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물질과 철학의 근본문제

 

 

 

신재길 | 회원

 

 

 

  1. 물질이란 무엇인가?

 

물질은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 고전적 명제로 정식화되어 있다.

 

“물질이란 인간의 감각에 의해 주어지고, 우리의 감각에 의해 복사되고 촬영되고, 모사되지만, 그것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표현하기 위한 철학적 범주이다.”(레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아침, 1988, p. 135.)

 

이러한 레닌의 물질개념에는 첫째, 물질의 객관성 둘째, 그것의 의식으로의 반영이 잘 나타나 있다. 물질의 이 두 가지 측면이 유물론을 반대하는 진영의 끊임없는 공격 대상이 되어왔다. 지금도 이러한 공격은 계속되고 있다. 그 대표자는 슬라보예 지젝이다.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지젝은 물질개념의 두 측면에 대한 반대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아주 분명하게 제기한다. 이는 지젝의 책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 정영목 역)에서 ‘유물론을 다시 생각하다’라는 논문에 잘 나타나 있다.

 

“레닌의 ‘반영이론’의 문제는 그 이론에 내재한 관념론에 있다. 의식 외부에 물질적 실재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강박적인 강조는 징후적인 전치(轉置, symptomatic displacement)로 읽힐 수 있으며, 그런 강박적인 강조는 의식 자체가 자기가 ‘반영’하는 실재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암묵적으로 가정되고 있다는 핵심적인 사실을 결국엔 감추게 된다.”(≪지젝이 만난 레닌≫, p. 290. 강조는 지젝)

 

이 논문에서 지젝은 레닌을 내재적 관념론자로 비판한다. 레닌은 물질외부에 의식 자체를 전제하였고 이것은 의식도 물질외부에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바깥에서 세계를 관찰하는 의식만이 실재 전체를 ‘실제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재에 대한 전적으로 온당한 ‘중립적’ 지식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외부에 존재한다(ex-sistence), 우리가 실재와 관련하여 외부적인 위치에 있다는 뜻이 되고 만다. 거울이 대상 외부에 있을 때에만 완벽하게 대상을 반영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위의 책, p. 290.)

“따라서 문제는 의식 외부에 의식으로부터 독립한 실재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의식 자체가 실재의 외부에 실재로부터 독립해 있느냐 아니냐다.”(위의 책, p. 291.)

 

이 정도면 레닌은 내재적 감추어진 관념론자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지젝이 레닌을 관념론자라고 비판하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객관적 실재라는 레닌의 (내재적으로 관념론적인) 개념을 받아들이는 대신 우리는 실재에 대한 ‘객관적’ 지식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해야 한다.”(위의 책, p. 292.)

“오직 바깥에서 우주를 관찰하는 의식만 실재 전체를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우주’라는 개념 자체가 외부 관찰자의 위치를 전제하지만, 이 위치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위의 책, p. 294.)

“현상이 중요하다. 현상이야말로 본질적이다. 우리는 사물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그 방식에 무조건 반대할 수는 없다.”(위의 책, p. 295.)

 

지젝의 글을 통해 요즘 논의되고 있는 철학의 수준을 그대로 알 수 있다. 요즘 철학자들의 논의 중심에 지젝이 서 있는데 레닌의 물질개념에 대한 지젝의 오해가 이를 잘 말해준다. 간단히 결론부터 언급하고 구체적 논의는 본론에서 하기로 하자.

레닌의 물질개념에 대한 지젝의 언급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문제점은 첫째 ‘의식 자체’를 존재론적 실체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둘째로 맑스주의 철학의 핵심적 개념인 실천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젝의 세계관의 전제인 세계가 현상세계에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세 가지는 근대철학의 근본적 문제점이고 근대철학은 이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첨언할 부분은 앞으로 현대철학이란 용어는 맑스주의 철학 이후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의 성립과 발전만을 의미하는 용어로, 그리고 변유와 사유의 전제들을 인정하고 확장하고자 하는 의미의 용어로만 쓸 것이다. 따라서 맑스 이후의 철학이라도 이런 입장이 아니라면 근대철학이라 칭할 것이다. 물론 지젝도 근대철학자들 중의 한명이다.

 

본 논고에서는 레닌의 물질개념 검토로부터 시작해서 철학의 근본문제로 논의를 확장하고 철학의 근본문제를 세 가지로 제시하여 이의 상관관계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질개념의 확장의 필요성을 제안하도록 하겠다.

 

 

  1. 레닌의 물질개념 검토

 

위에서 레닌의 물질에 대한 고전적 정의를 보았다. 그것은 물질이 객관성을 그 속성으로 하고 의식에 반영된다는 것이다.

 

“물질이라는 개념을 인정하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감각기관의 증언을 신뢰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 즉 우리 인식의 원천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유물론과 경험비판론≫, p. 135. 강조는 필자)

 

좀 길어지겠지만 레닌의 말을 좀 더 살펴보자

 

“물질과 정신이라는 인식론의 두 개의 궁극적인 개념에 대해 그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라는 정의 이외에는 어떠한 정의도 본질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들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본질적으로 한 개념을 그보다 더 포괄적인 다른 개념 속에 포섭시킴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내가 ‘당나귀는 동물이다’라고 정의한다면, 그것은 ‘당나귀’라는 개념을 그보다 더 포괄적인 다른 개념, 즉 동물이라는 개념에 포섭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와 사유, 물질과 감각, 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이라는 두 가지 개념 이외에, 인식론이 취급할 수 있는 한층 더 포괄적인 다른 개념이 있겠는가가 문제로 된다. 그러나 그 이상의 개념은 없다. 인식론은 본질상 지금까지 이보다 더 궁극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에 도달하지 못했다.”(레닌의 위의 책, p. 153. 강조는 필자)

 

“물론 물질과 의식 간의 대립은 극히 국한된 범위 내에서만─ 이 경우에 있어서는 무엇이 일차적이고 무엇이 이차적인 것인가 하는 인식론상의 근본문제의 범위 내에서만 ─절대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범위를 넘어서면 이 대립은 물론 상대적인 의미밖에 없는 것이다.”(위의 책, p. 155. 강조는 필자)

 

