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13)

문영찬 | 연구위원장

제 4 장 부르주아적

 

 

제 4 장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사조에 대한 비판

3. 후설

후설은 20세기 초반과 중반에 활동한 독일의 철학자이다. 후설은 현상학이라는 학문을 창시했는데 기존의 모든 학문과 철학을 부정하고 현상학적 방법에 의한 학문, 철학만이 참다운 철학이라는 주장으로 나아갔다. 그는 과학적 심리학의 학문성을 부정하고 그에 현상학을 대치시켰다. 그러면 과연 현상학이 무엇인가가 문제되는데 그의 입론을 따라 하나하나 풀어가 보자.

후설은 다음과 같이 기존의 철학을 부정한다. “나는 철학이 불완전한 학문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나는 철학이 아직 학문이 아니며, 철학이 학문으로서는 여전히 어떤 출발도 못했다는 것을 주장할 뿐이다.”1) 즉, 후설은 기존의 철학 일체의 학문성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현상학만이 진정한 철학의 출발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면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이 과연 무엇인가가 문제되는데 후설은 사태 그 자체, 즉 현상이 곧 본질이라고 보면서 본질을 파악하는 직관을 통해 현상, 사태 그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 참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현상과 본질을 동일시하면서 이를 직관을 통해 파악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새로운 주장이 아닌데 후설은 이러한 방법을 진정한 철학이라고 치부하면서 기존의 모든 철학과 학문을 부정하는 길로 나아간다.

후설은 기존의 자연과학과 역사과학, 그리고 세계관 철학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그는 심리학의 학문성을 다음과 같이 부정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현대의 정밀한 심리학은, 비록 심리-물리적 규칙성들에 관계하는 심리적인 것의 의미를 추구하더라도 즉 참된 심리학적 이해를 통찰하더라도, 현대의 정밀한 심리학이 스스로 이미 방법적으로 완전하고 엄밀하게 학문적인 것이라고 간주하는 바로 그 점에 의해 사실상 비학문적이 된다.”2) 즉, 기존의 과학적 심리학이 사용하는 과학적 방법 그 자체가 심리학이 학문이 되지 못하는 이유라고 후설은 주장하고 있다. 심리학이 자연과학의 성과를 이어받아 인간의 심리현상에 대해 자연과학적 방법을 도입하여 발전하는 경향에 대해 후설은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심리학에서 자연과학적 방법이 의식의 사물화(事物化)를 초래한다고 본다. “자연과학의 ‘모형’을 따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피하게 의식을 사물화하고, 처음부터 우리를 배리에 얽혀 들어가게 하며, 이것으로부터 항상 새로운 배리적 문제설정과 그릇된 탐구방향에로 이끄는 경향이 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3) 의식의 사물화는 의식의 본질이 객관 세계의 사물의 반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후설은 이러한 과학적 인식을 정면에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사물과 독립적인 “심리적인 것에 대한 ‘순수한 내재적’ 탐구가 가능”4)하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심리학을 필두로 ‘자연주의 철학’을 부정한 후설은 이어서 역사주의 철학을 부정한다. 그는 역사적인 것을 관념론적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역사적인 것은 그 ‘존재’의 특성상 우리에게 ‘이해되고 설명되고’, 그것은 바로 ‘정신적 존재’이고 내적으로 요구되는 의미계기들의 통일체”5)라고 본다. 역사적인 것은 정신적 존재라는 것은 역사의 본질을 정신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기존의 역사주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탄핵한다. “사실들로부터 이념들을 정초하거나 논박하려는 것은, 칸트가 “부석(浮石)에서 물을 구하는 일”이라고 인용했듯이, 배리일 뿐이다”6)라고 주장한다. 역사학에서 사실을 제거한다면 그것은 과학성을 상실하게 되는데 후설은 사실에 기초한 역사학 혹은 역사주의 철학은 그것이 사실에 기초하기 때문에 학문성이 없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정신의 ‘철학’을 정초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상학적 본질학뿐이라고 주장”7)한다.

