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11)

 

 

 

 

문영찬 | 연구위원장*1)

 

[목차]

머리말

제 1 장 세계관과 철학의 근본문제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 철학의 근본문제

  3. 세계의 통일성

제 2 장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의 역사

  1. 철학의 발생

  2. 데모크리토스 노선과 플라톤 노선의 투쟁

  3. 아리스토텔레스

  4.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에 의한 고대 원자론의 계승, 발전

  5.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 토마스 아퀴나스

  6.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브루노, 갈릴레이, 뉴턴

  7. 베이컨, 홉스

  8. 데카르트

  9. 스피노자

  10. 로크

  11. 라이프니츠

  12. 흄

  13. 디드로, 엘베시우스, 돌바하

  14. 볼테르, 루쏘

  15. 칸트

  16. 피히테, 셸링

  17. 헤겔

  18. 포이에르바하

제 3장 맑스, 엥겔스에 의한 철학에서의 혁명

  1. 맑스, 엥겔스에 의한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의 창시

  2. 변증법적 유물론의 범주들

    1) 물질과 운동

    2) 공간과 시간

    3) 물질과 의식

    4) 원인과 결과

    5) 개별-특수-보편

    6) 필연성과 우연성

    7) 본질과 현상

    8) 가능성과 현실성

    9)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

    10) 모순 혹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내용과 형식)

    11) 부정의 부정

    12) 인식론
3. 자유와 필연성

  4. 목적의식성

  5. 사적 유물론의 범주들

 6. 레닌, 스탈린, 마오쩌뚱, 그람시에 의한 맑스주의 철학의 발전

제 4 장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사조에 대한 비판

  1. 콩트, 밀

  2. 쇼펜하우어, 니체

  3. 후설

  4. 하이데거

  5. 프로이트

  6.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7. 샤르트르

  8. 하버마스

  9. 알튀세르, 발리바르

  10. 푸코, 들뢰즈, 데리다, 라캉

  11. 지젝

  12. 자율주의

  13. 이진경

  14. 롤즈의 《정의론》, 마이크 샌덜의《정의란 무엇인가》

제 5 장 과학의 발전과 그에 대한 철학적 일반화

제 6 장 철학과 종교

제 3 장 맑스, 엥겔스에 의한 철학에서의 혁명

6. 레닌, 스탈린, 마오쩌뚱, 그람시에 의한 맑스주의 철학의 발전

1) 레닌

레닌주의는 흔히 제국주의 시대의 맑스주의라 일컬어진다. 레닌에 의해 정립된 전위당 노선, 부르주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제국주의론,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사회주의 변혁과 민족해방투쟁의 관계, 사회주의 건설론 등은 20세기 사회주의운동을 규정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레닌의 노선과 투쟁은 철학적 사고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데 레닌은 맑스주의에서 정치는 철학적 사고에 기반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레닌은 계급투쟁을 이끌고 전진시키면서 항상 철학적 사고를 가다듬어 갔고 철학적 쟁점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을 가하고 쟁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밝혔다.

레닌의 대표적인 철학적 저서인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은 레닌의 철학적 사고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은 1905년의 1차 러시아 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반동이 지배적이 되고 당 조직이 약화되고 심지어는 와해되고 사상적으로는 맑스주의에 대한 공격,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침투가 강화되던 시점에 경험비판론이라 불리는 마하주의와의 철학적 논쟁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이 쓰인 1909년은 러시아에서 반동이 정점에 달하던 시기였는데 바로 이 시기에 레닌은 철학을 통해 반동의 시대를 헤쳐 나갔다.

경험비판론은 마치 자신들이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포장을 하고 19세기 후반부터 거세진 과학에서의 새로운 발견과 새로운 조류를 관념론적으로 해석하려고 했는데 레닌은 경험비판론 혹은 마하주의가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의 재탕이라는 것을 밝히고 또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 가져온 과학의 위기를 철학적으로 일반화하여 맑스주의 철학을 새롭게 전진시켰다.

19세기 후반에 물리학에서는 전자, 방사능 등이 새롭게 발견이 되었는데 당시에는 전자와 방사능을 물질로 파악하지 못하고 거꾸로 물질이 붕괴되는 것으로 파악했었다. 왜냐하면 당시까지 물질의 최소단위는 원자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따라서 원자가 붕괴하여 방사능이 발생한다는 것은 곧 물질의 붕괴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발견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이 틈을 노려 관념론자들이 물리학 등의 과학을 관념론적으로 이끌어가려고 하는 것이 과학의 위기, 물리학의 위기의 진정한 원인이라는 것을 레닌은 규명했다.

레닌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이룩한 가장 커다란 공적은 물질 개념을 정립한 것이었다. 엥겔스에 의해 철학의 근본문제가 정식화되었지만 존재와 사고, 자연과 정신 등의 범주로 표현되었는데 당시는 과학의 발전의 성과를 담는 물질 개념이 정식화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닌은 전자, 방사능, 전자기학의 발전 등 과학의 발전을 반영하여 물질 개념을 재정립했다. “물질이란 인간의 감각에 의해 주어지고, 우리의 감각에 의해 복사되고 촬영되고 모사되지만, 그것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표현하기 위한 철학적 범주이다.”1) 이러한 물질에 대한 정의에서 ‘모사’개념을 통해 인간의 인식은 외적 세계의 반영이라는 반영론이 천명되고 있고 물질의 본질은 의식, 감각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실재임이 정식화되고 있고 또한 물질과 의식의 대립은 철학적 영역 내부의 문제라는 것이 표현되고 있다. 그리하여 물질 개념에 대한 이러한 정식화를 통해 전자, 방사능 또한 물질에 포함되게 되고 그에 따라 과학의 영역에서의 혼돈이 극복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레닌은 19세기 후반에 맑스주의 진영으로 침투해 들어오던 신칸트주의에 맞서 유물론을 수호하는데 마하주의자들이 칸트의 물자체 개념을 갖고 들어오는 것에 대해 단호히 비판을 가했다. 칸트의 물자체(物自體)는 인간의 감각,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실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불가지론이었다. 이에 대해 레닌은 실험과 산업 등의 실천을 통해 우리가 그 물(物)을 우리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재생산한다면 물자체는 우리를 위한 물(物)로 전화된다는 엥겔스의 관점을 들어 신칸트주의를 반박했다.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은 당시 과학의 발전을 철학적으로 일반화하고 있는데 물리학상의 위기에 대한 해명, 물리학에서의 관념론적 조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물질이 소멸한다는 견해에 대한 비판인데 물질의 소멸이라는 관념은 당시 물리학에서의 혼돈을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전자, 방사능 등의 발견은 그것이 아직 물질로 파악되지 못했기 때문에 물질이 비(非)물질로 전화한다는 관념을 발생시켰다. 이에 대해 관념론자들은 “원자는 탈물질화되며 … 물질은 소멸한다”2)고 파악했다. 이에 대해 레닌은 물질의 소멸 관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물리학자들이 ‘물질은 소멸한다’고 말한 의미는, 지금까지는 과학이 물리적 세계의 연구를 세 개의 궁극적 개념: 즉 물질, 전기, 에테르로 환원시켰는데; 현재는 전기와 에테르만이 남았다는 뜻이다. … ‘물질은 소멸한다’는 말은 우리가 물질에 대하여 지금까지 알고 있던 인식의 한계가 소멸한다는 뜻이고, 이것은 우리의 인식이 더 깊이 들어간다는 뜻이며; 이전에는 절대적, 불변적, 근원적으로 여겨지던 물질의 성질(불가입성, 관성, 질량 등)이 마찬가지로 소멸하고 이제는 그것이 상대적이며 오직 물질의 일정한 상태에서만 특징적임이 밝혀진다는 뜻이다.”3) 원자의 붕괴 그리고 원자의 구성에서 전자의 발견은 물질의 붕괴로 파악되었는데 레닌은 이에 대해 물질의 소멸로 파악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으며 물질의 소멸이라는 관념은 물질의 성질에 대한 인식의 한계가 무너지는 것이며 따라서 물질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임을 밝혔다.

