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역사와 노동계급 (3) ─ 노동운동역사 자료실을 열며

* [편집자 주] 이 글은 “대구노동운동자료실” 측의 일종의 설립취지문(초안)으로서, 이글을 연구소에 전달한 사람의 동의를 얻어, 원문에 있는 “첨부자료”는 생략하였고, 사소한 오타를 수정했다.

 

 

8년간 계속되는 경제위기

 

2008년 미국 주택시장의 붕괴 이후 8년에 걸쳐 세계경제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100년 만에 오는 위기라는 그린스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미국의 경우 2006년에 GDP 대비 총부채 비율인 부채율이 390%라는 사실은 그 거품의 정도와 과잉생산의 규모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인 심각한 위기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1929년 부채율이 260%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2008년 경제위기는 1929년 대공황을 넘어서는 대공황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더불어 2006년에 노동계급은 역사상 가장 빈곤한 상태에 있었다. 피케티가 21c 자본에서 제시한 도표에 의하면 미국의 경우 소득상위 10%가 전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인 소득점유율은 50%에 이르렀다. 소득상위 1%의 소득점유율은 24%까지 치솟았다. 전후 30년간 소득상위 10%가 차지하는 소득점유율이 대체로 33%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초과착취와 수탈로 노동계급의 총소득 중 1/4(17%) 정도가 자본계급으로 전이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총소득의 1/4을 초과착취와 수탈로 빼앗긴 노동계급은 1929년과 동일하게 가장 심각한 과소소비 상태에 처해 있었다.

 

이와 같은 부채율과 소득점유율 지표는 심각한 과도축적하의 과소소비를, 따라서 현재의 경제위기가 역사상 가장 심각하면서도 경제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대불황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점은 지난 7년의 과정을 통하여 사실로 확인되어 가고 있다. 2008년 이후 7년 동안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해서 미국은 3차례의 양적완화를 통해 35천억 달러 정도를, 선진국 차원에서만 8조 달러 정도를 투입했지만 경제위기는 지속되고 있다. 자본계급은 무제한적 화폐 공급을 통해 인플레이션 기대감을 유발하고 민간소비를 유도하려 하였지만 지금까지도 민간소비는 살아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중국 등과 같이 추가적인 거품으로 과잉생산을 더 키우고 그로 인한 경기 침체와 주가 폭락으로 전 세계적인 디플레이션을 유발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2008년 미국에서 촉발된 세계대공황은 남유럽의 국가부도 위기와 중국의 경제침체를 거치면서 세계적인 디플레이션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제 붕괴, 즉 2008년에 이은 2차 쇼크를 만들어가고 있다. 특히 전 세계 원자재의 40% 정도를 소비하는 시장인 중국의 경기침체(GDP 6.9% 성장은 거의 2008년 수준이다)는 석유, 철광석 등등의 원자재를 수출하는 신흥국의 경제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신흥국의 위기는 곧 선진국의 위기와 연결되어 있음을 곧장 보여주었다. 그동안 나 홀로 잘 나간다던 미국의 금리인상은 무산되었고 오히려 디플레이션 우려가 급부상하면서 4차 양적완화까지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추가적인 화폐의 인위적 공급확대는 더 심각한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 이미 미국은 엄청난 화폐공급으로 인해 달러 신용문제에 직면하고 있으며 추가적인 달러 공급확대는 기축통화의 지위에 결정적 손상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설사 추가적인 양적 완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신흥국의 경제 위기 심화에 따른 투자손실 확대와 장기간의 제로금리로 인한 금융자본의 수익률 저하 등으로 생산과 금융 전반에 걸친 2차 쇼크는 잠시 시간을 연장할 수는 있어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반인간적인 자본주의

 

따라서 노동계급의 소득을 급격하게 올리지 않으면 현재의 경제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하다. 그러기 위해서 자본계급은 과거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볼 때 그들이 현재 점유하고 있는 소득점유율 50% 가운데 1/3(17%)이상을 다시 토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자본은 더 많은 이윤창출이 본성이기 때문에 스스로 노동계급의 소득을 올리고 자신의 이윤을 줄이는 방식으로 운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붕괴할 때까지 착취와 수탈을 더 강화하는 방식으로 극단적 이윤 창출을 추구한다. 이 경우 소비가 더 위축되고 위기는 더 심화되는 악순환에 빠지겠지만 전체 공멸이 눈앞에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자본은 그 운동방식을 바꾸지 못한다.