또한 그는 세계관 철학을 부정한다. “세계관의 ‘이념’은, 그 개념에 대한 위의 분석에서 즉시 통찰할 수 있듯이, 각 시대에 대해 서로 다른 것이다. 반면 학문의 이념은 초시간적이다.”8) 세계관 철학은 시대성을 띤다는 이유로 학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후설의 주장이다. 그리하여 그는 철학과 세계관을 의식적으로 분리시킨다. “오히려 철학은 이론적 학문으로서 실천적 세계관을 추구하는 노력에 스스로를 대립시키고, 이러한 노력으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의식적으로 ‘분리시켜야’ 한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9)

이렇게 후설은 자연주의 철학, 즉, 자연과학을 부정하고 나아가 역사주의 철학, 즉, 역사과학을 부정하고 세계관의 의의를 부정했다. 그러면서 현상학만이 진정한 철학이고 학문이라는 주장을 했는데, 그러면 후설의 현상학이 과연 어떠한 맥락과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후설은 자신이 현상학을 창시한 배경으로 유럽학문의 위기를 들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철학의 위기를 논한다. “이것은 근대의 모든 학문이 결국 철학의 분과들로서 정초되었고, 따라서 이것들이 자체 속에 지속적으로 지니고 있는 의미상 더욱 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느껴진 독특한 위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는 사실을 뜻한다. … 철학의 위기는 철학적 보편성의 분과들인 근대학문 모두의 위기를 뜻하며, 이것은 유럽 인간성의 문화적 삶이 지닌 의미심장함 전체, 즉 그의 실존 전체에서 맨 처음에는 잠재적이지만 더욱 더 두드러지게 드러난 유럽 인간성 자체의 위기이다. 형이상학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 즉 근대인을 주도한 것으로서의 보편적 철학에 대한 신념의 붕괴는 곧바로 고대인의 ‘주관적 의견’에 대립하여 ‘객관적 인식’을 정립한 바와 같이 이해된 ‘이성’에 대한 신념의 붕괴를 뜻한다.”10) 철학의 위기, 형이상학에 대한 회의, 이성에 대한 신뢰의 상실이 후설이 들고 있는 현상학 창시의 배경이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위기의식은 정당성을 갖고 있는가? 기존의 형이상학이 붕괴되고 있고 그에 대체하여 개별과학이 발전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진보적 현상이었다. 따라서 후설이 느끼는 위기의식은 기존의 관념론 철학, 형이상학적 철학이 과학과 역사의 진보에 의해 무너지게 되고 나아가 철학의 최후의 성역이었던 인간의 의식과 심리현상이 과학적 심리학의 성립에 의해 과학적으로 조명되고 있는 현상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후설의 현상학의 창시는 철학사에서의 반동이었다 할 수 있다.

그는 철학사에서 칸트의 선험주의 철학의 성립을 ‘혁명’으로 파악한다. “모든 혁명 가운데 가장 위대한 혁명은 과학적 객관주의, 즉 근대의 그러나 또한 수천 년의 모든 철학의 객관주의를 선험적 주관주의로 전회함으로 특징지어진다.”11) 칸트 철학의 성립에 의해 수천 년의 과학적 객관주의가 선험적 주관주의로 전회한 것이 철학사의 혁명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철학사를 파악하는 후설은 자신의 현상학을 선험철학의 최종형식으로 규정한다. “내가 여기에서 제시하고자 시도하는 것은 선험철학의 최종형식― 현상학으로서 ―으로 향한 목표이다. 이 현상학에는 근대 심리학의 자연주의적 의미를 근절시키는 심리학의 최종형식이 지양된 계기로서 놓여 있다.”12) 이로써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이 가능해졌다. 즉, 후설의 현상학은 칸트의 선험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칸트에게서 존재하던 일정한 과학성과 객관성을 제거하고 그것을 일체의 과학들에 반대하는 비합리주의 철학으로 전화시킨 것이다. 후설은 칸트에게 존재하는 유물론적 요소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칸트는 비록 경험론에 대립해 있지만, 여전히 영혼에 관한 해석과 심리학의 과제영역에 관한 해석에서 곧바로 그 경험론에 의존한 채 남아 있으며, 그는 자연화된 영혼 즉 자연의 시간과 시간-공간성 속에서 심리-물리적 인간의 구성요소로 생각된 영혼을 영혼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이다.”13) 칸트의 영혼 개념이 여전히 경험론 즉, 유물론적 요소를 담고 있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후설은 이렇게 칸트에게 남아있던 유물론적 요소를 제거하면서 선험철학을 주관성으로 되돌아가는 철학으로 규정한다. “선험철학은 학문 이전의 객관주의와 학문적 객관주의에 대립해서 모든 객관적 의미형성과 존재타당성의 근원적 터전인 인식하는 주관성으로 되돌아가는 철학…”14)이라고 규정한다. 이리하여 후설의 현상학의 주관적 관념론적 성격이 드러난다. 후설은 명확하게 세계가 아닌 주관성을 일차적인 것으로 놓는다. “그 자체에서 제 1의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자명한 세계의 존재가 아니다. 말하자면 무엇이 세계에 객관적으로 속해 있는가 하는 단순한 물음이 제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로 제 1의 것은 주관성이다.”15), “어떠한 자연의 현존도 의식의 현존을 제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연의 현존은 실로 그 자체로 의식의 상관자로서 밝혀지기 때문이다. 자연의 현존은, 오직 규칙적인 의식연관들 속에 구성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16) 세계의 존재가 아니라 주관성이 제 1의 것이며 자연의 현존은 의식연관에 달려 있다는 것은 명확한 주관적 관념론이다. 이렇게 후설은 칸트에게서 유래하면서도 그것을 주관적 관념론으로 명확히 방향지웠다. 그러나 후설은 자신은 버클리와 같은 주관적 관념론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는데 주관적 관념론도 각양각색인 것은 불가피하다.

