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수 | 편집위원
누군가 전국적 독자와 영향력을 가진 일간신문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쓴다. 혹은, 그러한 일간신문의 논설위원이다. 그러한 사람이면, 그들은 분명 이 사회의 ‘최고 지식인’일 것이다. 혹은 그렇게 통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최고 지식인’인 만큼 그들의 논설, 그들의 칼럼은 대개 자못 진지하다.
자못 진지하다? 서술 형식과 그 형식에서 느껴지는, 글을 쓰는 그들의 자세가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면 내용은?
물론 많은 경우 내용 역시 진지하다. 이런 경우를 명실상부하다고나 해야 할까?
그런데, 필자 본인들한테는 좀 미안한 말씀이지만, 조중동문 같은 극우(極右紙)의 칼럼ㆍ논설도, 소위 ‘진보지(進步紙)’의 그것도, 서술 형식이나 글 쓰는 이의 자세와 달리 그 내용이 가히 코메디인 경우도 결코 적지 않다. 대개는 개살구 먹은 뒷맛을 남기는 고약한 코메디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거기까지는 좋다. 비록 개살구 먹은 뒷맛을 남기는 코메디일지라도 유독(有毒)하지만 않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 코메디가 대중을 심히 오도하는 유독한 것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더구나 그 ‘유독한 코메디’가 ‘진보지’에 실리는 그것이라면, 더욱 그러하여 그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진보지’의 그것은 대중 일반, 정치적 후진 대중뿐 아니라 수많은 선진 노동자들, 선진 대중들까지를 오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백하거니와, 나로서는 이 나라에서는 그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유독한 코메디라고 해도 달리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양심의 자유’(제19조), ‘언론ㆍ출판의 자유’(제21조), ‘학문ㆍ예술의 자유’(제22조) 등등등 국민의 온갖 권리가 헌법 제2장을 장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권리들은 어디까지나 장식일 뿐, 헌법 위의 법이 더욱 서슬 퍼렇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야말로 정말 그냥 웃어넘겨서는 안 되는 유독한 코메디들에 대해서는 비겁하지만 침묵하기로 하고, 그래도 지난 1980년대까지의 길고 긴, 지난한 투쟁을 통해서 조금은 만만해진 주제, 그러한 주제의 유독성 코메디에 대해서만 몇 마디 해보기로 하자.
목청 높은 지식인들의 어릿광대적 정신세계
아참, 본론으로 들어가지 전에 기분전환 삼아, 적어도 선진 노동자들, 선진 대중들에게는 유독하다기보다는 그저 개살구 뒷맛일 코메디 서너 가지를 먼저 소개해 보자.
그 하나: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님의 “국민행복시대, 신도시 주민도 행복하고 싶다”1)!
자신이 살고 있고 인천공항이 있는 영종도 신도시의 “교통문제 ‘걸림돌’”, 결국 “바가지 요금” 등을 해결해달라는 일종의 공개민원인데, 왜 그런 “바가지 요금” 등 “갖가지 불합리한 점[이] 드러”나는가, 그 원인을 그는 명확히 알고 있다. 그리고 그래서 더욱 코메디이다. 예를 들면,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공항철도가 민간 자본으로 건설돼 불가피한 일이라고 변명할지 모른다.” “민간 자본으로 건설한 두 다리의 통행료가 비싸기 때문에 영종도 주민에게는 인천시가 하늘도시 건설과 함께 약속한 제3연륙교, 즉 청라대교 건설이 숙원사업이다.”
그런데 류 교수님께서는 ≪조선일보≫의 사실상의 고정 칼럼니스트이고, 그리하여 이 글이 실린 칼럼의 명칭도 “朝鮮칼럼”이다. 다름 아니라, 류 교수님께서는 사실상 극우 ≪조선일보≫와 그 정치적ㆍ이념적 성향을 함께해오고 있는 인물이고, 따라서 그 ‘민자(民資) 철도’ㆍ‘민자 도로’를 있게끔 한, 그리하여 그 “바가지 요금” 등 “갖가지 불합리한 점[이] 드러”나게끔 한 신자유주의의 전투적 지지자이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리니까 ‘주민’의 이름을 팔아 “도로ㆍ교량ㆍ철도 등 사업 땐 주민 고통 해결 의지 보여줘야” 한다고 앙탈이다. 가히 코메디 아닌가?
그래도 약간의 염치는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와중에도 역시 신자유주의는 옹호되어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을 표명하는 것일까? 이렇게 눙치고 있으니 말이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예산이 부족해 민간 자본으로 신도시 주민이 필요로 하는 도로ㆍ교량ㆍ철도 등을 건설하는 사업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당국은 그 결과로 벌어질 일을 주민에게 충분히 알릴 의무가 있다. 나아가서 주민이 겪는 불편과 고통을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 해결하려는 의지와 역량도 보여 줘야 한다.
그러면서 글을 이렇게 끝맺고 계시다.
“국민행복시대, 신도시 주민도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국민행복시대, 신도시 주민도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국민행복시대, 신도시 주민도 행복하고 싶다”? ― 이 말은 말할 나위도 없이 영종도 신도시 주민을 제외하면 국민 모두가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과연 코메디일까, 아닐까?
이 글의 독자 대부분은 분명 코메디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아아~니, 금수저ㆍ흙수저니 헬조선이니 하는 소리가 높고, 생활고에 절망한 일가족 자살이 속출하는 판에 국민 모두가 행복한 시대라니! 순 미XX 아냐!?” 하고 분기탱천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코메디만은 아닐 수도, 분기탱천할 일만은 아닌 발언일 수도 있다. 예컨대, 박근혜 대통령님 각하께서 심심치 않게 내뱉으시는 말씀을 상기해 보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는가? 대략 뜻만 따서 ‘인용’하자면, “지지해주시고, 성원해주시는 국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말이다! 즉, 저들 극우에게는 우선 무엇보다도 자신들을, 따라서 자신들이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독점자본, 재벌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국민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그들에게 있어 자신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국민인가? 물론 아니다. 스스로의 곤궁하다 못해 비참한 경제적ㆍ사회적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무지 때문에, 정치ㆍ사회의식의 후진성 때문에 자신들을 지지하는 무지렁이들 역시 저들에게는 물론 국민이 아니다. 저들에게 국민이란 결국 독점자본, 재벌을 위시한 이 사회의 극소수 부유층, 권력층이며, 그 이데올로기적 대표자들이다. 그리고 “은퇴를 앞둔” 저 학식 높으신 노(老)교수님이야 진즉부터 그러한 국민의 일원이 아니었던가!