 

미국 법인자본의 이윤율은 1965~6년 17.5%를 정점으로 1981~2년 6%까지 지속적으로 하락하다가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를 재정립하면서 1997년 11.5%까지 상승하지만 98년 동아시아 위기, 2001~2IT 버블 붕괴를 거치면서 7.5%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부동산 거품과 그것을 조장한 저금리 금융에 의존하여 2006~7년 13%까지 상승하였지만 2008년 주택 거품이 붕괴하면서 급격히 하락하고 있는 중이다. 70년대의 이윤율 하락을 만회하기 위해서 자본은 착취율을 높이고, 제 3세계 경제침탈을 강화하는 신자유주의 방식으로 대응했지만 60년대의 이윤율 수준을 넘어서는 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노동에 대한 초과착취를 기본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는 하나의 축적체제로서 정립되지 못했다. 오히려 투기화한 금융을 제외한 비금융법인의 2006년 이윤율이 고작 9.8%를 정점으로 하여 다시 하락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40년에 걸친 장기적인 저하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윤율의 저하에 따른 축적의 위기에 직면한 자본은 착취율을 높이는 방식과 이윤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이윤율은 착취율에 정비례하고 자본의 유기적 구성에 반비례한다. 때문에 자본은 이윤율을 높이기 위하여 먼저 착취율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이는 임금 삭감과 비정규직 양산을 포함한 노동유연화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자본의 대응은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비정규직은 꾸준하게 확대되어 왔지만 박근혜 정권에서는 노동구조를 바꾸는, 극단적 착취를 강화하는, 자본독재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것은 성과에 따른 자유해고제, 시간제 일자리의 대폭 확대, 비정규직 사용기한 4년으로 확대 및 업종 제한 폐지, 성과 중심의 임금체계와 임금피크제 등으로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추진되고 있다.

 

이윤율을 높이는 방법과 더불어 자본은 생산량을 확대하여 이윤량을 늘리는 방법으로 대응하기도 한다. 이윤율이 저하하더라도 더 많이 팔면 이윤량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이렇게 하려면 더 많이 수출해야 하고 환율을 떨어뜨려야 한다. 환율전쟁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상품판매시장을 지키고 확대해야 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나 중국이 주도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도 블록화를 통하여 상품판매시장을 지키고 확대하는 전략이다. 그러나 블록화는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블록으로부터 불이익을 받거나 배제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대대적인 소비위축, 즉 디플레이션과 이윤율의 저하가 맞물려 진행될 때는 더 강력한 방법, 비경제적인 방법으로 갈 수밖에 없다. 상품시장을 둘러싼 충돌은 불가피하고 총체적 위기의 진전은 영토재분할전쟁을 야기한다.

 

이러한 진단은 역사적 경험과도 일치한다. 1929년 대공황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뉴딜정책을 통해서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1938년에 2차 쇼크가 발생하였다. 20c 대공황은 15년간의 대불황을 거치고도 회복되지 못하고 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경제적인 군사적 방법을 통해서 극복되었다. 소득상위 10%의 소득점유율은 1944년에 33%를 찍고 이후 30년간 그 수준에서 유지되었다. 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일본과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생산수단의 25%가 사라지는 대대적인 파괴가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총자본은 과잉생산을 해소하고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복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대공황이 1929년 대공황보다 더 심각하다는 앞서의 문제의식에 비추어볼 때 2008년 대공황은 수십 년의 장기불황과 대규모의 전쟁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미 1997년 동아시아 경제위기와 2001년 IT 버블 붕괴에 직면하여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자본은 지금 시리아를 매개로 한 중동전쟁으로 확대하고 있는 중이며,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에도 위기를 고조시키고 나아가 세계적인 군사충돌로 발전할 여지를 키우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은 5,000만 명이 죽고 수 억 명이 부상당하는 인류의 대참상이었다. 만약 또 다시 세계전쟁이 발발한다면 얼마나 많은 인류가 죽어야 하고, 전 인류의 피와 땀이 배어 있는 얼마나 많은 생산수단들이 파괴되어야 하겠는가?