주관적 관념론의 입장에서 객관적 진리에 대한 회의는 불가피한데 후설은 객관적 진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문을 제기한다. “학문적 진리 즉 객관적 진리는 오로지 세계, 다시 말하자면 물리적 세계와 마찬가지로 정신적 세계가 사실상 무엇인지를 확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학문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객관적으로 확정가능한 것만을 참이라고 간주한다면, 만일 역사가 정신적 세계의 모든 형태 즉 그때그때 모든 인간의 삶을 지탱하고 구속하는 이상들, 규범들이 일시적 파도와 같이 형성되고 다시 소멸하는 것이며, 이것은 과거에도 항상 그러하였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따라서] “이성은 무의미로 되고 선행은 재앙으로” 되는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뿐이라면, 세계와 그 속에 사는 인간의 현존은 과연 의미가 있을까?”17) 후설은 인간사회의 이상들, 규범들 등을 들며 이것들은 객관적 진리에 속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객관적 진리만이 참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을 무의미하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상과 규범이 의미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현상인데 후설의 주장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객관화될 수 없고 객관적 진리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주관적 관념론의 입장에서 이데올로기 현상은 객관적 영역에 포함되지 않지만 유물론의 입장에서는 이데올로기도 객관의 반영이므로 객관적 진리의 영역에 포함될 수도 있다. 또한 객관적 진리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의미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후설의 주장은 인간 삶의 핵심으로서 정신, 이데올로기라는 현상은 객관적 진리와 무관하고 따라서 주관성이 핵심이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주관적 관념론에서는 객관적 진리가 회의되고 위축되고 부정되게 된다. 그러나 객관적 진리는 과학의 성과이며 과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고 역사의 진보의 기둥이 되는 것이다. 칸트에게서 존재하던 객관성과 유물론의 요소를 거세한 후설은 객관적 진리에 있어서도 주관적 관념론의 입장을 보인 것이다.

