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10)

 

문영찬 | 연구위원장

*1)

[목차]

머리말

제 1 장 세계관과 철학의 근본문제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 철학의 근본문제

  3. 세계의 통일성

제 2 장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의 역사

  1. 철학의 발생

  2. 데모크리토스 노선과 플라톤 노선의 투쟁

  3. 아리스토텔레스

  4.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에 의한 고대 원자론의 계승, 발전

  5.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 토마스 아퀴나스

  6.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브루노, 갈릴레이, 뉴턴

  7. 베이컨, 홉스

  8. 데카르트

  9. 스피노자

  10. 로크

  11. 라이프니츠

  12. 흄

  13. 디드로, 엘베시우스, 돌바하

  14. 볼테르, 루쏘

  15. 칸트

  16. 피히테, 셸링

  17. 헤겔

  18. 포이에르바하

제 3장 맑스, 엥겔스에 의한 철학에서의 혁명

  1. 맑스, 엥겔스에 의한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의 창시

  2. 변증법적 유물론의 범주들

    1) 물질과 운동

    2) 공간과 시간

    3) 물질과 의식

    4) 원인과 결과

    5) 개별-특수-보편

    6) 필연성과 우연성

    7) 본질과 현상

    8) 가능성과 현실성

    9)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

    10) 모순 혹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내용과 형식)

    11) 부정의 부정

    12) 인식론
3. 자유와 필연성

  4. 목적의식성

  5. 사적 유물론의 범주들

  6. 레닌, 스탈린, 마오쩌뚱, 그람시에 의한 맑스주의 철학의 발전

제 4 장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사조에 대한 비판

  1. 콩트, 밀

  2. 쇼펜하우어, 니체

  3. 후설

  4. 하이데거

  5. 프로이트

  6.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7. 샤르트르

  8. 하버마스

  9. 알튀세르, 발리바르

  10. 푸코, 들뢰즈, 데리다, 라캉

  11. 지젝

  12. 자율주의

  13. 이진경

  14. 롤즈의 《정의론》, 마이크 샌덜의《정의란 무엇인가》

제 5 장 과학의 발전과 그에 대한 철학적 일반화

제 6 장 철학과 종교

제 3 장 맑스, 엥겔스에 의한 철학에서의 혁명

3. 자유와 필연성

자유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자유와 필연성의 관계라는 주제는 낯선 것이다. 지금도 사회에서 지배적인 견해는 자유는 정치적 자유, 사상의 자유, 학문의 자유 등으로 불리는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이고 이러한 것은 권리가 되어 자유권으로 불린다. 이러한 자유권의 개념은 비록 제도화된 것이지만 인류의 계급투쟁의 성과라는 점에서 소중하며 그것들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구성한다 하더라도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입장에서는 의미가 크다.

그러나 제도로서 자유 개념을 떠나 본질로서 자유 개념, 철학에서의 자유 개념은 어떤 것인가? 예를 들면 정치적 자유를 보면 노동자계급과 민중들이 독재권력에 맞서 싸울 때 비로소 정치적 자유가 실현된다. 그런데 하늘을 날 수 있는 자유는 인류가 비행기를 만들었을 때 실현되었다. 이렇게 볼 때 억압으로부터의 자유가 주요한 측면이지만 자유를 그것만으로 보는 것은 매우 협소하며 자유의 영역은 정치적 영역을 넘어서서 매우 넓어질 수 있다.

자유라는 개념이 철학에 등장한 것은 봉건제의 태내에서 자본주의적 관계가 발생하던 시점부터였다. 봉건적 질곡에 맞서서 싸움을 시작한 부르주아지는 소유권의 보장, 소유의 자유, 영업의 자유, 직업의 자유 등을 봉건제 권력에 맞서서 획득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기 시작했고, 봉건제에 맞서 전체 민중들과 함께 싸워야 했기에 소유의 자유를 넘어서는 자유일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기치로 내세웠다. 그리하여 철학의 영역에서도 자유개념이 대두하고 검토되고 정교화되기 시작했다.

자유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그것과 쌍을 이루는 개념이 필연이었다. 자유는 필연과 무관한 것인지, 원인과 결과, 인과성이 관철되는 필연의 영역과 별도로 자유의지라는 것이 존재하는지가 논쟁이 되었다. 이 논쟁이 이른바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논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자유와 필연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정립되었는데 헤겔에 의해서는 자유는 인식된 필연이라는 변증법적 인식이 수립되었고 이러한 인식은 맑스와 엥겔스로 이어진다.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시기에 홉스는 자유와 필연의 관계를 탐구하였다. “자유와 필연은 양립한다. 물은 물길을 따라 흘러내려갈 ‘자유’뿐만 아니라 ‘필연성’도 지니는 것처럼 인간의 자발적인 여러 행위도 이와 같다. 사람의 행위는 그의 의지, 즉, ‘자유’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필연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모든 행위 및 의욕, 성향은 어떤 원인에서 비롯되고, 그리고 그 원인은 또한 다른 원인에서 비롯되는 등 (그 최초의 고리는 제 1 원인인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이렇게 계속 원인이 사슬처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원인들의 연쇄를 알 수 있는 자의 관점에서 인간의 모든 자발적 행위가 ‘필연적’임이 분명하다.”1) 여기서 홉스가 보이는 견해는 결정론자들의 전형적인 견해이다. 자유와 필연의 개념의 연관성을 승인하면서도 결정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은 필연적이라고 보고 있다. 모든 것이 원인의 원인이 있고 원인의 사슬에 있기 때문에 필연적이라고 보는 것인데 이러한 관점은 홉스가 기계적 유물론의 관점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뉴튼 역학이 지배하던 당시 과학의 입장을 추구한다면 기계적 유물론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지배적이었고 자유의지론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입장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홉스의 견해에서 자유라는 개념은 형식적으로는 승인되었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이 필연적이라고 보아 자유 개념은 내용을 상실하고 있다. 즉, 홉스에게서 자유 개념은 형해화되어 있다.

