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5)*

* 편집자: 연구소에서 철학세미나를 지도하고 있는 문영찬 연구위원장이 그동안의 성과를 정리하여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2015년 1월호부터 연재하고 있다.

 

문영찬 | 연구위원장

[목차]

머리말

제 1 장 세계관과 철학의 근본문제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 철학의 근본문제

  3. 세계의 통일성

제 2 장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의 역사

  1. 철학의 발생

  2. 데모크리토스 노선과 플라톤 노선의 투쟁

  3. 아리스토텔레스

  4.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에 의한 고대 원자론의 계승, 발전

  5.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 토마스 아퀴나스

  6.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브루노, 갈릴레이, 뉴턴

  7. 베이컨, 홉스

  8. 데카르트

  9. 스피노자

  10. 로크

  11. 라이프니츠

12. 흄

  13. 디드로, 엘베시우스, 돌바하

  14. 볼테르, 루쏘

  15. 칸트

  16. 피히테, 셸링

  17. 헤겔

  18. 포이에르바하

제 3장 맑스, 엥겔스에 의한 철학에서의 혁명

  1. 맑스, 엥겔스에 의한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의 창시

  2. 변증법적 유물론의 범주들

    1) 물질과 운동

    2) 공간과 시간

    3) 물질과 의식

    4) 원인과 결과

    5) 개별-특수-보편

    6) 필연성과 우연성

    7) 본질과 현상

    8) 가능성과 현실성

    9)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

    10) 모순 혹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내용과 형식)

    11) 부정의 부정

    12) 인식론
3. 자유와 필연성

  4. 목적의식성

  5. 사적 유물론의 범주들

  6. 레닌, 스탈린, 마오쩌뚱, 그람시에 의한 맑스주의 철학의 발전

제 4 장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사조에 대한 비판

  1. 콩트, 밀

  2. 쇼펜하우어, 니체

  3. 후설

  4. 하이데거

  5. 프로이트

  6.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7. 샤르트르

  8. 하버마스

  9. 알튀세르, 발리바르

  10. 푸코, 들뢰즈, 데리다, 라캉

  11. 지젝

  12. 자율주의

  13. 이진경

  14. 롤즈의 《정의론》, 마이크 샌덜의《정의란 무엇인가》

제 5 장 과학의 발전과 그에 대한 철학적 일반화

제 6 장 철학과 종교

제 2 장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의 역사

12. 흄

흄은 18세기 초에 태어나 18세기 말엽까지 활동한 영국의 철학자이다. “흄이 생애를 보낸 18세기 영국은, 격동의 시대라고 했던 홉스나 로크의 시대와 달리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2대 변혁 사이에 끼었던 비교적 평온한 시대였다.”1) 또한 이 시대는 “영국 자본주의의 결정적 승리라는 조건이 성숙한 상태였다.”2)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 부르주아지는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분위기와 달리 보수적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는데 이러한 분위기가 버클리의 맥을 이으면서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제출한 흄의 철학을 낳게 한 배경이었다.

흄의 철학, 불가지론은 관념론적이면서도 이전의 관념론과 달리 현실 세계에 대한 파악 불가능성, 원인과 결과 관계의 객관성의 부정 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흄은 자신의 철학을 회의론 철학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실은 과학에 대한 부정, 반(反)과학의 체계라 할 수 있다. 흄의 회의론은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는 전혀 다르다. 데카르트는 확실한 진리를 움켜쥐기 위해 불확실한 것을 쳐내고 의심하는 방법적 회의의 길을 걸은 데 반해 흄은 물질의 성질, 외적 세계의 존재, 지각을 넘어서는 세계의 문제 등을 인간이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회의론이었고, 그런 점에서 불가지론이라 불리게 되었다.

흄의 철학적 주저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다. 여기서 그는 유명한 인과율 비판, 혹은 원인과 결과 관계의 객관성에 대한 부정을 제출한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승인하는가 여부는 철학적으로 오랜 논쟁거리였다. 그것을 승인하는 입장은 결정론이라 불리었고 부인하는 입장은 비결정론이라 불리었다. 그런데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라는 속담처럼 어떤 현상이 있을 때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접근은 과학적 인식의 초석이 된다. 그런 점에서 원인과 결과 관계의 객관성의 부정은 단순한 철학적 혼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 전반에 대한 부정으로 된다. 즉, 반(反)과학의 입장에 서게 된다. 실제로 흄은 추상관념, 필연성과 우연성, 원인과 결과, 시간과 공간 등 제반의 영역에서 과학을 부정하거나 비과학적 주장을 제출한다. 그러면 그의 체계에 따라 불가지론이라 불리는 반(反)과학의 입장을 파헤쳐 보자.

