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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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찬 | 연구위원장

 

 

 

[목차]

 

머리말

제1장 세계관과 철학의 근본문제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 철학의 근본문제

  3. 세계의 통일성

제2장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의 역사

  1. 철학의 발생

  2. 데모크리토스 노선과 플라톤 노선의 투쟁

  3. 아리스토텔레스

  4.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에 의한 고대 원자론의 계승, 발전

  5.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 토마스 아퀴나스

  6.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브루노, 갈릴레이, 뉴턴

  7. 베이컨, 홉스

  8. 데카르트

  9. 스피노자

  10. 로크

  11. 라이프니츠

  12. 흄

  13. 디드로, 엘베시우스, 돌바하

  14. 볼테르, 루쏘

  15. 칸트

  16. 피히테, 셸링

  17. 헤겔

  18. 포이에르바하

제3장 맑스, 엥겔스에 의한 철학에서의 혁명

  1. 맑스, 엥겔스에 의한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의 창시

  2. 변증법적 유물론의 범주들

  3. 자유와 필연성

  4. 목적의식성

  5. 사적 유물론의 범주들

  6. 레닌, 쓰딸린, 마오쩌뚱, 그람시에 의한 맑스주의 철학의 발전

제4장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사조에 대한 비판

  1. 콩트, 밀

  2. 쇼펜하우어, 니체

  3. 후설

  4. 하이데거

  5. 프로이트

  6.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7. 샤르트르

  8. 하버마스

  9. 알튀세르, 발리바르

  10. 푸코, 들뢰즈, 데리다, 라캉  ㆍㆍㆍ <이번 호에 게재된 부분>

  11. 지젝

  12. 자율주의

  13. 이진경

  14. 롤즈의 ≪정의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제5장 과학의 발전과 그에 대한 철학적 일반화

제6장 철학과 종교

제4장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사조에 대한 비판

 

10. 푸코, 들뢰즈, 데리다, 라캉

 

2) 들뢰즈

들뢰즈는 푸코와 마찬가지로 20세기 중, 후반의 프랑스 철학자이다. 들뢰즈는 68혁명의 영향을 받아 반자본주의를 표방했지만 들뢰즈의 반자본주의는 니체-맑스적인 것으로서 반자본주의를 비과학성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먼저 들뢰즈의 인식론 혹은 방법론이 정립된 저작인 ≪차이와 반복≫을 검토해 보자.

들뢰즈는 자신의 논지가 반헤겔주의임을 공공연하게 표방한다. 이 모든 조짐들은 반(反)-헤겔주의로 집약될 수 있다. 즉 차이와 반복이 동일자와 부정적인 것, 동일성과 모순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차이는 동일자에 종속되는 한에서만 부정적인 것을 함축하고 마침내 모순에까지 이르기 때문이다.1) 이 인용문은 ≪차이와 반복≫이라는 저작 전체의 내용을 압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헤겔 변증법의 핵심 개념인 모순 개념은 동일성을 전제로 하는 개념인데 들뢰즈는 동일성을 부정하고 그것을 차이 개념으로 대체하고 있으며 운동은 반복이라고 주장하며 차이와 반복 개념으로써 헤겔 변증법을 대체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변증법을 일종의 형이상학으로 전환시키는 것인데 그의 논리를 하나하나 추적해 보자.

