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흐루쇼프가 거짓말했다(25)

그로버 퍼(Grover Furr)
번역: 편집부

부록
─ 1차 자료들과 다른 자료들로부터의 인용들

11. 1934년 12월 1일, 예누끼제(Enukidze)가 서명한 “지령”

흐루쇼프:

“1934년 12월 1일 저녁에, 스딸린의 결정으로(정치국의 승인 없이 이틀 뒤에 통과되었다. 일상적으로)…”

흐루쇼프 연설에 대해 비평안을 단, 1989년에 나온 러시아어로 된 책(ed. Ayermakher, K., ed. Doklad N.S. Khrushcheva o Kul’te Lichnosti Stalina na XXs”ezde KPSS. Dokumenty. Moscow: ROSSPEN 2002)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각주 11):

이것은 쏘련 중앙집행위원회의 1934년 12월 1일 법령인 “테러리즘 활동을 준비하고 지시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는 올바른 방법에 관하여”에 대한 것이다. 이 법령은 나중에 “1934년 12월 1일 법률”로 불렸고, 1956년까지 시행되었다. 문제의 이 법령은 쏘련의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 승인을 받기 위해 제출─ 쏘비에트 헌법은 그런 절차를 요구한다 ─되지 않았다.

볼꼬고노프의 원본 문서들 가지고 만든 온라인상의 문서들을 보라. http://chss.montclair.edu/english/furr/research/12_01_34_law.pdf

12. 흐루쇼프는 끼로프(Kirov) 암살 사건에 스딸린이 연루되었다고 암시한다

흐루쇼프:

“우리는 오늘날까지 끼로프의 암살을 둘러싸고 있는 정황이 불가사의하고 모호한 많은 것들을 숨기고 있고, 가장 조심스런 조사가 요구된다고 주장해야 한다. 끼로프의 암살자인 니꼴라예프(Nikolaev)가, 끼로프를 보호하는 것이 의무인 사람들 중의 몇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는 의심을 할 만한 이유가 있다. 암살이 일어나기 한 달 반전, 니꼴라예프는 의심스러운 행동 때문에 체포되었지만 풀려났고 심지어 조사도 받지 않았다. 끼로프를 보호하기 위한 임무를 부여받은 체끼스트(Chekist)가 1934년 12월 2일 심문을 받기 위해 소환을 앞두고 있었을 때, 자동차 “사고”로 죽었는데 그 사고에서 다른 동승자들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이것은 대단히 의심스러운 정황이다. 끼로프가 암살된 후 레닌그라드 내무인민위원회의 최고위직 관리들은 아주 가벼운 선고를 받았지만, 그러나 1937년에 총살을 당했다. 끼로프의 암살을 조직한 사람의 흔적들을 덮어버리기 위해 그들을 총살했다고 우리는 추정할 수 있다.”

수도쁠라또프:

“끼로프의 암살에 스딸린이나 비밀경찰(NKVD)이 연루되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어떠한 문서나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끼로프는 스딸린을 대체하는 사람(alternative, 경쟁자: 역자)이 아니었다. 그는 가장 충실한 스딸린주의자 중의 한 명이었다. 나중에 고르바쵸프는 반스딸린 운동을 하면서 흐루쇼프의 주장을 인정하고 이용하였다.”
— Razvedka i Kreml’. Moscow, 1996, pp. 60-61.