이상의 레닌의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물질이 철학의 근본문제 특히 ‘인식론상의 근본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점이다. 철학에서 ‘인식론상의 근본문제’의 첫 번째 부분은 ‘인식의 원천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즉 인식의 대상에 대한 문제이다. 인식의 대상, 원천이 ‘주관 밖에 있는 물질, 사물인가’, ‘주관 내에 있는 인상, 표상인가’의 문제이다. 두 번째 부분은 ‘인식주관이 인식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이다. 즉 인식 가능성 문제, 진리의 문제이다. 이런 인식론상의 근본문제를 엥겔스는 철학의 근본문제로 정식화 하였고, 레닌은 그 해답을 물질개념으로 정식화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지젝이 레닌에 대해 관념론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레닌의 물질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레닌의 물질개념은 “인식론상의 근본문제의 범위 내에서만 절대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젝은 레닌의 물질개념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레닌이 의식을 물질의 외부에 실체로서 전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심리적인 것, 정신 등등은 물질(즉, 물리적인 것)의 최고산물이며, 인간의 뇌수라고 불리어지는 특별히 복잡한 물질의 덩어리의 기능이다.”(레닌의 앞의 책, p. 243)라고 의식의 존재론적 의미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레닌은 결코 의식을 물질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실체로 본 것이 아니다. 인식활동은 인간 뇌수의 기능적 활동이다. 의식 활동은 인간이 하는 것이며 인간도 물질이다. 따라서 의식 활동은 물질의 특수한 한 기능일 뿐이지 물질 바깥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다. 그래서 레닌은 물질개념을 인식론의 범위 내에 한정시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지젝 정도의 철학자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레닌을 비판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에는 다른 의도나 원념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내친김에 지젝의 레닌 비판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자. 지젝은 말한다.

 

“오직 바깥에서 세계를 관찰하는 의식만이 실재 전체를 ‘실제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객관적 실재를 강조한다는 것은 객관적 실재 바깥에 ‘의식’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이쯤에서는 지젝의 철학적 소양이 아니라 상식적 소양을 의심해 봐야 할 것 같다. 아니 객관적 실재 바깥에 의식이 존재해야 실재를 관찰할 수 있다니 그렇다면 지구가 둥글다는 실재는 인공위성을 타고 지구 바깥으로 나가서 봐야 알 수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실재를 바깥에서 관찰한다고 해서 실재 전체를 ‘실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실재든 내적구조와 그 실재가 변화 발전하는 운동법칙을 알면 ‘실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전체우주’라는 개념 자체가 외부 관찰자의 위치를 전제하지만, 이 위치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상이 중요하다. 현상이야말로 본질적이다.”

“실재에 대한 ‘객관적’ 지식은 불가능하다”

 

지젝은 전체우주라는 개념으로 전체우주를 관찰할 수 있는 관찰자는 불가능함을 말하고, 그러므로 객관적 지식은 불가능하다고 하고, 본질이 아닌 현상만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전체우주’라는 말은 외부 관찰자를 전제하지 않는다. 전체우주라는 말은 ‘외부 없음’을 말할 뿐이다. ‘외부 없음’이란 시공간적으로 무한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전체우주를 사고하는 것은 무한을 사고하는 것과 같다. 무한을 사고하고 그 법칙을 밝혀 낼 수 있다면 전체에 다가갈 길이 있는 것이 된다. 집합론의 창시자인 독일의 수학자 칸토어는 이미 무한을 수학적으로 정의하고 무한의 크기를 비교하였다. 인류는 이미 무한과 전체에 한발 다가갔다. 인류는 신(전체우주의 외부 관찰자)이 되지 않아도 신의 영역인 무한을 수학의 영역으로 만들 수 있었다. 우리는 현상이나 부분 ‘그 자체’에 매몰되지 않고 본질과 전체에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객관적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지젝 등의 근대철학자들은 본질이나 물질을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근대철학이 딜레마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내린 결론이다. 이를 인식론적 딜레마라 한다.

 

 

  1. 인식론적 근본문제의 딜레마

 

인식론적 문제는 인식주관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즉 인식주관이 먼저 있어야 이 인식주관이 인식할 대상의 문제가 제기되고, 인식주관이 대상을 인식할 능력이 있는가 하는 인식가능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 인식주관의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우리가 잘 아는 데카르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은 인식주관을 분명히 해야 함을 의미하며, ‘모든 것을 의심해도 의심하는 나(주관)는 의심할 수 없다’는 말은 바로 인식주관이 인식론의 전제가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으로 근대철학의 전제가 데카르트에 의해 세워진다.

데카르트의 한계는 이러한 인식주관을 물질로부터 독립적인 실체로서 인정한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데카르트에게는 두 개의 실체가 설정된다. 하나는 사유로서의 인식주관과 다른 하나는 연장(물체)으로서의 인식대상이다. 이를 이원론이라고 한다. 두 개의 실체가 정립되자 인식론적 딜레마에 봉착한다. 그 딜레마는 ‘사유’와 ‘물질’이 서로 비교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의식 속에 주어진 것과 의식 밖에 있는 것을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내가 모르는 것, 즉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지각하지 못한 것을 비교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물에 관한 관념과 그 사물을 비교할 수 있으려면, 그전에 그 사물을 다시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사물을 다시 하나의 관념으로 변형시켜야만 한다. 비록 내가 관념과 사물을 비교한다고 생각할지라도 실제로는 관념과 관념을 비교할 뿐이다.”(일렌코프,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 연구사, p. 24.)

 

의식 속에 주어진 것과 의식 밖에 있는 것을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비교되는 두 대상이 상호 공통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공통의 요소가 있어야 비교 가능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사용가치가 상호 비교되고 교환되기 위해서는 공통의 가치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유’와 ‘물질’ 또는 ‘인식주관’과 ‘객관대상’ 사이에는 어떤 공통성도 없다.

 

“사유에 대한 일련의 정의 가운데 연장에 대한 정의의 일부분이라도 될 수 있는 속성은 하나도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공통적인 속성이 없다면, 사유로부터 존재를 합리적으로 연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위의 책, p. 27.)

 

이는 진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철학에서 인식주관이 신으로부터도 인식대상으로부터도 독립되어 실체화 되자마자 진리의 가능성이 문제로 제기된 것이다. 진리란 사유와 존재의 일치, 주관과 객관의 일치인데 이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진리의 가능성의 문제가 근대철학의 근본문제가 되었고 그것의 정식화가 물질과 의식의 관계라는 철학의 근본문제이다. 신을 통하지 않고 인간 이성으로 확실한 지식에 이르고자 했던 데카르트는 결국 ‘신은 알고 있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데카르트 이후의 모든 근대철학은 철학의 근본문제를 중심으로 돌고 돌아 다시 근대철학의 딜레마에 돌아온다. 경험론은 객관대상을 중심으로 진리문제를 풀고자 했으나 경험이란 객관대상이 아니라 인식표상인 관념일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러 주관적 관념론으로 후퇴하고 만다. 그리고 합리론은 인식주관을 중심으로 진리의 문제를 풀어간다. 그러나 이들도 주관(사유)이 객관(물질)에 다가갈 길을 찾지 못하고 관념, 즉 주관의 주위를 맴돌고 말았다. 이는 현재까지 이어져 경험주의는 신실증주의로, 합리론은 협약주의로 발전한다. 그리고 포스트류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들이 그 출발과 발전과정이 모두 제각각이라고 해도 공통적인 것은 객관적 진리에 주관이 다가가지 못한다는 근대철학의 근본문제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의 주관적 의지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1. 실천개념을 매개로 근대철학의 딜레마를 극복한 맑스