또한 물리학에서 관념론적 견해의 대표적인 것이 오스트발트의 에너지론이었는데 레닌은 이에 대해서도 정확한 비판을 가했다. 오스트발트는 에너지 개념을 신비화시키고 관념론적으로 해석했는데 에너지는 물질과 정신의 대립을 뛰어 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물질을 전제하지 않는 에너지가 가능하다고 보았는데 레닌은 바로 이 점을 비판하면서 오스트발트의 에너지론이 물질 없는 운동을 상정하는 것이라고 통렬하게 반박했다. “오스트발트는 “에너지”라는 말을 무한히 확장시켜 사용함으로써 이 불가피한 철학적 갈림길(유물론 또는 관념론)을 회피하려 애쓴다. … 만약 에너지가 운동이라면 당신은 단지 난점을 주어에서 술어로 옮겨놓았을 따름이며, 물질이 운동하느냐? 하는 문제를 에너지는 물질이냐? 하는 문제로 변화시켰을 뿐이다.”4) 오스트발트의 견해는 “물질과 정신의 양 개념을 에너지 개념에 종속시킴으로써 결합시키”5)려 하였는데 바로 이 점이 혼동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런데 물질이 에너지로 전화한다고 할 때 그 때의 에너지는 비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의식 밖의 객관적 현상이므로 에너지 또한 물질적 현상인데 오스트발트는 이러한 관점을 거부하고 에너지는 물질과 정신의 대립을 뛰어넘는 개념이라고 본 것이다. 에너지가 물질과 정신의 대립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실은 에너지는 물질을 전제하지 않는, 비물질적인 현상이라고 보는 것인데 에너지가 가리키는 것이 실은 운동이므로 이러한 오스트발트의 에너지론은 물질을 전제하지 않는 운동, 물질과 운동의 분리를 상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레닌은 물질과 운동의 분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운동을 물질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사유를 객관적 실재로부터 분리시키는 것, 또는 나의 감각을 외적 세계로부터 분리시키는 것―한마디로 말해서 관념론 쪽에 붙는 것과 같은 것이다.”6) 고양이가 내 앞에서 웃고는 사라졌다고 할 경우 운동과 물질의 분리를 주장하는 견해에서는 고양이는 가고 없는데 고양이의 웃음은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질은 없는데 운동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의 어리석음은 곧 간파되는데 물질과 분리된 운동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이는 운동 자체가 물질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물질과 운동의 불가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형이상학적, 즉 반(反)변증법적 유물론자는 운동(비록 일시적이고, “최초의 충격” 이전 등등이긴 하지만)이 없는 물질의 현존을 용인할 것이다. 그러나 변증법적 유물론자는 운동을 물질의 불가분한 성질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운동 등을 단순화시키는 견해도 거부한다.”7) 운동을 물질의 불가분한 성질로 파악하는 것은 물질의 성질로서 운동이라는 점에서 유물론적 관점이면서 동시에 운동과 물질의 연관성을 승인한다는 점에서 변증법적이다. 레닌은 오스트발트의 에너지론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에너지론적 물리학은 물질 없는 운동을 생각하려는 새로운 관념론적 시도의 원천이다.”8)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 신칸트주의, 마하주의에 맞서 유물론을 수호하고 19세기 말 이후의 과학의 발전을 철학적으로 일반화한 것이었다면 ≪철학노트≫는 제국주의 전쟁 시대에 혁명을 준비하면서 헤겔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변증법적 사고를 비약적으로 전진시킨 저서이다. 레닌은 ≪철학노트≫에서 논리학=인식론=변증법의 정식을 정립한다. 레닌은 “≪자본론≫에는 논리학, 변증법, 유물론의 인식론 이 세 개의 낱말은 필요 없다. 그것은 하나이면서 동일한 것이다.”9)라는 인식을 세운다. 왜 논리학=인식론인가? 왜 그것은 또한 변증법과 동일한 것인가? 이에 대해 레닌은 헤겔을 분석하면서 논리학이 인식 발전의 집약임을 말한다. “논리학은 인식에 관한 학설이다. 즉, 인식론이다. 인식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반영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직접적인, 총체적인 반영이 아니라 일련의 추상화, 정식화, 여러 개념들이나 법칙들 등등의 형성 과정이다. … 여기서 실제로 객관적인 세 개의 항이 있다. 1) 자연, 2) 인간의 인식=인간의 두뇌(바로 상술한 자연의 최고 산물로서의 두뇌), 그리고 3) 인간의 인식 안에서 자연을 반영하는 형식. 그리고 이러한 형식이야말로 다름 아닌 개념, 법칙, 범주 등등이다.”10) 레닌이 논리학=인식론이라고 단호히 선언하는 근거는 인간의 인식과정의 본질에 있다. 인간의 인식은 자연의 반영이며 그것은 직접적 반영이 아니라 추상화 작용을 거치는 반영인데 이 추상화의 형식이 개념, 법칙, 범주 등의 논리이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논리의 집약이 논리학이며 따라서 인식론=논리학이라는 정식이 성립한다. 그런데 그러한 개념, 법칙, 범주 등은 또한 변증법이기도 하며 따라서 변증법=논리학=인식론이라는 정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레닌이 정립한 이 정식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 반영론을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며 반영론에 대한 속류적인 비판을 극복하고 변증법적 논리학과 인식론의 발전의 전망을 열어젖힌 것이다.

또한 레닌은 두 개의 대립하는 발전관을 세우는데 진화적 발전관과 변증법적인 발전관이 그것이다. “두 개의 근본적인(혹은 두 개의 가능한? 혹은 역사에서 관찰된 두 개의?) 발전(진화)관은 감소 및 증가로서의, 즉 반복으로서의 발전과, 그리고 다른 하나는 대립물의 통일(통일물의 상호배제하는 대립물들로의 분열과 그것들 간의 상호관계)로서의 발전이다.”11) 이러한 발전관의 문제는 변증법의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 법칙에 기초하는데 레닌은 이를 발전관의 문제로 정식화한 것이다. 이 세계, 자연, 인간사회는 점진적인 양적 발전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양적 변화의 중단과 질적인 비약으로 이루어지는가가 레닌이 제기하는 발전관의 요지이다. 그런데 레닌은 여기서 질적인 비약 혹은 변증법적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것이 대립물의 통일로서 발전이기 때문임을 드러내고 있다. 즉, 양적 변화가 질적인 비약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것이 대립물의 통일 즉, 모순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모든 대상은 내적 모순이 있고 내적 모순을 구성하는 대립물은 상호 대립하면서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운동을 하게 되고 양적인 운동은 대립물 중의 한 측면이 다른 측면을 극복하게 되면서 질적인 비약을 하게 된다. 레닌은 이러한 변증법의 원리를 발전관의 문제로 정식화한 것이다.

레닌이 ≪철학노트≫에서 변증법적 인식을 전면적으로 심화했다는 점은 그가 관념론을 평가하는 대목에서 두드러진다. 유물론에서 볼 때 관념론은 일반적으로 부조리이고 허황된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이러한 관점에 머물지 않고 관념론의 내적 원리를 변증법적 관점에서 파악한다. “철학적 관념론은 조잡하고 단순하며 형이상학적인 유물론의 입장에서 볼 때, 단지 부조리일 뿐이다. 이에 반해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보는 철학적 관념론은, 인식의 특징들, 측면들, 한계들 중의 하나를 물질이나 자연으로부터 분리시켜 신격화된 절대자로까지 일면적으로 과도하고 [극단적으로] (디츠겐) 전개(확장, 확대)시킨 것이다. 관념론은 신앙주의이다. 정말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관념론은 (“보다 정확히 말해” 그리고 “이 점 외에”) 무한히 복합적인(변증법적인) 인간 인식의 뉘앙스들 중의 하나를 뛰어넘어 신앙주의로 나아가는 길이다.”12) 관념론은 인간 인식의 특징들의 하나를 절대화시키고 과도하게 확장시킨 것이라는 레닌의 파악은 매우 변증법적이다. 인간의 인식은 그 자체로 변증법적인데 감성과 이성, 직관과 개념 등등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연쇄가 인간 인식이다. 레닌은 인간 인식의 이러한 변증법적 성격을 전제로 관념론이 그러한 인식과정의 특정한 측면을 과장하고 절대화한 것이라는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객관적 관념론의 시조인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개별과 보편의 연관에서 보편 개념을 자립화하고 절대화시킨 것이다. 헤겔의 절대정신은 인간의 이성적 측면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켜 절대화한 것이다. 이렇게 관념론의 내적 원리, 본질을 파악함에 의해 변증법적 유물론은 관념론을 원리적으로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맑스주의에서 철학은 관념론과 같이 독립적이고 관조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통일되어 존재한다. 맑스 자신이 철학과 정치의 통일을 이루었고 이러한 성격은 레닌에 이르러 한층 강화되었는데 철학과 정치의 긴밀한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이 민주주의와 독재에 대한 레닌의 접근이다. 1917년 10월 혁명이 승리하고 내전을 겪으면서 노동자계급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이루어가는 상황에서 카우츠키는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비판하면서 ‘독재인가, 민주주의인가’라는 쟁점을 제기하였다. 카우츠키는 속류적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비판했는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독재이기 때문에 말 그대로의 독재가 아니며 사회주의 변혁은 민주주의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레닌은 카우츠키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독재와 민주주의 문제를 바라본다고 비판했다. 독재와 민주주의의 내적 연관에 대해 카우츠키는 의도적으로 무시했는데 바로 이 점을 레닌은 비판했다. 레닌은 카우츠키의 순수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비판한다. “‘순수한 민주주의’는 국가의 성격과 계급투쟁의 양자에 대한 이해의 결여를 드러내는 무지한 수사일 뿐만 아니라 세배나 공허한 수사인데 왜냐하면 공산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변화하고 습관으로 되는 과정에서 사라질 것이며 결코 “순수한” 민주주의가 되지 않을 것이다.”13) 카우츠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에 기반한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주장할 때, 그 때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일반, 순수한 민주주의를 가리키는 것인데 레닌은 그러한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레닌은 민주주의를 다수와 소수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자유주의적 접근이며 다수와 소수의 문제 이전에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라는 문제가 근본적임을 주장한다. 즉, 민주주의와 독재의 문제에서 자유주의적 입장에 설 것인가, 아니면 계급적 입장에 설 것인가가 레닌이 카우츠키에 대해 제기한 방식이었다. 레닌은 계급적 관점에 설 때만 민주주의와 독재의 연관성을 해명할 수 있고 부르주아적 독재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그리고 이와 대립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라는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동시에 부르주아 독재이기도 하다는 점,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동시에 광범하고 전면적인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전제한다는 점은 계급적 관점을 기초로 하는 변증법적 인식이다. 이렇게 레닌은 독재와 민주주의에 대한 속류적, 자유주의적인 카우츠키의 접근에 대해 독재와 민주주의의 변증법을 대치시켰다. 독재와 민주주의를 카우츠키처럼 절대적으로 대립시키는 것은 형이상학적이다. 그러나 실제로 독재와 민주주의는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 레닌이 이를 해명한 것은 철학과 정치의 통일을 보여준 것이며 나아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레닌은 맑스주의 철학에서 많은 영역을 개척했다. 당건설의 철학적 토대로서 목적의식성의 문제를 해명했고 전술에서 객관적인 자본주의 발전과 그에 대응하는 주관의 작용으로서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의 문제를 정립했다. 또한 제국주의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사적 유물론적 차원에서 독점 단계의 자본주의론을 세웠다. 또한 19세기 후반의 과학적 발전을 철학적으로 일반화하여 물질 개념을 정립했고 이후 변증법=인식론=논리학이라는 정식을 수립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의 발전을 촉진했다.

2) 스탈린

스탈린은 공과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특히 20세기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난 후 그 모든 것의 원인이 스탈린에게 있는 듯이 악마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비과학적인 접근이고 사실상 20세기 사회주의가 이룩했던 모든 성과를 무화(無化)시키는 것이다. 맑스-레닌주의자는 이러한 접근을 거부하고 스탈린의 공적과 과오를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한다. 더욱이 인류 최초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하고 나아가 사회주의 건설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스탈린은 단순한 청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스탈린으로 표현되는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분석은 여기서 고찰의 대상이 아니지만 맑스주의 철학의 영역에서 스탈린이 차지했던 내용 또한 적지 않다.

