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흐루쇼프가 거짓말했다(32)

그로버 퍼(Grover Furr)

번역: 편집부

 

 

 

부록

― 1차 자료들과 다른 자료들로부터의 인용들

 

 

  1. 보론쵸프(Vorontsov)의 편지

 

흐루쇼프:

우리는, 쏘비에트 영토에 대한 독일군대의 침입 위협과 관련된 이러한 정보가 우리의 군사정보와 외교정보로부터 역시 나오고 있었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지도부는 그러한 정보를 불신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에, 그러한 자료를 두려워하며 폐기하였고 보류하였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쏘비에트 군사수행원 보론쵸프 대령이 1941년 5월 6일 베를린에서 보내온 정보는 다음과 같다: “쏘비에트 시민 보제르(Bozer)는 … 해군수행원 대표자와 대화를 했는데 그 내용은 … 히틀러 사령부의 어떤 한 독일 장교의 진술에 의하면 독일은 핀란드, 발트해 국가와 라뜨비아를 통하여, 5월 14일 쏘련을 침략할 준비를 하고 있다. 동시에 모스끄바와 레닌그라드는 심하게 공습을 당할 것이고 낙하산부대들이 국경도시들에 착륙할 것이다. …”

<Voenno-Istoricheskii Zhurnal No. 2, 1992, pp. 39-40>에 보론쵸프 대령이 작성한 글의 전문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1941년 5월 6일 꾸즈네쵸프(Kuznetsov) 대장이 쓰딸린에게 보낸 편지 속에 있다. 흐루쇼프가 빠뜨린 핵심적인 부분은 굵은 글씨로 적는다:

 

일급비밀

  1. 5. 6.

번호. 48582cc

쏘련공산당(볼) 중앙위원회

쓰딸린 동지

베를린에 있는, 해군 수행원 보론쵸프 대령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쏘비에뜨 시민 보제르(유대 민족주의자, 이전에는 리뚜아니아 민족주의자)는 해군수행원 대표자와 대화를 했는데, 히틀러 사령부의 어떤 한 독일 장교의 진술에 의하면, 독일은 핀란드, 발트해 국가와 라뜨비아를 통하여, 5월 14일 쏘련을 침략할 준비를 하고 있다. 동시에 모스끄바와 레닌그라드는 심하게 공습을 당할 것이고 낙하산부대들이 국경도시들에 착륙할 것이다.

이 정보의 일차 출처를 밝히고, 이 정보를 보강하려는 우리의 시도들은 지금까지는 성공적이지 못하다. 보제르가 이를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작업을 하여 이 정보의 진위를 판별하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다.

나는 이 정보가 거짓일 것이라고 믿는다. 특히 이러한 경로를 통해서, 우리 정부에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이 정보가 발송되었고, 그것은 쏘련이 이 정보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보기 위한 것이라고 믿는다.

 

대장 꾸즈네쵸프(Kuznetsov)

  1. 독일 병사

 

흐루쇼프:

다음과 같은 사실이 역시 알려져 있다: 히틀러 군대가 쏘련 영토를 침략하기 전날 밤에, 어떤 한 독일 시민이 우리의 국경을 건너와서 독일군들이 6월 22일 새벽 3시에 쏘련에 대한 공격개시명령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쓰딸린은 이것에 관한 정보를 즉시 받았지만, 심지어 이 경고조차 무시되었다.

 

그 병사는 알프레트 리쓰꼬프(Alfred Liskow)였다:

많은 사람들이, 1941년 6월 22일 새벽에 한 독일 병사가 우리 진영으로 탈출하여, 독일군대의 침입이 임박했다고 보고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뻬레스뜨로이까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이 탈영병이 밀정으로 즉시 총살되었다고 언급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예를 들어, 1990년에 뉴욕에서 출판된 쓰딸린 전기에,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다:

정확한 공격 시간을 보고하기 위하여, 이전에 공산주의자였던 한 독일 병사가 용감하게 국경을 넘었다. 쓰딸린은 거짓정보라며 그를 즉시 총살시키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거짓이다. 위의 글은 루이스 조나단(Lewis Jonathan)과 화이트헤드 필립(Whitehead Phillip)의 책 Stalin. A Time for Judgement (뉴욕, 1990)의 p. 121에서 언급된 것이고, 조레스(Zhores)와 로이 메드베제프(Roi Medvedev)의 책 Neizvestniy Stalin(러시아어판, 모스끄바, 2002)의 pp. 309-10로부터 인용한 것이다. 이 책의 영어판 The Unknown Stalin(Woodstock and New York: The Overlook Press, 2004)의 pp. 240-1에서 흐루쇼프의 거짓말을 완전히 논박한다.

