라브 사회민주당의 해결 방법을 표절하고, 그 다음 그것에 찬성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그것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분트 분자들이 러시아의 민족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방법이다.

사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 남부 슬라브 사회민주당 결의안의 정신으로(몇 개의 하찮은 수정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브륀(1899)2)에서 그들의 민족 강령을 채택했을 때, 그들이 이를테면 완전히 러시아와 다른 방법으로 문제에 접근하고 또 물론 러시아와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우선, 문제의 설정을 보자. 문화적-민족자치를 주장하는 오스트리아 이론가들이며 브륀 민족 강령과 남부 슬라브 사회민주당의 결의안의 통역자인 쉬프링어(Springer)와 바우어(Bauer)가 어떻게 문제를 제기하는가?

쉬프링어는 말한다.

 

일반적으로 다민족국가가 가능한지 어떤지, 또 특수하게는 오스트리아의 여러 민족들이 단일한 정치체제를 구성해야 하는지 어떤지는 우리가 여기서 대답할 것이 아니라 해결된 것으로 전제해야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전제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우리의 연구가 물론 무근거한 것일 수 있다. 우리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이들 민족들이 함께 살지 않으면 안 되는 한, 어떤 법적 형태 그들이 함께 가장 잘 살 수 있는 방법인가 하는 것이다[강조는 쉬프링어]. (쉬프링어, ≪민족문제≫, p. 14.)

 

이와 같이 오스트리아의 국가 통합이 출발점이 되고 있다. 바우어도 역시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우리는 오스트리아 민족들이 현재 그들이 존재하는 동일한 국가연방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연방 내의 민족들 사이의 관계와 그들의 국가에 대한 관계가 어떠해야 할지를 탐구한다. (바우어, ≪민족문제와 사회민주당≫, p. 399.)

 

여기서도 역시 오스트리아의 국가 통합이 우선적인 문제로 되고 있다.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이러한 방법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민족이 분리 독립할 권리를 갖는다는 민족자결권에 관한 견해를 [민족문제의] 출발의 기초로 삼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분트 분자 골트블라트(Goldblatt)조차 러시아 사회민주당 2차 대회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민족자결의 입장을 버릴 수 없었다는 점을 수용하고 있다. 골트블라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결권에 대해 반대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느 민족이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경우에 우리는 그것에 반대해서는 안 된다. 만일 폴란드가 러시아와의 정식결혼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일에 간섭할 수 없다.

 

이것은 모두 옳은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과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출발점이 동일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라는 점이다. 이러한데, 오스트리아인들의 민족 강령을 차용할 가능성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다음으로, 오스트리아인들은 민족의 자유를 사소한 개량으로 천천히 실현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문화적-민족자치제를 실천적 대책으로서 제안하면서 근본적 변화나 민주주의적 해방운동은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고 그에 대해 어떠한 전망도 갖고 있지 않다. 이와 반대로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은 개량에 의지하지 않고 민족의 자유에 대한 문제를 예상되는 근본적 변화나 민주주의적 해방운동과 연관시키고 있다.

바우어는 말한다.

 

물론, 민족자치가 위대한 결단, 과감한 행동의 결과로 생기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오스트리아는 한 걸음 한 걸음 발전의 완만하고 어려운 투쟁의 과정 속에서 민족자치를 향해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그 투쟁의 결과로 입법과 행정은 만성적인 마비 상태로 될 것이며, 새로운 정치체제는 하나의 위대한 입법적 행동이 아니라 개개의 지역과 개개의 공동체에서 많은 개별적 법률제정에 의해 창출될 것이다. (바우어, ≪민족문제≫, p. 422.)

 

쉬프링어 역시 똑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쓰고 있다.

 

나는 이러한 종류의 기관들[즉, 민족자치 기관: 쓰딸린]이 일 년 또는 십 년 내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프로이센의 행정기구 하나를 재편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 프로이센은 그들의 기초적 행정기관을 수립하는 데 이십 년이 걸렸다. 그러므로 오스트리아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며 얼마나 많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될 것인가는 짐작할 만하다. (쉬프링어, ≪민족문제≫, pp. 281-282.)

