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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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찬 | 연구위원장

[목차]

머리말

제1장 세계관과 철학의 근본문제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 철학의 근본문제

  3. 세계의 통일성

제2장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의 역사

  1. 철학의 발생

  2. 데모크리토스 노선과 플라톤 노선의 투쟁

  3. 아리스토텔레스

  4.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에 의한 고대 원자론의 계승, 발전

  5.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 토마스 아퀴나스

  6.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브루노, 갈릴레이, 뉴턴

  7. 베이컨, 홉스

  8. 데카르트

  9. 스피노자

  10. 로크

  11. 라이프니츠

  12. 흄

  13. 디드로, 엘베시우스, 돌바하

  14. 볼테르, 루쏘

  15. 칸트

  16. 피히테, 셸링

  17. 헤겔

  18. 포이에르바하

제3장 맑스, 엥겔스에 의한 철학에서의 혁명

  1. 맑스, 엥겔스에 의한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의 창시

  2. 변증법적 유물론의 범주들

  3. 자유와 필연성

  4. 목적의식성

  5. 사적 유물론의 범주들

  6. 레닌, 쓰딸린, 마오쩌뚱, 그람시에 의한 맑스주의 철학의 발전

제4장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사조에 대한 비판

  1. 콩트, 밀

  2. 쇼펜하우어, 니체

  3. 후설

  4. 하이데거

  5. 프로이트

  6.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7. 샤르트르

  8. 하버마스

  9. 알튀세르, 발리바르

  10. 푸코, 들뢰즈, 데리다, 라캉  ㆍㆍㆍ <이번 호에 게재된 부분>

  11. 지젝

  12. 자율주의

  13. 이진경

  14. 롤즈의 ≪정의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제5장 과학의 발전과 그에 대한 철학적 일반화

제6장 철학과 종교

제4장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사조에 대한 비판

10. 푸코, 들뢰즈, 데리다, 라캉

3) 데리다

데리다는 푸코, 들뢰즈 등과 같이 20세기 중, 후반의 프랑스 철학자이다. 데리다는 해체주의로 유명한데, 이성(로고스) 중심주의를 언어학 등에서 해체하는 길을 걸었다. 이는 기존의 언어학, 기호학을 로고스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그것을 자신이 창안한 문자학(그라마톨로지)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는데, 그 과정에 쓰인 방법론은 해체주의였고 해체주의를 매개하는 주요 고리는 흔적, 차연이라 불리는 관념이었다. 데리다는 이론 활동의 초기에 독일의 후설, 하이데거를 연구하였는데 후설의 현상학,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데리다의 주장 곳곳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면 먼저 데리다가 언어학과 기호학을 자신의 그라마톨로지로 전환시키는 과정을 추적해 보고, 이어서 그 과정의 주요 방법론인 흔적, 차연 등의 관념을 살펴보도록 하자.

데리다는 자신의 해체주의와 관련하여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한 본인은 개념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전략상의 편의를 위해서, 그리고 지금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본인이 사용하고 있는 이 개념들을 해체하기 위해서이다.1) 이와 같이 데리다는 개념을 구사하면서도 그것은 잠정적인 것이고 데리다 자신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그러한 개념의 해체라는 점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이렇게 해체라는 방법론을 데리다는 언어학과 기호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에 적용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로고스 중심주의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철학과 과학이 내포하고 있는 이성 중심주의에 대해 반기를 들고 있다. 데리다가 이렇게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반대를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그가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연구를 자신의 학문 활동의 출발로 삼았기 때문이다. 즉, 후설의 현상학은 기존의 자연과학, 심리학 등 일체의 과학에 대해 공공연히 반대하는 반과학주의를 표방했는데 데리다 또한 후설의 반과학주의를 이어받아 그것을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한 반대로 표명하고 있다.