흐루쇼프의 이야기는 물론 거짓이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역자] 이고르 삐할로프(Igor’ Pykhalov)의 놀라운 연구, Velikaia Obolganniai Voina(The Great Calumniated War, 모욕당한 위대한 전쟁)(모스끄바, 2005)를 충분히 인용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제9장: “한 탈영병의 운명.”

 

많은 사람들이, 1941년 6월 22일 새벽에 한 독일 병사가 우리 진영으로 탈출하여, 독일군대의 침입이 임박했다고 보고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뻬레스뜨로이까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이 탈영병이 밀정으로 즉시 총살되었다고 언급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예를 들어, 1990년에 뉴욕에서 출판된 쓰딸린 전기에,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다:

정확한 공격 시간을 보고하기 위하여, 이전에 공산주의자였던 한 독일 병사가 용감하게 국경을 넘었다. 쓰딸린은 거짓정보라며 그를 즉시 총살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사실은 이렇다. 이 사람의 운명을 분명히 밝혀보자.

독일 육군 병사 알프레트 리쓰꼬프는 1941년 6월 21일 21:00시에 제90 국경부대의 쏘깔쓰크(Sokalsk) 사령부의 부대에 구금되었다. 6월 22일 새벽 3:10분에, 르포프(L’vov)주의 지방 비밀경찰(UNKVD)은 우끄라이나 사회주의공화국 국가보안인민위원회(NKGB)에 전화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달했다:

쏘깔 지역의 국경선을 넘어온 독일군 하사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신의 이름은 리쓰꼬프 알프레트 게르마노비치, 30세, 노동자, (바이에른 주, Bavaria) 콜베르크(Kohlberg) 시에 있는 가구공장의 목수,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부인과 아이와 부모가 있다.

그 하사는 제15사단(division)의 제221 공병연대에서 복무했다. 그 연대는 쏘깔 지역으로부터 5킬로미터 북쪽으로, 첼렌쯔(Tselenzh)라는 마을에 위치해 있다. 그는 1939년에 예비군으로부터 군대로 징병되었다.

그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여기고, 붉은 전선 군인들의 연합(Union of Red Front-line soldiers)의 구성원이고, 독일에서 노동자들의 삶은 매우 고되다고 말했다.

저녁 무렵에 자신의 부대 지휘관 슐츠(Schulz) 중위가, 오늘 밤 대포사격 후에, 우리 부대가 뗏목, 보트, 철주(鐵舟, pontoon)를 이용하여 부크 강(Bug)을 건널 것이라고 말했다.

쏘비에트 권력의 지지자로서, 일단 그가 이것을 배워서 이해한 이상, 그는 우리에게 도망쳐서 말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제90 국경부대 지휘관 비치꼬프스끼(M. C. Bychkovskii) 소령의 보고에 있다:

6월 21일 21:00시에 쏘깔쓰크 사령부 관할 지역에 한 병사가 구금되었는데, 그는 독일 군대를 탈출한 리쓰꼬프 알프레트였다. 사령부에는 통역자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병사를 트럭에 태워 블라지미르(Vladimir) 시에 있는 참모부대로 데려가라고, 그 지역의 지휘관 베르샤드쓰끼(Bershadsky) 대령에게 명령했다.