우선 그의 반복이라는 개념을 보면 그것은 일종의 형이상학적 개념으로서 제시된다. 만일 반복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자연법칙에 반하는 만큼이나 도덕법칙에 반하여 성립한다.2) 자연법칙에 반하는 것으로서 반복이라면 그때의 반복은 자연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또 도덕법칙에 반하는 것으로서 반복이라면 그것은 일반적인 사회적 현상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들뢰즈의 반복은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초월적 개념으로서 제기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는 니체와 키에르케고르를 끌어들인다. 니체는 그의 가설을 순환주기의 가설에 대립시킨다. 그는 영원회귀 안의 반복을 존재로 생각한다. … 사실상 법칙의 개념에 대한 비판을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갔던 철학자가 어떻게 영원회귀를 자연법칙으로 다시 끌어들일 수 있단 말인가?3) 여기서 들뢰즈는 반복 개념의 전형적인 예로서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을 들고 있다.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이 공허한 형이상학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들뢰즈의 반복 개념 또한 일종의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들뢰즈는 또한 키에르케고르를 통해 반복 개념이 초월적임을 주장한다. 키에르케고르가 이해한 바 그대로, 반복은 심리적 의도들로서의 항의와 체념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초월적 상관항이다.4) 이와 같이 들뢰즈의 반복 개념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반복의 의미가 아니라 그가 헤겔 변증법을 대체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도입하는 초월론적인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이렇게 되면 반복 개념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들뢰즈는 헤겔 변증법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서서히 반복 개념에 내용을 부여하기 시작한다. 들뢰즈는 운동은 반복이라고 주장하면서 변증법의 대전제가 되는 개념인 운동 개념을 반복의 개념으로 대체한다. 이 운동, 운동의 본질과 그 내면성은 대립도 아니고 매개도 아닌 다만 반복일 뿐이다.5) 여기서 들뢰즈는 운동=반복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운동의 본질은 대립이 아님을 천명하고 있다. 이는 운동의 원천으로서 모순 개념을 부정하는 것인데 모순 개념을 부정하는 고리가 형이상학적인 반복 개념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 들뢰즈가 파악하는 운동이란 것은 과연 무엇인가가 문제되는데 들뢰즈는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형이상학적인 관점을 보인다. 키에르케고르와 니체는 철학에 새로운 표현 수단을 도입한 사람들에 해당한다. 이들과 더불어 철학의 극복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들의 모든 저작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운동이다. 이들이 헤겔을 비난하는 것은 그가 거짓 운동, 추상적인 논리적 운동, 다시 말해서 매개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키에르케고르와 니체는 형이상학이 운동성과 활동성을 띠게 되기를 원한다. … 중요한 것은 운동 자체를 어떠한 중재도 없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 매개적인 재현들을 직접적인 기호들로 대체하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정신에 힘을 미치는 어떤 진동, 회전, 소용돌이, 중력들, 춤 또는 도약들을 고안하는 것이 문제이다.6) 여기에는 들뢰즈가 사고하는 운동 관념이 잘 들어있다. 들뢰즈는 헤겔의 운동 관념이 거짓운동이라고 보는데 그 근거는 헤겔의 운동 관념이 매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운동 관념은 매개가 없는 운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운동에 대한 변증법적 관점과 형이상학적 관점이 정확히 구분될 필요가 있다. 헤겔의 운동관념이 논리적 운동이지만 매개되어 있는 이유는 현실의 운동이 물질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즉, 물질을 떠난 운동, 매개를 떠난 운동은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헤겔은 변증법의 전개에서 운동과 매개를 결부시켰던 것이다. 사실 변증법 자체가 발전의 사상이고 운동, 변화의 사상이기 때문에 운동 개념을 어떻게 파악하는가는 변증법적 관점에 설 것인가, 형이상학적 관점에 설 것인가를 가르는 지점이다. 여기서 헤겔은 매개를 통한 운동 관념으로써 변증법적 관점에 섰고 들뢰즈, 키에르케고르, 니체는 매개 없는 운동, 공허한 추상에 지나지 않는 운동, 형이상학적 운동 개념의 입장에 섰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은 반복이라는 들뢰즈의 입장은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고 이때 들뢰즈의 반복 개념은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그러면 들뢰즈가 반복 개념과 더불어 하나의 짝으로 설정하고 있는 차이 개념에 대한 고찰로 넘어가자. 들뢰즈의 차이 개념 또한 헤겔의 모순 개념을 부정하는 것을 초점으로 하고 있다. 헤겔의 모순 개념이 동일성을 전제한 대립이라는 점에서 들뢰즈는 먼저 동일성의 개념을 비판한다. 들뢰즈는 아도르노가 동일성을 억압, 전체주의, 강압으로 파악했던 것과 유사하게 동일성 개념과 억압 개념을 연관시킨다. 