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14)

 

문영찬 | 연구위원장

*1)

[목차]

머리말

제 1 장 세계관과 철학의 근본문제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 철학의 근본문제

  3. 세계의 통일성

제 2 장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의 역사

  1. 철학의 발생

  2. 데모크리토스 노선과 플라톤 노선의 투쟁

  3. 아리스토텔레스

  4.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에 의한 고대 원자론의 계승, 발전

  5.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 토마스 아퀴나스

  6.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브루노, 갈릴레이, 뉴턴

  7. 베이컨, 홉스

  8. 데카르트

  9. 스피노자

  10. 로크

  11. 라이프니츠

  12. 흄

  13. 디드로, 엘베시우스, 돌바하

  14. 볼테르, 루쏘

  15. 칸트

  16. 피히테, 셸링

  17. 헤겔

  18. 포이에르바하

제 3장 맑스, 엥겔스에 의한 철학에서의 혁명

  1. 맑스, 엥겔스에 의한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의 창시

  2. 변증법적 유물론의 범주들

    1) 물질과 운동

    2) 공간과 시간

    3) 물질과 의식

    4) 원인과 결과

    5) 개별-특수-보편

    6) 필연성과 우연성

    7) 본질과 현상

    8) 가능성과 현실성

    9)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

    10) 모순 혹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내용과 형식)

    11) 부정의 부정

    12) 인식론
3. 자유와 필연성

  4. 목적의식성

  5. 사적 유물론의 범주들

  6. 레닌, 스탈린, 마오쩌뚱, 그람시에 의한 맑스주의 철학의 발전

제 4 장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사조에 대한 비판

  1. 콩트, 밀

  2. 쇼펜하우어, 니체

  3. 후설

  4. 하이데거

  5. 프로이트

  6.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7. 샤르트르

  8. 하버마스

  9. 알튀세르, 발리바르

  10. 푸코, 들뢰즈, 데리다, 라캉

  11. 지젝

  12. 자율주의

  13. 이진경

  14. 롤즈의 《정의론》, 마이크 샌덜의《정의란 무엇인가》

제 5 장 과학의 발전과 그에 대한 철학적 일반화

제 6 장 철학과 종교

제 4 장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사조에 대한 비판

5. 프로이트

프로이트는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이며 의사이고 이른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이다. 프로이트는 정신과 의사로서 신경증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신경증의 증상이 성본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인간의 의식이 무의식에 의해 규정된다는 주장으로 나아갔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프로이트는 꿈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꿈의 해석≫을 발표하여 정신분석이론을 창시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꿈 연구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목적은 꿈의 의미를 명백히 하여 신경증 연구의 기초를 닦는 데 있습니다. 꿈 연구는 신경증 연구의 가장 훌륭한 준비가 될 뿐만 아니라, 꿈 그 자체가 신경증적 증상으로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므로 많은 이점이 있습니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다 꿈을 꾼다면, 우리는 꿈에서 신경증 연구가 찾아낸 거의 모든 점들을 통찰할 수 있습니다.”1) 이렇게 프로이트는 신경증 연구에서 출발하여 꿈 연구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고 꿈을 통해 인간의 무의식의 발견이라는 방법으로 나아갔다. 프로이트는 꿈과 무의식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우리의 견해를 꿈 전체에 확대시켜보면, 꿈이 무의식적인 것의 왜곡된 대체물이라는 점이 드러납니다.”2) 꿈을 통해 무의식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본 프로이트는 꿈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하는데 다음과 같은 파악은 일정한 합리성이 있다. “각성시 상태의 가장 큰 특징은, 사고 활동이 ‘표상’에 의하지 않고 ‘개념’에 의해 행해진다는 점이라고 실라이메르마하는 지적했다. 그런데 꿈은 주로 형상에 의해 생각되고, 수면 상태에 접근함에 따라 의식적인 여러 활동이 곤란해지는 데 반비례하여 자의적인 표상이 나타난다.”3) 즉 꿈과 꿈을 꾸지 않는 각성시 활동의 차이는 각성시에는 인간이 개념에 의존하고 사고를 하는 데 반해 꿈에서는 그러한 개념이 나타나지 않고 표상, 형상 등에 의해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파악은 일정한 타당성이 있는데 꿈에서는 개념적 사고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프로이트는 꿈을 외현적 꿈과 잠재적 꿈으로 구분한다. “지금부터는 꿈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외현적 꿈 내용’으로, 연상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숨겨져 있는 것을 ‘잠재적 꿈 사고’로 부르기로 합시다.”4) 외현적 꿈은 실제 꾼 꿈의 내용을 말하고 잠재적 꿈은 외현적 꿈에 숨어있는 무의식적인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왜 그런 꿈을 꾸게 되었는가하는 의문을 추적하여 꿈에 숨어 있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렇게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을 통해 인간의 무의식이라는 개념에 접근한다.