그러면 후설이 모든 과학을 부정하면서 대안으로 제시하는 현상학의 논리를 살펴보자. 후설이 일체의 과학을 부정하는 논리는 기본적으로 사실학문과 본질학문을 나누는 것이다. 기존의 자연과학과 역사과학은 사실학문이며 현상학만이 본질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형이상학적인 주장이며 사실과 본질 사이의 연관을 무시하는 것이다. 후설은 현상 즉, 사태 자체가 본질이며 직관을 통해 현상을 파악하는 것이 진정한 학문, 현상학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현상은 본질 자체가 아니며 현상은 본질로 통하는 통로로서 역할한다. 현상을 통해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 과학적 태도이고 변증법적 태도인데 모든 과학을 부정하는 후설은 사태 자체에 대한 직관을 통한 본질파악을 제일로 친다. 후설이 과학을 부정하는 방법은 흥미로운데 그는 세계에 대한 이해, 과학적 이해에 대한 ‘판단중지’를 방법으로 내세운다. “요컨대 우리는 객관적인 이론적 관심 전체에 대한 판단중지, 즉 객관적 학자로서뿐만 아니라 또한 단순히 지식을 열망하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고유한 목적추구나 행동들 모두에 대한 판단중지를 수행한다.”18),“내가 세계의 존재나 비존재에 관한 모든 태도결정을 중지하더라도, 내가 세계에 관련된 모든 존재타당성을 단념하더라도, 어쨌든 이 판단중지의 내부에서는 모든 존재타당성이 나를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19) 여기서 판단중지라는 개념은 주관이 객관세계를 지워버리는 방법이다. 객관세계에 대해 판단중지하고 혹은 괄호를 쳐서 순수주관의 영역을 확보하는 방법이다. 그리하여 “판단중지라는 이제까지 우리의 방법에 의해 모든 객관적인 것은 주관적인 것으로 변경되었다.”20) 판단중지는 단순히 주관이 객관에 대해 거리를 두면서 객관을 인식하여 객관의 주관화를 이루는 방법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판단중지는 객관세계의 존재를 지우는 것이다. “세계에 관련된 존재타당성을 단념”한다는 것으로서 판단중지는 객관에 대한 단순한 주관적 인식이 아니라 객관의 존재를 지우는 것이며 그를 통해 선험적 혹은 순수한 주관의 영역, 순수자아를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객관과 주관의 연관성은 단절되고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현상 세계와 이데아의 세계가 분열되는 것처럼 객관세계의 영역과 현상학적 영역이 구분되게 된다. 또한 판단중지는 주관에 대한 객관세계의 일차성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객관에 대한 주관의 일차성을 확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판단중지라는 방법은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맞닿아 있는데 실제로 후설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연상시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자연에 관한 완전히 이성화한 경험학문의 이념, 즉 이론화함을 통해 이 이론화함 속에 포함된 모든 특수한 것이 자신의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원리적인 근거들로 소급될 정도까지 진척된 경험학문의 이념을 형성한다면, 이때 이 이념을 실현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에 상응하는 형상적 학문을 완성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점이 분명하다.”21) 경험학문, 즉, 자연과학과 역사과학 등의 학문의 발전은 그에 상응하는 형상적 학문의 발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형상이라는 용어는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등에게서 나타나는 용어인데 모양, 꼴 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용어를 써서 후설은 경험학문과 형상적 학문이라는 이원론을 구사하는데 경험학문, 즉, 현실적 과학의 발전은 그 자체의 논리와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 있는 이데아의 세계처럼 형상적 학문의 발전 혹은 완성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는 명백히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차용한 것인데 후설은 이 혐의를 부정한다. 그러나 후설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현상학의 관념이 이데아론을 차용한 것은 명백하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는 현실세계의 모든 대상에 상응하는 이데아가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데 후설은 현실의 각 개별과학과 현상에 상응하는 각각의 현상학과 현상학적 관념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예를 들어 물리적 자연이 배제되고 있지만, 반면 그럼에도 자연과학적 경험작용과 사유작용의 측면에서 자연과학적 의식의 현상학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의식의 상관자인 자연 자체의 현상학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속한다. 마찬가지로, 비록 심리학과 정신과학이 배제함에 관련되더라도, 인간의 현상학, 그 인격의 현상학, 그 개인적 속성의 현상학, 그 (인간의) 의식경과의 현상학도 존재한다. 더 나아가 사회적 정신, 사회적 제도, 문화형성물들의 현상학도 존재한다.”22) 각각의 개별학문에 상응하는 형상적 학문이 현상학으로서 각각 존재한다는 것은 이데아론의 판박이이다. 또한 이데아의 세계가 현실세계를 규정하는 것처럼 현상학의 영역과 관념들이 그에 상응하는 현실적인 각 개별 학문의 발전을 규정한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이데아론을 적용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후설의 주장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비합리주의에 다름 아니다. 즉, 비합리주의로까지 나아간 주관적 관념론이라 할 수 있다.

