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16)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

 

 

 

문영찬 | 연구위원장

[목차]

머리말

제1장 세계관과 철학의 근본문제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 철학의 근본문제

  3. 세계의 통일성

제2장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의 역사

  1. 철학의 발생

  2. 데모크리토스 노선과 플라톤 노선의 투쟁

  3. 아리스토텔레스

  4.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에 의한 고대 원자론의 계승, 발전

  5.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 토마스 아퀴나스

  6.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브루노, 갈릴레이, 뉴턴

  7. 베이컨, 홉스

  8. 데카르트

  9. 스피노자

  10. 로크

  11. 라이프니츠

  12. 흄

  13. 디드로, 엘베시우스, 돌바하

  14. 볼테르, 루쏘

  15. 칸트

  16. 피히테, 셸링

  17. 헤겔

  18. 포이에르바하

제3장 맑스, 엥겔스에 의한 철학에서의 혁명

  1. 맑스, 엥겔스에 의한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의 창시

  2. 변증법적 유물론의 범주들

  3. 자유와 필연성

  4. 목적의식성

  5. 사적 유물론의 범주들

  6. 레닌, 쓰딸린, 마오쩌뚱, 그람시에 의한 맑스주의 철학의 발전

제4장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사조에 대한 비판

  1. 콩트, 밀

  2. 쇼펜하우어, 니체

  3. 후설

  4. 하이데거

  5. 프로이트

  6.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7. 샤르트르

  8. 하버마스    ㆍㆍㆍㆍㆍㆍ <이번 호에 게재된 부분>

  9. 알튀세르, 발리바르

  10. 푸코, 들뢰즈, 데리다, 라캉

  11. 지젝

  12. 자율주의

  13. 이진경

  14. 롤즈의 ≪정의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제5장 과학의 발전과 그에 대한 철학적 일반화

제6장 철학과 종교

제4장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사조에 대한 비판

8. 하버마스

하버마스는 20세기 중, 후반의 독일의 사회학자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출발했으나 곧 그러한 경향을 벗어나서 의사소통행위론을 세워 독자적 입지를 구축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혹은 비판이론이 도구적 이성 비판에 천착하는 데 비해 하버마스는 도구적 이성 개념을 벗어나서 의사소통적 합리성 개념을 정립하여 나름의 체계를 구축하였다. 하버마스는 베버, 미드, 뒤르켐, 파슨스 등의 부르주아 사회학자들의 이론을 검토하면서 목적론적 행위에 대응하는 의사소통행위의 개념 그리고 의사소통행위의 배경으로서 생활세계 개념을 세우고 나아가 생활세계와 체계(국가, 경제의 영역)의 분리를 설정하였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론은 대중의 호응을 일정하게 받았는데 이는 의사소통행위 개념이 주체들의 대등한 상호작용을 의미하고 또 강제가 없는 상호이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즉, 민주주의적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의사소통행위론은 계급투쟁이 아닌 행위조정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경제영역이 의사소통행위의 마당이 아닌 체계의 영역에 포함된다는 점에서 부르주아 질서의 보전과 항구성을 전제로 하는 이론이며 그런 점에서 독일의 현실에서 사회민주주의적 경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하버마스의 체계를 따라가면서 의사소통행위의 개념, 생활세계의 개념, 그리고 생활세계와 체계의 분리라는 개념을 각각 검토해 보자.