홉스보다 후대의 사람인 로크 또한 자유와 필연의 관계를 탐구하였다. 로크는 “자유는 의지에 속하지 않는다”2)고 보아 자유의지론을 부정한다. 어떤 것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의지는 필연성에 따르는 것이며 따라서 자유가 아니라고 본다. 이러한 로크의 입장은 결정론을 따르는 것인데 그는 그러면서도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필연성이 자유의 근저”3)라고 하여 필연성과 자유의 연관성에 조심스레 다가서는데 자유와 필연성의 관계를 정면으로 분석하기보다 우회하여 ‘자유와 지성의 관계’를 분석한다. “대체로 자유가 없으면 지성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며, 지성이 없으면 자유는 (만일 어느 것을 할 수 있었다고 해도) 아무것도 의미표시를 하지 않는다. 만일 인간이 자신을 위해 선한 것이나 해가 되는 것, 자기를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거나 하는 것을 보아도 (자유가 없이) 그쪽으로, 또는 거기에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다면 보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또 반대로 지성이 전혀 없는) 완전한 어둠을 방황할 자유가 있는 자, 그와 같은 자의 자유는 바람의 힘으로 거품처럼 이리저리 사라져버렸을 때에 비해 좋은 점이 있을까?”4) 여기서 지성은 필연성에 대한 인식 혹은 과학적 인식을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로크가 자유와 지성의 긴밀한 연관성을 논하는 것은 아직 자유와 필연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으로 나아가지는 못하지만 그에 다가서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홉스, 로크보다 후대의 사람인 칸트는 결정론, 원인과 결과 관계에 따르지 않는 자유의 개념을 정면으로 승인한다. “이와 반대로 내가 우주론적 의미에서 자유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상태를 ‘스스로 시작’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자유의 원인성은, 자연법칙을 따라서, 다시 그 자체를 시간적으로 규정하는 다른 원인에 종속되지 않는다. 자유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순수한 선험적 이념이다.”5) 칸트는 한편으로 자연의 원인과 결과 관계를 승인하면서도 자유 또한 또 하나의 원인이며 그것은 자연법칙을 따르지 않는 선험적인 것이라고 보고 있다. 칸트는 원인과 결과의 결정론이 지배하는 것은 현상의 세계뿐이며 현상은 사물 자체(물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사물 자체 차원의 “본질적 원인은 그 원인성에 관해서는 현상에 의해 규정받지 않는다.”6)고 본다. 그리하여 “자유와 자연은 동일한 행위에서 각각 우리가 그 행위를 본질적 원인에 견주느냐 또는 감성적 원인에 견주느냐에 따라, 동시에 그리고 아무 모순 없이 양자의 완벽한 의미에서 병립할 수 있을 것이다.”7) 이렇게 칸트는 자신의 선험적 관념론의 구상에 따라 자유와 자연(필연)의 관계를 설정한다. 즉, 자연은 현상에 지나지 않고 사물자체(물자체), 본질이 아니며 따라서 본질의 심급에서 자연과 무관한 자유에 의한 원인이 가능하며 따라서 자연과 자유는 양립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칸트의 관점은 자유와 필연성의 연관성의 단절, 현상과 본질의 연관성의 단절을 주장하는 것인데 전형적인 형이상학적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자유의 의미는 현실 혹은 자연과 무관한 선험적 개념으로 되며 이러한 자유의 개념이 칸트의 모든 도덕률의 기초를 이룬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자유 개념의 극복은 헤겔에 의해 이루어졌다. 헤겔은 필연과 단절된 자유가 아니라 필연과 연관된 자유 개념을 추구했는데 그에 따라 ‘자유는 인식된 필연’이라고 보았다. “만일 자유를 필연성의 추상적 대립물로서 고찰한다면, 그것은 자유라는 한갓 오성적 개념이지만, 자유라는 참된 이성적 개념은 이에 반해 필연성을 지양된 것으로서 자기 내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8) 자유가 참된 자유가 되려면 필연성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필연성을 지양된 것으로서, 즉, 필연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자기 내부로의 고양을 통해서 필연을 내부에 포함하는 자유이어야 한다고 헤겔은 통찰했다. 이러한 헤겔의 자유 개념은 맑스와 엥겔스로 이어졌는데 엥겔스는 ≪반뒤링론≫에서 자유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있다. “헤겔은 자유와 필연의 관계를 올바르게 서술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헤겔에게 있어서 자유란 필연에 대한 통찰이다. ‘필연은 다만 개념적으로 파악되지 않은 한에서만 맹목적이다.’ 자유는 자연 법칙에 대한 꿈꾸어진 독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법칙들을 인식하는 데에 있으며, 그리하여 일정한 목적을 위해 이 법칙들을 계획적으로 작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 데에 있다. … 의지의 자유란, 사태에 대한 지식을 갖고서 결정을 내리는 능력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특정한 문제점과 관련한 인간의 판단이 더 자유로울수록, 그 판단의 내용은 그만큼 더 큰 필연의 규정을 받는다. … 그러므로 자유의 요체는, 자연 필연성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여 우리 자신과 외적 자연을 지배하는 데 있다; 따라서 자유는 필연적으로 역사적 발전의 생산물이다.”9) 필연을 지양하여 자신의 내부에 포함하는 자유가 헤겔의 자유 개념이라면 엥겔스의 자유 개념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유를 역사적 발전의 산물로 보는 것이다. 필연에 대한 인식이 자유의 기초이므로 자유의 내용은 필연에 대한 인식의 역사적 발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실제로 석기시대 인간이 누린 자유의 폭, 그리고 노예제 시대 인간이 누린 자유의 폭과 현대 자본주의에서 인간이 누리는 자유의 폭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 이는 그 사이의 역사적 기간 동안 인류의 필연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가 계급사회가 극복된다면, 인류가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도약한다면 인간이 누리는 자유의 폭은 무궁무진하게 확대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필연에 대한 인식 자체가 자유는 아니라는 점이다. 헤겔은 자유는 인식된 필연이라고 했지만 이는 자유를 인식의 영역에서만 고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는 실천의 영역 또한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리하여 엥겔스는 자연필연성에 대한 인식은 자유의 ‘기초’라고 보고 자유는 그러한 필연성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여 우리 자신과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본다. 사실 필연성에 대한 인식 자체는 과학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유는 아니며 인간은 필연성에 대한 인식, 과학적 인식에 기초하여 자유의 영역을 스스로 개척해 가야만 한다. 헤겔이 이룩한 것은 자유와 필연의 형이상학적 단절을 극복하고 필연을 자유의 개념에 내포한 것이다. 그러나 필연에 대한 인식 자체가 자유는 아니며 자유는 그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획득되고 쟁취되고 개척되어야 하는 영역이다.

홉스에서 로크, 칸트, 헤겔과 맑스, 엥겔스의 자유 개념은 이렇게 다양하고 미묘하게 변화해왔으며 결정적으로 헤겔에 의해 자유와 필연의 연관이 해명되었고 엥겔스에 의해 자유가 역사적 발전의 산물로 파악되었다. 현대 부르주아 사회에서 자유는 형식적 자유개념이다. 이러한 형식적 자유를 실질적 자유로 전환시키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자유를 향한 투쟁, 해방을 위한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본주의의 필연적 발전법칙과 이 사회의 사회주의 사회로의 지양의 필연성을 통찰할 때만 자유를 위한 투쟁, 자유의 영역을 확대하는 투쟁이 가능하다.

4. 목적의식성

목적의식성이라는 개념은 1980년대 운동에서 크게 논의가 되었던 주제이다. 1970년대 운동이 반독재민주화운동이었다면 1980년대의 운동은 변혁운동으로 질적인 도약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이론적 측면에서 보면 레닌이 한국사회에 소개되고 레닌주의 운동을 시도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당시 운동은 군사파쇼하에서 비합법적 성격을 띠고 전개되었는데 ≪무엇을 할 것인가≫,≪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당의 두 가지 전술≫,≪국가와 혁명≫등의 레닌의 저작들이 팜플렛의 형태로 은밀히 돌고 있었고 레닌의 저작들은 당시 운동의 사상적 지렛대가 되었다. 이때 많은 활동가들은 전위를 지향하였는데, 헌신성, 목적의식성, 사상적 통일성 등이 당시 전위개념을 구성하는 요소였다.

그러나 당시의 운동은 당건설에 성공하지는 못하고 정파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정치적 폭압이라는 조건, 운동의 역사의 일천함이 당건설의 걸림돌이었고 이어지는 20세기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조건 속에서 1980년대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운동은 퇴조의 길로 접어든다.

이와 같이 1970년대의 반독재민주화운동에서 1980년대의 변혁운동으로의 도약에서 결정적인 것은 레닌주의의 수용이었는데 철학적 차원에서 의미를 갖는 것은 목적의식성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레닌은 목적의식성을 제기하면서 당건설의 철학적 토대를 놓았고 짜르 러시아에서 볼세비키 운동의 조류를 건설할 수 있었다.

레닌이 제기한 목적의식성은 대중의 자생성과 사회주의자의 의식성을 대비시킨 것이었다. 대중운동의 자생적 발전은 사회주의자에게 보다 깊고 폭넓은 의식성을 요구한다는 것, 자생적 발전만으로는 노동조합주의를 넘어설 수 없고 노동자 대중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벗어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기초한 사회주의 의식이 외부로부터, 즉, 대중운동의 외부로부터 도입되어야 할 것을 주장했다.

‘외부로부터’라 불리는 이 정식을 레닌이 도출하는 과정을 검토해보자. 레닌은 카우츠키의 분석으로부터 인용을 통해 ‘외부로부터’가 불가피하며 필연적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자본주의 발전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증대시키면 시킬수록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와 투쟁할 가능성을 얻게 되고, 얻지 않을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주의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의식하기에 이른다.’ …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다. 물론 학설로서의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경제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또한 그런 경제 관계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가 낳은 대중의 빈곤과 비참함에 반대하는 투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은 나란히 발생하는 것이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낳은 것이 아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전제 조건 아래서 생겨난다. 현대의 사회주의 의식은 깊이 있는 과학적 지식에 근거해야만 생겨날 수 있다. … 이처럼 사회주의 의식은 외부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에 도입된 것이지 그 투쟁으로부터 자생적으로 자라 나온 것이 아니다.”10) 사회주의 의식과 계급투쟁은 나란히 발생한다는 것! 계급투쟁은 대중이 부딪히는 현실 자체, 착취와 억압에 맞서는 투쟁을 본령으로 하는 것이고 이는 대중 스스로 주체가 되어 수행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 의식은 노동자계급의 이해가 자본가 계급의 이해와는 화해될 수 없고, 노동자계급의 이해는 사회체제 전체, 그리고 나아가 국가와도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것이며 이러한 모순과 대립의 결과 그것은 계급대립이 폐지되는 사회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운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의식이다. 이러한 의식, 사회주의 의식은 대중의 자생적 운동, 자생적 의식만으로는 도달할 수가 없고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정치 등에 대한 깊이 있고 과학적인 분석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사회주의 의식은 계급투쟁과 나란히 발생하는 것이다. 즉, 과학으로서 사회주의 의식은 자생적 계급투쟁의 외부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레닌은 노동자의 파업 자체가 사회주의 의식을 가져오는 것은 아님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파업들은 노동자와 고용주의 대립이 각성되고 있음을 알려 주었지만, 노동자들에게는 현대의 정치 및 사회체제 전체와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타협할 수 없는 대립 관계에 놓여 있다는 의식, 즉 사회 민주주의 의식이 없었다. 아니,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1890년대의 파업은 “폭동들”과 비교할 때의 그 엄청난 진보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자생적인 운동에 머물렀다. 우리는 사회 민주주의 의식이 노동자들에게 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오직 외부에서 들여올 수 있을 뿐이었다.”11) 파업은 개별 자본가에 대한 투쟁이다. 그런 점에서 파업을 통해 사회체제 전체에 대한 이해, 노동자가 사회체제 전체와 화해할 수 없다는 의식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 의식은 개별자본가에 대한 적대를 넘어서서 자본주의 사회 자체와 노동자계급은 화해할 수 없다는 의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 전체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따라서 사회주의 의식은 계급투쟁의 외부에서 수행되는 과학적 분석의 영역으로부터 ‘도입’될 수 있을 뿐이다.

