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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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구 | 전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1. 한국의 민족주의 논의

 

90년대 말부터 한국사회에서 민족주의 비판은 학자들이나 일반 지식인 사회에서 하나의 대세가 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민족주의를 비윤리적인 이데올로기라고 매도하고 백안시한다. 민족주의를 이야기하면 마치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는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나 외국인 신부들에 대한 차별 행위와 관련해서도 마치 민족주의가 그 원흉인 것 같은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단일민족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단군신화를 폐기하자는 과격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갑자기 이런 사태가 벌어진 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90년대부터 본격화된 지구화 움직임이다. 특히 한국에서 이것은 1997년 말의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체제를 받아들인 것과 관련이 깊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경제개방이 가속화되며 그것이 미래에 대한 정당한 처방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세계화가 ‘국경이 없는 세계’를 상정하므로 이제 민족이나 민족주의는 당연히 협소한 개념으로, 또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다.

공산권 붕괴 이후 구쏘련 지역이나 구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일어난 민족 분규도 하나의 원인이다. 보스니아의 대량학살이나 체첸인들의 독립 전쟁도 그 원인이야 어쨌든 민족분쟁을 유혈과 연결시키는 나쁜 선입견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양에서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들어온 것이다. 그것이 민족이나 민족주의가 근대에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근대주의적 해석>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우리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1. 민족주의를 보는 관점들

 

민족주의를 보는 방식은 보통 영속주의, 원초주의, 근대주의, 종족-상징주의의 넷으로 나눈다. 영속주의(perennialism)란 민족이 기억할 수 없는 오랜 역사 속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역사가 수백 년 내지 수천 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실 많은 사람들이 최근까지도 민족에 대해 소박하게 갖고 있는 생각이다. 우리가 단군을 민족의 조상으로 생각하며 민족이 그때부터 존재해 왔다고 믿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주로 역사가들이 좋아하는 패러다임이다. 1980년대에 근대주의가 나타나기 전만 해도 민족주의에 대한 주류해석이었다.

원초주의(primordialism)는 민족을 원초적인 사회적 결속이라고 생각한다. 민족은 가족이나 친족 같은 자연적인 조직으로서 그것에 대한 애착은 우리의 체질 속에 항상 존재하며 자연의 질서와 같은 원초적 성격을 가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친족을 친족이 아닌 사람들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유전인자를 남기려고 한다는 점에서 유전적이며 본능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개미나 벌이 하나의 군집을 형성하고 사회적으로 살듯이 인간도 그런 원초적인 사회적 본능을 갖고 있고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 민족주의라는 것이다. 1960년대 이래 일부 인류학자나 사회동물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했다. 그러나 둘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원초주의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근대주의(Modernism)는 1980년대부터 새로이 나타난 해석이다. 이것은 민족이나 민족주의가 근대에, 즉 18세기 말이나 19세기 초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면 민족이나 민족주의는 200여 년에 불과한 짧은 역사를 갖는 셈이다. 따라서 앞의 두 해석과는 전연 다르다. 이런 견해는 1960년대에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학자인 어니스트 겔너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짧은 기간에 많은 추종자들을 얻으며 지금은 민족주의 연구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겔너가 당시까지 주로 이데올로기로만 취급되던 민족주의를 사회적 구조와 관련해 분석함으로써 민족주의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구방향이 당시 서양학자들에게 매우 참신하고 그럴듯하게 보였기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이 이에 매달렸고 그래서 1990년대에 들어와 영속주의를 밀어내고 민족주의의 주류적 해석이 되었다.

종족-상징주의(Ethno-Symbolism)는 근대주의가 전근대와 근대를 단절적으로 보는 데 반대하여 전근대부터 내려오는 종족적 요소를 매우 중시한다. 그리고 근대의 정치적 민족주의는 과거의 종족적 결속이나 그 기억 없이는 설명할 수 없으며 유럽의 많은 민족들은 과거는 물론 지금도 종족적 기반 위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종족성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강조하므로 종족-상징주의로 부르나 영속주의와는 달리 강한 역사적 지속성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민족이 과거의 종족적인 형태에서 출발하기는 했으나 근대의 힘에 의해 변형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근대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출발했으나 이 점에서 근대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1970년대 이후 등장했으며 중심인물은 앤서니 스미스이다.

  1. 근대주의적 해석이란?

