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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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찬 | 연구위원장

 

 

[목차]

 

머리말

제1장 세계관과 철학의 근본문제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 철학의 근본문제

  3. 세계의 통일성

제2장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의 역사

  1. 철학의 발생

  2. 데모크리토스 노선과 플라톤 노선의 투쟁

  3. 아리스토텔레스

  4.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에 의한 고대 원자론의 계승, 발전

  5.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 토마스 아퀴나스

  6.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브루노, 갈릴레이, 뉴턴

  7. 베이컨, 홉스

  8. 데카르트

  9. 스피노자

  10. 로크

  11. 라이프니츠

  12. 흄

  13. 디드로, 엘베시우스, 돌바하

  14. 볼테르, 루쏘

  15. 칸트

  16. 피히테, 셸링

  17. 헤겔

  18. 포이에르바하

제3장 맑스, 엥겔스에 의한 철학에서의 혁명

  1. 맑스, 엥겔스에 의한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의 창시

  2. 변증법적 유물론의 범주들

  3. 자유와 필연성

  4. 목적의식성

  5. 사적 유물론의 범주들

  6. 레닌, 쓰딸린, 마오쩌뚱, 그람시에 의한 맑스주의 철학의 발전

제4장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사조에 대한 비판

  1. 콩트, 밀

  2. 쇼펜하우어, 니체

  3. 후설

  4. 하이데거

  5. 프로이트

  6.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7. 샤르트르

  8. 하버마스

  9. 알튀세르, 발리바르

  10. 푸코, 들뢰즈, 데리다, 라캉

  11. 지젝   ㆍㆍㆍ <이번 호에 게재된 부분>

  12. 자율주의

  13. 이진경

  14. 롤즈의 ≪정의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제5장 과학의 발전과 그에 대한 철학적 일반화

제6장 철학과 종교

   

제4장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사조에 대한 비판

 

11. 지젝

 

지젝은 20세기 말, 그리고 21세기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유럽의 철학자이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분열되어 생겨난 슬로베니아 공화국 출신인 지젝은 1980년대 말부터 철학 활동을 해 왔고 최근까지 많은 저술들을 쏟아 냈다. 변증법적 유물론, 레닌주의, 금융위기 등을 화두로 삼아 수많은 말을 쏟아 내고 있는데 정작 그것들은 새로운 전망의 제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혼란된 상들만을 제기하고 있을 따름이다. 지젝에게는 패배주의가 짙게 깔려 있다.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대격변을 체험한 그는 변증법이 거세된 헤겔, 맑스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환상성,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에 대한 부정 등을 제출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젝은 헤겔을 반복해야 하고 레닌을 반복해야 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격변이 지젝으로 하여금 이렇게 비비 꼬인 방법론을 취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먼저 변증법과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지젝의 입장을 검토하고 이어서 레닌주의에 대한 입장 등을 살펴보도록 하자.

지젝은 변증법적 분석의 목표를 카오스의 질서로의 전도라고 파악한다. 그리고 마술적 전환의 이러한 계기를, 카오스의 질서로의 이처럼 예견 불가능한 전도가 변증법적 분석의 진정한 목표이다.1) 변증법적으로 분석하고 변증법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의 결과가 예견 불가능한 카오스(혼돈)라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실제로 지젝의 저작은 혼돈으로 가득 차 있다. 지젝의 저작에서 일관된 것은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 변증법적 유물론의 부정이지만 그것을 전개하는 논리들은 혼돈 자체이다. 변증법이 이끄는 지점은 혼돈이라는 지젝의 주장은 지젝이 실은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변증법은 인류의 지적 발전의 결과 성립한 논리학이자 인식론이며 나아가 자연에도 관철되는 변증법(자연의 변증법, 존재의 변증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성과가 지젝에 의해서 깊은 혼돈 속으로 내던져지고 있다. 그러면 지젝이 혼란시키고 있는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 보도록 하자.

지젝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20세기의 궤변으로 치부한다. 놀랍게도 서구 철학사의 정반대 쪽 끝에서도,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불리는 20세기 궤변론에서 이와 동일한 점진적 구분법을 발견할 수 있다.2) 이와 같이 지젝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하나의 궤변으로 치부하는데 지젝에게서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젝은 쓰딸린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서술을 인용하고서는 그에 대해 철학적 차원의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쓰딸린의 전체주의적인 악행을 비난하는 것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비판을 대체한다. 그러면서 지젝은 고대 그리스의 궤변론자들(쏘피스트들)을 비판하며 관념론을 세운 플라톤을 치켜세우면서 플라톤 사상의 해방적 잠재력3)을 주장한다. 이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궤변으로 치부한다는 점에서 고대 그리스에서 궤변론자들과 싸운 플라톤이 지금 부각되어야 한다는 지젝의 의도를 보여 준다.