스탈린은 1938년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시기는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이 성공적으로 달성되고 경제 전체가 계획경제로 이행한 시기였고 또 2차 대전 직전의 상황으로서 전쟁의 기운이 높아지던 때였다. 위 논문이 발표된 것은 경제와 정치 영역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를 일정하게 해결하고 난 후에 철학의 영역에서 쏘련 사회의 방향을 결정할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스탈린의 위 논문은 그리하여 쏘련에서 철학 교과서의 집필의 지침이 되었는데 이 논문은 20세기 맑스주의 철학의 발전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스탈린은 “변증법적 유물론은 맑스-레닌주의 당의 세계관이다.”14)고 파악한다. 이 언급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세계관의 문제이며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당의 세계관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당이 세계관을 가질 수 있는가가 논쟁이 될 수도 있지만 변증법적 유물론 자체가 당파적 철학이며 세계관이라는 점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스탈린은 변증법을 ‘방법’으로 파악하고 형이상학의 대립물로 본다. 변증법의 내용으로는 제 물질과 현상, 대상의 상호연관의 문제, 세계를 부단한 운동과 변화의 상태로 본다는 것,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 모순의 문제 등을 언급한다. 그런데 스탈린의 언급에서 빠져 있는 것이 있는데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엥겔스가 변증법의 3대 법칙의 하나로 정식화했던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다. 변증법적 부정의 연속으로서 부정의 부정의 법칙은 발전의 방향성을 가리키는 것인데 스탈린의 논문에서는 빠져 있지만 이후 쏘련의 철학 교과서들에는 포함되어 있다.

스탈린은 유물론에 대해서 철학의 근본문제를 정리하고 불가지론을 비판한다. 또한 세계를 운동하는 물질로 파악한다. 그리고 철학적 유물론의 원칙들을 사회적 실천에 확장시킬 것을 강조한다.

스탈린은 사적 유물론에 대해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의 관계라는 근본문제를 정리하고 지리적 문제, 인구의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밝힌다. 지리적 조건은 사회적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조건의 하나임이 분명하지만 결정적인 영향력이 아니며 한 사회가 노예제, 봉건제, 자본제를 거치는 동안에도 지리적 조건은 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논거를 들고 있다. 또한 인구에 대해서도 인구의 증대가 사회의 발전에 대해 많은 영향을 미치지만 결정적인 영향력은 아닌데 왜냐하면 인구증대가 사회발전의 관건이라면 인구밀도가 높은 사회가 더 높은 사회체제가 되어야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논거로 들고 있다. 그러면서 사회체제를 결정하는 힘, 사회의 발전을 결정하는 주요한 힘은 물질적 생산양식이며 생산력의 문제임을 주장한다. 지리적 조건과 인구의 문제를 사적 유물론적 차원에서 검토한 것은 스탈린의 주요한 이론적 기여인데 이는 쏘련에서 실제적인 사회주의 건설의 경험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스탈린은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의 사적 유물론에 대한 정식화된 내용을 인용하면서 논문을 끝맺는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에 대한 매우 간략한 정식화를 이루고 있는 이 논문은 쏘련의 철학 교과서의 저술 지침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의 기본적인 원칙들의 정식화라고 할 수 있다.

스탈린은 철학에 대한 전문적인 저술보다 실천적 활동을 통해 철학적 의미를 갖는 많은 내용을 제기하였다. 주요한 것으로는 민족문제에 대한 이론적 기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의 발전,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문제, 사회주의 경제의 발전 법칙의 정식화 등이라 할 수 있다.

스탈린은 1913년에 레닌과 협력하여 민족문제에 대한 논문을 쓰는데 <맑스주의와 민족문제>가 그것이다. “민족은 역사적 범주일 뿐 아니라, 특정 시대, 발달하는 자본주의의 시대에 해당하는 역사적 범주이다. 봉건제의 폐지와 자본주의의 성장과정은 동시에 민족적 형성 과정이다.”15) 이러한 스탈린의 규정에서 핵심은 민족이라는 범주는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생성과정이 곧 민족의 생성과정이라는 것인데 스탈린은 민족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민족이란 공통의 언어, 지역, 경제적 생활 그리고 공통의 문화에 나타나는 심리적 성격을 기초로 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람들의 안정적 공동체이다.”16) 이러한 스탈린의 규정은 민족을 인종적 공동체로 보는 속류적 관점과 대비된다. 민족은 인종적, 종족적 공동체 혹은 흔히 말하는 혈연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 지역, 경제, 문화와 심리 등이 본질적 지표가 되는 복합적인 범주이다. 또한 민족은 자본주의의 산물로서 공통의 경제적 생활의 형성을 토대로 민족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민족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실천적으로 중요한데 자본주의 시대, 제국주의 시대에 발전하는 민족운동에 대한 맑스주의 진영의 태도를 결정하는 데 있어 토대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민족운동에 대한 맑스주의자의 태도는 민족자결권의 옹호인데 이에 대해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나라의 사회민주주의는 민족자결을 주장한다. 민족자결권은 민족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또 그 누구도 민족의 삶을 강제로 간섭할 권리, 학교와 다른 시설을 파괴하고 관습과 풍습을 더럽히고 언어를 탄압하고 권리를 침해할 권리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민족자결권을 위한 투쟁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목표는 민족억압 정책을 종식시키고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며 그로부터 민족들 사이의 분쟁의 지반을 제거하고 그 분쟁의 기세를 꺾고 이를 최소한으로 격감시키는 것이다.”17) 언듯 보면 당연한 듯이 보이는 민족자결권에 대한 옹호는 실은 많은 반대에 부딪혔었다. 대표적인 견해는 민족자결을 옹호하는 것은 부르주아 민족주의를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레닌과 스탈린은 민족자결을 통해서는 착취의 폐지라는 노동자계급의 궁극목표를 달성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의 발전 자체로 인해 민족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며 따라서 민족문제의 해결은 민족적 억압에 대한 반대, 약소민족들의 분리의 자유, 독립국가 형성의 자유가 본질이며 민족자결권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며 사회주의적 과제인 착취의 폐지,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담지하는 것은 아님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전 시기에 민족운동이 부르주아 혁명의 동맹군으로 역할했다면 제국주의 시대에 노동자계급이 민족자결권을 옹호하는 것은 민족운동, 민족해방세력을 사회주의 혁명의 동맹군으로 전환시키는 것임을 레닌과 스탈린은 주장했다. 그런 점에서 스탈린의 위 논문은 제국주의 시대에 민족 문제에 대한 맑스주의 원칙의 수립에 커다란 기여를 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레닌 사후에 사회주의 건설을 이끌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회주의 건설론에 있어서 많은 진전을 이루었다. 대표적으로 <레닌주의의 문제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스탈린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세 가지 측면을 정식화하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주요한 세 측면은 다음과 같다. 1) 착취자들의 억압, 조국의 방어, 다른 나라 프롤레타리아트와의 유대의 강화, 모든 나라에서 혁명의 발전과 승리 등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지배의 활용. 2) 피착취 근로대중을 즉시 부르주아지로부터 분리시키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러한 대중들과의 동맹을 강화하며, 이러한 대중들을 사회주의 건설 사업에 끌어들이며, 이러한 대중들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적 지도력을 보장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 지배의 활용. 3) 사회주의의 조직화, 계급의 폐지, 계급 없는 사회,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 등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지배의 활용.”18) 여기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첫째, 억압의 도구, 지배의 도구로서의 측면과 둘째, 노동자계급과 피착취 대중의 동맹을 강화하고 이들을 지도하는 도구, 동맹과 지도력의 도구라는 측면 셋째, 사회주의 건설의 도구라는 측면으로 정식화되어 있다. 스탈린에 의한 이러한 정식화는 의미가 큰데 이전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주로 부르주아지에 대한 억압의 측면만이 강조되어 왔다면 스탈린에 의해서는 지도의 측면, 건설의 측면이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식화는 사회주의 건설을 실제로 이끌면서 축적된 경험을 이론적으로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스탈린은 뜨로츠키주의자들의 영구혁명론을 논박하면서 쏘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해명했다. 스탈린은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의 문제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음을 밝힌다. “한 나라의 노력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의 문제― 긍정적으로 대답되어야 할 문제 ―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존재하는 나라가, 수많은 다른 나라에서 혁명이 승리하지 않았는데 자신을 개입에 대항하여 그리고 결정적으로 구질서의 회복에 대항하여 충분히 보증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의 문제― 부정적으로 대답되어야 할 문제.”19) 즉,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은 다른 나라에서 혁명이 성공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가능하지만 그것의 완전한 승리, 구질서의 회복불가능성은 세계적으로 혁명이 승리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담보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스탈린은 밝힌 것이다. 이러한 스탈린의 입장에 대해 당시의 뜨로츠키, 그리고 현재의 뜨로츠키주의자들은 반대하고 있는데 이들은 다른 나라에서, 즉 당시로서는 서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가 없다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국에서 혁명의 승리의 가능성과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는 스탈린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라 레닌이 이미 혁명 전에 밝힌 바가 있었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상이한 나라들에서 극히 불균등하게 전개된다. 상품 생산하에서 그와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으로부터 사회주의는 모든 나라들에서 동시적으로 승리를 획득할 수는 없다는 것이 논박의 여지없이 따라 나온다. 사회주의는 처음에 하나 혹은 몇몇의 나라들에서 승리를 획득할 것인데, 반면에 다른 나라들은 얼마 동안은 부르주아적 혹은 전(前)부르주아적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20) 이러한 레닌의 입론은 자본주의에서 불가피한 불균등발전의 결과 사회주의의 승리가 모든 나라에서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그리하여 19세기에 맑스와 엥겔스가 전 유럽적인 동시혁명을 상정했던 것과 달리 제국주의 시대에는 불균등발전으로 말미암아 심지어는 하나의 나라에서도 혁명의 승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스탈린이 일국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노선을 밀고 나간 것은 레닌의 이러한 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독일 등 서유럽 혁명이 좌절된 상황에서 뜨로츠키의 영구혁명론적 인식은 패배주의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이루어가면서 세계적 차원의 혁명운동의 발전과 연대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최선이었고 과학적 노선이었다 할 수 있는데 이는 2차 대전에서 쏘련의 승리, 그리고 중국혁명의 승리와 세계사회주의진영의 성립에 의해 올바름이 입증되었다 할 수 있다.

