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 득시글거리는 무정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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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수

 

 채만수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

[편집자 주: 이 글은 ≪레프트 대구(Left Daegu)≫ 제10호 (2015. 12.)에 게재된 글입니다.]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가 아니다?

많은 독자가 아마 의아하다는 듯,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물을 것이다. “아~니, 무정부주의가 곳곳에 득시글거린다고? 도대체 어디에?”

그런 의문 혹은 항변도 이해할 만하다. 천하의 논객 홍세화 씨가 번역한, 19세기-20세기에 걸친 러시아의 저 걸출한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P. A. Kropotkin)의 소책자 ≪청년에게 고함≫(2014, 낮은산)에 해설자로 나서고 있는 하승우 박사님조차 이렇게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해석하는 건 심각한 오해이자 편견이다.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골드만, 유자명 등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을 강제적인 억압에 반대하는 ‘반(反)강권주의’로 받아들였다. 국가만이 아니라 경제, 문화적인 억압 모두에 반하는 사상이 바로 아나키즘이다. 중앙집권화된 국가권력, 독점된 자본, 표준화되고 획일화된 문화, 가부장적인 권력을 거부하는 사상이 아나키즘이고, 아나키즘은 자율적인 개인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추구했다. 그래서 무정부주의로는 아나키즘을 절반도 설명하지 못한다.

더구나 무정부주의라고 부르면 아나키즘이 가진 본질적인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다.1)

아나키즘의 전도사조차 이렇게 아나키즘은, ‘반(反)강권주의’일지언정, 무정부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나서니,2) ‘도대체 이 사회 어디에 무정부주의가 득시글거리느냐’는 의문, 항변이 나올 만도 한 것이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전도사, 그것도 특히 크로포트킨주의적 아나키즘의 전도사인 하승우 교수님께서 이렇게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나서는 것은 언어도단의 부정직이다. 왜냐하면, 하 박사 자신이 사숙(私淑)하며 그 사상을 전도하고 있는, 다름 아니라, 크로포트킨 바로 그는 아나키즘을 이렇게, 즉 “정부가 없다고 상정(想定)되는 사회에서의 생활 및 행동의 원칙이나 이론에 주어진 명칭(the name given to a principle or theory of life an-d conduct under which society is conceived without government)”3)이라고, 혹은 “정부가 없는 사회 상태(no government state of society)”4)라고 명문(明文)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고, 하 교수 또한 이를 모를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아나키즘에 대한 크로포트킨의 정의(定義)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그러한 사회 속에서의 [즉, 정부가 없는 사회 속에서의: 인용자] 조화(harmony)는, 법률에의 복속(服屬)이나 어떤 권위에의 복종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산과 소비를 위해서, 그리고 또한 문명화된 인간의 무한히 다양한 필요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유롭게 구성된 다양한 지역별 그리고 직업별 집단들 사이에 체결되는 자유로운 합의들에 의해서 얻어진다.5)

언뜻 들으면, 환상적일 만큼 매력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자유롭게 구성된 다양한 지역별 그리고 직업별 집단들 사이에 체결되는 자유로운 합의들”이 “법률(law)”까지는 아니라고 해두자. 그러나 그것이 “어떤 권위(any authority)”조차 아니라면, 저 ‘자유롭게 구성된 다양한 집단들’이, 그리고 그 집단들 속의 “문명화된 인간(civilized being)”이 과연 그것에 복종하고, 그리하여 “조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복종하진 않겠지만, 지키긴 할 것’이라고 장난친다면, 물론 두 손, 두 발 번쩍 들겠지만!

그러나 이러한 매력적인 환상은 무정부주의의 환상, 그 반동성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 환상, 그 반동성의 본줄기는 그 역사 인식과 그 현실 분석의 몰과학적 방법과 내용에, 그리하여 저 ‘정부가 없는’ 환상적으로 매력적인 사회에 이르는 방도 혹은 방략의 몰과학성에, 그리고 과학과 과학적 실천에 대한, 그러한 몰과학에 기초한 적대에 있다. 이 글에서 그 몰과학성・반동성의 대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은폐된 무정부주의

그건 그렇고, 우선 다시 곳곳에 득시글거리는 문제로 되돌아 가보면, ‘아~니, 도대체 어디에 무정부주의가 득시글거린단 말인가’ 하는 의문・항변을 낳게 하는 보다 더 큰 원인, 더 큰 사정은 사실 다른 곳에 있다.

그러한 의문・항변이 나오는 것은, 무정부주의가, 도처에서 득시글거리면서도, 역시 아니 보다 더 철저히 은폐된 형태로 선전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정부주의의 선전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그 선전이 무정부주의적인 것임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은폐된 무정부주의, 그 선전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그 하나는 그 선전자 자신 역시 자신이 선전하고 있는 것이 무정부주의임을 모르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선전자가 자신의 선전이 무정부주의의 그것임을 명백히 혹은 미필적으로 인식하면서도 역시 명백한, 혹은 미필적인 고의로 그것을 은폐하는 경우이다.

그 선전이 객관적으로 끼치는 반동적 해악은, 자신의 선전이 무정부주의임을 선전자가 의식하고 있는 경우나, 그렇지 않은 경우나 물론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러면, 먼저 그 선전자 자신 역시 자신이 선전하고 있는 것이 무정부주의임을 모르는 경우, 혹은 모르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부터 보자.

은폐된 무정부주의로서의 ‘쏘련=국가자본주의’론

‘쏘련은, 어떤 형태의 사회주의 사회도 아니고, 자본주의 사회,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 ― 이런 주장이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도 꽤나 시끄럽게 목청을 높이고 있다. 물론 서유럽에서는 보다 일찍부터, 그러니까 예컨대, 소위 좌익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는 1920년대부터, 그리고 자칭 국제사회주의자들(이른바 IS)에 의해서는 1940년대 말엽부터 주장되어 왔던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헛소리들인데, 그것이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해체된 후 우리 사회에서도 각종의 반동적 사상이 일부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대략 서너 부류의 지식인들이 ‘쏘련은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는, 한때 꽤나 시끄러웠으나 요즘은 조금은 조용한, 조정환을 위시한 소위 자율주의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오세철 교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좌익공산주의자들과 그 아류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영국의 ‘사회주의 노동자당’과의 밀접한 연계 속에서, 혹은 그들의 절대적인 사상적ㆍ정치적 영향력과 지도 하에서, ‘IS’에서 ‘다함께로’, 그리고 다시 ‘노동자 연대’로 이름을 바꿔가며 오늘날 민주노총의 집행부에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는 자칭 국제사회주의자들인 뜨로츠끼주의 일파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쏘련 해체 전에는 선도적으로 쏘련의 경제학 문헌을 소개해왔으나 그 해체 이후에는 반쏘주의자로 일변한 윤소영 교수와 그의 추종자들, 혹은 그 한때의 추종자들이다. 그리고, 뒤늦게 ‘쏘련=국가자본주의론’을 들고 나오신 ‘한국 최고의 마르크스주의자’ 고(故) 김수행 교수님도 물론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6)

이들 가운데 자율주의자들은 주관적으로도 자신들이 무정주의자들임을, 혹은 적어도 무정부주의적임을 분명 부인하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주장을 ‘은폐된 무정부주의’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

윤소영 류의 반쏘주의, ‘국가자본주의론’은, 스스로 무정부주의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ㆍ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7) 아마 자신들은 무정부주의와 무관하다고 주장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이들 자율주의자들과 윤소영 류의 부류를 제외 혹은 유보하고, 나머지 부류들에 대해서 “적어도 쏘련에 대한 시각과 그 선전에 관한 한, 당신들은 은폐된 무정부주의자들이오!” 하면, 그들은, ‘노동자 연대’라는 이름의 뜨로츠끼주의자들도, 좌익공산주의자들도,8) 그리고 고 김수행 교수님도 아마 “내가 (혹은 우리가) 왜 무정부주의자냐”며 펄쩍펄쩍 뛰고 나설 것이며, 자신들은 비과학적인 무정부주의자들과는 다른 맑스주의자이고, 따라서 자신들의 주장은 무정부주의자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관련, 공통점도 없으며, 독창적이라고 주장하고 나설 것이다.

그러나 다음 글을 보라.

우리의 [즉, 러시아의: 인용자]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상황에 관해서 [말하자면: 인용자], 러시아 혁명은 … 프랑스 혁명이 “실질적인 평등”이라고 불렀던 것, 즉 경제적 평등을 창출하는 데에 성공하기 전에 멈췄던 그 지점에 도달하려 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러시아에서 이 노력은 강력하게 중앙집권화된 당 독재 하에 이루어져 왔다. 이 노력은, 극도로 중앙집권화되고 바뵈프(Baboeuf)의 자코뱅적(Jacobin)인 시도와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내가 당신들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내 생각으로는, 당 독재의 철(鐵)의 법률 하의 강력하게 중앙집권화된 국가공산주의(state communism)를 기반으로 공산주의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이 시도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우리는, 인민이 구(舊)체제에 지쳐 있고 새로운 지배자들의 실험들에 어떤 적극적인 저항도 하고 있지 않지만, 어떻게 공산주의를 도입해서는 안 되는가를 배우고 있다.

쏘비에뜨라는 사상, 즉, … 짜르체제가 전복되자마자 1917년 2월 혁명에 의해서 즉각적으로 실현된 노동자・농민의 평의회라는 사상은 위대한 사상이다. …

그러나 나라가 당 독재에 의해서 통치되는 한, 노동자・농민의 평의회는 그 모든 의의(significance)를 잃는다. …

더 이상 언론의 자유가 없다면, 노동자 평의회는 자유로울 수도, 쓸모가 있을 수도 없는 것이며,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그러한 상태에 있었다 ― 전쟁 상태에 있다는 구실 하에.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선거가 자유로운 선거운동에 의해서 진행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선거가 당 독재에 의한 압력 하에서 이루어진다면, 노동자・농민 평의회는 그 의의를 잃는다. 물론, 상투적인 핑계는 구체제와 싸우기 위해서 독재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분명 후퇴인바, 왜냐하면 혁명이란 새로운 경제적 기초 위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운 체제의 조종(弔鐘)을 의미한다.9)

 

다름 아니라, 예의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이 1919년 4월에 서유럽의 노동자들에게 보낸 공개서한의 일부이다. 그리고 보다시피, 그 안에는 오늘날 “소련은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고 외치는 자들의 쏘련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즉, 그에 의하면, 러시아 혁명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실패하여 ‘실질적인 평등’, 즉 경제적 평등을 창출하지 못하고 멈추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강력하게 중앙집권화된 당 독재(strongly centralized party dictatorship)”이다! 당의 독재 때문에 노동자ㆍ농민의 평의회, 즉 쏘비에뜨가 형해화(形骸化)되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중앙집권화된 당의 독재 때문에,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으로서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지 못하고, 머물렀다는, 즉 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했다는 뜻이다.

당의 독재 때문에, 혹은 1930년대 이후 특히 뜨로츠끼주의자들의 표현을 빌면, ‘스딸린주의’(!)의 독재 때문에 쏘비에뜨가 “자유로울 수도, 쓸모가 있을 수도 없(게)” 되고, 즉 형해화되고, 쏘련은 자본주의로, 국가자본주의로, 반혁명적으로 후퇴했다! ― 이것이 오늘날 “쏘련은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고 외치고 있는, 맑스주의자임을 자임하는 사회주의ㆍ공산주의 혁명가들의 주장 아니던가?