 

근대철학의 딜레마는 인식주관(사유)을 독립적 실체로 설정하는 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물론 혹자는 근대철학에서 인식주관을 해체하는 견해도 있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해체라는 것도 인식주관을 전제하고 인식주관이 ‘구성되는’ 인식주관인가 아니면 ‘구성하는’ 인식주관인가의 차이일 뿐이다. 인식주관의 해체도 근대철학의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이라는 이항구도 내의 문제이다. 즉 인식주관을 의식의 문제, 이성의 문제로 한정하는 한 인식주관의 문제는 풀 수 없다. 즉 근대철학의 ‘주관 대 객관의 구도’에서 주관은 육체를 가진 구체적 인간이 아니라 육체와 분리된 사유 자체이다. 이렇듯 사유를 육체와 분리시켜 주관이나 주체로 실체화시키는 점이 근대철학의 문제점이다. 이렇게 사유를 물질과 분리시킴으로서 사유와 물질의 공통점은 사라지고 상호 관계할 수 없게 된다.

근대철학은 육체로부터 분리된 의식, 사유, 정신이 주동적, 능동적이고 물질은 피동적, 수동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물질이라는 질료에 형상을 부여하여 만물이 생성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방식과 같다. 물질은 수동적이고, 이성이나 정신은 능동적이라는 물질관은 맑스 이전의 유물론자들도 공유한 생각이었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1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까지의 모든 유물론(포이에르바하의 것을 포함하여)의 주된 결함은 대상, 현실, 감성이 단지 객체에 또는 직관의 형식하에서만 파악되고, 감성적인 인간 활동 즉 실천으로서, 주체적으로 파악되지 못한 점이다. 따라서 활동적 측면은 유물론과 대립되는 관념론 ─이것은 물론 현실적이고 감성적인, 활동 그 자체는 알지 못한다 ─에 의해 추상적으로 전개되었다. 포이에르바하는─ 사유객체와는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감성적 객체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활동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는 파악하지 못했다.”(≪독일이데올로기1≫, 두레, p. 37, 강조는 맑스)

 

그리고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2번에서 계속하여 말한다.

 

“인간의 사유가 대상적 진리를 포착할 수 있는지 여부의 문제는 결코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다. 인간은 실천을 통해 진리를, 즉 그의 사유의 현실성과 위력 및 현세성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같은 책, p. 38. 강조는 맑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인식주관과 객관대상의 일치의 문제 즉 진리의 문제는 주관 안에서의 논의만으로는 결코 해결 불가능하다. 그것은 감성적인 실천에 의해서만 해결 가능한 문제이다. 인식과 대상이 일치하지 않으면 그 사물 대상의 개조, 변혁에 실패할 것이다. 철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다면, 즉 철이라는 대상과 철에 대한 지식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철을 이용해 도구를 만든다든지 철골구조의 건물을 건설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물 대상에 대한 인식에 의거해서 사물의 개조, 변혁에 성공한다는 사실이 그 인식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인식내용과 인식대상이 일치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객관대상이 자극의 원천으로서 존재할 수 있지만 이 객관대상의 자극에 의해 나타나는 인상, 표상은 주관 속에만 있고 객관대상에로 나아갈 수 없다고 한다면 객관대상에 대한 개조, 변혁은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실천은 물질의 인식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대상과 인식의 일치성에 대한 실천적 증명은 곧 물질이 의식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함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 만약 인식대상이 객관적으로 의식 바깥에 있지 않고 단순히 인식주관의 ‘표상’이나 ‘인상’ ‘관념’일 뿐이라면 처음부터 인식주관과 객관대상의 일치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식주관도 관념이고 인식대상도 관념이기에 비교의 공통성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대상과 인식의 일치성에 대한 문제제기 자체가 인식주관과는 독립적인 물질의 객관성에 대한 문제제기인 것이다. 따라서 인식과 대상의 일치성이 물질적(감성적) 행위라는 실천에 의해 증명된다는 것은 인식대상이 곧 물질적(감성적)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맑스는 이렇게 인식론에 실천개념을 도입함으로서 근대철학의 딜레마를 해결한다. 인식이란 순수한 사고 작용이 아니다. 인식이 있기 전에 인간의 행위가 먼저 있고 행위의 결과가 인식의 내용을 이루고 다시 인식내용에 기초해서 실천함으로서 대상을 개조하고 변혁할 수 있는 것이다. ‘감성적인 인간 활동 즉 실천’은 사유작용이 아니라 물질적 운동이다.

여기서 주관과 주체개념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주관’이 사유의 담당자라면 ‘주체’는 ‘감성적 인간 활동’의 담당자이다. 이런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근대철학의 딜레마가 이 구분을 하지 못하는 데서 근원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라는 물질의 한 속성인 의식을 물질 전체와 관계항으로 설정할 때 나타는 딜레마가 근대철학의 문제였다. 맑스가 의식을 인간의 감성적 활동에 온전히 되돌림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인식작용이란 순수 사유의 영역이 아니다. 객관대상을 인식한다는 것 즉 앎이란 ‘감성적 인간 활동 즉 실천’적 앎이다. 실천적 앎이란 의식차원이 아니라 물질차원의 앎이다. 실천적 앎이란 무엇인가를 할 줄 아는 것, 어떤 것을 변화시킬 줄 아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앎이란 수영을 할 줄 아는,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차원의 앎이다. 수영을 ‘관조(직관)’를 통해 사유작용만으로 배우고 할 수는 없다. 무수한 몸의 활동을 통해, ‘감성적 활동’을 통한 익힘으로만 수영을 배워 할 수 있는 것이다. 앎 즉 인식이란 이런 수영을 ‘할 줄 아는’ 것과 같은 차원의 앎이다.

이러한 실천개념의 인식론에의 도입은 근대철학의 종말과 현대철학에로의 이행의 기준점이 된다.

 

 

  1. 실천개념과 철학의 근본문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맑스주의는 근대철학의 근본문제인 인식론적 문제를 실천개념을 인식론에 도입함으로서 해결한다. 기존의 근대철학은 물질 대 의식의 관계문제를 객관 대 ‘주관(이성)’의 문제틀로 사고함으로서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이를 실천개념을 매개로 해서 객관 대 ‘주체(물질)’로 대체함으로써 해결한 것이다.