그러하니, 당연하다는 듯이 “국민행복시대”를 구가할 수밖에!
그 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님의 ‘공산주의는 아편 같은 종교였다’2)!
‘진보지’ ≪한겨레≫의 단골 칼럼니스트인 천하의 ‘진보 논객’ 강준만 교수님께서는 이렇게 일갈하신다.
카를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지만, 정작 아편 같은 종교는 공산주의였던 게 아닐까? 세계 곳곳에서 공산주의 혁명과 집권의 와중에서 벌어진 잔혹한 인명 살상과 인권 유린은 그 어떤 종교적 신념에 중독되지 않고선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반대편에선 ‘공산주의 공포’로 인해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으며, 이 또한 종교적 확신에 따른 것이었다.
아무리 은유라고 해도 천하의 강 교수님께서 이렇게 진지하게 “종교”, “종교적 신념”, “종교적 확신”을 말씀하실 때, 당신께서 과연 ‘종교’의 의미, 그 요건을 알고나 계신 것인지 적이 의심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가 ‘신문방송학과 교수’이시고, 따라서 ‘신문방송’이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이용되는지, 이데올로기 형성에 어떤 역할ㆍ기능을 하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 혹은 잘 알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말이다. 위 발언 속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에 대한 반성적 사고, 혹시 제국주의자들의 선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적 사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강 교수님께서는 이른바 양비론적 ‘비판’에 대한 전투적 비판자이시기도 하신 것 아닌가? 그런데 위 말씀이 설마 ‘양시론’(^^) 혹은 비(非)양비론은 아니겠지요?
교수님의 표현을 빌려 말씀드리자면, “현재 새누리당 내부에 울려 퍼지는 ‘박 타령’”이 아무리 “코미디라고 하기엔 너무 슬픈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을 비판하시고자 하시는 교수님의 의욕이 아무리 절절하시다 하더라도 교수님의 코메디 역시 “코미디라고 하기엔 너무 슬픈[?] 이야기”군요!
불초 소생이 변명을 하나 해드리리다. 신문방송학이란 그 대상 자체가 고유의 발전법칙을 가지지 않는 것이어서 과학이 아닌 탓이라고.
그리고 불초 소생이 볼 때, 교수님께서는 나오는 대로 내뱉으시기 전에 자신의 사고ㆍ판단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당신께서 혹시 본의 아니시게도 (독점)자본의 흑색선전을 더욱 설득력 있고 더욱 교묘하여 더욱 유독한 형태로 재생산하고 계신 것은 아니신지를 되돌아보실 필요가 있는 듯하군요. 맑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만 썼던 게 아니랍니다. 이렇게도 썼지요. 예전에도 지금의 교수님 같은, ‘슬픔 코미디’를 하시는 학자님들이 득시글득시글했으니까요.
지배 계급의 사상이 어느 시대에나 지배적인 사상이다. 즉, 사회의 지배적인 물질적 권력인 바의 계급이 그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적 권력이다. 물질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계급은 그와 동시에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그 때문에 또한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에 종속되어 있다. 지배적 사상이란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의 관념적 표현, 사상의 형태로 표현된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실로 하나의 계급을 지배계급이게 하는 관계의 관념적 표현, 따라서 이 계급의 지배의 사상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3) (강조는 원문)
한 가지만 더, 교수님.
교수님께서는 “정작 아편 같은 종교는 공산주의였던 게 아닐까”라고 쓰셨더군요. 공산주의는 과거지사일 뿐이라는 뜻이지요? 분명 그런 뜻이지요? 그것이 얼마나 반공주의에 찌든 천박한 인식인지는 아마 교수님 생전에 절절히 아시게 될 겁니다.
그 셋: 윤평중 한신대 정치철학 교수님의 당랑거철(螳螂拒轍).
지난 2월 4일자 ≪조선일보≫에서 우리는 “‘시장은 악마가 아니다… 민주주의ㆍ정의와 어긋나지 않아’”4)라는, 그 신문지면의 거의 반절을 할애한 기사, 아니 윤평중 교수님 저술의 ≪시장의 철학≫이라는 “연구서”의 선전문을 보게 된다. 윤평중 교수님이야 저 극우 ≪조선일보≫의 오랜 고정 칼럼니스트인바, “자본주의의 핵심인 시장과 시장 경제를 정치철학적 관점에서 정리”하셨다는 그의 “연구서”가 어떤 성향의 것일지는 불문가지. 이선민 선임기자님의 선전문에 의하더라도 돈키호테적 기담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두 가지만 예로 들자면, 이선민 선임기자님에 따르면 우선, “윤 교수는 먼저 시장이 민주주의에 적대적이라는 주장을 반박한다”고 한다. “양자가 긴장관계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선순환하면서 현대성(모더니티)의 핵심 요소를 이룬다”며, 이렇게 쓰고 계시다는 것이다.
“경제적 자유와 풍요의 증대는 정치적 자유를 위한 공간과 기회를 증대시킵니다. 또 시장경제의 자원 배분과 민주주의적 자원 배분은 얼핏 다르게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상호 비판적 보완 관계에 있습니다.”
이 발언들이 시정(市井)의 장삼이사의 그것이라면, 그냥 웃어넘기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장삼이사의 그것이 아니라, “중진 철학자인 윤평중(60) 교수”님의 “경제철학적” “연구서” 속의 발언이다.5) “중진 철학자”의 ‘철학적’ 발언, 그것도 논쟁적 저서 속의 발언이다.
그런데 그 “중진 철학자”님께서 “시장이 민주주의에 적대적이라는 주장을 반박”하신다?! “시장경제의 자원 배분과 민주주의적 자원 배분은 얼핏 다르게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상호 비판적 보완 관계에 있…다”고?!
