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4ㆍ13 총선과 노동자계급

채만수 | 편집위원

I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 논객들은, 누구라 할 것도 없이 그 대개가 ‘선거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칭송한다. 그들이 알고 있는 민주주의란 게 기껏 부르주아 민주주의뿐이니, ‘선거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뜻이다. 그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꽃이 오는 4월 13일에 국회의원 총선거로 전국에 만개할 참인데, 그 ‘꽃’은 프롤레타리아에게는 과연 무엇일까?

정당별 지지율을 반영하는 비례대표제가 일부 가미되어 있긴 하지만, 기본적ㆍ압도적으로 소선거구제, 즉 승자독식의 제도여서 민의(民意)를 제대로 반영하느니 못하느니1) 따위의, 혹은, 지역감정이나 영남 패권주의 운운 따위의, 혹은 또, 권력의 중앙집권이 바람직스러운가 지방 분산이 바람직스러운가2) 따위의, 문제의 본질엔 전혀 접근조차 못하는 논의들, 좀스러우면서도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 언론에 차고 넘치는 논의들은 저들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 논객들의 몫으로 제쳐놓도록 하자. 그리고 현대 독점부르주아 국가 일반에서의 선거의 특징ㆍ양상ㆍ의미에 대해서도 불가피 언급은 하되, 주요 논의는 한국 사회에서의 그것에 집중하기로 하자.

II

수수하지만 많은 꿀을 함유하고 있고, 맛있고 커다란 열매까지 맺는 꽃에서부터 화려하지만 독성이 있는 꽃, 심지어 악취까지 진동하는 꽃까지, 꽃도 꽃 나름이렸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선거가 꽃인 이유는 바로 그것이 야바위판이요 정치쑈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는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움으로써, 그리고 내용적으로는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포장함으로써 정치적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노동자ㆍ민중에 대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애초부터 협잡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선거야말로 이 협잡ㆍ야바위의 꽃인 것이다.

이 꽃은 자본주의가, 따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발전할수록 더욱 화려해지더니, 자본주의가 그 최후의 단계,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이르자 급기야 자신들의 선혈로 분칠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독점부르주아 국가의 대명사 미국의 대통령 선거판에서 요즘 서로 치고 받으며 터져 나오는 온갖 추문, 독설들을 보라.

저들이 그렇게 서로의 피로 칠갑을 하면서 싸우는 이유는 물론 권력 장악이 그 분파에게 가외(加外)의 이권을 보장하기 때문이지만, 하나의 전제, 즉 그러한 추악한 싸움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의 지배는 보장된다는 전제가 없이는 그러한 싸움은 불가능하다. 한국에서의 비근한 예를 들자면, 지난 2012년 대선에서 국정원 등 국가 정보기관의 선거 개입이 문제로 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중견 간부까지 나서서 대규모 ‘개표 부정’을 폭로하고 나섰을 때, 정작 최대의, 그리고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인 민주당3)이나 문재인 후보는 선거ㆍ투표 결과에 선선히 승복하고 나선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을 문제 삼아 싸우고 나설 경우 자칫, 부르주아 분파 간의 권력 이동 이상의 격동, 즉 이 사회에서의 부르주아 지배 자체를 위협하는 정치적 격동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가 그들을 지배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이유 말고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 있을까?

아무튼 부르주아지의 지배의 보장이라는 그 전제는 우선 무엇보다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금권(金權) 정치, 금권 민주주의라는 사실에 의해서 확보된다. 더구나 금권정치의 극치인 부르주아 선거판에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대표가 설 자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전제는 지난 세기 후반기 이래, 물론 잠재적으로야 아니지만, 적어도 현실적으로는 더욱 더 확실한 것으로 확보되어 있다. 한편에서는, 1930년대 대공황과 파씨즘, 제2차 세계대전 등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전반적 위기가 사실상 극에 달함으로써 강요받은 ‘복지국가’ 체제에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노동자계급이 안주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매체의 확산ㆍ고도화로 독점자본에 의한 대중 이데올로기 조작이 위력적으로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이 크게 후퇴하고 약화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III