후설은 판단중지를 통해 순수자아를 도출하는데 순수자아는 그 내용을 보면 공허한 관념에 지나지 않는데 후설 스스로 이를 말하고 있다. “만약 내가 현상학적 판단중지를 수행한다면, 자연적 정립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나[자아], 인간’은 배제함의 수중에 떨어지고, 이때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지닌 순수한 작용체험은 뒤에 계속 남아 있다. … 그 체험들은 ‘순수 자아의 체험’으로서 순수 자아에 ‘속하며’, 순수 자아의 의식배경이고 또 순수 자아의 자유의 장이다. … 순수 자아의 ‘관련방식들’이나 ‘행동방식들’을 제외하면, 순수 자아는 본질의 구성요소들에서 완전히 공허한 것이고, 해명될 수 있는 어떤 내용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그 자체에서 또 그 자체만으로 무엇이라 기술할 수 없는 것이다. 즉 그것은 순수 자아일 뿐이며,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23) 판단중지를 해야만 현실세계를 괄호치고 현상학적 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데 현상학적 영역의 핵심인 순수자아는 아무 내용도 없는 공허함이라는 것이 후설의 주장이다. 주관적 관념론이 도달한 핵심 개념인 순수자아가 아무 내용도 없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세계를 괄호쳐서(판단중지해서) 제거했기 때문이다. 객관세계와의 관련성을 상실한 순수자아는 내용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자연과학(자연주의 철학), 역사과학(역사주의 철학), 세계관 철학에 대한 부정을 기치로 들고 나왔고 학문과 철학의 위기를 부르짖었으나 그 위기는 칸트의 선험철학으로 대표되는 지배적 철학과 형이상학의 붕괴에 다름 아니었으며 나아가 과학적 심리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의식, 심리가 과학의 영역이 되면서 느끼게 된 위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후설에 의한 현상학의 창시는 철학사에서 반동이었으며 그 내용은 비과학적인 내용으로 점철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칸트의 선험철학을 주관적 관념론으로 개작하면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차용하였고 현실 배후의 현상학으로써 현실의 과학과 학문 발전을 규정하려 했다는 점에서 독단적이었다 할 수 있다.

4.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후설의 제자로 출발했으나 ≪존재와 시간≫이라는 저서를 발표하여 독자적 입지를 굳혔다. ≪존재와 시간≫은 존재론을 표방하였고 이후 샤르트르 등으로 이어지는 실존주의의 원천이 되는 것이었다. 실존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인간 존재의 불안정성 등을 존재론의 입장에서 다루었으며 1차 대전 이후의 독일사회의 불안정성을 철학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나찌가 등장했을 때 적극적으로 동조하기도 했고 반유대주의를 표방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전범으로 처벌되지는 않고 학문적 삶을 계속할 수 있었다.