신경증 연구에서 출발하여 무의식의 세계로 접근하는 프로이트의 출발점은 일정한 합리성이 있다. 실제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최초에는 신경증 치료목적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따라서 성적인 분방함은 정신분석의 치료 효과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의식을 의식으로 대체하고, 무의식을 의식으로 해석해 내는 일입니다. 무의식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억압과 함께 증상이 나타나는 조건들을 없앨 수 있으며, 병인이 되는 갈등 역시 해결할 수 있는 정상적인 갈등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5) 이렇게 무의식을 의식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신경증적 증상을 치료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최초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여기서 더 나아가 무의식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주장을 세우면서 인간의 심리를 본능(이드)-자아-초자아라는 3가지로 도식적으로 구분하는 일종의 심리학 혹은 정신분석학을 세웠는데 프로이트 스스로는 이를 심층심리학이라 불렀다. 그러면 꿈의 해석을 넘어서 프로이트의 심층심리학 혹은 정신분석학의 의미를 파악해보자.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방법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목적을 위해 정신분석과는 이질적인 모든 해부학적ㆍ화학적ㆍ생리학적 가설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정신분석은 온전히 심리학적 가설만을 근거로 연구되어야 하는데, 이 점 때문에 여러분이 더욱 낯설어할까 봐 염려스럽습니다.”6) 여기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의 방법이 해부학적ㆍ화학적ㆍ생리학적 가설에서 벗어나 온전히 심리적 방법에만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심리는 그 자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세계로부터의 자극과 그것의 신체적, 생리학적 과정을 거쳐 심리가 형성되게 된다. 즉, 인간의 심리, 의식은 외적 세계의 반영이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여기서 세우고 있는 방법론은 이런 유물론적 접근에서 이탈하여, 외적 세계의 반영을 핵심으로 하는 생리학적 접근을 배제하고 심리학적 가설만을 전제로 하여 정신분석을 행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로부터 프로이트 정신분석이론의 비합리성이 시작된다.