다시 말해서 나는 체험된 것을 동일성이나 유사성을 띤 어떤 대상의 형식에 맞추어 매개하는 표상을 억압하도록 결정되어 있다.7) 여기서 들뢰즈는 자신이 어떤 대상을 동일성의 형식에 맞추어 억압하게 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즉, 억압은 대상을 동일성의 형식에 맞추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런데 동일성=억압이라는 것은 비약이다. 많은 억압들이 동일성을 매개로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일성은 또한 피억압계급의 단결이라는 의미를 매개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동일성의 개념을 개념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렇게 동일성을 개념적으로 부정하는 것을 기초로 자신의 차이 개념을 전개해 간다. 들뢰즈는 동일성을 개념적으로 부정하는 것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주장한다. 동일성이 일차적이지 않다는 것, 동일성은 원리로서 현존하지만 이차적 원리로서, 생성을 마친 원리로서 현존한다는 것, 동일성은 차이 나는 것의 둘레를 회전한다는 것, 이런 것이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내용이다. 이 혁명을 통해 차이의 고유한 개념을 찾을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차이는 미리 동일한 것으로 설정된 어떤 개념 일반의 지배 아래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니체가 영원회귀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영원회귀는 동일자의 회귀를 의미할 수 없다. 오히려 모든 선행하는 동일성이 폐기되고 와해되는 어떤 세계(힘의 의지의 세계)를 가정하기 때문이다.8) 여기에서 들뢰즈는 차이가 동일성의 지배에서 풀려났다고 주장하고 있고 그리하여 니체적인 영원회귀는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매번 동일성이 폐기되는 반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들뢰즈의 주장은 자신의 형이상학을 강변하기 위해 엉터리 논리를 전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차이가 동일성의 지배에서 풀려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존에 어떤 대상들이 차이가 있다는 것은 동일성을 전제로 하여 그를 기초로 파악되는 차이라는 의미였다. 즉, 차이라는 개념은 개념적으로 동일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논리학의 일반 상식이었다. 그런데 들뢰즈는 바로 이 점을 부정하면서 이를 가리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어떤 두 개의 대상이 차이가 있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차이를 말하게 되는가? 차이가 파악 가능하게 되는 기준, 그것은 동일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는 차이 개념은 성립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바로 이 점을 부정하고 있고 이를 차이가 동일성의 지배에서 풀려나는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 점은 결정적으로 들뢰즈의 철학이 비과학적임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의 출발점 자체가 엉터리라는 것을 말한다. 들뢰즈는 헤겔 변증법을 부정하면서 동일성의 부정으로 나아갔지만 그것은 비과학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엉터리 출발점을 갖는 들뢰즈의 차이 개념, 동일성으로부터 풀려난 차이 개념이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살펴보자. 차이는 어떤 결정적인 경험과 맞물려 있다. 제한 앞이나 안에, 대립 앞이나 안에 처하게 될 때마다 우리는 그런 상황이 전제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그런 상황은 우글거리는 차이들을 전제한다. 거기에는 자유롭고 야생적인 혹은 길들여지지 않은 차이들의 다원주의가 전제되어 있다.9) 동일성으로부터 풀려난 차이는 결국 우글거리는, 야생적인 차이들의 다원주의로 귀결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동일성의 부정에 기초하는 차이의 다원주의는 (소)부르주아적인 다원주의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원주의를 통해서는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세력으로서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위치라는 개념은 부정되게 되고 자본주의에 맞서는 노동자계급과 인민대중의 단결이라는 정치적 구호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은 현실적으로는 이렇게 (소)부르주아적 다원주의로 귀착되고 있다. 더구나 그의 차이의 철학은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부정을 거부하는 것인데 그는 동일성을 부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변증법적인 부정의 개념을 거부한다. 차이의 철학이 거부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모든 규정은 부정이라는 명제이다. … 차이는 본질적으로 긍정의 대상, 긍정 자체이다.10) 모든 규정은 부정이라는 명제는 스피노자의 명제이다. 이 명제는 규정 자체가 어떤 제한이며 그러한 피제약성은 동시에 부정이기도 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변증법적 통찰인데 스피노자 이후 변증법의 발전은 이 명제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변증법의 발전의 역사 전체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하여 차이는 긍정 자체라는 공허하고 입에 발린 말에 그치고 있다. 