그러면 변증법에 대한 지젝의 태도는 어떠한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지젝은 변증법적 분석의 요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그와 반대로 변증법적 분석의 요점은 모든 현상이, 발생하는 모든 것이 자체에 고유한 방식으로 실패하며, 자체의 핵심에 균열, 적대, 불균형을 함축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데 있다.4) 변증법이 혼돈(카오스)의 질서로 이끈다고 본 지젝은 변증법에서 실패, 균열, 불균형을 본다. 이는 지젝이 20세기 사회주의의 붕괴로 인한 패배주의와는 별도로 변증법 자체에 대해 왜곡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변증법은 대립물의 통일로서 모순의 운동, 그리고 그러한 운동 속에서 관철되는 비약과 발전을 가리키는 사상이고 법칙이다. 그러나 지젝에게서는 변증법이 발전의 사상이라는 것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생략된 채로 변증법은 실패와 불균형의 사상이라고 재단되고 있다. 이렇게 지젝이 변증법에 대해 왜곡되게 이해하는 이유는 운동이라는 개념이 지젝에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데 이는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지젝은 헤겔에 대해 키에르케고르적인 반복의 개념으로 파악한다고 한다. 이 책의 목표는 단순히(또는 좀 덜 단순한 방식으로) 헤겔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키에르케고르적 의미에서) 헤겔을 반복하는 것이다.5) 그런데 반복 개념으로써 운동 개념을 대체한다면, 그리하여 운동 개념을 상정하지 않고는, 변증법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변증법에 대한 피상적이고 왜곡된 이해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개념의 변증법이거나 자연의 변증법이거나 그것은 운동을, 그것의 변화, 발전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젝의 변증법은 운동이 빠진 변증법이기에 변증법이 실패, 불균형 등으로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지젝은 진리에 대해서도 매우 왜곡된 주장을 한다. 우리가 결국 얻게 되는 것은 선행하는 환상들을 극복한/지양한 진리가 아니다. 유일한 진리는 모든 가능한 환상들이 논리적으로 상호 연결된 정합성 없는 건축물이다. … 이것이 바로 헤겔이 ≪정신현상학≫(그리고 다른 수준이기는 하지만 ≪논리과학≫)에서 행했던 작업이 아닐까?6) 진리가 정합성 없는 건축물이라면 진리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변증법이 카오스로 이끈다는 주장을 한 지젝은 진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카오스적인 주장을 한 것이다. 또한 이는 지젝이 헤겔의 변증법에서 일정한 정합성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 즉, 헤겔의 변증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헤겔 철학 전체가 정합적 진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헤겔과 같은 역사적 지위를 갖는 철학자에게서는 한계와 오류의 측면과 성과의 측면, 정합적인 진리의 측면을 정확히 가려내어 인류의 지적 자산으로 삼는 것이 필요한데 지젝에게서는 헤겔의 변증법이 정합성을 갖지 못하는 것, 즉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단히 매도되고 있는 것이다.

지젝은 유물론과 관념론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바꾸고 있는데 이는 철학의 근본 문제를 수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궁극적 분수령은 존재의 물질성(오직 물질적인 것들만이 실제로 존재한다)이 아니라 없음/공백과 관련되어 있다. 유물론의 근본적인 공리는 공백/없음이 (유일하게 궁극적) 실재라는 것, 즉 존재와 공백은 구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7) 여기서 지젝은 물질이 일차적인가 의식이 일차적인가라는 철학의 근본 문제를 없음/공백, 즉, 비존재가 일차적이라는 주장으로 대체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혼란된 주장이다. 관념론과 유물론의 구분은 근대 철학에서 물질과 의식 중 어느 것이 일차적인 것인가의 문제로 확립되었으며 이는 정확한 것이다. 그런데 지젝이 주장하는 없음/공백(공허, 비존재, 무)이라는 것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서 유래된 것인데 고대 원자론의 존재와 비존재의 동일성의 문제를 철학의 근본 문제로 지젝이 바꿔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는 철학의 근본 문제를 대신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운동과 관련된 개념이다. 즉, 존재와 비존재(무)의 통일로서 운동 혹은 생성이라는 관념이 고대 원자론과 헤겔에 의해 제기된 바 있는데 이는 운동이 모순임을, 대립물의 통일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없음/공백(공허, 비존재, 무)이라는 것은 유물론과 관념론을 가르는 개념이 아니라 운동의 본질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정확히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이 또한 지젝 스스로 개념의 혼동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보여 준다.