심리학적 가설만을 전제하는 프로이트는 이제 자유롭게 자신의 가설을 펼치는데, 의식에 대한 무의식의 선차성이 그 출발점이다. “사람들이 거부감을 보이는 정신분석적 주장 가운데 첫째는, 정신 과정 자체가 무의식적 과정이며 의식적인 것은 전체 정신 활동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것이거나 그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7) 즉, 기존에 정신은 의식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하여 정신과 의식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나아가 무의식이 의식을 규정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정신적인 것은 의식적인 것이다’라는 추상적 명제가 선입관에 불과하다는 제 주장에 여러분은 아직 선뜻 동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정신분석이 발견한 이 명제는 바로, 넓은 의미에서나 좁은 의미에서나 성적(性的)일 수밖에 없는 욕구충동이 신경증이나 정신병을 유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성적 충동이 인간 정신의 최고의 구현이라 할 문화적ㆍ예술적ㆍ사회적 창조에 이바지해 왔다는 것입니다.”8) 이렇게 프로이트는 의식이 곧 정신이라는 기존의 관점을 부정하고 무의식이 의식을 규정하며 나아가 그러한 무의식은 성적일 수밖에 없는 욕구충동에서 비롯되며 그것이 문화적ㆍ예술적ㆍ사회적 창조에 이바지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간의 심리에서 생리학적 기초와의 단절을 방법론으로 세운 프로이트는 성적인 무의식적 본능이 인간의 의식을 규정하는 근본이라는 입론을 이렇게 세우고 있다. 리비도라 불리는 이러한 성적인 본능은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신경증의 발생 원인을 리비도에서 찾고 있다. “사람들이 신경증에 걸리는 것은, 자신의 리비도를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졌기 때문인데, 저는 이 경우를 ‘좌절’이라고 부릅니다.”9), “모든 증상들은 리비도 때문에 발생하며, 결국 증상들은 리비도를 비정상적으로 사용하는 데서 오는 대리 만족입니다.”10) 이렇게 프로이트는 신경증이라는 정신병의 발생 원인을 성적인 본능인 리비도의 좌절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프로이트가 이런 결론에 다다른 것은 자신의 환자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인데 환자들과의 상담, 환자들의 꿈의 해석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인간에게 본능과 무의식적 세계가 있다는 주장을 넘어서서 그것이 의식 자체를 규정하고 병의 핵심적인 원인이라는 주장은 과학적인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의학계에서 과학으로 승인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프로이트의 주장이 과학적 접근, 방법론에 입각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경증의 발생과 리비도, 성본능은 일정한 관계가 있을 수 있지만 신경증의 원인은 리비도의 좌절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또 다른 것이다. 바로 여기에 프로이트 정신분석 이론의 비합리성이 있다. 부분적 현상을 과도하게 일반화하고 또 생리학적 기초와 단절하여 성본능, 리비도라는 개념을 형이상학적으로, 관념적 개념으로 전환시킨 것이 그러한 비합리성의 핵심이다. 리비도, 성본능이라는 개념에 모든 현상을 돌리는 프로이트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러한 애정 경쟁은 분명 성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특별한 애정을 품어 어머니를 자신만의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따라서 아버지만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아버지를 경쟁자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린 딸은 어머니를 자신과 아버지 사이를 방해하는 경쟁자로 생각하게 됩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부르는 이러한 감정이 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11) 인간의 의식은 무의식에 의해 규정되는데 무의식의 핵심은 리비도, 성본능이고 그러한 성본능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유년기의 성적 경험과 관념에 의해 규정된다고 프로이트는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결국 인간의 삶이 어린 시절의 성적 경험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인데 매우 비합리주의적인 주장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관점을 보충하기 위해 이드(본능)-자아-초자아로 규정되는 도식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그런데 리비도 충동에 반대하여 개입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누가 이 병리적 대립의 반대편에 있을까요? 넓은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은 성적이지 않은 충동들입니다. 우리는 이를 포괄적으로 ‘자아본능’이라고 부릅니다. 병인으로 작용하는 갈등은 결국 자아본능과 성본능 사이의 갈등입니다.”12) 여기서 자아 개념은 리비도 충동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했는데 프로이트는 자아를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주체로 상정하고 있다. 또한 초자아는 도덕적 금기, 양심과 같은 사고를 하는 것으로서 사회적, 윤리적 존재, 그러한 정체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매우 도식적인데 바로 본능(이드)이라는 것을 초점으로 그 개념을 보완하기 위해 배치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사고, 도덕적 사고는 자아를 구성하지 않는가? 본능과 자아는 현실에서는 통일되어 있지 않는가? 인간의 의식과 삶은 현실에서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총체적 존재이다. 사실, 프로이트가 초자아로 분류한 도덕적 사고, 사회적 사고는 자아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일 따름이며 그것을 자아와 분리된 초자아로 규정할 근거는 없다. 프로이트가 도덕과 사회성을 초자아로 분류한 것은 그것이 본능, 이드, 성 충동을 억압하는 요소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리비도, 성본능을 인간 삶의 가장 근원적인 규정적 요소로 고정적으로 사고하는 형이상학적 관점이다. 그리고 프로이트가 이러한 형이상학적 관점에 빠진 것은 무의식이라는 개념 자체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심리를 외적 세계의 반영으로 보지 못하고 인간의 심리를 규정하는 생리학적 기초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이러한 일면성, 형이상학적 사고는 여러모로 드러나는데 그는 종교적 세계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종교적 세계관의 비판에 마지막 획을 그은 것은 정신분석학이었습니다. 정신분석학은 종교의 원천을 어린아이의 무력감으로부터 찾아냈고, 그 내용은 성숙한 시절에 이르도록 살아남은 어린 시절의 소망과 욕구에서 연유한다는 것을 밝혀낸 것입니다.”13) 어린 시절의 성적 경험과 피억압의 경험, 무력함의 경험이 종교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협소하고 비과학적인 관점인데 종교의 근원은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이 아니며 종교는 인간이 자연에 대해, 나아가 사회에 대해 느끼는 무력감, 공포 때문에 발생하고 유지되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또한 유물론적 역사관에 대해 초자아에 의한 이데올로기의 계승이라는 관점을 간과했다고 비판한다. “초자아를 고려하는 것이 인류의 사회적 행동― 예를 들어, 범죄의 문제 ―을 이해하는 데에 얼마나 중요한 도움을 줄지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아마도 교육에 있어서도 실제적인 힌트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유물론적인 역사관의 오류는 아마도 이런 중요한 요소를 평가절하했다는 데 그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이데올로기’를 동시대의 경제 조건의 산물이자 상부구조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그 문제를 쉽게 넘겨 버립니다. … 여러 민족 및 사람들의 과거와 전통은 초자아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전승되며, 이것은 현재의 영향을 아주 조금씩만 받아들이면서 조금씩만 변화해 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초자아를 통해 작용하는 한, 그것은 경제적 조건들과는 독립적으로 인간의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14) 프로이트는 이데올로기를 초자아에 의해 전승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유물론적 역사관에 대해 이데올로기의 특성을 무시하는 경제 결정론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접근은 일면적인데 유물론적 역사관은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독립성을 무시하지 않고 정반대로 이데올로기의 특성에 대해 과학적 분석을 한다. 즉, 유물론적 역사관에서는, 이데올로기는 근원적으로, 궁극적으로 경제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그것은 상대적 독립성이 있으며 나아가 경제에 반작용하기까지 한다는 것을 승인한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는 유물론적 역사관의 변증법적 성격에 대해 잘못 파악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신경증 치료에서 출발하였지만 인간 의식과 심리의 물리적 기초, 생리학적 기초와 단절하는 방법론을 통해 성본능(리비도), 무의식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비합리주의적인 주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의식이 외적 세계의 반영이라는 관점과 대립되는 것이며 또한 인간 의식을 규정하는 여러 요소들 간의 상호 관련을 무시하는 일면적인 주장이었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당시 금기시되던 성본능 등을 학문적 대상에 올려놓은 것은 그의 진보적 측면인데 문제는 그것을 과도하게 절대화시켜 비합리주의에 빠진 점이라 할 수 있다.