1941년 6월 22일 00:30분, 그 병사는 블라지미르-볼린쓰크(Volynsk) 시에 도착했다. 대략 새벽 1:00시경 통역자를 통해서, 6월 22일 새벽에 독일군이 국경을 넘을 예정이라고, 리쓰꼬프는 말했다. 나는 즉시, 군대참모의 책임자인 여단 인민위원 마슬로프쓰끼(Maslovsky)에게 이것을 보고했다. 동시에 나는 개인적으로, 제5 육군 지휘관 뽀따프뽀프(Potavpov) 소장에게 전화로 보고했다. 그는 나의 보고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겼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병사 리쓰꼬프의 보고의 진실성에 대해 확신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지역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국경의 경계를 강화하고, 부크 강에 특별 청음 초소(listening post)들을 —그것들을 포격하고 파괴하며 독일군이 강을 건널 경우에 대비하여— 세우라고 지시했다. 동시에 의심스러운 어떤 것(반대편 강기슭에서 어떠한 움직임)이라도 나타나면, 나에게 개인적으로 즉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내내 참모본부에 남아 있었다.

6월 22일 1:00시에 지역의 지휘관들이 나에게, 반대편 강기슭에서 의심스러운 어떤 것도 나타나지 않았고, 고요하다고 보고했다. 우리 부대의 통역자들이 서툴렀기 때문에, 나는 시에 있는 독일어에 능통한 독일어 교사를 호출했다. 리쓰꼬프는, 1941년 6월 22일 새벽에 독일이 쏘련을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는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불렀고, 특별히 우리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여 우리에게 왔다고 말했다. 그 병사에 대한 심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쓰띨루그(Ustilug, 첫 번째 사령본부) 방향에서 강력한 포사격 소리가 들렸다. 나는, 독일이 우리 영토에 대해 —심문 중인 그 병사가 말했던— 포격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즉시 전화로 지휘관들을 호출하려고 했지만, 연결은 이미 파괴되어 있었다.

쏘비에트 선전이, 리쓰꼬프의 행위를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활용하려고 한 것은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부르쳬프(Burtsev) 소장이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여기에 있다. 그는 붉은 군대의 최고 정치위원회(Main Political Directorate) 특별선전부를 지휘했다:

이미 6월 27일에 독일 반-파시스트 알프레트 리쓰꼬프에 관한 첫 번째 전단지가 나타났다. 강의 양쪽 기슭에서 사격을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쏘련에 대한 침공이 임박했다는 것을 우리의 국경수비대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그는 부크 강을 헤엄쳐 건넜다. 복무했던 제75사단의 222연대에서 침공하라는 명령을 받자마자, 그는 이렇게 했다. 물론, 우리는 이 첫 번째 탈영병과 대화하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곧바로 리쓰꼬프는 모스끄바로 보내졌다. “노동계급의 베인 상처”를 가진 키가 큰 독일인은 야전에서 위생병으로 복무하면서 호의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는 말했다. “나는 콜베르크 시의 노동계급 가족 출신입니다. 나의 부모와 나는 히틀러와 그의 체제를 싫어합니다. 우리에게 쏘련은 친근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쏘비에트 인민과 싸우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독일에는 그러한 노동계급 가족이 많습니다. 그들은 여러분들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쁘라브다≫에 발표되었고, 최초의 전단지로 만들었던 것은 그 이야기이다. 거기에는 그의 초상화가 인쇄되었고, 전쟁과 히틀러주의를 반대하는 사람과 쏘련의 친구들이 독일군 내에 있다는 것을 독일병사들에게 알려 주었다.

많은 전쟁 경험자들은 리쓰꼬프의 이름이 나오는 선동 자료들을 기억한다. 예를 들어, 레닌그라드 작가 드미뜨리 쓰쳬그로프(Dmitry Shcheglov):

6월 28일 … 벽에 붙은 신문들에서, 사람들은 그 발표문을 읽고 있었다: ‘독일 병사 알프레트 리쓰꼬프는, 쏘련 인민들과 전쟁을 원하지 않아, 우리 측으로 탈영했다. 알프레트 리쓰꼬프는 독일 병사들에게 인사하면서 히틀러 체제를 전복하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두 번째 장에는 리쓰꼬프의 진술문과 초상화가 있다: ‘독일 병사들 사이에는 침울한 분위가 만연하다.’