 

반복적으로 노동자, 인류의 폭력적 희생 위에서만 존속가능하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는 노동자ㆍ인간해방의 장애물이다. 노동자에 대한 착취, 수탈, 억압, 지배를 넘어 전쟁을 통한 인류와 인류의 유산의 대대적인 파괴를 통해서만 생명을 연장하는 자본주의는 명백히 반인간적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계급적으로 단결ㆍ투쟁해야 하며 나아가 자본주의를 넘어 다른 세상, 사회주의를 꿈꾸고 실현시켜야 한다. 자본주의를 깨부수는 변혁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간다운 삶, 인간해방을 이룰 수 있겠는가?

 

 

변혁 없는 인간해방은 없다

 

대공황에 대한 자본 주도의 위기탈출 전략은 인류를 파멸로 이끈다.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본성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자본의 전략을 거부하고 자본주의에 반대해야 한다. 그리고 자본이 마음대로 쥐고 흔드는 그런 상황을 확실하게 막아야 하고 자본을 급격하게 약화시켜야 한다. 그래서 자본에 대한 통제, 그것도 급진적인 통제가 필요하다. 또한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2차 쇼크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상황이기에 시급하게 통제해야 한다. 말하자면 시급하고도 급진적인 자본 통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노동이 주도하는 체제 전환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 말고 다른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자본을 통제한다는 것은 노동의 역량이 그만큼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은 실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임노동과 관계 속에 있는 자본이다. 따라서 자본과 노동은 힘의 관계 속에 있으며 서로 대립하고 반작용한다. 그래서 자본을 통제하고 노동이 주도하는 체제 전환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자본 주도를 뒷받침하는 자본임노동 생산관계를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즉 변혁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틀 안에서 사고하고 실천해서는 자본 주도를 막아낼 수가 없다. 실리적으로 적당히 타협하는 것 이상으로 전진할 수 없다. 따라서 노동계급이 변혁적으로 나설 때에만 이런 모든 가능성들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변혁적으로 사고하고 실천한다고 해서 급진적인 자본 통제력이 갑자기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통합진보당의 배신으로 노동계급의 수 십 년에 걸친 피와 땀이 배어 있는 정치세력화에 실패하고, 산별노조를 건설하고자 했던 지난한 염원도 수포로 돌아가 여전히 기업별노조 수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민주노총의 상태, 그러한 과정과 결과로부터 확산된 패배주의,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무기력한 노동운동의 현재의 역량으로 볼 때 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현재 노동운동의 무기력도 따지고 보면 변혁을 포기하고 국회의원 몇 명 더 뽑아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환상에 불과했던 개량주의, 의회주의, 타협적 실리주의의 결과물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더 더욱 악화시키는 비변혁적인 처방을 버리고 변혁적인 사고와 실천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본에 대한 통제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변혁적으로 사고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노동운동 전체가 그렇게 힘을 모으다 보면, 자본에 대한 통제력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어느 순간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더구나 자본의 위기로 체제 유지가 어려워지는 격변의 시기에 대중의 의식은 역동적이다. 변혁진보 세력이 자신의 진지를 튼튼히 세우고 대중적 요구를 더 담대하고 진보적으로 제기해 나가면 대중의 열정적인 호응을 만들어낼 수 있다.

 

 

변혁과 분리된 공상들

 

이런 점에서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기본소득제, 협동조합 등과 같은 운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기본소득제처럼 생산관계의 변화 없는 분배구조의 변화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아무리 재분배를 한다고 해도 생산수단의 독점적 사적 소유는 여전히 성역으로 남는다. 그래서 재분배는 일시적인 조치로 끝나고 노동계급의 양극화는 다시 진행된다. 이것은 20세기 노자관계 100년사를 나타내는 피케티 도표를 통해서 이미 확인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생산관계의 변화 없이는 분배관계의 변화조차도 어렵다.