그러나, 좌익공산주의자들도, 자칭 국제사회주의자들인 뜨로츠끼주의자들(‘노동자 연대’)도, 윤소영 교수님이나 고 김수행 교수님께서도,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 맑스주의자임을 자임하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지만, 쏘련이 자본주의 사회였음을 주장하려면, 무엇보다도 필수적으로, 맑스가 그의 주저(主著)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존립조건”으로서까지 언명했던 과잉인구, 산업예비군, 즉 실업이 쏘련 사회에 존재했음을 입증해야 하지 않겠는가? 맑스는 이렇게 쓰고 있기 때문이다.

과잉노동자 인구가 축적의 또는 자본주의적 기초 위에서의 부의 발전의 필연적 산물이라고 한다면, 이 과잉인구는 거꾸로 자본주의적 축적의, 아니 실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존립조건으로 된다. 그것은 마치 자본 자체의 비용으로 육성된 것처럼 아주 절대적으로 자본에 속하는, 자유자재로 가동할 수 있는 산업예비군을 형성한다. 그것은 자본의 변전(變轉)하는 가치증식 욕망을 위해서 항상 이용될 수 있는 인간 재료를 현실적인 인구증가의 제한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만들어 낸다.10)

그러나 누구도 쏘련에 그러한 과잉인구, 산업예비군, 즉 실업이 존재했음을 입증할 수 없다. 물론, 그러한 것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저들은 그 과잉인구, 산업예비군, 즉 실업의 존재를 입증하기는커녕 거꾸로, 예컨대, 쏘련에 극단적으로 적대적인 영국의 좌익공산주의자들의 한 집단이 집필하고, 저 천하의 ‘공산주의자’ 오세철 교수님께서 ‘번역’(?)해내신 한 저서에서처럼, “쏘련에서는 국가가 완전고용을 보장했다”11)고 증언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러면서도 저들은 “쏘련은 자본주의 사회”였단다! “쏘련은 자본주의 사회였다”! ― 이 얼마나, 무정부주의적이지 않고, 과학적인, 맑스주의적인 주장인가!

“당의 독재”와 관련해서는, 저들은 아마 이렇게 주장할지 모른다. 즉, ‘당의 독재’를 비판한다는 미명으로 무정부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그것을 부인하지만, 자신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인정하며, 그야말로 말 그대로의 당의 독재, 스딸린주의 독재를 비판할 뿐이라고.

만일 그렇다고 주장한다면, 얄궂지만 저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의 다음과 같은 ‘비판’이 크로포트킨 바로 그 자신에게 딱 적절한 만큼이나 저들 ‘맑스주의 혁명가들’에게도 적절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태를 구체적으로, 견실하게 보지 않는다. 그들은 상황을 명확히 마음속에 그리면서(in clearly-imagined pictures) 생각하기보다는 말로써만(in words) 사고하고, 그들은 혁명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 그 혁명으로 하여금 현재의 형태를 취하게 해온 저 수백만의 원인들에 대한 ― 인식을 절대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혁명 과정 속에서의 그들의 인간성의 중요성을, 그리고 이 거대한 격변 속에서 그들과 그들의 동료들, 동일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12)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저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견실하게 보지 않(고)”, 그것을 “명확히 마음속에 그리면서 생각하기보다는 말로써만 사고하고” 있지 않은가? 저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무엇인지에 대한, 그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하여금 과거 쏘련에서의, 특히 스딸린 지도 하의 쏘련에서의 형태를 취하게 한 “저 수백만의 원인들에 대한 인식을 절대로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리하여 저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의 “그들의 인간성의 중요성을, 그리고 이 거대한 격변 속에서 그들과 그들의 동료들, 동일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지 아니한가?! 아무튼 이렇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 채 그저 근사하게 들리는 말을 지껄이는 것 또한 무정부주의자들과 그 아류의 기질, 장기(長技)이다.

아무튼, 오늘날 좌익공산주의자들이나, 뜨로츠끼주의자들, 윤소영ㆍ김수행 교수 등이 “쏘련은 자본주의 사회였다”며 퍼붓는 악담들은 한 마디로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즉, ― “이것은 혁명의 매장이다”! 다름 아니라, 바로 저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이 혁명의 와중에서 내뱉었다는 말이다.13)

무정부주의자들의 ‘국가폐지’론

그런데 쏘련에 대한 저들의 그러한 악담들은, 그 악담을 퍼붓는 자들이 그것을 인식하고 있든 아니든, 사실은 무정부주의자들의 저 유명한 ‘국가 폐지’론에 입각하고 있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맑스주의에서 국가는 계급 지배의 도구이자 지배계급 내부의 이해 충돌의 조정자이다.14) 그리고 그것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즐겨 논거로 삼는 ‘인간의 본성’과는 무관한 어떤 우연한 계기에 그 본성에 반하여 외부로부터 강요된 것이 결코 아니다. 국가 그것은 인간의 노동생산력이 발전하여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잉여생산물이 사회적 규모로 발생하게 되자 사회가 그 잉여생산물을 착취하는 계급과 착취당하는 계급으로 화해 불가능하게 분열된 결과 필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인 맑스와 엥엘스는 역사적 유물론에 기초한 이러한 국가관을 일찍이 1840년대부터 ―예컨대 ≪독일 이데올로기≫(1845/46년)에서부터― 발전시켜 수많은 저작들 속에서 이를 명확히 표명해왔는바, 여기에서는 그 가장 정식화된 표현들을 인용해두자.

국가란 … 결코 외부로부터 사회에 강요된 권력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헤겔이 주장하듯이, “윤리적 이념의 현실성”, “이성의 형상(Bild) 및 현실성”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특정한 발전단계에 있는 사회의 산물이다. 그것은 이 사회가 자기 자신과 해결할 수 없는 모순에 끌려들어가, 자신이 물리칠 힘이 없는 화해할 수 없는 대립물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의 고백이다. 그와 더불어 그러나 이 대립물, 즉 상반되는 경제적 이해를 가진 계급이 무익한 투쟁 속에서 자신과 사회를 먹어치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충돌을 완화하고 그것을 ‘질서’의 한계 내에 유지할, 외견상으로는 사회 위에 서는 권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사회로부터 태어났지만, 그러나 그 자체 사회의 위에 서고, 갈수록 그로부터 소외되어 가는 이 권력이 국가이다.15)

국가는 계급대립을 억제할 필요에서 생겼기 때문에, 그러나 동시에 이들 계급 충돌의 한 가운데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일반적으로 가장 강력하고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계급의 국가이며, 이 계급은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정치적으로도 지배하는 계급으로 되며, 그리하여 피착취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위한 새로운 수단을 획득한다. 그리하여, 봉건국가가 농노와 예속농민을 억압하기 위한 기관이었고 근대 대의제 국가가 자본에 의한 임금노동의 착취 도구인 것처럼, 고대 국가는 무엇보다도 노예 억압을 위한 노예소유자들의 국가였다. 예외적으로, 서로 투쟁하는 계급이 거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곳에서는 국가권력이 외견상의 조정자로서 일시 양자에 대하여 어느 정도 독자성을 갖는 시기가 존재한다. 귀족과 시민계급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던 17・18세기의 절대군주제가 그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대해서, 그리고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 반목하고 있던 제1, 그리고 특히 제2 프랑스 제정(帝政)의 보나빠르띠즘이 그랬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이런 식으로 똑같이 희극적으로 나타나는 최근의 예는 비스마르크의 새로운 독일 제국이다.16)

민주공화국은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재산을 차별하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부는 그 권력을 간접적으로, 그러나 그 때문에 더욱 확실하게 행사한다. 한편에서는 미국의 경우처럼 직접적인 관료매수의 형태로, 다른 한편에서는 정부와 거래소의 동맹의 형태로 ….17)

국가의 본질과 그 기능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실상 누구에게나 알려져 있는 이 구절들을 굳이 여기에 인용해두는 것은, 이를 명확히 알아야만 무정부주의자들의 소위 ‘국가 폐지론’의 황당함을 확신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무정부주의자들에게도 국가는 억압적 폭력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국가의 즉각적인 폐지를 주장한다. 억압적 폭력에 불과한 국가를 즉각 폐지하라! 이 얼마나 쌈빡하고 매력적인 주장인가?! 앞에서 보았지만, 바로 이 쌈빡한 주장이 저들 무정부주의자들이 쏘련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비난하는, 쏘련이 혁명을 매장했다고 주장하는 가장 기본적인 준거이기도 하다.

좋다. 그 쌈빡한 주장처럼 국가를 즉각 폐지하고, 그리하여 사회 속의 ‘개인들’이 즉각적으로 아무런 억압 없이, 자유롭게, 상호부조하면서 살아갈 수 있으면야 오죽이나 좋겠는가?! 정말 오죽이나 좋겠는가?!

그러나, “국가란 … 결코 외부로부터 사회에 강요된 권력이 아니(며)” “그것은 … 특정한 발전단계에 있는 사회의 산물”로서 “이 사회가 자기 자신과 해결할 수 없는 모순에 끌려들어가, 자신이 물리칠 힘이 없는 화해할 수 없는 대립물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의 고백”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국가는 계급대립을 억제할 필요에서 생겼기 때문에, 그러나 동시에 이들 계급 충돌의 한 가운데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일반적으로 가장 강력하고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계급의 국가이며, 이 계급은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정치적으로도 지배하는 계급으로 되며, 그리하여 피착취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위한 새로운 수단을 획득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국가가 무언가의 조치를 통해 즉각 폐지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렇게 주장할 수 있을까? 일정한 사회혁명, 정치혁명을 거치고도, 그리하여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폐지한 이후에도 착취와 억압의 구체제를 부활시키고 재건하려는 세력들이 갖은 형태로 준동하는데, 그러한 시도, 준동, 반혁명을 억압ㆍ제거하는 일정 기간의 독재 없이도, 자신들이 망상하는 ‘아나키즘적 공산주의’라는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겠는가?

몇 가지 시덥잖은 조건을 붙여서이겠지만, 저들은 물론 “그렇다, 가능하다”고 대답할 것이다.18) 역시 무지와 망상은 저들의 자유이기 때문에!

이러한 쌈빡하고 매력적인 무지ㆍ망상ㆍ행티가, 표현만 조금 다를 뿐, 좌익공산주의자들이나 ‘쏘련=국가자본주의’였다고 주장하는 일부 뜨로츠끼주의자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음은 위에서 본 대로이다.