지금도 TV에서 나오는 광고 중에 차별이 아닌 차이의 긍정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은 바로 이러한 부르주아 광고의 철학적 토대라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차이는 긍정 자체라는 것을 보충하기 위해 긍정이 일차적이며 부정은 긍정의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발상법을 따른다면 긍정이 일차적이다. 긍정은 차이, 거리를 긍정한다. … 부정적인 것은 긍정의 환영, 대용품 같은 환영만을 산출한다. … 부정은 보다 심층적인 발생적 요소의 그림자로서만 출현할 뿐이다.11) 과연 긍정이 일차적이고 부정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헤겔은 생성은 존재와 무의 통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의 고대 원자론은 이 세계는 원자와 공허(비존재)의 통일이라고 했다. 또한 헤겔은 변증법적 부정이 새로운 생성의 원천이라고 했고 이를 발전시켜 운동의 원천으로서 모순 개념을 정립했다. 그런데 부정이 단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면 부정은 고유한 내용을 갖지 못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떠한가? 어떤 생물이 있을 때 그 생물의 죽음은 그 생물의 부정이며 이때 부정은 단지 그림자가 아니라 생물의 사멸이라는 고유의 내용을 갖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부정은 자본주의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회 형성의 원천이 된다. 그런 점에서 부정은 단지 그림자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 내용과 근거를 갖고 있으며 현실의 생성과 발전, 운동은 긍정과 부정의 통일, 존재와 비존재의 통일이다. 변증법의 지양이라는 개념은 어떤 대상에 대한 불모의 부정이 아니라 그 대상을 부정하면서도 대상의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점을 간직하면서 새로운 질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부정이 단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러한 지양의 개념은 성립할 수 없다. 긍정 자체로서의 차이라는 들뢰즈의 개념은 이렇게 변혁적 사고를 가로막고 질식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를 조금 더 살펴보자. 본연의 차이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거꾸로 그것은 비-존재이고, 이 비-존재는 본연의 차이, 곧 반대가 아닌 다름이다.12) 비-존재는 반대가 아닌 다름이라는 것은 현실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존재가 반대가 아니라는 것은 대립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현실에서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이 대립의 차원에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그것은 단지 다름,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대립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계급투쟁은 부정되게 된다. 즉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에서 계급투쟁은 원천적으로 부정되게 된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계급으로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차이가 있는 존재일 뿐이며 그러한 차이는 이 사회의 많은 다원주의 요소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부르주아적 궤변으로 귀착되게 된다. 그리하여 들뢰즈는 혁명은 부정이 아니라는 강변을 한다. 사회성 능력의 초월적 대상, 그것은 혁명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혁명은 차이의 사회적 역량, 사회의 역설, 사회적 이념의 고유한 분노이다. 혁명은 결코 부정적인 것을 거쳐 가지 않는다. … 실천적 투쟁은 부정적인 것을 경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를, 그 차이의 긍정하는 역량을 경유한다.13) 혁명은 부정이 아니라 차이의 긍정이라는 것! 이는 실천적으로는 혁명을 부르주아 다원주의로 용해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부르주아 변호론적인 차이의 철학을 전개한 들뢰즈는 68혁명이 일어나자 그에 영향을 받아 저항의 이론을 펼치는데 1972년의 ≪안티 오이디푸스≫가 그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이 유행하여 20세기 중반에 서유럽에서 프로이트와 맑스를 양립시키는 프로이트-맑스적인 조류가 있었는데 들뢰즈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프로이트-맑스적 조류에 반발하여 그것에 니체-맑스적인 경향을 대치시켰다. 또한 ≪안티 오이디푸스≫는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프로이트를 반박하면서 분열증을 고찰하고 분열증이 자본주의의 극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들뢰즈는 서술에 있어서도 분열증적인 틀을 취하는데 이는 그의 차이의 철학에 따른 것이었다. 즉, 동일성으로부터 풀려난 차이는 현실에서는 분열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 그리고 ≪천 개의 고원≫은 반자본주의를 표방하고 있는데 그 내용과 서술방식은 일정한 통일성(동일성)을 갖지 않고 분열증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면 들뢰즈의 반자본주의의 실제 내용이 무엇인지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도록 하자.