 

협동조합운동은 분배구조의 변화를 넘어서 생산관계의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제보다는 훨씬 더 진보적이다. 그러나 협동조합을 계속 만들어 나가면 저절로 자본주의 체제가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된다고 생각하면 문제다. 협동조합은 저절로 꼬뮨이 되고 꼬뮨은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로 전환할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이다. 격렬한 계급투쟁을 통한 변혁적 과정 없이 평화스럽게 전 사회적 생산관계의 전환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과학적인 인식일 수 있을까? 아니다. 역사는 생산관계의 변화, 사회적 경제구성체의 변화가 격렬한 계급투쟁과 정치적 혁명 과정을 수반한다는 것을 자세하게 말해주고 있다. 오히려 노동자 정치권력의 정립 없이는 협동조합이 전 사회적으로 확산될 수도 없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이다.

 

이처럼 변혁과 분리된 형태로 제기되는 어떤 전략도 인간해방으로 가는 길일 수는 없다. 그것은 도리어 인간성을,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데 협조하는 길일 뿐이다. 물론 기본소득제와 협동조합은 그 자체로 의미는 있다. 자본의 착취와 수탈로 벼랑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려는, 나아가 약육강식의 정글과 같은 인간관계를 거부하고 공동체적, 사회적 삶을 영위하려는 시도로서 그 의미가 작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치 그것들이 인간해방으로 가는 길인 양, 변혁전략인 양 포장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변혁을 외면하는,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거부하게 되는 자본주의 체제를 문제 삼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운동일 뿐이다. 비변혁적인 전략이면서 급기야는 반변혁적인 전략이 되는 그러한 운동이다. 이러한 운동들은 변혁운동과 분리되어서는 인간해방으로 한발도 내디딜 수 없는 것이며 오로지 변혁운동의 보조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최근에 이런 주장들이 반자본은 말할 것도 없고 탈자본을 넘어 반노동적 입장과 결부되어 나타나고 있어서 심히 우려스럽다. 심지어 정규직 노동자들이 귀족화되어 노동자들은 더 이상 세상을 바꾸는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자영업자를 중심으로 한 소자산가들이 세상을 바꾸는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노동 상층에 대한 비판을 넘어 사회변혁의 주체로서 노동계급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에 대한 심각한 적대감까지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결국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사회적 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기본모순과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변혁도 부정한다. 말하자면 변혁 자체를 부정하고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자영업자 중심의 소자산가들의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겉으로는 노동계급과 대자본에 대해 공히 적대하는 것처럼 행세하지만 결국은 노동계급에 대한 적대와 대자본에 대한 충성으로 그칠 것이다. 왜냐하면 소자본은 대자본의 영향 하에 있으며, 따라서 대자본의 조종을 받고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자본의 지령에 의해 노동계급을 공격하고 파괴하고 난 이후 무엇이 남겠는가? 완성된 자본독재, 자본테러독재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역사적으로 이러한 체제를 우리는 파시즘이라고 부른다.

 

 

노동해방과 인간해방

 

그러므로 변혁 없는 인간해방은 없다. 그리고 또한 더불어 노동계급의 해방없는 인간해방도 없다. 변혁 없는 생산관계의 전환이 공상에 불과하듯이 노동계급의 해방이라는 단계와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인간해방을 이룰 수 없다. 인간해방이란 인류의 전 역사 과정을 통해서 실현되어야 할 과제이다. 이른바 인류의 보편적 과제이다. 보편성으로서의 인간해방은 인류가 걸어온 역사적 시기나 단계에 따라 각각의 특수하고도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시기는 전 자본주의 시기와는 확연히 다른 사회이다. 자본주의는 더 많은 가치 증식을 목적으로 생산에 투입되는 가치인 자본의 원리가 지배적으로 관철되는 사회이다. 이 사회는 생산을 둘러싼 자본-임노동 착취관계가 기본으로 작동하며 자본가와 노동자는 계급적으로 대립한다. 이 사회 속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계급은 필연적으로 착취당하고 지배당한다. 노동자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도 박탈당한 채 노예로서, 임금노예로 전락한다. 인간성은 말살되고 물질적 존재로 전락한다.