그는 인간의 지각을 인상과 관념으로 나누는데 그러한 구별의 기준은 “지각이 정신을 자극하며 사상 또는 의식에 들어오는 힘과 생동성의 정도에 있다”3)고 본다. 여기서 인상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감각의 단계를 말하며 관념은 이성적 인식의 단계를 말한다. 그런데 그 구분의 기준이 ‘힘과 생동성의 정도’라는 주관적 기준이다. 이는 흄이 감각과 이성을 구분하고 있지만 그 차이에 대해 과학적 기준을 세우고 있지 못함을 말한다.

그는 보편(일반)과 개별의 문제를 그릇되게 파악한다. “정신이 추상 관념들을 표상할 때 과연 그 관념들이 일반적인가 아니면 개별적인가 하는 것은, 추상관념들이나 일반관념들에 대하여 제기해 온 아주 중요한 과제이다. … 모든 일반관념은 어떤 명사에 뒤따른 개별관념들일 뿐이며… 추상관념들은 다른 것들을 대표한다는 점에서는 일반적이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는 모두가 개별적이다.”4) 일반 혹은 보편 관념은 실제로는 개별관념일 뿐이라는 이러한 주장은 일반 혹은 보편 개념을 개별이라는 개념으로 분해하여 보편성(일반성)의 관념을 사실상 부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일반 혹은 보편의 의미를 ‘다른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보편 개념의 독자성, 고유성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보편 혹은 일반은 단지 개별을 ‘대표’하는 의미가 아니라 개별에 존재하는 여러 성질 혹은 측면 중에서 특정한 한 측면 혹은 성질을 추상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편 혹은 일반은 개별의 ‘대표’라는 관념은 부정확한 파악이다. 보편이 개별을 ‘대표’한다면 보편은 개별로 환원될 수 있지만 보편이 여러 개별에 공통된 한 측면을 말하는 것이라면 보편은 개별로 환원되지 않고 독자적 범주로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더욱 더 문제가 되는 것은 흄이 일반(보편)을 개별로 환원하는 근거로 ‘습관’을 들고 있는 점이다. “우리는 어떤 일반 명사를 쓸 때마다 개별자들의 관념을 이루지만 이 모든 개별자들을 하나하나 드러내는 것은 거의, 또는 전혀 불가능하다. 그 관념이 당장 요구될 때마다 그 개별자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습관에 의해 나머지 개별자들이 표상될 뿐이라는 것은 아마도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이 곧 추상관념과 일반명사의 본성이다.”5) 일반관념은 개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습관’일 뿐이라는 것이 요지이다. 일반 혹은 보편과 개별이라는 과학의 기초가 되는 관념에서 흄이 들고 있는 근거는 고작 ‘습관’이라는 비과학적이고 주관적인 관념일 뿐이다. 그러나 습관이라는 말로써는 개념의 범위와 그 내포가 확정될 수도 없고 무한한 자의적인 판단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보편)은 단지 개별을 상기시켜주는 습관이 아니라 개별들에 존재하는 종(種)과 류(類)를 파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독자적 범주이다. 따라서 일반 혹은 보편은 습관이라는 비과학적 개념을 매개로 개별로 환원될 수는 없는 것이다. 과학에 대한 흄의 태도는 바로 이러한 것이다.