‘적대적’이든 ‘비적대적’이든, 이것은 어떤 주체의 무언가 객체에 대한 태도의 문제이고, 어떤 주체가 무언가 객체에 대해서 ‘적대적’이든 ‘비적대적’이든 어떤 태도를 취하기 위해서는 그 주체가, 의사능력이나 의지까지는 아닐지라도, 하다못해 최소한 어떤 동물적 본능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어떤 것들이 “상호 비판적”이기 위해서는 그것들은 분명 인식ㆍ비판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저 “중진 철학자”님께서는 시장이 민주주의에 대하여 적대적이니 적대적이지 않으니를 논하여 적대적이지 않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으시고, “시장경제의 자원 배분과 민주주의적 자원 배분은 … 상호 비판적”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결국 시장은 최소한 어떤 동물적 본능을 가지고 있고, “시장경제의 자원 배분”이나 “민주주의적 자원 배분”은 인식ㆍ비판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중진 철학자“다운 고담준론인가!
뿐만 아니다. 그는 말씀하신다. “시장경제의 자원 배분과 민주주의적 자원 배분은 얼핏 다르게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상호 비판적 보완 관계에 있…다”고!
“시장경제의 자원 배분과 민주주의적 자원 배분은 얼핏 다르게 보이지만” 하고 말이 시작되었으면, 우리 같은 비(非)철학자들은, 예컨대, “사실은 다르지 않다”거나, “보다 깊이 고찰하면, 다르지 않다” 등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그런데, 저 “중진 철학자”님께서는 범상하지 않게도 “궁극적으로는 상호 비판적 보완 관계에 있…다”고 ‘논리’를 전개하신다. 이 역시 얼마나 “중진 철학자”다운 ‘논리’ 전개인가!
“윤 교수는 또한 시장철학의 확산과 정착을 위한 시민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위한 공론장의 역할을 강조”하시는데, “이는 저신뢰사회와 낮은 법치 수준으로 표출되는 한국의 시장 왜곡이 조선시대로 소급되는 오랜 역사적 유산을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며, “이웃 중국과 일본에 비해서도 유달리 상업을 천시하고 억압했던 조선 문명의 전통이 지금도 건전한 시장질서와 성숙한 시민정신의 발달을 가로막고 있어 문화적 대응이 필요하”기 때문이란다.
“한국의 시장 왜곡이 조선시대로 소급되는 오랜 역사적 유산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이웃 중국…에 비해서도 유달리 상업을 천시하고 억압했던 조선 문명의 전통이 지금도 건전한 시장질서와 성숙한 시민정신의 발달을 가로막고 있어 문화적 대응이 필요하다”?
나는 일본의 중세 직업관ㆍ신분제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 없어 할 말이 없지만, “이웃 중국…에 비해서도 유달리 상업을 천시하고 억압했던 조선 문명의 전통”이라니!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상업 천시ㆍ억압이 정말 중국에 비해서도 유달랐던 조선 문명의 전통이었단 말인가? 재미있는 코메디이다!
그리고 그러한 “조선 문명의 전통”의 “역사적 유산”이 한국의 “시장”을 “왜곡”시키고 있고, “건전한 시장질서와 성숙한 시민정신의 발달을 가로막고 있”다?
우선, 나는 저 고고한 “중진 철학자”가 아니기에 저잣거리적 관념으로 묻건대, 재벌이, 독점자본이 얼마나 더 잔인하게 노동자계급은 물론 중소 상공인 이하 대중 일반을 지배하고 짓밟아야 “유달리 상업을 천시하고 억압했던 조선 문명의 전통”, 그 “역사적 유산”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고, “건전한 시장질서와 성숙한 시민정신의 발달”을 말할 수 있을까?
그건 그렇고, “시장 왜곡”? 도대체 어떤 시장이 왜곡된 시장이고, 어떤 시장이 왜곡되지 않은 시장인가요, 교수님? “저신뢰사회와 낮은 법치 수준으로 표출되는” 운운 같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철학적” 발언 대신에 어리석은 중생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설명 좀 해주시지요. “낮은 법치 수준으로 표출” 운운이 설마 ‘보다 더 파쇼적으로’를 요구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교수님께서 평소 ≪조선일보≫와 한 목소리로 사실상 파쇼 강화를 요구하시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만 더. “현실의 시장이 천민자본주의 같은 약점을 드러낸다고 해서 시장 자체를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
우선, 자본주의에 “천민자본주의” 따로 있고, ‘귀족자본주의’ 따로 있다는 뜻이군? 재미있군!
그리고 “시장 자체를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
“시장 악마화” 운운은 바로 시장 숭배자들이 스스로 제발이 저려 지레 지껄여대는 소리이고, 그들의 이란성 쌍생아인 몰과학적인 소부르주아 시장반대론자들이 떠드는 소리 아닌가?
왜냐하면, 저 “중진 철학자”님께서 제 주제 파악 못하고 “비판을 시도”하는 맑스도, 맑스주의자들도 시장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로 노동이 사적으로 수행되고 그 생산물이 사적으로 전유되는 사회체제에서 사적 노동이 사회화되고 사적으로 전유된 노동생산물이 사회적으로 교환되는 기구로 파악ㆍ규정할 뿐이지, 그것을 결코 악마로 파악ㆍ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선민 선임기자님의 선전에 의하면, 저 “중진 철학자” 윤평중 교수님께서는,
반(反)시장 정서의 지적 원천인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마르크스는 시장질서의 보편성을 강조했던 헤겔을 부당하게 ‘관념론자’로 왜소화시키면서 시장과 이에 기반한 시민사회를 부정했고, 결국 이것이 현실사회주의 붕괴의 요인이 됐다는 것이다.
우선, 맑스는 “시장질서의 보편성을 강조했던 헤겔을 부당하게 ‘관념론자’로 왜소화”시켰다?
다시 우선, “시장질서의 보편성”? 분명하지는 않지만, “시장질서의 보편성”이라는 말로 필시 그는 (“중견 철학자”다운 표현인) “시장질서”, 심상(尋常)한 우리네 표현으로는 “시장”의 ‘역사적 보편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전후 맥락으로 보아 그 자신 그 보편성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표현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단언컨대, 저 “중진 철학자”는 과연 “중진 철학자”답게 무지하고 용감하다. 그가 말하는 “시장질서”, 그러니까 “시장”이 보편적으로 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그 역사가 길어야 4-5백 년에 불과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일이고, 심지어 “시장” 그것이 등장한 지도 불과 기천 년에 불과해서, 수만 년 혹은 수십만 년의 인류 역사에 비하면, 촌음까지는 아니더라도, 극히 짧은 기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에서 본 것처럼, 저 “중진 철학자”님 스스로도 “유달리 상업을 천시하고 억압했던 조선 문명의 전통” 운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시장이 보편적이지 않았던 것이 “조선 문명의 전통”임을 스스로 떠벌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헤겔을 부당하게 ‘관념론자’로 왜소화”시켰다? “왜소화”라는 규정에는 과히 신경 쓰지 말자. ‘관념론자’이면 철학자로서는 ‘왜소한’ 것이다라고 그가 생각하고 있다고,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가자.
