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하 | 시인
30여년 만에 걸어보는 이 학살의 숲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산등성이마다 뼛가루로 쌓여 있는 흰 눈이며
나뭇가지마다 암호를 주고 받는 새들의 울음소리며
멀리 사람 실은 배 한 척, 돌 실은 배 한 척, 떠나는 바다여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허겁지겁 땅을 파헤쳐
씹고 또 씹었던 이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며
마지막 남은 이파리마저 가솔린 냄새를 풍기며 불탔던
이 학살의 숲은
아직도 총소리로 가득하다
(중략)
붉은 저녁노을이 멀리 관덕정 인민광장 위로 지고 있었다
산은 다시 한 번 알몸이 되고
그 빈 숲에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살아 흘러가고 죽어 흘러가고
마침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흘러갔다
몸 가릴 곳 하나 없는 이 참혹한 겨울 숲
마지막 몇 사람이 기적처럼 살아 걷는 이 학살의 숲
누가 그 날을 기억하지 않는가
돌려주자
오늘도 노란 유채꽃이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는
아! 피의 섬 제주도
그 4.3이여
우리의 심장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이 진달래꽃을
그 누가 꺾을 수 있으랴
돌려주자
기름진 지주와 자본가의 살을 죽창에 꽂아
그들에게 돌려주자
공장의 프레스에 싹둑싹둑 잘려나간 노동자들의 손가락을
포크레인에 찍힌 철거민의 팔과 다리를
얼어붙은 배추고기 같은 삶을 살다 농약 속으로 사라져간
농민들의 그 골수에 사무친 원한을
그리고
푸르른 5월의 금남로를 승냥이처럼 할퀴고 간
저 피 묻은 손을
찢어
갈갈이 찢어서
‘조국 아메리카’의 후예들에게 돌려주자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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