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칼 맑스: 가장 세속적인 철학자

졸탄 지게디(Zoltan Zigedy)

번역: 제일호(회원)

 

칼 맑스는 가장 있을 것 같지 않은 장소들에 나타난다. 미국과 유럽에서 대부분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맑스의 사상은 이제부터는 적절하지 않다고 선언을 한 이후 25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월 스트릿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은 “가장 세속적인 철학자(The Most Worldly Philosopher)”라는 제목 하에 그의 사상에 대한 놀랄 만큼 평가된 토론을 제공한다(2016년 10월 1일-2일). 저자인 캠브리지 대학의 명예교수이자 펜실베니아 대학의 교수, 조나단 스타인버그(Jonathan Steinberg)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끝맺는다: “맑스는 사라진 지성적인 풍토의 시대에 뒤떨어진 창조물로서 우리의 염두에서 사라질 수 없고… 20세기 전 과정을 넘어서 그 사상을 받아들였던 맑스주의 당들과 수백만 명의 사람들의 성장을… 자극했던 강력한 사상의 유산을 남겨주었다. 맑스는 정말로 세속적인 철학자였다.”

나는 다음과 같은 전면 기사 위에 광고를 전시했던 ≪월 스트릿 저널(WSJ)≫ 편집자가 이 애처로운 선거의 계절[미국의 대통령 선거: 역자]에 익살스러운 순간을 즐기고 있는 중이라고 믿고 싶다: “억압받는 사람들은 몇 년에 한 번씩 억압계급의 어떤 특별한 대표자들이 대표가 되어 그들을 억압할지를 결정하는 것을 허락받는다.” 레닌의 의해 맑스의 공으로 돌려졌던(엥겔스의 부연과 같이) 환영받는 이 인용문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것은 선거라고 4년마다 비명을 지르는 두 편에 선 악마 친구들에 의한 대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스타인버그(Steinberg) 교수는 맑스에 관한 그의 관점들 몇 가지를 공유하기 위해 가레스 스테드만 존스(Gareth Stedman Jones)가 최근에 쓴 책의 관점이 제공하는 기회를 이용한다. 그리고 존스의 책으로 자신의 이유를 돌리는 몇 가지를 보고 판단해 보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많은 그의 학문적인 동시대인들처럼 스테드만 존스는 일단 자기 자신을 일종의 맑시스트라고 생각했지만 단지 맑스가 유행을 하고 있는 동안이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정체성은 학구적인 세계에서 인본주의 훈련의 고결함에 관한 유감스러운 반영인 노선으로 아주 빨리 빠져든다. 인문이 풍부한 교육과정을 위해 싸우고 있는 학생이 거의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맑스 사상의 추종자들이 없는 동안, 스타인버그는 맑스 사상에 대한 건전한 존경심을 보여 주고, 솔직하게 맑스 사상과는 다르다는 의사를 표현한다; 거기에는 맑스 사상의 “희생자들”을 기록한 ≪공산주의 흑서(Black Book of Communism)≫는 없다; 맑스주의자들의 사생활과 도덕성에 대한 명예훼손은 없다; 사람들이 ≪월 스트릿 저널≫에서 기대했던 자본주의의 영광에 대한 찬가는 없다.

 

직면하고 있는 사상들

 

스타인버그는 새로운 것도 아니고 본래의 것도 아니면서 많은 지식인들의 비판의 핵심에 존재해 왔던 맑스주의에 대한 도전들의 모음을 제공한다:

 

소위 “(가치) 전형의 문제”

스타인버그는 “경제학에서 오스트리아 학파의 주요 인물 중의 한 사람, 오이겐 폰 뵘 바베르크(Eugen von Böhm-Bawerk)가 그것[맑스의 자본론: 필자]은 ‘가치와 가격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만족스러운 이론’을 만들어 내는 데 실패했다고 선언했”음을 적고 있다. ≪자본론≫ 3권이 출판되고 난 후, 맑스의 사후 기간은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쇠퇴와 당면한 경제관계의 형식적이고 수학적인 재건과 심리적인 경향에서의 시장관계의 바탕에 기초한 경제학의 부상과 일치했던 기간이었고 개인적인 선택의 탓으로 돌렸던 기간과 일치했다.