하버마스는 목적론적 합리성 혹은 인지적-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대비시킨다. 만일 목표지향적 행위에서처럼 명제적 지식이 비의사소통적으로 사용되는 경우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인지적-도구적 합리성 개념을 선호하는 쪽으로 미리 결정한 셈이다. 이것이 바로 경험주의를 통해 근대의 자기이해에 강하게 영향을 미친 합리성 개념이다. … 이러한 의사소통적 합리성 개념은 최종적으로는 사람들의 생각을 강제 없이 합치시키는 논증적 대화의 합의형성적 힘에 대한 근본적 경험에 호소한다는 의미가 있다.1) 여기서 하버마스는 인지적-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대비시키고 있는데 도구적 합리성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이해되는 합리성의 개념으로서 목적에 대한 수단, 효율성 개념을 의미하는 합리성으로 제시되어 있고 반면에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최근에 특히, 하버마스 자신에 의해 제기되는 것으로서 수단적, 도구적 측면이 아닌, 상호이해를 추구하는 합리성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하버마스의 체계에서 출발점은 바로 합리성이라는 개념인데 그는 이러한 합리성 개념이 보편성을 띠는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합리성이라는 개념은 보편주의적 성격을 갖는가? 여기에 대해 하버마스는 합리성 개념이 보편성을 띤다고 승인하고 있다. “… 합리성이 보편성을 갖는다고 여기는 ―원칙적으로 정당한― 입장…2) 나는 우리가 이제까지 베버의 구상을 추적해 본 결과 보편주의적 입장이 도출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3) 이와 같이 하버마스는 명백히 합리성 개념 혹은 서구의 합리화 과정이 보편적 성격을 갖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 개념은 바로 이렇게 합리성의 보편주의적 성격에 기초하고 있는데 여기서 합리성 개념의 보편성이 맞는 것인가가 검토되어야 한다. 합리성은 과학성과는 다른 개념이다. 과학적 개념은 일정하게 보편성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합리성은 그렇지 않다. 어느 곳, 어느 때에는 합리적인 개념이 다른 곳과 때에는 비합리적으로 되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주장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비합리적인 것이 된다. 미국에서 남북전쟁 이전에 노예제는 합리적인 것이었으나 남북전쟁 후에 노예제는 비합리적인 것이 되었다. 이와 같이 합리성이라는 개념은 과학성이라는 개념과 달리 보편적 성격을 갖기 어렵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합리성이 보편주의적 성격을 갖는다고 승인하면서 이를 기초로 상호이해를 강조하는 의사소통행위 개념이 이 사회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되고 나아가 인류역사의 발전을 해명하는 지주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하버마스는 주체들의 대등한 상호이해를 의미하는 의사소통행위는 기존의 철학의 틀인 주체-객체의 접근과는 패러다임을 달리하는 것, 즉,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패러다임은 전환했을지 몰라도 주체-객체 개념에 대해서는 그르치고 있다. 어떤 판정이 객관적일 수 있는 것은 그 판정이 임의의 관찰자와 수신자에게 각 행위주체 자신에게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 초주관적 타당성 주장을 통해서 이루어질 때이다.4) 세계는 언어와 행위 능력이 있는 주체들의 공동체에 대해서 하나의 동일한 세계로 통용됨으로써 비로소 객관성을 획득한다.5) 여기서 하버마스가 이해하는 객관성은 세계 혹은 어떤 대상이 주체들에게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객관성은 주관주의적으로 이해된 객관성이다. 객관성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대상 혹은 세계의 주체로부터의 독립성을 의미한다. 즉 어떤 대상이 관련되는 모든 주체에게 붉은색이라고 인식될지라도 실제로 붉은색이 아니라 푸른색일 수도 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붉은색이 객관적인 것이지만 실제로는 푸른색이 대상의 객관적 성격인 것이다. 세계의 객관성을 주체로부터의 독립성으로 인식하면 과학이 시작된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객관의 의미를 그르치고 있기 때문에 과학의 추구가 아닌 합리성의 추구를 자신의 출발점으로 놓았고 그의 의사소통행위 개념은 그렇게 출발한 것이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 개념은 따라서 과학은 아니지만 민주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의사소통행위 개념 자체가 부정될 것은 아니며 그에 포함되어 있는 일정한 진보성을 건져 올릴 필요가 있다. 하버마스는 합리성에 천착하면서 그를 상세하게 분류한다. 목적론적 합리성, 의사소통적 합리성, 규범적 합리성, 표출적 합리성이 그것이다. 목적론적 합리성은 목적과 수단, 효율성의 관점에서 합리성이며,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상호이해의 증진의 차원에서 합리성이고, 규범적 합리성은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승인될 수 있는 합리성이며, 표출적 합리성은 자신의 소망이나 감정 혹은 정서를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으로서 합리적이라고 승인되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것들이 합리성이라고 승인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 발언의 합리성 여부에 대해서도 역시 비판가능한 타당성 주장에 대한 상호주관적 인정의 가능성이 결정적이다.6) 즉, 비판가능한 주장에 대해 주체들의 상호적인 인정이 합리성을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합리성을 분류하면서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가장 관건적인 요소라고 보며 합리성이 진화할수록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강화된다고 본다.