 

근대주의적 해석은 그 전까지 전통적인 연구방식이었던 사상사적인 접근 방식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되었다. 대신 전근대와 근대의 사회구조 차이에 주목하여 민족과 민족주의를 산업화, 자본주의, 근대국가, 도시화, 세속화와 같은 여러 근대적인 현상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다.

이 연구 방향이 처음 등장한 1960년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식민지들이 해방되며 새롭게 많은 민족이나 국가가 성립한 시기이다. 따라서 그런 상황을 직접 지켜보던 서양 사회과학자들이 민족형성을 당시대의 일로, 길어 봤자 18세기 말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고 본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새로운 민족주의 이론을 주도한 것은 과거와 같이 역사학자가 아니라 사회과학자들, 특히 사회학자나 정치학자들이었다.

이 해석은 기본적으로 겔너가 1983년에 낸 ≪민족과 민족주의≫라는 책에 기초하고 있다. ≪상상의 공동체≫(1983)라는 책을 통해 그 말을 유행시킨 베네딕트 앤더슨이나, 대중적으로 많이 읽히는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1990)를 쓴 에릭 홉스봄도 모두 큰 틀에서는 그를 따르고 있다.

겔너의 주장을 통해 그 논리를 간단히 살펴보자. 겔너는 민족주의를 산업화의 결과로 보고 농업사회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고 생각했다. 전통적인 농업사회는 신분으로 나눠져 있는 수직적 사회이므로 동질적인 문화가 존재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 산업사회는 산업화에 의해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평등한 관계를 갖는 수평적인 사회이므로 동질적인 문화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위에서 민족이 만들어질 수 있는데 그것은 고도의 분업이 이루어지는 산업사회의 요구 때문이다. 고도로 분화된 산업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전문화된 노동이 필요하고 그 전제는 숫자계산이나 문자의 해득이다. 노동자들이 기계를 다루기 위해 최소한의 지침서를 읽을 수준은 되어야 하고 같이 일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업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든지 그런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통의 일반적인 교육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은 그 대규모성 때문에 국가가 담당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국가가 주도하는 대중화된 공공교육을 통해 신분이나 지역을 넘어선 동질적인 문화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고도(高度)문화라고 불렀다.

민족주의란 이 고도문화에 정치적 보호막을 만들려는 노력이다. 산업화와 함께 이미 낡아 버린 왕조국가 대신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만들려고 할 때 이렇게 고도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공동체적 이념이 민족주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부구조를 구성하는 것이 민족주의적 교육과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체계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고 보호하는 유일한 기관인 국가이다.

이렇게 그는 보편적인 문자해득이나 중앙집권적 국가, 대중교육 등 산업사회의 여러 요소들에 의해 민족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민족이 민족주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즉 민족이 민족주의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기존의 상식을 넘어서는 매우 도발적인 것으로 그 후 많은 추종자를 얻게 되었다.

앤더슨은 인쇄자본주의의 발전으로 동질적인 문화의 형성이 이루어지고 여기에서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민족이 만들어진다고 본다. 홉스봄은 민족의 형성을 봉건국가를 넘어선 근대적인 영토국가의 발전, 근대적인 특정단계의 기술이나 경제발전과 관련해서 보며 민족주의 시대에 들어와 전통조차 ‘발명’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산업화, 자본주의, 근대국가와 관련해서 보면 민족주의는 근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다른 많은 근대주의자들의 경우도 중점은 조금씩 달라도 비슷하다.

따라서 이들은 민족이나 민족주의를 논할 때 전근대적 요소를 거의 완전히 배제한다. 전근대에도 근대의 민족과 비슷한 원(原)민족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것도 근대의 민족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믿는다. 양자 사이에 사회구조가 다르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양 중세에는 봉건제도나 기독교, 신성로마제국 같은 것들로 인해 지방적인 충성심이나 초국가적인 충성심이 있었을 뿐 민족적 충성심은 발전할 수 없었다고 본다. 또 신분사회였으므로 민족의 일원으로서의 평등한 동료의식도 불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민족은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 민족주의는 주권이 왕이나 귀족이 아니라 민족 전체에 있는 민족주권이 발전해야 하고 타민족의 억압에서 벗어나거나 분열된 민족의 통합을 추구하는 민족자주성에 대한 생각이 성숙해야 하고 민족의식이나 민족감정이 정치적 운동을 일으킬 정도로 확산되어 있어야 하나 중세에는 그런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므로 근대주의자들은 전근대를 전연 연구할 필요조차 없는 영역으로 간주했다.