그런데 실천개념이 철학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중심적 개념의 위치를 차지하자마자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철학의 근본문제인 ‘존재와 사유’ ‘물질과 의식’관계에서 실천개념이 논리적 정합성을 찾지 못한 것이다. 물질과 의식의 관계문제는 철학의 근본문제로서 모든 철학적 문제를 푸는 기본관점이며 전제인데, 이 근본문제를 해결한 실천은 물질의 객관성과 물질의 의식에의 반영이라는 명제에서는 도출되지 않는다. 결국 실천개념은 물질과 의식의 관계에 대해 외생적이다. 외생적이라는 말은 실천개념의 관계항이 물질과 의식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실천‘주체’와 실천‘대상’은 의식과 물질이 아니라 ‘물질’과 ‘물질’인 것이다.

 

“실천은 주체, 즉 사회적으로 조직된 인류와 객체, 즉 주체의 실천적 작용이 가해지는 객관적 실재의 영역이라는 두 관계항 사이에서 이루어진다.”(철학대사전, 동녘, p. 778)

 

실천개념은 인류와 물질세계 사이의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개념이지 의식과 물질 사이에 의해 형성되는 개념이 아니다. 따라서 실천개념은 물질/의식과 별도의 개념적 원천을 필요로 하였고, 그러므로 해서 물질, 의식, 실천 개념의 관계가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로 인해 물질, 의식, 실천을 모두 철학의 근본문제로 보자는 견해도 있었다(코징). 또는 실천을 철학의 근본개념으로 보고자 하기도 하였다(자이델). 그러나 “실천은 의식에 의해 조종되는 물질적 행위과정”(위의 책, p. 780)이다. 따라서 실천을 맑스주의 철학의 중심개념으로 위치지울 때 물질의 선차성 테제와 대립되는 부분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기존의 실천중심 논의들은 대체로 관념론적 오류에 빠져들게 되었다. 반대 편향도 나타났다. 인류의 주동적 실천을 객관법칙의 자기실현의 기제쯤으로 여기는 과학주의나 객관주의적 편향이다. 이들은 인류의 계급투쟁이 역사발전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철학의 근본문제를 실천의 관계항인 인류와 객관세계의 관계문제로 대체하자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황장엽은 자신의 책 ≪세계관≫에서 “정신은 물질의 속성(성질)이기 때문에 물질과 정신을 대립시켜 물질이 먼저 있었는가 정신이 먼저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세우는 것은 정확하지 못하다”(p. 36)고 하면서 인간과 객관세계의 상호문제만이 ‘세계관적 문제’로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물질/의식의 관계라는 철학의 근본문제를 사람/세계의 관계 문제로 대체하자는 주장은 물질과 의식의 문제가 인류의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인식론적 의의를 간과하는 잘못이 있다.

 

 

  1. 철학의 근본문제 확장의 필요성

 

물질과 의식관계에서 의식이 황장엽이 보듯이 단순히 인간의 속성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물질과 의식의 관계라는 철학의 근본문제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인식론적으로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의 관계

둘째 철학사적으로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의 관계

셋째 존재론적으로 의식이 없는 물질과 의식이 있는 물질의 관계

 

첫째 관계는 위에서 본 바와 같다. 인식론적 문제는 객관적 물질인 인식대상 문제와 인식대상의 인식 가능성 문제이다. 오이저만은 그의 저서 ≪철학의 근본문제≫(세계, 1990)에서 인식대상의 문제를 인식론적 문제로 보지 않고 존재론적 부면으로 설명하고 있다. 물론 물질의 선차성은 의식의 파생성을 말하는 것이고 결국 ‘세계는 물질이다’라는 존재론적 측면을 포함한다. 그러나 철학의 근본물음의 출발점은 ‘세계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아니라 ‘인식의 실재대상은 무엇인가’이다. 즉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이 인식의 실재대상인가’ 아니면 ‘인간의 의식에 표상되는 인상이 인식의 실재대상인가’의 물음이다. 만약 물질과 의식의 관계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물질’과 ‘물질의 속성’을 직접 비교하는 꼴이 되고 만다. 물질과 물질의 속성인 의식은 인식론적 범위를 벗어나면 직접비교할 수 없다. 존재론적으로 전혀 공통성이 없을 뿐 아니라, 의식은 물질의 한 속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하면 고양이가 먼저냐 고양이의 웃음이 먼저이냐는 우문이 되고 만다. 따라서 물질의 객관성 문제는 존재론적 물음이 아니라 인식론적 물음에 한정지어야 한다. 그러면 물질의 선차성과 의식의 파생성에 대한 물음은 사이비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다만 이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의 선차성 문제는 인식론적 문제도 아니고 존재론적 문제도 아니다. 이는 철학사적 대립의 문제이다. 철학사적 문제는 물질과 의식의 관계가 의미하는 두 번째 내용이다. 이는 물질과 의식의 관계라기보다는 유물론과 관념론의 문제이다. 물질과 의식관계의 두 번째 측면은 철학사의 수 천년 동안 세계가 무엇인가에 대한 기본대립구도를 정식화한 것이다. 이 문제도 맑스가 실천개념을 철학에 도입하면서 해결되었다.

마지막으로 물질과 의식문제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한다면 ‘의식 없는 물질’과 ‘의식 있는 물질’의 관계가 된다. 소위 사람과 객관세계의 관계 문제이다. 이러한 물질의 구분은 물질이 층위적 관계로 구조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사람과 세계의 관계 문제는 물질의 층위적 관계 중에서 가장 발달된 ‘의식 있는 물질’과 나머지 층위들 간의 관계이다. 이 물질들 간의 관계 문제는 어떤 층위의 물질이 물질 운동과 변화의 주동성, 능동성을 갖는가 하는 문제이다. 의식 있는 물질과 의식 없는 물질의 관계에서 ‘의식 있는 물질’이 물질운동의 주동성을 갖은 것은 자명한 것이다. 이렇게 의식 있는 물질과 의식 없는 물질을 대비시켜 의식 있는 물질의 주동성, 능동성을 정립함으로서 주관능동성이나 주객변증법 등 실천을 강조한 논의들의 관념론적 편향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즉 주체의 능동성은 주체의 의지나 의식에로 환원하지 않고 주체가 얼마나 실천적 힘을 형성하고 있는가의 문제로 그리고 주체가 실천적 힘을 발휘할 조건의 문제로 규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물질과 의식 개념’으로는 ‘세계와 사람 개념’을 포괄할 수 없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의식은 사람의 속성이다. ‘의식개념’으로 ‘사람개념’을 포괄할 수 없다. 의식이 사람에 속할 수는 있어도 사람이 의식에 포함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물질과 의식 관계’를 ‘사람과 세계 관계’에 포함시키는 논리를 살펴보자. 황장엽이 이런 입장이다. 물질과 의식, 사람과 세계의 개념적 차원에서만 본다면 그럴 수도 있다. 물질은 세계와 등치될 수 있고 의식은 사람에 포함되는 속성이기에 개념적으로만 본다면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물질과 의식이라는 철학의 근본문제는 이런 단순한 개념적 관계만이 아니다. 물질과 의식 관계라는 철학의 근본문제는 인식론적 물음의 두 측면을 함의하고 있으며, 철학사적으로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의 역사를 포함하는 정식화이다. 따라서 사람과 세계 관계 문제라는 존재론적 문제틀에 물질과 의식의 관계 문제가 포괄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물질과 의식의 관계’에 ‘세계와 사람의 관계’가 포함되지도 않는다. 일단 존재론적 문제설정이 물질과 의식의 관계라는 인식론적 틀 밖에 있고, 실천이라는 중심개념을 물질과 의식의 관계 문제로는 해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천은 사람과 객관세계의 문제이기에 사람과 세계의 관계 문제에서는 정립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세계 문제를 물질/의식 문제에서 분리해 새로운 철학의 근본문제로 설정할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질과 의식 관계’와 ‘사람과 세계 관계’를 따로 독립적으로 철학의 근본문제로 인정한다면 인식론과 존재론의 문제나 실천의 철학체계에의 정립문제가 모두 풀린다. 그러나 두 개의 철학의 근본문제 간의 상호관계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뒤에서 다루기로 하자.