스탈린에게서 이론적으로 중요한 또 하나는 30여 년에 걸친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정리하여 사회주의 경제의 문제를 해명한 것이었다.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문제들>(1952년)이라는 논문에서 스탈린은 사회주의 경제의 문제를 정치경제학의 견지에서 요약했다. 스탈린은 먼저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도 일정한 법칙성, 경제법칙을 갖고 있음을 말한다. “일부 동지들은 과학의 법칙들의 객관적 성격과 특히 사회주의 아래에서의 정치경제학의 법칙들의 객관적 성격을 부정한다. … 쏘비에트 정부는 자신이 현존하는 경제법칙을 이른바 파괴하고 새로운 법칙을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성격과 필연적으로 조응할 수밖에 없는 경제법칙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것을 완수했다.”21) 이러한 스탈린의 언급은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도 일정한 법칙에 의존한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쏘련에서 계획경제에 따른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성공으로 인해 일부는 쏘련에서 경제법칙은 존재하지 않으며 쏘비에트 정부의 계획과 결정이 경제법칙을 대신한다는 과도한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대해 계획적 경제건설을 총괄적으로 지도했던 스탈린 자신은 그러한 경제계획이 실은 경제법칙에 의거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스탈린은 자본주의의 경제의 무정부성과 대비되는 ‘균형 있는 발전법칙’을 사회주의 경제 법칙의 하나로 들고 있다. “우리의 다년간의 그리고 5년간의 계획이 국민경제의 균형 잡힌, 비례를 이루는 발전의 객관적 경제법칙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국민경제의 균형 잡힌 발전의 법칙은 자본주의 아래서의 생산의 경쟁 및 무정부성의 법칙에 반대하여 제기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정당성을 상실한 생산의 경쟁 및 무정부성의 법칙 이후로 생산수단의 사회로부터 제기되었다. … 그것은 국민경제의 균형 잡힌 발전의 법칙은 우리의 계획 기관이 사회적 생산을 올바르게 계획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22) 스탈린이 제기한 사회주의 경제의 ‘균형 있는 발전법칙’은 그것을 위배하면 사회주의 경제건설이 제대로 진행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5개년 경제계획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원리라는 의미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에서 비롯되는 경제법칙이라고 스탈린은 말한다. 이러한 균형 있는 발전법칙의 현실적인 의미는 소비재와 생산재의 균형, 공업과 농업의 균형, 소비와 축적의 균형 등 경제계획의 기본원리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관료적인 계획과 조정이 아닌데 말단 기업의 노동자들의 계획의 작성과 중앙으로의 반영, 중앙 계획이 말단기업으로 다시 내려가 검토되고 이 결과가 다시 중앙에 반영되는 등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민주주의적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또한 자본주의에서 가장 근본적인 법칙, 생산의 목적을 규정하는 잉여가치의 법칙과 대비하여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경제법칙’이라는 개념을 제기한다. 이것은 사회주의 생산의 목적을 규정하는 법칙이라 할 수 있다. “더 높은 기술에 기초한 사회주의적 생산의 지속적인 확대 및 완벽화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사회 전체의 물질적ㆍ문화적 요구들의 극대만족을 확보하는 것.”23) 이것은 사회주의 생산의 목적이 인민의 확대되는 복지를 지속적으로 만족시키는 것임을 말한다. 잉여가치의 축적인가, 아니면 인민의 복지인가가 바로 자본주의 생산에서의 목적과 사회주의 생산의 목적을 가르는 지점이다. 이렇게 사회주의 생산의 목적이 자본주의 생산의 목적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생산관계가 사적,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전화되고 사회화되어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생산관계의 변화에 따른 생산의 목적의 변화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이다.

이외에 스탈린은 사회주의경제에도 가치법칙이 작동하지만 그것은 지배적인 법칙이 아니라 고려의 대상이 되는 하나의 조건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자원의 배분을 결정하는 법칙은 자본주의와 달리 가치법칙이 아니라 균형 있는 발전법칙임을 말한다. 또한 국유기업에서 생산되는 생산수단은 상품이 아니라는 것을 제기한다. 그런데 쏘련에서도 상품생산은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집단적 농업의 농민들과 국유부문은 상품적 거래를 통해서만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임을 제기한다.

스탈린의 위 논문은 쏘련에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교과서 저술의 지침이 되었다 할 수 있다. 사회주의 생산관계에 기반하는 30여 년의 계획경제의 총괄이 바로 위 논문이라 할 수 있다. 사회주의 사회에도 경제법칙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사회주의 생산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 사회주의 경제는 자본주의경제와는 생산의 목적, 자원의 배분의 원리가 달라진다는 것 등이 여전히 의미를 갖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3) 마오쩌뚱

20세기 중반의 중국혁명의 성공은 세계 식민지체제를 붕괴시키고 세계사회주의 진영의 성립을 가져왔다. 그런데 중국혁명은 중국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인민들의 투쟁을 통해 성취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쏘련 등과 밀접한 연대관계를 형성하면서 이룩된 것이었다. 중국혁명을 이끈 마오쩌뚱 노선은 중국공산당 내의 좌ㆍ우편향을 극복하면서 중국인민의 자주적 혁명투쟁을 개척한 것이면서 동시에 맑스-레닌주의를 모토로 하는 쏘련 등 국제사회주의진영의 원조와 지지에 기초한 것이었다. 마오쩌뚱 노선의 사상적 기반, 정치적 원리는 맑스-레닌주의를 중국의 현실에 적용한 것이었는데 마오쩌뚱의 ≪모순론≫, ≪실천론≫은 레닌의 철학적 노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었다.

마오쩌뚱의 ≪모순론≫은 변증법의 핵심원리인 모순 개념을 전면적으로 분석하고 중국 현실에 적용한 것이었다. 마오쩌뚱은 두 가지 세계관으로 형이상학적 세계관과 유물변증법적인 세계관을 들면서 내적 모순의 개념을 정립한다. “사물 발전의 근본원인은 사물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내부에 있으며 사물에 내재하는 모순성에 있다. 어떠한 사물이나 그 내부에는 모두 이런 모순성이 있기 때문에 사물은 운동하며 발전하게 된다. 사물에 내재하는 이런 모순성은 사물 발전의 근본 원인이며 한 사물의 다른 사물과의 상호연관 및 상호영향은 사물 발전의 이차적인 원인이 된다.”24) 사물 발전의 원리는 사물에 내재하는 모순에 있고 이것이 일차적이며 내적 모순의 개념을 형성한다. 그런데 이차적으로는 사물과 다른 사물과의 연관성이 사물에 영향을 미치며 이 연관성은 내적 원리는 아니지만 사물의 운동과 발전에 이차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마오쩌둥은 나아가 모순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해명한다. 마오쩌뚱은 모순의 보편성을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모순의 보편성 또는 절대성이라는 이 문제에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의의가 있다. 하나는 모순이 모든 사물의 발전과정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사물의 발전 과정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순의 운동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25) 여기서 마오쩌뚱은 모순의 보편성의 두 측면을 첫째, 모든 사물의 운동과 발전에는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 둘째 모순은 사물 발전의 일정 단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발전의 처음부터 끝까지 존재한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것은 일체의 운동과 발전의 문제를 모순의 관점에서 파악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마오쩌뚱은 모순의 보편성의 사례를 광범위하게 들고 있는데 인간의 사고의 영역과 당내 투쟁의 영역에도 모순이 관철됨을 주장한다. “인간의 개념에 있어서의 모든 차이는 그것을 모두 객관적 모순의 반영으로 보아야 한다. 객관적 모순은 그것이 주관적인 사유에 반영되어 들어오면 개념의 모순운동을 조장하고 사유의 발전을 촉진하며 인간의 사상문제를 부단히 해결해 간다. 당내에도 서로 다른 사상의 대립과 투쟁은 늘 발생한다. 이것은 사회의 계급적 모순 및 신구 사물의 모순이 당 내에 반영된 것이다. 만일 당 내에 모순과 모순을 해결하는 사상투쟁이 없다면 당의 생명도 정지된다.”26)