그런데 뜨로츠끼와 그 추종자들 일반에게서는 쏘련에서 관료주의의 문제를 둘러싸고도 그러한 무정부주의적 무지ㆍ망상ㆍ행티가 나타난다. 여기에서 자세히 논할 여유는 없지만, 아무튼 붉은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그리고 1920년대 초두에 노동조합 문제를 둘러싸고 누구보다도 심각하게 관료주의를 조장하는 조치들을 취했고, 그것을 강화하는 주장을 펼친 장본인과 그 추종자들이, 마치 어떤 혁명적 조치, 혁명적 선언을 통해서 일거에 관료주의를 일소할 수 있는 양 주장하면서, 쏘련을, 관료주의 문제에 대한 스딸린의 정책을 비난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저들의, 무지와 망상일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은폐된 반공주의로 귀결되는, 구제 불능의 반쏘ㆍ반스딸린주의의 발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 무정부주의자들의 무지ㆍ망상이든, 좌익공산주의자들이나 뜨로츠끼주의자들의 그것과 반쏘ㆍ반스딸린주의의 발로이든, 그것들이 끼치는 해악, 즉 아직 계급적 정치의식이 높지 못한 노동자 대중과 소부르주아들을 반쏘ㆍ반공주의로 오도하고, 그들 안에 그러한 종파주의를 심어 노동자ㆍ인민 대중의 혁명적 진출을 가로막는 것에는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국가는, 그리고 그 억압적 기능들은, 저들이 공공연한 형태로, 혹은 은폐된 형태로 주장하듯이, 일시에 즉각 폐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 조건에 따라 길거나 짧은 이행기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통해서 “사멸하는” 것, “잠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엥엘스에게서 들어보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갈수록 더 대량의 인구를 프롤레타리아로 전화(轉化)시킴으로써, 몰락이라는 형벌 때문에 부득이 이 변혁[=“생산물이 처음에는 생산자를, 다음에는 취득자도 예속시키는 자본주의적 취득양식에 대신하여, 현대 생산수단의 본성에 기초를 두는 생산물의 취득양식이 나타나게” 하는 변혁: 인용자]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는 세력을 창출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거대한 사회적 생산수단을 국가 소유로 전화시키도록 갈수록 더 밀어붙임으로써, 변혁 수행으로의 길을 스스로 보여준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생산수단을 우선 국가 소유로 전환한다.19)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자기 자신을 지양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계급 구분과 계급대립을 지양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로서의 국가를 지양한다. 계급대립 속에서 운동해온, 지금까지의 사회는 국가를, 즉 그때그때의 착취계급이 자신의 외적 생산조건들을 유지하기 위한, 그리하여 특히, 피착취계급을 현존 생산양식에 의해서 주어지는 억압의 조건들 (노예제, 농노제 혹은 예농제, 임금노동) 하에 폭력적으로 억눌러두기 위한 조직을 필요로 하였다. 국가는 전체 사회의 공식적 대표자, 즉 하나의 가시적인 단체로의 그 총괄이었는데, 그러나 국가가 이러한 것이었던 것은 단지, 국가가, 각각의 시대에 그 사회 전체를 스스로 대표했던 계급의 국가, 즉 고대에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국가시민(Staatsbürger)의 국가, 중세에는 봉건귀족의 국가, 우리 시대에는 부르주아지의 국가인 한에서였다. 국가가 마침내 진실로 사회 전체의 대표자가 됨으로써, 국가는 스스로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억눌러두어야 할 어떤 사회계급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자마자, 계급 지배 및 지금까지의 생산의 무정부성에 기초한, 개인적 생존을 위한 투쟁과 함께 거기에서 연유하는 충돌과 무절제(Exzess)도 또한 제거되어 버리자마자, 특수한 억압권력, 즉 국가를 필요로 했던, 억압해야 할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국가가 진실로 사회 전체의 대표자로서 취하는 최초의 행위― 사회의 이름으로 생산수단을 장악하는 것 ―는 동시에 국가로서의 국가의 최후의 행위이다. 사회적 관계들 속으로의 국가의 개입은 한 분야 한 분야 차례로 불필요해지고, 이윽고 저절로 잠들어간다. 인간에 대한 지배 대신에 사물의 관리와 생산과정의 지배가 나타난다.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사멸한다. 이것에 의해서 “자유로운 인민국가”라는 공문구는 평가되어야 하며 … 이것에 의해서, 국가는 오늘이나 내일 폐지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무정부주의자들의 요구도 역시 평가되어야 한다.20)

“국가는 오늘이나 내일 폐지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무정부주의자들의 요구”의 몰과학성은, 그리고 반쏘주의를 선전하는 수많은 ‘혁명가들’의 주장의 몰과학성은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사멸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사회적 관계들 속으로의 국가의 개입은 한 분야 한 분야 차례로 불필요”해지면서 국가는 “이윽고 저절로 잠들어간다”는 사실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은폐된 무정부주의로서의 사회적 기업론, 사회적 협동조합론

≪한겨레≫ 신문과 그 부설 연구소들, 그리고 기타 몇몇 시민단체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은 몇 년 전부터 이른바 ‘사회적 기업’, 혹은 ‘사회적 협동조합’을 열심히 설교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상의 내용에서는 물론이고, 특히 ≪한겨레≫의 경우 크로포트킨의 저서를 번역하고 있는 홍세화 씨의 논객으로서의 주요 활동의 장(場)이 ≪한겨레≫라는 점에서도, 그리고 위에서 인용했던, 고명섭 기자 등 여러 사람들의 크로포트킨 및 그의 저서 소개, 무정부주의 소개가 무정부주의에 대한 어떤 비판적인 논급 한 마디 없이 “민중을 사랑한 ‘영원한 아나키스트’” 따위의 찬사로 가득한 점에 미루어 보아도, 이 소위 ‘사회적 기업’ㆍ‘사회적 협동조합’론은 분명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 특히 그의 ≪상호부조론≫의 영향을 받은 무정부주의의 선전이다.21) 그러나 물론 그들은 그것을 점잖은 침묵으로 은폐한다.

우리의 주제인 소위 ‘사회적 기업’론이나 ‘사회적 협동조합’론에 대해서 얘기하기 전에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에 대해서 한 가지만 간단히 언급하고 가자.

크로포트킨은 그의 ≪상호부조(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1902)22)에서, “자유 도시들의 파괴(ruin of the free cities)”니, “상호부조를 위한 중세의 모든 사회제도의 폭력적 종말(violent end to all medieval institutions f-or mutual support)”이니, “중세 문명의 쇠망(decay of medieval civilization)”이니 하고 운운하면서, “12세기로부터 15세기까지”의 중세가, 특히 그 사회 속의 동직조합들(guilds)이 마치 사실상 이상적(理想的)인 사회나 사회관계, 혹은 그에 준하는 사회ㆍ사회관계였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우선, 영주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저 “자유 도시들”을 마치 그 ‘내부의 사회ㆍ생산관계가 자유로운 도시들’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며, 중세 유럽의 영주들의 할거(割據) 체제를 중앙집권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마치 국가가 없는 문명이라도 되는 듯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저 동직조합들 내부에서의 장주(匠主, masters, Meister)-도제(journeymen, Gesellen) 간의 봉건적 착취ㆍ억압 관계 따위는, 그리고 중세 장원경제 내부의 야만적인 착취ㆍ억압 따위는 그의 안중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저 어이없는 복고주의, 그 반동성에 대해서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무지의 과시도 망상도 모두 그의, 그리고 그를 숭상ㆍ숭모하는 저들의 자유이니까!

그런데, 저들의 소위 ‘사회적 기업’론이나 ‘사회적 협동조합’론이 어째서 무정부주의적이고 반동적이냐고?

우선 다음 글을 먼저 보자. (오늘날 저들이 선전하는 ‘사회적 기업’론이나 ‘사회적 협동조합’론이 얼마나 무정부적이고 반동적인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고전(古典)이기 때문에, 인용이 다소 이례적으로 길더라도 양해하기 바란다.)

우리는 협동조합 운동, 특히 소수의 대담한 ‘일손들(hands)’이 [외부의: 인용자] 도움 없이 자기 노력으로 이룩한 협동조합 공장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 위대한 사회적 실험들의 가치는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과대평가일 수 없습니다. 주장이 아니라 행동에 의해서 그들은, 대규모로 그리고 근대 과학의 요청에 맞추어 이루어지는 생산은 일손 계급을 고용하는 고용주 계급이 존재하지 않아도 수행될 수 있다는 것, 과실(果實)을 낳기 위해서 노동수단이 노동하는 사람 그 자신을 지배하는, 그리고 강탈하는 수단으로서 독점될 필요는 없다는 것, 그리고 노예 노동처럼, 농노 노동처럼, 고용된 노동은, 그 일을 자발적인 손과 기꺼운 마음, 즐거운 가슴으로 수행하는 연합된 노동 앞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과도적(過渡的)이고 저급한 형태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영국에서는 협동조합 제도의 씨앗은 로버트 오웬에 의해서 뿌려졌습니다. 대륙에서 시도된, 노동자들의 그 시도들은, 1848년에 창안(創案)되지는 않았지만 그 해에 큰 목소리로 선포된 이론들의, 사실상, 실천적 귀결이었습니다.

동시에 1848년부터 1864년까지의 경험은, 아무리 원칙적으로 뛰어나고, 아무리 실천적으로 유용하다 하더라도, 협동조합 노동은, 만일 그것이 개별적인 노동자들(private workmen, vereinzelte Arbeiter)의 우연한 노력이라는 협소한 범위에 제한된다면, 기하급수적으로 진행되는 독점의 성장을 억제할 수 없으며, 대중을 해방시킬 수 없고, 심지어 그들의 궁핍이라는 부담을 눈에 띄게 경감(輕減)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의문의 여지없이 증명하였습니다. 겉만 그럴싸한 귀족들, 박애주의적인 청산유수의 부르주아(middle-class) 세객(說客)들, 그리고 심지어 빈틈없는(keen) 경제학자들조차, 자신들이 망상가의 공상(Utopia)이라고 조롱함으로써, 혹은 사회주의의 신성모독이라고 낙인을 찍음으로써 싹부터 잘라버리려 했으나 실패했던 바로 그 협동조합 노동 제도에 일제히 구역질나게 찬사를 보내는 것도 아마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근로 인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협동조합 노동은 국민적 규모로 발전되어야 하고, 따라서, 국민적 수단에 의해서 촉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토지 귀족들과 자본 귀족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경제적 독점들을 지키고 영구화하기 위해서 그들의 정치적 특권을 이용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노동의 해방을 추진하기는커녕, 그들은 온갖 가능한 방해물을 그 해방의 길에 계속 가져다놓을 것입니다. 지난 번 회기에 파머스턴 경(Lord Palmerston)이 아일랜드 소작인 권리 법안(Irish Tenants; Right Bill)의 지지자들에게 퍼부었던 냉소를 상기하십시오. 그는 외쳤습니다, 하원은 토지 소유자들의 의회다라고.

정치권력을 쟁취하는 것은 그리하여 노동자계급들의 커다란 의무가 되었습니다.23)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들, 근로인민에 의한 협동조합 운동의 의의와 그 한계에 대한, 그리고 그에 대해서 노동자계급이 취해야 할 태도, 수행해야 할 의무에 대한, 다름 아니라, 맑스의, 따라서 맑스주의자들의 관점이다.