그런데 그가 맑스는 “헤겔을 부당하게 ‘관념론자’로 왜소화시키면서” 운운할 때, 거기에는 분명 ‘헤겔은 결코 관념론자가 아니다!’라는 강한 ‘반론’ 혹은 ‘비판’이 내포되어 있다.
‘헤겔은 결코 관념론자가 아니다!’ ―― 과연 “중진 철학자”다운, 극우 ≪조선일보≫에서 활동하고 극우 ≪조선일보≫가 자랑스러워 할 만한 위대한 철학사적 발언이다!
게다가 저 “중진 철학자”에 의하면, 맑스는 “시장과 이에 기반한 시민사회를 부정했다”? 박근혜 대통령님 각하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혼이 비정상’인 인간은 필시 자신의 혼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혼이 비정상’으로 보이고 생각될 것이다. 도대체 맑스가 어디에서, 어떤 글, 어떤 저서, 어떤 연설에서 “시장과 이에 기반한 시민사회를 부정”했단 말인가? “시장과 이에 기반한 시민사회를 부정” 따위의 생각, 상상은 저 “중진 철학자”님 같은 분께나 어울리는 사고이지, 맑스의 그것은 결코 아니다. 맑스야말로 “시장과 이에 기반한 시민사회”를 누구보다도 분명히 긍정했던 것 아닌가? 돈키호테 같은 저 “중진 철학자”님께서 그토록 증오하는 맑스의 저 필생의, 불후의 과학적 업적은, “시장과 이에 기반한 시민사회”의 “부정”이 아니라, “시장과 이에 기반한 시민사회”의 구조와 운동법칙을 밝힌 것이었고, 그것을 통해서 저들 부르주아들과 그 이데올로그들이 초역사적ㆍ보편적이라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시민사회’, 즉 자본주의적 생산체제가 사실은 역사적으로 과도적인 체제이며, 머잖아 보다 고도의 생산체제에 필연적으로 자리를 내주지 않을 수 없는 체제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었다.
“실천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죽었지만 지식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반(反)시장주의의 뿌리는 마르크스이기 때문에 시장철학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이 매우 중요하다”고? ―― 바로 이야말로 그 알량한 앞발을 도끼랍시고 곧추 쳐들고선 거대한 수레의 진전을 가로막으려 드는 한 마리 늙은 사마귀의 애처로운 모습 아니던가!
우리의 저 “중진 철학자”님에게 감히 한 마디 드리자면 (분명 콧등으로도 안 들으시겠지만), ‘시장의 철학’을 하시기 전에 시장의 발생ㆍ발전사와 그 발전법칙을 먼저 공부하시오. 그리고 맑스를 ‘비판’한답시고 나서기 전에 맑스의 저술을 먼저 읽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시오. 무지와 그 무지에서 나오는 돈키호테적 만용은 결코 자랑이 아니오!
그 넷(약간은 유쾌한<?> 코메디): 정재승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님의 ‘남성 호르몬 과잉이 글로벌 금융위기 불렀다’6)!
사실 글의 제목은 “테스토스테론(남성 호르몬) 과잉이 글로벌 금융위기 불렀다?”이다. 즉, 단정하는 대신에 의문부호가 붙어 있다. 그러나 논리 전개가 산만하며 모순적이기도 하고, 표현이 애매한 곳도 있어서 다른 해석의 여지가 전혀, 그야말로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은 분명 “남성 호르몬 과잉이 글로벌 금융위기 불렀다!”로 읽히고, 의문부호는 편집 데스크의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혹시 내 “혼이 비정상”이라서 그렇게 읽히는 것일까?
아무튼 정재승 교수님의 이 글은, 필시 진지한 자세로 집필하셨을 교수님께는 다소 미안한 말씀이지만, “테스토스테론(남성 호르몬) 과잉이 글로벌 금융위기 불렀다?”라는 제목에서부터, 그리고 “리먼브러더스 아닌 리먼시스터스였다면?”이라든가 “주식시장에서 돈을 잃지 않으려면”이라는 소제목도 그 자체로서 무척 놀랍고 유쾌ㆍ발랄하며 도전적인 코메디이다! (적어도, 뇌과학자나 “투자행동학자”가 아닌, 혹은 못된, 범인(凡人)의 눈으로 볼 때는 분명 그렇다!)
우선, “테스토스테론(남성 호르몬) 과잉이 글로벌 금융위기 불렀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하시는지를, 다소 길지만 그 유쾌함을 맛보기 위해서, 인용해 보자면,
실제로 월가 외부에서는 테스토스테론 과잉에 따른 지나친 남성성과 공격성향 위험 감수가 현 글로벌 금융위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남녀의 뇌는 위기가 닥쳤을 때 대응하는 방식이 다르다. 사용하는 뇌 활동 패턴이 다르기 때문에 직장 안에서도 남녀는 문제에 대처하는 태도나 해결하는 방식이 크게 다르다. 남성은 상대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위기를 관리하는 데에는 약하기 때문에, 금융시장이 호황일 때는 승승장구해도 상황이 어려워지면 동굴로 숨는 경향이 있다.
월가의 경우 직급이 올라갈수록 남자가 훨씬 많아, 리먼 브러더스 사태가 벌어졌을 때 잘 대처하지 못한 회사가 금융계 전체 문제를 야기했다고 설명한다. 즉 조직 내 의사결정권자 성비가 한쪽으로 쏠리는 것은 위험하며, 조직이 다양한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서는 조직 구성원들이 다양해야 하며 성 지능(gender intelligence)도 그중 하나의 고려 요소인 것이다.