알라 끼릴리나(Alla Kirilina):

“… “모든 것이 용납되고”, 저자들이 (증거: 역자) 문서들을 찾는 수고를 하지 않고, 1934년 12월 1일에 발생한 일에 대해서 사실에 근거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수고를 하지 않고, 소위 말하는 다원론적(pluralism) 논문들이 발표되는 오늘날의 상황. 그들의 주요 목표는 ‘스딸린이 끼로프를 살해했다’는 것을 여전히 다시 선언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주장을 입증할 일차 자료도 이차 자료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그들은 신화, 전설, 풍문을 다양하게 이용한다.”
— Neizvestniy Kirov. Moscow, 2001, p. 304. 이 책의 335페이지에서 끼릴리나는, 스딸린이 끼로프의 살해를 지시했다는 풍문의 출처는 뜨로츠끼라고 폭로한다. 이것은, 흐루쇼프와 뽀스뻴로프가 이 문제에 대해서 뜨로츠끼를 재탕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게티(Arch Getty):

“끼로프에 대해서, 그리고 특별한 명령 없이:
1. 수년 동안, 끼로프의 살해에 대해서 세 가지 그리고 아마도 네 가지의 “정선된(blue ribbon)” 연구가 있었다. 각각은 정치국 총비서로부터 조사를 위임받았다 그리고 각각은, 쏘비에트의 고유한 방식으로, 원하는 결론을 미리 가지고 시작되었다. 스딸린은 그것을 지노비에프와 뜨로츠끼의 탓으로 돌리기를 원했다; 흐루쇼프와 고르바초프는 그것을 스딸린의 탓으로 돌리기를 원했고, 거기에 맞추어서 그들 모두는 조사자들을 직접 골랐다. 그러한 조사 작업들로부터 나온 문헌적 자료에 필자가 정통해지면서, 세 번의 조사 모두는 원하던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는 것이 (내게는: 역자) 분명해졌다. 특별히 흐루쇼프와 고르바초프 시대의 작업은 대량의 공문서와 인터뷰 자료를 제시하지만, 스딸린이 그 살해의 배후에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데에 실패한다. 스딸린의 작업은, 물론, 반대파들의 소행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그 조사들은 모스크바 재판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신뢰하기 힘든 피고들의 자백을 별도로 하면, 이러한 선험적인 결론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2000년 8월 24일, H-RUSSIA의 토론 목록에서. http://tinyurl.com/hjput

13. 1936년 9월 25일 공산당 정치국에 보낸
스딸린과 쯔다노프(Zhdanov)의 전보

흐루쇼프:

“1936년 9월 25일 소치(Sochi)에서라고 날인된 스딸린과 [안드레이(An-drei)] 쯔다노프의 전보가 까가노비치, 몰로또프와 정치국의 다른 위원들에게 보내진 후, 1936년 말경부터 대규모 숙청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전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예조프 동지가 내무부 인민위원회의 수장에 임명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긴급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야고다(Yagoda)는 뜨로츠끼파-지노비에프파 연합을 폭로하는 데 무능하다는 것을 그 스스로 결정적으로 증명했다. OGPU(쏘련의 비밀경찰기구, 내무인민위원회의 하부 부서: 역자)는 4년을 미적거리고 있다. 모든 노동자 당원들과 내무인민위원회의 대표자들 대다수가 이것을 말한다.

대규모 숙청을 하는데 “내무인민위원회가 4년을 미적거리고 있다”는 것과 태만한 작업과 관련해서 “따라 잡을” 필요성이 있다는 스딸린주의자의 공식화는 내무인민위원회 요원들을 직접적으로 대규모 체포와 처형의 길로 밀어 넣었다.”

전보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흐루쇼프는 “비밀연설”에서 그 일부분을 읽었다.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모스크바.
까가노비치 동지, 몰로또프 동지, 그리고 다른 정치국원들에게