 

 

  1. 변증법과 또 다른 철학의 근본문제

 

지금까지는 철학체계 전체의 출발점이자 기초가 되는 철학의 근본문제인 물질과 의식의 관계 문제 그리고 실천개념이 갖는 이론적 문제로부터 출발해서 사람과 세계의 관계 문제라는 새로운 근본문제를 도입하고 확장하였다.

그러나 물질과 의식의 관계가 철학의 근본문제로서 포괄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또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철학의 근본문제와 변증법’의 관계문제이다. 물질의식의 근본문제의 유물론적 대답은 물질이 의식으로부터 독립한 객관성과 의식에 대한 선차성이다. 그러나 이 대답으로는 변증법이 이론적으로 규명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조적 유물론’과의 차이도 찾아지지 않는다. ‘관조적 유물론’과의 차이 문제는 실천개념을 검토하면서 한 측면을 살펴봤다. 이제 ‘관조적 유물론’의 다른 측면인 형이상학과의 차이점인 변증법과 철학의 근본문제를 살펴보자.

맑스주의 철학은 유물론적 변증법이다. 유물론과 변증법은 맑스주의 철학에서 뗄래야 뗄 수 없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맑스주의 철학의 두 축인 유물론과 변증법 중에서 변증법은 철학체계의 기초로 되는 철학의 근본문제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난점을 갖고 있다.

물론 맑스-레닌주의 철학에서 유물론과 변증법은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그러나 유물론과 변증법의 유기적 통일은 이론적 정합성에서의 통일이 아니라 대상적 실재에서의 통일이다. 즉 유물론적 대답을 기초로 대상적 실재(물질)가 형이상학적이 아니라 변증법적 운동을 한다는 것은 수많은 실천(실험과 산업)을 통해 실증된다. 유물론과 변증법의 통일은 실천을 매개로 한 대상적 실재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일관된 유물론적 답변을 고수한다고 하여 변증법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포이에르바하는 철저한 유물론적 입장에 서 있으나 형이상학자이며, 헤겔은 철저한 관념론자이지만 변증법론자이다.

물질과 의식의 관계문제의 대답은 운동법칙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밝혀주지만, 그 대상의 운동법칙이 변증법적인가 아니면 형이상학적인가의 문제에 대한 대답은 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람과 세계의 관계문제도 물질운동의 주동성의 문제와 실천의 문제는 해명해 주지만 물질운동과 실천의 변증법적 문제는 해명해 주지 못한다. 따라서 변증법문제는 물질/의식 문제 즉 유물론의 해명과 사람/세계 문제 즉 운동의 주동성 문제와는 별도의 다른 문제로 설정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제3의 철학의 근본문제가 대두된다.

 

레닌은 ≪철학노트≫에서 변증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변증법이란 대립물이 어떻게 동일할 수 있으며, 어떻게 동일한가(어떻게 동일하게 되는가)─ 그것들은 어떤 조건하에서 상호전화 함으로써 동일하게 되는가 ─왜 인간의 오성은 이러한 대립물들을 죽은 경직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조건적인, 동적인, 상호전화 하는 것으로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관한 학설이다.”(≪철학노트≫, 논장, p. 54.)

 

또 철학대사전에는 변증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변증법은 자연, 사회, 사유의 보편적 운동과 발전의 제 법칙에 관한 철학적 과학이다. 변증법은 연관과 발전의 일반 이론이자 사유와 행위의 일반적 방법으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본질적 구성 요소를 이룬다.”(철학대사전, 동녘, p. 513.)

 

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변증법은 운동론이자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물질의 운동도 변증법적이고 물질의 운동법칙을 인식하는 방법도 변증법적이며 물질을 변혁하는 것도 변증법적이다. 그리고 이런 변증법적 운동과 방법의 기초구조가 대립물의 통일과 상호전화라는 것을 레닌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대립물들의 가장 추상적인 범주는 무엇일까? 앞에서 우리는 인식론의 가장 추상적인 범주는 물질과 의식임을 보았고, 존재론의 가장 추상적 범주는 사람과 세계라는 것을 살폈다. 변증법의 최고의 추상적 범주도 물질/의식이나 사람/세계에 포함될 수 있는지 검토해보자. 변증법이 대립물의 통일을 기본 구조로 하고 있으므로 물질과 의식의 통일을 생각해 볼 때 그 통일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또 다른 추상범주의 대립인 사람과 세계의 한 측면이다. 그런데 사람과 세계는 모두 물질의 하위개념이다. 물질/의식 범주와 사람/세계 범주는 상호 순환구조로 메비우스의 띠처럼 꼬여있다. 어느 하나의 대립범주로 대립물의 최상범주를 설정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또한 물질/의식 문제는 인식론적 물음(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가능성 문제)의 정식화이고, 사람/세계 문제는 존재론적 문제(물질의 상호관계와 물질운동의 주동성의 문제)의 정식화이다. 여기에 운동론, 방법론으로서 물질/의식, 사람/세계의 보편적 운동과 발전의 제 법칙은 무엇인가에 대한 정식화가 필요하다. 물질/의식 문제에서 유물론이 도출되고, 사람/세계 문제에서 물질의 상호관계와 운동의 주동성이 해명되었다. 그러나 자연, 사회, 사유의 보편적 운동과 발전의 제 법칙은 밝혀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 운동과 발전의 보편적 법칙의 가장 추상적 범주로 헤겔 논리학에 따라 ‘존재와 무’의 관계로 설정해 볼 수 있겠다. 존재와 무(있음과 없음)는 물질과 의식, 사람과 세계라는 범주에 포괄되거나 대체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오히려 존재와 무의 관계에는 물질/의식, 사람/세계 범주가 모두 포함되니 ‘존재와 무’를 유일한 최고 범주로 상정하자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맑스주의 이전의 존재론적 범주에 근거하고 있다. 맑스 이전의 존재론의 존재개념은 주로 절대자, 절대정신, 이데아, 신 등을 이르는 범주로 사용되었다. 이들에게 물질은 가변적인 가상이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개념을 이런 존재론적 개념으로 사용한다면 이는 물질과 의식의 관계에서 의식에 포함되는 범주가 되고 만다. 존재개념을 이와 같은 존재론적 개념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존재를 물질이나 의식이 가지고 있는 ‘존재한다는 성질’을 나타내는 ‘속성’이 아니라 물질과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실체’개념이 되고 만다. 이는 형이상학적 관념론의 존재개념이다. 따라서 존재개념을 운동론과 방법론에 한정하여 운동과 발전의 보편적 법칙을 밝히는 일반적 ‘속성(성질)’으로 제한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존재와 무가 변증법의 가장 추상적 개념이 될 수 있는 것은 존재와 무라는 개념이 그 자체로 모순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물질과 의식이나 사람과 세계 범주는 그 자체 모순관계를 표현하지 못한다. 의식 없는 물질이 있을 수 있고 사람 없는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 어떤 특수한 상황과 조건이 주어지지 않는 한 물질과 의식이나 사람과 세계라는 범주에서는 모순적 대립이 도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존재와 무(있음과 없음)은 그 개념자체가 서로를 배척하고 부정한다. 존재와 무는 그 자체가 개념적으로 모순관계에 있다. 이것이 존재와 무가 변증법의 가장 추상적 개념이 될 수 있는 근거이다. 헤겔도 논리학에서 학의 시원으로서 존재와 무로부터 시작한다. 존재와 무가 개념적으로 모순관계이기 때문이다.