후설은 현상학을 표방했는데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론에 의존하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존재 일반’의 문제에 천착하는 존재론의 영역을 개척해 갔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개념이 명확한 개념이 아니라 어두운 개념이며 따라서 규명이 필요한 개념이라고 본다. “사람들이 ‘존재’는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물에 대한 이 보편적ㆍ직접적 개념이 가장 명백하고 더 이상의 어떠한 논의도 필요로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개념은 오히려 가장 어두운 개념이다.”24) 그리하여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를 묻는 이론, 존재 일반을 탐구하는 존재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존재론이란 어떤 존재론상의 학파나 경향에 쏠리지 않으면서 가장 넓은 의미에서 생각하는 탐구방식이다. … 존재론적인 물음은 실증과학과 같은 존재적인 물음에 비해 더 근원적인 물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특정한 존재자의 존재를 물으면서 존재일반의 의미를 구명하지 못한다면 역시 그 자체도 소박함과 불투명성을 벗어나지 못한다.”25) 여기서 하이데거는 존재론을 ‘존재일반의 의미를 구명’하는 이론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론이 과연 과학으로서 성립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모든 과학은 자신의 구체적 대상을 갖고 있다. 즉, 물리학 등의 자연과학, 역사과학, 정신과학 등등은 자신의 구체적 대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과학적 영역, 학문으로 성립하는 것인데 ‘존재 일반’이라는 무규정적 대상을 갖는 존재론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더구나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는 객관적 실재로서의 존재, 객체적 성격을 갖는 존재가 아니라 ‘사유가 곧 존재’라고 보는 고대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관점에서의 존재 개념이다. “철학은 옛날부터 진리를 존재와 나란히 취급해 왔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자의 존재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인데, 그는 존재란 곧 존재를 수용하면서 이해하는 작용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런고로 사유와 존재는 동일한 것이다.”라고 말했다.”26) 사유=존재라고 보는 파르메니데스와 동일한 관점에서 하이데거는 존재론을 펼치는데 그런 점에서 그의 존재론은 과학적 성격을 갖기 어려운 것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론의 핵심 개념으로 현존재를 내세운다. 일반적으로 철학에서 현존재는 시ㆍ공간에서 존재하는 현실적 존재를 가리킨다. 그러나 하이데거에게서 현존재는 이와 다르다. “물음이라는 존재가능성을 지닌 존재자를 우리는 술어적으로 현존재라고 부르기로 한다.”27) 즉,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객관적인 시ㆍ공간 속에서 존재자로서의 현존재가 아니라 추상화된 존재자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 자체가 파르메니데스적인 경향을 띠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존재 개념을 세운 하이데거는 현존재 개념을 기초로 실존 개념을 세운다. “현존재의 ‘본질’은 그것의 실존에 있다. 따라서 이 존재자에게서 이끌어 낼 수 있는 성격은, 이러저러한 ‘형상’을 띠는 객체적 존재의 객체적 ‘속성’ 같은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현존재에게 있을 수 있는 존재 방법이며 또한 그것뿐이다.”28) 여기서 실존은 현존재가 그때그때 띠게 되는 존재 방법 혹은 존재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실존 개념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전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는 실존 개념과 객체성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실존범주와 카테고리는 존재의 여러 성격 중 근본적 양태가 같은 두 가지 부류이다. 거기에 해당하는 존재자는 일차적으로 물음을 받을 때에 각각 다른 양식을 요구한다. 한쪽은 누군가로 불리는 존재자인데, 그 존재는 실존이다. 다른 쪽은 무엇인가로 불리는 존재자로, 그 존재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객체성이다.”29) 누군가로 불리는 존재라는 것은 주관성과 결합된 존재라는 의미이며 반면에 무엇인가로 불린다는 것은 객관적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현존재와 실존 개념을 세운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본성을 ‘세계-내-존재’로 보면서 세계성, 내-존재 등의 개념을 전개한다.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중심적 개념인데 그가 이해하는 세계는 객관적 실재로서의 세계가 아니다. “실존 범주로서 세계 ‘곁에 있는’ 존재들은, 출현하는 사물들이 한곳에 늘어서 있는 듯한 객체적 존재를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30) 즉 하이데거의 세계 개념은 객관적 실재가 아닌 실존론적 개념이다. 그리하여 그는 “현존재의 본질 구조로서의 세계-내-존재가 이해되기 시작하면, 현존재의 실존론적 공간성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31)고 본다. 이렇게 하이데거의 세계 개념과 공간 개념은 객관적, 과학적인 세계 개념이 아니라 실존 개념을 매개로 한 주관화된 세계 개념, 공간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인식의 의미에 있어서도 실존론적인 경향을 보인다. “인식이 무엇보다 먼저 주관과 ‘세계’와의 교제를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며, 또한 이 ‘교제’는 세계가 주관에 미치는 영향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인식이란 세계-내-존재에 기초한 현존재의 한 상태이다.”32) 세계가 주관에 미치는 영향으로서의 인식은 유물론적인 인식론인데 하이데거는 이를 부정하고 인식은 현존재의 한 상태라는 주관적 입장을 보인다.