첫째, 우리는 예조프 동지가 내무부 인민위원회의 수장에 임명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긴급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야고다(Yagoda)는 뜨로츠끼파-지노비에프파 연합을 폭로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충분한 역할을 분명하게 보여주지 못했다. OGPU(쏘련의 비밀경찰기구, 내무인민위원회의 하부 부서: 역자)는 4년을 미적거리고 있다. 모든 노동자 당원들과 내무인민위원회의 주(州) 대표자들 대다수가 이것을 말한다. 아그라노프(Agranov)는 내무부 인민위원회에서 예조프의 대리인(부대표, deputy)으로 남을 수 있다.
둘째, 우리는, 리꼬프가 통신부의 인민위원에서 제명되고, 야고다가 통신부의 인민위원에 임명되는 것이 필요하고 긴급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설명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로 명확하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는, 로보프(Lobov)를 제명하고, 북부 지역 위원회 비서인 이바노프(Ivanov)를 목재산업 인민위원에 임명하는 것이 절대로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이바노프는 임학을 알고, 유능한 사람이다. 인민위원으로서 로보프는 업무에 매진하지 않았고, 매년 사업에 실패했다. 우리는, 로보프를 목재산업 인민위원인 이바노프의 제1 보좌관으로 둘 것을 제안한다.
넷째, 당 통제위원회에 관해서, 만일 예조프가 자신의 시간의 10분의 9를 내무인민위원회에 쏟을 수 있고, 당 통제위원회에서 야꼬프(Iakov A. Iakovlev)를 예조프의 제1보좌관으로 승진시킨다면, 그는 동시에 당 통제위원회의 의장에 남아 있을 수 있다.
다섯째, 예조프는 우리의 제안에 동의한다.
스딸린, 쯔다노프
번호 44. 25/Ⅸ.36.
— stalin i Kaganovich. Perepiska 1931-1936 gg. Moscow: ROSSPEN, 2001, No.827, pp. 682-3.  <http://www.hrono.ru/dokum/193_dok/19360925stal.html>과 <http://www.alexanderyakovlev.org/almanah/inside/almanah-doc/56532>를 보라.
이 책의 영어판에는 약간 다르게 번역되어 있다. The stalin-Kaganovich Correspondence. Ed. R.W. Davies, Oleg V. Khlevniuk, and E.A. Ress.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2003. No. 169, pp. 359-60.

서스턴(Thurston):

4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서방의 저술가들은, 이 구절은 류띤 각서(Ri-utin Memorandum)를 의미한다고 대개 답한다. 그러나 1936년 12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예조프는, ‘1932년 말에 테러에 기초를 둔 지노비에프파-뜨로츠끼파 블록의 형성’에 대해, 한 번 더 언급했다. [주석 83, 244페이지에서 이 페이지까지 공문서가 인용된다. Ⅵ 1/95, 5-6페이지에 인쇄된, 1936년 12월 중앙위원회 총회 기록의 일부분을 복사한 것에는 같은 내용이 언급된다. 그러나 “블록”이라는 단어는 없고, 여기에 있는 직접 인용도 없다.]. (p. 35)

얀세과 뻬뜨로프(Jansen & Petrov):

“4년”은 1932년의 뜨로츠끼주의자-지노비에프주의자 블록의 형성을 말한다. 이것은 1936년 6월-7월 이후에 적발되었다… (p. 54)

14. 1937년 2-3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의 스딸린의 보고서

흐루쇼프:

1937년 2-3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스딸린의 보고서, ‘뜨로츠키파들과 다른 표리부동한 세력(two-facers)을 해소시키는 당의 사업과 방법들에 있어서 결함’은 우리가 사회주의를 향해 전진할 때, 계급투쟁이 날카롭게(sharpen)되어야만 한다는 구실 아래 대규모 테러를 이론적으로 정당화려는 시도를 포함하고 있었다. 스딸린은 역사와 레닌이 그에게 이것을 가르쳤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스딸린의 발언과 비슷한 레닌의 언급:

계급들을 폐멸시키는 것은 장기간의 험난하고 끈질긴 계급투쟁의 문제이다. 그것은, 자본의 권력이 전복된 후에도 부르주아 국가가 분쇄된 후에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확립된 후에도 (구태의연한 사회주의와 시대에 뒤떨어진 사회 민주주의 속물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직 그것의 형태만 변화하고, 여러 측면에서는 심지어 더욱 격렬하게 된다.
레닌, “Privet vengerskim rabochim. 27 maia 1919 g.” 전집(러시아어판, Pol-noe Sobranie Sochinenii, v. 38, p. 387.) 스딸린은, 1929년 4월 그의 연설 “볼쉐비키당 내의 우익에 대하여”에서 이 구절을 인용했다; http://www.hrono.ru/libris/stalin/12-9.html