레닌은 노동운동의 자생적 발전만으로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동운동의 자생적 발전은 바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노동운동을 종속시키는 길이며 ≪크레도≫의 강령을 따라 나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생적 노동운동이란 노동조합주의, 즉, 순수조합주의이며, 노동조합주의란 바로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의 이념적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12) 자생적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주의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데 노동조합주의는 사회전체에 대한 이해 속에서 계급대립의 비화해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노동자의 시야를 조합 자체 내로 한정한다는 점에서 부르주아 지배를 전제로 하는 의식에 불과하며 따라서 노동운동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포로로 만드는 것임을 레닌은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레닌은 “노동운동의 자생성에 굴종하고 “의식적 요소”, 즉 사회 민주주의 당의 역할을 축소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당사자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아무 상관없이 ─그 자체로 노동자에 대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을 강화함을 의미한다”13)고 보고 있다.

이렇게 레닌은 “의식적 요소”를 사회민주주의 당의 역할과 등치시켜 파악하고 있는데 바로 이 점이 레닌이 목적의식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당건설의 철학적 토대를 놓고 있는 지점이다. 노동자계급의 당은, 사회주의 당의 본질은 대중운동의 자생적 발전에 편승하거나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운동의 자생적 발전이 제기하는 과제를 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인식하고 자생적 발전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귀착되는 것을 막아내고 그것을 사회주의 의식으로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다.

레닌은 이렇게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당건설론을 제기하고 볼세비키당의 기초를 놓았다. 레닌이 목적의식성의 개념을 통해 당건설의 철학적 토대를 놓았다는 점은 노동자계급의 당이 존재하지 않는 한국사회의 지금의 현실에서 여전히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무엇을 할 것인가≫가 레닌의 청년기 저작이라면 ≪철학노트≫는 레닌의 원숙기의 저작인데 레닌은 ≪철학노트≫에서 헤겔을 분석하면서 다시금 목적의식성의 문제를 파고들고 있다.

목적의식성의 개념은 목적 개념과 의식성이라는 개념의 통일이다. 기존에 철학에서 목적론은 자연에 목적이 존재한다고 보며 신학을 뒷받침하는 논리였는데 칸트는 조야한 목적론을 넘어서서 목적론을 합목적성의 관념으로 발전시킨다. 칸트는 자연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질서, 예를 들면 초식동물이 풀을 뜯어먹고 사는 것을 가리켜 풀은 초식동물을 위해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연에 무수히 존재하는 이러한 현상을 분석하면서 칸트는 자연에도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14). 칸트가 이렇게 자연에 목적이 있다고 보고 자연목적이라는 개념을 구사하는 것은 18세기 말 당시로서는 진화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유기체에서 나타나는 진화라는 현상, 유전과 환경에 적응하는 것의 끊임없는 반복과 상호작용의 관념이 없었기 때문에 칸트는 자연에 목적이 있다, 합목적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헤겔은 이러한 칸트의 목적개념에 주목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데 “목적론과 기계론의 대립이 무엇보다도 먼저 자유와 필연성의 일반적 대립”15)이라는 점을 제기한다. 기계론 즉, 원인과 결과 관계가 관철되는 자연의 현상의 영역은 필연성의 영역이라면 그와 대비되는 목적론, 혹은 합목적성, 목적에 따른 행위는 자유의 개념을 내용으로 한다는 헤겔의 파악은 비과학적인 목적론을 극복하고 목적 개념을 과학적으로 정립하는 것이었다. 레닌이 헤겔의 목적론 분석에서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레닌은 헤겔의 목적 개념을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목적 개념을 정립해간다. “객관적 과정의 두 형식: 즉, 자연(기계적 및 화학적 자연)과 인간의 목적 정립적 활동. 이 두 개의 형식의 상호관계. 인간의 목적은 최초에는 자연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낯선(“타자”)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의식, 과학(“개념”)은 자연의 본질, 실체를 반영하지만, 동시에 이 의식은 자연에 대한 관계에 있어 외적인 것이다. (이것은 자연과 즉각 그리고 간단히 합치하는 것이 아니다)”16) 여기서 레닌은 자연과 인간의 목적 정립적 활동을 객관적 과정의 두 형식으로 본다. 즉, 인간의 목적에 따른 활동도 객관이며 결국은 자연의 일부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목적 개념과 관련하에서 자연과 목적 정립적 활동이 구분되는데 최초에는 목적은 자연의 외부에 있고 자연 외적인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목적이 최초에는, 겉으로는 자연 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음을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제로 인간의 목적은 객관적 세계를 통해 산출되며 또한 객관적 세계를 전제로 삼고 이것을 주어진 것, 현존하는 것으로 발견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신의 목적이 세계외부로부터 유래하고 세계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자유”).”17) 우리가 어떤 목적을 세울 때 그 목적은 현실 세계, 객관세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고 또 목적을 통해 객관세계를 변혁하려는 것임에도 마치 우리는 목적이 자연 외부로부터, 객관세계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레닌의 이러한 파악은 목적 개념에 대해 관념론적 견해를 극복하고 유물론의 관점을 정립하는 것인데 레닌은 이러한 목적 개념이 자유 개념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레닌은 목적과 자유에 대한 헤겔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한다. “비록 인간은 그의 목적에 따라서 보면 자연에 오히려 종속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그의 도구로 말미암아 외적 자연을 지배하는 힘을 얻게 된다.”18) 목적을 설정하면 유한성에 갇히는 것이고 결국 객관세계를 의미하는 자연에 종속되는 것이지만 목적을 실행하는 가운데 필요로 되는 도구, 수단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힘을 얻게 된다고 헤겔은 보고 있다. 여기서 목적에 따른 자연에의 종속이라는 개념과 자연을 지배하는 힘이라는 자유의 개념이 대립되어 있다. 즉, 목적이라는 개념은 종속의 측면, 유한성의 측면과 자유의 측면, 무한성의 측면이 동시에 있게 된다. 이를 인간의 실천에 적용하면 인간의 합목적적 실천은 종속의 측면, 즉, 필연성에 대한 인식에 기반하여 자유의 측면, 즉, 객관의 변혁으로 나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레닌은 헤겔의 목적 개념에 대한 분석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탁월한 점은 헤겔이 인간의 실천적, 합목적적 활동을 넘어서 개념과 객관의 일치로서의 “이념”으로, 진리로서의 이념으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실천을 통해 자신의 이념, 개념, 지식, 과학의 객관적 정확성을 증명하는 데까지 아주 가까이 접근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 주관적 개념과 주관적 목적으로부터 객관적 진리로.”19) 이러한 레닌의 언급은 매우 의미가 크다. 목적성, 합목적적 활동보다 더 일차적인 것은 객관적 진리라는 것! 따라서 주관적 목적으로부터 객관적 진리로 나아가는 것은 인식에 있어서 질적인 비약이며, 나아가 객관적 진리에 기초한 주관적 목적이어야만 참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강조한 목적의식성은 대중의 자생성과 비교되어 제출된 것이었다. 여기서 핵심은 사회주의 의식은 자생적 계급투쟁과 나란히 발생하며 따라서 대중운동의 외부로부터 대중운동으로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목적의식성은 필연성에 대한 인식으로서 과학이라는 점에 강조점이 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목적 개념이 자유 개념과 연결된다는 ≪철학노트≫에서의 인식은 목적의식성이 단지 과학, 필연성에 대한 인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내포하는 개념임을 말해준다. 이를 당건설의 문제와 관련하여 본다면 당건설의 철학적 토대로서 목적의식성은 필연성에 대한 인식으로서 과학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당건설은 노동자계급의 자유의 확대의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필연성에 대한 인식과 자유의 통일로서 목적의식성! 즉, 목적의식성은 단지, 과학의 측면, 필연성의 인식의 측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성의 인식에 기초하여 자유의 영역을 개척하고 확대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목적의식성을 필연성의 인식, 과학적 인식만으로 파악하고 자유의 영역의 문제를 빠뜨린다면 그때의 목적의식성은 기계적 목적의식성으로 전락될 수도 있다. 사회주의적 전위, 레닌주의적 의미에서 전위는 한편으로 과학, 필연성에 대한 통찰을 기초로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투쟁의 현실에서 스스로 자유의 영역을 개척해나가는 존재이며 이 두 측면이 레닌주의적 목적의식성의 개념을 구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 사적 유물론의 범주들