지젝은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개념을 구사하지만 그것의 내용은 매우 뒤틀려져 있다. 지젝은 유물론의 초석이 되는 개념인 물질 개념을 비판하며 외적 세계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라고 한다. 간단히 말해 메피스토펠레스의 논리의 악마는 독립적인 외적 현실에 대한 믿음은 믿음의 문제이며, 신성한 물질의 존재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신학의 기본교리임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유혹하려고 한다.8) 여기서는 외적 세계의 존재가 믿음의 문제라는 주장, 그리고 변증법적 유물론이 신학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외적 세계, 주관, 주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가 단지 믿음의 문제인가? 그렇다면 이 세상에 오직 자기 자신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라도 된다는 말인가? 외적 세계의 객관적 실재성, 주관으로부터의 독립성에 대한 인식은 결코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자연, 동물의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오면서부터 인간은 이 세계에 대해 무수한 관찰을 했고 과학적 인식의 싹을 틔워 나갔다. 그러면서 신앙에 대한 지식의 투쟁이 시작되면서 획득한 인식은 자연은, 외적 세계는 인간의 인식, 주관으로부터 독립한 객관적 실재라는 것이었다. 산과 강, 하늘, 땅의 존재와 그 움직임은 인간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수백만 번의 관찰의 결과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 외적 세계, 자연의 객관적 실재성에 대한 인식은 과학이 시작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외적 세계의 존재는 결코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의 문제, 지식의 문제, 과학의 문제였던 것이다.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물질이라는 개념은 신성한 개념이 아니라 인류의 지적 발전, 과학 발전의 산물로서 정립된 것이다. 레닌이 물질 개념에 대해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한 객관적 실재라는 철학적이면서 동시에 과학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말의 과학 발전을 철학적으로 일반화한 결과였다. 이 과정에는 소위 신성함의 문제는 끼어들 여지가 없었고 따라서 지젝이 믿음이니 신성함이니 하고 주장하는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과학적 성격을 흠집 내고 마타도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물질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지젝은 과감하게 객관적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객관적 현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현실은 이미 초월론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9) 객관적 현실에 대한 부정! 이것은 사실 주관 혹은 신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객관적 현실을 부정하면 과학적 사고는 불가능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지젝은 키에르케고르적으로 해석된(변증법이 거세된) 헤겔과 라캉을 버무려서 기형적인 철학을 제출하고 있는 것이다.

지젝은 모든 것이 변한다라는 상식적인 진리를 부정하면서 이러한 부정이야말로 참다운 변증법적 이성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고 주장한다. … 모든 고정된 형태들을 용해시키는 생성의 영원한 흐름이라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주제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것이 만물은 원초적인 카오스로부터 출현하며, 그런 다음 다시 그것에 의해 삼켜진다는 소위 심오한 통찰, 즉 고대 우주론들에서부터 스탈린주의적인 변증법적 유물론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지속하여 온 지혜의 형태와 철저하게 양립 불가능한 변증법적 이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다.10) 모든 것이 변한다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변증법과 대립된다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을 승인하는 것이다. 사물을 고정되게, 불변의 것으로서, 영원한 것으로서 파악하는 것이 곧 형이상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젝은 그러한 인식을 진정한 변증법적 이성의 첫걸음이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지젝의 변증법은 실제로는 변화의, 운동의, 발전의 법칙으로서 변증법이 거세된 변증법이다. 실제로는 모든 것이 변한다라는 인식이야말로 변증법의 첫걸음이다. 이 세계가, 외적 자연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항상 유동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인식이 자연의 변화 자체를 반영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변증법의 논리학과 인식론이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젝은 변증법의 권위는 취하고자 하나 변증법의 내용은 거세하는 왜곡된 접근을 하고 있다.