1937년 2-3월 쏘련공산당(볼)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스딸린은, 흐루쇼프가 인용한 제목의 보고를 실제로 했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주의를 향해 전진할 때” 계급투쟁은 날카롭게 되어야만 한다(must)는 주장은 그 보고서에는 결코 없다.
비밀연설에서 흐루쇼프의 이러한 왜곡에 대하여, 리차르드 꼬솔라뽀프(Richa-rd Kosolapov)는 언급한다:

사실, “스딸린주의자”라고 끊임없이 반복(비방: 역자)하는 근거가 되는, 전술한 명제는 스딸린의 보고에도, 결론을 내리는 연설에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스딸린은, “우리가 전진하는 만큼 여기(쏘련: 역자)에서의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점점 더 잦아들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성공을 성취하는 만큼 계급의 적은 점점 더 유순해질 것이다라는 썩어 빠진 이론을 분쇄하고 물리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는 것이 진실이다. 스딸린은, “계급투쟁의 한쪽 끝은 쏘련의 구역 내에서 작동하지만, 다른 한쪽 끝은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부르주아 국가의 구역으로 뻗어 있다”는 것을 역시 강조했다. 그러나 1930년대의 후반에 그는 결코 “격화이론(theory of sharpening)”을 제출하지 않았다. 당시에 쏘련에서는 사회주의 경제형태의 절대적 지배력이 확립되었고, 승리를 거둔 사회주의의 헌법이 통과되었다…

꼬솔라뽀프, “Uverenno torit’ tropy v budushchee. Doklad ‘O resheniiakh ХХ i ХХⅡs”ezdov KPSS po voprosu ‘O kul’te lichnosti i ego posledstviiakh’”. http://www.cea.ru/~shenin/news/news20.html

1937년 3월 3일 스딸린 보고서의 7번 항목, 1937년 3월 29일 ≪쁘라브다≫에 발표.

7. 우리가 전진하는 만큼 여기(쏘련: 역자)에서의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점점 더 잦아들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성공을 성취하는 만큼 계급의 적은 점점 더 유순해질 것이라는 썩어 빠진 이론을, 우리는 반드시 분쇄하고 물리쳐야만 한다.
이것은 썩어 빠진 이론일 뿐만 아니라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이론은 우리 인민의 경계심을 잠재우고, 함정에 빠뜨리며, 계급의 적들이 쏘비에트 정부에 맞서 투쟁하는 힘을 회복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앞으로 더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 큰 성과를 거두면 거둘수록, 격파된 착취계급의 잔존 분자들의 맹렬함은 더욱 커질 것이고, /30페이지/
날카로운 투쟁의 형태를 더 빨리 회복할 것이고, 쏘비에트 국가를 더욱 해치려고 할 것이고, 가망이 없는 자들의 마지막 수단으로 가장 극단적인 투쟁 수단을 더욱 더 움켜잡으려고 할 것이다.
쏘련에서 격파된 계급의 잔존 분자들은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들은, 쏘련의 외부에 있는 우리의 적들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계급투쟁의 범위가 쏘련 내부에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계급투쟁의 한쪽 끝은 쏘련의 구역 내에서 작동하지만, 다른 한쪽 끝은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부르주아 국가의 구역으로 뻗어 있다. 격파된 계급의 잔존 분자들은 이것을 모를 리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앞으로 발악적 공격을 계속할 것이다.
이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이 레닌주의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명심하고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 스딸린, Mastering Bolshevism. NY: Workers Library Pubs, 1937, pp. 1-40. http://www.marx2mao.com/stalin/MB37.html