리먼 브러더스는 지난 2007년부터 불거진 미국 부동산가격 하락에 따른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로 파산한 글로벌 투자은행이다. 리먼 브러더스 사태는 2008년 리먼 형제가 파산 신청을 하면서 세계 경제가 위기 국면을 맞이하고, 대형 미국 은행들이 쓰러졌던 사건이다. 아마 ‘리먼 브러더스’가 아니라 ‘리먼 시스터스(sisters)’였다면, 위기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테스토스테론 과잉에 따른 지나친 남성성과 공격성향 위험 감수가 현 글로벌 금융위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 그런데, “남녀의 뇌는 위기가 닥쳤을 때 대응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리먼 브러더스’가 아니라 ‘리먼 시스터스(si-sters)’였다면, 위기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봐도 썩은 논리, 그야말로 코메디 아닌가? “남녀의 뇌는 위기가 닥쳤을 때 대응하는 방식이 다르”다면, “테스토스테론 과잉에 따른 지나친 남성성과 공격성향 위험 감수”는, 혹은 “‘리먼 브러더스’가 아니라 ‘리먼 시스터스(sisters)’였다면,” 위기에 대한 대응방식이 달랐을지언정, “테스토스테론 과잉에 따른 지나친 남성성과 공격성향 위험 감수”가, ‘리먼 시스터스’가 아니라 ‘리먼 브러더스’였던 것이 어떻게 위기의 원인의 하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주식시장에서 돈을 잃지 않으려면”이라는 겸손한 소제목하에 실제로는 “비이성적인 주식시장에서 수익을 얻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를, 즉 주식시장에서 떼돈 버는 비결을 설파해가는 ‘논리’ 전개 역시 가관인데~. 글쎄? 여기에서 더 이상 언급할 여유가 없는 그 비결이 투기꾼들에게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다.
아무튼 정 교수님께서 ‘학문’의 최신의 발전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면서도 또 그 발전에 우리가 곧 적응하게 될 것이라고 격려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지적해둬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경기 침체와 투자, 리먼 브러더스 같은 단어들이 테스토스테론, 뇌 활동 패턴 같은 단어들과 뒤엉켜 있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주식시장을 예측하고 투자와 재무를 연구하는 학문이 최근 인간의 행동과 대뇌 메커니즘에 큰 관심을 갖게 됐고 ‘행동투자학’(Behavioral Finance)이라는 학문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조만간 적응하게 될 것이다.
유쾌ㆍ발랄하고 용감무쌍한데다 이렇게 따뜻하시기까지 하신 저 정 교수님께 우리는 어떻게 감사해야 할까?
≪한겨레≫의 시대착오적 ‘미국의 가치’‘
주지하는 바이지만, 부르주아 사회를 옹호ㆍ선전하는 자들에 의하면 그 사회의 정치적 ‘대표자들’(!)을 뽑는 선거전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부르주아 민주정치의 꽃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전이, 그리고 한국에서는 국회의원 총선거전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바야흐로 부르주아 민주주의ㆍ민주정치의 꽃이 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누구의 눈에나 그 꽃은,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악취 진동하고 추악하기 그지없는 꽃이니 말이다.
자연히 이 사람 저 사람이 눈살을 찌푸리고, 수많은 비판들을 쏟아낼 수밖에!
문제는 그런데 그 ‘비판’이란 것들의 대개가, 그럴싸하게 비판의 외양은 띠고 있지만, 사실은 비판이라기보다는 현대 부르주아 사회의, 현대 부르주아 민주주의ㆍ민주정치의 악취 진동하는 추악함을 은폐하는 변호론들이라는 점이다. 그들 변호론이 그렇게 그럴싸한 비판의 외양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그만큼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으로 위험하고 유해하다.
‘비판’이라는 너울을 쓴 그 위험하고 유해한, 현대 부르주아 사회 변호론 중의 하나로 여기에서 나는 ≪한겨레≫ 박찬수 논설위원의 “한국의 크루즈ㆍ트럼프를 그려보다”7)는 칼럼을 특히 지적하고 싶다. 이 칼럼을 특히 꼬집어 지적하는 이유는 이 칼럼이 대한민국 최고의 ‘진보지’ ≪한겨레≫ 지면에 실렸을 뿐 아니라 바로 ≪한겨레≫ 논설위원의 자격으로 실렸기 때문이다. 즉, 사실상 ‘진보지’ ≪한겨레≫의 이름으로 문제의 변호론을 설파하는 만큼, 그만큼 선진 노동자들, 선진 대중들에게 끼칠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위험ㆍ해악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한겨레≫의 ‘비판’ㆍ말씀을 들어보자.
미국 대선전의 개막을 알리는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테드 크루즈와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1, 2위를 기록한 건 상징적이다. … 극우 성향에 상식을 뛰어넘는 발언을 일삼아온 트럼프의 선전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엔 거의 재앙에 가깝다. 테드 크루즈는 트럼프처럼 천방지축은 아니지만 극우 성향 단체인 티파티의 전폭 지지를 받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를 극우 정치인 그 자체로가 아니라 그저 “극우 성향에 상식을 뛰어넘는 발언을 일삼아온” 정치인으로 규정하고, “티파티”를 극우단체 그 자체로가 아니라 “극우 성향 단체”로 규정하는 거야 그렇고 그런 엄밀함의 결여이려니 하고 생각해버리면, 이상은 대개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하고 있는 얘기이다. 그런데, 위 인용문 중 생략부호가 있는 곳엔 다음과 같은 ‘비판적’ 판단이 쓰여 있다.
주류의 지지를 받는 3위 마코 루비오와 격차가 크지는 않지만, 공화당의 가파른 우경화를 드러내는 징표인 건 분명하다. (강조는 인용자)
그리고 위 전체 인용문엔 다음과 같은 ‘비판적’ 자문(自問)이 뒤따른다.
어쩌다 미국 보수의 주류를 자처해온 공화당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러고는 그 자문을 이렇게 받는다. (인용이 길지만 양해 바란다.)
[미국 출신의: 인용자] 이매뉴얼 패스트라이시 경희대 교수는 트럼프와 크루즈의 부상을 “끔찍하다”면서도 “예상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이건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 1990년 후반의 미국 정치, 그리고 2001년 9·11 테러와 조지 부시 정권의 대응이 트럼프를 키웠다”고 말했다. 50대 초반인 패스트라이시 교수는 “지금 미국은 내가 어렸을 적의 그 미국이 아니다. 외국인들은 잘 느끼지 못했겠지만, 미국의 변화는 오래전에 이미 시작됐다”고 덧붙였다.