지젝의 변증법에 대한 왜곡은 모순 개념에 대한 왜곡에서 정점에 달한다. 헤겔에게서 투쟁의 진리는 항상 대립물의 상호 파괴로, 그것은 도저히 피할 길 없이 필연적이다. ― 어떤 현상의 진리는 항상 자신의 자기말살, 자신의 직접적인 존재의 파괴에 있다.11) 투쟁의 진리는 대립물의 상호 파괴라는 것! 지젝이 이렇게 파악하는 것은 키에르케고르로 인하여 운동 개념을 사고하지 못하고, 객관적 실재로서 물질 개념을 사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질의 운동을 사고한다면, 대립물의 운동이 새로운 물질의 운동으로 전화된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지만 이러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지젝은 대립의 철저한 관철은 대립물의 상호 파괴라는 형이상학적인 비극(혹은 희극)으로 나아간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대립은 두 계급의 상호 파괴로 끝나며 인류의 존재의 파괴에 있다는 것이 지젝의 인식이다. 이는 지젝이 한편으로 변증법을 운동과 발전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 20세기 사회주의의 붕괴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인식과 전망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혼돈, 카오스, 이것이 지젝의 소위 변증법적 이성의 내용이다.

물질 개념을 부정하는 지젝은 신학적인 주장을 하는데 무로부터의 창조가 그것이다. 태초에(비록 신화적인 태초지만) 실체적 일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없음 자체가 존재한다. 모든 일자는 두 번째로 오며, 이 없음의 자기 관계 맺기를 통해 출현한다. 다시 말해 부정으로서 무는 기본적으로 어떤 것, 실정적인 존재자의 부정이 아니라 자체의 부정이다.12) 모든 일자(즉, 존재 혹은 세계)는 없음(무)의 자기 관계 맺기를 통해 출현한다는 것은 세계(일자들)가 없음, 무로부터 출현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중세 신학에 대한 과학의 투쟁을 통해 수백 년 전에 극복되었던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발상이 21세기 지금 지젝에 의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젝은 부정은 존재자의 부정이 아니라 부정 자체의 부정이라고 한다. 언뜻 매우 변증법적인 주장으로 들리는 이 말은 실제로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에서, 이 세계에서 부정, 무는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존재 자체가, 존재와 비존재(무, 부정)의 통일이다. 존재와 비존재의 통일로서 운동, 삶이 현실적 대상, 사물의 변증법적 과정이다. 존재가 사멸하는 것은 존재 자체에 부정, 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정은 부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혹은 대상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대상은 새로운 대상, 새로운 존재로 전화하게 된다. 이러한 것이 현실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인데 변화 자체를 부정하는 지젝은 부정 자체에 대한 부정, 무에 대한 무라는 공허한 궤변을 마치 변증법적 인식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지젝이 현실에 개입하는 철학자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소리 높여 외치는 반자본주의자라는 점에서 지젝이 자유라는 개념에 어떠한 입장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자. 지젝은 자유를 현실과 무관한 것으로 본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자유로워지려면 우리의 자유로운 행위에 어떠한 실정적 내용도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따라야 한다.13) 어떠한 실정적 내용, 즉 현실과 관계된 내용도 자유에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 이 주장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현실은 원인과 결과 관계가 기계적으로 관철되는 영역이므로 자유는 그 영역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한다는 주장으로 들린다. 그러나 현실적 필연성과 무관한 자유가 성립 가능할까? 이러한 자유와 필연성 간의 관계의 문제에 대해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자유는 파악된 필연성(스피노자부터 헤겔 그리고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된 논리)도 또 간과된(무시된) 필연성(인지과학과 뇌과학의 명제. 즉 자유는 우리 의식을 규정하는 생명-뉴런 과정을 모르는 우리 의식의 사용자의 환상이다)도 아니라 상정된 것이자 미지의 것/알려질 수 없는 것으로서의 필연성이라는 것이다.14) 인식된 필연은 맑스주의에서 자유의 기초로서 작용하는 개념이다. 인식된 필연에 기초하여 자기 자신과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곧 자유라고 엥겔스는 말한 바 있다. 간과된(무시된) 필연은 자신에게 관철되는 필연을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환상적인 자유 즉, 현실적인 비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알려질 수 없는 것으로서의 필연은 무엇인가? 필연이라는 점에서 우리를 규정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알려질 수 없기 때문에, 즉,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이 자유인가? 필연에 대한 종속은 자유가 아니라 부자유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소위 자유라고 주장하는 지젝은 결국은 자유에 있어서 신 개념을 끌어들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옳았다. 즉 자유를 주는 것은 ―신이 욕망하는/결핍되어 있는 타자를, 타자 속의 결여를 가리키는 이름인 한― 인격화된 신이다. … 만약 나의 존재의 실체가 완전한 인과관계적 망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불완전한 장이면 나는 자유롭다.15) 자유를 주는 것은 (인격화된) 신이라는 이 과감한 주장! 이것은 종속된 자유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은 스스로 자유를 쟁취할 수 없고 결국은 신에 의해 자유를 부여받는다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인과관계의 망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불완전할 때 자유롭다는 것은 현실로부터 분리되는 불완전한 존재일 때 비로소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며 이는 현실에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현실에서는 스스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이것이 지젝의 결론이다.