정치 교육과 고위직 당 관리는 자신을 대체할 사람들을 선발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스딸린의 제안:

이러한 간부들의 이데올로기 수준과 정치적 활력을 높이고, 그들 속에다 준비된 신진역량을 보충하고, 그래서 우리의 지도 성원을 확대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이것을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가?
첫째 가장 먼저, 당의 단위 조직의 비서들에서부터 지역과 공화국 당 조직의 비서들에 이르기까지의 당지도자들에게, 각각은 자신들의 유능한 대리자들로 될 수 있는 두 명의 당 일꾼을 일정 기간 내에 선발할 것을 제안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그러한 사람이 없다면,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킬 만한 사람이 없다면, 두 명씩의 대리자들을 어디서 구하겠는가? 동지들, 이것은 옳지 않다. 우리에게는 수만 명의 유능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있다. 오직 필요한 것은, 그들을 파악하고 적시에 등용하여, 그들이 너무 오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하고, 썩기 시작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다음에, 단위조직들의 비서들을 당적으로 교양하며 재교양하기 위해, 각각의 지역 중앙에 4개월의 <당 훈련과정>을 개설해야 한다. 모든 당의 기초 조직(units)의 비서들은 이 과정에 보내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과정을 수료하고 돌아오면, 대리자들과 기초 조직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이 이 과정에 보내져야 한다.
다음으로, 지구 조직의 제1비서들을 정치적으로 재교양하기 위해서, 쏘련 전역에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10개의 중심지에, 8개월의 <레닌 과정>을 개설하여야 한다.
지구와 지역 당 조직의 제1비서들은 이 과정들에 보내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과정을 수료하고 돌아오면, 대리자들과 지구와 지역 조직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이 거기로 보내져야 한다.
다음으로, 시 당 조직 비서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재교양하고 정치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6개월 과정의 <역사와 당 정책 연구>를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에 개설하여야 한다. 시 당 조직의 제1비서와 제2비서들은 이 과정들에 보내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과정을 수료하고 돌아오면, 시 당 조직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이 거기로 보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에 <국내와 국제 정책 문제 회의>를 6개월 과정으로 개설하여야 한다.
지방(division)과 주(province) 조직의 제1서기들과, 각 민족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제1서기들은 이곳으로 보내져야 한다. 이러한 동지들은 우리 당의 중앙위원회 동지들을 대체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사람들을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을 양성해 놓아야 한다. 이것은 필요하며 반드시 수행되어야만 한다.
― 스딸린, Mastering Bolshevism. NY: Workers Library Pubs, 1937, pp. 36-38. http://www.marx2mao.com/stalin/MB37.html

스딸린은, 2-3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또 다른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것은 3월 5일 제출한, 결론을 내리는 보고서이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뜨로츠끼즘이라는 독일-일본 첩자들을 분쇄하고 뿌리를 뽑는 임무를 어떻게 실제로 수행할 것인가. 이것은, 진정한 뜨로츠끼파만이 아니라 한때 뜨로츠끼즘에 물들었지만 오래전에 뜨로츠끼즘을 버린 사람들까지, 타격하고 박멸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실제적인 뜨로츠끼파 파괴분자만이 아니라, 몇몇 뜨로츠끼파가 지나긴 길을 과거에 우연히 따라갔던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어쨌든, 그러한 목소리들이 여기 총회에서 들린다. 그러한 해결방안들은 올바른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모든 다른 문제들에서처럼, 이 문제에 대해서도, 개별적이고 차별화된 접근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을 같은 척도로 측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마구잡이식 접근은, 진정한 뜨로츠끼파 파괴분자와 스파이와의 투쟁이라는 대의에 해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책임 있는 동지들 중에는, 오래전에 뜨로츠끼즘을 버리고 지금은 그것과 싸우고 있는 이전에 뜨로츠끼파였던 사람들이 몇몇 있다. 그들은, 뜨로츠끼즘에 결코 물들지 않았던 우리의 존경받는 몇몇 동지들보다 못하지 않고 오히려 더 훌륭하다. 지금 그러한 동지들을 비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우리의 동지들 중에는,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뜨로츠끼즘에 항상 반대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로츠끼파 인물들과 개인적으로 접촉을 지속했었던 사람들이 또한 있다.
/44페이지/
뜨로츠끼즘의 실제적인 모습이 분명해지자마자, 그들은 즉시 그것을 청산했다. 뜨로츠끼파 사람들과의 개인적인 우정 관계를 즉시 끊지 않고 뒤늦게 끊은 것은, 물론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동지들을 뜨로츠끼파와 함께 묶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강조는 그로버 퍼]