데리다의 주저인 ≪그라마톨로지≫(문자학)는 기존의 언어학을 로고스 중심주의의 산물이라고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다. 로고스 중심주의는 표음 문자의 (가령 알파벳 문자의) 형이상학으로서 그 근본에 있어서 … 가장 독자적이며 가장 강력한 민족 중심주의였으며 오늘날 지구 전체에 스스로를 부과, 관철시키는 중인 동시에, 유일하면서도 동일한 질서 속에서 다음 개념들을 지배한다.2) 데리다는 알파벳이라는 표음문자가 로고스 중심주의라는 형이상학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며 이어서 그 형이상학이 문자언어 개념, 형이상학의 역사, 과학 개념을 지배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자언어 개념, 형이상학, 과학 개념들은 데리다에게 있어 해체의 대상이 된다.

데리다는 기존의 언어학의 지배적인 견해인 소쉬르를 비판한다. 소쉬르는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에 대해 음성언어만이 언어학의 진정한 대상이며 문자언어는 음성언어의 파생물이며 언어의 의미와 그것의 표현인 기호와의 관계는 자의성의 관계라고 주장했다. 어떤 특정한 의미를 어떤 기호로 표현할 것인가는 법칙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인 약속에 따른 것이라는 기호의 자의성 개념은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적인 축인데 데리다는 이를 거부한다. 따라서 기호의 자의성이란 이름으로 문자언어를 언어 체계의 이미지(즉 자연적 상징)로 파악한 소쉬르의 정의를 거부해야 한다.3) 데리다가 소쉬르의 기호의 자의성 개념을 거부하는 이유를 보면, 그것을 승인하면 문자언어의 파생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문자언어가 가장 근본이 되는 언어라는 데리다 자신의 견해에 배치되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데리다는 소쉬르의 기본적 관점과 체계를 거부하면서 문자가 언어의 근본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을 체계화하기 위해 문자를 의미하는 에크리튀르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그런데 데리다에게 있어서 에크리튀르는 단순히 문자언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음성언어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쓰이는데 심지어 수학의 에크리튀르4)라는 관념을 쓰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에크리튀르는 의사표현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그런데 데리다는 의사표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문자라고 보고 있으며 그에 따라 문자를 중심으로 한 의사표현을 가리켜서 에크리튀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데리다의 견해는 문자언어는 음성언어의 파생물이라는 소쉬르 언어학에 대한 정반대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데리다는 에크리튀르가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공통의 뿌리이며 에크리튀르는 흔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언제, 어디서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공통 뿌리인 에크리튀르 일반, 즉 흔적이 통상적 의미의 문자언어로 좁혀지는가?5) 이와 같이 에크리튀르는 문자언어와 음성언어를 모두 포괄하는 뿌리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이는 문자언어의 파생성을 부정하기 위한 논거가 된다. 그런데 데리다는 에크리튀르를 흔적이라고 했는데, 흔적이라는 관념은 그것이 개념이 아니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즉, 언어학의 형이상학을 해체하려는 데리다에게 있어 자신의 고유한 관념은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규정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데리다의 흔적이라는 관념은 개념 이전의 관념 즉, 직관적 인식을 의미하는 것이며 데리다는 이러한 직관적 관념을 통해 기존의 언어학의 해체를 시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데리다는 흔적이라는 관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흔적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전하는 것이 아니며,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넘어선다.6)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내용이 없다는 것이며 현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규정이 가능할 정도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며 무엇이라는 질문을 넘어선다는 것은 규정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흔적이라는 관념은 개념으로 규정될 수 없는, 동요하고 흔들리는 직관적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는데, 데리다는 이러한 직관적 관념으로 기존의 과학적 언어학을 해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데리다가 이렇게 접근하는 이유는 그가 후설의 현상학을 배후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반과학주의로서 후설은 현상=본질이라고 규정하면서 그것을 본질직관이라는 직관적 인식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데리다가 개념으로 규정하기를 거부하는 흔적이라는 자신의 관념(직관적 인식)으로 기존의 과학과 학문을 재단(해체)하려는 것은 후설의 판박이이다.