 

 

  1. 근대주의적 해석의 문제점들과 비판

 

근대주의적 해석은 일견 그럴 듯하나 실증성이 매우 약하다고 하는 근본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겔너의 경우 산업사회와 민족주의의 관계에 관한 추상적인 모델을 만들었으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공허한 이론적 가설에 불과하다. 앤더슨의 경우 민족주의가 인쇄자본주의에 의해 남아메리카에서 처음 발전했다고 주장하나 그의 설명도 거의 설득력이 없다. 홉스봄은 역사학자이므로 셋 중 그래도 나으나 그도 매우 편파적인 역사해석을 한다는 점에서는 문제가 많다. 그러면 근대주의적 해석의 근본적인 문제점들과 함께 그것을 비판해 보자.

 

첫째로, 근대주의자들의 가장 중요한 취약점은 앞에서 말했듯 역사적 사고의 결여이다. 민족과 민족주의를 단순하게 근대의 산물로 단정하나 역사적으로 접근하면 그들의 주장들이 얼마나 단순하고 불충분한 것인지 잘 드러난다.

근대주의자들은 중세 시대에는 기독교 같은 보편종교나 제국, 또는 왕조, 봉건제도, 사회정치적 불평등, 많은 방언들의 사용이 민족의 형성을 막았다고 주장한다. 또 왕조가 왕국의 국경 안에 사는 주민들보다 더 중요했으므로 다른 민족의 군주가 다스려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것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민족에 해당하는 라틴어 gens나 natio/nacio는 8, 9세기부터 오늘날과 크게 차이가 없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중세유럽의 왕국들은 왕에게만이 아니라 그 주민들의 공동체(라틴어로 gentes, nationes, populi)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그 영토도 우연히 왕에게 속하게 된 영토가 아니라 그 주민들의 집단에 속하는 영토로 인식되었다. 교황이나 황제 같은 보편권력은 통치자의 원형으로서의 국왕의 최고권과 정치공동체의 원형으로서의 왕국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되지 못했다. 중세의 충성심이 봉건제에 의해 분산되지도 않았다. 또 왕국이나 다른 행정단위들은 공통의 혈통에 따라 묶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자기 민족이 주변의 민족과 다른 독자적인 민족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곳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이다. 잉글랜드에서는 이미 8세기에 잉글랜드인(gens Anglorum)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고 9세기의 앨프릿 대왕 때는 왕을 ‘잉글리쉬(잉글랜드인)의 왕’, 그들이 사는 땅을 잉글랜드라고 불렀다.

중세 후기에 들어와서는 집권적 국가의 형성, 보통법, 파러먼트(잉글랜드 중세의회), 영어의 사용(1363년 의회의 개회연설에 영어가 처음 사용되었다)이 민족공동체와 민족정체성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족적 정체성은 프랑스와의 백년전쟁(1337-1453)을 통해 더 강화되었다. 이 시기의 왕들은 근대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봉건제도 하에서도 신성한 권위를 가지고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잉글랜드와 관련해 이 시기의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상황을 잘 알려주는 두 가지 예가 있다. 하나는 1320년의 스코트족의 아브로스(Arbroath) 선언이다. 이는 당시 잉글랜드의 왕인 에드워드 1세가 계속 스코틀랜드를 괴롭히자 스코트족의 지도자들이 로마교황에게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다.

 

스코트 족은 대 스키타이에서 와서 … 스페인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그리고 많은 승리와 노력을 하여 오늘날의 영토를 확보했다. 이 왕국은 대대로 130명의 왕이 다스렸고 한번도 외부인에 의해 왕통이 무너진 적이 없다. … 우리 민족은 ‘신의 백성’으로 다른 탁월한 민족들 사이에서 많은 특징에 의해 구분된다. … 우리는 영광이나 부, 명예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유만을 위해 싸운다. 그것은 훌륭한 사람이라면 죽지 않는 한 포기할 수 없다. … 우리는 100명이라도 살아남는 한 결코 어떤 조건하에서도 잉글랜드인의 지배에 복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

 

민족의 기원 및 영토, 민족적 특수성에 대한 언급은 민족정체성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외부인에 의해 왕통이 무너진 적이 없다는 것과 자유를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고 잉글랜드인에게 복속되지 않겠다는 결의는 민족자주성과 관련한 이야기이다. 이 선언에 서명한 사람들은 당시 스코틀랜드의 지배계층인 영주, 성직자, 부유한 자유농들에게 한정되어 있으므로 민족주권의 범위는 매우 좁다. 그러나 여하튼 존재한다고 할 수는 있다.