6.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20세기 중반의 독일의 철학자들인데 초기에는 맑스주의를 추구했으나 파시즘 등장을 전후하여 비관주의에 빠졌다. 나찌 등장 이후에 미국으로 망명하였는데 2차 대전 말엽에 두 사람이 함께 쓴 ≪계몽의 변증법≫으로 학문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고 종전 후 독일로 돌아가 비판이론 혹은 프랑크푸르트 학파라 불리는 경향을 이끌었다. 이들의 이론에는 한편으로 파시즘에 대한 반대가 표명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성에 대한 비관주의, 패배주의가 깔려 있다. 이들은 또한 동구 사회주의를 전체주의로 파악하는데 한편으로는 반파쇼를 표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 사회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그들의 입장으로 인해 일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이들의 이론은 이른바 신좌파의 모태가 되었는데 68혁명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들의 이론을 철학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인데 이는 이성에 대한 패배주의를 합리화한 것이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다음과 같이 표명한다. “우리가 이 과제에 착수하면서 염두에 둔 것은 다만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라는 인식이었다.”15) 즉,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파시즘의 등장에 대해 야만으로 규정하면서 그것에 대한 입장을 세우는 것을 자신들의 과제로 삼았다는 것을 표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파시즘에 대한 과학적 입장을 정립하기보다는 인간의 이성 혹은 계몽이 그 자체에 이미 야만으로의 전화가능성을 갖고 있었다고 파악한다. “우리는 우리가 뒤엉켜 들어간 구체적인 역사적 형태나 사회 제도뿐만 아니라 이 계몽 개념 자체가 오늘날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 퇴보의 싹을 함유하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고 믿는다.”16) 그리하여 그들은 계몽의 광기로의 전화를 결론으로 하는 이른바 계몽의 변증법을 전개한다. 이들의 인식에서 주요한 개념은 도구적 이성이라는 개념이다. 즉, 이성이 효율만을 중시하는 도구로 전락했으며 이것은 파시즘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다고 파악한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법이다. 오직 그것만이 유일한 목적이다. 자기 자신마저 돌아보지 않는 계몽은, 자신이 갖고 있는 자의식의 마지막 흔적마저 없애버렸다. …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진리라고 부르는 만족이 아니라 “조작”, 즉 효율적인 처리 방식인 것이다.”17) 이들은 인간의 소외를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로부터 구한다. “신화는 계몽으로 넘어가며 자연은 단순한 객체의 지위로 떨어진다. 인간이 자신의 힘을 증가시키기 위해 치르는 대가는 힘이 행사되는 대상으로부터 ‘소외’다. 계몽이 사물에 대해 취하는 형태는 독재자가 인간들에 대해 취하는 행태와 같다. …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사물은 언제나 동일한 것, 즉 지배의 대상이라는 데에 그 본질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성’이 ‘자연의 통일성’을 구성한다.”18)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보는 인간은 인간 또한 지배의 대상으로 보며 그것이 ‘동일성’을 구성한다고 본다. 아도르노에게서 ‘동일성’이라는 개념은 주요 개념으로 쓰이는데 근대 철학의 주요 개념인 동일성 개념이 아도르노에게서는 지배, 체계, 전체주의, 강압 등을 설명하는 철학적 고리가 된다. 그들은 도구적 이성이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끌어낸다. “이성은 다른 모든 도구를 제작하는 데 소용되는 보편적인 도구로 쓰인다. … 목표를 위한 순수한 기관이 되고자 하는 이성의 오랜 야심은 마침내 이루어졌다. 논리 법칙의 배타성은 이처럼 오직 기능만을 생각하는 데서 생겨난 것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자기 유지의 강압적 성격에서 유래하는 것이다.”19) 이성이 진리의 추구라는 목표를 상실하고 단지 효율성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것이 도구적 이성이라는 개념의 내용이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이성의 의미를 천착하는 것이지만 이성에 대한 신뢰의 상실을 불러오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이성에 대한 패배주의를 짙게 깔고 있다. 파시즘의 등장이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은 일면적이다. 이러한 접근에는 계급적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 독점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독점자본가계급의 대응으로서 파시즘의 성립이라는 점을 명료히 하지 못하고 이성의 위기가 파시즘의 등장을 가져왔다고 파악하는 것은 파시즘의 본질을 잘못 짚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몽(이성)의 광기로의 전화라는 일면적이고 패배주의적인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들의 계몽의 변증법은 계몽 자체에 이미 퇴보의 싹이 있고 그것이 파시즘에서 광기로 전화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은 계몽이 대중을 일깨우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대중을 기만하는 것이 되었다고 본다. “베이컨의 견해대로 확실히 ‘인간의 우월성’의 근거인 ‘지식’은 이제 지배의 해체로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재 세계에 봉사하고 있는 계몽은 이러한 가능성 앞에서 대중의 총체적 기만으로 변질된다.”20) 이들은 니체를 들어 계몽의 이중적 성격을 분석한다. “니체는 헤겔 이후 ‘계몽의 변증법’을 인식한 몇 안 되는 철학자 중의 하나다. 그는 ‘지배’에 대한 계몽의 이중적 관계를 명확하게 표현했다.”21) 즉, 이들은 니체를 들어 계몽이 한편으로 민중을 일깨우는 것이지만 동시에 계몽은 민중 기만의 수단이며 통치기술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파악은 계몽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계급적 관점이 결여되면 일면적으로 계몽, 이성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것에 그치게 된다. 이들은 이성에 대한 불신을 칸트의 개념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정언 명령’에 따라, 더 깊이는 ‘순수 이성’에 조응해서, 파시즘은 인간을 사물로, 즉 행동양식들의 총화로 만들었다.”22) 인간의 이성의 필연적 산물로서 파시즘이라는 이러한 관점은 파시즘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이성에 대한 패배주의 조장으로써 회피하는 것이다. 이렇게 접근하면 파시즘에 대한 극복의 전망은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이들의 계몽의 변증법은 이성에 대한 패배주의이다. 이러한 패배주의 속에서 그들은 니체의 허무주의를 다음과 같이 긍정한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온갖 위안과 보장에 의해 매일매일 배반당하고 있다 할 때, 니체는 오히려 그의 ‘부정’ 속에서 인간에 대한 흔들림없는 신뢰를 구제했던 것이다.”23) 현대사회에서, 특히 파시즘에서 인간에 대한 신뢰가 상실되고 있는데 니체는 이미 인간에 대한 신뢰를 공공연히 부정했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를 구제했다는 것이다. 이성에 대한 패배주의는 이렇게 니체의 허무주의를 인간에 대한 신뢰의 회복으로까지 보고 있다.