맑스와 엥겔스가 활동을 시작하던 당시는 과학의 급속한 발전으로 형이상학이 무너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종(種)의 불변성이라는 형이상학은 진화론으로 인해 종의 변화라는 개념으로 대체되었고 증기기관은 열운동의 역학적 운동에너지로의 변환을 나날이 증명하고 있었고 이는 에너지 보존 및 전화의 법칙으로 개념화되었다. 이렇게 과학의 발전은 형이상학에서 변증법으로의 이행을 재촉하고 있었는데 헤겔에 의해 변증법이 관념론적 지반 위에서이지만 완성되었고 맑스와 엥겔스는 초기에 헤겔주의자로서 변증법을 흡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총체적인 세계관의 형성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사회에 대한 유물론, 역사에 대한 유물론을 정립하는 것이었고 맑스와 엥겔스의 초기 활동의 대부분은 사적 유물론의 완성을 향한 노력이었다.

맑스는 헤겔의 ≪법철학≫을 비판하면서 사적 유물론의 구상을 가다듬어 갔다. 헤겔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에 대하여 국가를 으뜸으로 쳤는데 맑스는 이를 거부하고 국가와 시민사회 중에서 일차적인 것은 시민사회임을 간파했다. “그러므로 자연 필연성, 인간의 본질적 속성들,─ 그 속성들이 아무리 소외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해가 시민사회의 성원들을 결집시키는 것이며 정치적 생활이 아닌 시민적 생활이 그 성원들의 진정한 끈이다.”20) 부르주아 국가는 정치적 국가인데 정치적 국가에서의 공민으로서 삶과 시민사회에서 시민적 삶은 부르주아 사회에서 이중화되어 있으며 그 이중적 삶에서 일차적인 것은 공민으로서의 정치적 삶이 아니라 시민적 삶임을 맑스는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맑스의 파악은 부르주아 사회는 국가와 시민사회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여기서 맑스는 헤겔이 국가에 일차성을 부여하는 것과 달리 시민사회에 일차성을 부여하고 있다.

국가와 시민사회 중에서 시민사회에 일차성을 부여하는 것을 전제로 맑스는 사적 유물론의 가장 근본이 되는 문제, 즉,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의 관계 문제를 정립해 간다. “이렇게 됨으로써 도덕, 종교, 형이상학 및 그 밖의 이데올로기와 그에 상응하는 의식 형태들은 더 이상 자립성의 가상을 지니지 않는다. 그것들은 아무런 역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어떠한 [자립적] 발전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과 자신들의 물질적 교류를 발전시키는 인간들이 이러한 자신들의 현실과 함께 또한 그들의 사유 및 그 사유의 산물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21)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 바로 이 점이 사적 유물론의 근본이 되는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의 관계를 맑스가 해명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극히 높은 추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맑스가 이러한 규정에 이르기 위해서는 첫째, 부르주아 사회가 국가와 시민사회로 분리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일차적인 것은 국가가 아니라 시민사회라는 것, 둘째, 도덕, 종교 등등의 이데올로기는 자립적 역사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 즉, 사회의 이러저러한 의식형태들의 발전은 그 자체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셋째, 결국 이러저러한 의식형태들은 물질적 삶의 역사적 변화에 의존한다는 것, 물질적 생산과 교류를 변화시키는 인간들이 그러한 삶을 기초로 의식형태들을 변화시킨다는 것의 파악이 필요했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생활 즉, 사회적 존재가 의식, 즉,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사적 유물론의 근본명제가 맑스에 의해 도출되었다. 이를 기초로 맑스는 사적 유물론의 구상을 구체화해간다.

맑스는 시민사회의 개념을 발전시키는데 역사의 진정한 무대는 시민사회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적 단계에 존재했던 생산력들에 의하여 조건지어지고 동시에 역으로 그 생산력들을 조건짓는 교류형태가 시민사회인데, 그것은 앞서 말한 바로부터 도출되듯이 단일 가족 및 복합가족, 소위 종족을 그 전제 및 기초로 삼고 있는바, 그에 대한 보다 자세한 규정들은 앞의 서술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미 여기서, 이 시민사회야말로 모든 역사의 진정한 발생지이자 무대라는 것, 그리고 교만한 군주나 국가의 행위에만 한정된 채, 이 실제적 관계들을 등한시하는 종래의 역사관이 얼마나 불합리한가가 드러나고 있다.”22) 여기서 맑스는 생산력의 개념을 정립하고 있고 나아가 생산력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역으로 생산력을 조건짓는 교류형태의 개념을 정립하고 있다. 여기서 교류형태라고 규정된 개념은 이후에 생산관계라 일컬어지는 것인데 맑스는 이러한 교류형태를 시민사회로 파악하고 있다. 즉, 맑스에게서 시민사회의 핵심은 경제적 생산관계로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교류형태 혹은 생산관계가 역사의 진정한 발생지이자 무대라고 본다.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인식은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의 문제였다면 맑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생산력과 교류형태(생산관계)가 역사의 진정한 발생지라고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발전의 원천은 무엇인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기존에 역사는 왕의 역사, 영웅의 역사, 고귀한 이념의 역사였다면 이러한 인식이 맑스에 의해 전복되고 진정한 역사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역사임을 맑스는 정립하고 있다.

맑스는 역사 발전의 원천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파악에 따르면, 역사의 모든 충돌들은 생산력들과 교류형태 사이의 모순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덧붙이자면 이 모순이 한 나라 안에서 충돌들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 나라 자체 안에서 그 모순이 극점으로 추동될 필요는 없다. 확대된 국제적 교류에 의해서 생겨난, 산업적으로 발전된 나라들 사이의 경쟁은 발전된 산업을 별도로 가지고 있지 못한 나라들에서도 유사한 모순을 산출하기에 충분하다”23). 여기서 맑스는 정확하게 생산력과 교류형태(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이라는 범주를 정립하고 있고 이것이 역사적 충돌들의 원천, 즉, 역사발전의 원천임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인식을 기초로 맑스는 사적 유물론의 뼈대를 다음과 같이 세우고 있다. “이러한 역사 파악의 근거는 현실적 생산과정을 그것도 직접적 생활의 물질적 생산으로부터 출발하여 현실적 생산 과정을 전개하는 것, 그 생산 양식과 연관된 그리고 그 생산 양식에 의해 산출된 교류형태를, 따라서 그 다양한 단계에 있어서의 시민 사회를 역사 전체의 기초로서 파악하는 것, 그리고 시민 사회를 그 행동에 있어서 국가로서 표현하는 것, 이와 함께 종교, 철학, 도덕 등등의 의식의 각종 이론적 산물들과 형식들을 시민사회로부터 설명하고, 또한 그 형성과정을 시민사회로부터 추적하는 것 등에 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사태는 그 총체성 속에서(그래서 또한 이들 다양한 측면들의 상호 작용도) 표현될 수 있다.”24) 여기서 맑스는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유물론을 정립하고 있다. 이러한 총체성이 가능했던 것은 물질적 생산을 핵으로 하는 유물론적 접근을 했기 때문이다. 물질적 생산과 교류형태(생산관계) 그리고 이를 시민사회로 파악하고 국가, 종교, 철학, 도덕 등등을 시민사회로부터 설명하는 것을 통해 사회를 이루는 일체의 구성요소들이 일목요연한 상호연관과 총체성 속에서 파악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이렇게 사적 유물론의 뼈대를 잡았으나 아직 생산관계라는 개념은 정식화되고 있지 못하고 교류형태, 시민사회라는 용어 등과 혼용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철학의 빈곤≫에서 극복되고 여기서 생산관계라는 용어가 정립된다.