불행히도 아직까지 나는 알프레트 리쓰꼬프의 이후의 운명을 추적할 수 없다. 부르쳬프는 적었다:

그 이후에, 마지막 숨결에 파시즘과 싸우는 진실을 남기고 리쓰꼬프는 죽었다.

그러나 심지어 리쓰꼬프가 나중에 억압을 당했다 해도, 전쟁 최초의 날들 동안에는 그러한 일들이 발생하지 않았다.

 

삐할로프의 장 전체는 (러시아어로) 다음 주소에서 참고할 수 있다:

http://militera.lib.ru/research/pyhaov_i/09.html

 

회고록에서 흐루쇼프는, 쏘비에트에게 경고하기 위한 독일병사의 탈영에 대해 다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병사의 경고가 무시되었다는 자신의 주장을 반복하지는 않는다. 흐루쇼프 자신이 만든 회고록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그의 생각은 틀렸다. 음모(예를 들어 의도적인 거짓말)이거나 혹은 잘못된 기억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여하튼, 흐루쇼프는 사건의 현장에 있지 않았고, 직접적으로 알지 못했다.

 

한 병사가 전방에서 우리 쪽으로 도망쳤다. 그는 조사를 받았고, 그가 말한 [전쟁 개시 날짜 등: 역자] 상세한 정보들—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이것에 기초했다—은 논리적으로 서술되었고 믿을 만해 보였다. 그는, 침공은 내일 세 시에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첫째, 왜 특별히 내일인가? 그 병사는, 자신들이 3일치의 건조 식량을 배급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왜 3시인가? 왜냐하면 독일군은 그러한 상황에서 항상 이른 시간을 선택한다. 그 군인이 세 시라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는지, 아니면 ‘군대 무선통신’—이것은 항상 공격 시기를 매우 정확하게 알려 준다—에서 그것을 들었다고 말했는지, 나의 기억에는 없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었는가?

― 흐루쇼프 회고록: Vremia, Liudi, Vlast’. Vol. 1, Part 2, p. 299.

리쓰꼬프의 사진이 실린 1941년 6월 27일 ≪쁘라브다≫ 기사를 다음의 주소에서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http://chss.montclair.edu/english/furr/research/liskowpravda062741.pdf

  1. 처형된 사령관들

 

흐루쇼프:

쓰딸린의 의심 때문에 그리고 중상모략을 통하여 1937년—1941년 사이에 많은 군사령관들과 정치 일꾼들은 쓰딸린에 의해 몰살당했고, 이는 특히 전쟁 초기에 매우 비통한 결과들을 초래했다. 이 기간 동안, 탄압은 말 그대로 중대와 대대 지휘관 수준에서부터 고위 군 간부들까지 확대되면서 시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 스페인과 극동에서 군사적인 경험을 축적했던 지도자들이 거의 완벽하게 청산되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흐루쇼프는 군사음모와 소위 말하는 “뚜하체프스끼 사건”을 넌지시 언급하고 있다. 그는 그것들을 분명하게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유죄인가 아니면 무죄인가에 대해 어떠한 질문도 완전하게 회피한다. 뚜하체프스끼, 그리고 그와 함께 재판을 받고 처형당한 고위직 장교들이 실제로 독일과 일본과 함께, 그리고 반대파의 우파 세력과 함께, 쏘비에트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상당히 많은 증거들이 있다.

흐루쇼프는 오래전에 그들을 복권시키려고 했다. 1937년 6월 9일 쓰딸린에게 보내는 K. I. 야끼르(Komandarm Iona IAkir)의 편지가 —부적당한 부분이 삭제된 형태로— 쓰딸린과 쓰딸린의 지지자들을 맹공격하기 위해서 흐루쇼프 동맹세력에 의해 이용되었다는 것이 회자되고 있다. 야끼르의 실제 편지는 그[뚜하체프스끼: 역자]가 죄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

이러한 증거들은, 수감되고, 구타와 고문을 당하고, 처형된 모든 군사 지휘관이 유죄라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는 않는다. 죄 없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에게 그[흐루쇼프: 역자]가 한 것처럼, 예조프와 그의 심복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아주 많은 사람들을 모함했다.