다른 하나는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개최한 콘스탄츠공의회(1414-1418)에서 벌어진 민족과 관련된 논의가 그것이다. 당시 백년전쟁으로 잉글랜드와 사이가 좋지 않던 프랑스가 잉글랜드의 대표권을 문제 삼았다. 영토나 인구도 작은데 잉글랜드가 스코트, 웨일스, 아일랜드까지 포함시킨 대표권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때 잉글랜드 대표단은 “민족이 다른 민족들과 혈통이나 관습, 언어에서 구분되는 사람들로 이해되든 말든 민족의 가장 확실하고 적극적인 표식이자 본질은 신법과 인법이다. … 또 민족이 프랑스 민족의 영토와 마찬가지로 영토로 이해되든 말든 …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민족 개념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요소 가운데 혈통, 관습, 언어, 종교, 법, 영토가 모두 언급되고 있다. 오늘날의 민족 개념과 다른 점이 별로 없다.

프랑스에서는 왕권이 강화되며 13세기부터 프랑스왕국 또는 Francia라는 표현이 사용되었고 왕과 왕국에 대한 충성심이 생겨났다. 그리고 13세기 중반에 프랑스 법학자들은 유럽의 보편권력으로서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위를 부인했다. 잉글랜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백년전쟁이 민족정체성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15세기 후반의 로베르 개갱이라는 사람은 프랑스(France)를 조국(Patria)으로 부르며 조국에 대한 사랑, 프랑스의 영광과 명예가 그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프랑스의 영토, 역사, 민족성과 관련해 열렬한 민족감정을 토로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1500년경이면 프랑스 지역에서도 잉글랜드보다는 못해도 민족적 정체성이 분명히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아직은 두 지역 모두에서 물론 주로 엘리트 계층에 한하는 일이다.

그러나 민족과 민족주의의 형성에서 보다 중요한 시기는 18세기까지의 근대 초 시기이다. 16세기에 들어와 종교개혁으로 인한 갈등은 국내적인 분쟁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많은 종교전쟁을 가져왔다. 특히 17세기 초의 30년 전쟁에는 전쟁터가 된 독일 외에, 프랑스, 스페인, 덴마크, 스웨덴 같은 여러 나라가 관련되었다. 그 과정에서 각 나라의 민족의식이 크게 성장했다. 성경이 자국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도 각 나라의 민족의식 고양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잉글랜드의 경우 헨리 8세와 뒤이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국교회 수립과, 국력신장에 힘입어 민족의식이 매우 강화되었으며 거기에서 나온 애국적 열정은 문학의 여러 형태로 표현되었다. 여기에는 귀족만이 아니라 일부 평민들도 참여했다. 1640년대의 영국혁명은 영국인을 정치화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고 민족의식을 더 넓게 또 더 하층계급으로 확산시켰다. 그리하여 18세기 중반의 7년 전쟁 때의 전쟁문학에서는 이 전쟁을 왕실이나 종교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화해할 수 없는 두 민족 사이의 전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종교전쟁은 민족의식의 진전에 큰 기여를 했다. 이는 신교와 구교 사이의 위그노 전쟁을 끝내며 1589년에 왕위에 오른 앙리 4세의 선언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는 “… 우리는 모두 프랑스인이며 같은 나라의 동료ㆍ시민들이다”라고 말하며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종교전쟁을 통한 장기적 혼란을 경험한 프랑스인은 그 후 절대왕정을 지지했다. 그래서 18세기 중반까지 왕은 민족적 충성심의 유일한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1750년경부터 민족의 주체를 둘러싼 싸움이 벌어졌다. 이는 루이 15세의 섭정정치 시기에 잠시 왕권이 약화된 시기를 틈탄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왕권을 약화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족계급을 대변하는 고등법원들이 자신들을 민족의 대변자로 주장했다.