조지 부시 정권 8년 동안에, 지난 수십 년간 세계에 전파해온 ‘미국의 가치’는 뚜렷하게 퇴색했다. 테러정보 수집을 이유로 연방수사국(FBI)은 시민들의 전화와 이메일을 무차별 도청했고, 테러 용의자들은 재판 없이 군 기지에 갇혀 기약 없는 나날을 가혹 행위의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감시와 도청, 불법구금과 고문의 위협에 가장 먼저 노출된 이들은 미국 내 아랍계와 무슬림들이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겠다”는 비상식적 발언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데도 높은 지지를 받는 데엔, 시민권 후퇴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이런 경험이 짙게 깔려 있다.
정작 조지 부시를 비롯한 공화당 주류는 “우리는 이슬람 전체를 적으로 돌리진 않았다”고 펄쩍 뛴다. 하지만 트럼프와 크루즈에게 열광하는 극단적이고 폐쇄적인 지지자를 양산해낸 건 부시 8년간의 집권 경험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개방과 포용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한다는 ‘미국의 가치’, 이른바 아메리칸드림은 이미 부시 시대에 현저히 빛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 크루즈와 트럼프의 질주에서, 전세계는 동경보다 조롱과 질시를 받는 아메리칸드림의 끝을 보고 있다. 패스트라이시 교수가 회상하는 ‘어릴 적의 미국’은 이제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럴싸하긴 하지만 사실은 논리적으로도, 역사적 사실에서도 정말 어이없는 ‘비판’이다.
우선 위 인용문들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깔려 있다. 즉, “부시 정권 8년 동안에” “감시와 도청, 불법구금과 고문의 위협” 등으로, “지난 수십 년간 세계에 전파해온 ‘미국의 가치’”가 “뚜렷하게 퇴색했”고, “트럼프와 크루즈에게 열광하는 극단적이고 폐쇄적인 지지자를 양산”하여 트럼프와 크루즈 같은 “극우 성향”의 정치인이 등장할 수 있는 조건과 계기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부시 정권 그 자체는 극우 정권도 “극우 성향”의 정권도 아니었다는 전제 말이다. 이는 “주류의 지지를 받는 3위 마코 루비오와 격차가 크지는 않지만, 공화당의 가파른 우경화를 드러내는 징표인 건 분명하다”거나, “정작 조지 부시를 비롯한 공화당 주류는 ‘우리는 이슬람 전체를 적으로 돌리진 않았다’고 펄쩍 뛴다”거나, “어쩌다 미국 보수의 주류를 자처해온 공화당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등의 서술ㆍ자문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더욱 명백하다. (이 전제가 무엇을 의미하며, 그에 대한 비판이 왜 중요한지는 조금 뒤에서 보기로 하자.)
또한, 위 인용문 속에서 ≪한겨레≫는, “도널드 트럼프가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겠다’는 비상식적 발언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데도 높은 지지를 받는 데엔,” “미국 내 아랍계와 무슬림들이” 거기에 “가장 먼저 노출”되었던 “감시와 도청, 불법구금과 고문의 위협”과 같은 “시민권 후퇴에 대한 미국 사회의 … 경험이 짙게 깔려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역시 그럴싸한 논법이다. 그런데 “감시와 도청, 불법구금과 고문의 위협”과 같은 “시민권 후퇴”, 그리고 그 “경험”은 그 자체로서 시민들로 하여금, 대중으로 하여금 그러한 “감시와 도청, 불법구금과 고문의 위협”을, 혹은 그러한 “시민권 후퇴”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극우 정치인을 지지하게 만드는 것일까?
≪한겨레≫는 주요 언론이고, 게다가 ‘진보’를 자임ㆍ지양하는 언론이다. 그렇다면 무지렁이 시민ㆍ대중들로 하여금 그러한 극우를 지지하도록 만드는 사회의 토대, 하부구조, 그 사회의 동학(動學, dynamics) 전체는 해명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그렇게 만들고 있는 자본의 극우언론에 대해서는 냄새 정도의 문제의식이라도 제기했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상에서 짚은 문제들은 ≪한겨레≫가 “미국의 가치” 운운하면서 내뿜는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해독(害毒)에 비하면, 사실 별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한겨레≫의 얘기를 다시 들어 보자.
조지 부시 정권 8년 동안에, 지난 수십 년간 세계에 전파해온 ‘미국의 가치’는 뚜렷하게 퇴색했다.
개방과 포용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한다는 ‘미국의 가치’, 이른바 아메리칸드림은 이미 부시 시대에 현저히 빛을 잃었다.
50대 초반인 패스트라이시 교수가 회상한다는 “어렸을 적의 그 미국” 역시 물론 그러한 ‘미국의 가치’, “이른바 아메리칸드림”이 빛을 발했다는 미국이다. 그리고 이 “개방과 포용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한다는 ‘미국의 가치’, 이른바 아메리칸드림”은, 그리고 나아가 ‘미국식 민주주의’는, ≪한겨레≫ 말고도, 우리 사회에서, 아니 자본주의 세계 전체에 걸쳐서 수많은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해서 널리 상찬되어 온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개방과 포용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한다는 ‘미국의 가치’, 이른바 아메리칸드림”은 과연 실제로 존재했던 것일까? 그리고 만일 그러한 것이, 혹은 그와 비스름한 것이라도 실제로 존재했다면, 그것은 언제까지 존재했던 것일까? 저들의 얘기에 의하면, “50대 초반인 패스트라이시 교수”가 “어렸을 적”까지, 보다 구체적으로는 적어도 1990년대 후반에 부시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러한 것이 존재한 것으로 되는데, 과연 정말일까?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정말 터무니없고 어이없는, 유독한 망발이다!
“최대한 존중한다”는 편리한 유보를 염두에 둔다면, 미국에 예전에 그 비슷한 것이 존재했다는 것까지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독립전쟁을 통해서 영국에 의한 식민 지배의 족쇄를 벗고 선구적으로 공화정을 도입했던 18세기 후반 이후의 시기, 그리고 흑인 노예제를 폐지했던 19세기 후반기가 그러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들조차도 그 전반기는 수십만 원주민이 백인 이민자들에 의해서 학살되고 수십만 흑인이 노예로서 신음했을 뿐 아니라 아프리카의 수백만 흑인이 그 미국으로 노예로 끌려가는 도중에 대서양에 수장되었던, 백인 이민자들만을 위한 ‘미국의 가치’ㆍ‘아메리칸드림’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되고, 그 후반기는 ‘해방된 흑인’ 대부분을 포함한 수백만 노동자들이, “개방과 포용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받기는커녕, 착취와 억압, 빈곤에 신음하던 ‘미국의 가치’ㆍ‘아메리칸드림’이었음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러한 알량한 ‘미국의 가치’ㆍ‘아메리칸드림’마저 19세기 말이 되면 사라져버리고 만다. 적어도 자본주의 체제가 존속하는 한은 영원히! 이때가 되면 이미 미국은 제국주의 강자의 하나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미국이 자본주의 세계의 사실상 유일한 절대 강자로 군림해온, 제2차 대전 이후의 시기는 물론 더욱 그렇다. ‘미국의 가치’ㆍ‘아메리칸드림’ 따위는 그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게 된 시기인 것이다.