 

 

  1. 변증법의 추상개념인 ‘존재와 무’의 관계

 

헤겔은 ≪논리학≫ 첫머리에서 그저 있음을 ‘순수존재’라 하고, 이 순수존재는 단지 있음일 뿐이므로 본질적 특질 등이 없는 무와 같다고 하였다. 그저 있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순수한 있음은 그 내용에서 전혀 아무것도 없다는 이유로 없음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순수존재와 순수무가 합일됨으로써 생성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즉 헤겔의 존재론인 ≪논리학≫의 출발은 무규정적 직접성인 존재일반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점이 맑스주의의 논리학이라 불리는 ≪자본론≫의 방식과 다른 점이다. ≪자본론≫의 시작은 상품의 공통성인 가치의 규정에서 시작하지 않고 구체적 상품에서 시작한다. 각각의 다른 사용가치를 가진 상품이 교환될 수 있는 가능조건을 추적해 상품이란 가치와 사용가치의 통일임을 밝힌다. 헤겔이 가장 ‘추상적인 것’의 전제에서 시작한다면 맑스는 가장 ‘구체적인 것’의 전제에서 시작한다.

헤겔의 길은 모든 존재들 바깥에 순수존재가 실체로서 있다는 전제하에 이 실체로서의 순수존재가 자기전개 과정에서 존재자들이 생성된다고 본다. 그러나 맑스의 길에는 개별적 존재자들 바깥에 실체로서 순수존재는 실재하지 않는다. 존재란 물질개념과 마찬가지로 인간 이성의 추상물이지 감각적 실재물이 아니다. 물질개념이 사물들의 의식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의 객관적 속성을 나타내는 개념이라면 존재는 사물현상들이 현존하고 있다는 속성을 추상화 시킨 개념이다. 우리도 헤겔의 길이 아닌 맑스의 길을 따라가 보자. 어떤 규정도 없는 존재일반이 아닌 다양한 규정들 속에서 현존하고 있는 존재자들로부터 시작하자.

여기에 책상이 ‘있다’. 우리는 책상이 ‘있다’는 것, 그리고 책상 옆에 의자가 ‘있다’는 것을 구별할 수 있다. 그런데 책상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서 파르메니데스의 유명한 말을 떠올려 보자.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이 말처럼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이 없다면 책상은 있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이 ‘없다’면 책상 등 구체적 사물은 있을 수 없다.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도 ‘있어’야 사물은 존재할 수 있다. 책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책상이 없는 부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공간─ 사무실이라고 하자 ─에 책상이 있다는 것은 책상이 차지하지 않는 공간이 사무실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책상은 책상이 아닌 한계, 경계를 통해 존재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없는 것’이 ‘있어야’ ‘있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존재와 무의 통일이다. 존재와 무는 상호 배척하고 부정하는 속성이지만 ‘무’가 있어야 ‘존재’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헤겔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시원의 분석은 어느덧 존재와 비존재의 통일의 개념과 ─혹은 또 반성적인 형식을 빌어 본다면 구별되는 존재와 구별되지 않는 존재의 통일과 ─더 나아가서는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라는 개념을 마련해 주게 된다.”(≪대논리학≫제1권, 임석진역, 분도출판사, p. 64.) 이것을 우리는 모순이라 한다. 존재와 무의 모순관계는 모든 모순 관계의 토대가 되는 개념으로 존재와 무의 관계가 변증법의 근본문제가 될 수 있는 근거이다.

 

존재와 무의 관계를 좀 더 살펴보자. 존재와 무의 통일이란 어떤 것인가? 먼저 헤겔의 말을 들어보자.

 

“이 단순한 직접성을 뜻하는 진정한 표현은 순수존재 혹은 존재 일반으로서, 다시 말하면 그밖에 아무것도 없는, 즉 다른 어떤 규정이나 내실도 갖춘 바가 없는 존재인 것이다.”(위의 책, p. 57. 강조는 헤겔)

 

“결국 시원은 이 양자의 구별될 수 없는 통일을 뜻한다고 하겠다.”(위의 책, p. 64. 강조는 헤겔)

 

헤겔에 의하면 학의 시원으로서의 단순한 직접성은 무규정적 순수존재이다. 이를 ‘순수지의 개념’이라고 한다. 이것은 무규정성의 ‘무’와 순수존재의 ‘존재’가 ‘구별되지 않는 통일’을 뜻한다.