이에 대해 루이 15세는 “일부 사람들이 민족을 나와 분리시키려 하지만 민족의 권리와 이익은 나에게 있다”고 선언하며 이에 대항했다. 그러나 이미 왕이 민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는 지나갔다. 특히 7년 전쟁을 통해 프랑스의 민족감정이 고조되고 사회적으로도 확산되며 이제 왕이나 귀족이 아니라 대중이 민족의 주체로 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영국, 프랑스만이 아니다. 네덜란드의 경우에도 16세기 말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민족정체성과 민족주의의 비슷한 분출을 보여 준다. 이런 것을 보면 전근대에 민족정체성과 민족주의가 상당한 수준에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근대주의자들은 근대 민족과 민족주의의 시작을 프랑스 혁명에서 찾고 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여지는 있다. 프랑스 혁명 때에 혁명가들이 민족주권을 내세우며 민족이 이제 프랑스의 전체 인민을 의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민족자결권을 분명히 선언했으며, 민족주의 운동이 상당히 대중화되었다. 근대주의자들이 전근대에 민족 비슷한 것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근대의 민족과는 전연 다르며 그 민족의식은 그 인민 가운데 소수 엘리트만의 의식이고 민족주의도 아직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까닭이다.

물론 혁명가들이 사회계약론을 도입하여 민족주권론을 발전시킨 것이 민족주의 이론의 발전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기를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이제 모든 인민이 이론적으로는 평등한 관계 속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상일 뿐 실제로는 주로 도시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하는 의식이었고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은 그렇게 구성된 민족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프랑스에서 농민들이 민족의식을 갖게 된 것은 제3공화국 시대인 1880년대이다.

그러므로 전근대의 민족주의는 소수 엘리트의 것이었고 프랑스 혁명 이후의 민족주의는 전체 인민이 참여하는 것이었으므로 근대적이라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참여자라는 면에서 전근대 민족주의와 근대 민족주의는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범위의 차이에 불과하다.

또 프랑스 혁명 이후에 민족주의가 대중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표현이 강화되기는 했으나 전근대의 민족주의가 그것과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다. 전근대의 경우 종교적인 요소나 왕조적 요소가 더 많이 포함될 뿐이다. 근대 민족주의도 경우에 따라 세속적인 것만이 아니라 왕조적, 종교적 요소를 포함하기도 한다.

 

둘째로, 민족주의 발생의 주된 요인은 산업화나 자본주의의 발전, 근대국가의 형성이 아니라 국가나 민족 사이의 경쟁과 억압, 착취이다. 근대적 민족주의가 처음 발전했다고 하는 프랑스 혁명 당시의 프랑스는 아직 산업화가 이루어진 사회가 아니었다. 또 19세기 중반의 동유럽국가들, 20세기의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의 민족주의도 산업화와는 별 관계가 없는 지역들이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이다. 19세기의 서유럽 지역에서는 약간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할 수 있으나 다른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근대국가와의 관계도 그렇다. 서유럽에서 근대국가는 14-15세기부터 서서히 발전했으므로 그것을 반드시 근대에 귀속시킬 수는 없다. 또 동유럽이나 아시아, 아프리카의 경우는 서유럽형의 근대국가와 전연 관계가 없다. 이런 세 요인들이 민족주의의 발전을 도와주었을 수는 있으나 근본적인 동인은 아니다.

민족주의는 이런 것들 때문이 아니라 국가나 민족 사이의 경쟁과 억압, 착취에서 비롯했다. 18세기에 영국과 프랑스에서 민족주의가 발전한 것은 두 나라의 경쟁 때문이었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프랑스에서 민족주의가 고조된 것은 이웃 국가들의 간섭 때문이었다. 반면에 프랑스의 정복 전쟁은 주변 유럽 국가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분열 상태에서 벗어나 국가를 통일하려는 민족주의 운동을 벌인 것은 분열된 상태로는 이웃 국가들과 경쟁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 동유럽 지역 피억압 민족들이 독립을 추구하여 일으킨 민족주의 운동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탓도 있으나 오스트리아, 러시아 같은 나라들이 강화한 억압 정책 때문이다. 이들 나라가 다른 나라들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 나라 안의 소수 민족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와 민족주의가 아시아, 아프리카의 전 지역으로 확산된 것은 제국주의 때문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이 점에서 민족주의를 근대의 몇 가지 현상들과만 결합시키려는 근대주의자들의 주장은 부적절하다.