이들은 도구적 이성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이성의 형식화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진리의 추구라는 목표를 상실하고 이성이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성의 형식화는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정의, 평등, 행복, 관용,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난 세기 이성에 내재했거나 이성에 의해 비준 받은 모든 개념들은 정신적 뿌리를 상실했다.”24) 즉, 이성의 형식화라는 개념은 고전적인 이성 개념에 포괄되었던 많은 가치 있는 것들이 상실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성의 형식화라는 개념을 통해 이들은 시민사회 내의 적대감을 포착한다. “이성의 형식화는 역설적인 문화적 상황을 불러온다. 한편으로 이 시대에는 자아와 자연의 파괴적인 적대감, 즉 시민 사회 문명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보여주는 적대감이 정점에 이른다.”25) 그런데 이들이 파악하는 적대감은 자아와 자연의 적대감이지 계급적 적대감은 아니다. 즉, 이들에게는 계급적 접근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들은 다음과 같이 과제를 파악한다. “오늘날 대중의 과제는 전형적인 전통적 당파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의 고유한 조직 속으로 침투해 그들의 의식을 개별적으로 지배하는 독점적인 구조를 인식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다.”26) 바로 이것이 이들의 실천적인 결론이다. 즉, 전통적 당파에 매달리지 않는 것, 다시 말해 계급투쟁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속에 침투하고 지배하는 사회의 독점적 구조를 인식하고 저항하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지배질서에 대한 저항은 논하지만 계급투쟁은 아닌 것! 이것이 이른바 신좌파의 노선의 실체이다. 이성에 대한 패배주의 속에서 저항은 논하지만 과학적 노선을 이끌어낼 의지와 능력이 없는 흐름이 바로 신좌파인 것이다.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은 이성에 대한 패배주의를 철학적으로 합리화하고 있다. 그러나 아도르노가 파악하는 변증법은 맑스의 변증법과는 거리가 먼데 이들은 동일성의 개념과 부정이라는 개념을 주요고리로 하여 부정의 변증법을 전개한다. 아도르노는 이성의 패배주의를 다음과 같이 승인한다. “철학은 단지 세계를 해석해왔을 뿐이고 현실에 대해 체념함으로써 자체로서도 불구화되었다는 일괄적 판단은, 세계변화가 실패한 후 이성의 패배주의로 된다. … 예측 못할 훗날로 연기된 실천은 이제 자족적 사변에 반대하는 장치가 아니라, 대개 행정가들이 변화하는 실천에 필요한 비판적 사상을 공허한 것이라고 묵살하는 구실로 되었다.”27) 여기서 아도르노는 이성의 패배주의를 공공연히 승인하고 있는데 그 근거는 세계변화가 실패했다는 현실인식이다. 즉, 그는 2차 대전 이후 성립한 세계 사회주의진영을 현실을 변화시킨 체제로 보지 않고 전체주의 체제로 보는 것에 근거하여 맑스가 포이에르바하 테제에서 제창한 세계의 변혁, 실천 개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고 있으며 나아가 그러한 변혁적 실천은 “예측 못할 훗날로 연기”되었다고 보고 있다. 또한 현재는 실천 개념이 비판적 사상과 이론을 ‘행정가들’이 억압하는 구실로 전락했다고 본다. 이는 동구의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2차 대전 후에 급속히 확대된 서유럽 공산당들의 의미에 대해서도 행정가들이 비판적 사상을 억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아도르노의 이성의 패배주의에 대한 승인은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2차 대전 후의 세계상을 이렇게 파악하는 것에 기초하여 아도르노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에 대한 요구는 부단히 이론을 시녀로 전락시켰으며, 그 통일 속에서 이론이 수행해야 했을 일을 이론으로부터 제거했다. 사람들이 모든 이론에 요구하는 실천적 검증이 검열의 인장으로 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찬양받는 이론-실천에서 이론이 굴복하자 실천은 비개념적인 것으로 되고 정치의 일부로 되었다.”28) 20세기 사회주의 진영을 전체주의 체제로 보는 아도르노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검열의 인장이 되고 또 이론을 시녀로 만들었다고 본다. 