이렇게 개념이 아닌 직관적 관념에 지나지 않는 흔적, 에크리튀르라는 관념으로 기존의 언어학을 해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리다는 기존의 언어학을 그라마톨로지라는 새로운 문자학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반 그라마톨로지는 더 이상 일반 언어학에서 배제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반 언어학을 지배하며, 또 일반 언어학을 자신 속에 포함시킬 것이다.7) 로고스 중심주의의 산물인 기존 언어학은 형이상학이므로 그것은 해체되어야 하며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창안한 문자 중심의 그라마톨로지(문자학)라는 새로운 학문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데리다는 기호학 또한 그라마톨로지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언어적 대체를 통해 ≪일반 언어학 강의≫ 프로그램에서 기호학을 그라마톨로지로 바꾸어 놓아야 할 것이다.8) 이리하여 기존의 언어학과 기호학은 데리다가 창안한 그라마톨로지로 전화되어야 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데리다의 이러한 과대망상은 그라마톨로지가 인간이 만든 과학에 포함되지 않으며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주장에까지 이른다. 여기에서 예시되는 것은 그라마톨로지가 인간 과학들 가운데 하나여서도 안 되고 다른 과학들의 틈바구니 속에 끼는 주변 과학이어서도 안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인간 과학 중 하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라마톨로지의 고유한 질문으로 인간이란 명칭에 대한 물음이 우선적으로 제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9) 그라마톨로지가 인간 과학에 포함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바로 데리다의 해체주의의 본질이 드러난다. 데리다는 인간 과학이라는 관념을 제기해 놓고 나서는 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한 물음, 즉 인간 개념의 해체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고 그에 따라 자신의 그라마톨로지는 인간 과학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고는 그것은 과학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문자의 성찰에서 예지되는 초합리성 또는 초과학성은 과학에 대한 전통적 관념에 부응할 수 없을 만큼 인간 과학에 더 이상 갇힐 수 없다. 그것들은 유일무이하며 동일한 입장으로 인간, 과학, 직선을 넘어선다.10) 이와 같이 데리다는 자신의 그라마톨로지가 초과학적인 것, 즉 과학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히 말하면 초과학이 아니라 반(反)과학이라 할 수 있다.

문자언어가 음성언어의 파생물이며 언어학의 진정한 대상은 음성언어라는 소쉬르의 견해를 데리다는 집중공격하고 있고 그를 위해 기호의 자의성이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있다. 데리다는 문자 중심의 언어학, 그라마톨로지를 위해서 심지어 문자언어가 음성언어보다 나중에 발생했다는 근거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고 나아가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공통의 뿌리라는 관념, 원문자라는 관념 또한 고안하고 있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 데리다는 합당한 과학적 근거를 대는 것이 아니라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관념들을 갖다 붙이고 있다. 그러면서 그러한 자신의 방법론을 해체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면 데리다가 해체라는 방법론을 위해 흔적이라는 관념과 더불어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고 있는 차연이라는 관념을 고찰해 보도록 하자.

차연이라는 관념은 하나의 개념이 아니다. 즉, 개념 이전의 직관적 인식이다. 데리다가 고안한 관념인 차연(différance)은 프랑스어의 차이라는 명사 différence에서 e라는 스펠링을 a라는 스펠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러한 바꿈을 통해 데리다는 매우 많은 의미를 차연이라는 관념에 부여하지만 그러면서도 차연을 하나의 개념으로 규정하는 것은 거부한다. 차이라는 개념은 논리학의 주요 개념이며 그것은 동일성과 짝을 이루는 개념이다.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은 차이 개념에서 동일성을 떼어내는 것으로서 차이 자체의 철학을 추구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데리다의 차연 관념은 논리학의 개념으로서 차이 개념을 부정하고 그것을 기존의 개념들을 해체하는 매개 관념으로 전화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데리다는 기존의 차이 개념은 공간적인 개념으로 구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차연은 지연시키다라는 의미에서 차이 개념에 시간적 관념이 들어간 것이라고 주장한다. 데리다는 차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질적으로 그리고 합법적으로 모든 개념은 연쇄 체인이나 체계 속에서 이미 고정되어 있어, 이 구조 안에서 다른 개념이나 개념들은 차이의 체계적 유희를 통해 표시된다. 이러한 유희인 차연은 단순히 개념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개념성, 개념적 과정, 그리고 체계를 있게 하는 가능성이다.11) 데리다는 차연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개념을 있게 하는 가능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개념을 있게 하는 가능성이라는 것은 결국 개념 이전의 직관적 인식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데리다에게 있어 개념은 단순한 것이고 직관적 인식에 지나지 않는 차연이라는 관념은 마치 심오한 의미를 가진 것인 양 서술되고 있다. 데리다의 이러한 인식은 개념보다 직관을 우선시하는 후설의 인식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과학의 입장에서는 직관적 인식은 개념적 인식의 전 단계이며 개념이 대상의 본질을 반영하는 공고한 인식이라면 직관적 인식은 동요하는, 흔들리는, 불완전한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 데리다 스스로도 차연에 대해 말도 아니고 개념도 아닌 차연12)이라고 규정한다. 또한 데리다는 차연에 대해 결코 나타날 수 없는 것의 흔적, 스스로 나타날 수 없는 흔적, 즉 현상 속에서 이와 같다고 스스로를 나타내고 보여줄 수 없는 차연13)이라고 규정한다. 스스로를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은 차연이 온전한 자기 내용을 갖지 못하는 불완전한 인식임을 말한다.