자신의 직접적ㆍ간접적 지배하에 둔 아시아ㆍ중남미 국가들에서 미국이, 정확히 말하자면, 미 제국주의가 어떤 만행을 저질러왔는가를 생각해 보라. 이 시기 미 제국주의는, 이른바 ‘미국식 민주주의’니 ‘아메리칸드림’이니 운운하는, 일부 가당찮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은연중 선전하는 것처럼 “개방과 포용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그리고 그들 현지 인민의 자결을 “최대한 존중”해왔던가? 현지 지배계급을 하수인 삼아, 그리고 여의치 않으면 직접 군대를 파견해 “개방과 포용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향한, 민족 독립과 자결을 향한 현지 인민의 열망을 최대한 잔인하게 억압ㆍ압살해왔고 억압ㆍ압살하고 있지 않은가?!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비겁하기 그지없는 예이지만, 마침 며칠 전에 ≪한겨레≫ 자신이 제공한 실례를 하나 들어보자.
… 미국과 라오스의 밀월에는 걷어내야 할 장애물이 하나 있다. 미국의 비밀전쟁 유산인 불발탄이다. 1964-1973년 사이 미국은 라오스를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를 막는 방파제 삼아 북베트남의 보급로를 자르겠다는 전략 아래 선전포고도 없이 비밀리에 라오스를 불법 폭격했다. 미국은 9년 동안 라오스를 악명 높은 집속탄(cluster bomb) 실험지로 삼았을 뿐 아니라 200만 톤을 웃도는 각종 폭탄 700만 개를 퍼부었다. 미국은 그 9년 동안 58만344회나 출격해서 평균 7분30초마다 한 번씩 라오스를 공습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 시절 라오스 인구가 400만 명쯤이었으니 한 사람당 0.5톤짜리 폭탄 1.75개씩을 뒤집어씌운 꼴이다. 그 가운데 30% 넘는 불발탄이 50년이 지난 오늘까지 온 천지에 굴러다니며 희생자를 내고 있다. 1975년 전쟁이 끝난 뒤부터만 따져도 그 불발탄 희생자가 5만여명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전사에서 최대 융단폭격으로 꼽아온 한국전쟁 때 미군이 사용한 총폭량이 49만5000톤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일본 본토 공격에 사용한 총폭량이 15만6000톤이었던 사실과 견줘볼 만하다.
20년간 내놓은 돈이 5일치 폭격 비용
그럼에도 미국은 시치미를 떼다 전쟁이 끝나고 20년도 더 지난 1996년부터 마지못해 불발탄 제거 비용이라며 라오스에 샐닢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게 지금껏 8200만 달러로 연평균 400만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그 시절 미군이 비밀 폭격에 쓴 돈만도 69억 달러였다. 1년에 평균 7억6600만 달러를 쓴 꼴이다. 그 무렵 1일 평균 비용 210만 달러는 현재 환율로 따져 1800만달러가 넘는다. 지난 20년 동안 미국이 라오스에 내놓은 돈이 5일치 폭격 비용에도 못 미친다는 뜻이다. 지금 속도로 불발탄을 제거해 나간다면 한 200년쯤은 더 걸려야 라오스가 불발탄자유지대가 된다고도 한다.
더구나 미국 정부는 지금껏 공식적인 사과마저 한 적이 없다. 2012년 미국 국무장관으로 57년 만에 처음 라오스를 방문했던 힐러리 클린턴은 “과거 전쟁의 비극적 유산”이라 했고, 이번에 방문한 케리는 “예산을 더 늘릴 수 있는지 따져보고 있다”는 수사들만 늘어놓았을 뿐.8)
다름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실제의 제국주의 ‘미국의 가치’이고 ‘아메리칸드림’이다. 그리고 그것은 부시 정부 이후 “뚜렷하게 퇴색했”거나 “현저히 빛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욱더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런데도 지금 저들은, ‘진보’ ≪한겨레≫는 적어도 1990년대 전반까지는 “개방과 포용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한다”는 이른바 ‘미국의 가치’ㆍ‘아메리칸드림’ 따위가 존재했을 뿐 아니라 빛을 발하고 있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심지어 조지 부시 정권마저도 그 시대에 “‘미국의 가치’, 이른바 아메리칸드림”이 “뚜렷하게 퇴색했”고, “현저히 빛을 잃었”지만, 극우 정권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극우 성향에 상식을 뛰어넘는 발언을 일삼아온” 정권은 아니었다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다. 미 제국주의가 저질러왔고 저지르고 있는 범죄들을 그렇게 은폐하며 상찬하고 있다. 참으로 터무니없고 어이없는, 유해한 망발 아닌가!
그러나 미 제국주의의 그러한 범죄는 국제사회에서의 일이고, 미국 내에는 여전히 “‘미국의 가치’, 이른바 아메리칸드림”이 존재했던 것 아닌가 하는 똑똑한 반론이 제기될지 모른다. 그러나 타민족ㆍ타국가에 대한 억압과 착취는 자국 내의 계급적 억압과 착취의 연장인바, 타민족ㆍ타국가를 그토록 잔인하게 짓밟는 제국주의 국가가 자국의 인민은 짓밟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윤똑똑이들의 망상일 뿐이다. 노동자계급에게 있어 국제주의가 중요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것도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은 바로 그렇게 한 덩어리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덧붙여 얘기하자면, 일부러 그 어원을 추적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확언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른바 “미국의 가치”니, “아메리칸드림”이니 하는 말들은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것들의 흔적조차 사라진 제국주의 시대에 제국주의 이데올로그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대부분 그렇게 기만적 의도로,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고, 미 제국주의야말로 그 방면의 챔피언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건 그렇고, ≪한겨레≫의 문제의 칼럼의 제목은, 이미 본 것처럼, “한국의 크루즈·트럼프를 그려보다”이다. 미 “공화당의 가파른 우경화”에 대한 ‘비판’의 구도를 한국의 정치판에 적용하여 박근혜 정권을, 그리고 새누리당을 비판하겠다는 뜻이다. 당연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부시 집권 시절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퇴행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건 ‘애국법’이었다. 한시법인 이 법은 버락 오바마 정권에서 더는 연장되지 못하고 폐지됐다. 요즘 한국에서 유난히 ‘애국심’이 강조되고 이걸 잣대로 모든 사안을 재단하려 드는 건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불길하다. 조지 부시 정권이 그랬듯, 박근혜 정권이 우리 정치와 사회에 끼친 영향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거란 예감 때문이다.