아마도 새로운 경제학의 공공연한 엄격함에 지나치게 감동을 받은 많은 맑스주의자들(엥겔스를 포함한)은 그 도전을 받아들였고 맑스의 가치 계산과 현실 세계의 가격 사이의 양적 관계의 “증거들”을 조립하였다. “증거들”과 “반(反)증거들” 사이의 그 논쟁은 오늘날까지 특히 부르주아 경제학 속에서 훈련된 사람들 중에서 강단 맑스주의자들을 계속해서 괴롭힌다.

그러나 맑스는 단지 상품 가치와 상품 가격 사이의 합리적으로 수치가 가까운 양적관계를 보여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가치와 가격은 공유된 도덕 표준(가치)과 공유된 법체계(현실 세계의 법체계) 사이의 대조와 같은 것이다; 하나가 또 다른 것의 배경이 된다는 것을 알기 위해 도덕적 가치와 그 반대의 법칙 사이의 엄격한 상호관계나 형식적인 유도를 보여줄 필요는 없다. 정말로, 법체계들이 근원적인 도덕 양식들에 의해 결정적으로 모양이 갖추어지는 것에 대해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법체계들이 전적으로 재판의 변덕이나 개인적인 선호에 기초한 훌륭한 독립적인 존재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논쟁을 한다면 그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이러한 유행 속에서의 논쟁은 신뢰받지 못하는 실증주의의 유산이다.

가격이 가치로부터 끌어내어질 수 있다는 엄격한 증거를 찾기 위한 연구는 학문의 세계를 차지하고 있는 학자적인 훈련이지만 맑스주의 계획과는 거의 관련성이 없다. 가치가 가격의 기초가 된다는 것은 부당한 살인에 반대하는 도덕적인 규범이 살인에 반대하는 모든 법을 위한 기초라는 믿음만큼이나 확실하다. 같은 맥락에서, 심리학의 과학적인 지위가 심리적인 경향과 심리적인 행동 사이의 관계의 형식적인 논증에 족쇄가 채워졌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만약 우리가 뵘 바베르크와 그의 어리석음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면, 과학으로서 맑스주의는 당연히 사라질는지 모른다!

 

소위 “궁핍화 테제”

스타인버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899년 엥겔스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 중의 한 사람,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조차도 노동계급은 점점 더 가난하게 되고 산업의 집중은 점점 더 크게 될 운명이라고 주장했던 소위 궁핍화 이론을 공격했다.”

베른슈타인과 다른 사람들처럼 스타인버그 교수는 이 점에 관해서 맑스를 잘못 해석한다. ≪자본론≫, ≪잉여가치 학설≫과 ≪임노동과 자본≫에서 맑스는 명료하게 밝혔다; “임금으로 지불되지 않은 양의 두드러진 증진은 생산 자본의 급속한 증가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의 안락함이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가들의 이렇게 증대된 안락함과 비교해 보면 그것들이 주는 사회적 만족은 하락을 했는데, 자본가들의 안락함은 노동자들에게는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고 일반적으로 발전한 사회와 비교해 보면 자본가들의 안락함은 도달했다… 그것들의 성격이 사회적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것은 상대적이다.”

맑스는 노동자들의 비참함을 사회의 고도화에서 삶의 수준의 증진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본다. 생산이 증진할 때, 노동계급의 삶의 수준은 당연히 증진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자본가계급의 이익과 비교해 보면 훨씬 적다. 2차 세계대전 후 짧은 기간은 생산성의 증진이 일반적이었지만 삶의 수준에서 불평등이 발생했던 하나의 시대였다. 자유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 시대를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로서 축하를 했으며 노동계급의 상대적인 빈곤과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의 증가는 편의적으로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지난 40년간 대부분의 시간 동안, 노동자들의 삶의 수준의 정체나 하강과 함께 노동계급의 빈곤은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 모두 증가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맑스의 예언보다도 훨씬 더 비참하고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다.