들뢰즈는 자본을 기관 없는 몸이라고 파악한다. 자본은 그야말로 자본가의, 아니 차라리 자본주의적 존재의 기관 없는 몸이다. 하지만 이런 것이기에 자본은 단지 돈의 흐르고 멈추는 실체는 아니며, 자본은 돈의 불모성에 돈이 돈을 생산하는 형식을 부여하게 된다. 기관 없는 몸이 자신을 재생산하듯, 자본은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싹이 터서, 우주 끝까지 뻗어 나간다. 자본은 기계에게 상대적 잉여가치를 제조하는 임무를 맡기고, 그 자신은 기계 안에 고정자본으로 체현된다.14) 자본을 기관 없는 몸이라고 파악하는 것은 일정한 일리가 있다. 자본은 잉여가치를 낳고 다시 그것을 자신의 본체에 합체하여 더 큰 자본으로 기능한다. 무한한 증식을 향한 자본의 운동을 기관 없는 몸이라고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의 자본에 대한 인식은 매우 협소하다. 그는 자본이 기계에게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을 맡기고 자신은 고정자본에 체현된다고 했는데 이는 자본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조장하는 것이다. 자본의 본질은 고정자본에의 체현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이다. 노동자로부터 더 많은 잉여가치를 착취하기 위한 힘으로서, 사회적 관계로서 기능하는 자본! 기계와 고정자본은 사회적 관계를 떠나서는 단지 사물일 뿐이며 자본으로서 성격을 띠지 않는다. 이렇게 들뢰즈의 자본에 대한 인식은 피상적이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반자본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우리는 잘 안다. 결핍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또한 결핍의 주체적 상관물인 환상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결핍은 사회적 생산 속에서 설비되고 조직된다.15) 이러한 들뢰즈의 주장은 타당하다. 자본주의에서 결핍, 빈곤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산물이다. 한편에서 부가 생산될 때 다른 편에서 빈곤이 생산되어야만 자본주의적 축적이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들뢰즈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반자본주의를 표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들뢰즈의 반자본주의는 과학성이 매우 결여되어 있는데 그는 욕망이라는 개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욕망이 억압되는 까닭은, 아무리 작은 욕망일지라도 일단 욕망이 있게 되면 사회의 기성 질서가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욕망이 비-사회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대다. 하지만 욕망은 뒤죽박죽이다. 욕망 기계가 있을 수 있게 되면 사회의 모든 부문은 온통 요동친다. 몇몇 혁명가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욕망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다. 혁명적인 것은 욕망이지 축제가 아니다! 또한 어떤 사회라도 참된 욕망의 정립을 허용할 수 있게 되면 그 착취, 예속, 위계의 구조가 반드시 위태로워진다.16)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와 민중들의 욕망은 일반적으로 억압된다. 그리고 맑스주의는 유물론이라는 점에서 고상한 정신이 아닌 물질적 삶이 역사발전의 일차적 원동력이라 것을 전적으로 승인한다. 그런데 맑스주의에서 물질적 삶을 역사발전의 원동력으로 파악하는 것과 욕망 혹은 욕망기계라는 개념으로 혁명을 설명하는 것은 일정한 차이가 있다. 물질적 삶을 역사발전의 원동력으로 파악하여 접근하면 생산력과 생산관계, 그리고 생산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계급의 문제가 관건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욕망을 키워드로 하여 접근하면 계급의 문제가 사라진다. 그에 따라 맑스주의에서는 물질적 삶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이루어지는 반면 욕망에서는 욕망에 대한 억압, 욕망의 해방이라는 접근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욕망이라는 개념을 통하는 것이 대중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방식 같지만 실은 대중들이 사회적 문제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나아가 혁명은 욕망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사회변혁이라는 관점은 전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들뢰즈의 반자본주의는 이렇게 과학성을 결여하고 있고 피상적인 것이다.