경험은, 아무리 원칙적으로 뛰어나고, 아무리 실천적으로 유용하다 하더라도, 협동조합 노동은, 만일 그것이 개별적인 노동자들의 우연한 노력이라는 협소한 범위에 제한된다면, 기하급수적으로 진행되는 독점의 성장을 억제할 수 없으며, 대중을 해방시킬 수 없고, 심지어 그들의 궁핍이라는 부담을 눈에 띄게 경감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의문의 여지없이 증명하였(다)”는 것, 귀족들이나 박애주의적 부르주아 세객들, 그리고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이 … 싹부터 잘라버리려 했으나 실패했던 바로 그 협동조합 노동 제도에 일제히 구역질나게 찬사를 보내는 것도 아마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근로 인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협동조합 노동은 국민적 규모로 발전되어야 하고, 따라서, 국민적 수단에 의해서 촉진되어야” 하는데, “토지 귀족들과 자본 귀족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경제적 독점들을 지키고 영구화하기 위해서 그들의 정치적 특권을 이용”하여 그것을 계속 훼방할 것이며, “정치권력을 쟁취하는 것은 그리하여 노동자계급들의 커다란 의무가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맑스의 이러한 사상은, 오늘날 이른바 ‘사회적 기업’이야말로, ‘사회적 협동조합’이야말로 그것들이 소위 풀뿌리 운동으로서 널리 확산되기만 하면, 신자유주의, 즉 이 말기 자본주의가 노동자ㆍ인민 대중에게 가하고 있는 빈곤ㆍ실업ㆍ고통을 저절로 사라지게 하는 길인 양 선전하고 있는 저들 ≪한겨레≫나 ‘진보적 지식인들’, 일부 소부르주아 ‘진보 정치인들’의 사상, 한 마디로 은폐된 무정부주의자들의 사상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저들 은폐된 무정부주의자들의 사상은, 그들이 처방・선전하고 있는 방책, 즉 소위 ‘사회적 기업’이나 ‘사회적 협동조합’이 “대중을 해방시킬 수 없고, 심지어 그들의 궁핍이라는 부담을 눈에 띄게 경감할 수조차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해방의 길인 양, 노동자계급의 정치권력 쟁취 따위는 나 몰라라 해도 좋은 양 노동자ㆍ인민 대중을 오도하고,24) 그리하여 죽음이 임박한 이 착취ㆍ억압 체제를 연명시키는 데에 일조하기 때문에 반동적이다.

여기에서, “겉만 그럴싸한 귀족들, 박애주의적인 청산유수의 부르주아(middl-e-class) 세객(說客)들, 그리고 심지어 빈틈없는(keen) 경제학자들조차, 자신들이 … 싹부터 잘라버리려 했으나 실패했던 바로 그 협동조합 노동 제도에 일제히 구역질나게 찬사를 보내는 것도 아마” “개별적인 노동자들의 우연한 노력이라는 협소한 범위에 제한된협동조합 제도는기하급수적으로 진행되는 독점의 성장을 억제할 수 없으며, 대중을 해방시킬 수 없고, 심지어 그들의 궁핍이라는 부담을 눈에 띄게 경감할 수조차 없(기)” 때문일 것이라는 지적을 다시 주목하자.

오늘날 소위 ‘사회적 기업’ㆍ‘사회적 협동조합’을 선전해대는 자들은, 이 사회의 가장 반동적인 세력들, 재벌이나 이명박 정부가 사실상 앞장서서 ‘사회적 기업’ㆍ‘사회적 협동조합’을 선전ㆍ지원하고 있는 데에 대하여 아무런 반성적(反省的), 아무런 자기비판적ㆍ자기성찰적 문제의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니, 전혀 표출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사실은 자신들의 방책의 실현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서 환영하고 있다. 이 사회의 가장 반동적인 세력들이 앞장서서 ‘사회적 기업’ㆍ‘사회적 협동조합’을 선전ㆍ지원하는 것을 보면서, “혹시 내가”, “혹시 우리가” “저 반동적 세력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이 미필적으로나마 들지 않을 수 없을 터인데도, 저들이 저렇게 그에 대해서 침묵하며 전혀 문제의식을 표출하지 않고 있고, 심지어 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적어도 미필적으로는’ 자신들이 반동적 세력에 봉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용인하는 것 아니겠는가? 훌륭하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앞에서 본 것처럼, 맑스는 노동자들의 협동조합 운동의 의의를 극히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 노동자 협동조합 공장들이 “[외부의: 인용자] 도움 없이 자기 노력으로 이룩한” 것들임을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바로 그렇게 자력으로 성취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만 그 협동조합 운동, 협동조합 공장이라는 “위대한 사회적 실험들”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과대평가일 수 없(는)” 가치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들이 “주장이 아니라 행동에 의해서 … 대규모로 그리고 근대 과학의 요청에 맞추어 이루어지는 생산은 일손 계급을 고용하는 고용주 계급이 존재하지 않아도 수행될 수 있다는 것, 과실을 낳기 위해서 노동수단이 노동하는 사람 그 자신을 지배하는, 그리고 강탈하는 수단으로서 독점될 필요는 없다는 것, 그리고 노예 노동처럼, 농노 노동처럼, 고용된 노동은, 그 일을 자발적인 손과 기꺼운 마음, 즐거운 가슴으로 수행하는 연합된 노동 앞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과도적(過渡的)이고 저급한 형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저 은폐된 무정부주의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그 소위 ‘사회적 기업’ㆍ‘사회적 협동조합’이 국가와 재벌의 지원 하에 설립되고 운영되는 데에 대해서 비판적 문제의식을 갖기는커녕 환영하고 있다. 혹시, “근로 인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협동조합 노동은 국민적 규모로 발전되어야 하고, 따라서, 국민적 수단에 의해서 촉진되어야” 한다는 것을 저들도 알고 있기 때문에?

분명 아니다.

협동조합 운동이 “근로 인민을 구원하기 위해서” “국민적 규모로 발전되…고, 따라서, 국민적 수단에 의해서 촉진”될 수 있는 절대적인 전제적 조건은 노동자계급에 의한 사회 전체의 운영, 그 수단으로서의 노동자계급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이기 때문이다. 맑스가 “정치권력을 쟁취하는 것은 그리하여 노동자계급들의 커다란 의무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 아니겠는가?

그러나, 자신들의 주장의 이론적ㆍ철학적 권위를 제외하곤 일체의 권위, 국가를 부정ㆍ거부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의 경우는 당연히 전혀 다르게 사고하고 주장한다. 어폐를 무릅쓰고, 이들 역시 협동조합 운동이 “근로 인민을 구원하기 위해서” “국민적 규모로 발전되고, 따라서, 국민적 수단에 의해서 촉진”될 수 있는 근거를 찾는다면, 저들은 그것을, 당연히 국가 권력에서 찾지 않고, 크로포트킨에 따라 상호부조의 인간 본성에서 찾기 때문이다. 즉, 너무나 영광스럽게도 “개미, 바다로 나아가 알을 낳으려 할 때 무리를 지어 이동하며 서로 제휴하고 협동하는 서인도 제도 참게, 상호지원의 사회성이 특히나 발달한 꿀벌, 몇 시간 동안 갇힌 동료를 도와주려고 애쓰는 몰루카 게들의 감동적 협력과 연대! 솔개, 황조롱이, 도요새, 앵무새들”25) 등등 온갖 미물(微物)의 그것으로까지 격상된 상호부조의 인간 본성에서, 혹은 그에 기초하여 “만물의 자연법칙”으로까지, 그리하여 과학으로까지 승화된 “서로돕기와 연대”26)에서 저들은 그 근거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동시에 저들은 이 사회의 가장 반동적인 세력들이, 국가가 소위 ‘사회적 기업’ㆍ‘사회적 협동조합’을 지지ㆍ지원하는 것을 환영하고 있다. 크로포트킨이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어울리는 ‘비판’을 러시아 혁명가들에게 해대는 것을 보면서, 내가 “아무튼 이렇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 채 그저 근사하게 들리는 말을 지껄이는 것 또한 무정부주의자들과 그 아류의 기질, 장기이다”라고 했던 것을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그들의 행동・실천 또한 그렇다.

다윈의 진화론에 적대하며,27) 그리고 맑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에 적대하며 ‘상호부조’라는 ‘인간 본성’을 역사발전의 원동력으로 내세우는 저들의 저 극히 추상적인 인간관에 대한 비판은, 예컨대 프루동에 대한 맑스와 엥엘스의 비판을 통해서 이미 한 세기 반도 더 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저들에게 싱거운 질문 하나만 던져보기로 하자.

“상호부조”가, “서로돕기와 연대”가 그렇게 인간의 본성이고 “만물의 자연법칙”이기까지 하다면, 착취와 억압, 계급투쟁, 전쟁이 이렇게 수천 년 동안 인간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당신들이 그토록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그 즉각적인 폐지를 주장하는 국가는 도대체 왜 발생하여, 수천 년이 지나도록 완강히 그 지배를 계속하고 있는가?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정말로 훌륭한 대답을 듣게 된다.

상호부조는, 진화의 요인들 가운데 하나를 대표하긴 하지만, 그러나 역시 인간관계들의 단지 한 측면만을 카바한다(cover)고 하는 것, [그러나: 인용자] 그것이 강력하긴 하지만, 이러한 흐름의 곁에는 다른 흐름 ― 경제적・정치적・종교적으로 개인적 혹은 카스트적 우세를 점하려는 데에서뿐만이 아니라, 부족과 촌락공동체, 도시[공동체: 인용자], 국가가 개인에게 강요하고, 언제나 결정화(結晶化)되는 경향이 있는 속박들을 돌파하는, 덜 명확하긴 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기능에 있어서도, 개인의 자기주장[이라는 다른 흐름: 인용자]이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진보적인 요인으로 간주되는, 개인의 자기주장이 있다.28)

자, 이제, 무정부주의자들, 크로포트킨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진의에 반한다고 항변할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이 훌륭한 답변을 계량화(?)해 보자.

그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양대(兩大) 본성, 혹은 양대 인간관계가 있어, 그 하나는 ‘상호부조’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주장’이다. 그런데, 그가 ‘상호부조’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시키고 있고, 또 그 속에서 아나키즘적 공산사회의 필연성을 보고 있음을 상기하면, 이 양대 본성 혹은 인간관계 중에서 ‘상호부조’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 전체 본성 혹은 인간관계의 2분의 1 이상일 것이고, 그 이하는 결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자기주장’에 대해서도 그는 양대 ‘자기주장’을 말하고 있다. “… 우세를 점하려는” ‘자기주장’, 즉, 그가 무언(無言) 중에 분명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자기주장’과, 국가 등이 “개인에게 강요하고, 언제나 결정화(結晶化)되는 경향이 있는 속박들을 돌파하는, … 훨씬 더 중요한 기능에 있어서[의] … 자기주장”, “진보적인 요인으로 간주되는, 개인의 자기주장”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도 “진보적인 요인으로 간주되는, 개인의 자기주장”이 그 ‘자기주장’의 2분의 1 이상이다. 그리하여 전체적으로 보면, ‘상호부조’와 그것을 강화하는 요인으로서의 ‘자기주장’이 인간의 본성 혹은 본성적 인간관계의 최소한 4분의 3 이상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4분의 1도 안 되는 부정적 ‘자기주장’이 지난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역사를 지배해온 셈이다! 도대체 무슨 연유인가?