 

따라서 한줌도 안 되는 자본계급의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를 부숴버리는 것 이외 다른 방법이 없다.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체제를 깨부수고 착취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노동해방이다. 인류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예화된 인간으로서의 노동자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는 노동해방이 인간해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하자면 노동해방은 인간해방으로서의 노동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해방은 자본주의라는 특수한 사회경제체제하에서 노동해방이란 모습으로 특수화되고 과학적으로 더 구체화된 것이다.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의 이러한 연관 때문에 양자는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양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이면서 둘이다. 인간해방은 노동해방과 분리되어서 얘기될 수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노동해방은 인간해방 속에서만 자신의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인간해방은 노동해방 속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더욱 뚜렷이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노동해방은 인간해방 속에 있고 인간해방은 노동해방 속에 있게 된다.

 

그러나 노동해방이 되었다고 해서 그 즉시 인간해방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가 임금노예의 사슬을 끊고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개성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만드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인간해방으로 가는 진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간적인 차별과 억압이 자동적으로 소멸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착취관계는 사라지지만 환경문제를 포함한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일체의 편견과 차별들은 바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여러 가지 종류와 형태로 남을 수 있고 어떤 것은 상당히 긴 세월 동안 인간적 과제로서 남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노동해방을 추구해 감에 있어서 노동자들만의 해방이 아니라 인간의 숙명적 과제로서의 전체 인간들의 차별과 억압의 완전한 소멸에 대해, 인간해방에 대해 항상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것을 지금부터 당장 노동해방의 과제와 결합시켜 나가야 한다. 노동해방이 되고 난 이후에 고민하거나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지금부터 바로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리하여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착취관계를 깨는 것과 더불어 그 이상의 인간적 소외를 해결해 나가는 데 앞장 서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인간해방의 지향은 더 확고해지며 노동해방의 내용은 더 풍부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더 풍부해진 노동해방의 내용은 이행기 강령 속에서 보다 선명하게 각인되리라 여겨진다.

 

이처럼 현실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인간적 문제들을 노동해방과 함께 틀어쥐고 가는 것은 실천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할 때만이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반자본주의 투쟁에 강력한 민중연대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순히 일회적으로 다가서는 것을 넘어서서 차별과 소외로 고통받는 모든 민중들이 자신의 고통의 근원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생하며, 그 체제로부터 더 가중된다는 인식을 가지도록 설명하고 교육해야 한다. 자신의 문제들이 자본주의로부터 파생되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면 할수록 그들 또한 반자본주의 투쟁의 주체가 될 것이다.

 

 

변혁의 주체인 노동계급

 

변혁 없이 인간해방은 없으며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인간해방은 노동해방으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노동해방은 반자본주의 변혁으로 이루어지며 그 주체는 마땅히 노동계급이다. 비록 그들이 각성하지 못하여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무수한 사람들의 탄식을 자아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가 노동에 대한 착취에 근거한 자본-임노동 관계에 기초해 있는 한 이 착취관계를 깨부수고 나아갈 수 있는 당사자는 노동자 자신들이다.

 

그러나 단결만 하고 투쟁하지 아니하는 노동자가 부지기수이듯이 투쟁을 하지만 변혁적으로 투쟁하지 아니하는 노동자들도 부지기수이다. 또 지난 수십 년간의 역사를 거치면서 노동운동진영의 변혁적 기풍은 오히려 현저히 줄어들었다. 전노협이 열심히 외쳤던 천만노동자 총단결로 노동해방 앞당기자란 구호에서 노동해방이란 말 자체가 민주노총 시대에 와서 사회대개혁으로 대체되면서 이제는 듣기도 어려워졌다. 노동해방이 사라지면서 지역적, 전국적 총파업도 보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그러면서 현장투쟁으로는 안 되니 국회의원 많이 만들어 세상을 바꾸자는 기류로 확 바뀌었다. 이제는 국회에 의원도 거의 없어졌다. 그리고 자본의 공세는 더 심각해져 자본독재를 실현하는 수준으로까지 내달리고 있다.