이렇게 사적 유물론을 정립시킨 맑스와 엥겔스는 정치적, 변혁적 실천으로 나아가는데 ≪공산주의당 선언≫은 오랜 기간 정립의 길을 걸어온 사적 유물론을 실천적으로 적용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부르주아지는 생산 도구들에, 따라서 생산관계들에, 그러므로 사회적 관계들 전체에 끊임없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존립할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이전의 다른 모든 산업 계급들에게는 낡은 생산양식의 변함없는 유지가 그 제 1의 존립 조건이었다. 생산의 끊임없는 변혁, 모든 사회 상태들의 부단한 동요, 항구적 불안과 격동이 부르주아 시대를 이전의 다른 모든 시대와 구별시켜 준다.”25) 여기서 맑스는 부르주아지를 생산도구들과 생산관계에 끊임없는 혁명을 일으키는 존재로 파악한다. 그리하여 부르주아 사회의 항구적 동요가 도출된다. 이러한 파악은 사적 유물론을 부르주아지라는 계급에 대한 분석에 적용한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사적 유물론을 적용하여 분석한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에 대립하고 있는 모든 계급들 중에서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참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다른 계급들은 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쇠퇴하고 몰락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대공업의 가장 고유한 산물이다.”26) 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부르주아지와 대립하고 있는 여타의 계급은 쇠퇴와 몰락의 길을 걷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대공업의 산물이고 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발전한다는 것은 사적 유물론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범주를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분석에 적용한 것이다. 생산력, 즉, 대공업의 발전의 결과 생산관계, 즉, 자본가계급의 대립물로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발전! 바로 이 점으로 인해 맑스주의는 과학으로 성립한 것이고 변혁의 이론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맑스와 엥겔스는 헤겔주의자에서 출발하여 민중의 삶과 노동자계급의 삶과 결합하면서 유물론자로 변신하고 과학의 급속한 발전이라는 시대적 배경하에서 사적 유물론의 완성으로 나아가고 그것은 ≪공산주의당 선언≫에서 실천적으로 정립되었다. 그런데 사적 유물론에 대한 완전한 정식화는 1848년부터 1851년에 이르는 전 유럽의 혁명의 실패를 거친 후에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서문에서 이루어지는데 다소 길지만 사적 유물론의 핵심을 압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용의 가치가 있다.

“나를 엄습했던 의문의 해결을 위하여 시도된 첫 번째 작업은 헤겔의 법철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였는데, 그것의 서설은 1844년에 빠리에서 발행된 ≪독불연보≫에 실렸다. 나의 고찰은 다음과 같은 결론, 즉 법 관계들과 국가 형태들은 그것들 자체로부터 파악될 수 있는 것도, 또 이른바 인간 정신의 보편적 발전으로부터 파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헤겔이 18세기의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의 선례를 따라 ‘시민사회’라는 이름 아래 그 총체를 총괄하고 있는 물질적 생활 관계들에 뿌리박고 있다는, 그러나 시민 사회의 해부학은 정치 경제학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빠리에서 시작했던 정치 경제학의 연구를, 기조 씨의 추방 명령으로 인해 이주해 갔던 브뤼셀에서 계속하였다. 나에게 분명해졌던, 그리고 일단 획득되자 내 연구의 길잡이가 되었던 일반적 결론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식화될 수 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일정한 필연적 관계들, 즉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력들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들에 들어선다. 이러한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그 위에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구조가 서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형태들이 그에 조응하는 그러한 실제적 토대를 이룬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반을 조건짓는다. 인간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들은 그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지금까지 그것들이 그 내부에서 운동해 왔던 기존의 생산관계들 혹은 이 생산관계들의 법률적 표현일 뿐인 소유 관계들과 모순에 빠진다. 이러한 관계들은 이러한 생산력들의 발전 형태들로부터 그것들의 족쇄로 변전한다. 그때에 사회 혁명의 시기가 도래한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서서히 혹은 급속히 변화한다. 이러한 변혁들을 고찰함에 있어서 사람들은 자연 과학적으로 정확히 확인될 수 있는 경제적 생산 조건들에서의 물질적 변혁과, 인간들이 이러한 충돌들을 의식하고 싸워서 해결하는 법률적, 정치적, 종교적, 예술적 혹은 철학적, 간단히 말해 이데올로기적인 형태들을 항상 구별해야만 한다. 한 개인이 무엇인가를 그 개인이 자신을 무엇이라고 여기는가에 따라 판단하지 않듯이, 그러한 변혁의 시기가 그 시기의 의식으로부터 판단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이러한 의식을 물질적 생활의 모순들로부터, 사회적 생산력들과 생산관계들 사이의 현존하는 충돌들로부터 설명해야만 한다. 한 사회구성체는 그것이 충분히 포용하고 있는 생산력들 모두가 발전하기 전에는 결코 몰락하지 않으며, 더 발전한 새로운 생산관계들은 자신의 물질적 존재 조건들이 낡은 사회 자체의 태내에서 부화되기 전에는 결코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인류는 언제나 자신이 풀 수 있는 문제들만을 제기한다. 왜냐하면, 더 자세히 고찰해 볼 때 문제 자체는 그 해결의 물질적 조건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거나 적어도 형성 과정 중에 있을 때에만 생겨나기 때문이다. 크게 개괄해 보면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그리고 현대 부르주아 생산양식들을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순차적인 시기들이라 할 수 있다.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들은 사회적 생산과정의 마지막 적대형태인데, 여기서 적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개인적 적대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개인들의 사회적 생활 조건들로부터 싹터 온 적대라는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사회의 태내에서 발전하는 생산력들은 동시에 이러한 적대의 해결을 위한 물질적 조건들을 창출한다. 이 사회구성체와 더불어 인간 사회의 전사(前史)는 끝을 맺는다.”27)

위 인용문은 크게 보면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뒷부분은 사적 유물론의 주요 명제들이 압축적으로 설명되고 있고 앞부분은 사적 유물론을 도출하기까지의 맑스 자신의 여정이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다. 먼저 앞부분부터 고찰하면 맑스가 사적 유물론을 구상하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헤겔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맑스 자신이 밝히고 있다. 즉, 헤겔은 ≪법철학≫에서 부르주아적 국가와 법원리를 상세히 전개하는데 헤겔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국가가 시민사회보다 일차적이라는 것이었다. 맑스는 이 점을 비판하면서 국가가 아닌 시민사회라는 이름 아래 총괄되는 ‘물질적 생활 관계’가 일차적임을 파악했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에 대한 천착은 맑스의 여러 초기 저작들에서 보이는데 이러한 천착을 통해 시민사회가 역사의 진정한 무대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그리고 맑스는 시민사회의 해부학으로서 정치경제학의 중요성에 주목하는데 바로 이러한 관점으로 인해 1850년대 이후 맑스는 정치경제학 연구에 몰두하고 그 결과 ≪자본론≫이 완성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것이 사적 유물론의 명제들이며 위 인용문의 후반부를 이루는 것이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된 … 생산관계들에 들어선다.”는 명제는 사적 유물론의 근본이 되는 명제인데 여기서 물질적 생산과 생산관계의 범주가 제기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생산관계가 ‘자신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된 관계’라는 파악이다. 이는 생산관계가 자의적인 관념적 관계가 아니며 주체의 의지로부터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물질적 관계임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부르주아 사회에서 생산관계는 생산수단에 대한 관계인데 생산수단을 소유하여 임노동을 고용하는 자는 자본가가 되고 생산수단이 결여되어 고용되어야만 생활할 수 있는 자는 무산자, 노동자가 되는데 이러한 관계는 관념적인 관계가 아니라 실제적인, 물질적인 관계이며 따라서 자신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관계이다. 따라서 주체들에게, 인간들에게 이러한 생산관계들은 주어진 것으로서, 하나의 조건으로서 작용하는 것이며 주체는 그러한 조건들에 적응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맑스는 생산관계들이 “물질적 생산력들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한다고 본다. 즉, 생산관계는 주체에 따라 자의적으로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실제로 물레와 베틀이라는 생산력은 봉건적 생산관계를 규정하며 기계적 대공업은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를 규정한다. 이와 같이 근본적으로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수준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맑스가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생산관계는 역으로 생산력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영향은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영향이 있을 수 있는데 생산관계가 생산력에 조응하고 있다면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발전을 촉진한다. 그러나 생산관계가 생산력에 조응하지 못할 때는 생산관계는 생산력 발전의 족쇄가 된다. 이러한 것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의 개념인데 이 모순이 역사 발전의 진정한 원동력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기적으로발생하는 공황은 발전하는 생산력, 사회화된 생산력이 자본주의적 사적 생산관계와 충돌하는 것이다.