자유에 대해 이렇게 비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지젝은 사회 이론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지젝은 사회적 생산의 최고 형태는 상인의 생산이라는 허황된 주장을 한다. 시장 생산에서 나는 나 자신의 욕구와는 무관한 대상을 제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생산의 최고 형태는 상인의 생산이다.16) 자신의 욕구를 위한 생산은 전형적인 사적 생산이다. 그리고 자신의 욕구가 아닌 생산 예를 들면 시장을 위한 생산은 사회적 생산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장을 위한 생산이 사회적 생산의 최고 형태인가? 시장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사회를 위한 생산은 그야말로 사회적 생산의 최고 형태가 아닌가? 시장을 넘어서는 사회를 위한 생산, 즉, 사회주의적 생산은 지젝의 관념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한편으로 20세기 사회주의 붕괴로 인해 지젝이 인식한 사회주의의 불가능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젝이 과학적인 정치경제학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 전화되는 것이 아니라 대립물의 상호 파괴(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상호 파괴)로 끝난다는 것이 지젝의 논리이다. 그러나 20세기 사회주의는 비록 그 대부분이 붕괴되었지만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서 시장을 위한 생산을 넘어서는 사회를 위한 생산의 전형을 보여 주었었다. 계획경제는 그 자체가 사회를 위한 생산을 전제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지젝과 같이 대립물의 상호 파괴라는 관점에서 시장을 위한 생산을 사회적 생산의 최고 형태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위한 생산의 과거, 현재, 미래를 검토, 연구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다.

지젝은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그리고 만약 20세기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이 세기 안에 일어난 모든 극단적 현상들은 결코 단일한, 모든 것을 아우르는 철학적 내러티브 안에 통일될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즉 도저히 기술의 진보, 민주주의의 등장, 공산주의 실험의 실패, 파시즘의 공포들, 식민주의의 점진적 종말을 통일시켜 20세기의 정신현상학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17) 20세기의 역사 발전을 통일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이는 지젝이 20세기 사회주의의 붕괴로 인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전망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바른 관점은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실험의 성과와 한계, 오류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또 20세기, 그리고 21세기의 자본주의 발전이 가져온 현실, 그 진보와 모순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통일적 인식은 이러한 전망 속에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통일적 인식은 제 대상들의 상호연관을 분명히 하고 하나의 총체성 속에서, 하나의 역사적 과정으로, 운동으로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젝은 카오스라고 하지만 혼돈 속에 관철되는 필연성, 법칙성들을 찾아낼 때 20세기의 전 역사적 과정의 통일성은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지젝은 객관적 현실이라는 개념을 부정하기 때문에 지젝에게서 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한편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에서 지젝은 결정적인 오류를 범한다. 즉,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문제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이다. 지젝은 현대 자본주의에서 기업의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는 현상, 기업이 자신의 자본이 아닌 부채로 경영하는 것이 일반화된 현상을 가리키면서 빌 게이츠와 함께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졌는데, 적어도 표준적인 의미에서는 그렇다18)라고 파악한다. 그러나 지젝의 이러한 인식은 매우 안이한 인식이다. 왜냐하면 현대 자본주의의 모든 문제는 바로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문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실업, 빈곤, 과잉생산, 환경 파괴 등등의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는 사회를 위한 생산이 아니라 시장을 위한 생산, 사적 소유,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지젝은 사적 소유라는 관계가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변화하는 현상에 사로잡혀서 그 본질이 변화하는 것인 양 착각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극복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그것을 사회적 관계로 전화시키는 것,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수립에 달려 있다는 것은 21세기 지금도 여전한 진실이다.