그러나 20세기 사회주의가 일정한 한계와 오류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더라도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론은 자족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과 결합될 때만 개념의 내용을 확보할 수 있고 진리의 기준을 얻을 수 있다. 이론의 역할, 그 본질은 시녀라기보다는 실천에 봉사하는 것이다. 이론과 실천의 부단한 상호작용 속에서 운동은 발전하는 것인데 시녀라는 비판을 통해 실천과의 통일이 결여된 이론의 추구로 나아가는 것은 이론의 방향성의 상실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은 칸트, 헤겔, 맑스와 엥겔스에 대한 다양한 고찰을 하고 있지만 그는 변증법의 기본적 개념과 맥락에 대해 맑스, 엥겔스와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아도르노는 변증법의 주요개념인 모순에 대해 유물론적 변증법과 다른 관점을 보인다. “그러한 모순을 최초로 검토한 헤겔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비중을, 모순은 차지한다. 한때 총체적 동일성을 위한 매체였던 그것이 총체적 동일성의 불가능성을 말해주는 기관으로 된 것이다.”29) 유물론적 변증법에서 모순은 동일성의 매체가 아니다. 모순은 대립물의 통일을 의미하는데 대립과 통일성의 결합이 모순 개념이다. 즉, 대립은 단순히 동일성 혹은 통일성을 매개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순은 아도르노의 주장과 같이 동일성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모순은 동일성의 부정으로서 비동일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통일성)내에 존재하는 대립을 가리킨다. 그러나 전체주의, 억압을 동일성을 통해 설명하는 아도르노는 동일성인가 그에 대한 부정인가를 모순의 의미로 본다. 그러나 이는 모순 개념을 단순화시키는 것이면서 동시에 모순 개념의 역동성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모순 개념을 총체적 동일성의 불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파악하는 아도르노는 유물론적 변증법의 주요 개념인 ‘부정의 부정’에 대한 오류를 보인다. “부정의 부정을 긍정성과 같다고 하는 것은 동일시의 정수이며, 그 순수 형식으로 환원된 형식적 원칙이다. 이를 통해 변증법의 가장 핵심적인 자리에서 반변증법적인 원칙, 즉 산수에서 음수 곱하기 음수를 양수로 처리하는 전통적 논리가 주도권을 잡는다. … 부정의 부정은 부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부정이 충분히 부정적이지 못했다는 점을 증명한다. … 부정된 것은 사라질 때까지 부정적이다.”30) 산수에서 음수 곱하기 음수는 양수라는 것은 일종의 형식논리이다. 그러나 부정의 부정 법칙에서 부정은 변증법적 부정인데 아도르노는 변증법적 부정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형식논리적 부정으로 바꿔치기 하고 있다. 변증법적 부정은 긍정의 계기를 내포한 부정이며 그것은 헤겔과 맑스에 의해 지양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또한 부정의 부정은 단순히 긍정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고양된, 질적으로 상승한 새로운 긍정을 말하는 것이며 나아가 변증법적 부정의 연속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아도르노에게서는 부정의 부정의 이러한 역동적이고 풍부한 변증법적 성격이 거세되고 그것이 형식논리적으로 재단되고 있다. 동일성 테제를 근간으로 하여 비동일자의 철학, 부정의 철학을 추구하는 아도르노는 변증법적 부정, 혹은 지양의 개념을 승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도르노는 자신의 부정 변증법 혹은 부정의 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정의 부정이 긍정적이라는 원칙 없이는 헤겔의 체계구성이 와해되었을 것이 틀림없지만 변증법의 경험내용은 그러한 원칙에 있지 않고 동일성에 대한 타자의 저항에 있다. 바로 여기서 변증법의 힘이 나온다.”31) 여기서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의 핵심이 정식화되어 있는데 그는 변증법적 부정의 승인이 아니라 ‘동일성에 대한 타자의 저항’을 부정 변증법으로 보고 있다. 전체주의의 논리, 억압의 논리로 파악되는 동일성에 대한 타자, 즉, 비동일자의 저항이 부정 변증법이며 ‘변증법의 힘’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에서는 내적으로 존재하는 대립물의 투쟁을 통한 변증법적 부정, 지양이라는 헤겔과 맑스의 개념은 사라지고 동일성과 타자라는 형식논리가 부정 변증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다.