그러나 존재와 무의 통일이 ‘구별되지 않는 통일을 뜻하는’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존재는 주격적 정립이고 무는 술격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위에서는 책상의 비유를 들었는데 여기서는 컵의 비유가 더 적절할 것 같다. 여기 컵이 있다고 하자. 컵은 가운데 빈 공간이 있다. 이 컵이 유용한 이유는 속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이 빈공간이 ‘무’라고 할 수 있다. 컵이 컵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비어 있는 공간인 ‘무’가 있어야 한다. 즉 존재를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존재의 부정이다. 즉 ‘무’이다. 이것이 ‘존재가 주어라면 무는 주어를 규정하고 설명하는 술어이다’는 의미이다. 달리 말하면 무는 존재에 내재한다고 할 수 있겠다. 무가 존재에 내재한다는 말은 삶과 죽음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삶은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즉 삶이라는 존재 속에 죽음이라는 무가 내재해 있다는 의미이다. 존재와 무는 ‘구별되지 않는 통일’이 아니라 존재는 주어로 무는 술어로 구별되는 통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존재와 무의 통일로서의 물질은 모순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와 무의 통일은 어떤 것이 그저 있기도 하고 동시에 없기도 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철수가 지금 여기에 있기도 하고 동시에 없기도 하다거나, 살아 있기도 하고 죽어 있기도 하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모순율에 위배된다. 존재와 무의 통일은 무가 존재에 동일한 주어적 위상에서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는 다만 술어적으로, 즉 존재의 본질을 규정하는 속성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철수는 지금 이곳에 있지만 지금 이곳에서 벗어나는 무화(無化)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철수는 살아 있지만 죽어가는 소멸의 속성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존재와 무의 통일체에서 무의 측면은 사물현상의 본질적 속성으로서 운동과 변화의 원리가 되며 운동과 변화는 존재와 무의 ‘주어와 술어’의 통일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1. 세 가지 철학의 근본문제들의 상호관계

 

세 가지 철학의 근본문제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A: 물질과 의식의 관계 문제

B: 사람과 세계의 관계 문제

C: 존재와 무의 관계 문제

 

A는 인식론으로 물질의 객관성 문제이고, B는 존재론으로 물질의 속성과 상호관계 문제이고, C는 운동론과 방법론으로 물질의 운동과 변화의 보편적 법칙 문제이다.

 

이 세 가지의 철학의 근본문제 중에서 논리적으로 선차적인 문제는 물질/의식 문제이다. 이 문제가 세계관의 기초를 이루기 때문이다. 세계관의 기본적 구분은 유물론이냐 관념론이냐이다. 이 문제가 선차적으로 해명되어야 이에 기초해서 B, C 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 유물론적으로도 관념론적으로도 B, C 문제에 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A문제는 철학의 근본문제들의 관계에서 선결적 근본문제가 된다. A문제가 해명되고 나면 다음으로 물질의 근본속성에 대해 심화 발전된 인식으로 나아간다.

우리의 인식대상이 객관적 물질이고 이 물질을 인식가능하다면 이 물질은 무엇인가라는 물질의 성질과 물질 간의 관계에 대한 탐구로 발전하게 된다. 물질은 시작도 끝도 없다. 즉 무한하다. 물질은 변화하기는 하지만 소멸하지 않는다. 즉 영원하다. 물질은 안도 없고 밖도 없다. 즉 유일자이다. 이런 물질의 특징들을 가능하게 하는 속성이 무엇일까? 위와 같은 특징들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어야 성립한다. 시작이 있다면 시작 이전의 시작의 원인이 되는 다른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운동 변화도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물질 운동의 원인이 물질이 아니라면 물질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있어야 하고 이는 유물론에 위배된다. 물질의 무한성, 영원성, 유일성은 곧 물질의 ‘자기원인’이라는 성질을 전제로 할 때만 성립한다. 물질 이외에 어떤 원인자가 없어야 한다. 따라서 ‘자기원인성’이 물질의 제일의 보편적 성질이 된다. 이는 물질의 능동성, 주동성, 자주성으로 나타난다.

물질은 끊임없이 운동 변화 발전한다. 물질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물질은 쉼 없이 운동한다. 단순히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획일적인 것에서 다양한 것으로 발전한다. 물리적 운동, 화학적 운동, 생물학적 운동, 사회적 운동으로 복잡해지고 그 만큼 물질의 다양성도 커진다. 이런 복잡성과 다양성으로 운동하고 발전하는 특성은 어떤 성질을 전제로 할까? 그것은 창발적 성질이다. 창발성이란 어떤 요소들이 결합했을 때 그 요소의 속성에 속하지 않는 성질이 생겨나는 현상을 말한다. H₂O는 H에도 O에도 없는 성질이 있다. 이렇듯 구성요소로 환원되지 않는 성질을 만들어내는 물질의 특성을 창발성이라 한다. 물질은 이런 창발적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변화하는 게 아니라 발전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즉 ‘자기원인성’과 ‘창발성’이 물질이 스스로 존재하고 운동 발전하는 바탕이 되는 물질의 근본성질이다.

그리고 이 창발성에 의해 물질은 다양해지고 여러 층위로 발전하게 된다. 물리, 화학, 생물, 사회 등 물질의 층위는 복잡성에 따라 수직적 층위를 갖게 된다. 각 층위마다 운동양태와 운동법칙이 달라진다. 이런 물질적 층위의 차이에 따라 물질과 물질 간의 관계가 주동성과 피동성의 차원에서 형성되게 된다. 보다 복잡하고 고차원적 물질이 단순하고 저급한 물질보다 주동성과 능동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 복잡성과 고차성의 정점에 인간이 있다. 인간은 물질 발전의 최고 정점에 위치한다. 가장 발달한 물질인 인간은 다른 저급한 물질들과 구분되는 고유한 속성을 갖는다. 그것은 목적의식성이다. 따라서 의식성을 고유한 속성으로 갖는 물질이 그렇지 못한 물질에 비해 상호관계에서 주동성과 능동성을 갖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사람과 세계의 관계문제이다.

물질/의식 문제가 철학의 근본문제 중에서 ‘선결적 문제’라면 사람/세계 문제는 철학의 근본문제 중에서 ‘중심적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람/세계 문제가 ‘중심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세계 문제를 중심으로 삼아야 물질/의식의 문제도 완벽하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실천개념을 검토하면서 언급한 바 있다.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윤구병의 존재론 강의≫, 벼리, p. 177.)는 말이 있듯이 계급사회에서 순수객관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객관성의 확보는 노동자 민중의 입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물질의 객관성도 물질 중에서 가장 발전된 물질을 중심으로 물질의 상호관계를 파악할 때 담보된다. 사회를 사회 구성요소들 중에서 주동성과 창발성을 가장 잘 체현한 노동자 민중을 중심으로 고찰할 때 사회의 객관적 합법칙성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듯이 물질의 객관성도 물질 중에서 가장 주동적이고 창발적인 물질을 중심으로 고찰해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이 점이 사람/세계 문제가 철학의 근본문제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근거이다.

 

다음으로 ‘존재와 무의 문제’와 ‘다른 두 근본문제’와의 관계문제이다.