 

이 모든 것은 아주 명확하다. 그러나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은 민족문제를 과감한 행동과 연결시키지 않을 수 있는가? 맑스주의자들은 민족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부분적 개량이나 수많은 개별적 법률제정에 기대할 수 있는가? 그러나 만일 그들이 기대할 수 없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면, 오스트리아인들과 러시아인들이 지닌 투쟁 방법과 또 그들의 전망은 완전히 달라야 한다는 점이 명백하지 않는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그들이 오스트리아의 일면적이고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불철저한 문화적-민족자치에 그들 자신을 제한할 수 있는가? 이는 두 가지 중의 하나이다. 표절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러시아에서의 과감한 행동을 기대하지 않거나 그들이 그것을 기대하지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든가이다.

마지막으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직면해 있는 당면한 과제는 완전히 다르고, 결과적으로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서로 다르다. 오스트리아는 의회제도의 조건하에 있으며 현재의 조건에서 오스트리아의 발전은 의회 없이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의회 생활과 입법은 민족 정당 간의 심한 갈등으로 중지되는 일이 종종 있다. 이것은 오랫동안 오스트리아가 겪어 왔던 만성적인 정치적 위기를 설명해 준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의 민족문제는 정치 생활의 중심적 문제, 사활적 문제로 되고 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당 정치가들이 무엇보다 민족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물론 현존하는 의회제도의 기초 위에서, 의회주의적 방법으로 노력하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러시아에서는 그렇지 않다. 첫째, 러시아에는 의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여 감사합니다.3) 둘째로 ―이것이 중요한 점인데― 러시아 정치 생활의 중심은 민족문제가 아니라 농지 문제이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문제의 운명과 따라서 민족의 해방 역시 러시아에서 농지 문제의 해결, 즉 봉건적 잔재의 청산, 즉 국가의 민주화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쉬프링어는 쓰고 있다.

 

오스트리아 의회가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어떤 개혁이든 민족 정당들 내부의 대립을 야기시켜 민족들의 단결을 파괴한다는 사정에 기인한다. 따라서 당 지도자들은 개혁을 연상시키는 모든 것을 회피한다. 오스트리아의 진보는 일반적으로 박탈할 수 없는 법적 지위가 민족들에게 보장될 경우에만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민족들이 의회 안에서 호전적 민족 그룹을 계속 유지시킬 필요가 없게 할 것이며 또 그들의 관심을 경제적 및 사회적 문제들의 해결로 전환시킬 것이다. (쉬프링어, ≪민족문제≫, p. 36.)

 

바우어 역시 동일하게 말하고 있다.

 

민족적 평화는 무엇보다 먼저 국가에 필수적이다. 언어라는 매우 어리석은 문제에 의해, 아니면 언어적 경계 또는 모든 신설 학교에 대한 흥분한 사람들에 의해 일어나는 다툼에 의해 입법 행위가 중지되는 것을 국가로서는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민족문제가 전혀 다른 차원에 있다는 점도 역시 분명하다. 러시아에서는 민족문제가 아니라 농지 문제가 진보의 운명을 결정한다. 민족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다.

이와 같이 문제 설정이 서로 다르며 전망과 투쟁 방법이 서로 다르며 당면 임무가 서로 다르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민족문제를 단지 공간과 시간을 떠나서 해결하려는 현학자들만이 오스트리아의 예를 적용하거나 강령을 차용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은가?

다시 말하자면, 출발점으로서의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들, 문제를 설정하는 유일하게 올바른 방법으로서 변증법적 문제설정 ― 이것이 바로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다. (다음 호에 계속)  [노/사/과/연]


1) [편집부] 시오니즘는 유대인 부르주아지의 반동적이며 민족주의적인 한 조류로서 지식인들과 가장 후진적 유대인 노동자층 속에 지지자를 가지고 있었다. 시오니스트들은 유대인 노동자 대중을 노동계급의 공동 투쟁에서 분리시키려고 하였다.

오늘날 시오니즘적 단체들은 쏘련과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을 반대하며 자본주의 국가와 식민지에서의 혁명운동을 반대하기 위한 미제국주의자들의 책략을 수행하는 대리인으로 되고 있다.

2) [편집부]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브륀(Brünn) 대회는 1899년 9월 24‒29일 간 진행되었다. 대회에서 채택된 민족문제에 대한 결의안은 본 저작의 다음 장에 인용되고 있다.

3) [편집부] 짜르의 재무 대신(후에 총리 대신)인 꼬꼬프쩨프(Kokovtsev)가 1908년 4월 24일 국가 두마에서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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