그러면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이어 하버마스가 이해하는 세계개념과 생활세계 개념으로 접근해 보자. 이에 따르면 인지발달은 외적 세계의 구성으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세계와 사회세계를 주관세계와 동시에 경계 짓는 기준체계의 구성으로서 이해된다. 인지적 발달은 일반적으로 자기중심적 경향의 세계이해가 탈중심화되는 것이다.7) 여기서 하버마스는 세계를 자연을 의미하는 객관세계, 그리고 인간사회를 의미하는 사회세계 그리고 개인의 주관적 영역을 의미하는 주관세계로 나눈다. 그러면서 인지의 발달은 세계이해가 탈중심화되는 것이라고 본다. 세계이해의 탈중심화는 주체의 인식이 주관에서 객관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세 가지 세계개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때 세 가지 세계개념은 ―당사자들 사이에 그때그때 무엇이 사실, 혹은 타당한 규범, 혹은 주관적 체험으로 취급될 수 있는지에 관해 동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상황맥락에 질서를 부여하는, 공통으로 상정된 좌표체계와 같은 역할을 한다.8) 즉, 하버마스가 나누는 세 가지 세계개념은 주체들의 상호 동의를 가능하게 하는 좌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면서 하버마스는 위 세 가지 세계개념과 차원을 달리하는 세계개념을 도입하는데 그것이 생활세계 개념이다. 의사소통행위의 지평과 배경으로서 생활세계9), “… 우리는 생활세계를 문화적으로 전승되고 언어적으로 조직된 해석 유형들의 비축분으로 대체하여 생각할 수 있다.10) 생활세계라는 개념이 앞의 세 가지 세계개념과 별도로 제기되는 이유는 의사소통행위라는 개념을 보충하기 위해서이다. 즉, 의사소통행위가 이루어지는 현실적인 공간이 바로 생활세계이다. (가족, 이웃, 자유로운 결사체들에 의해 지탱되는) 사적 생활영역 및 사인(私人)들과 시민들의 공론장11)이 생활세계의 구체적 내용이다.

이러한 의사소통행위 개념과 생활세계라는 개념은 다음과 같은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다. 상호이해 개념은 행위조정과 객관영역에 대한 의미이해적 접근이라는 두 측면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상호이해 과정은 타당성 주장에 대한 상호주관적 인정에 근거하는 합의를 겨냥한다. … 근대화과정이 도대체 합리화의 관점에서 파악될 수 있는가, 파악될 수 있다면 어떻게 파악되어야 하는가?12) 의사소통행위와 생활세계 개념을 내용으로 하는 합리화는 (유럽의) 근대화 과정을 이해하는 관건적 요소라고 파악되는데 하버마스는 그러한 합리성의 핵심을 행위조정객관영역에 대한 이해라고 보고 있다. 객관영역에 대한 이해는 과학적 인식을 의미하는 것인 반면에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의사소통행위를 통한 상호이해의 증대를 매개로 한 행위조정이라는 개념이다. 이는 유럽의 근대화, 자본주의 발전을 합리화의 증대로 보는 것인 동시에 합리화의 증대는 행위조정의 증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인데 여기서 계급투쟁의 개념은 거세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론의 사회민주주의적 성격이 도출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버마스의 이론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나아가 인류 역사 전체를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로 보는 것이다. 체계는 국가행정의 영역과 경제행위의 영역을 포괄하는데 하버마스는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라는 개념을 통해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을 수정하는 길을 간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를 끌어내기 위해 부르주아 사회학에 대한 이론사적 검토를 하는데 우선 그 과정을 추적해 보자.