노동계급의 상대적 빈곤을 유발한 장치는 맑스가 “실업자 상비군(실업자)”이라고 불렀던 것의 성장, 쉽게 자포자기하고 절망적인 노동자원의 결과로 노동력의 판매력이 줄어드는 과정이다. 노동계급의 삶의 수준에 관한 이 압박은 우리 시대에 지난 수십 년을 통해 잠재적 노동자들(소수로 대표되는 것 이상으로 거대하게)의 다수의 투옥에 의해 극적으로 말을 못하게 되었다. 이백만 명 이상의 다수의 투옥은 잠재적 실업자(“산업 예비군”)와 임금과 이익에 관한 그들의 동반된 압력을 강제로 줄이는 반면에 그것은 지난 20세기에 완전히 산업화된 국가에서 고용의 희망 없는 반역적인 인민들과 많은 젊은 사람들의 폭발하기 쉽고 심지어 혁명적인 가능성에 대한 지배계급의 인식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투옥을 통해 “산업 예비군”에서 물러났다.1)

 

사적 유물론

스타인버그 교수는 인민들이 주로 빠져들게 되는 사회, 경제적 환경이 그들의 행동의 특질을 결정한다는 맑스의 견해를 보고 혼란에 빠진다. 그렇지 않다면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Eighteenth Brumaire of Louis Bonaparte)≫에서 그것을 아주 단순하고 더욱 설득력 있게 말했듯이: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인간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역사를 만들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선택적인 환경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주어지고 전해진 이미 존재하는 환경 하에서 역사를 만든다. 모든 죽어버린 세대의 전통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뇌에서 악몽과 같이 무게를 가한다.” 스타인버그는 ≪자본론≫ 서문에서의 같은 결과에 대해 더욱 신비스럽지만 일치하는 진술을 인용한다.

그러나 스타인버그는 다음의 내용을 깊이 생각한다: “설사 안다고 할지라도 언제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게 될까? ≪자본론≫ 서문이 옳다면 ―인간들이 인식과 의지 없이 경제학의 법칙들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어떻게 체제가 변화할까?”

스타인버그 교수는 운명론에 항복함으로써 역사적인 과정들의 인식을 혼동한다.

≪브뤼메르 18일≫의 확인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역사적으로 발전된 사회적, 경제적 환경이 무르익었을 때, 노동자들은 체제를 변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발전된 사회적, 경제적 환경이 무르익기 전에 노동자들은 체제를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러다이트 직공단원들(Luddites)은 자신들의 삶의 환경에 대한 자본주의의 유린에 저항하여 열렬하지만 무익하게 싸웠다. 하지만 초기 산업자본주의는 구질서와 연관된 진실한 운동을 짓밟는 활력과 함께 등장했다. 러다이트 직공단원들에 의해 고수되었던 질서처럼, 21세기 자본주의는 구질서이고 자본주의의 몰락에 반대하는 성공적이지만 운명을 건 투쟁을 계속하는, 부패해 있고 유지할 수 없는 체제이다. 맑스는 체제가 그 체제의 잠재력을 소진했을 때, 노동자들이 그 체제를 전복하기에 충분한 사회적, 경제적 환경이 역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들이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은 정확하게 혁명적인 변화를 위한 환경이 명백할 때이다. 노동자들이 혁명적인 순간을 이해하고 포착하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맑스―그리고 특히 레닌―은 혁명적인 당, 즉 공산주의자들의 당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당은 새로운 질서의 사상을 제시할 것이다.

 

맑스주의적 인본주의

“맑스주의적 인본주의(Marxist Humanism)”라고 불리게 되었던 것에 관하여 스타인버그 교수는 “광대한 문헌”을 언급한다. 맑스 초기의 출판되지 않은 노트들(≪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의 출판과 대중화에 의해 박차가 가해진 많은 좌파들은, 맑스가 자유주의의 가치들의 구체화인 것으로 믿도록 변형하고 이상화했다. 냉전이 고조되었을 때, 반공주의 좌파들은 청년 맑스―졸업 학위에서 벗어난 지 이제 3년 된, 사회 개혁주의로 가득 차 있고, 노동계급 운동에는 여전히 새롭고, 단지 최근에 정치경제학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있는 맑스―의 시험적인 사고를 수용했고, 청년 맑스를 참된 맑스라고 주장한다.