언어학 혹은 그라마톨로지와 관련하여 데리다는 차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순수한) 흔적은 차연이다라고 하면서 이 차연은 지성적으로 파악될 수 없을뿐더러 감각적으로 파악이 안 되지만, 동일한 추상적 차원(가령 음성적 텍스트 또는 표기적 텍스트) 내부에서 기호 사이의 분절을 허용한다. 그것은 (일상적 의미에서)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분절을 가능하게 한다14)고 주장한다. 감각적으로 파악이 안 되면 차연은 현실적인 감각적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며 지성적으로 파악이 안 된다는 것은 차연이 개념적 사고가 아니라 불완전한 직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리다는 차연이 언어학에 있어서 음성적 분절과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분절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차연이라는 관념은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데리다 자신의 자의적인 느낌과 판단에 의존한다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러한 것이 후설적인 직관 그리고 데리다적인 직관적 인식의 한계이다. 이러한 데리다의 차연이라는 관념은 차이라는 논리학의 개념을 해체주의적으로 전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간극, 틈, 지연 등의 요소에 시간적 의미를 포함하는 차연 관념을 적용하여 일정한 개념을 해체하고 균열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해체주의를 표방한 데리다는 1990년대 초반 쏘련과 동구사회주의 진영이 붕괴하자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저서를 통해 맑스주의의 존재론적 해체를 주장했다. 데리다는 마르크스주의는 어디로?15)라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한다. 데리다는 ≪공산당 선언≫을 수십 년 만에 다시 읽었다고 하면서 유령이라는 모티브를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고 하는 ≪공산당 선언≫에서 얻었음을 밝힌다. 데리다는 쏘련을 하나의 전체주의 사회로 규정한다. 동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있었던 전체주의적 테러, 소비에트 관료제가 낳은 모든 사회경제적 재난, 과거의 스탈린주의 및 당시 진행되고 있던 신스탈린주의(간단히 최소의 지표만 지적한다면, 모스크바 재판에서 헝가리의 억압에 이르기까지 볼 수 있었던)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16)을 언급하면서 해체 과정은 신쓰딸린주의에서부터 즉, 쓰딸린 사후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프랑스 등 서유럽은 1950년대 쓰딸린 탄핵 이후 이미 맑스주의의 해체 과정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맑스가 당들에 속하지 않는 하나의 고전적 사상으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맑스는: 인용자] 공산주의자들, 마르크스주의자들, 당들에 속하지 않고, 우리 서양 정치철학의 위대한 고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야 하오. 마르크스로 돌아갑시다.17) 당이라는 현실적 실천을 떠난 맑스! 위대한 고전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맑스! 이는 맑스주의에서 운동성, 혁명성을 거세하고 많은 부르주아 철학 중의 하나로서 맑스를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가리켜 데리다는 비판적 상속18)이라고 규정한다.