마오쩌뚱은 모순의 보편성에 이어 모순의 특수성으로 나아간다. “먼저 물질의 각종 운동 형태의 모순은 모두 특수성을 띠고 있다. 세계에는 운동하는 물질 외에 아무 것도 없으며 물질의 운동은 반드시 일정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인간이 물질을 인식한다는 것은 물질의 운동 형태를 인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 어떠한 운동 형태이든지 그 내부에는 모두 자체의 특수한 모순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특수한 모순은 그 사물이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특수한 본질을 구성한다. 이것이 곧 세계의 모든 사물에 천차만별적인 차이를 있게 하는 내재적 원인 또는 근거가 된다.”27) 물질과 그 운동 형태를 다른 물질과 운동 형태와 구별하게 하는 것은 그 물질과 운동에 존재하는 모순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마오쩌뚱은 본다. 앞서의 모순의 보편성은 모든 사물에는 모순이 존재하며 운동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면 모순의 특수성은 물질과 운동의 질적인 차이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러한 모순의 특수성의 개념은 실천적으로 중요한데 이를 마오쩌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질적으로 서로 다른 모순은 질적으로 서로 다른 방법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무산계급과 자산계급과의 모순은 사회주의 혁명의 방법으로 해결하며, 인민대중과 봉건제도와의 모순은 민주주의 혁명 방법으로 해결하며, 식민지와 제국주의와의 모순은 민족혁명전쟁의 방법으로 해결하며, 사회주의에서 노동계급과 농민계급과의 모순은 농업집단화와 농업기계화의 방법으로 해결하며, 공산당 내의 모순은 비판과 자기비판의 방법으로 해결하며, 사회와 자연과의 모순은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과정이 변화하여 낡은 과정과 낡은 모순이 없어지고 새로운 과정과 새로운 모순이 발생하면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도 따라서 다르게 된다.”28) 마오쩌뚱은 이렇게 중국혁명의 현실에서 모순의 특수성을 탐구하면서 모순이 질적으로 다름에 따라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제기한다. 매우 평이하면서도 정확한 이러한 서술은 마오쩌뚱에 특유한 것인데 중국혁명운동의 현실에서 형성된 마오쩌뚱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이어서 마오쩌뚱은 주요모순과 모순의 주요한 측면의 개념의 정립으로 나아간다. 마오쩌뚱은 주요 모순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복잡한 사물의 발전 과정에는 많은 모순이 있는데 반드시 그 중 한 가지가 주요한 모순이다. 그것의 존재와 발전이 기타 모순의 존재와 발전을 규정하거나 또는 그것에 영향을 준다.”29) 사물은 단순한 것이 있는 반면 복잡한 것도 있고 대표적으로는 인간 사회의 발전은 복잡한 과정을 띠는데 이러한 복잡한 과정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과정을 형성하는 여러 모순 중에서 주요한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반드시 구별해내야 한다. 예를 들면 1930년대 중국혁명에서 토지혁명, 반봉건의 과제가 주요한 것이었지만 일본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한 이후에는 반봉건의 과제가 뒤로 밀리고 반제, 항일투쟁이 주요한 모순으로 전화된다. 이에 대해 마오쩌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국주의가 이런 국가에 대하여 침략전쟁을 진행하는 경우에는 이 국가 내부의 각 계급은 일부 반역자를 제외하고는 일시적으로 단결하여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민족전쟁을 진행할 수 있다. 이때에는 제국주의와 이 국가 간의 모순이 주요 모순으로 되고 이 국가 내부의 각 계급 간의 일체 모순(봉건제도와 인민대중 간의 이 주요 모순도 포함한)은 잠시 이차적이며 종속적인 위치로 물러선다. 중국의 1840년의 아편전쟁, 1894년의 중일전쟁, 1900년의 의화단전쟁 및 현재의 중일전쟁은 모두 이러한 상황이다.”30)

주요 모순의 개념을 정립한 마오쩌뚱은 이어서 모순의 주요한 측면이라는 개념을 정립한다. “주요 모순이건 부차적 모순이건 모순되는 두 측면을 균등하게 취급할 수 있겠는가? 역시 그럴 수는 없다. 어떠한 모순을 막론하고 모순의 여러 측면의 발전은 불균형적이다. 때로는 세력이 같은 것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으로 상대적인 상황일 뿐이며 기본적인 형태는 불균형적이다. 모순되는 두 측면 가운데서 반드시 한 측면은 주요한 것이고 다른 측면은 부차적인 것이다. 그 주요한 측면은 모순의 주도적 역할을 하는 측면일 뿐이다. 사물의 성질은 주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모순의 주요 측면에 의하여 규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모순의 주요 측면과 주요하지 않은 측면은 서로 전환하여 사물의 성질도 이에 따라서 변화한다.”31) 주요 모순과 모순의 주요한 측면이라는 개념은 혼동하기 쉬운데 서로 다른 개념이다. 주요 모순은 복잡한 사물 혹은 과정에 존재하는 여러 모순 중에서 관건이 되는 주요한 모순을 추출하는 것인 반면에 모순의 주요한 측면은 하나의 사물 혹은 과정에 존재하는 모순의 두 측면 중 주요한 것이 어떤 것인가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태양계의 운동에서 구심력과 원심력이라는 모순의 두 측면 중 어느 것이 우세한가 혹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이라는 두 측면 중 어느 측면이 우세한가를 가리키는 것이 모순의 주요한 측면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한데 예를 들면 자본가계급이 우세하고 주요한 측면이라면 자본주의 사회는 안정화되어 있고 비혁명적이라고 파악할 수 있지만 노동자계급이 주요한 측면이 되었다면 운동이 상승하고 혁명적 정세가 다가오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마오쩌뚱이 이렇게 주요 모순과 모순의 주요한 측면이라는 개념을 정립한 것은 이 개념들이 혁명운동에서 실천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이며 그런 점에서 이 개념들은 중국혁명의 경험을 이론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오쩌뚱은 이어서 모순 개념을 구성하는 두 요소 즉, 대립물의 통일성(동일성)과 상호투쟁의 개념을 분석한다. “일체 모순되는 사물은 상호연관되어 있으며 일정한 조건하에서 하나의 통일체 내에 같이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일정한 조건하에서는 상호전환한다. 이것이 곧 모순의 동일성의 전체 의의이다.”32) 상호연관, 하나의 통일체 내의 동시적 존재, 그리고 상호전화가 마오쩌뚱이 파악하는 모순 개념에서 동일성(통일성)의 의미인데 대립물의 상호전화까지를 통일성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대립물의 상호전화가 통일성의 개념으로 파악되는 것은 상호전화는 대립물의 상호의존을 전제로 하며 상호의존은 바로 통일성의 개념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대립물의 상호전화는 통일성의 개념에 포함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어서 마오쩌뚱은 대립물의 투쟁을 고찰한다. 마오쩌뚱은 레닌에게서 다음을 인용한다. “레닌은 ‘대립물의 통일(합치, 동일성, 합성)은 조건적이며 일시적이며 과도적이며 상대적이다. 상호배제하는 대립물의 투쟁은 발전, 운동이 절대적인 것처럼 절대적이다.’라고 말하였다”33) 통일의 상대성, 조건성과 투쟁의 절대성이라는 레닌의 정식에 대해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어떠한 사물의 운동이나 그것은 모두 두 가지 상태, 즉 상대적 정지의 상태와 현저한 변동의 상태를 취한다. … 사물은 부단히 첫째 상태로부터 둘째 상태로 전환하는데 모순의 투쟁은 이 두 가지 상태 가운데 존재하며, 또 둘째 상태를 거쳐 모순의 해결에 도달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립물의 통일은 조건적이고 일시적이며 상대적이지만 대립물의 상호배제하는 투쟁은 절대적인 것이다.”34) 사물의 부단한 운동과 발전은 대립물의 투쟁에 의해 주어지기 때문에 투쟁은 절대적인 반면에 사물이 현저한 변동을 통하여 다른 사물로 이행하면 대립물의 통일성은 해체되고 새로운 통일성이 정립된다는 점에서 통일은 일시적이며 상대적이라고 본 것이다.

끝으로 마오쩌뚱은 모순에서 적대가 차지하는 위치를 고찰한다. “모순과 투쟁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이지만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 즉 투쟁의 형태는 모순의 성격이 다름에 따라 서로 다르다. 어떤 모순은 공개적인 적대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모순은 그렇지 않다. 사물의 구체적 발전에 의하여 어떤 모순은 비적대적이던 것이 적대적인 것으로 발전하며 또 어떤 모순은 본래 적대적이던 것이 비적대적인 것으로 발전한다.”35) 모든 모순이 적대적인 모순인 것은 아니며 또한 적대성은 상대적이며 적대적 모순은 비적대적 모순으로 혹은 역으로 비적대적 모순이 적대적 모순으로 전화할 수도 있다. 이러한 마오쩌뚱의 인식은 중국혁명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인데 토지혁명, 반봉건 혁명에서 적대적이었던 지주의 존재가 항일전쟁에서는 비적대적으로 변화하는 현실, 그리고 적대적인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관계가 항일민족통일전선에는 동지적 관계로 전화하는 현실 등 변화무쌍한 중국혁명의 과정에서 모순에서 적대의 문제에 대해 마오쩌뚱은 이론적으로 해명한 것이다. 마오쩌뚱은 이 지점에서 레닌을 인용하면서 적대적 모순의 개념을 마무리한다. “레닌은 ‘적대와 모순은 결코 같지 않다. 사회주의하에서는 전자는 소멸하나 후자는 남는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적대는 모순투쟁 형태의 하나일 뿐이고 그 일체의 형태는 아니므로 이 공식을 아무 데나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36) 적대는 모순이지만 모든 모순은 아니며 적대와 비적대는 상호전화한다는 것! 만약 비적대적 모순을 적대적 모순으로 혼동하면 그것은 좌편향의 오류에 빠지게 되는데 마오쩌뚱은 다양한 당내 투쟁을 겪으며 편향을 극복하면서 이를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으로 개념화한 것이다.

그런데 적대적 모순, 비적대적 모순의 개념은 혁명의 승리 이후에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인민내부의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한다. 1957년에 마오쩌뚱은 ‘인민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는데 이는 적대와 비적대의 모순의 개념을 사회주의 건설과정에 적용한 것이다. “우리의 면전에는 두 종류의 사회적 모순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적아(敵我) 간의 모순과 인민내부의 모순이다. 이것은 성질이 완전히 다른 두 종류의 모순이다.”37) 적아 간의 모순 즉, 적대적 모순과 인민내부의 모순은 완전히 다른 것인데 인민내부의 모순은 비적대적 모순의 일종임을 말하고 있다. 인민내부의 모순에 대해 마오쩌뚱은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우리나라의 현재의 조건하에서, 소위 인민내부의 모순은 노동계급 내부의 모순, 농민계급 내부의 모순, 지식분자 내부의 모순, 노농 양 계급 간의 모순, 노동자ㆍ농민과 지식분자 간의 모순, 노동계급 및 기타 노동인민과 민족부르주아지 간의 모순, 민족 부르주아지 내부의 모순 등등이다. 우리의 인민정부는 진정으로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부이며, 인민에게 복무하는 정부이지만, 그러나 그것과 인민군중 간에도 일정한 모순이 있다. 이 종류의 모순은 국가이익ㆍ집단적 이익과 개인적 이익 간의 모순, 민주와 집중의 모순, 지도와 피지도 간의 모순, 국가기관의 어떤 사업인원의 관료주의 작풍과 군중 간의 모순이다. 이런 종류의 모순 또한 인민 내부의 모순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인민 내부의 모순은 인민의 이익이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에 기초하는 모순이다.”38) 사회주의 사회에서 인민을 구성하는 다양한 부문 사이에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을 마오쩌뚱은 전적으로 승인하고 있다. 그러나 마오쩌뚱은 이러한 인민 내부의 모순이 적대적 모순이 아님을 강조하고 인민내부의 모순의 해결과정은 적대적 투쟁이 아니라 교육과 설득의 방법 등 평화적 방법임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인민내부 모순의 개념의 정립은 사회주의 건설론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사회주의의 건설은 인민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모순의 해결과정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마오쩌둥은 제기하고 있다. 예를 들면 노동자계급 내부의 모순인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간의 모순의 해결은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인 사회주의 사회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모순이다. 또한 노동자계급의 국유와 농민계급의 집단적 소유 간의 모순은 생산력의 높고 낮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을 통해 점차적으로 해결의 길을 걷게 된다. 사회주의 국가와 인민 간의 모순은 인민의 교육적 수준의 향상과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확장을 통해 인민들의 행정에 참여가 확대되면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이와 같이 인민 내부의 모순의 해결과정은 곧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이기도 하다. 마오쩌뚱이 이와 같은 인민 내부의 모순의 개념을 제기한 것은 1956년 스탈린 탄핵의 여파가 중국에 밀려오고 특히 헝가리에서 폭동이 일어난 것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민내부에도 모순이 있으며 그것은 비적대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며 이는 사회주의 건설의 방법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마오쩌뚱은 제기했던 것이다.