그리고 맑스는 “이러한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구조가 서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형태들이 그에 조응하는 실재적 토대를 이룬다”고 파악한다. 이것이 바로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개념의 원형이다. 여기서 토대는 생산관계들의 총체이다. 상부구조는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구조인 국가와 사회적 의식형태들 즉, 종교, 도덕, 예술, 철학 등의 이데올로기를 가리킨다. 여기서 경제적 생산관계는 토대로 파악되고 국가와 이데올로기는 상부구조로 파악되는데 바로 이 점이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으로 일컬어지는 점이다. 한 사회를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하나의 건축물에 비유한 것인데 물질적 삶에서 맺어지는 관계, 생산관계를 사회의 근본토대로 본다는 점에서 이는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인 접근이다. 맑스 이전에는 국가 혹은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핵심으로 파악되었었다. 단적으로 헤겔이 국가를 신성시하였고 다른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의 발전이 곧 역사의 발전이라고 파악했었다. 그런데 맑스에게서는 국가와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토대에 기초하는 사회의 상부구조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맑스는 국가와 이데올로기를 상부구조로 파악했지만 그러한 파악이 국가와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무시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고 반대로 국가와 이데올로기에 정확한 위상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물질적 생산관계를 사회의 토대로 규정하는 것은 그것이 사회의 발전을 근본적이고 근원적으로 규정하며 상부구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국가와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생산관계에 의해 근원적으로 규정되지만 상대적인 독립성이 있다. 바로 이렇게 상대적인 독립성이 있기에 철학의 역사, 종교의 역사, 예술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만약 상부구조에 상대적 독립성이 없다면 물질적 경제사가 곧 철학, 종교, 예술의 역사가 되었을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상부구조는 이렇게 물질적 생산관계에 의해 근원적으로 규정되면서도 상대적 독립성을 갖는데 이러한 상대적 독립성에 기초하여 물질적 생산과 생산관계에 역으로 영향을 미친다.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개념을 이전의 개념이었던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개념과 비교한다면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개념은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개념의 긍정적인 요소를 가져가며 또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개념의 모호성을 극복하고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개념의 정립, 혹은 국가로부터 시민사회의 분리는 부르주아 혁명의 성과를 반영하는 것이다. 봉건적 절대왕정과의 투쟁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내걸었고 소유권의 보장을 내세웠는데 바로 이것이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의 핵심 내용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런데 맑스는 시민사회가 국가보다 선차적이라는 인식을 세우면서 시민사회의 핵심은 물질적 생산을 둘러싼 관계, 생산관계라는 것을 포착했다.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틀에서는 사회에 대한 관념적인 인식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물질적 생산관계의 토대와 국가와 이데올로기의 상부구조라는 개념에서는 사회에 대한 관념적 인식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개념은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개념의 긍정성을 담지하면서도 사회에 대한 인식을 유물론적으로 고양하고 정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맑스는 “물질적 생활의 생산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반을 조건 짓는다.”고 하여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을 분명히 한다. 그러면서 사적 유물론의 근본 명제 즉,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의 문제를 해명하는데 “인간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고 명확히 밝힌다. 맑스에 의한 이러한 정식화는 큰 의미를 갖는다. 세계관 전체에서, 철학 전체에서 근본문제가 물질과 의식의 문제였다면 사적 유물론에서는 근본문제가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의 문제로 명료하게 된 것이다. 맑스는 사회적 의식의 문제에 대해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다음과 같이 파악한 바 있다. “의식은 결코 의식된 존재이외의 어떤 것일 수 없으며, 인간들의 존재는 그들의 현실적 생활 과정이다.”28) 의식은 의식된 존재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 것! 바로 이 점으로 인해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유물론적 관점이 성립한다. 인간의 사회적 의식은 복잡다단하고 많은 요소의 영향을 받지만 결국 의식의 본질은 의식된 존재이며 따라서 사회적 존재에 의해 사회적 의식이 규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어서 맑스는 사회혁명의 문제에 다가서는데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모순에 빠질 때, 생산관계들이 생산력에 족쇄로 변화할 때 사회혁명의 시기가 도래한다고 파악한다. 혁명에 대한 이러한 파악은 혁명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비로소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전에는 혁명은 왕의 횡포에 대한 저항, 혹은 비밀결사의 음모의 성공 등으로 보았지만 혁명의 진정한 성격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맑스에 이르러 비로소 혁명의 비밀은 생산력 발전과 충돌하는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파악됐던 것이다. 이를 통해 권력의 교체를 의미하는 정치혁명과 구분되는 사회혁명이라는 개념이 가능해졌다. 정치혁명이라는 개념은 왕정의 공화국으로의 교체, 혹은 하나의 공화국에서 다른 공화국으로의 변화(권력의 계급적 소재의 변화를 포함하여) 등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여전히 유효한 개념이다. 즉, 사회혁명만이 진정한 혁명이며 정치혁명이라는 개념은 성립될 수 없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사회혁명을 토대로 하지 않는 정치혁명이라는 개념은 비과학적인 주장이다. 사회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사회혁명으로 나아가는 정치혁명이 진정한 혁명일 수 있다. 이를 맑스는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서서히 혹은 급속히 변화한다”고 파악한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상부구조의 변화가 직접적으로, 비례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 기초의 변화가 상부구조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서서히 혹은 급속히” 상부구조 또한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의 긴밀한 연관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또한 맑스는 변혁에서 “경제적 생산 조건들에서의 물질적 변혁과 …이데올로기적인 형태들을 항상 구별해야만 한다”고 파악한다. 경제적 측면이 이데올로기적 형태를 근원적으로 규정하지만 이데올로기적 형태는 상대적 독립성이 있기 때문에 물질적 변혁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함을 제기하는 것이다. 변혁의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적 형태의 변혁 또한 수반될 수밖에 없지만 변혁의 핵심은 물질적 생산관계의 변혁이라는 점에서 양자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변혁의 시기는 그 시기의 의식으로부터 판단될 수 없으며, … 오히려 이러한 의식을 물질적 생활의 모순으로부터, 사회적 생산력들과 생산관계들 사이의 현존하는 충돌들로부터 설명해야 한다”고 맑스는 파악한다. 이는 변혁의 시기의 문제는 의식이라는 주관적 요소가 아니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충돌이라는 객관적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며 의식은 단지 그러한 객관적 요소의 반영임을 말한다.

맑스는 “한 사회구성체는 그것이 충분히 포용하고 있는 생산력들 모두가 발전하기 전에는 결코 몰락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는 변혁의 본질은 사회구성체의 교체라는 인식에 기초하여 생산력 발전의 문제가 사회구성체 교체의 관건임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변혁이 주관적 요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사적 과정임을 말한다. 이러한 혁명의 객관적 성격, 자연사적 성격에 대해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혁명들이 의도적으로 또 자의적으로 일으켜지는 것이 아니며, 혁명들이란 언제 어디서나 개별적인 당파들이나 계급전체의 의지 및 지도에는 전혀 의존하지 않는 정세의 필연적인 결과들이었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29)

맑스는 역사의 발전을 생산양식의 교체로 파악하는데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그리고 현대 부르주아적 생산양식들을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순차적인 시기들”이라고 본다. 생산양식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총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두 가지 개념 모두 가능하다. 아시아적 생산양식이 원시공동체적 소유인지, 노예제적 소유인지는 판단의 여지가 있지만 맑스의 분류는 큰 틀에서 보면 과학적이다. 지금은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개념보다는 원시공동체 사회, 노예제적 생산양식, 봉건적 생산양식,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사회주의적(공산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이 보다 과학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생산양식 개념이 정립됨으로써 역사에 대한 일체의 신비로운 관념이 무너지고 역사에 대한 과학이 정초되었다 할 수 있다.

맑스는 끝으로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들은 사회적 생산과정의 마지막 적대적 형태”라고 본다. 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소유관계가 마지막 적대적 형태, 즉, 계급대립의 마지막 형태인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를 인류가 도달한 마지막 사회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형이상학적이며 비역사적이다. 자본주의는 내적 적대를 갖는 사회이며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대립을 본질로 한다. 이러한 모순은 스스로의 운동에 의해 지양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논리적 접근이라면 자본주의는 인류가 거쳐 가는 하나의 역사적 형태, 역사적 과정일 뿐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내적 적대를 갖는 생산양식의 최후의, 최고의 형태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계급대립을 가장 단순화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에 의해 표현되는데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취득의 사적 성격 간의 대립’이라는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은 그것의 지양태를 다음과 같이 가질 수밖에 없다. 즉, 생산의 사회적 성격에 조응하는 생산관계의 사회적 성격의 수립이 그것이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사라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변화할 수밖에 없고 변화해야 하는 것은 취득의 사적 성격이며 사적 성격의 대립물은 사회적 성격이기에 사적 성격을 지양하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성립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맑스는 부르주아적 생산관계가 마지막 적대형태, 즉, 계급사회의 마지막 형태라고 갈파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맑스는 “이 사회구성체와 더불어 인간 사회의 전사(前史)는 끝을 맺는다”고 결론을 짓는다.