더구나 그 보고서에서, 한 덩어리로 무차별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명확하게 반대하며, 스딸린은 같은 주장을 반복한다(pp. 58-9):

“7. 마지막으로, 여전히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나는, 개별적 당원들의 운명, 당원들의 출당, 또는 출당되었던 사람들의 권리를 회복시키는 문제에 대한, 일부 우리 당원들의 형식적이고 냉담하고 관료주의적 태도를 염두에 두고 있다.
문제는 우리 당의 일부 지도자들이 사람들에 대한, 당원들에 대한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이 적다는 데 있다. 더구나 그들은 당원들을 연구하지 않으며, 당원들이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가를 알지 못하며, 일반적으로 노동자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당원들과 당의 노동자들에게 개별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59페이지/
바로 그들이 당원들과 당 노동자들을 평가할 때, 개별적으로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대개 마구잡이식으로 행동한다. 즉 그들을 덮어놓고 마구 칭찬하는가 하면, 또 덮어놓고 마구잡이식으로 박살을 내며, 당에서 수천 수만 명을 몰아낸다.
그러한 지도자들은 일반적으로 수만 명에 대해서는 생각하려고 하지만, “단위조직들(units)”과 당원 개인들과 그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수천 수만 명을 당에서 몰아내면서도,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우리 당은 2백만의 당원을 가지고 있고, 수만 명을 당에서 몰아내는 것쯤은 당의 형편을 조금도 건드리지 못하리라고 자위한다.
그러나 사실은 지극히 반당적인 사람들만이 당원들을 이렇게 대할 수 있는 것이다.
― 스딸린, Mastering Bolshevism. NY: Workers Library Pubs, 1937, pp. 40-63. http://www.marx2mao.com/stalin/MB37.html 이 판에서는 날짜 기록이 잘못되어 3월 3일로 적혀 있다. 3월 5일이 맞다. 그러나 제목은 “결론을 내리는 연설”로 맞게 되어 있다.
부하린과 리꼬프에 대한 조사를 다루는 위원회에서의 스딸린의 보고, 1937년 2월 27. (보고서 전체를 읽으려면 다음을 보라: Getty & Naumov, 409-11; 러시아어 책, Voprosy Istorii 1/94, 12-13)

이 보고서에 대한 게티와 나우모프의 언급:

“스딸린 자신이 그러한 보고서들을 제출한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당의 역사에 첫 번째이고 유일한 것이다. 이 글은 정말로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결코 속기록으로 발표되지 않았고, 총회에서 나온 다른 기록물들처럼 당의 문서고에 전달되지도않았다… 부하린에 관한 모호하고 모순적인 결정을 담은 이 필기록은 대폭 편집되고 제한적으로 회람된 속기록에 결코 포함되지도 않았다. 그 속기록은 총회가 시작된 2월 27일― 총회가 사실상 시작되고 4일 후 ―에 나타난다. (411)

문서고의 자료들을 개척자적으로 연구한 역사학자 유리 쭈꼬프(IUrii Zhuko-v)는 1937년 2-3월 중앙위원회 총회의 미발표된 결의안을 인용하고, 거기에 대해 언급한다.