 

이 과정은 노동운동이 해방이라는, 착취관계를 깨부수는 것을 그만두는 순간부터 더 이상 의미 있는 운동이 되지 못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노동자 일부에서 임금은 더 받았는지 모르지만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본독재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은 이러저러한 투쟁을 통해서 정규직을 유지했지만 자식들은 비정규직이 되었다. 그동안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쌓아올린 거대한 금자탑은 사상누각이 되어 모래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남은 것은 노동운동의 무기력뿐이다.

 

노동계급은 스스로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빨리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깊이 성찰해야 한다. 수십 년에 걸쳐서 너무 꼬여 있기 때문에 무엇이 문제인지 짚어 나가는 것도 어렵다. 오랜 세월 동안 꼬인 것이기에 풀어나가는 데 아마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래도 먼저 자각한 집단이 있다면 인간해방, 노동해방의 노래를 나지막하게라도 불러야 한다. 그러나 그 노래들이 여기저기서 불리어지기 시작하면 노래는 함성이 되고 세상을 놀라게 하는 천둥벼락소리가 될 것이다.

 

지난날의 역사적 교훈에 의거하여 노동운동은 변혁적 노동운동으로 자신을 새롭게 세워나가야 한다. 자본-임노동의 착취에 기반한 노예적 사슬을 끊고 인간해방으로 나아가는 노동해방의 기치를 분명하게 제기하는 변혁적 노동운동의 길로 나서야 한다. 단순히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를 부정하고 넘어서는 반자본주의 변혁의 주체로 나서는 노동계급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노동해방이 실현되고 인간해방이 더 구체화되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역사의 주체인 노동계급

 

변혁적 지향이 약화되어 온 탓에 ‘과연 변혁이 가능한가?’라는 회의가 광범위하게 깔려 있고 관심 자체가 거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왔다. 그동안 여기저기서 탈노동에 대한 담론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기도 하고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던 노동중심이란 단어가 새삼스럽게 강조되기도 했다. 노동의 무기력과 상대적으로 거대한 자본의 벽을 마주하면서 자본주의가 자연사적 법칙에 따라,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소멸한다는 점까지도 망각한 채 자본에 타협하고 수용하는 데로 나아갔다. 자본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 속에서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자본 친화적인 인간들을 양산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자본에 대해 분노하고 저항하는 인간들을 굴복시키고 체제 내화시킬 수도 있다. 역사가 인간을 그들의 모습대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인간을 만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고 해서 이후의 역사가 똑같은 모습으로 재생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사회구조, 제도, 역사가 미래의 구조, 제도, 역사를 동일한 형태로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과거의 역사는 미래의 역사의 조건과 한계가 될 뿐이지 창조할 수는 없다. 구조, 제도, 역사는 그들 자신을 만들지 못한다. 역사는 역사를 만들지 못한다.

 