아도르노는 자유의 개념에서도 변증법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자유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전체적 대립관계를 세워가는 가운데에서 자유와 인과성은 서로 겹친다. 칸트의 경우 자유는 이성에 기초한 행위와 같기 때문에 그것은 합법칙적이기도 하다. 즉 자유로운 행동들도 ‘규칙들로부터 나온다.’ 그로부터 자유는 법칙이 없으면 아무 자유도 아니며 단지 법칙과의 동일시 속에만 자유가 존재한다는, 칸트 이후 철학의 역겨운 저당권이 생겨났다. 그와 같은 것은 독일 관념론을 넘어서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영향을 발휘하면서 엥겔스에게 전수되었는데, 이는 거짓된 화해의 이론적 근원이다.”32) 칸트가 법칙과의 동일시를 자유로 파악했는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칸트는 자유를 선험적 영역으로 보고 필연성과 무관하게 자유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도르노는 칸트의 자유개념을 ‘법칙과의 동일시’로 보면서 그것을 엥겔스에게 뒤집어씌우고 있다. 자유를 법칙과 동일시하는 것은 오류이며 자유 개념을 형해화하는 것이다. 즉, 자유와 필연성을 동일시하는 것은 자유 개념의 형해화이다. 그러나 엥겔스의 자유개념은 자유=필연성이 아니라 자유는 필연성의 지양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필연성을 인식하고 그에 기초하여 자기 자신과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자유라고 엥겔스는 규정하고 있다(≪반듀링론≫). 그러나 지양의 개념이 없는 아도르노는 필연성의 지양으로서 자유 개념과 자유=필연성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이 아도르노는 자유 개념에 있어서도 비변증법적이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아도르노는 지양의 개념이 없는 대신 ‘화해’를 변증법의 귀결로 본다. “한편 변증법은 화해로 종결될 것이다. 이 화해로써 비동일자가 해방되고, 정신화된 강압까지도 사라질 것이며, 이제야 비로소 다양한 것들의 다원성이 열릴 것이며, 이에 대해 변증법은 더 이상 아무 힘도 지니지 못할 것이다.”33) 전체주의와 강압으로 파악되는 동일성이 ‘화해’를 통해 극복되면, 비동일자가 해방되고 다원성이 열린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변증법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다. 변증법은 화해로 종결되지 않는다. 변증법은 대상의 내적 모순의 지양에 의한 새로운 질로의 고양이라는 운동으로 나아간다. 아도르노는 형식적으로는 변증법을 승인하고 유물론도 승인하지만 그것의 내용은 뒤틀려 있다. 지양이 아닌 화해를 아도르노가 주장하는 것은 그가 모순 개념에 대해 그르쳤기 때문이다. 대립물의 통일로서 모순이 아니라 동일성에 대한 부정을 모순으로 파악하는 그는 지양이라는 개념을 세울 수도, 수용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자연 변증법도 부정하는데 내적 모순이라는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는 자연에 변증법이 존재한다는 인식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변증법을 보편적 설명의 원칙으로서 자연에까지 확장시킬 수는 없지만, 또한 사회 내적인 변증법적 진리 및 그와 무관한 진리라는 두 종류의 진리를 나란히 설정할 수도 없다.”34) 자연 변증법, 그리고 일관된 변증법은 자연에 대해서도 변증법적 과정을 승인하는 것이다. 자연의 변증법적 과정은 물질과 운동의 통일성에 대한 승인에 기초하는데 이를 승인할 때만 유물론적인 변증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일성에 대한 부정을 모순으로 파악하는 아도르노는 자연에 존재하는 모순과 그것의 역동성, 물질의 운동에 대해 변증법적 인식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80년대에 운동이 상승하다가 쏘련 등 20세기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자 운동은 퇴조하고 많은 활동가들이 운동을 떠나갔다. 이들은 ≪계몽의 변증법≫에 심취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쏘련 붕괴로 인해 밀려오는 이성에 대한 패배주의를 ≪계몽의 변증법≫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 프랑크푸르트 학파, 비판이론, 신좌파는 이른바 ‘전통’과 단절되어 실천과 유리된, 계급투쟁이 아닌 초라한 저항의 이론에 머무는 것이었다. 계몽의 이중성에 대한 지적은 올바른 것이지만 계급적 관점이 결여되면 그것은 이성에 대한 불신을 불러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계급사회의 지양은 이성에 대한 치열한 탐구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과학적 노선은 사회와 계급의 현실에 대한 이성적 통찰을 통해서만 산출될 수 있다. 20세기의 현실 사회주의가 일정한 한계와 오류가 있었고 그로 인해 붕괴되었다고 해도 계급투쟁을 떠난 저항의 이론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이성의 패배주의를 합리화한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은 지양의 계기가 없는 변증법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그것은 새로운 질, 새로운 사회의 탄생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계급사회의 지양은 평탄한 길이 아니라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현실을 거쳐야만 한다. 자유는 그러한 필연성을 인식하면서 그것을 지양하는 것이다. <노사과연>