이렇게 사적 유물론을 정립함에 의해 맑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총체적인 세계관을 완성할 수 있었다. 사적 유물론의 완성이 없었다면 변증법적 유물론도 불가능하였을 것인데 그런 점에서 사적 유물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단순한 적용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유물론의 성립에서 관건이 되는 요소로 파악하는 것이 정확하다.

그런데 사적 유물론은 사회에 대한, 역사에 대한 유물론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발전의 내용을 수용하고 구체화되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데 대표적인 것이 레닌에 의한 제국주의론의 정립이다.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사적 유물론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은 제국주의론이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변화를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에 의해 정립된 제국주의론은 이전의 자유경쟁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로 변화했다는 인식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생산관계에서의 변화를 의미한다. 즉, 독점자본주의의 성립은 생산관계에서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때의 독점은 자유경쟁과 대립하지만 자유경쟁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며 독점은 자유경쟁과 양립하면서도 지배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 독점자본주의라는 생산관계의 본질을 이룬다.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20세기 들어 명확하게 모습을 드러낸 독점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경제적, 정치적인 총체적인 관점으로 분석한 것이었다. 자유경쟁 자본주의의 기본원리인 생산의 집적의 결과 곧장 독점이 발생한다는 것, 은행이 산업자본과 결합되어 금융과두제가 형성되고 금리생활자 계급이 팽창한다는 것, 상품의 수출보다 자본의 수출이 더욱 더 중요하게 되고 나아가 자본가 단체들, 그리고 열강들에 의한 세계의 분할과 재분할이 이루어지는 것이 제국주의의 주요 지표임을 레닌은 정립했다. 이러한 인식을 기초로 제국주의는 농업지역을 병합하려는 산업자본의 열망이 아니라 산업국가를 포함하는 세계의 모든 지역을 병합하려는 금융자본의 열망이며 금융자본은 자유가 아닌 지배를 원하며 제국주의는 단순한 정책이 아니라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성립하는 금융과두제의 지배 자체이며 따라서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라고 레닌은 파악했다.

레닌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최고, 최후의 단계이며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기의 특질을 지니는 자본주의로 파악한다. “왜냐하면 자유경쟁의 토양에서, 즉 바로 자유경쟁 자체에서 성장해 나온 독점은 곧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보다 높은 사회경제적 질서로의 과도형태이기 때문이다.”30) 레닌이 독점을 보다 높은 사회경제적 질서, 즉 사회주의로의 과도형태라고 보는 것은 독점이 생산과 자본의 집적의 가속화를 통해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9세기의 자유경쟁 자본주의와 비교할 때 20세기, 21세기 독점자본주의 혹은 제국주의하에서 생산의 규모의 거대한 팽창은 그 사회적 성격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시켰고 생산의 사회적 성격은 완연히 성숙해졌다. 그런데 제국주의는 한편으로 이렇게 생산과 자본의 집적의 가속화를 통해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강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부패해가는 자본주의이다. 즉,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의 융합을 통한 금융자본의 지배는 이자낳는 자본의 규모를 거대하게 만들었고 또 상품의 수출보다 자본의 수출이 중요성을 가짐에 따라 이자를 통해 생활하는 금리생활자 계급은 거대해졌다.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는 자본수출을 통해 얻는 수입을 자국의 노동자계급의 상층에 나누어 주어, 이들을 매수하여 노동운동을 부패하게 한다. 그리하여 레닌은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노동자계급의 상층부의 이러한 기회주의세력에 대한 비판과 통일되어야만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레닌은 이렇게 제국주의의 경제적 본질은 독점자본주의이며 이는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기의 자본주의이고 따라서 제국주의는 사멸해가는 자본주의라고 보았다. 그런데 사멸해가는 제국주의라는 규정이 제국주의 혹은 독점자본주의의 자동붕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나아가 독점자본주의의 새로운 갱신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제1차 제국주의 전쟁을 전후하여 독점자본주의는 자체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격심한 위기에 빠졌는데 이 상황에서 국가는 경제에 전면 개입하여 독점자본을 떠받치는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국가독점자본주의이다.

레닌은 제1차 제국주의 전쟁의 과정에서 탄생한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사회주의의 완전한 물질적 전제’로 보았는데 레닌의 분석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탄생 시점의 분석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맑스주의 진영의 초기의 분석이라는 점에서 자세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실제적인 혁명적-민주주의 국가가 주어지면, 국가독점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사회주의를 향한 한 걸음, 한 걸음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당신들은 보게 될 것이다. …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단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부터의 다음 발걸음이기 때문이다. 혹은 말을 바꾸면 사회주의는 단지 전체 인민에 봉사하게 되는 그리고 그러한 정도로 자본주의적 독점이기를 멈추는 국가독점자본주의일 뿐이다. … 역사의 변증법은, 전쟁이 독점자본주의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전화를 특별히 촉진함에 의해 그리하여 인류를 사회주의로 특별하게 전진시켰다는 것이다. … 제국주의 전쟁은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의 공포가 프롤레타리아들의 반란을 일으키기 때문만이 아니라─ 어떠한 반란도 사회주의를 위한 경제적 조건들이 성숙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를 가져올 수 없다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위한 완전한 물질적 전제, 사회주의의 입구, 그것과 사회주의라 불리는 계단 사이에 아무런 중간의 계단이 없는 역사의 사다리의 계단이기 때문이다.”31)

레닌은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사회주의를 위한 완전한 물질적 전제로 보고 심지어 사회주의는 인민에게 봉사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보았다. 국가독점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회에는 중간 단계가 없고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입구라고 보았다. 이러한 레닌의 파악은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생산의 사회적 성격의 강화라는 사회주의 변혁의 물질적 전제를 성숙시킨다는 인식이다. 국가가 개입하는 경제부문은 실제로 사적 성격이 부정되고 사회적 성격이 고도로 강조될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면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한결 신속하고 수월하게 하는 조건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완전한 물질적 전제라는 성격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독점자본주의의 모순과 위기를 완화하여 자본주의의 수명을 연장하는 장치라는 성격 또한 갖고 있다. 국유부문의 존재, 국가의 신용과 재정정책, 사회보장 등의 계급대립의 완화정책, 국가의 공황구제로 인한 위기의 완화 등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체제 유지의 성격이 강하다. 이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일반화되면서 국가독점자본주의는 독점자본주의와 구분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이며 심지어 새로운 생산관계라고 파악하는 견해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는 오류인데 국가가 경제에 개입한다고 해도 그것의 본질은 사적 독점을 떠받치는 것이며 지배적인 것은 국가가 아니라 사적 독점이다. 국가의 재정정책보다 근본적인 것은 금융자본의 사적 신용이다. 그런 점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새로운 생산관계가 아니며 독점자본주의의 모순의 격화에 대한 독점자본가계급의 대응이며 독점자본주의의 발전의 경향이다. 또한 모든 독점자본주의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며 사회주의 변혁이 지체되는 사회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발전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사적 유물론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하는 또 하나는 사회주의 생산관계이다. 20세기 내내 존재했던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는 인류가 도달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라는 점에서 사적 유물론적 차원에서 고찰의 대상이 된다. 쏘련과 중국 등 20세기 사회주의 진영은 착취를 폐지하고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창출했다. 사회주의 생산관계는 공업에서 국가소유, 즉, 국유의 형태를 띠었고 농업에서는 국유가 아닌 집단적 소유의 형태를 띠었다. 국유는 법적으로 국가의 소유를 의미했지만 그것은 국가의 배타적 소유가 아니라 전인민소유의 법적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즉, 국유기업의 소유권자, 지배자는 전인민이었고 이는 기업에서의 쏘비에트 혹은 노동자대표 대회의 지배를 통해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개입에 의해 보장되었다. 한편 농업에서는 국유 혹은 전인민소유가 아니라 집단적 소유형태를 띠었는데 집단농장을 구성하는 농민들의 집단적 소유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농업전체가 집단적 소유인 것은 아니었고 발전된 농업부분은 국영농장 또한 존재했다. 농업에서 이렇게 국유가 아니라 집단적 소유가 지배적이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농업의 생산력이 공업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농업의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집단농장은 점차 대규모화되었고 나아가 공업과 농업이 융합하면서 농·공 복합체가 탄생하기도 했다. 1950년대 쏘련에서 농·공 복합체가 많이 탄생되었고 중국에서도 1950년대 말에 탄생한 인민공사는 농·공·상·학·병의 공동체였다. 20세기 사회주의가 비록 붕괴되었지만 이러한 농·공 복합체의 탄생은 미래사회의 싹을 보여주는 것인데, 계급사회의 잔재가 완전히 소멸하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모순, 도시와 농촌의 모순이 해소되는 사회가 되면 농·공 복합체를 기본으로 하는 꼬뮨이 사회의 기초조직이 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20세기 사회주의가 비록 붕괴되었지만 그럼에도 사적 유물론의 차원에서 여전히 의미가 있는 것은 계획경제의 문제이다. 계획경제는 단순한 경제계획의 수립과 조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주의 생산관계에서 비롯되는 경제의 원리이기 때문에 고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잉여가치의 법칙이 생산의 목적을 표현하는 최고의 법칙이다. 또한 자본주의에서는 사적 생산이기 때문에 생산의 무정부성이 지배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생산관계에서는 생산의 목적이 잉여가치가 아니라 인민의 복지와 발전이기 때문에 경제 원리가 바뀌고 또한 사적 생산이 아니라 결합된 사회적 생산이기 때문에 무정부성이 극복된다. 사회주의 생산관계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원리의 표현이 바로 계획경제이다. 즉, 계획경제는 관료적 조정이나 명령이 본질이 아니며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본질을 반영하는 조직된 경제이다. 그에 따라 생산재 생산과 소비재 생산의 균형, 공업과 농업의 균형, 소비와 축적의 균형 등이 계획되고 수행된다. 이러한 계획은 자본주의에서는 불가능하고 사후에 조정되고 때로는 공황을 통해 조정된다.