그의 비과학성의 면모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그는 역사에서 필연을 부정하고 역사는 우연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맑스가 정식화한 규칙들을 정확하게 따른다는 조건에서, 역사 전체를 자본주의의 조명 아래 회고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정당하다. 무엇보다, 세계사는 우발들의 역사이지 필연의 역사가 아니며, 절단들과 극한들의 역사이지 연속성의 역사가 아니다.17) 맑스를 인용하면서도 역사에 필연이 없다는 이 주장은 맑스를 대단히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역사가 우연의 착종이 아니라 역사에는 발전법칙이 있다는 것을 세운 것이 맑스주의이고 역사적 유물론인데 들뢰즈는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역사가 우연일 뿐이라면 사회의 진보와 역사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투쟁한다는 관념이 성립할 수 있는가? 어불성설이다. 그의 비과학적 면모는 잉여가치에 대한 개념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는 잉여가치의 개념에 대한 정의를 변경한다. 잉여가치의 정의는 가변자본의 인간적 잉여가치와 구별되는 불변자본의 기계적 잉여가치와 관련해서, 그리고 흐름의 잉여가치의 집합의 측정 불가능한 성격과 관련해서 교정되어야만 한다. 잉여가치는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에 의해 창조된 가치 사이의 차이에 의해서는 정의될 수 없다. 오히려 서로 내재하는 두 흐름의 통약 불가능성에 의해, 이 두 흐름을 표현하는 화폐의 두 양상 간의 어긋남에 의해, 또 한편으로 참된 경제력을 측정하며 다른 한편으로 <소득>으로 규정된 구매력을 측정하는 두 흐름과 관련해서 외부 극한의 부재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18) 잉여가치는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이 창출하는 가치의 차이라는 잉여가치에 대한 정의가 들뢰즈에 의해 기각되고 있다. 그리하여 잉여가치는 노동력, 즉, 인간만이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 등의 불변자본 또한 잉여가치를 산출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들뢰즈의 주장은 그의 반자본주의의 비과학성의 정점이다. 부르주아들이 핏대를 올리며 주장하는 것이 이윤은 노동자만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 또한 생산한다고 하는 것이다. 기계, 건물, 원료 그리고 관리자와 자본가 자신의 노동 또한 이윤(잉여가치)의 생산에 기여하며 노동자의 기여는 극히 일부분뿐이라고 하는 것이 부르주아 경제학의 일반적인 입장인데 들뢰즈와 부르주아지의 차이는 잉여가치라는 개념을 사용하는가 아닌가의 차이밖에는 없다. 들뢰즈는 불변자본 또한 잉여가치를 생산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들뢰즈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불변자본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고백이다. 불변자본이 불변자본인 이유는 그것이 생산과정에서 가치가 변화하지 않는 채로, 즉 불변인 채로 있기 때문이다. 불변자본은 생산물의 형성, 사용가치의 형성에 기여하지만 가치의 차원에서는 자신이 가진 가치를 생산물에 이전하는 것 이상은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불변자본과 반대로 노동력은 그리고 노동력만이 자신의 가치(노동력의 가치, 즉 노동력의 재생산비용)보다 더 많은 가치를 노동과정에서 생산하며 그 가치를 생산물에 응고시킨다. 그런 점에서 가치는 응고된 노동이며 잉여가치는 노동자의 노동에 의해서만 생산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불변자본은 가치를 단지 이전할 뿐이며 노동력은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렇게 들뢰즈는 잉여가치, 나아가 정치경제학에 대해서 매우 피상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계급적으로는 부르주아적인 관점을 보이고 있을 따름이다.