* 편집자: 연구소에서 철학세미나를 지도하고 있는 문영찬 연구위원장이 그동안의 성과를 정리하여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2015년 1월호부터 연재하고 있다.

1) 프로이트, ≪정신분석 입문≫, 돋을새김, pp. 70-71.

2) 프로이트, 앞의 책, p. 95.

3) 프로이트, ≪꿈의 해석≫, 선영사, p. 73.

4) 프로이트, ≪정신분석 입문≫, 돋을새김, p. 99.

5) 프로이트, 앞의 책, p. 269.

6) 프로이트, 앞의 책, p. 27.

7) 프로이트, 앞의 책, p. 28.

8) 프로이트, 앞의 책, pp. 28-29.

9) 프로이트, 앞의 책, p. 233.

10) 프로이트, 앞의 책, p. 255.

11) 프로이트, 앞의 책, p. 153.

12) 프로이트, 앞의 책, p. 237.

13) 프로이트,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 문예출판사, p. 278.

14) 프로이트, 앞의 책, pp. 124-125.

15)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 지성사, p. 12.

16)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앞의 책, p. 15.

17)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앞의 책, p. 23.

18) 아도르노, 호르크하어미, 앞의 책, p. 30.

19)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앞의 책, p. 62.

20)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앞의 책, p. 79.

21)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앞의 책, p. 81.

22)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앞의 책, p. 138.

23)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앞의 책, p. 102.

24) 호르크하이머, ≪도구적 이성비판≫, 문예출판사, p. 43.

25) 호르크하이머, 앞의 책, p. 202.

26) 호르크하이머, 앞의 책, p. 184.

27) 아도르노, ≪부정 변증법≫, 한길사, p. 55.

28) 아도르노, 앞의 책, p. 218.

29) 아도르노, 앞의 책, p. 229.

30) 아도르노, 앞의 책, pp. 236-237.

31) 아도르노, 앞의 책, p. 238.

32) 아도르노, 앞의 책, p. 338.

33) 아도르노, 앞의 책, p. 59.

34) 아도르노, 앞의 책, p.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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