하버마스는 막스 베버가 구유럽사회의 근대화를 어떤 보편사적 합리화 과정의 결과로 파악하고자 했던 유일한 사람13)이라고 본다. 하버마스는 베버에게서 다음과 같은 근대화 혹은 합리화의 세 가지 요소를 끌어낸다. 자본주의 경제와 근대국가를 위해, 그리고 양자 사이의 교류를 위해 조직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은 제정(制定)원칙에 기초하는 형식법이다. 사회합리화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 바로 이 세 가지 요소들이다.14) 자본주의 경제, 근대국가, 제정법은 부르주아 사회의 지주가 되는 것들이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여기서 이러한 것들이 제도를 구성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이해관심의 표현을 규제하는 제도가 존속하려면, 이해관심이 이념과 결부되어야 한다. 한 생활질서는 이념을 통해서만 정당한 효력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15) 이해관심, 즉, (계급적) 이익의 문제와 이념 즉, 정당성의 문제가 통일되어야만 제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당성의 문제는 하버마스를 비롯한 부르주아 사회학자들이 천착하는 지점인데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 또한 부르주아 사회에 대해 정당성을 제공하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베버를 통해 근대적 의식구조를 고찰하는데 세계상 합리화의 보편사적 과정으로부터, 그러니까 종교적 형이상학적 세계상의 탈주술화로부터 근대적 의식구조가 나온다16)고 본다. 그리하여 근대적 의식구조라 할 수 있는 탈중심화된 세계이해는 한편에서 사실의 세계에 대해 인지적으로 객관화된 대응방식의 가능성을 열고, 사람들 상호관계의 세계에 대해서는 법적ㆍ도덕적으로 객관화된 대응방식의 가능성을 연다17)고 본다. 세계상의 탈주술화는 인간이 종교로부터 깨어나서 과학적 인식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객관세계에 대해서는 과학적 인식을 추구하고 사회에 있어서는 종교와 분리된 법적, 도덕적 인식의 추구로 나아간다는 주장이다. 하버마스가 베버를 통해 이러한 고찰을 하는 것은 바로 상호이해를 통한 합의라는 의사소통행위 개념을 끌어내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하버마스는 근대사회에서 규범적 동의는 전통에 의해 미리 주어진 동의로부터 의사소통적으로 성취된, 즉 합의된 동의로 이동해야 한다18)고 주장한다. 과거에는 규범 혹은 법적인 동의가 전통에 의해 규정되어 있었다면 근대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의사소통적인 즉, 합의를 통한 동의로 변형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버마스는 베버의 근대사회의 합리화라는 개념에서 의사소통행위의 전제들을 끌어내고 있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 개념을 보강하기 위해 언어철학적인 많은 분석을 하는데 다음과 같은 주장은 가치가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오스틴은 발화적, 발화수반적, 발화수단적 행위를 구별한다. … 그러니까 오스틴이 구별하는 세 가지 행위는 다음과 같은 핵심어를 통해 특징화될 수 있다. 어떤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을 말하여서 행위한다; 어떤 것을 말하여 행위함으로써 어떤 효과를 야기한다.19) 발화(發話)행위는 단지 어떤 것을 말하는 것 자체를 가리킨다. 발화수반적 행위는 어떤 말을 하여 일정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말 자체가 아니라 그에 담긴 의미가 중요하다. 그리고 발화수단적 행위는 어떤 말의 의미를 넘어서 의미를 통해 목적하는 바가 중요하다. 말 자체의 내용, 의미와 목적이 일정하게 분리되어 있는 경우이다. 하버마스가 이러한 언어철학적인 분석을 하는 것은 의사소통행위를 축으로 하여 자신의 논리와 역사의 진보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베버를 고찰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낸다. 베버도 전반적 합리화 과정을 행위이론의 차원에서는 공동사회 행위가 이익사회 행위로 대체되는 경향으로 그렸다. 그러나 이익사회 행위 안에서 상호이해지향적 행위와 성공지향적 행위를 구별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일상행위의 의사소통적 합리화와 목적합리적 경제 및 행정행위를 위한 체계형성을 상보적 발달로 파악할 수 있다.20) 하버마스는 국가의 행정과 경제영역을 체계로 보고 사적 영역과 공론장을 의사소통행위가 행해지는 생활세계로 나누는데 행위론 차원에서 상호이해지향적인 의사소통행위는 생활세계로, 성공지향적인 목적합리적 행위는 체계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이러한 파악은 약간 도식적인 느낌을 주는데 도식을 나누는 기준은 행위를 규정하는 요소에 따른 것이다. 