그러면 하이데거가 이해하는 세계는 과연 무엇인가? 그는 “세계일반의 세계성”을 목적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실존론적으로 구성한다. “‘세계성’은 일종의 존재론적 개념이며 세계-내-존재의 한 구성계기의 구조를 가리킨다. … 따라서 세계성이라는 것도 하나의 실존범주이다.”33) 즉, 하이데거의 세계는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객관적 실재가 아니다. 나아가 하이데거는 자연이라는 개념으로는 세계성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환경세계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그것을 매개로 세계성의 개념에 접근한다. “일상적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세계는 환경세계이다. 우리의 근본적 탐구는 이 평균적인 세계-내-존재의 실존론적 성격인 환경세계에서 출발하여 세계성 일반의 이념으로 나아가게 된다.”34) 여기서 하이데거는 환경세계의 의미를 구체화하기 위해 ‘도구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자신을 둘러싼 환경세계에서 만나는 존재자들이 도구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주목한다. 또한 도구는 어딘가에 사용된다는 점에서 취향성을 띠게 되는데 이 도구성이라는 개념과 취향성이라는 개념을 결합하여 실존론적인 세계성 개념을 정립한다. “취향성이라는 존재양식 안에서 존재자를 만나게 하는 작용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서의 자기 지시적인 이해작용이 행하여지는 것, 바로 그것이 세계라고 하는 현상이다. 따라서 현존재가 자신을 그리로 지향하게 하는 기초가 되는 것의 구조가 곧 세계의 세계성을 구성한다.”35) 도구는 그것을 사용하게 하는 지시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취향성과 결합한 이러한 지시적 관계를 통해 주체, 현존재는 일정한 방향을 지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가 객관적 실재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세계성은 현존재를 어떤 방향으로 지향하게 하는 구조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 개념과 세계성 개념은 주관적 관념론으로서의 세계개념이라 할 수 있다. 주관과의 연관에 의해서 규정되는 객관과 세계라는 이러한 접근은 전형적인 주관적 관념론이라 할 수 있다.

세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이렇게 주관적 관념론의 입장을 보이는 하이데거는 외부세계가 객관적 실재로서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정당하건 부당하건 ‘외적 세계’의 실재성을 믿는다는 것, 충분하건 불충분하건 이러한 실재성을 증명한다는 것, 명료하건 불명료하건 이 같은 실재성을 전제한다는 것, 이러한 시도는 그 고유의 기반을 완전히 통찰하면서 제어하지도 못한다. … 과연 외부세계는 눈앞에 존재하는가, 또 증명될 수 있는가, 이를 묻는 의미에서의 ‘실재성의 문제’에 대한 답은 불가능하다.”36) 외적 세계의 객관적 실재성의 승인은 유물론적 입장을 의미하는데 주관적 관념론의 입장을 갖고 있는 하이데거는 이에 답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도 주관적 관념론의 입장을 보인다. “진리는 한편의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에 동화한다는 의미에서의, 인식작용과 대상과의 일치라는 구조를 전혀 갖추지 않았다.”37) 기존에 진리는 인식(개념)과 대상의 일치라는 것이 지배적 견해였는데 하이데거는 이러한 진리개념을 정면에서 부인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진리란 ‘사상(事象) 그 자체’라고 하는 현상학적 개념을 내세운다. “진리란 ‘사상 그 자체’, 즉 자기를 스스로 표시하는 그 당사자, 다시 말하면 ‘자신이 어떻게 발견되어 있는지를 표시하는 존재자’를 의미한다.”38) 진리란 사상(사태) 그 자체라는 것은 후설에게서 유래하는 것이다. 현상이 곧 본질이며 그것은 직관을 통해 인식된다고 하는 후설의 입장에서는 진리는 직관을 통해 사상(사태) 그 자체, 현상=본질을 직접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개념과 대상의 일치라는 진리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후설과 하이데거의 입장은 진리에 대한 주관적 관념론에 다름 아니다.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진리가 주관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한다. “진리는 현존재가 존재하고 있는 한, 또 그런 동안에만 ‘존재한다’. 존재자는 대체로 현존재가 존재하고 있는 동안에만 발견되며 개시된다. 뉴턴의 법칙이라든지 모순 원리 같은 모든 진리 일반이 참인 것은 현존재가 존재하고 있을 동안뿐이다.”39) 진리가 현존재, 즉, 주관에 의해 규정된다고 하는 이런 주장은 명백한 비합리주의인데 직관을 통해 사태 그 자체를 파악한다는 하이데거의 인식이 진리의 문제에서 이러한 비합리주의를 초래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입장은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직관을 통한 사태 그 자체의 파악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객관적 진리로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객관적 진리에 대한 부정은 존재론이 과학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 주관적 관념론의 입장을 보인 하이데거는 실존 개념에 입각하여 이후 실존주의의 원천이 되는 많은 개념들을 전개한다. 대표적인 것이 피투성이다. “이 존재 성격, 즉 이러한 ‘현존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존재자가 그의 ‘거기에’로 ‘내던져져 있다’라고 부른다. 즉 그것은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현(거기에)’ 존재한다고 할 그런 ‘피투성(내던져짐)’이다.”40)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내던져지는 존재이다라는 관념은 자신의 존재의 불안정성을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솔깃한 것이다. 1차 대전 이후 독일의 상황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이러한 불안과 불안정성을 하이데거는 실존 개념을 매개로 하여 전개하여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실존적 관념의 전개는 사실은 주체로 하여금 이성에 대한 치열한 탐구를 멈추고 자신의 존재를 회의하게 만드는 것이며 주체를 나약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존적 관념으로서 하이데거는 퇴락, 불안, 양심의 호소, 죽음에 임하는 존재 등을 전개한다.