‘존재와 무의 관계 문제’도 나머지 두 근본문제와 상대적 독자성을 가지면서도 다른 근본문제들과 상호의존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물질/의식 문제가 ‘선결문제’이고 사람/세계 문제가 ‘중심문제’라면 ‘존재와 무의 관계 문제’는 ‘포괄적 문제’라 할 수 있다. 포괄적이란 존재와 무의 관계문제가 미치는 범위를 의미한다. 이 문제는 물질/의식의 문제에도 사람/세계의 문제에도 동등한 가치와 수준에서 영향을 미친다. 물질 일반의 구조와 운동의 원리도, 의식의 구조와 운동의 원리도, 사람이나 세계의 구조와 운동의 원리도 모두 변증법적 구조와 운동의 보편적 법칙을 따른다. 주관성이나 객관성에도 상관없이, 주동성이나 피동성에도 무관하게 구조와 운동의 보편적 원리는 변증법적 원리가 관철된다. 이러한 포괄성으로 말미암아 존재와 무의 관계 문제는 어느 하나의 근본문제에 속하지 않고 독자적 근본문제로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존재/무 관계가 독자적 근본문제로 되는 근거는 그 방법론적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방법이란 “1) 새로운 인식을 얻기 위해, 또 인식을 근거지우고 검증하기 위해 인식 활동에서 어떠한 조치들이 취해져야 하는가에 대해, 2) 객관적 실재(자연과 사회)를 변화시켜 특정한 목적을 이루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어떤 식으로 실천적 활동이 행해져야 하는가에 대해 일정한 지침을 주는 근본명제, 요구, 규정 내지 규칙들의 체계”(철학소사전, 동녘, p. 145.)이다.

경험론과 합리론이 진리인식의 대표적 방법으로 근대 방법론의 출발점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 두 방법론은 인식과정과 사유과정의 어느 한 측면만(경험론은 경험, 합리론은 이성)을 절대화 시키는 형이상학적 한계를 지닌다. 다음으로 나타난 방법론은 역학적 운동에 기반한 기계론적 방법론이다. 뒤 이어 나타난 것이 변증법적 방법론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주로 주관의 논리적 사유방법으로 발전하였다. 물질/의식의 문제가 해명된 뒤에야 변증법은 세계관인 동시에 자연과 사회를 인식하고 변혁하기 위한 방법론의 자리에 서게 된다. 그리고 세계를 인식하고 변혁하는 사람의 주동적 실천의 방법론적 기초로도 설정되게 된다. 이렇듯 존재/무 관계 문제는 자연, 사회, 사유의 구조와 운동의 보편적 법칙을 해명하고 그 방법론적 기초로 됨으로서 독자적 철학의 근본문제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존재/무 관계 문제’는 ‘물질/의식 관계 문제’, ‘사람/세계 관계 문제’의 해명에 기초해서만 자신의 세계관적, 방법론적 위치를 명확히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변증법적 세계관과 방법론을 통하지 않고는 ‘물질/의식 관계 문제’나 ‘사람/세계 관계 문제’는 해명될 수 없는 문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앞의 두 근본문제와 별도로 ‘존재/무 관계 문제’가 철학의 근본문제로 정립되는 것이다.

 

  1. 철학의 근본문제와 물질개념의 확장을 바라며

 

이상에서 맑스주의 철학이 안고 있는 ‘물질’, ‘실천’, ‘변증법’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 간의 논리적 정합성의 결여라는 문제의식을 출발점으로 해서 철학의 근본문제를 세 가지로 확장해 보는 과감한 시도를 해보았다. 무모한 시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쏘련이 붕괴한 이후의 여러 고민거리를 정리할 필요성에서 제기하게 되었다. 쏘련의 멸망은 외부적 요소도 있겠고, 많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회의 변화에 특히나 물리적 지배관계를 기반으로 사회를 지탱하지 않고 사람들의 연대와 사상적 통일성으로 사회를 지탱하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그 사회를 지탱하는 세계관이 차지하는 영향이 다른 요소들보다 크다. 세계관의 검토가 쏘련 멸망의 근원적 원인 규명의 단초인 것이다. 이 글은 쏘련 멸망의 근원적 원인 탐구의 문제의식에 의한 개인적 고민의 결과이다. 물론 필자가 전문학자도 아니고 직장생활로 인해 시간적 여유도 없는 관계로 인해 글의 정밀한 개념구사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필자도 느끼는 바이다. 따라서 독자들이 근원적 문제의식에 관심을 가져 주면 좋겠고, 또 문제의식을 풀어내는 과정의 오류를 지적하고 새로운 대안을 적극 제기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확장된 물질개념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먼저 아파나세프는 레닌의 물질개념에 “현존하는 모든 것의 내적인 궁극원인”(아파나세프, ≪대중철학개론≫, 사상사, p. 45.)을 추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물질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정의도 있다. “의식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이며, 모든 관계, 속성, 운동의 본체”(≪철학사전≫, 힘, p. 219.)라는 규정이다. 위와 같은 물질개념들에는 물질의 객관성뿐만 아니라 ‘내적인 궁극원인’이나, ‘관계, 속성, 운동의 본체’라는 존재론적인 내용을 추가하고 있다. 만약 철학의 근본문제를 위에서 검토한 세 가지로 확장하는 논의가 받아들여지든지, 아니면 그 문제 의식적 차원의 내용이 맑스주의에 수용될 수 있다면 물질 개념도 확장될 필요성이 대두된다. 아파나세프나 ≪철학사전≫의 물질개념은 이런 물질개념의 확장 필요성을 보여준 대표적 예이다. <노사과연>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3개의 댓글

  • 세미나 광고에서 언급한대로 지젝에 대한 비판은 CPGB(ML)정도에서 일부나마 했던 비판 정도가 있는데 아직 전면적인 주제로 지젝을 취급한 ML 주의의 문서를 찾아보기가 힘들지요. 저 지젝은 그 분의 재장전을 주장하고 있지만 재장전한 것은 저와같은 분석대로 오발탄 그 자체입니다. 물론 국내의 어떤 단체 아마 변혁재장전인가 하는 곳도 재장전한건 변혁이 아닌 오발탄입니다만 국내나 국외나 저런 오발탄을 장전하는 자들때문에 나빠져 온 것 아니겠습니까?

  • 변증법에 대한 학습이 안된 것 같은 글인데… 물질과 의식의 문제는 물질 따로 의식 따로가 아니라 물질과 의식의 관계, 과정으로서 물질, 과정으로서 의식을 다루는 문젠데… 글전반이 스콜라틱함…

    • 학습이 안되기는 뭐가 안돼있어요… 공부를 안 했다면 저 정도 글이 나올거라 생각하나요? 우월감 바탕으로 그런 식으로 비하하는 모욕 내뱉지 마세요. 공산주의 이념에서는 형제애와 인간애를 강조하지 않나요? 지금 여기서부터 실천 가능하지 않으면, 내일도 불가능합니다. 내일 당장에 사회주의 혁명정권이 들어 선다해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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