즉, 생활세계는 의사소통행위가 행위조정을 하는 데 반해 국가의 행정과 경제영역은 권력과 화폐라는 비의사소통적인 조절매체가 행위를 조정하기 때문에 두 개의 영역은 생활세계가 아니라 체계라는 이름으로 포괄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생활세계와 체계를 나누는 것은 전적으로 의사소통행위라는 기준에 의해서 의사소통의 영역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버마스는 미드에 대한 분석을 통해 몸짓 언어가 상징에 의한 신호언어로, 나아가 문법적 대화로 발전하는 과정을 고찰하고 또 뒤르켐에게서는 집합의식(집단의 정체성)을 고찰하면서 탈주술화를 통해 의례적 규범이 언어화되고 집합체의 동일성이 종교에서 의사소통으로 옮겨진다고 분석하면서 이러한 과정에서 의사소통행위에 들어 있는 합리성의 잠재력이 해방된다21)고 파악한다. 이렇게 미드와 뒤르켐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의사소통행위 개념을 정교화한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의 전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행위규범의 적용이 의사소통을 통해 매개되기 위해서는 참여자들이 행위상황의 객관적, 규범적, 주관적 단면과 관련하여 공동의 상황정의에 이를 수 있어야 한다.22) 이러한 판단은 일정한 합리성이 있는데 소통의 당사자들이 주어진 상황에 대해 공통의 인식을 하여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타당하다. 하버마스는 나아가 의사소통의 윤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사소통윤리의 이론적 기본 개념은 보편적 토의, 즉 언어적 상호이해라는 형식적 이상이다.23) 보편적 토의! 의사소통행위를 진보의 시금석으로 볼 때는 보편적 토의 자체가 윤리의 핵심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천적 행동의 필요와 긴밀히 연결되지 않은 보편적 토의는 말만 많은 수다쟁이라는 비판에 얼마든지 놓여질 수 있다. 이는 의사소통행위 개념이 일정한 합리성은 있지만 사회의 실천적 진보와 실천의 요구와 통일되지 않으면 관념적인 자기기만으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버마스가 그것을 통해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을 대체 혹은 수정 혹은 재구성하려 하는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검토해 보자. 하버마스는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를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상당한 정도로 진행된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는 유럽 봉건주의의 계층화된 계급사회로부터 초기 근대의 경제적 계급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필수조건이다.24) 이러한 하버마스의 인식은 사실은 부르주아 혁명으로 인해 실천적으로 정립되었고 맑스에 의해 이론적으로 표현된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를 다르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봉건제 국가는 신분제 국가였고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소유권의 보장을 위해 경제적 생산관계를 핵심으로 하는 시민사회를 국가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절실하였고 혁명을 통해 그것을 이루었다. 그에 따라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공민으로서의 삶과 시민으로서의 삶이라는 이중적 삶이 구조화된다. 이러한 점은 맑스의 유태인 문제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충분히 분석된 바가 있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이러한 맑스의 분석을 차용한 것이지만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경제적 생산관계가 맑스에게서는 시민사회의 영역에 포괄되지만 하버마스에게서는 경제가 생활세계가 아니라 체계에 포함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맑스의 시민사회 개념에 비해 하버마스의 생활세계라는 개념은 매우 협소화된 내용을 갖는다. 맑스에게는 경제적 생산관계가 핵심인 시민사회가 역사의 진정한 무대라고 파악되는 반면에 하버마스에게서는 생활세계는 의사소통행위가 행해지는 무대이고 또 국가와 경제라는 체계에 의해 침식당하고 식민지화되는 세계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차이는 맑스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 그리고 시민사회 내의 적대에 대한 분석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새로운 사회의 주체를 발견하는 데 비해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을 통한 상호이해의 영역이라는 형태로 쪼그라들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관과 관련해서는 맑스는 역사의 진보는 물질적 삶의 재생산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의해 규정된다고 유물론적으로 보는 데 반해 하버마스는 역사의 진보는 의사소통의 증대와 그를 통한 생활세계의 합리화를 의미한다고 본다. 맑스의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라는 개념과 하버마스의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라는 개념은 이러한 차이가 있다.