여기까지야, 앞에서 비판해온 점을 제외하면, 그냥 들어 넘길 수 있는 얘기다. 그런데, 이렇게 이어진다.
부시 재임 시절에 외교전문가 이보 달더가 쓴 책의 이름이 <고삐 풀린 미국>(America Unbound)이었는데, 현 정권의 행동이 꼭 그렇다. 그래도 콘크리트 같은 지지층이 있고, 오로지 대통령만 좇는 수십 명의 국회의원들이 있다. 상식을 벗어난 권력의 집행은 한국 사회에, 그리고 새누리당에 두고두고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래서 십여 년 뒤엔 한국에서도 트럼프나 크루즈 같은 극우 정치인이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일을 보게 될는지 모른다.
어? 여기에는 “트럼프나 크루즈”가 “극우 정치인”으로 규정되어 있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의: 인용자] 상식을 벗어난 권력의 집행은 한국 사회에, 그리고 새누리당에 두고두고 영향을 끼칠 것”이며, “그래서 십여 년 뒤엔 한국에서도 트럼프나 크루즈 같은 극우 정치인이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일을 보게 될는지 모른다”니?!
박찬수 논설위원에게, ≪한겨레≫에 묻노니, 그렇다면 현재의 박근혜 정권은, 지금의 새누리당은 극우 정권, 극우 정당이 아니고, 그 주요 구성원들은 극우 정치인들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면, 박찬수 논설위원의, ≪한겨레≫의 이렇게 터무니없고 어이없으며 유독하기까지 한 객설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이 좁은 지면에서, 그리고 천학(淺學)의 내가 논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수많은 원인과 배경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주어진 문제를 근본적으로 파고들기를 게을리하고 심지어 두려워하기조차 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하여 그 사고가 제국주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바로 그 한 가지이다. 저들은 그렇게 제국주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비(非)(사회)과학적 사고를 하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지배 독점자본가계급 내부의 분파 간의 이권 다툼, 권력이동에 불과한 이른바 ‘정권 교체’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곤 한다. 하지만, 어느 자본주의ㆍ제국주의 국가에서든 그러한 ‘정권 교체’가 억압ㆍ피억압 계급 간, 착취ㆍ피착취 계급 간 이해관계의 어떤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온 적이 있었던가? 제국주의 지배계급과 식민지ㆍ신식민지ㆍ종속국 피지배 인민 간 이해관계의 어떤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온 적이 있었던가? 예컨대, 미국에서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 정권 교체가 거듭되고, 그 직접적ㆍ간접적 지배 아래에 있는, 아시아나 중남미 국가들에서 그러한 정권 교체가 가끔은 이루어져 왔다고 해서 말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오늘날 미 민주당 대선후보 경쟁전에 나서고 있는 버니 쌘더스를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 언론들은 앞을 다투듯 사회주의자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것 역시 바로 저 제국주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발로이자, 그에 종속된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 쌘더스가 사회주의자라면, 요즘 젊은이들의 우스갯소리처럼, 잠자리는 비행기이다!
그가 설령 대통령으로 당선된다고 해도 미국의 국내 정책에도, 그 제국주의적 대외 정책에도 어떤 유의미한 변화가 있을 리는 만무하다. 미국의 노동자ㆍ인민이 위력적으로 저항하고 나서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런데 이 거대한 억압의 시대, 기만의 시대를 둘러볼 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난 2007년 하반기 이래 도도히 전개되어온 대공황의 최근의 새로운 전개양상을 보면, 저 제국주의가 영원히 사멸해 역사박물관으로 보내질 날도 그리 멀지는 않은 것 같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물론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조직적ㆍ목적의식적 투쟁이 필수적이지만, 이 문제 역시 격동할 정세의 전개가 그 해결의 단초와 조건들을 조성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되면, 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 그 기만적이고 유독한 헛소리들이 그 수명을 다할 날도, 물론 그 잔명을 질질 끌면서이겠지만, 과히 멀지는 않을 것이다. <노사과연>
1) 류석춘, “국민행복시대, 신도시 주민도 행복하고 싶다”, ≪조선일보≫, 2016. 2. 1.
2) 강준만, “정치 종교”, ≪한겨레≫, 2016. 2. 1.
3) ≪독일 이데올로기≫, MEW, Bd. 3, S. 46.
4) 이선민, “‘시장은 악마가 아니다… 민주주의ㆍ정의와 어긋나지 않아’”, ≪조선일보≫, 2016. 2. 4.
5) 참고로 말하거니와, 나의 인용이 “연구서”의 서술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더라도, 이선민 선임기자의 선전문과 다르지 않은 한, 나에게 책임을 추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진 철학자” 윤 교수와 ≪조선일보≫는 사실상 동일한 사상ㆍ이념적 지반에 서 있고, 따라서 이 선임기자의 선전문이 윤 교수의 ‘연구’ 내용을, 필시 저자인 윤 교수의 명시적 혹은 암묵적 동의하에, 대변한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6) “[정재승의 영혼공작소: 주식시장과 신경과학]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 과잉이 글로벌 금융위기 불렀다?”, ≪한겨레≫, 2016. 1. 30.
7) 박찬수, “한국의 크루즈ㆍ트럼프를 그려보다”, ≪한겨레≫, 2016. 2. 3.
8) 정문태, “[정문태의 제3의 눈(61) 미국의 라오스 접근] 불발탄 제거, 200년은 걸리리라”, ≪한겨레≫, 2016. 1. 30.
0개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