 

세 번째로, 민족과 민족주의 형성에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종족적 요소이다. 근대주의자들은 민족 안에서 종족성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매우 과소평가한다. 실제로 어떤 민족에게나 혈통, 언어, 영토, 역사적 경험, 관습, 문화, 종교 등과 결합하고 있는 종족성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제2차 대전 이후 최근의 사례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60-70년대에 서유럽 각 나라에서는 소수파 종족들의 분리주의 운동들이 계속 일어났다. 영국에서는 스코틀랜드, 웨일스에서, 프랑스의 부르타뉴, 스페인에서는 바스크와 카탈로니아, 이탈리아에서는 코르시카, 티롤 등지에서, 다종족 국가인 벨기에, 또 프랑스계가 많이 사는 캐나다의 퀘벡주에서도 비슷한 운동이 벌어졌다. 이들 지역은 모두 선진국에 해당하는 곳이고 민주주의도 비교적 잘 발전하여 지배 종족으로부터의 억압이나 착취도 거의 없는 곳이다. 이것은 종족의 자율을 위한 투쟁 외에는 달리 설명하기가 어렵다.

미국에서 여러 이민 종족들의 동화를 가정했던 메팅폿 이론이 무너지고 다문화주의로 이행한 것도 종족성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공산권이 붕괴한 후에 유고슬라비아나 쏘련 지역에서 나타난 민족주의 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주의 정권 하에서 사라진 것 같았던 민족주의가 다시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것들은 종교적 요소와도 관련이 있으나 종족적 요소와도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어디에서건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종족성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 와서 민족주의 연구자들이 종족성에 대해 다시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냉전 이후의 종족적 민족주의 분출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종족성의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민족주의는 쉽게 만들어지지도 쉽게 사라질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든다는 주장은 일부 그렇게 할 수 있는 경우가 있어도 여러 유보조건을 붙여야 할 것이다.

 

네 번째로, 근대주의자들은 민족의 인위성을 강조한다. 보통 생각하듯이 민족이 민족주의를 만든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민족은 19세기의 민주화 시대에 지배계급이 대중을 계속 지배하기 위해 민족공동체를 내세우며 ‘위에서 아래’로의 방식으로 만든 것이므로 억압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소위 ‘관제’ 민족주의가 그것이다.

그들이 민족적 정체성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민족이 인위적 구성물이므로 그 정체성도 강인한 힘을 갖고 있지 않으며 쉽게 생기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민족적 정체성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여러 정체성 가운데 하나로서 클럽, 학급, 갱단 등의 정체성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경우는 아예 민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담론으로만 규정한다. 그리고 그 무가치를 주장한다.

그러나 민족의 오랜 역사와 그 중심에 있는 종족성을 고려한다면 이런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물론 19세기 후반의 유럽이나 20세기 제3세계 민족주의에 인위적 요소들이 일부 나타나지만 그것은 민족이 전체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 민족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말하듯 민족의 실체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가족이라는 것도 존재할 수 없지 않겠나.

 

다섯 번째로, 민족주의가 비윤리적이라는 주장은 일방적이다. 근대주의자들은 민족주의를 억압적 이데올로기로 단정한다. 지배 종족이 소수파 종족들과 사회 내의 약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공동체를 내세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또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경향이 강하다고도 비판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너무 단순하다.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으로부터 자율성을 지킴으로써 그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나게 하는 기능을 한다. 말하자면 본질적인 가능은 민족이라는 하나의 큰 틀을 가지고 이민족이나 국가에 대항하는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큰 민족 안에 들어오는 소수 종족들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있을 수 있고 관제 민족주의의 경우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이나 소수파의 자유는 국가 안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킴으로써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 민족주의가 전쟁을 일으킨다는 주장은 가설일 뿐 증명된 것이 아니다.

또 어떤 이데올로기든 윤리적으로 완전무결한 것은 없다. 쏘련의 현실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결합해 있고 수많은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자유주의도 사회 안의 빈부 차이를 용인한다는 점에서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며 최근의 신자유주의는 이미 제국주의로 변모하여 약소국가들을 억압하고 있다.