그런데 위 인용문에 이어지는 크로포트킨의 심오한 진술을 보면, 우리는 역시 그와는 껨(game)도 안 되는 하수(下手)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두 지배적인 흐름들이 분석되지 않는다면, 진화에 대한 어떤 설명도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개인이나 개인 집단들의 자기주장, 우세를 점하기 위한 그들의 투쟁들, 거기에서 귀결되는 갈등들은 이미 기억할 수 없는 태고 적부터 분석되어 왔고, 기술(記述)되어 왔으며, 찬미되어 왔다. 실제로, 지금까지는, 오직 이러한 흐름만이 서사시인, 분석가, 역사가, 그리고 사회학자의 주목을 받아왔다.29)

 

착취와 억압, 전쟁, 계급투쟁, 전쟁, 국가의 지배가 수천 년 동안의 인간의 역사였다고 보는 것은, 4분의 1도 안 되는 오직 그러한 흐름만이 “기억할 수 없는 태고 적부터” “서사시인, 분석가, 역사가, 그리고 사회학자의 주목을 받아왔(고)”, “분석되어 왔고, 기술(記述)되어 왔으며, 찬미되어 왔(기)” 때문에 생기는 환상, 그 때문에 “혼이 비정상”으로 되어 생기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무정부주의의 전도사들도 물론 그렇게 얘기한다. 예컨대, 이렇게,

물론 자연에서도 투쟁과 다툼이 일어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기 동안 동물과 식물은 평화롭게 살아간다. 서로 도우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 즉 상호부조(相互扶助)는 진화에서 생존 경쟁보다 더 요긴하다. 목숨을 지키는 데도, 에너지를 적게 쓰는 데도 더 낫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 속의 여러 모습을 예로 든다. … 개미 … 철새 … 버펄로 … 코끼리, 물범, 고래, 원숭이에 이르기까지, 자연에서 서로 돕고 살아가는 모습은 쉽게 눈에 띈다.

그럼에도 학자들은 평화로운 시기를 놓쳐 버리곤 한다. 싸움은 특별하기에 눈길을 잡아끌지만, 협력과 공생(共生)으로 꾸려지는 일상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탓이다. 진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상호부조’를 신경 써서 바라보지 않았던 이유다.

크로폿킨은 상호부조를 진화를 이끄는 가장 중요한 힘으로 여겼다. 협력하고 서로를 보듬는 종(種)일수록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보면, 인간 역사를 바라보는 눈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역사에는 전쟁이 숱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전쟁이 정상 상태였던 적은 없었다”. 평화의 시기는 전쟁 기간보다 훨씬 길기 마련이다. 게다가 사람들의 본성은 결코 사납지 않다. 자유롭게 내버려 두면 사람들은 서로 도우며 오순도순 살아간다.30) 경찰관이 없어도 불안해하지 않는 작은 농촌 마을처럼 말이다.31)

안 박사님, 그런데 전쟁은 왜 숱하게 일어났구, 경찰관은 왜 생겨났대유~? 그리고 지금 문제는 전쟁 기간이 긴가, 평화의 시기가 긴가가 아니잖남유? 왜 그런 박사스러운, 정말 웃기는 논법으로, ‘전쟁의 시기’에 못지않게 ‘평화의 시기’에 벌어지고 있는, 상호부조가 아닌, 착취와 억압, 계급투쟁을 얼버무리고 은폐허시남유? 왜 그렇게 사기치시나유?

그건 그렇고, 진보 ≪한겨레≫ 등이 열심히 설파하고 있는, 은폐된 무정부주의로서의 사회적 기업론, 사회적 협동조합론에 대하여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자.

맑스는 “협동조합 노동은, 만일 그것이 개별적인 노동자들의 우연한 노력이라는 협소한 범위에 제한된다면, 기하급수적으로 진행되는 독점의 성장을 억제할 수 없으며, 대중을 해방시킬 수 없고, 심지어 그들의 궁핍이라는 부담을 눈에 띄게 경감(輕減)할 수조차 없다”고 말하고 있음에 비해서, 이 사회의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 ‘진보적 언론’은 은연중에 그것을 사실상 만병통치약처럼 선전하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그러면 저들의 이른바 ‘사회적 기업’, ‘사회적 협동조합’은, 다른 건 다 그만두고, 이 사회 노동자ㆍ인민의 “궁핍이라는 부담을” 얼마나 경감시킬 수 있을까? 가령, 일천 개의 이른바 ‘사회적 기업’, ‘사회적 협동조합’이, 자립적으로든, 재벌이나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든, 설립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다른 것은 다 그만두더라도, 예컨대, 5년 후, 10년 후에 그 중 몇 개나, 몇 퍼센트나 살아남을 것이며, 성장해갈 수 있을까?

아직 신뢰할 만한 통계가 없지만, 그야말로 극소수만이 살아남아 있을 것임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운동법칙에 비추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왜냐?

“자유경쟁은 개별 자본가들에게 대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적 법칙들을 외적 강제법칙으로 작용하도록”32) 하기 때문이고, 그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 새로운 생산방식을 요구하고, 상품을 저렴하게 생산하기 위해서 대규모 생산을 요구하는, 자유경쟁에서 절대적으로도 상대적으로도 소규모일 수밖에 없는 그들 이른바 ‘사회적 기업’, ‘사회적 협동조합’은 대자본, 독점자본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저들의 이른바 ‘사회적 기업’론, ‘사회적 협동조합’론은 노동자・민중의 “궁핍이라는 부담”을 경감시키기는커녕, 그들을 더욱 더 깊은 절망과 수렁 속에 몰아넣는 것이다.33) 1998년-1999년 외환ㆍ금융위기의 한 복판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이른바 벤쳐기업들 가운데 오늘날 몇 개 업체나 살아남았는가를 생각해보라.

앞에서 본 것처럼, 진보 ≪한겨레≫는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을 가리켜 “민중을 사랑한 ‘영원한 아나키스트’”라며 칭송하고 있다. 그 ≪한겨레≫를 위시하여 오늘날 저 이른바 ‘사회적 기업’, ‘사회적 협동조합’을 설파ㆍ전도하는 ‘진보적 지식인들’도,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영원하다’고까지야 할 수 없겠지만, 물론 “민중을 사랑한 ‘아나키스트들’”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그것을 설파ㆍ전도하는 저들의 의도가 그러한 ‘민중에 대한 사랑’이라면, 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서양의 속담을 둘려주어야 할 것이다. ―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善意)로 포장되어 있다”!

이른바 ‘대안화폐’

한편, 마찬가지의 선의로 포장된 무정부주의적 운동 중에는 이른바 ‘대안화폐’라는 것도 있다. 이른바 ‘사회적 기업’이나 ‘사회적 협동’처럼 영향력이 큰 대형 언론에 의해서, 그리고 특히 반동적 정부기관, 재벌들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선전ㆍ지원되고 있진 않지만, 고려대학교의 강수돌 교수34) 같은 저명한 지식인을 포함한 여러 ‘진보적 논객들’에 의해서, 그리고 ‘희망제작소’나 ‘함께하는 시민행동’ 같은 ‘진보적 단체들’에 의해서 선전되고 있고, 또 여러 지역의 ‘풀뿌리’ 공동체 운동에 의해서도 실험ㆍ실천되고 있다. 2003년에 발표된 한 글은, ‘대안 화폐’ 운동의 한 형태로서의 ‘지역화폐 운동’의 당시 현황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박용남 씨의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에 약 3,000개 정도의 지역통화제도가 운영 중이며 영국에 500개, 호주와 뉴질랜드에도 300개 이상의 지역통화가 있다. 미국 캐나다나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같은 서구는 물론 남미와 아시아에도 번지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1996년 ‘녹색평론’이 처음 소개한 후 1998년 3월 신과학운동조직인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미내사)이 ‘미래화폐’(fm)란 단위로 처음 시작했다. 이어 불교환경교육원, 중앙대 부설 종합사회복지관이 운영하는 기술도구은행, 관악지역화폐 등에서 지역통화운동을 벌였으나 이 가운데는 현재 미내사만이 계속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부침이 심하다.

… 미내사 역시 전국 단위로 움직이다보니 실거래는 미미한 실정. 대신 서울 송파구의 송파품앗이, 경기 안산시 고잔1동의 고잔품앗이, 안양시청 자원봉사센터에서 운영하는 지역화폐 등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지역화폐가 활발하다. 특히 송파품앗이는 송파구민 뿐 아니라 서울과 과천에서도 동참, 480여명이 올해에 573건의 품앗이를 나눴다. 박용남씨는 전국에 30개 정도의 지역화폐, 또는 대안화폐가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35)

인터넷에서 ‘대안화폐’를 검색해보면 알 수 있듯이, ‘대안화폐’ 혹은 그 운동은 그 무정부주의적 성격에 걸맞게 다양한 형태, 갈래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것들에 대하여 일일이 논할 여유도, 가치도 없다.36) 여기에서는 이들 이른바 ‘대안화폐’의 일반적 특징을 간단히 얘기할 수밖에 없고, 또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른바 ‘대안화폐’의 기원은 논자에 따라 1983년이라고도 하고,37) 1920년대ㆍ1930년대라고도 하지만,38) 그렇지 않다. 그 기원은 적어도 저 유명한 공상적 사회주의자 오웬(Robert Owen)이 그의 이상공동체(理想共同體) ‘뉴 하머니(N-ew Harmony)에서 1826년에 채택한 ‘노동화폐(labour-money)’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노동화폐’라는 사상은 프루동 및 프루동주의자들에 의해서 진지하게 설교되었다.

‘대안화폐’는 그 대부분이 ‘노동시간이 화폐의 직접적 도량단위이다’39)는 사고에 기초하는데, 이러한 사고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선전ㆍ전개되고 있는 ‘대안화폐’ 운동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대안화폐의 A to Z”까지를 소개・선전하는 명저, ≪돈의 반란 ― 디플레이션 시대의 공동체 생존 전략, 대안화폐≫의 저자, 한국사회적금융연구원장 문진수는 이렇게 얘기한다.

지역화폐 시스템이 작동하는 곳에서는 돈이 없어도 ‘상품’을 얻을 수 있고, 그 대가를 돈이 아닌 ‘서비스(노동력)’로 갚을 수 있습니다. 한겨울 엄동설한에 폐지를 줍기 위해 밖에 나가지 않아도 동네가게에서 라면 몇 봉지를 당당히 가져올 수 있습니다.

노인이 동네 가게에 들러 먹을거리를 ‘외상으로’ 가져왔다면 일정한 시간 동안 골목 청소를 하는 대가로 외상값을 갚을 수 있고, 직업을 얻지 못해 놀고 있는 백수 청년이 동네 피자가게에서 10,000원짜리 피자를 주문해 먹었다면 다음 날 이웃 가게에서 한 시간 동안 배달을 해서 노동으로 빚을 갚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1시간의 노동량은 10,000원에 가치에 해당한다는 등가물의 원칙을 정하고, 동네사람들이 이 거래 표준을 합의하면 됩니다.