그러면 하버마스의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라는 개념을 하버마스의 내적 논리를 따라 좀 더 고찰해 보자. 나는 사회적 진화를 이차적 분화과정으로 이해한다. 체계와 생활세계는, 전자의 복잡성과 후자의 합리성이 증가하면서 각각 체계와 생활세계로서 분화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서로로부터도 분리된다는 말이다.25) 이러한 하버마스의 접근은 대단히 피상적이다. 체계의 복잡성과 생활세계의 합리성이 체계와 생활세계를 나누는 기준이며 근거이다. 국가와 경제의 영역이 복잡성을 띠어간다? 이것으로서 국가와 경제의 내용과 본질이 설명 가능한가? 생활세계의 합리성의 증대가 우리가 부딪히며 살아가는 현실적 삶의 영역의 본질을 표현해 주는가?

하버마스는 체계와 생활세계의 상호연관에 다음과 같이 접근한다. 사회체계의 복잡성이 커질수록 생활세계는 더욱 변방으로 밀려난다는 사실 말이다. 분화된 사회체계에서 생활세계는 하나의 하부체계로 위축된다. 그렇지만 이 말을 인과론적으로 독해해서, 마치 생활세계의 구조가 체계의 복잡성 증가에 의존하여 변화하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 반대가 맞다. 복잡성 증가가 오히려 생활세계의 구조적 분화에 의존한다. 이 구조변화는 다시금, 그것의 역학이 어떻게 설명되든지 간에, 의사소통적 합리화의 고유논리에 따른다.26) 체계의 복잡성의 증가가 생활세계의 구조적 분화에 의존한다는 것은 맑스의 국가와 시민사회의 논리를 차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가 시민사회의 내적 논리를 규정하는 것으로서 물질적 삶을 강조한 것과 달리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화가 생활세계의 고유논리라고 보고 있다.

하버마스는 체계와 생활세계의 연관에 대해 생활세계의 식민지화, 생활세계의 기술화(技術化)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부르주아 사회의 사회병리현상을 고발한다.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는 국가와 경제라는 체계에 의해 생활세계가 종속되고 파괴되는 병리현상을 가리킨다. 그리고 생활세계의 기술화는 의사소통을 본질로 하는 생활세계의 영역에 대해 의사소통이 아닌 화폐와 권력 같은 조절매체가 침식하여 그 영역이 생활세계에서 분리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 기술화라는 관점은 근본적 문제가 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개념들이 전제하는 사회적 병리현상이라는 것이 실은 계급대립의 문제이고 나아가 계급투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하버마스에게서 계급대립의 문제는 사회병리현상으로 포착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하버마스의 사회민주주의적 관점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유럽에서 사민주의의 성공을 치켜세운다. 정통 맑스주의자들은 국가개입주의, 대중민주주의 그리고 복지국가에 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지 못한다. 계급갈등의 평화적 해결, 그리고 2차 대전 이래 유럽국가들에서 개량주의가 한층 넓은 의미에서 사회민주주의 프로그램에 따라 이룩한 장기적인 성공에 맞닥뜨릴 때, 경제주의적 접근법은 무너지고 만다.27) 즉, 유럽에서 복지국가의 성공, 개량주의의 성공이 정통 맑스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버마스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성공적인 개입과 민주적 절차로 인한 정당성 획득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피고용인이 프롤레타리아트적 성격을 잃는다28)고 파악한다. 그러나 경제적 수준의 향상이 노동과 자본의 대립을 폐지하는 것이 아닌 한, 프롤레타리아트, 즉, 무산자로서의 성격이 사라질 수는 없다. 또한 국가개입, 민주적 절차, 경제적 향상이라는 개량주의의 성공은 노동자계급이 약화되자 신자유주의에 의한 가차 없는 공격으로 대체되고 있고 최근에는 자본과 노동의 고유한 모순의 결과인 경제 공황의 전개가 유럽사회를 내리누르고 있다. 흥미 있는 것은 하버마스의 복지국가의 모순에 대한 언급이다. 국가의 복지정책에는 처음부터 자유보장과 자유박탈의 양가성이 붙어 다녔다. … 삶의 위험에 대한 이러한 법적 보장은 주목할 만한 대가를 요구한다. 그것은 수급권자의 생활세계에 대한 구조변화를 가져오는 개입을 초래한다. … 복지국가가 생산영역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계급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넘어서 개입하고, 수혜자 관계의 망이 사적 생활영역들 위로 널리 확산됨에 비례해서, 법제화의 예기된 병리적 부작용, 즉 생활세계의 핵심영역이 관료제화되고 동시에 금전화되는 경향은 더욱 뚜렷하게 등장한다.29) 자본가계급의 양보에 의해 복지정책이 확대된다 해도 하버마스에 따르면 체계의 영역인 관료제가 복지 수혜자 망의 확산에 따라 생활세계의 영역에 더욱 깊숙이 침투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하버마스는 법제화의 병리적 부작용이라 했는데 실은 복지국가에서 계급대립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이론, 즉, 의사소통행위이론 그리고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의 이론은 사실상 계급투쟁의 개념을 의사소통행위 개념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발전에서 계급투쟁이 차지하는 역할, 즉 역사발전의 원동력의 역할을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와 그에 따른 합리성의 증대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을 기초로 하버마스는 본격적으로 역사적 유물론을 수정하려 하는데 이를 검토해 보자.