부르주아 민주주의, 부르주아 선거판의 야바위판적ㆍ협잡판적 성격과 금권정치로서의 본질은 한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한국의 선거판에서는 더욱 더 극명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는 우선, 노동자계급이 ‘복지국가’ 제도에 안주했다거나 기타 이런 저런 이유로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이 후퇴하고 약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계급적 이해와 사상ㆍ이론, 강령을 내걸고 정치적으로 단결하여 당을 건설하고 권력 장악을 위해 나선다고 하는 면에서 애초부터 제국주의와 동맹한 지배계급의 극악한 파쑈적 지배로 노동자계급도, 혁명적 소부르주아계급도 철저한 정치적 무권리 상태에 있었고, 있으며, 지배 부르주아지의 입장에서 보면 그 파쑈적 지배의 실상을 부분적으로 은폐해주는 일부 소부르주아지의 어릿광대적인 ‘혁신 정치’, ‘진보 정치’를 제외하면, 사실상 부르주아의 야바위 정치쑈만이 만발했기 때문이다.

‘어릿광대적’이라는 규정에 반발하고 나설 사람이 상당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혁신 정치’, ‘진보 정치’가, 그저 어릿광대적이지 않고,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조금이라도 위협할 가능성이 있고, 그 지배에 조금이라도 생채기를 낼 가능성이 있을 때, 이 자유민주주의의 대한민국이 그것들을 어떻게 대접하는지를 상기해 보라. 그 대접은, 현 박근혜 정권하에서의 통합진보당의 해산과 이석기 의원 등의 투옥이, 그리고 사실은 자유당 시대 이래의, 특히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이나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의 수많은 정치적 옥사(獄事)ㆍ옥사(獄死)ㆍ사법살인(司法殺人)이 생생히 증언하고 있는 대로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파쑈적 억압하에 사실상 부르주아의 정치, 부르주아의 정치쑈만이 판을 치는 한국 정치이지만, 그 정치는 역시 또 불가피 철저한 금권정치이다. 파쑈적 억압하의 부르주아 정치이지만, 역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치, 즉 유권자 대중의 표를 얻어야 하는 정치이고, ‘개표 부정’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결정적으로 눈에 띌 정도는 아닐 만큼은 표를 얻어야 하는 민주주의 정치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저 명성 높았던 막걸리 선거, 고무신 선거는 이제 사실상 옛 얘기로 되었지만, 표를 얻기 위한 비용은 여전히, 그리고 유권자 규모가 커지고 정상배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 치열해질수록 더욱, 막대하기 때문이다. ― 산악회니, 친목회니, 동우회니, 동창회니, 당 지역협의회니 하는 각양각색의 당파의 조직 및 그 유지 비용, 선거 때가 되면 그 동원비용 및 선전비용 등등등. 거기에다가, 조중동문 등등의 극우 언론은 악의로, 즉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명확히 인식하면서, 그리고 대개의 소부르주아 ‘진보 언론’은 선의로, 즉 자신들의 언설(言說)과 지향이 객관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인식하지 못한 채 부르주아 민주주의,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옹호ㆍ선전해주지만, 각 분파는 분파대로 상대 분파에 대항하여 자신들을 선전해야 하기 때문에 부르주아 정치는 막대한 비용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즉, 금권정치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이나 소부르주아지가 부르주아 정치판에서 저들 부르주아지와 진지하게 경쟁하려 해봤자, 그야말로 족탈불급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한국의 부르주아 정치판이다.

IV

현재진행형의 4ㆍ13 총선판을 보자.

‘테러방지법’의 제정으로 여당인 새누리당의 인사들까지, 그리고 심지어 공안검사들까지 이른바 ‘싸이버 망명’이 속출하고 있다는 보도를 보지 않더라도, ‘테러방지법’ 그것이 기존의 여러 파쑈기구들, 헌법 위의 파쑈기구들에 더하여, 제국주의와 동맹한 독점 부르주아지의 파쑈적 지배를 더욱 강화하는 장치,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이나 혁명적 소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무권리 상태를 더욱 강제ㆍ강화하는 장치가 되리라는 것, 이번의 총선을 포함한 여러 정치쑈에서 알게 모르게 그 위력을 발휘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여기에서는 한 가지만 간단히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자.