마을에는 돈은 없지만 재능과 기술을 가진 이들이 많으며, 해야 할 일 또한 많습니다. 돈이란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해서 받은 대가일 뿐이고, 사람들은 다시 그 돈을 가지고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구매하려 할 것이므로 만일 상품과 서비스가 서로 맞교환될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 화폐라는 매개수단이 없어도 거래는 가능합니다. 돈이 없어도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이론적으로[!!!: 인용자] 지역화폐 시스템은 상품과 상품, 서비스와 서비스의 교환 등 지역에서 생산되는 모든 상품과 서비스의 유통 및 소비를 매개할 수 있습니다. 지폐 방식을 사용하든 계좌 방식을 사용하든, 지역화폐는 시장 원리(화폐금융을 통해 상품과 서비스가 교환되는 질서)를 따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거래의 품목과 내용을 지역사회의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조직화할 수 있습니다.40)

정말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리고 앞에서 본 것처럼, ‘함께하는 시민행동’도 ‘대안화폐’는 “노동력과 생필품의 교환수단 … 가난한 이들이 노동력을 대안화폐 단위로 팔고 대신 필요한 생필품과 서비스를 얻을 수 있게 한 것”으로서 “지역 공동체 안에서 물건과 노동력을 주고 받는다는 뜻에서 지역화폐나 공동체 화폐로 불리기도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역시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런데, 멋진 건 어디까지나 멋진 것이고, 이들 ‘대안화폐’는 정말 ‘대안화폐’일까?

“대안화폐의 A to Z”까지를 소개ㆍ선전하는 명저, ≪돈의 반란 ― 디플레이션 시대의 공동체 생존 전략, 대안화폐≫의 저자, 한국사회적금융연구원장ㆍ사회적경제센터장 문진수는 기고만장하여, “이론적으로[!!!: 인용자] 지역화폐 시스템은 상품과 상품, 서비스와 서비스의 교환 등 지역에서 생산되는 모든 상품과 서비스의 유통 및 소비를 매개할 수 있습니다” 운운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은, 모든 형태의 ‘금폐화론(金廢貨論)’41)이 그러하듯이, 그러나 금폐화론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42) 화폐가 무엇인지에 대한, 상품경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론적” 무지에서 발(發)하는 헛소리일 뿐이다! 맑스는 말한다.

노동시간이 가치의 내재적 척도인데, 왜 그것과 나란히 하나의 다른 외재적 척도가 있는 것인가? 왜 교환가치는 가격으로 발전하는가? 왜 모든 상품은 그 가치를 하나의 배타적인 상품으로 평가하고, 그리하여 그 상품이 교환가치의 적합한(adäquat) 존재로, 즉 화폐로 전화되는가? 이것이야말로 그레이(Gray)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였다. 그것을 해결하는 대신에 그는, 상품들은 사회적 노동의 생산물로서 직접적으로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그것들인 것으로서(als das, was sie sind; [상품들로서: 인용자])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뿐이다. 상품들은 직접적으로는 개별화된 독립적인 사적노동(私的勞動)의 생산물들, 사적 교환의 과정에서 그 사적노동임을 그만둠(Entäußerung)으로써 일반적인 사회적 노동임을 입증해야 하는 사적노동의 생산물들이며, 상품생산이라는 기초 위에서의 노동은 개인적 노동임을 전면적으로 그만둠으로써만 비로소 사회적 노동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레이는 상품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시간을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노동시간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공동체적 노동시간 혹은 직접적으로 연합된 개인들의 노동시간이라고 간주한다. 그렇다면 사실, 금과 은 같은 어떤 특수한 상품이 다른 상품들에 대하여 일반적 노동의 화신(化身)으로서 대립할 수 없고, 교환가치는 가격으로 될 수 없을 것이며, 그러나 사용가치도 역시 교환가치로 되지 않고, 생산물은 상품으로 되지 않으며, 그리하여 부르주아적 생산의 토대 자체가 폐기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그레이가 생각한 것(Meinung)이 아니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인용자] 생산물은 상품으로서 생산되어야 하지만, 상품으로서 교환되어서는 안 된다. 그레이는 이 경건한 소망의 달성을 국립은행에 맡기고 있다.43)

위 인용문의 ‘그레이’를 ‘대안화폐론자’로, 그리고 ‘국립은행’을 ‘지역화폐’ 혹은 ‘대안화폐’로 바꾸어보라. 그러면 위 인용문은 바로 저들 대안화폐론자들에 대한 것이지 않은가? 저들 역시 바로,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즉, 상품 생산 그 자체, 자본주의적 생산 그 자체가 폐기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설파하면서도 그러한지 모른 채, 또 다른 앞뒤 맞지 않은 주장, 즉 “생산물은 상품으로서 생산되어야 하지만, 상품으로서 교환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그레이가 전국적ㆍ전면적 규모에서 그러한 소망을 품었다면, 저들 오늘날의 무정부주의적 대안화폐론자들, 무정부주의적 공동체주의자들은 좀스럽게도 국지적・지역적 규모에서 그러한 “경건한 소망”을 품고 있다는 차이는 있지만.

다시 맑스의 얘기를 들어보자.

왜 화폐는 노동시간 자체를 직접적으로 대표하지 않는가 하는, 왜 예컨대 한 장의 지폐가 x 노동시간을 표시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는 아주 간단히, 왜 상품생산의 토대 위에서는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문제로 귀착되는데, 왜냐하면, 상품으로서 나타나는 것(Darstellung der Ware)은 상품과 화폐상품으로의 그것의 이중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왜 사적노동은 직접적으로 사회적 노동으로서, 즉 사적노동의 반대물로서 취급될 수 없는가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상품생산의 토대 위에서의 “노동화폐”라는 천박한 유토피아주의에 대해서는 나는 다른 곳에서 상세하게 논했다. (…44)) 여기에서는, 예컨대 오웬의 ‘노동화폐’가 ‘화폐’가 아닌 것은 마치 극장 입장권이 ‘화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도 언급해두어야 할 것이다. 오웬은 직접적으로 사회화된 노동을, 즉 상품생산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생산형태를 전제하고 있다. 노동증명서는 단지 공동노동에서의 생산자의 개인적인 몫과 공동생산물 중 소비하기로 되어 있는 부분에 대한 그의 개인적 청구권을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오웬은, 상품생산을 전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필연적인 조건들을 날림화폐(Geldpfuschereien)로써 회피하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45)

앞에서, ‘대안화폐’의 기원은 적어도 오웬의 ‘노동화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지만, 사실은 오웬의 ‘노동화폐’는 저들의 이른바 ‘대안화폐’와는 이렇게 그 전제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러나 화폐의 격하(格下)와 상품의 승천(昇天)을 진지하게 사회주의의 핵심으로서 설교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주의를 상품과 화폐 간의 필연적 연관에 관한 기초적인 오해(誤解) 속에 해소시켜버리는 것이 [무정부주의자: 인용자] 프루동 씨와 그의 학파의 역할이었다.46)

오늘날 저 ‘대안화폐’론자들의 그것이기도 한 이 역할, 정말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런데, 저들 ‘대안화폐’론자들이 과연 무엇을 위해 그러한 운동을 펼치는가를 보면, 그것이 정말로 “얼마나 멋진 일”인지를 알 수 있다.

강수돌 교수는 앞에서 언급한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쟁과 평화>에서 “아,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슬픈 일이 이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라는 톨스토이의 한탄은 더 이상 지역화폐 시스템에서는 찾기 어렵다. 물론 아직도 미국 달러를 위시한 중앙은행권의 권력은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이 권력은 좀처럼 붕괴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 지역화폐는 마을ㆍ지역ㆍ세계공동체의 활성화에 이바지할 것이다.

그리고 저 ≪돈의 반란 …≫의 저자는 말한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대안화폐 사업은 이상적 현실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상적 현실을 만드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멋지고 훌륭한 일이지만, 대안화폐를 통해 이상을 구현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의 실현은 이보다 훨씬 더 큰 꿈과 ‘거대한 전환’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반대로 대안화폐는 현실적인 이상을 추구한다. 대안화폐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현실이 이상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꾸어내는 것이 고매한 이상을 외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화폐 없는 세상world without money이 아니라, 돈이 선하게 쓰이는 세상world flowing the good money을 꿈꾼다.47)

그리고 이 ≪돈의 반란 …≫을 감격하며 소개하는 ‘시민기자’는, 짐작컨대, 필시 그 책의 내용에 따라서,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 대안화폐가 지닌 최고의 장점은 공동체를 위한 착한 화폐라는 점일 것이다. 이번 그리스 사태에서 보듯 광범위하게 통용되는 화폐시스템은 때로 지역 경제에 극심한 문제를 일으킨다. 어느 지역의 돈이 다른 지역으로 유출되기만 하고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 지역에선 돈이 돌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자원과 노동을 매몰시켜 지역 경기를 얼어붙게 만든다. 대안화폐는 이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까지는 되지 못할지라도 효과적인 대처가 될 수 있다. 화폐 유통범위를 지역단위로 제한함으로써 공동체 내의 자원 순환을 장려해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안화폐가 오늘날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대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지역의 부가 일방적이고 지속적으로 유출되는 현상 등을 완화해 지역경기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보완적 수단에 가깝다. 하지만 화폐가 본래의 역할에서 벗어나 인간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오늘날,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화폐시스템을 고민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상당하다. 돈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접하고 화폐 본연의 목적과 내가 살아가는 공동체의 미래를 살피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하겠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 스스로 구해야 하는 세상이 아니던가.48)

“착한 화폐”? “화폐가 본래의 역할을 벗어나 인간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모습”? “돈에 대한 새로운 관점”? “화폐 본연의 목적”? ― 온갖 미물의 본성으로까지 인간의 본성을 격상시키는 것보다는 좀 낫다고 보고 넘어가자.

그런데 저들이 하는 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안화폐가 오늘날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대책이 될 수는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대안화폐 사업은 이상적 현실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는 점”을, 그리고 “대안화폐를 통해 이상을 구현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미국 달러를 위시한 중앙은행권의 권력은 어마어마”해서 “이 권력은 좀처럼 붕괴하진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온갖 요설(妖說)과 ‘대안화폐’, ‘지역화폐’라는 누더기로 누덕누덕 기워서라도 그 “자본주의 시스템”, 그 “달러를 위시한 중앙은행권의 권력”의 지배를 더욱 연명시키겠다는 것 아닌가?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반적 위기가 크게 재격화되어 있는 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안화폐’ 운동들이 시끄럽게 벌어지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물론 저들의 표현이야, 그리고 어쩌면 주관적 의도도 다를지 모르지만. 아무튼 참으로 “멋진” 반동이며, 지옥으로 가는 길을 멋지게 선의로 포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기왕 ‘대안화폐’ 얘기가 나왔으니, ‘비트코인(bitcoin)’이란 것이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해 두어야 할 것이다.

‘비트코인’은 최근 몇 년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 화폐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학문적인 관심이든, 치부욕에 의한 그것이든, ‘비트코인’ 그것이 무엇인지 대략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금시초문인 사람이나 듣긴 들었지만 그냥 흘려보낸 사람들을 위해 우선 최병두 박사님49)께서 번역ㆍ소개하는 미국의 한 자연과학 저널리스트의 글을 발췌ㆍ소개해 두자.