마오쩌뚱의 ≪실천론≫은 인간의 인식과 실천의 관계를 해명한 저작이다. 인간의 인식에서 실천의 문제는 헤겔에 의해 단초가 제기되고 맑스에 의해 정립되고 레닌에 의해 심화되는 길을 걸어왔는데 마오쩌뚱은 중국혁명의 경험을 녹여서 인식에서 실천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마오쩌뚱은 맑스 이전의 유물론이 인식에서 실천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음을 비판하면서 실천이 진리의 기준임을 말한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인간의 사회적 실천만이 외계에 대한 인간 인식의 진리성의 기준이 된다고 인식한다. 그 실제적인 상황은 다음과 같다. 즉 사회적 실천을 하는 과정에서 (물질적 생산 과정에서, 계급투쟁 과정에서, 과학적 실험 과정에서) 사람들이 예상하였던 결과에 도달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의 인식은 실증된다.”38) 실천을 통해 예상하는 결과를 얻었을 때 비로소 인식의 올바름이 검증된다는 것이다. 마오쩌뚱은 진리의 기준으로서 실천을 고찰한 후 나아가 “실천에 대한 이론의 의존관계, 즉 이론의 기초는 실천인 동시에 이론은 다시 또 실천에 적용돼야 한다”39)는 것을 말한다. 실천을 떠난 이론은 생명력을 가질 수 없고 또 올바른 개념화도 어렵고 나아가 풍부한 내용을 확보할 수도 없다. 그런 점에서 실천에 대한 이론의 의존관계에 대한 마오쩌뚱의 제기는 정확하다.

마오쩌뚱은 인식의 발전과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인식은 실천으로부터 시작되며 실천을 통하여 이론적 인식에 도달한 다음 다시 실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식의 능동적 비약에서 표현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성적 인식에서 혁명적 실천에 이르는 비약에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40) 이러한 인식과정을 정리하면 실천-감성적 인식-이성적 인식-혁명적 실천으로의 비약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즉, 기존에는 인간의 인식과정은 감성적 인식의 단계와 이성적 인식의 단계로만 파악되었는데 마오쩌뚱과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인식의 단계를 감성적 인식단계, 이성적 인식 단계, 실천의 단계의 3단계로 파악한다. 즉, 실천 또한 인식과정의 하나로 파악되는데 이는 실천을 인식론에 포함한 것의 귀결이다.

마오쩌뚱은 인식에 있어서 진리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일정한 사상, 이론, 계획, 방안에 근거하여 객관적 현실의 변혁에 종사하는 실천이 매번 전진함에 따라, 객관적 현실에 대한 인간의 인식도 매번 심화되어 간다. 객관적 현실 세계의 변화운동이 영원히 완결되지 않음에 따라, 실천에 있어서 진리에 대한 인간의 인식도 영원히 완결되지 않는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진리를 종결시키지 않으며 진리를 인식하는 길을 실천에서 부단히 개척하려고 하고 있다.”41) 현실의 변화운동이 종결되지 않기 때문에 진리는 완결되지 않는다는 것, 맑스-레닌주의는 진리를 종결시키지 않는다는 마오쩌뚱의 주장은 변증법적이며 실천적으로는 교조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다. 진리는 완결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무결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를 과정으로 파악하는 마오쩌뚱의 이러한 변증법적 인식은 실천-인식-재실천-재인식이라는 유명한 정식으로 나아간다. “실천을 통하여 진리를 발견하고 또 실천을 통하여 진리를 실증하고 진리를 발전시킨다. 감성적 인식으로부터 이성적 인식으로 능동적으로 발전시키고, 또 이성적 인식으로부터 혁명의 실천을 능동적으로 지도하여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를 개조한다. 실천, 인식, 재실천, 재인식 이러한 형식이 무한히 순환, 반복되며 모든 순환 과정에서의 실천과 인식의 내용은 매번 이전보다는 한 급 높은 정도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과 인식론의 전체이며, 이것이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지행통일관(知行統一觀)이다.”42)

마오쩌뚱은 ≪모순론≫과 ≪실천론≫을 통해 맑스주의 철학을 발전시켰지만 그의 철학적 내용이 이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마오쩌뚱은 장기간에 걸친 혁명전쟁과 항일전쟁을 지도하면서 많은 군사적 저술을 했는데 그의 군사전략에는 변증법적 인식이 언제나 녹아 있었다.

‘중국혁명전쟁의 전략문제’라는 논문은 아직 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장개석의 국민당군과의 싸움을 다룬 글이다. 여기서 마오쩌뚱은 변증법의 보편-특수-개별의 범주를 사용하여 전쟁의 법칙을 탐구한다. 전쟁의 법칙(보편), 혁명전쟁의 법칙(특수), 중국혁명전쟁의 법칙(개별)을 차례로 탐구하는데 변증법의 범주를 직접 군사전략에 적용한 것이다. 그의 변증법은 전쟁이라는 계급투쟁의 가장 격렬한 형태에 녹아 있는데 “전쟁 상황이 다름에 따라 전쟁의 지도법칙도 달라지게 된다. 즉 시간ㆍ지역ㆍ성격이 다름에 따라 달라진다. … 모든 전쟁 지휘의 법칙은 역사의 발전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고 전쟁의 발전에 따라 발전하는 것으로, 고정불변의 사물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43)고 파악하여 전쟁에 대해 변증법적 분석을 한다.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홍군의 혁명전쟁은 항일전쟁으로 전화된다. 일본과의 전쟁은 속전속결이 아니라 지구전의 양상으로 전개되는데 이에 대해 마오쩌뚱은 ‘지구전을 논함’이라는 논문에서 역시 변증법적 분석을 통해 지구전 전략을 수립한다. “항전 10개월 동안의 모든 경험은 다음의 두 가지 견해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나는 중국필망론이고 하나는 중국 속전필승론이다. 전자는 타협적 경향을 낳고 있으며, 후자는 적을 경시하는 경향을 낳고 있다. 그들이 문제를 보는 방법은 모두 주관적이며 일면적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비과학적이다.”44) 한편으로는 강대한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패배주의가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국인 일본을 속전속결로 물리칠 수 있다는 경향이 존재하는 가운데 마오쩌뚱은 이 두 가지 경향 모두를 비판하며 지구전을 통한 필승론을 전개한다. 왜 마오쩌뚱은 지구전을 통해야만 필승할 수 있다고 보았는가? “전체적으로 말한다면, 일본의 장점은 그 전쟁역량이 강한 것이고, 단점은 그 전쟁의 본질적 퇴보성과 야만성에 있으며, 그 인력과 물력이 부족한 데 있으며, 국제정세에 있어서 그들에 대한 원조가 적다는 데 있다. 이러한 것들이 일본 측의 특성이다. … 종합해서 말한다면 중국의 단점은 전쟁역량이 약한 것이고, 장점은 그 전쟁의 본질적인 진보성과 정의성에 있으며, 큰 나라이자 국제정세에 있어서 그 원조자가 많은 데 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중국의 특성이다. … 이러한 특성들은 쌍방의 모든 정치상의 정책과 군사상의 전략전술을 규정하였고 또한 규정하고 있으며, 전쟁이 지구적이며 궁극적 승리가 일본에 있지 않고 중국에 있다는 것을 규정해 주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바로 이러한 특성들의 경쟁이다.”45) 지구전 필승론은 이렇게 적아의 역량과 국제정세, 전쟁의 성격과 본질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중국필망론은 중국의 전쟁이 정의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일본이 전쟁역량 자체는 강하나 물자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또 원조자가 적다는 점에서 그릇된 것이며, 속전속결론은 중국이 대국이라는 잇점을 살리지 못하고 일본의 전쟁역량이 강하다는 점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옳지 못하며 따라서 지구전을 통해서 일본의 역량을 서서히 약화시키면서 국제정세의 잇점을 살리고 중국 측의 전쟁역량을 극대화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마오쩌뚱의 전략이었다. 중국의 항일전쟁은 실제로 이와 같이 발전되었고 중국은 일본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마오쩌둥의 군사전략에는 철저히 변증법적 관점이 녹아 있었는데 변증법을 통해 군사전략을 과학의 수준으로 고양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마오쩌뚱은 맑스-레닌주의를 중국혁명의 실제에 적용하고 구체화시켰다고 평가된다. 러시아 혁명과 쏘련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중국혁명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마오쩌뚱의 노선과 중국혁명은 쏘련, 레닌, 스탈린과 깊은 연관을 지니며 또 마오쩌뚱은 좌익적, 우익적 편향과 싸우며 중국혁명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맑스-레닌주의를 중국화한 것이라는 것도 진실이다. 마오쩌뚱은 ≪모순론≫, ≪실천론≫을 통해 맑스주의 철학을 심화시켰고 그의 군사전략은 철저히 변증법적 유물론을 적용하고 구체화한 것이었다. 이는 철학이 정치에 녹아들 때 어떠한 위력을 보여주는가를 실제로 증명한 것이었는데 맑스주의 자체가 철학과 정치의 통일을 근본 원칙으로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오쩌뚱은 사회주의 건설에서도 원칙을 지키며 나아갔지만 흐루쇼프 수정주의의 발생, 중국에서 주자파(走資派)의 발생이라는 상황에서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는데 문화대혁명은 취지의 올바름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서 좌편향이 발생하여 결국은 실패하였고 이후 중국은 자본주의화의 길을 걸었다. 현대의 중국이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다고 해서 마오쩌뚱의 사상과 원칙이 무화(無化)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 중국의 건국 자체가 마오쩌뚱의 사상과 노선에 기반한 것이었고 철저한 반제반봉건 혁명의 성과가 현대 중국에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수정주의하에서 현대 중국자본주의의 발전은 중국의 노동자계급의 발전을 초래할 것이며 그 결과 현대 중국의 노동자계급이 깨어날 날이 올 것임은 필연적이다.