들뢰즈의 사회주의에 대한 입장은 매우 뒤틀려 있다. 그는 사회주의를 관료제에 의한 지배로 보고 레닌주의가 국가자본주의의 부활을 막지 못했다고 보고 나아가 쓰딸린주의를 전체주의로 보고 있다. 하나하나 인용하면서 비판해 보자. 그러므로 다음 둘 중 하나이다. 프롤레타리아가 그 객관적 이해관계에 맞게 국가기구를 탈취하든가, 아니면 부르주아지가 국가의 통제를 지키든가. 그런데 전자의 경우, 이 조작들은 그 의식의 전위나 정당의 지배 아래, 말하자면 <부재하는 위대한> 계급으로서 부르주아지의 등가물인 관료제와 기술 관료제에 이익이 되게 행해진다.19) 들뢰즈는 여기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기구를 탈취한 사회, 사회주의 사회를 관료제와 기술 관료제의 이익에 따른 사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그러한 주장의 근거는 제시되지 않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에도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이 관료제의 지배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부르주아 국가와는 다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국가가 존재하는 한 관료는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관료제와는 다른 것이다. 부르주아 관료제는 계급대립의 심화의 산물이다. 즉, 부르주아 사회에서 국가의 팽창의 진정한 이유는 계급대립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반대로 사회주의 사회에서 관료는 인민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민에 의해 선출되고 생산활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물론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관료주의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계급적 대립과 억압의 문제가 아니라 인민이 문화적 수준이 높아져서 행정에 대한 직접적 참여의 수준이 높아지면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기술관료는 전문가를 의미하는데 사회주의 사회에서 전문가는 우대를 받지만 이들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즉, 전문가는 노동자계급에 의해 정치적 통제를 받는다. 그런 점에서 들뢰즈가 사회주의 사회를 관료제와 기술관료의 이익에 따르는 사회라고 규정하는 것은 매우 주관적이며 사회주의 사회의 의미, 그 현실에 대해 왜곡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또한 레닌주의가 국가자본주의의 부활을 막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레닌과 러시아 혁명의 엄청난 성과는 객관적 존재 내지 객관적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계급의식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로 자본주의 국가들에 계급의 양극성을 인정하라고 강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레닌주의의 이 위대한 절단은 사회주의 자체 속에서 국가자본주의가 부활하는 것을 막지도 못했고, 또 고전적 자본주의가 자신의 두더지 같은 참된 작업을 계속함으로써 그 절단을 돌리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20) 레닌주의가 국가자본주의의 부활을 막지 못했다는 들뢰즈의 주장은 기존의 20세기의 사회주의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사실과 맞지 않는데 쏘련에서 국가자본주의의 전형은 1920년대의 신경제정책(NEP) 시대였다. 국유화된 사회주의 기업과 사적 자본주의 기업이 공존하고 또 국유기업에 이윤추구를 일정하게 허용한 것이 NEP 시대였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전쟁에 의해 파괴된 생산력이 회복되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농업에서도 집단화를 통해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성립시켰고 사적 자본이 제거되고 계급으로서 부르주아지와 쿨락이 사라졌다. 또한 국유기업의 활동도 이윤추구가 아니라 인민의 복지와 요구를 위한 것으로 정립되었다. 이렇게 1920년대, 30년대를 거치면서 쏘련에서는 전반적으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성립되었고 그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성격이 사라졌고 남은 것은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계급적 구분, 그리고 노동자계급 내의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구분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레닌주의가 국가자본주의의 부활을 막지 못했다는 들뢰즈의 주장은 주관적이고 피상적이며 실제로는 서유럽의 부르주아지의 입장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들뢰즈는 부르주아지의 전형적인 주장대로 쓰딸린주의를 전체주의로 규정한다. 물론 전체주의 국가라는 개념은 파시즘의 발명품이지만, 파시즘을 파시즘 자신이 발명한 개념에 의해 규정할 이유는 없다. 쓰딸린주의 유형 또는 군사 독재 유형처럼 파시즘 없는 전체주의 국가가 있기 때문이다.21) 쓰딸린주의 혹은 쓰딸린 시대의 쏘련을 전체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서유럽과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진영의 일반적 입장이고 들뢰즈 또한 이를 반복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쓰딸린 시대 쏘련은 전형적인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였으며 따라서 독재를 공공연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독재는 착취계급에 대한 독재였고 착취의 폐지를 위한 독재였다. 그리고 쓰딸린 시대에 민주주의는 짜르 시대에 비해, 그리고 부르주아 정부 시대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했었다. 물론 쓰딸린 시대는 역사적 한계로 인해, 즉 인류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시대였다는 점에서 시행착오가 있었고 일정한 오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와 오류가 쓰딸린 시대가 착취의 폐지를 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대였다는 본질을 가리지는 못한다.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은 헤겔 변증법을 형이상학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으며 대립과 모순의 개념을 차이의 개념으로 대체하려 했으며 나아가 동일성을 부정하는 차이 개념은 분열증으로 귀착되었다. 들뢰즈는 변증법적 부정 개념을 거부하면서 긍정 자체인 차이를 주장하여 부르주아 변호론으로, 부르주아 다원주의로 나아갔다. 이후 68혁명의 영향을 받아 반자본주의를 표방했으나 그것은 반자본주의를 비과학성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이었고 기계가, 불변자본이 잉여가치를 생산한다는 주장은 그러한 비과학성의 정점이었다.  노사과연


1) 들뢰즈, ≪차이와 반복≫, 민음사, p. 17.

2) 같은 책, p. 33.

3) 같은 책, p. 37.

4) 같은 책, p. 38.

5) 같은 책, p. 44.

6) 같은 책, p. 41.

7) 같은 책, p. 62.

8) 같은 책, p. 112.

9) 같은 책, p. 132.

10) 같은 책, p. 136.

11) 같은 책, pp. 140-143.

12) 같은 책, p. 159.

13) 같은 책, p. 449.

14) 들뢰즈,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p. 36.

15) 같은 책, p. 63.

16) 같은 책, p. 208.

17) 같은 책, p. 246.

18) 같은 책, p. 402.

19) 같은 책, p. 431.

20) 같은 책, p. 431.

21) 들뢰즈, ≪천 개의 고원≫, 새물결, p. 408.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Nov 4th, 2016 | By | Category: 이론 | 조회수: 720

댓글 한 개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19)”

  1. 티마이오스말하길

    들뢰즈 이해 하지도 못해놓고 글쓰는듯 ㅋㅋㅋㅋㅋㅋ 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