돈을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다. 벌거나 주울 수 있고 위조하거나 훔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토시 나카모토 (Satoshi Nakamoto)와 같이 불가사의한 재능을 지닌 컴퓨터 프로그래머라면 다르다. 발명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은 2009년 1월 3일 밤 컴퓨터 키보드를 눌러 비트코인 (bitcoin)이라 부르는 새로운 화폐를 창조했다. 이 화폐엔 비트만 있을 뿐 코인은 없다. 종이나 구리, 은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31,000항으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코드를 인터넷상에 공개한 것이 그가 한 일의 전부인 것이다.

 … 나카모토는 부분적으로는 최근의 세계재무위기에 화가 나서 1년 이상 걸려 이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예측이 불가능한 각국의 통화정책과 은행가와 정치가들의 약탈행위에 좌우되지 않는 통화를 만들려고 했다. 나카모토의 이 발명품은 소프트웨어에 의해 전적으로 통제되고 앞으로 20년간 2천1백만 개의 비트코인을 발행하게 된다.

매 10분마다 새 코인이 발행되는데 이 화폐는 복권의 제비뽑기와 비슷한 경로를 거쳐 배분된다. 이 코인을 찾는 사람들을 ‘광부’라 부르며 이들은 여러 번의 제비뽑기 과정을 거쳐 결국 가장 빠른 컴퓨터를 가진 사람이 가장 많은 코인을 갖게 된다.

나카모토의 이 발명품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증가하여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를 이 제비뽑기에 사용하고 많은 교환과정이 생기게 되어 결국은 비트코인을 가진 사람은 이를 달러나 유로 같은 공식 화폐와 교환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창의적인 기술자들이 비트코인을 캐내면 다른 사람들이 이를 사는 식이다. 처음 1비트코인은 1센트 미만에 거래되었으나 상인들이 점점 더 비트코인에 의한 거래에 참여하면서 2010년 말부터 비트코인의 가치는 급격하게 상승하여 2011년 6월에는 1비트코인이 29달러 이상에 거래되었고 시장의 변화에 따라 2011년 9월에는 그 가격이 5달러까지 하락하였다. 그러나 이 때 이미 700만개 이상의 비트코인이 발행되어 유통되고 있었으니 결국 나카모토는 3500만 불 이상의 가치를 창조해낸 것이다.

 

(역자 주: 이 글은 2012년에 발표된 것으로 비트코인의 유통과 그 가치는 더욱 증가하여 각국 통화당국자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미국 연방준비은행(FRB)과 한국은행 등에서는 2013년 비트코인의 대안화폐로서의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는 반면 중국과 대만의 통화당국은 비트코인의 자국 내 은행거래를 금지하여 비트코인의 가치는 1500불 이상에서 수백 불 사이에서 요동치고 있다. 국내에도 민간 비트코인 거래소가 여러 곳 생기고 실물 거래에서 비트코인을 받고 있는 업소도 생기고 있다.)50)

반복하진 않겠지만, 얼마나 “멋진” 과학적 화폐론에 입각해 발명되고 창조된 화폐인가?! “부분적으로는 최근의 세계재무위기에 화가 나서” “예측이 불가능한 각국의 통화정책과 은행가와 정치가들의 약탈행위에 좌우되지 않는 통화를 만들려고” 했고, 만들었다는데, 그 가치가 “처음 1비트코인은 1센트 미만에 거래되었으나” 2014년 초에는 “1500불 이상에서 수백 불 사이에서 요동치고 있다”니, 천재적 발명의 목적도 충분히 달성하고 있는 셈이다.

거기에 화룡점정(畵龍點睛)!

지난 하반기 한때 가치가 1000달러를 넘기며 화폐의 새로운 질서로 추앙받았던 비트코인은 이후 가격이 폭락하며 대규모 투자손실을 일으켰다. 최대 거래소였던 일본 마운트곡스는 약 85만개(약 4772억 원)의 비트코인 손실을 봤으며, 도쿄 지방법원에 파산 보호 신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원인은 기술적 결함 및 내부자 소행이라고 알려졌다.51)

환상의 청룡은 계속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다. 이렇게. ― “일각에서 ‘비트코인이 끝났다’는 평가가 쏟아지지만 일부 거래소의 관리부실일 뿐 ‘아직 이르다’는 주장도 공존하고 있다.” “대안화폐로 자리 잡는 과정일 뿐 … 여전히 활용 가능성 높아”!52)

결론을 대신하여

무정부주의에 대하여 내가 총괄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은, 무정부주의 그것은 부조리한 현실, 가혹한 착취와 억압에 대한 조건반사적ㆍ몰과학적 저항, 낭만적 저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낭만주의,

그것의 내용은 사물의 가장 피상적인 외관에서 걷어 올린 일상적인 편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그릇되고 하찮은 내용이 그 후 그것을 신비화하는 표현방식을 통해서 ‘치켜세워지고’ 시화(詩化)되는 것이다.53)

그리하여 무정부주의에 있어서는 기껏해야 ‘지옥으로 가는 길이 선의로 포장되어 있는 것’이고, 현실에서처럼 그것이 과학을 백안시하고 적대할 때, 그것은 노동자ㆍ인민의 전진을 가로막는, 노동자ㆍ인민의 적일 수밖에 없다.

이제 1901년에 집필된, 무정부주의에 대한 레닌의 테제들을 여기에 옮기는 것으로써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

테제:

1. 무정부주의는, 35년에서 40년 동안 (바꾸닌과 인터내셔날, 1866년 이래), (그리고 쉬티르너를 포함하면, 더 많은 햇수 동안) 존재하면서, 착취에 반대하는 일반적인 공문구들 이외에는 아무 것도 제공하지 않았다.

이들 공문구들은 2000년 이상 동안이나 유행해왔다. 거기에는, (가) 착취의 원인들의 이해, (나) 사회주의로 이끄는 사회발전의 이해, (다)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한 창조력으로서의 계급투쟁의 이해가 없다.

2. 착취의 원인들의 이해. 상품경제의 토대로서의 사적소유.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 무정부주의에는 아무것도 없다(nil).

무정부주의는 뒤집어진, 부르주아 개인주의이다. 무정부주의의 전체 세계관의 토대로서의 개인주의.

       토지의 소(小)소유와 소경영의 옹호.

       다수결은 결코 없다(Keine Majorität)

       국가권력의 통일하고 조직하는 힘의 부정.

3. 사회발전의 몰이해 ― 대경영의 역할[의 몰이해] ― 자본주의의 사회주의로의 발전[의 몰이해]

(무정부주의는 자포자기의 산물. 프롤레타리아의 심리가 아닌, 갈피를 못 잡는 인텔리겐차들 혹은 룸펜프롤레타리아의54) 심리.)

4.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의 몰이해.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정치의 부조리한 부정.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교육의 역할의 몰이해.

일면적이고 맥락을 잃은 수단으로 이루어진 만병통치약.

5. 유럽의 최근대사에서 일찍이 라틴 국가들을 지배했던 무정부주의는 무엇을 제공했는가?

— 어떤 원칙(Doktrin)이나 혁명적 학설, 어떤 이론도 없다.

— 노동운동을 산산조각낸 것.

— 시도한 혁명운동의 완전한 대실패 (1871년의 프루동주의, 1873년의 바꾸닌주의).

— 정치의 부정으로 은폐된, 부르주아 정치에의 노동자계급의 종속.55)


1) 하승우, “아나키즘에 관한 오해와 편견: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인가?”, <http://bkworlds.tistory.com/67>

2) 하승우 박사님께서 크로포트킨의 이른바 ‘상호부조론’을 ‘자신의 언어로’(?) 설파한 것으로 보이는 서적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에 감동을 받고,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가 아니다: <서평>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을 읽고”(<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0424>)처럼, 아예 명문(明文)으로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나서는 논객들도 있다.

3) Peter Kropotkin, “Anarchism”(from The Encyclopaedia Britannica, 1910), <http://dwardmac.pitzer.edu/Anarchist_Archives/kropotkin/britanniaanarchy.html> (강조는 인용자)

4) “Proudhon was the first to use, in 1840 (Qu’est-ce que la propriete? first memoir), the name of anarchy with application to the no government state of society.” (Peter Kropotkin, 같은 글).

5) 같은 글.

6) 김수행,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 한울 아카데미, 2012. 특히 그 “제6장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였다” 참조.

7) 사실, 뒤에서 간단히 그러나 분명히 입증하는 것처럼, 어떤 색조를 가진 것이든, ‘쏘련은 (국가)자본주의였다’는 주장 자체가 터무니없는 몰과학이요, 악의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를 확인하는 데에 시간과 노력을 허비할 이유도, 가치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8) 참고로 말하자면, 오세철 교수님께서는 자신들이 무정부주의적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년 전에 내가 ‘무정부주의 아니냐’고 추궁했을 때, ‘그건 좌익공산주의 중에서 평의회 공산주의의 경우이고, 자신들은 그와 다르다’고 대답한 적이 있기 때문에. 물론 기억에 없다고 잡아떼시면, 그만이지만.

9) Peter Kropotkin, “The Russian Revolution and the Soviet Government: Letter to the Workers of Western Europe”(1919. 4. 28.),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kropotkin-peter/1910s/19_04_28.htm>.

10)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661. (강조는 인용자).

11) 아우프헤벤(Aufheben 그룹) 저, 오세철 ‘번역’, ≪소련은 무엇이었나: 소련 사회 붕괴와 해체에 대한 분석≫, 빛나는 전망, 2009, p. 88.; 왜 “오세철 역” 대신에 “오세철 ‘역’”이라고 적는지에 대해서는, 그리고 이들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쏘련론 비판에 대해서는, 채만수,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쏘련론 (상) ― 아우프헤벤 저, 오세철 ‘역’, ≪소련은 무엇이었나≫를 중심으로”, ≪노동사회과학 제5호: 좌ㆍ우익 기회주의의 현재≫, 노사과연, 2012, pp. 55-137 및 같은 글 (중)(≪노동사회과학 제6호≫, pp. 16-30), 같은 글 (하)(≪노동사회과학 제7호≫, pp. 89-134) 참조.

12) Peter Kropotkin, 같은 글.

13) 고명섭 기자, “<크로포트킨 자서전> 크로포트킨”, ≪한겨레≫(인터넷 판), 2003. 5. 9.(<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9100003/2003/05/009100003200305091940167.html>).

14) 국가 그것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 및 현대 사민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계급 간(間) 이해 충돌의 조정자,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국민 통합’을 선도ㆍ실현하는 기구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와는 정반대로 착취ㆍ지배 계급의 이익을 보장하는 사회적 폭력ㆍ억압기구이다!

15) F. 엥엘스, ≪가족, 사적소유 그리고 국가의 기원≫(1884), MEW, Bd. 21, S. 165.

16) 같은 책, SS. 166-167.

17) 같은 책, S. 167.