4) 그람시

레닌, 스탈린, 마오쩌뚱은 현실적인 혁명투쟁을 이끌었고 거대한 성취를 남긴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람시는 이들과 달리 이탈리아 혁명의 패배 속에서 파시즘의 감옥에 갇혀서 장기간 투쟁하면서 옥중에서 자신의 생각들을 편지, 수고 등의 형태로 남겼다. 그리하여 그람시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옥중수고로 알려진 단편들뿐인데 따라서 레닌, 스탈린, 마오쩌뚱과 달리 체계적인 이론틀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람시의 옥중수고가 단편들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거기에는 파시즘의 감옥에서의 치열한 자기반성과 모색이 담겨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탈리아 혁명이 패배한 원인을 분석하는 가운데 러시아 혁명과 유형이 다른 서유럽 혁명의 문제를 파고드는 점이다.

그람시는 러시아에서는 자본주의 발전이 지체되어 시민사회의 성숙이 미약했던 데 반해 자본주의가 발달한 서유럽은 시민사회가 강력히 발전되어 있다는 데 주목하고 이를 근거로 러시아 혁명과 서유럽 혁명이 유형을 달리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내가 보기에 일리치(레닌-필자)는 1917년의 동구에서는 성공적으로 적용된 기동전이, 서구에서 가능한 유일한 형태인 진지전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해했던 것 같다. … 그러나 일리치는 자신의 공식을 확장시킬 시간이 없었다. … 다시 말하여 그 공식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지형에 대한 탐색과 시민사회의 요소들로 표현되는 참호와 요새에 대한 확인이 요구된다. 러시아에서는 국가가 모든 것이었고 시민사회는 아직 원시적이고 무정형한 것이었지만, 서구에서는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 적절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고 국가가 동요할 때는 당장에 시민사회의 견고한 구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국가는 단지 외곽에 둘러쳐진 외호(外濠)에 불과하며 그 뒤에는 요새와 토루의 강력한 체계가 버티고 있었다.”46) 국가는 단지 외호에 불과하고 그 뒤에는 요새와 토루라는 강력한 시민사회가 버티고 있어서 서유럽에서는 러시아와 달리 기동전이 아닌 진지전이 요구된다는 것이 그람시의 문제의식이다. 맑스는 국가와 구분되는 시민사회의 핵심을 경제적 생산관계로 파악했는데 그람시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즉, 그람시는 생산관계가 시민사회의 핵심이라는 맑스의 관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발달한 시민사회가 자본가계급의 요새로 작용하는 서유럽의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그람시의 문제의식은 러시아 혁명 이후 몰아쳤던 서유럽 혁명의 파고가 물러나고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라는 반동이 대두되었던 현실, 혁명의 패배라는 현실을 분석한 결과였다. 러시아 혁명의 전개과정에서는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가 취약하여 노동자계급이 직접 국가를 공격했던 데 반해 서유럽에서는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가 강력했고 그것은 국가만이 아니라 시민사회 차원에서도 그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그람시는 국가와 시민사회론, 기동전과 진지전, 헤게모니론 등으로 구성되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정리해간다.

그람시는 엄밀한 이론체계를 구축한 것이 아니라 단편적인 문제의식을 치열하게 정리해간 것이기에 언듯 보면 이론적으로 오류로 보이는 것이 상당히 있다. 그러나 그러한 오류로 보이는 것에 담긴 합리적 핵심은 혁명의 패배를 극복하려는 치열한 노력이라는 점을 정확히 볼 필요가 있다. 먼저 국가와 시민사회를 보면 그람시는 시민사회를 상부구조로 규정하는데 이는 맑스나 레닌과는 외면적으로는 다른 것이다. “적어도 가장 발전된 나라들의 경우에는 정치기술과 정치학에 있어서도 동일한 격하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들 나라들에서는 ‘시민사회’가 직접적인 경제적 요소들(공황, 불황 등)의 파국적 ‘기습’에 저항할 수 있는 복합적인 구조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시민사회라는 상부구조는 근대적 전쟁에서 참호체계와 같다.”47) 여기서 그람시는 명백히 시민사회를 상부구조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국가와 구분되는 시민사회, 시민사회의 핵심은 경제적 생산관계라는 맑스의 관점에서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람시는 여기서 시민사회를 상부구조로 규정하면서도 시민사회의 핵심이 경제적 생산관계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람시가 시민사회를 상부구조로 규정하는 것의 의미는 시민사회가 국가라는 상부구조와 연관되는 지점, 국가가 시민사회에 영향력 혹은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영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이렇게 보면 그람시의 규정은 합리적 내용을 갖는다. 이러한 그람시의 문제의식은 국가에 대해서도 치열하게 전개되는데 그람시는 국가가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라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관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내용을 확장한다. “정치에 있어서도 국가(통합적 의미에서의 국가, 즉 독재 + 헤게모니)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 부정확하게 이해하는 데에서 그와 같은 잘못이 일어난다.”48), “우리는 여전히 국가와 지배(government)를 동일시하는 풍토 속에 있는데, 이 동일시야말로 경제적ㆍ조합주의적 형태의 표현, 다시 말하여 시민사회와 정치사회 사이의 혼동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국가라는 추상적 개념 속에는 시민사회의 개념에서 도출되어야만 하는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국가=정치사회+시민사회, 다시 말하여 국가=‘강제의 철갑에 의해 보호되는 헤게모니’라고 말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49) 국가는 독재와 헤게모니의 총합이고 달리 표현하면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통합이라는 것이 국가와 시민사회의 개념에 있어서 그람시가 제기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부르주아지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를 내세웠고 맑스 또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를 전제로 그것을 토대와 상부구조의 개념으로 전화시켰는데 그람시는 국가의 개념에 시민사회를 포함시키고 있고 그것의 합리적 핵심을 헤게모니라는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그람시의 문제의식은 국가가 국가조직에 의한 독재와 폭력의 개념으로만 파악되어서는 안 되며 국가가 시민사회에 행사하는 헤게모니까지 포함하여 국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람시의 문제의식은 합리적 핵심이 있는데 시민사회가 발달한 서유럽에서 지배계급의 지배는 국가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단순한 독재 혹은 폭력만이 아니며 시민사회에 대한 다양한 기제를 통한 동의에 기초한 헤게모니를 통해서도 이루어지는 것임을 제기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의에 기초한 헤게모니가 독재 혹은 폭력과 통일되어 있음을 제기한 것이다. ‘강제의 철갑에 의해 보호되는 헤게모니’라는 정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은 국가와 시민사회에 대한 이러한 파악에 기초하여 제기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은 현대 사회와 정치에서 매우 가치 있는 것이다. 폭력은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헤게모니는 지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 폭력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러면서도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는 국가라는 폭력에 의해 보호를 받는다. 폭력 혹은 독재와 헤게모니의 통일! 이것이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 발달한 시민사회라는 조건에서 지배가 이루어지는 기제라고 그람시는 파악한다. 그람시는 부르주아 정치의 위기를 헤게모니의 위기로 파악한다. “사회계급들은 그 역사적 생장의 어떤 시점에서 자신들의 전통적인 정당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다시 말하여 전통적인 정당들은 기존의 특정한 조직형태, 그리고 그 정당을 구성하고 대표하고 이끌어 온 기존의 인물들을 가지고는 더 이상 자신들의 계급(혹은 계급 중의 어떤 분파)의 표현으로서 인정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 이러한 갈등적 상황은 맨 처음에 어떻게 발생하는가? 나라마다 그 과정은 다르다. 하지만 그 내용은 동일한데, 그 내용이란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의 위기이다.”50) 전통적인 정당들 즉, 부르주아 정당들의 위기라는 것은 그 표현형태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그것의 내용은 동일한데 그것의 본질은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의 위기’라는 것이다. 헤게모니의 위기는 부르주아 계급의 영향력의 위기, 동의에 기초한 지배의 위기,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게 되는 위기, 국가의 본질이 드러나게 되는 위기를 의미한다는 것을 그람시는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람시는 부르주아 계급의 헤게모니와 관련하여 이전의 지배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이전의 지배계급들은 다른 계급들로부터 자기 자신의 계급으로의 유기적 통로를 건설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시 말하여 자기 계급의 영역을 ‘기술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확대시키고자 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보수적이었다. 그들의 개념은 폐쇄적인 신분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르조아 계급은 끊임없이 유동하는 유기체, 전 사회를 흡수할 능력이 있는 유기체, 전 사회를 자기 자신의 문화적ㆍ경제적 수준으로 동화시킬 수 있는 유기체로서 자기 자신을 제시했다.”51) 이전의 지배계급이 폐쇄적 신분이었다면 부르주아 계급은 전 사회를 자신의 모습으로 동화시킨다는 파악은 정확하다. 부르주아 계급의 이러한 성격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헤게모니적 지배의 가능성이 도출되는 것이다. 부르주아적 헤게모니의 원천은 바로 폐쇄성을 극복하고 끊임없이 유동하면서 자신의 모습대로 전 사회를 동화하고 창조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르주아 계급이 발전하고 있을 때, 부르주아 계급이 진보하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며 부르주아 계급이 진보를 멈출 때, 반동화될 때는 그러한 헤게모니의 원천은 고갈되는 것이고 국가의 폭력성이라는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

그람시는 운동의 전술과 관련하여 러시아혁명이 기동전이었다면 서구의 혁명은 진지전이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시민사회의 요새와 토루를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시민사회는 경제적 생산관계를 핵심으로 하지만 부르주아 계급은 생산관계에 기초하여 다양한 시민사회의 조직을 발전시키고 나아가 국가와 시민사회의 밀접한 연관을 건설한다. 바로 이러한 지점을 그람시는 진지, 즉 요새와 토루라고 보았고 지배계급, 국가의 이러한 헤게모니적 지배를 극복하기 위한 진지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람시가 서구에서 진지전을 강조한 문제의식은 올바른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람시를 들어 러시아 혁명은 기동전이고 서구는 진지전이라고 도식적으로 구분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러시아 혁명은 단지 1917년의 기동전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스크라≫라는 전국적 신문의 창간을 위한 노력, 짜르의 반동적 의회에 대한 참가 등은 그람시의 기준을 따르더라도 중요한 진지전이었고 이러한 진지전을 기초로 1917년의 기동전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반대로 서구의 경우 진지전이 중요하지만 기동전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대중의 역동성이 고양될 때 그것이 기동전으로 표출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는 것이며 기동전을 예비하는 진지전, 기동전에 봉사하는 진지전, 기동전과 진지전의 올바른 배합이 타당하다.