데리다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론을 비판하면서 여전히 맑스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조건이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마르크스주의를 새로운 조건들 및 이데올로기에 대한 다른 사고에 맞춘다는 것을 조건19)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조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더 필수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정신을, 우리는 존재론, 철학 또는 형이상학 체계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및 역사 유물론으로서 또는 방법으로서 마르크스주의와, 또 당의 장치들과 국가장치들로 또는 노동자 인터내셔널로 합체된 마르크스주의와 구별해 보고 싶다.20) 데리다의 이러한 주장은 맑스주의의 비판정신을 그 존재와 즉, 변증법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을 자신의 세계관으로 하고 또 당과 인터내셔널과 결합된 변혁적 운동과 분리하자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맑스주의는 유령으로 남고 맑스주의는 존재론적으로 해체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맑스주의는 필요하지만 단지 유령으로서만 필요하다!?!

데리다는 맑스주의의 존재론적 해체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있다. 다소 길지만 인용해 보자. 우리는 이러한 정신을 마르크스의 다른 정신들로부터, 곧 마르크스주의를 마르크스주의의 교의에, 이른바, 체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또는 존재론적 총체성에(특히 변증법적 방법이나 유물 변증법에), 노동과 생산양식, 사회 계급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개념들에, 따라서 그 장치들(노동자 운동 인터내셔널, 프롤레타리아 독재, 유일당, 국가, 마지막으로 전체주의적 괴물 등과 같은 투사된 장치들이나 현실적인 장치들)의 전체 역사에 고정시키는 정신들로부터 구분할 것이다. 왜냐하면 ―좋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 존재론에 대한 해체는 단지 마르크스주의 몸체의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층위만이 아니라, 이를 세계 노동자 운동의 장치들 및 전략들의 가장 구체적인 역사와 접합하는 모든 것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21) 계몽정신, 혹은 비판정신으로만 남고 현실적 운동으로서 맑스주의는 해체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해체주의를 걸어온 데리다가 맑스주의에 대해 내리는 선고!이다. 데리다는 그러면서 환영은 결코 죽지 않으며, 항상 도래할 것으로, 다시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다22)고 하면서 부르주아지에 대한 충고를 잊지 않는다.

데리다의 충고는 현실이 되고 있는데 2007년 발발한 세계대공황으로 인해 맑스주의는 이데올로기적 명맥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의 운동으로 소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유령은 유럽만 배회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무대로 배회하고 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다.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은 동일성에서 풀려난 차이의 철학을 추구했다면, 데리다는 차이 개념을 해체하여 그것을 차연이라는 직관적 인식으로 전화하였고 그를 매개로 언어학을 비롯한 기존의 철학과 과학 전체를 해체하려 하였다. 그러나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실제로는 후설의 본질직관이라는 반과학주의를 무기로 한 것이었고 개념적 사고의 부정이 어떠한 결말에 이르는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1) 데리다, ≪해체≫, 문예출판사, p. 134.

2) 데리다, ≪그라마톨로지≫, 민음사, pp. 25-26.

3) 같은 책, p. 138.

4) 같은 책, p. 47.

5) 같은 책, p. 221.

6) 같은 책, p. 223.

7) 같은 책, p. 135.

8) 같은 책, p. 147.

9) 같은 책, p. 240.

10) 같은 책, p. 247.

11) 데리다, ≪해체≫, p. 132.

12) 같은 책, p. 126.

13) 같은 책, p. 150.

14) 데리다, ≪그라마톨로지≫, p. 168.

15)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그린비, p. 33.

16) 같은 책, p. 44.

17) 같은 책, p. 78.

18) 같은 책, p. 124.

19) 같은 책, p. 129.

20) 같은 책, p. 146.

21) 같은 책, p. 179.

22) 같은 책, p. 198.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Dec 15th, 2016 | By | Category: 이론, 정세와노동 | 조회수: 338

댓글 한 개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20)”

  1. 보스코프스키말하길

    요즘 이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 잘 일독하고 있습니다. 다만 지난 9일 사망한 지그문트 바우만(1925 ~ 2017.1.9)에 대해서도 추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자는 과거 게오르그 루카치처럼 배반한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