18) 앞에서 본 것처럼,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은 러시아 혁명 과정 속에서의 ‘독재’를 비난하면서, “상투적인 핑계는 구체제와 싸우기 위해서 독재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19)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생산수단을 우선 국가 소유로 전환한다.”? 뿐만이 아니다. 맑스와 엥엘스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정치적 지배를, … 모든 생산용구들을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는 데에, 그리고 생산력들의 양(量)을 가능한 한 급속히 증대시키는 데에 사용할 것이다.”(≪공산당 선언≫(1848), MEW, Bd. 4, S. 481.) ― 자, ‘쏘련=국가자본주의’론자들이여, 외쳐라, 외쳐! 악다구니를 써라! “맑스와 엥엘스는 국가자본주의자들이었다!”고.

20) F. 엥엘스, ≪공상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1880), MEW, Bd. 19, SS. 223-224. (강조는 엥엘스).

21) ‘상호부조’론은 물론 크로포트킨의 창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무정부주의의 이론적 창시자의 한 사람인 프랑스의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1865)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2) <http://dwardmac.pitzer.edu/Anarchist_Archives/kropotkin/mutaidcontents.html>.

23) K. 맑스, “국제노동자협회 창립식사(創立式辭)”, Karl Marx Frederick Engels Collected Works, Vol. 20, pp. 11-12. (강조는 인용자). [독일어로의 번역도 맑스 자신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원래 영문으로 작성되어 발표된 문헌이기 때문에, 독일어 판과 일본어 번역판, 그리고 기존의 우리말 번역판을 참조하면서, 영어 판으로부터 번역ㆍ인용하였다. (독일어로부터의 우리말 반역은, 김태호 역, “국제 노동자 협회 발기문”,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3권, 박종철출판사, 1993, pp. 11-12 참조.)]

24) 사실, 이 세상에 ‘사회적’이지 않은 기업, ‘사회적’이지 않은 협동조합이 어디에 있으며, 있을 수나 있는 것인가?! 그런데도 저들이 “사회적 기업”ㆍ“사회적 협동조합” 하고 떠드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자신들의 무지의 과시! 다른 하나는, 노동자ㆍ인민 대중을 현혹시키려는 음흉한 의도!

25) 오철우 기자, “서로돕기와 연대는 만물의 자연법칙”, ≪한겨레≫(인터넷 판), 2005. 4. 29.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0542.html).; “상호부조”가 인간의 본성이고 그 때문에 무정부주의적 공산사회는 잠꼬대가 아니라는, 크로포트킨의 이러한 무정부주의는 특히 ≪한겨레≫ 지면에서 열성적으로 선전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이미 언급한 홍세화 씨나, 고명섭 기자, 오철우 기자 말고도, 유현산 기자의 “[출판] 아나키즘에 대한 변명: 패배와 희망의 역사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한겨레 21≫ 제625호, 2006. 9. 1.(<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6/09/021015000200609010625011.html>), 안광복 철학박사, 중동고 철학교사의 “안광복 교사의 시사쟁점! 이 한권의 책, 34.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 진화를 이끄는 상호부조의 힘: 다윈은 생존경쟁만 말하지 않았다”, ≪한겨레≫(인터넷 판), 2011. 6. 20.(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483560.html>), 등등.

26) 오철우 기자는 같은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 “그[=크로포트킨: 인용자]는 ‘상호부조(서로 돕기)는 거부할 수 없는 만물의 자연법칙’이라며 ‘과학’을 내세운다.”

27) 안광복 박사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 자신들 무정부주의자들이 다윈의 진화론에 적대적인 게 아니라, 몽매한 대중이 다윈을 오해하는 것이라고, 박사님스럽게 에둘러치지만. ― “지리학자이자 사상가였던 크로폿킨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강한 자만 살아남는다는 생각은 다윈을 오해한 것이라고 말한다.”(안광복 박사, 같은 글).

28) Peter Kropotkin, 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 (1902), <http://dwardmac.pitzer.edu/Anarchist_Archives/kropotkin/mutaidconclu.html>).

29) 같은 글.

30) “‘곤궁한 자들끼리 서로 돕고 연대함’은 19세기 말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운동의 지도자 크로포트킨의 중요한 사상적 뿌리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은 본디 선하다는 ‘성선설’이나 그런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상상’ 같은 도덕과 윤리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상호부조(서로 돕기)는 거부할 수 없는 만물의 자연법칙’이라며 ‘과학’을 내세운다.”(오철우 기자, 같은 글).

31) 안광복 박사, 같은 글.

32) K. 맑스,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286.

33) 물론 무정부주의자들은 ‘경쟁’의 결과에 대해서 훨씬 더 과격한, 그리하여, 듣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전혀 균형 잡히지 않은 소리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 “현대는 무한경쟁의 시대다. 그래서 상호부조보다는 ‘경쟁력’이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경쟁은 결국 모두가 패배자가 되는 것으로 끝난다. 정상에 섰더라도, 그 상태가 영원하지는 않은 탓이다. 최고였어도 언젠가는 패배자가 되어 내밀려야 한다. 반면 상호부조는 결코 패배자를 만들지 않는다. 끝없이 서로 성장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안광복 박사, 같은 글). 그리고 예의 장기(長技)대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다름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것도 대자본ㆍ독점자본들에 비해서 사실상 모두 극히 열악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서 ‘상호부조하라’고, ‘사회적 기업’ㆍ‘사회적 협동조합’을 만들라고 고고하게 설교하면서, 천연덕스럽게도 저런 말씀을 하시고 계시니까!

34) 강수돌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 “지역화폐와 대안적 상상력”, ≪대학원 신문≫ 제300호, 2013. 5. 16.(?) (<http://gspress.cauon.net/news/articleView.html?idxno=20693>).

35) “[지역화폐운동] 대전의 한밭레츠의 대안화폐 ‘두루’”(2003. 11. 21.), <http://action.or.kr/?mid=care_news&page=31&document_srl=70819> (강조는, 인용자).; <http://action.or.kr>은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홈페이지이고, 이 글은 필자를 밝히지 않은 채 ‘좋은기업만들기 새소식’(!)이라는 꼭지에 실려 있다. 이 외에, 윤수종, “대안 운동의 현황과 방향”, 한국사회이론학회, ≪사회이론≫ 제32권 0호 (2007), p. 271도 참조.

36) 최근에 그것들을 종합적으로, “대안화폐의 A to Z”까지를 소개ㆍ선전하는 명저(名著), ≪돈의 반란 ― 디플레이션 시대의 공동체 생존 전략, 대안화폐≫(한국사회적금융연구원장 문진수 저, 2015, 북돋움)가 나와 판매 중인 모양이니, 정 할 일이 없는 사람은 사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책값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저들 ‘대안화폐’론자들의 깃발엔 ‘돈이 없으면 만들어 쓰면 된다’고 씌어 있으니까! 어? 아니네. 책값은 ‘대안화폐’가 아니라 ‘국가화폐’로 받고 계시네! (‘국가화폐’란 저들이 각국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법화(法貨)를 가리키는 말이다.)

37) 강수돌, 같은 글.

38) “책[주36의 ≪돈의 반란 …≫: 인용자]에 따르면 대안화폐는 법정화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등장한 보완화폐다.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Weimar) 공화국에서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했을 때나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 달러화 품귀현상이 극심했을 경우가 대표적이다.”(김성호, “대안화폐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 [김성호의 독서만세 67] <돈의 반란>”(2015. 8. 10.),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34338>.)

39) “화폐의 직접적 도량기준(度量基準, Maßeinheit)으로서의 노동시간에 관한 학설은 [오웬의 제자인: 인용자] 존 그레이(John Grey)에 의해서 맨 처음 [1831년에: 인용자] 체계적으로 전개되었다.”(K. 맑스, ≪경제학 비판(Zu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1859), MEW, Bd. 13. S. 66.)

40) 사회적경제센터 문진수 센터장, “지역에 ‘화폐실험’을 허하라”(2012. 3. 15.), <http://www.makehope.org/지역을-살리는-착한-금융-지역통화/> (강조는 인용자). (<http://www.makehope.org>은 ‘희망제작소’의 홈페이지이다.)

41) ‘금폐화론’은 ‘금은 이제 더 이상 화폐가 아니다’는 주장ㆍ‘학설’로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반적 위기 시대의 부르주아 국가의 화폐ㆍ통화제도로서의 이른바 ‘관리통화제도’ 하에서, 즉 전면적인 법률적 불환통화제도 하에서, 그리고 특히 1971년 7월 미국이 ‘달러와 금의 교환 정지’를 선언한 이후, 부르주아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물론, 일부 언필칭 ‘맑스경제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사이에서까지 꽤 세(勢)를 얻고 있다. 그러나 맑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상품들은 화폐에 의해서 같은 기준으로 도량(度量)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이다. 모든 상품은 가치로서는 대상화된 인간노동이기 때문에, 그리하여 그 자체로서 같은 기준으로 도량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그 가치를 공동으로 동일한 특정한 상품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고, 이 상품을 그럼으로써 상품들의 공동의 가치척도 또는 화폐로 전화(轉化)하는 것이다. 가치척도로서의 화폐는 상품들의 내재적 가치척도의, 즉 노동시간의 필연적 현상형태이다.”(≪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109). “… 은행권의 태환성, 즉 그것의 금 혹은 은으로의 교환가능성은, 법률상의 규정이 뭐라고 하든, 여전히 경제법칙이다. 그러므로 프러시아의 지폐탈러(Papiertaler)는, 법률적으로 불환지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일상의 거래에서 은탈러(Silbertaler)보다 낮게 통용되고, 그리하여 실제로 [그 액면가만큼: 인용자] 태환할 수 없게 되면, 곧바로 감가(減價)된다.”(≪경제학 비판≫, MEW, Bd. 13, SS. 65-66.)

42) 금폐화론자들이 화폐란 무엇보다도 상품의 등가물(等價物), 즉 대상화(對象化)된 노동시간임을 모른다면, 이들 ‘대안화폐’론자들은 노동시간을 화폐의 직접적 도량기준으로 삼으려 하기 때문에.

43) ≪경제학 비판≫, MEW, Bd. 13, SS. 67-68. (강조는 맑스).

44) ≪경제학 비판≫, MEW, Bd. 13, SS. 66-69를 가리킨다.

45)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S. 109-110 (각주 50). (강조는 인용자).

46) ≪경제학 비판≫, MEW, Bd. 13, SS. 68-69.

47) 문진수, ≪돈의 반란 …≫, pp.  244, 245. (김성호, “대안화폐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에서 재인용.)

48) 김성호, 같은 글.

49) 경제지리학자인 대구대학교의 최병두 교수가 아닌, 그와는 동명이인인 사람이다.

50) 조슈아 데이비드(Joshua david) 저, 최병두 박사 역, “가상화폐 비트코인-사기인가 미래의 대안화폐인가”(2014. 1. 9.), <http://kecstory.tistory.com/649>. (강조는 인용자).

51) 정미나 기자, “[이슈분석] 비트코인 기로에 섰다 … 거품인가 대안화폐인가?” ≪전자신문≫ 2014. 3. 13. <http://www.etnews.com/20140313000026>.

52) 정미나 기자, 같은 글.

53) ≪자본론≫ 제3권, MEW, Bd. 25, S. 411.

54) 영어 번역본은, “부랑자의”.

55) Lenin Werke, Bd. 5, SS. 334-337. (강조는 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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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18th, 2015 | By | Category: 미분류, 자료, 정세와노동 | 조회수: 2,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