먼저 하버마스는 쓰딸린 식의 역사유물론 이해는 재구성을 필요로 한다30)고 주장한다. 쓰딸린은 여기서도 부르주아 이론가에 의해 악마화되는 과정을 거치는데 중요한 것은 쓰딸린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과학인가 아닌가이다. 하버마스는 우선 역사적 유물론의 근본 개념인 사회적 노동이라는 개념을 공격한다. 인간, 인류만이 사회적 노동을 한 것이 아니라 인류 이전의 원인들도 수렵과 채집이라는 사회적 노동을 했다는 것이며 인류와 원인을 구별하는 것은 가족 구조라고 주장한다. 단지 수렵경제가 가족적 사회구조에 의해 보완될 때만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와 더불어 성립한 <인간적인> 삶의 재생산에 대해 말할 수 있다.31) 하버마스는 수렵을 하는 수컷 집단이 채집을 하는 암컷과 새끼 집단과 관계를 맺어서 아버지 역할을 하면서 인류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사적 소유가 발생하면서부터, 즉, 계급사회가 발생하면서부터 형성된 부계 사회 이전에는 모두 모계 사회였고 아버지라는 개념은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고 오히려 모계의 외삼촌이 아버지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 또한 이러한 친족관계의 문제가 인류의 형성에서 사회적 노동과 대등한 것은 아니다. 무리를 이루어야 친족관계가 형성되는데 무리를 규정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였고 그것은 수렵과 채집이라는 사회적 노동의 문제였다. 따라서 인류의 형성에서 사회적 노동이 일차적인 것이라면 친족관계는 이차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역사적 유물론을 목적론으로 파악한다. 물론 가장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역사유물론이 역사에 내재한다고 주장하는 <목적론>이다.32) 이것은 하버마스가 역사적 유물론에 대해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역사적 유물론은 목적론과는 정반대에 위치한다. 역사적 유물론이 유물론인 이유는 인간의 역사를 하나의 자연사적 과정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인간 각각의 수많은 목적들이 어우러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철되는 역사발전의 법칙이 있고 그러한 법칙은 인간 개개인과 그리고 인류 전체의 의지와 독립적으로 작용한다는 의미에서 역사발전은 하나의 자연사적 과정으로 파악된다. 심지어 사적 유물론은 인간의 최고도의 목적의식적인 행위인 혁명조차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본다. 사적 유물론은 인간의 역사를 물질적 삶의 재생산에 의해 규정되는 것,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자연사적인 성격을 갖는다.