다름 아니라, 선거도 있고 하여, 그냥 통과시켜 주면 왕사꾸라 집단이라는 치명적 낙인이 찍히는 것을 피해야 하고, 또 더러는 내부에 순진한 열혈파가 없지도 않아, 눈물까지 보이며 세계 최장의 감동적인 필리버스터를 벌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통과를 전제로 한 일대 쑈였을 뿐 아니라, 애초 이 ‘테러방지법’은 현 야당이 그 집권 시기에, 즉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 의해서 발의되었던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컨대, 과거 야당 시절에 자신(들)이 발의하여 제정한 소위 ‘국회선진화법’을 오늘날 박근혜 대통령님 각하나 새누리당이 저주하며 폐기하려 드는 것과 함께, 부르주아 정치의 협잡성, 그 파렴치성을 보여준다.

그건 그렇고, 이번의 총선판에서도 역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독점)부르주아 정파들이,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그리고 하다못해 안철수의 국민의당이 요란하게 판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부르주아 민주정파로서의 정의당이 눈에 띄긴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대세와는 사실상 전혀 무관한 존재일 뿐이다. 노동자계급의 정당, 정치적 대표는 사실상 아예 눈에 띄지조차 않는다.

아무튼 판을 지배하고 있는 (독점)부르주아 정파들 가운데, 압도적으로 승리할 거라는 자신감, 그러할 진한 가능성, 그러한 전제하에 비박이니, 친박이니, 진박이니, 진진박이니 하는 천박하기 그지없는 내부투쟁까지 벌이고 있는 초극우의 새누리당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새삼 언급할 필요도 가치도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시민들’, 그러한 ‘소부르주아들’, 그리고 그러한 소부르주아들의 이데올로기적 영향력하에 있는 많은 노동자들이 걱정 어린 눈길, 안타까워하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야당(들)에 대해서만 얘기하자면, 그들은 역시 노동자계급의 이해, 나아가 소부르주아의 이해에 대립하여 (독점)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맨 먼저 보여준 움직임은 국민의당 세력의 이탈과 ‘더불어민주당’으로의 당명의 개칭, 그리고 이른바 ‘더불어 성장’의 주창인데, 우선 당명의 개칭과 ‘더불어 성장’의 주창은 전형적인 야바위 놀음이고, 협잡이다. 자유당 시절부터 면면히 이어오는 그 세력, 그 정파를 민주당이라 부르든, 새정치민주연합이라 부르든, 더불어민주당이나 다른 무엇으로 부르든, 시쳇말로 그야말로 그 밥에 그 나물인데, 이름을 바꾸고 깃발을 바꿔서 대중을 홀리려는 수작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특히 ‘더불어 성장’이라니?! 일부 정치꾼들, 천방지축의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이른바 ‘동반성장론’과 더불어, 이는 자본과 노동 간의 적대적 이해관계를 은폐하려는 수작, 전형적인 방식의 야바위ㆍ협잡이 아닌가?!

안철수 등을 중심으로 한 국민의당 세력의 ‘새정치’ 또한 가상(嘉尙)하다. 그들이 자신들이 몸담고 있던 야당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로 내세운 것이 그 안의 ‘친노패권주의’와 “낡은 운동권적 진보정치”이니 말이다. 이는 사실상 극우 새누리당과 어떤 갈등도 없이 유화적으로 공존해야 한다는, 공존하겠다는 선언이다. 실제로 이들은 현 집권 세력과의 투쟁, 부르주아지 내부의 당파투쟁에 가장 소극적ㆍ부정적이었던 인사들이고, 그들의 새정치란 그만큼 파쑈 유화적인 정치이니, 게다가 “호남!”, “호남!” 하면서 지역주의ㆍ지역감정을 자극하는 것으로 정치적 기반을 조성하고자 하는 세력들이니 얼마나 가상한가!

그런데 안철수 등의 파쑈 유화적 ‘새정치’는 ‘전통야당’ 더불어민주당에도 강한 자극을 주어 경쟁적 움직임을 불러 일으켰다. “노회한 김종인”의 영입과 공천 관련 전권의 부여가 그것이다.

알만한 이는 다 아는 사실이지만, 김종인이 누구인가?