쏘련의 경우 이러한 계획경제의 성과로 인해 후진농업국에서 공업강국으로 변모하였고 또 무상교육, 무상의료, 노후연금제를 실시하고 실업이 일소되었다. 그런데 쏘련은 스딸린 사후에 수정주의가 발생하여 자본주의 원리를 사회주의 생산관계에 접목하려다 실패하고 경제가 침몰하여 결국 사회주의 체제 자체가 붕괴되었다. 1965년에 실시된 수정주의적 경제개혁은 코시킨 개혁이라 불리는데 공동체로서 사회주의 기업의 원리를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기업의 원리로 변화시키려 한 것이었다. 그에 따라 이윤을 몰랐던 사람들이 이윤을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쏘련 경제와 사회는 침체하고 경제가 균열되었다. 고르바쵸프가 이를 개혁하려 했지만 우익적 편향으로 인해 사회주의를 침식하고 자본주의의 부활을 가져왔다.

중국의 경우 현재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노선을 걷고 있는데 이는 사회주의의 근본원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본질은 계급대립의 철폐이고 착취의 폐지를 실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와 경제의 지배계급과 주인이 되는 것이 사회주의인데 착취를 허용하는 것은 곧 사회주의가 아닌 것이다. 덩샤오핑이 생산력의 발전과 해방이 사회주의의 본질이라 한 것은 수정주의적으로 해석된, 실용주의적인 접근이었다. 덩샤오핑 노선이 해방시킨 것은 중국 자본가계급이었고 이들은 2015년 현재 중국의 명실상부한 지배계급이 되었고 노동자계급은 단순한 피고용인으로 전락했다. 현재의 중국이 자신들이 사회주의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공산당의 지배와 국유기업이 아직까지 경제의 주력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의 중국의 국유기업은 자본주의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 자본주의 기업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G2로 떠오르면서 사적 기업이 거세게 자라나서 이들 사적 기업이 독점자본으로 발전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아직까지는 사적 독점보다 국가독점이 우세하지만 사적 독점의 강화의 경향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국유기업 혹은 국가독점의 우세를 기반으로 하여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지만 그 공산당에게서 맑스주의 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의 본질은 사상인데 사상이 변했다면 당 자체가 변한 것이다. 즉, 지금의 중국공산당은 무산계급의 당이 아니라 부르주아 정당, 자산계급의 정당이라 할 수 있다. 맑스는 역사의 진정한 무대는 시민사회이고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 했다. 이를 기초로 보면 중국에서 국유와 집단농업이라는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시장경제 즉,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바뀐 것은 역사의 근본적인 변동이라 볼 수 있고 계급적 본질이 변화한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사회주의라고 주장하는 또 하나의 논거는 러시아 혁명 직후의 신경제정책(NEP)인데 러시아 혁명 후의 NEP는 노동자계급의 권력과 사회주의 원리를 견지하면서 사적 자본주의적 경제를 일정하게 허용한 것이었고 이는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으로 피폐화된 경제를 살리고자 하는 과도적 정책이었다. NEP는 그리하여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확립으로 가는 과도기였는데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거꾸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해체하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NEP를 근거로 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쏘련의 붕괴, 중국의 자본주의화라는 세계사의 대변동은 사회주의운동 내부에서 발생하는 수정주의의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제국주의가 사회주의로의 이행기라는 점에서 그리고 사회주의운동의 성장이라는 시대적 흐름에서 과거 사회주의 진영 외부의 비판자들이 사회주 의 진영 내부로 들어와서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진영의 조류를 변화시키려 했던 것이 바로 수정주의의 본질이다.

20세기 사회주의는 비록 붕괴했지만 그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사회주의가 어떤 한계와 오류가 있었기에 붕괴되었는지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기초로 21세기 지금의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변혁의 이론과 전망을 개척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적 유물론은 바로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가능하게 하고 또 지금의 자본주의 현실을 과학적으로 통찰하게 하는 원칙들이다. 사적 유물론의 원칙을 견지하고 적용하고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 것! 이것이 21세기 사회주의자들의 몫일 것이다. <노사과연>


* 편집자: 연구소에서 철학세미나를 지도하고 있는 문영찬 연구위원장이 그동안의 성과를 정리하여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2015년 1월호부터 연재하고 있다.

1) 홉스, ≪리바이어던≫, 동서문화사, p. 214.

2) 로크, ≪인간지성론≫, 동서문화사, p. 289.

3) 로크, 앞의 책, p. 318.

4) 로크, 앞의 책, p. 335.

5) 칸트, ≪순수이성비판≫, 동서문화사, p. 369.

6) 칸트, 앞의 책, p. 371.

7) 칸트, 앞의 책, p. 374.

8) 헤겔, 레닌의  ≪철학노트≫, 논장, p. 132에서 재인용.

9) 엥겔스, “반뒤링론”, ≪맑스ㆍ엥겔스 저작선집≫ 제5권, 박종철 출판사, pp. 127-128.

10) 카우츠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재인용, 박종철 출판사, p. 49-50.

11) 레닌, 앞의 책, p. 38-39.

12) 레닌, 앞의 책, p. 51.

13) 레닌, 앞의 책, p. 48.

14) 칸트, ≪판단력 비판≫, 아카넷, “목적론” 부분을 참고하시오.

15) 헤겔, 레닌의 ≪철학노트≫에서 재인용. 논장, p. 138.

16) 레닌, 철학노트, 논장, pp. 140-141.

17) 레닌, 앞의 책, p. 141.

18) 헤겔, 레닌의 ≪철학노트≫에서 재인용, 논장, p. 142.

19) 레닌, 앞의 책, pp. 143-144.

20) 맑스ㆍ엥겔스, “신성가족”, ≪맑스ㆍ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 박종철 출판사, p. 110.

21) 맑스ㆍ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맑스ㆍ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 박종철 출판사, p. 202.

22) 맑스ㆍ엥겔스, 앞의 책, pp. 216-217.

23) 맑스ㆍ엥겔스, 앞의 책, p. 243.

24) 맑스ㆍ엥겔스, 앞의 책, p. 220.

25) 맑스ㆍ엥겔스, “공산주의 당 선언”, 앞의 책, p. 403.

26) 맑스ㆍ엥겔스, 앞의 책, p. 410.

27)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맑스ㆍ엥겔스 저작선집≫제2권, 박종철 출판사, pp. 477-478.

28) 맑스ㆍ엥겔스, “독일이데올로기”, ≪맑스ㆍ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 박종철 출판사, p. 202.

29) 엥겔스, “공산주의의 원칙들”, ≪맑스ㆍ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 박종철 출판사, p. 331.

30) 레닌, ≪제국주의론≫, 백산서당, p. 161.

31) 레닌, “임박한 파국 그리고 그것에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 ≪레닌 선집≫ (progess 영문판)제2권, 모스크바, pp. 2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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