지젝은 ≪레닌 재장전≫, ≪지젝이 만난 레닌≫ 등의 저작에서 마치 자신이 레닌주의를 옹호하는 듯한 외관을 가지려 한다. 그러나 지젝이 헤겔을 언급하면서 헤겔의 변증법을 거세하듯이 지젝이 언급하는 레닌은 혁명적 노선이 거세된 레닌이다. 이를 가리켜서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핵심은 레닌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키에르케고르적인 의미에서 레닌을 반복하는 것이다.19) 이는 레닌에게서 혁명성과 과학성을 거세하고 레닌을 부르주아적으로 비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지젝이 레닌을 어떻게 비틀고 있는지 살펴보자.

지젝은 레닌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강조했던 물질 개념의 의의, 즉,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실재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비틀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의식 외부에 의식으로부터 독립한 실재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의식 자체가 실재의 외부에 실재로부터 독립해 있느냐 아니냐다.20) 물질 개념을 신성한 물질이라고 거부하는 지젝의 입장에서는 레닌의 핵심적 주장을 비틀어서 왜곡하고 부정하는 것이 중요한 듯하다. 그러나 지젝은 여기서 기본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실재는 물질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인식론적 범주의 문제이다. 그런데 지젝이 이를 비틀어서 의식 자체가 실재의 외부에 있느냐 아니냐고 설정하는 문제는 인식론적 범주가 아니라 존재론적 범주이다. 의식 자체는 실재의 외부에 있지 않다. 의식은 뇌라는 물질의 성질로서 이 세계, 물질적 세계의 일부분이다. 여기서 지젝은 인식론적 범주의 문제와 존재론적 범주의 문제를 혼동하고 있다. 레닌은 물질 개념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의식으로부터 독립한 객관적 실재를 가리키는 철학적 범주라고 했다. 이는 의식과 물질의 대립은 철학적 영역 내의 문제, 즉, 인식론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과 물질의 대립을 인식론적 범위를 넘어서서 현실의 대립, 존재론적 대립으로 확장하면 그것은 세계에 대한 이원론이 된다. 그런데 지젝은 이렇게 레닌이 제기한 것이 인식론적 차원이었다는 것을 무시하고 의식의 실재로부터의 독립성이라는 존재론적 물음을 제기한 것이다. 이는 인식론을 존재론으로 바꿔치기하여 레닌을 비틀면서 물질 개념의 인식론적 의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지젝의 이러한 방식은 비단 이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젝의 저작 여러 곳에서 사용되는데 이는 철학적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대중을 기만하는 것이다.

지젝은 레닌의 당에 대한 핵심적 테제, 즉, 외부로부터라는 테제를 악명 높은 것으로 주장한다. 물론 레닌주의 정당이 외부로부터 노동계급에 도입하는 악명 높은 지식 역시 정신분석의 지식(으로 여겨지는 것)과 성격이 같다.21) 외부로부터라는 정식은 사회주의 의식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직접적 대립(경제투쟁)의 영역에서는 스스로 자라 나올 수 없고 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 분석의 영역으로부터 도입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며 사회주의 당의 역할은 바로 여기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지젝은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의 결합을 위한 핵심 고리가 되는 외부로부터 정식의 의의를 부정함으로써 사회주의 당을 공격하고 레닌주의를 훼손하고 있다. 사실 사회주의 운동은 대중의 자생적 운동과 달리 목적의식적 운동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닌가? 지젝이 외부로부터라는 정식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이 반자본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를 현실로 극복하려는 사회주의 운동, 그 당들과는 선을 긋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젝은 자본주의적 지구화에 반대하면서 민주적인 지구화를 주장하는데, 문제는 지젝이 이해하는 민주주의가 엉터리라는 점이다. 지젝은 민주주의와 국가와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데 길지만 인용해 보자. 민주주의의 한계는 국가다. 민주적 선거 과정에서 사회체는 상징적으로 해체되어 순수한 수치상의 다중으로 환원된다. 선거인단은 하나의 신체, 구조화된 전체가 아니라, 형체 없는 추상적 다중, 국가(…) 없는 다중이다. 따라서 핵심은 민주주의 국가에 고유한 것으로서 그 기구들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이 의존성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바디우가 국가는 그것이 대표하는 다중과 관련하여 늘 과잉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민주주의가 구조적으로 간과하는 것이 바로 이 과잉이라는 뜻이다. 민주주의적 과정이 국가의 이런 과잉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착각이다.22) 민주주의의 한계는 국가라는 주장은 국가가 있는 한 민주주의는 진정으로 실현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과학적인 주장이다. 민주주의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무계급사회에서 국가가 소멸하면 민주주의도 소멸한다. 또한 민주주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국가를 가리킨다. 지젝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민주주의가 독재로 전화된다고 하지만 이는 그릇된 것이다. 민주주의와 독재는 국가의 두 측면이다. 즉, 국가는 부르주아 국가이건, 프롤레타리아 국가이건 독재와 민주주의의 두 측면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국가가 민주주의의 한계이며 국가를 구성하는 기구들이 민주주의를 가로막는다는 지젝의 주장은 민주주의에 대한 피상적인 접근이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무기이지만 그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한계를 지닌 무기이다. 이 한계를 의식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전망을 개척해 가야 하며 끝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전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지젝은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철학자이며 많은 정치적 담론을 쏟아 내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20세기 사회주의의 실패에 대한 과학적 고찰에 실패하면서 기존의 역사적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이론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역할을 해 왔다. 지젝의 방법론은 냉소적인 접근이다. 지젝이 말하는 변증법은 과학으로서의 변증법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현실의 객관성을 부정하고 카오스(혼돈)로 귀결되는 것이 변증법이라는 주장은 동유럽 지식인의 현재의 황폐화된 정신세계를 보여 준다. 지젝은 이 모든 엉터리 같은 주장을 쓰딸린주의에 대한 비난으로 정당화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21세기 사회주의는 가능하며 필연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젝과 같은 혼돈과 단절하고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과학적 접근,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계급투쟁의 무기를 벼려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노/사/과/연]