1965년에 작가 K. 씨모노프(Konstantin Simonov)와의 대담에서 꼬녜프(Konev) 장군은 말한다: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 것, 즉, 이러한 10, 12, 5 혹은 7명이 1937-38년에 사형당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전쟁초기에 그들이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면, 전쟁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 이것은 과장된 것이다.

― K. 시모노프, Glazami cheloveka moego pokoleniia(“우리 세대의 눈으로 보기”), 모스끄바: Novosti, 1988, p. 393.

 

다음과 같은 문제에 답하는 것, 즉, 당시에 사형당한 사람들 중에서, 만일 살아있었다면 어떤 사람들이 독일과 어떻게 싸웠을 것인가, 그리고 독일을 물리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 불행하게도,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공론일 뿐이다.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남아있다. 남아있던 사람들, 전쟁 동안 성장하고 군대를 지도했던 사람들, 점차적으로 떠맡게 된 직책을 수행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다.

― 같은 책, p. 401.

 

끼예프(우끄라이나) 군사 구역에서 지휘관들 대부분을 “전멸시켰던” 것에, 흐루쇼프 자신이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볼꼬고노프는(Volkogonov)는, 1938년 3월로 날짜가 찍힌 흐루쇼프의 지령을 인용한다. 러시아어판에서 가져온 더 긴 판본이 아래에 인용하는 글이다. 훨씬 더 짧은 판본이 다음의 영어판에 있다: 드미뜨리 A. 볼꼬고노프, ≪쓰딸린: 영광과 비극(Stalin: Triumph and Tragedy)≫(NY: Grove Weidenfeld, 1991), p. 329.

 

“구역의 사령부와 작전 사령부, 그리고 정치 참모부의 간부들의 상태와 관련한 끼예프 군사 구역의 군사 쏘비에트 법령

 

  1. 의심의 여지없이 레닌-쓰딸린 당의 사업에 헌신하는 지휘관들과 정치 일꾼들, 작전 사령부 지휘관들을 아래로부터 승진시키고, 붉은 군대에서 적대 분자를 일소하기 위해 수행된 위대한 사업의 결과, 간부진은 … 우리 당을 중심으로 [그리고] 인민의 지도자 쓰딸린 동지를 중심으로 확고하게 공고해졌고, 정치적 단결과 붉은 군대의 군사적 힘을 높이는 사업에서의 성공을 보증하게 되었다. …
  2. 인민의 적들은[vragi naroda―여기서 흐루쇼프는, 쓰딸린이 “만들었다”며 공격한 그 단어, 그러나 쓰딸린이 실제로는 결코 사용하지 않은 바로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로버 퍼] 간부진을 배치하는 사업에서 많은 손상을 주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군사위원회는 주요 임무로서 적대분자들의 남은 부분을 끝까지 뿌리 뽑는 사업에 착수했다. 모든 지휘관들과 작전 사령부 지휘관들 [그리고] 정치 일꾼들의 승진에 대해 깊게 연구하고, 헌신적이고 발전하고 있는 … 증명된 사람들을 과감하게 승진시키면서…

 

끼예프 군사 구역의 부대 지휘관, 육군 지휘관 서열 2위 띠모쉔꼬(Timoshenko); 군사위원, 군단 지휘관 스미르노프(Smirnov); 군사위원, 우끄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 흐루쇼프.”

 

나중에 띠모쉔꼬, 스미르노프, 흐루쇼프는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1938년 3월 28일, ‘뜨로츠끼파-부하린파, 부르주아 민족주의 분자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한 전체 범위와 관련하여서’ 그 구역의 참모 지도부를 아래와 같이 교체하는 효과가 있었다:

직위에 다른 분류:

교체된 군단 지휘관들 9 9

사단 지휘관 25 24

여단 지휘관 9 5

대대 지휘관 137 87

요새화된 지역 지휘관 4 4

군단 참모장 9 b

사단 참모장 25 18

요새화된 지역 참모장 4 3

대대 참모장 135 78

구역의 참모부장 24 19

― 볼꼬고노프, ≪쓰딸린≫ 제1권, 제7장, 주 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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