하버마스는 맑스에 의해 정립된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라는 개념을 공격한다. 이 사회에서 생산력의 진보는 아주 세분화된 노동과정의 분화와 산업들 사이에서 노동조직의 분화를 낳는다. 그러나 이러한 생산의 사회화에 구현되어 있는 잠재적인 인지능력은, 부르주아 사회를 혁명으로 내모는 사회운동을 가능하게 할 도덕적ㆍ실천적 의식과는 아무런 구조적 유사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생산력의 진보는, ≪공산당 선언≫이 주장하는 것처럼 노동자의 고립 대신에 노동자의 혁명적 결속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낡은 노동조직 대신에 새로운 노동조직을 산출할 뿐이다.33) 생산의 사회적 성격 자체가 혁명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취득의 사적 성격의 대립이라는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이 혁명을 필연화하는 것이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 자체는 일정한 한도 내에서 진화적 과정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것과 생산관계를 의미하는 취득의 사적 성격 간의 대립은 격화할 수밖에 없다. 기업은 자본가의 것이라는 인식이 일정 한도 내에서는 용인될 수 있지만 기업이 망하면 대량해고가 발생하고 지역경제가 망하고 나아가 국가가 기업의 부도를 막기 위해 수천억을 투입하는 사태에 이르면 기업은 단지 자본가의 것만은 아니게 된다. 즉,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그 관계의 사적 성격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따라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에 조응하는 관계의, 취득의 사회적 성격을 수립하라는 요구, 사회주의적 생산관계 수립의 요구는 거세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하버마스는 모순의 개념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생산의 사회화의 진화적 성격만을 보고 모순의 운동에 의해 발생하는 비약, 질적 변화의 필연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이런 진화적 사고는 생산양식의 개념에 대한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유적 역사에 관한 역사유물론적 이해는 사회 발전을 <생산양식의 연속적 발전>으로 재구성할 것을 요구한다.34) 하버마스는 맑스의 이론을 생산양식의 비연속적 발전이론으로 본다. 그러면서 자신은 생산양식의 연속적 발전이 올바르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봉건제에서 자본제로의 이행은 연속적인 진화적 발전이었는가 아니면 비약을 수반하는 비연속적인 발전이었는가? 또 봉건제와 자본제는 질적 차이가 있는가 없는가? 하버마스는 이렇게 사실상 생산양식의 개념을 부정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역사발전을 의사소통행위 개념을 중심으로 체계의 복잡화와 의사소통적 합리화의 역사로 보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심지어 국가와 계급사회의 발생을 학습 메커니즘의 문제로 설명한다. 우리는 학습 메커니즘의 도움을 통해서만, 왜 단지 몇몇 사회들만이 그 사회의 진화를 자극하는 조절 문제들 일반에 대해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었고 또 왜 바로 이 국가조직이라는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35) 국가의 발생을 인간의 인식능력과 의사소통, 학습능력으로 설명하는 것은 맑스주의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국가의 발생은 사적 소유가 발생하여 사회가 계급분열을 하고 계급분열이 치유될 길이 없을 정도가 되어서, 즉 계급대립의 비화해성의 산물로서 국가가 발생하는 것이다. 맑스주의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라는 물질적 삶을 기초로 국가의 발생을 설명하는 데 반해 하버마스는 학습 메커니즘이라는 관념적인 접근으로 국가의 발생을 설명하는데 이는 자신의 의사소통행위이론에 국가의 발생을 꿰어 맞추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버마스의 역사 유물론의 재구성은 조악한 수준이다. 그런데 그러한 재구성의 핵심은 물질적 삶을 역사발전의 토대로 규정하는 것을 공격하고 그것을 의사소통행위 혹은 학습능력이라는 관념적 개념으로 대체하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은 단지 하버마스의 개인적 작품은 아니다. 그것은 도구적 이성비판이라는 비판이론을 모태로 하여서 도구적 이성의 대립물로서 의사소통행위라는 개념을 설정한 것이 역사적 맥락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버마스는 베버, 미드, 뒤르켐 등의 이론을 흡수하면서 그것을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라는 개념으로 정식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식화는 맑스의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라는 개념을 사실상 차용한 것인데 맑스는 시민사회의 핵심을 경제적 생산관계로 보고 시민사회 내에서 그것을 극복할 담지자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발견했지만 하버마스는 경제적 영역을 체계의 영역에 넣고 의사소통의 영역으로서 생활세계라는 개념으로 쪼그라들었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이론은 전형적으로 개량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 경향을 뒷받침하는 이론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형성된 의사소통의 합리성의 개념 자체와 언어철학적 분석은 일정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1) 하버마스, ≪의사소통행위이론≫ 제1권, 나남, pp. 46-7.

2) 같은 책, p. 127.

3) 같은 책, p. 286.

4) 같은 책, p. 45.

5) 같은 책, p. 50.

6) 같은 책, p. 54.

7) 같은 책, p. 131.

8) 같은 책, pp. 131-2.

9) 하버마스, ≪의사소통행위이론≫ 제2권, 나남, p. 197.

10) 같은 책, p. 204.

11) 같은 책, p. 482.

12) 하버마스, ≪의사소통행위이론≫ 제1권, p. 228.

13) 같은 책, p. 239.

14) 같은 책, p. 260.

15) 같은 책, p. 299.

16) 같은 책, p. 339.

17) 같은 책, p. 335.

18) 같은 책, p. 383.

19) 같은 책, pp. 427-8.

20) 같은 책, p. 497.

21) 하버마스, ≪의사소통행위이론≫ 제2권, p. 132.

22) 같은 책, p. 151.

23) 같은 책, p. 161.

24) 같은 책, p. 440.

25) 같은 책, p. 245.

26) 같은 책, p. 273.

27) 같은 책, p. 529.

28) 같은 책, p. 538.

29) 같은 책, pp. 555-9.

30) 하버마스,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을 위하여, 의사소통의 사회이론≫, 관악사, pp. 14-5.

31) 같은 책, p. 23.

32) 같은 책, p. 32.

33) 같은 책, p. 41.

34) 같은 책, p. 44.

35) 같은 책, p.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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