학살자 전두환의 국보위 출신에다 민정당 출신이요, 지난 대선에서는 바로 박근혜 선거 캠프의 핵심 브레인이었다. 그런 그를 영입하여 전권을 부여하는 야당이니, 얼마나 전통야당다운 야당인가?

그리고 그러한 그인 만큼 그의 작업은 더불어민주당 내의 강성 인사들을 배제하는 것이고, 특히 “운동권은 안 된다”가 그의 주요 방침 중의 하나이다! 바로 저, 사실은 실체도 없는 “낡은 운동권적 진보정치”를 배제ㆍ청산하는 것이 그의 방침, 그의 소명 중의 하나인 것이다.

참고로, 오늘날 야당(들)에서 조소ㆍ조롱ㆍ배제의 대상으로 되어 있는 ‘운동권 출신’ 의원 나리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말 그대로 ‘운동권 출신’의 정치꾼들일 뿐 더 이상 운동권의 인물들이 결코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운동권 출신’의 ‘운동권적 기분을 가진’ (소)부르주아 정치꾼들이요, 따라서 정통 부르주아 정치꾼들의 눈으로 보면, 영락없는 ‘아류 부르주아 정치꾼들’일 뿐이다. 그리고 아류가 정통의 조소ㆍ조롱ㆍ배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부르주아 정치판에서의 일만은 아니다.

4ㆍ13 총선에 임하는 ‘전통야당’의 상황, 그 계급적 성격이 이러하니, 여기에서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적 영향력하에 있는 많은 노동자들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는 야당에 대한 어떤 걱정 어린 눈길, 안타까워하는 눈길도 거둬야 할 때라고. 그런 눈길, 그런 애정을 보내보았자 결국은 계급적 배신이 되어 돌아올 뿐이라고.

 

V

그러면 이러한 선거판에서 노동자계급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4ㆍ13 총선을 앞두고 새삼스럽게 제기되는 것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1987년 이래, 그러니까 특히 1980년대를 거치면서 치열한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이 여러 모로 부분적이지만 노동자로서의 계급의식을 획득한 이래 거듭거듭 제기되어 온 문제, 그만큼 만만치 않고 이견이 분분한 문제이다.

과연 정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우선 앞에서 나는, 부르주아 야당에 대한 어떤 애정, 어떤 기대도 거둬야 한다고 말했다. 왜 그래야 하는가는, 앞에서 얘기한 최근의 야당 꼴 말고도,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의 경제ㆍ사회정책들이 얼마나 신자유주의적이었고, 얼마나 반노동자적이었나 하는 사실, 그 정권하에서도 얼마나 많은 노동열사들이 스러져갔던가를 상기해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ㆍ노무현 정권 시절엔 지금만큼 파쑈적이지는 않았지 않느냐’는 반론 혹은 이견이 제기될지 모른다. 그 시절엔 지금만큼은 파쑈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지금만큼은 파쑈적이지는 않았던 이유는 결코 그들의 계급적 성격, 계급적 이해가 반파쑈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반파쑈 노동자ㆍ민중이 그들을 집권하게끔 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그 반파쑈 노동자ㆍ민중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의, 즉 종속적 독점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익을 추구해갔을 뿐이고, 그만큼 ‘덜’ 파쑈적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 정권 역시 결정적일 때에는 어김없이 폭압적이었다. 다른 것들은 다 그만 두고라도, 예컨대, 미군기지 문제를 둘러싼 평택과 강정에서의 사태들이나 방사능 폐기장 문제를 둘러싼 부안 사태 등을 상기해보라.

한국의 거대 양당의, 그리고 4ㆍ13 총선판에서의 ‘거대’ 3당의 계급적 기반ㆍ이해는 사실 별반 다르지 않고, 따라서 그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정책들 또한 사실상 거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이 점은 하급의 순진한 평당원들은 거의 당적을 바꾸지 않지만, 각 당의 대통령 후보급들까지를 포함하여 국회의원급 이상의 당 고위 인물들은 사실상 거침없이 이 당 저 당을 드나든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따라서, 파쑈와의 투쟁은 노동운동의 발전에 있어서 사활적이라고 할 만큼 중요하지만, 그것은, 야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수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노동자ㆍ민중의 대중적 정치역량을 강화ㆍ발전시킴으로써 수행되는 것이다.