스딸린의 결론적 발언이 그러한 것처럼, 스딸린의 보고서에 기초하여 채택된 그 결의안은 “마녀 사냥”과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전 수년 동안의 관례로서, 총회 참석자들은 만장일치로 그리고 특별한 언급 없이 거기에 찬성하였다. “뜨로츠끼주의자 파시스트의 반역 활동과 간첩-파괴 활동”은 서두에서 오직 한 번 언급되었다. 그것은, 오직 당 지도자들과 당 조직의, 사업에 있어서의 심각한 결함을 예시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그 결의안은 다음과 같이 구체화할 수 있다:
1. 당 조직들은 경제활동에 들떠 있어서, 당의 정치적 지도 활동에 있어서 후퇴했고, ‘자신들에게 (농업인민위원회의 지방 기관을: 역자) 종속시켰고, 농업인민위원회의 지방기관을 지워버렸고, 그것을 당 조직으로 대체해버렸고, 그들 자신을 협소한 경제적 책임자로 바꾸어버렸다.’
2. ‘우리 당의 지도자들은 당의 정치 사업을 돌보지 않았고, 경제적인 특히 농업 캠페인에 열중했다. 그래서 점차적으로 자신의 사업의 주요 기반을 시(city)에서 주(oblast, 州)로 이전시켰다. 그들은 노동계급을 가진 도시를 정치적 문화적 지도 역량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 여러 구역들 중의 하나로 여기기 시작했다.’
3. ‘우리 당의 지도자들은 이데올로기 사업과, 당원 대중들과 비당원 대중들에 대한 당의 정치적 교양사업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4. ‘그들은 또한, 우리의 결함에 대한 비판과 당지도자들의 자기비판에 대한 비판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5. ‘그들은 또한, 당원 대중을 직접 책임지는 것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선거를 담합(cooperation)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관료주의적 중앙집권화가 초래되었다.’
6. 결의안이 또한 주목하는 간부의 사업방식에서는, ‘형식적이고 관료적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대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 상황에 따라서 대해야 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정치적 관점(그들을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 아닌가), 둘째, 그들의 사업의 관점이다(부여받은 그 사업에 그들이 적당한가 아닌가).’
7. 당 조직의 지도자들은 ‘인민과 당원들과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인민들과 당원들과 당의 노동자들과의 혼이 깃들지 않은 그러한 관계의 결과, 불만과 적대가 당의 일부분에 인위적으로 조성되고 있다.’
8. 결의안은, 당 지도자들은 교양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교양수준을 높이려고 하지 않고, 연구하려 하지 않고, 재교육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마지막으로 언급한다.
당연하게, 그 결의안은, 당 사업에 대해 이러한 방식으로 요약된 실제적 결함을 즉각적으로 제거하려는 요구로 가득 차 있다. 1항목부터 8항목까지 요지는, 지방 조직들의 월권과 책임방기를 비난하고; 당의 정치 사업을 즉각적으로 회복하고, 특히 모든 도시(city)를 정치적으로 강화하고; 출판 사업에 주의를 더욱 기울이는 것. 9항목부터 14항목까지의 요지는 ‘주 위원회, 지역 위원회, 당 토론회, 시 활동가들의 총회들이, 당지도자들에 대한 떠들썩한 찬양과 과시와 전시의 수단으로 되는 관행’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당 조직들이 총회들에 대한 책임을 회복하는 것, 당 조직에서 (선거 등에서: 역자) 담합하는 관행을 정지시키는 것. 15항목에서 18항목까지는 간부의 사업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접근이 토론된다. 19항목부터 25항목까지는 당지도자들의 교육과 재교육을 다룬다.
― 유리 쭈꼬프, Inoi Stalin. Politicheskie reformy v SSSR v 1933-1937 gg. Moscow: Vagrius, 2003, pp. 360-363, p. 560의 주석들. 다음에 있는 공문서들을 언급한다: RGASPI F.17 OP. 2 D. 612. Vyp. Ⅲ L.49 ob.-50.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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