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민주주의 없이 노동자계급의 해방 없다

 

채만수 | 편집위원

 

 

 

요즘 박근혜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놀음, 이른바 ‘노동개혁’을 보면서 새삼 묻게 된다.

이 나라 대한민국에 과연 민주주의는 있는 것인가? 아니, 있었던 적이 있는가?

이 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 예컨대, 지금은 서울시 교육감을 하고 있는 조희연 교수 같은 이들조차 “미국식 민주주의” 운운하는 것을 읽은 기억이 있지만, 나의 상식으로는 이 나라에 민주주의가 있은 적이 없다. 저들의 ‘자유민주주의’, 혹은 ‘한국적 민주주의’만 있었을 뿐! 즉, 민주주의라고 분칠(粉漆)한 파쇼체제만 있었을 뿐! 그리고, 1960년 4월 혁명 후 ’61년 5.16 군사 쿠데타까지의 1년여나 1987년 대투쟁 이후와 같은, 파쇼체제의 이완, 그러니까 파쇼체제하에서의 약간의 숨 쉴 공간이 있었을 뿐!

이 사회의 대부분의 독자에게는 나의 이러한 발언이 필시 이상(異常)하고 과도하게 들릴 것이다. 이승만 정권 시절이나 박정희의 유신시대, 전두환 정권 때를 제외하면 이 사회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사회였다는 게, 그리하여 지금도 민주주의 시대이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는 게 이 사회가 강요하는 상식 아닌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이러한 상식 아닌 상식을 더 한층, 더 한 차원 높이고 확산ㆍ강화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재벌 중의 재벌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 회장이 한때 정치권력까지 장악하려 나서면서 호기(豪氣)롭게 “공산당도 허용해야 한다”고 해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야말로 그의 호기였을 뿐, 아니, 사실은 마음에도 없으면서 치고 빠지는 정치적 사기였을 뿐, 실제로는 그게 이 사회에서 가당키나 한 얘기인가?!

자, 그렇다면, 노동자계급이, 즉 한 사회의 구성원의 절대 다수가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내걸고, 자신의 계급적 해방을 내걸고 정치적으로 단결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사회, 그러한 정치적 결사의 자유가 박탈되어 있는 사회가 어떻게 민주주의 사회일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 박근혜 정권이 밀어붙이고 있는 사태는,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도, 이른바 ‘노동개혁’도, 사실은,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에 의해서, 그리고 그 후 1990년대 초까지 이어진 투쟁들에 의해서 노동자ㆍ민중에게 열렸던 약간의 정치적 공간을 이제 철저히 압살해버리려는 파쇼체제의 재강화, 그 아귀 다짐이다!

파쇼체제 재강화의 아귀 다짐?

그렇다. 그 아귀 다짐이다. 노동자ㆍ민중의 그나마의 정치적 공간조차 사실은, 구차하게 예들을 들 필요도 없이, 이미 오래 전부터 무기력하게 압살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쇼, 그리고 그 체제를 유지ㆍ강화하는 것, 그것은 저들 이 사회 지배계급의 생리(生理)이고, 그들의 생존의 조건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극복해야 할 상수적(常數的) 조건이요 대상일 뿐, 거기에서 현 사태의 원인을 찾을 일은 아니다.

무기력하게 밀려온 원인은 우리 자신, 특히 노동운동의 성향, 그 기조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대한 경시, 인식의 부족과 그로 인한 정치적 무능력, 무기력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의 노동운동이, 특히 ‘좌파’를 자임하는 진영의 그것은 더욱 더 경제주의, 노동조합주의에 빠져 있다는 인식, 따라서 경제주의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널리 확산되어 있지 않은가? 물론 스스로의 실천과 노선에 대한 건강한 반성적(反省的) 사고(思考)의 표현이다.

그런데 그러한 반성적 사고를 하면서도, 동시에 ‘민주화 투쟁은 소시민적 투쟁’이라는 편견이 일반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또한 노동운동의 현 상태이다. 민주화 투쟁에 대한 인식이, 노동자계급의 운동이 성장하고 노동자계급이 그 해방을 쟁취하는 데에서의 민주주의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부족한 것이 노동운동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부족하니 민주화 투쟁을 힘 있게 벌여왔을 리 없고, 바로 그 때문에 파쇼에 밀리고 밀려온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데에는 긴 이야기가 필요치 않다. 파쇼 이승만 정권하에서 노동자계급의 상태와 그 운동이 어땠으며, 4월 혁명으로 민주주의적 공간이 다소 열리니까 그것이 어땠는가를, 그리고 5.16 군사 쿠데타로, 특히 ‘10월 유신’과 전두환 정권에 의해 파쇼체제가 강화되자 그것이 어땠는가를 비교해보면 금세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가장 비근하게 1987년의 노동자 대투쟁이 어떤 조건에서 터져 나올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6월 항쟁에 의해서 열린 정치적 공간 속에서 터져 나오지 않았던가!

 

지금 박근혜 정권, 저들 파씨스트들은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노동자ㆍ민중을 향해서 온갖 모욕과 협박, 조롱을 퍼부으면서, 교과서 국정화로, 이른바 4대 개혁으로 파쇼 강화를 다짐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노동자ㆍ민중의 민주화 투쟁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피ㆍ아 간의 정치적 긴장ㆍ대립이 급격히 격화되고 있다.

만일 이 투쟁에서 패배한다면?

천추(千秋)의 한(恨)까지야 남기지 않겠지만, 노동자ㆍ민중은 분명히, 파업과 같은 이른바 사회권은 물론 일체의 시민적 자유와 권리를 압살당한 채, 무권리 상태에서, 또 다시 오랫동안 저들의 서슬 퍼런 압제에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시달려야 할 것이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박정희 정권하에서, 그리고 전두환 정권하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도 지금 노동자들은,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조직된 노동자들, 이른바 계급의식이 강하다고 자부하는 노동자들일수록 더욱 더, “민주화 투쟁은 소부르주아적이지 않은가” 하면서, “민주화 투쟁은 우리의 투쟁이 아니지 않은가” 하면서, 머뭇거리고 있다. 어떤 계급보다도 민주주의를 필요로 하는 것이 노동자계급이고, 어떤 계급보다도 민주주의를 위해 철저히 투쟁할 수 있고, 철저히 투쟁해야 하는 것이 노동자계급인데도, 다름 아니라 바로,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이 사회의 토양 때문에 그 사회의식, 정치의식, 계급의식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때문이다.

저들의 도전을 사양해서는 결코 안 된다.

만사를 제치고 싸워야 한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민주화 투쟁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고양하고, 정치투쟁의 전통을 확립하기 위해서!

민주주의 없이 노동자계급의 해방 없다!

그리고 노동자계급만이, 중도이폐(中途而廢)하지 않고, 민주주의다운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다.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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