그람시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분석하면서 현대의 군주는 정당임을 말한다. 주목되는 것은 정치적 세력들의 관계에 대해 논하는 부분인데 여기서 그람시는 3 단계로 정치세력의 발전을 논한다. “이 중 최초의, 그리고 가장 초보적인 것은 경제적ㆍ조합주의적 수준이다. … 두 번째 계기는, 의식이 어떤 사회계급의 모든 성원 사이의 이해(利害)의 연대성에까지 미치게 된 계기이다. … 세 번째 계기는, 한 집단이 자기 자신의 조합주의적 이익이 현재와 미래의 발전과정 속에서 지금까지의 순수 경제적인 계급의 조합주의적 한계를 벗어나 다른 종속적 집단들의 이익으로도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는 계기다. … 여기서는 이미 싹터 있었던 이념들이 정당으로 되고, 상호 충돌하고 갈등하면서 그 중 단 하나의 정당, 또는 적어도 몇몇 정당으로 된 단일한 결합체가 우세하게 되고 유리한 고지를 점하여 자기 자신을 사회 전체에 선전하게 된다.”52) 그람시가 논하는 정치세력의 발전은 첫 번째의 조합주의적 단계, 두 번째의 계급적 연대성의 단계, 세 번째의 다른 계급 혹은 정당들과의 관계에서 헤게모니적 우세를 점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람시의 이러한 분석은 일종의 추상인데 헤게모니의 문제가 본격화되는 것은 세 번째의 단계이지만 헤게모니의 싹은 정치적 발전의 최초 단계부터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그람시는 철학에 대해서도 많은 문제의식의 단편을 남겼는데 첨예하면서도 많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자유와 필연에 대한 그람시의 사고이다. 그람시는 맑스주의 철학을 숙명론적 세계관으로 규정하는데 그것의 근거로서 자유를 필연성에 대한 인식으로 파악하는 점을 들었다. “실천철학(맑스주의 철학-필자)의 숙명론적 세계관이 역사적으로 해온 역할에 관한 한 아마도 이제 추도사를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지난 시기에는 그것이 유용했음을 강조하되 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제는 마땅히 그에게 돌아가야 할 모든 영광을 안고서 묻혀야 함을 촉구해야 하는 것이다. 실천철학의 이런 역할은 근세 초에 예정조화설이나 은총설이 했던 역할에 실로 견줄 수 있겠다. 이 이론들은 독일 고전철학과 필연성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자유 개념 속에서 절정을 이루었다.”53) 여기서 그람시는 실천철학, 즉 맑스주의 철학이 숙명론적 세계관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근거로 자유는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주장을 들고 있다. 만약 자유가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숙명론이라고 하는 그람시의 주장은 올바른 것이다. 그러나 엥겔스는 필연성에 대한 인식은 자유의 ‘기초’이며 자유는 필연성에 대한 인식에 기초해서 자기 자신과 자연을 지배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반듀링론≫). 여기서 그람시는 필연성과 자유의 관계를 오해했다. 필연성의 인식 자체에 그친다면 그것 자체는 자유가 아니며 숙명론이다. 그러나 자유는 필연성을 박차고 나가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필연성을 인식하여 그것을 지양하면서 필연성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여 스스로 자유의 영역을 개척해가는 문제이다. 그럼 점에서 필연성에 대한 인식은 자유의 개념의 내용을 구성하지만 자유의 개념의 내용 전체가 아니라 단지 ‘기초’일 뿐이다. 맑스주의 진영에서 자유는 인식된 필연이라고 회자되었던 것은 자유와 필연성의 관계에서 형이상학적 단절을 비판한다는 차원이었지 필연성 자체가 자유라고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자유는 필연성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여 스스로 쟁취하고 개척해가야 하는 영역이다.

그람시는 러시아 혁명이 전 세계에 불러일으켰던 혁명의 파고가 서유럽에서 지나가고 혁명의 패배 속에서 파시즘이 대두된 상황에서 혁명의 전망을 개척해 갔다. 그람시는 파시즘의 감옥에서 정상적인 이론작업을 할 수 없었음에도 많은 단편들을 통해 서유럽의 상황에서 변화, 발전된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에 대한 이론, 독재와 헤게모니의 통일로서 국가론, 진지전과 기동전 등 많은 문제의식을 벼려냈다. 비록 체계화된 이론은 아니지만 그람시의 분투의 산물은 21세기 지금도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그람시는 20세기 중반에 개량주의적인 유로꼬뮤니즘의 사상적 지주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그람시 자신에게서 개량주의적 내용을 찾기는 어렵다. 그람시의 작업이 체계화된 이론적 산물로 남지 못하고 단편들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그러한 악용의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자본주의 발전이 가져오는 시민사회의 발전, 그것이 지배계급의 진지, 요새와 토루로 작용하는 현실, 지배계급이 폭력만이 아니라 동의에 기초한 지배, 헤게모니적 지배를 구사하는 점 등은 그람시의 치열한 문제의식이 현재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사과연>


* 편집자: 연구소에서 철학세미나를 지도하고 있는 문영찬 연구위원장이 그동안의 성과를 정리하여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2015년 1월호부터 연재하고 있다.

1) 레닌, ≪유물론과 경헙비판론≫, 아침, p. 135

2) L. 울레비그,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재인용, p. 275.

3) 레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아침, pp. 277-278.

4) 레닌, 앞의 책, pp. 288.

5) 오스트발트,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 비판론”≫에서 재인용. p. 288.

6) 레닌, 앞의 책, p. 284.

7) 레닌, 앞의 책, p. 287.

8) 레닌, 앞의 책, p. 291.

9) 레닌, ≪철학노트≫, 논장, p. 296.

10) 레닌, 앞의 책, pp. 133-134.

11) 레닌, 앞의 책, p. 300.

12) 레닌, 앞의 책, p. 304.

13) 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레닌선집≫ 제3권, (progress 영문판), 모스크바, p. 28.

14) 스탈린,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 ≪스탈린 선집≫ 제2권, 전진, p. 124.

15) 스탈린, “맑스주의와 민족문제”, ≪스탈린 선집≫ 제1권, 전진, p. 50.

16) 스탈린, 앞의 책, p. 45.

17) 스탈린, 앞의 책, pp. 54-55

18) 스탈린, “레닌주의의 문제에 관하여”, ≪스탈린 선집≫ 제1권, 전진, p. 209.

19) 스탈린, 앞의 책, p. 232.

20) 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군사강령, 레닌선집 1권(progress 영문판), 모스크바, pp. 741-742.

21) 스탈린, “USSR에서의 사회주의의 경제적 문제들”, ≪스탈린 선집≫ 제2권, 전진, pp. 226-230.

22) 스탈린, 앞의 책, p. 231.

23) 스탈린, 앞의 책, p. 258.

24) 마오쩌뚱, “모순론”, ≪모택동 선집≫제1권, 범우사, p. 362.

25) 마오쩌둥, 앞의 책, p. 366.

26) 마오쩌뚱, 앞의 책, p.367.

27) 마오쩌둥, 앞의 책, pp. 369-370.

28) 마오쩌뚱, 앞의 책, p. 372.

29) 마오쩌둥, 앞의 책, p. 381.

30) 마오쩌뚱, 앞의 책, pp. 381-382.

31) 마오쩌둥, 앞의 책, p. 383.

32) 마오쩌뚱, 앞의 책, p. 391.

33) 마오쩌뚱, 앞의 책, p. 393.

34) 마오쩌뚱, 앞의 책, p. 393.

35) 마오쩌둥, 앞의 책, p. 395.

36) 마오쩌뚱, 앞의 책, p. 396.

37) 마오쩌뚱, “인민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 ≪마오쩌뚱 문집≫ 제7권, 인민출판사(중국어판), pp. 204-205.

38) 마오쩌뚱, 앞의 책, pp. 205-206.

38) 마오쩌뚱, “실천론”, ≪모택동 선집≫ 제1권, 범우사, p. 344.

39) 마오쩌뚱, 앞의 책, p. 344.

40) 마오쩌뚱, 앞의 책, p. 353.

41) 마오쩌뚱, 앞의 책, p. 357.

42) 마오쩌뚱, 앞의 책, p. 358.

43) 마오쩌뚱, “중국혁명전쟁의 전략문제”, ≪모택동 선집≫ 제1권, 범우사, pp. 219-220.

44) 마오쩌뚱, “지구전을 논함”, ≪모택동 선집≫ 제2권, 범우사, p. 126.

45) 마오쩌둥, 앞의 책, pp. 135-137.

46) 그람시, ≪옥중수고 I≫, 거름, pp. 250-251.

47) 그람시, 앞의 책, pp. 247-248.

48) 그람시, 앞의 책, p. 253.

49) 그람시, 앞의 책, p. 279.

50) 그람시, 앞의 책, p. 219.

51) 그람시, 앞의 책, p. 276.

52) 그람시, 앞의 책, p. 185.

53) 그람시, 옥중수고 II, 거름, p.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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