1) 지젝, ≪헤겔 레스토랑―변증법적 유물론의 그늘≫, 새물결, p. 516.

2) 같은 책, p. 144.

3) 같은 책, p. 93.

4) 같은 책, p. 37.

5) 같은 책, p. 53.

6) 같은 책, p. 41.

7) 같은 책, pp. 125-126.

8) 같은 책, p. 277.

9) 지젝, ≪라캉 카페―변증법적 유물론의 그늘≫, 새물결, p. 1590.

10) 지젝, ≪헤겔 레스토랑―변증법적 유물론의 그늘≫, p. 367.

11) 같은 책, p. 414.

12) 같은 책, p. 679.

13) 같은 책, p. 388.

14) 같은 책, p. 396.

15) 같은 책, pp. 477-478.

16) 같은 책, p. 372.

17) 같은 책, p. 412.

18) 같은 책, p. 458.

19) 지젝, ≪지젝이 만난 레닌≫, 교양인, p. 21.

20) 같은 책, p. 291.

21) 같은 책, p. 302.

22) 같은 책, p. 484.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Feb 22nd, 2017 | By | Category: 2017년 02월호 제130호, 이론 | 조회수: 710

댓글 2개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22)”

  1. 지젝말하길

    내가 지젝인데, 내 책 똑바로 안 읽어보고 막 씨부리지 마삼 ㅋㅋㅋㅋㅋㅋㅋ 가만히 보니깐 여기 노동사회과학 연구소라는 곳은 루저들이 모여서 자기들끼리 정신 딸딸이 쳐주면서 노는 곳이네 ㅋㅋㅋㅋㅋㅋㅋ 공부 할거면 똑바로 해라 ㅋㅋㅋㅋ 라캉을 통해서 변증법을 다시 읽는다는 지젝의 기본적인 논지 조차 파악도 못하고 있는거 같으니깐…. 지젝이 언급한 어떤 부분이 어떻게 해서 왜 잘 못된 주장인지 그걸 제시해야지 그냥 자기 독백식으로만 쳐 적어놓으면 이게 논문인지 애들 장난인지 원 ㅋㅋㅋㅋ

  2. 보스코프스키말하길

    한글의 기본을 모르시나보오… 일단 받침으로 끝났으면 주격조사는 이를 붙이는데 가라니… 그리고 슬라보예 지젝에 대해서는 박노자도 비판한 바 있는데 여기 가셔서도 한 마디 하셨어야지… 왜 여기에만 와서 … 뭐 충격이야 슬라보예 지젝에게만 있지 않고 알랑 바디우(인지 **껴 인지)에게도 있고 무엇보다 한국 내의 한 때의 변혁파들(가령 구 반제 반법서사/파시즘 단)에게도 있는 듯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