오직 인간만이 역사를 만들 수 있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태어난다. 말하자면 기존의 사회구조, 제도, 역사 속에 던져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조건 속에 규정되고 강제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조건 삼아 새로운 구조, 제도,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오직 인간만이 역사를 만들어 간다. 비록 기존의 물질적, 정신적 유산들이─ 그것도 인간이 만들었던 사회경제구성체이지만 ─오랜 세월동안 고착화되어 그 틀 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 또한 모순 속에서 끝없이 대립하고 있고, 부정의 계급투쟁 과정을 통해 소멸하고, 새로운 구조, 제도, 역사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낡은 구조를 변혁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려면 새로운 구조, 새로운 역사의 상을 제대로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상과 전망이 뚜렷하면 할수록 운동은 위력적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갑자기 외부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포착하고 구체화하는 것도 실천하는 인간의 몫이다. 사회변혁이 필요하다면 그 필요성을 절감하는 사람들이 뭉쳐서 변혁적으로 사고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출발점이다. 비록 그 출발은 미약하더라도 그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해방은 노동해방으로 구체화되고 역사를 새롭게 만드는 인간은 노동자로 구체화된다. 자본-임노동 착취관계의 역사를 깨부수고 인간해방으로 다가서는 노동해방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기본적 주체는 노동자들이며 노동계급이다. 자본주의라는 낡은 체제 아래에서 자본의 역사를 부정하고 노동의 역사를 쓸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인간의 역사를 쓸 수 있는 조건과 토대를 만들 수 있는 핵심적 주체는 노동계급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착취와 폭력으로 점철된 자본주의의 반인간성을 직시하는 노동자라면 누구나 마땅히 변혁적 노동운동의 기치 아래 집결해서 그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한다. 노동운동이 변혁적 노동운동으로 전환되고 정립될 때 자본에 대한 급진적 통제를 통해 노동자를 포함한 인류의 파멸을 막아내고 인간다운 삶이 실현되는 새로운 역사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변혁적 노동운동으로

 

우리 역사에 있어서 노동운동이 변혁적으로 크게 나아갔던 시기로는 해방 직후와 80년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해방 직후 정치적, 변혁적 노동운동은 한국전쟁으로 남북분단이 고착화하면서 남한에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변혁적 노동운동이 새롭게 분출하였으나 90년대 이후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점차 약화되었다. 변혁적 노동운동이 자취를 감추거나 약화되는 시기에는 자본의 힘과 영향력은 엄청나게 커지고 노동자들의 권익은 약화되거나 파괴되어 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자본의 힘이 너무 막강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이 바닥으로 떨어진 그 결과로 오히려 자본이 자본으로서 정립을 위협당하는 체제위기의 상황, 대공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21세기 대공황은 노동계급으로 하여금 자본주의 체제가 반노동을 넘어서서 반인간적인 체제임을 명확히 직시하게 만들고 인간다운 삶을 실현해 나가는데 있어서 결정적 장애물임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문제이며 체제 그 자체를 깨부수고 넘어서는, 반자본주의 변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롭게 각성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 80년대부터 이어져 온 변혁적 노동운동 진영은 그간의 어려움을 딛고 이제 자본의 위기로 조성된 노동계급의 각성과 급진적 요구에 부응하여 그 변혁적 지향성을 좀 더 힘차게 거머쥐고 담대하게 나서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점에서 1980년대 대구지역의 변혁적 노동운동의 주체였고 지금까지도 그 기치를 지켜나가고자 했던 동지들이 모여 대구노동운동자료실을 만들기로 하였다. 원래는 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의 역사가 가득 담긴 수십 박스의 자료들이 비에 젖어 곰팡이가 슬어 심각하게 훼손되어가고 있고, 이 상태로 더 방치하다가는 원형을 완전히 상실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어딘가 안전한 공간으로 옮겨야 한다는 고민들을 늘 해왔었다. 최근에 와서 이러한 고민들은 자본에 대한 노동자들의 급진적 통제를 요구하는 현실에 조응하여 단순한 자료의 보존을 넘어 변혁적 노동운동의 전통을 새롭게 세우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발전하였다. 대구노동운동역사 자료실은 그러한 문제의식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자료실은 과거 변혁적 노동운동의 역사적 자료를 모으고 보존하기도 하겠지만 더 중요하게 추구하는 바는 변혁적 노동운동의 정신을 새롭게 세우고 그 주체들을 만들어내 그 빛나는 전통을 다시 복원하고 새로운 변혁의 역사를 쓰기 위함이다. 비록 숫자도 많지 않고 역량도 부족하지만 그 길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하는 마음이다.

 

홀홀단신으로 자신을 던져 남한 노동계급 전체를 각성시키고 변화시킨, 지금도 변화시키고 있는 전태일 열사의 그 치열함에, 그 절절한 인간애에는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하지만, 변혁운동이 흐드러지게 핀 가을꽃처럼 온 산하에 가득 펼쳐지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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