다시,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실, 노동자계급이, 족탈불급의 현실과 조건들을 망각한 채, 금권의 부르주아 정치쑈인 선거판을 통해서 부르주아 정치판에서의 자신의 몫을 진지하게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요, 현대 사민주의, 즉 독점부르주아지 좌파의 정치세력으로의 전락의 단초이다.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 선거판을 중시하지 않아서도 안 되고, 중시하지 않을 수도 없지만, 그것을 통해서 부르주아 정치판에서의 자신의 몫을 진지하게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대표자들, 선진 노동자들은 선거판이라는 정치적 공간을 통해서 부르주아 정치의 계급적 본질과 그 추악한 실상을 폭로하고, 그리하여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의 종속으로부터 후진 노동자 대중을 해방하고, 그들을 노동자 계급의식으로 무장시켜 노동자계급의 자주적 정치부대로 조직해내야 한다. 그러한 자주적ㆍ독자적 정치의 장으로 선거판을 활용해야 한다.

이번 총선판에서는 무엇보다도 세월호 학살의 진상, ‘노동개혁’이라는 미명하의 노동 관련 법률들의 개악, 파쑈의 강화 등등 박근혜 정권하에서 저질러진 제반 반노동자적ㆍ반인민적 정책들을 폭로하고, 또 소위 야당의 반노동자적ㆍ친제국주의-친독점자본적 성격과 정책들을 폭로하는 것이 그 주요 내용이 될 것이다.

이는 물론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저들 부르주아 권력의 억압ㆍ보복을 불러올 수도 있는 작업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임금노예의 지위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면 더욱 필요한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은 특히 협소한 노동자주의, 그 경제주의ㆍ조합주의를 넘어서 노동자계급의 과학과 사상으로 무장한 정치부대, 선진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벌여야 하는 정치적 작업인데, 이는 후진 노동자 대중의 정치의식ㆍ계급의식을 계발(啓發)ㆍ발전시킬 뿐 아니라, 선진 노동자들 자신의 정치의식, 과학과 사상을 발전ㆍ심화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한편, 지금까지의 ‘독자후보’ 전술이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사상과 의식을 발전ㆍ심화시켰다기보다는, 근본적으로는 역시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적 사정권 내에 있는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와 노동자주의를 주로 강화시켜 왔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얘기이긴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작업, 그 도정(道程)에서 ‘독자후보’ 전술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노사과연>


1) 참고로, 소위 ‘선거구제’라고 하지만, 한 선거구 당 유권자수는 수십만이다. 과반수 결선투표제조차 없기 때문에 대개 투표수의 60% 이상은 사표(死票)가 되어 버리고, 입후보자 전체에 대한 비(非)지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 기권자들까지를 감안하면, 선거구의 총유권자의 대략 30% 내외의 지지를 받은 자가 총유권자를 대표한다고 나서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 때문에 “승자 독식” 운운의 문제가 제기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부르주아 민주주의, 부르주아 선거제도의 정당성을 절대시한 위에서만,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부르주아 선거제도 자체라는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위에서만 의의를 갖는 논의이다.

2) 예컨대, “대통령 권력의 오ㆍ남용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정권교체뿐인가? … 단 한번이라도 그런 승자 독식의 타파를 위한 정책을 의제로 제기한 적은 있었는가? 모든 권력이 중앙에 집중돼 있기 때문에 중앙을 차지해야 한다는 게 유일한 대안인가? 너희들이 한 짓을 우리도 권력 잡아 해보겠다는 게 우리의 비전과 꿈이 되어야만 하는가? 지방은 언제까지 중앙권력 쟁탈전을 위한 인질이 되어야만 하는가? 중앙권력을 지방으로 분산함으로써 아예 승자 독식 모델을 깨버리는 싸움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강준만 칼럼] 바보야, 문제는 ‘승자 독식’이야!”, ≪한겨레≫ 2016. 3. 7.)

3) 한국의 부르주아 양대 정당은 하도 자주 명칭을 바꿔대니, 당시의 정확한 명칭이 무엇이었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로(勞)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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