후설의 현상학과 같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존재일반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구상이었고 그것은 과학으로 성립할 수 없었다.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이라는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 자체, 그리고 존재일반이라는 대상의 무규정성, 존재의 불안정성이라는 실존 개념의 도입, 진리문제에 있어서 주관적 관념론적인 편향 등으로 인해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하이데거는 실존주의의 사상적 원천이 되었는데 실존주의의 실천적 의미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는 인상적이다. “실존주의의 사회적 기능은 부정적이다. 이러한 성격은 소위 독일 실존주의 운동에서 두드러진다. 이 운동은 1930년대에 광범위한 부르주아 지식인과 교양 있는 소부르주아지를 지적 모험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이들이 부르주아 고전주의의 참된 인간성에 대한 이상으로부터 일탈하는 과정을 촉진시킴으로써, 쉽사리 독일 파시즘의 이데올로기와 그 실험에 감염될 수 있도록 그들을 연약하게 만들어 버렸다. … 실존주의를 선도하던 대표자들 특히 하이데거가 일찍이 독일 파시즘에 몸을 팔았음은 전혀 우연스런 일이 아니다.”41) <노사과연>


1) 후설,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 지만지, p. 20-21.

2) 후설, 앞의 책, p. 55.

3) 후설, 앞의 책, p. 71.

4) 후설, 앞의 책, p. 81.

5) 후설, 앞의 책, p. 102.

6) 후설, 앞의 책, p. 108.

7) 후설, 앞의 책, p. 112.

8) 후설, 앞의 책, p. 123.

9) 후설, 앞의 책, p. 135.

10) 후설,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한길사, pp. 73-74.

11) 후설, 앞의 책, p. 147.

12) 후설, 앞의 책, p. 149.

13) 후설, 앞의 책, p. 212.

14) 후설, 앞의 책, p. 191.

15) 후설, 앞의 책, p. 148.

16) 후설,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1≫, 한길사, p. 177.

17) 후설,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한길사, pp. 65-66.

18) 후설, 앞의 책, p. 240.

19) 후설, 앞의 책, p. 159.

20) 후설, 앞의 책, p. 303.

21) 후설,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1≫, 한길사, p. 74.

22) 후설, 앞의 책, p. 240.

23) 후설, 앞의 책, p. 265.

24)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동서문화사, p. 13.

25) 하이데거, 앞의 책, p. 21.

26) 하이데거, 앞의 책, p. 270.

27) 하이데거, 앞의 책, p. 17.

28) 하이데거, 앞의 책, p. 60.

29) 하이데거, 앞의 책, p. 64.

30) 하이데거, 앞의 책, p. 76.

31) 하이데거, 앞의 책, p. 77.

32) 하이데거, 앞의 책, p .85.

33) 하이데거, 앞의 책, p. 87.

34) 하이데거, 앞의 책, p. 89-90.

35) 하이데거, 앞의 책, p. 114.

36) 하이데거, 앞의 책, p. 262.

37) 하이데거, 앞의 책, p. 276.

38) 하이데거, 앞의 책, p. 277.

39) 하이데거, 앞의 책, p. 285.

40) 하이데거, 앞의 책, p. 175.

41) ≪철학대사전≫, 한국철학사상 연구회 편, 동녘, p. 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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