“인본주의자”로의 전환에 대한 중심적인 주장은 맑스가 포이에르바흐에게서 차용했던 용어인 “소외(alienation)”라는 핵심 개념이었다. 청년 맑스에게 그 용어는 자신들의 “인간성”을 성취하는 개인들의 방식에서 자신들이 서 있는 사회적 거리를 표시하는 일시적인 표현으로서 사용되었다. 가공되지 않은 철학적인 도구로서 소외의 개념은, 성숙한 맑스에 의해 실현되었던 면밀함과 정교함을 위해 필요로 했다. 사적 유물론은 “유적 존재(species-being)”의 분명치 않은 목적론을 대체했다. “계급”과 “착취”의 개념들은 “소외”의 모호함과 일반성을 대체했다. 더크 스트루이크(Dirk Struik)가 설명했듯이: “우리가 맑스의 해설[수고(Manuscripts)에서: 필자]을 자세히 공부할 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그의 성숙한 분석의 시작을 발견한다…” 단지 시작이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Erich Fromm)과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 같은 많은 저술가들은 사회적 이탈의 모든 형식에 대한 표현으로서 봉사하는 계급해방의 개념 속에서 “소외”를 모양 짓는 기회를 붙잡는다 ― 가장 끔찍한 잔인함에 대한 가장 사소한 반칙으로부터. 제멋대로 하는 부르주아지의 권태를, 계급과 인종의 가장 커다란 불공평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이래로, 자유주의자들은 새로운 맑스주의의 도래를 알렸다. 그에 따라, 자본주의적 착취 관계는, 사회적 소외들의 바다에서 사라졌다. 오늘날 개인이라는 정치사상은 이 왜곡되고, 억제되지 않은 소외 개념의 남용에 힘입은 바 크다.

스타인버그 교수가 교묘하게 그것을 번역했던 것처럼, “20세기의 과정을 거처 그 사상을 받아들였던 수백만 명”의 맑스주의는 잘못 사용된 청년 맑스나 실패했던 낭만이 아니라, 저임금, 야만적인 노동조건과 유혈 전쟁의 맑스주의이다. 성숙한 맑스에 의해 영감을 받은, 이러한 환경에 맞선 투쟁과 새로운 사회 질서를 위한 투쟁이, 진정한 “맑스주의적 인본주의”였다.

 

맑스주의에 대한 이러한 비평들과 다른 비평들―때때로 정직한 실수들에 기초하고 있기도 하지만 거의 대개가 의도적인 왜곡에 기초한―은 끝없는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도전은 확실히 맑스주의의 영원한 타당성에 대한 찬사일 뿐이다.


1) [편집자 주] “미국 법무부에 따르면 2015년 10월 현재 미국 내 교도소는 약 5,000여 개에 달한다. 연방교도소가 1,800개, 주나 카운티 등 지역교도소가 3,200개인데, 이는 미국 전체 4년제 대학교보다 많은 숫자다. 이들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죄수는 230만 명에 달한다. / 이는 전체 미국인구의 0.73%다(보호관찰과 보석 등 법의 감시 하에 있는 사람들 475만 명을 합하면 전체 인원은 700만 명을 넘는다. 이는 전체인구의 2.2% 수준이다). 전 세계 죄수가 980만 명임을 고려하면 미국은 전 세계 수감자의 24%를 차지하고 있다는 계산이다.” (정진용 기자, “[뉴투 컬처클럽] 죄수 비용만 83조원, ‘딜레마’에 빠진 미국”, ≪뉴스투데이≫, 2015. 10. 29.

<http://www.news2day.co.kr/n_news/news/view.html?no=7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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