홀로코스트를 민족주의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으나 거기에서는 인종주의적 요소가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2차 대전을 일으킨 것은 보통 오해되듯이 반드시 나찌 독일만이 아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태도도 다른 중요한 원인이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의 추축 국가들이 그 지배권에 도전했을 뿐이다. 따라서 민족주의에만 절대적 기준을 세워놓고 윤리적으로 비판 내지 비난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민족주의를 이렇게 억압적, 착취적인 이데올로기로 단정하는 데에는 근대주의 연구자들의 개인적 경험이 매우 중요했다. 겔너에 앞서 근대주의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한스 콘이나 그 후의 어니스트 겔너, 에릭 홉스봄과 같은 민족주의 연구의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은 다 유대인 출신들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과거 나찌 지배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남아 있고, 그것이 그들의 이론 속에서도 민족주의에 대해 지나치게 윤리적인 판단을 하는 경향으로 남아 있다.

 

여섯 번째로, 민족주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 지구화론이 등장하며 민족 국가의 사멸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민족주의는 근대사회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그 기능을 다하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역연합이나 초국적 기업, 초국적 비정부 기구들의 등장으로 대표되는 지구화 과정에서 민족주의는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민족의 종족성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상당히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또 지구화라는 것이 모든 민족 사이나 민족 내부에서 평등한 관계와 행복을 가져온다면 민족주의가 약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는 반대로 가고 있다. 민족들 사이의 억압과 착취를 더 강화시키고 있고, 민족 내부의 불평등은 커지고 있다. 미국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 경향이나 브렉씨트는 그 결과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주의가 멀지 않은 장래에 사라지리라고는 예상하기 어렵다.

또 현재 세계는 온난화로 몸살을 앓고 있고, 과잉인구로 인한 여러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다. 이런 것들은 앞으로 인류의 생존조건을 더 각박하게 만들 것이고, 그에 따라 민족 사이의 경쟁도 더 치열해 질 것이다. 그러니 민족주의가 어떻게 사라지겠는가? 게다가 외계인과의 전쟁이나 나면 모를까 아직 지구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1. 근대주의적 해석과 유럽중심주의

 

위에서 보았듯, 근대주의적 해석은 그 자체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특히 비서양인들에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유럽중심주의는 더 큰 문제이다. 근대주의자들이 전근대와 근대를 날카롭게 구분하고 근대를 절대시하는 것은 뒤르껭, 베버를 잇는 서양 사회학의 전통 때문이다. 따라서 전근대사회에 대해 적절한 평가를 거부하고 있으며, 이는 19세기에 근대화를 하지 못한 비유럽 세계에 대한 부당한 평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이 비유럽 세계의 민족주의를 단지 서유럽의 경험을 모방한 것으로 폄하하고 있으나, 실제로 동아시아의 경우만 보아도 한국, 중국, 일본은 서유럽과 거의 같은 시기나 그 이전에 민족을 형성했다고 볼 근거가 충분하다. 따라서 비유럽 세계의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해 전반적인 재검토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민족주의에 대해 기본적으로 부정적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시민적 민족주의와 종족적 민족주의로 나누어 전자를 바람직한 것으로 후자를 부정적인 것으로 본다. 전자는 합의에 의한 정치공동체, 국가, 영토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자유주의와 결합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 모델은 영국과 프랑스이다. 반면 후자는 혈통이나 언어, 종교 등 종족적 요소에 의해 구성되었으므로 억압적이고 외국인 혐오적이며 중동부 유럽이나 비서양 지역에 해당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은 서유럽 민족들도 실제로는 종족적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최근에 미국인들이 하는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구분론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애국주의를 국가에 대한 사랑이나 애착의 지속으로 정의하며,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가르치는 미국의 충성심은 애국적으로 구축되어 있으므로 합리적인 상태를 넘어서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반면 민족주의는 한 민족에 대한 정서적인 애착으로서 비합리적이고 원초적인 힘이므로 외국인 혐오증, 타자에 대한 증오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민적 민족주의와 종족적 민족주의라는 이분법의 미국판으로서 실제로 양자는 구분되지 않는다.

근대주의적 해석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 민족주의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매우 경시하는데 이것도 문제이다. 제3세계 민족주의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것은 현재의 민족주의 이론을 주도하는 영미인들의 제국주의적 태도나 심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본 연구소는 지난 9월 5일부터 10월 31일까지 총8강의 일정으로 “알기 쉬운 대중강좌: 사회과학의 기초”를 진행 중이다. 이 글은 그중 9월 19일 진행된 제3강을 위해 작성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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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Oct 9th, 2016 | By | Category: 이론, 정세와노동 | 조회수: 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