그는 공간과 시간에 대해서 유물론적인 입장을 비판한다. “연장과 물질은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공은 있다는 것, 이것은 역설이다. … 시간은 어떤 실재 대상들이 존재하는 방식일 뿐이라는 이론에 대해, 우리는 그 이론이 하마터면 연장에서의 이와 비슷한 이론과 같은 반론에 부딪치기 쉽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진공에 대하여 논의하고 추리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 우리가 진공관념을 갖는다는 데 대한 충분한 증거라면, 똑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변화하는 존재 없이도 시간 관념을 가져야 한다.”6) 연장은 물질의 속성이기에 물질 없는 연장을 의미하는 진공은 불가능하다는 데카르트파의 견해를 흄은 비판하면서 진공의 존재를 승인하고 있다. 또 시간에 대해서도 시간이 대상의 존재방식이라는 유물론적 견해를 비판하면서 변화하는 존재 없이도 시간관념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흄의 견해는 흄이 기본적으로 관념론의 지반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존재와 의식에서 어느 것이 선차적인가라는 철학의 최고물음을 관념론의 입장에서 해결한다. “우리가 의식하거나 기억하는 어떤 종류의 관념이나 인상도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존재에 관한 가장 완전한 관념과 확실한 증거가 이 의식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 존재관념은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의 관념과 완전히 똑같다. … 정신에 나타난 모든 대상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7) 존재의 증거는 의식이라는 주장은 존재보다 의식을 일차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존재 관념과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의 관념은 똑같다라는 것은 사고와 대상의 동일성 즉, 관념이 곧 대상이라는 관념론적 사고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정신에 나타난 대상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 즉, 정신이 존재를 규정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이렇게 흄은 존재 혹은 외적 세계의 문제를 관념론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주장한다. 이러한 흄의 입장은 주관적 관념론자였던 버클리의 입장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흄은 버클리 이후의 철학과 과학의 발전을 반영하고 있는데 단지 그것들을 반영하면서도 불가지론적으로 비틀고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흄은 인식론에서 관념론적인 경향을 보인다. “대상들이 우리에게 나타났을 때, 가장 단순한 현상조차도 그 대상들 자체의 성질들로부터 설명될 수 없으며, 우리는 기억이나 경험의 도움 없이 그 현상을 미리 알 수 없다.”8) 어떤 현상을 대상의 성질로부터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대상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단지 기억과 경험으로부터 설명한다는 것인데 이는 대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인식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유물론에서는 우리의 인식이란 대상의 반영이고 따라서 대상의 성질 자체에 인식의 근원이 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임에 반해 흄은 인식의 근원으로서 대상 자체의 성질을 부정하고 있다. 이로써 대상의 객관적 본질에 대한 접근을 의미하는 과학적 접근은 봉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흄의 언급을 조금 더 살펴보자. “이런 관찰들 가운데 어떤 것에서도, 정신은 감각기관에 직접 나타난 것을 넘어서 대상들의 실재 존재나 관계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9) 정신은 감각만을 알 수 있고 감각을 넘어선 실재 존재나 대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주장! 바로 이것이 불가지론(不可知論)이다. 즉, 객관적 현실에 대해 주체가 아는 것,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바로 불가지론이고 이는 과학적 인식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흄은 그것을 이론적으로 기초짓기 위해 원인과 결과 관계, 그리고 그 관계의 객관성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간다. 그는 원인과 결과 개념을 현상들의 단순한 인접과 시간적 계기로 변환시킨다. “먼저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원인이나 결과라고 여겨지는 대상들은 그 대상들이 무엇이든 간에 모두 이웃해 있다는 점이다. … 내가 살펴볼 두 번째 관계는 인과의 본질적인 관계로서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오히려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그 관계는 결과에 대한 원인의 시간적 우선 관계이다.”10) 흄은 여기서 결과를 산출하는 원인이라는 개념을 승인하는 대신, 인접과 시간적 계기라는 인과성의 외관에 대해 서술한다. 이것이 단지 외관에 대한 서술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그가 원인 개념을 부정하면서 원인 개념을 이렇게 인접과 계기라는 개념으로 분해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런데 그는 인접과 계기가 원인 개념을 대체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원인과 결과 개념에 내재하는 필연적 연관이라는 범주를 분해하기 시작한다. “이제 우리는 인접과 계기라는 이 두 계기가 인과성의 완전한 개념을 내세운다는 이론으로 만족하고 말 것인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어떤 대상은 원인으로 여기지 않고도 다른 대상에 이웃해 있으면서 그보다 앞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필연적 연관이라고 하는 것을 살펴 보아야 하는데, 이 관계는 앞에서 다루었던 다른 어떤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11) 여기서 필연적 연관이라는 관념은 원인과 결과 관계의 내용을 구성하는 중요한 범주이다. 그리하여 그는 “존재하기 시작한 것은 무엇이든 존재 원인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철학의 일반적 근본원리”12)라고 하면서 이 원리를 부정하는 길을 걷는다.

그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한 부정, 인과성의 부정을 다음과 같이 수행한다. “독립관념들은 모두 분리될 수 있고 인과의 관념들은 분명히 독립적이므로, 원인이나 생산의 원리 등과 같은 독립 관념을 지금은 존재하지 않으나 다음에 존재할 어떤 대상에 결합시키지 않고도 우리는 그 관념을 쉽게 상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상상력은 확실히 존재의 발단에 관한 관념에서 원인의 관념을 나눌 수 있다.”13) 원인 개념과 결과 개념은 각각 독립된 개념이며 따라서 그것들을 결합시키지 않고서도 원인 개념을 설정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이 원인과 결과의 연관성이 부정되면 원인 개념은 부정되면서 존재의 발단 개념으로 대체된다는 것이 요지이다. 흄의 이러한 사고가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유물론자가 아니고 주관적 관념론자라는 점이다. 현실적인 원인과 결과의 연관을 주관적으로 나누고 대체하여 원인 개념은 분쇄되었다고 망상하는 것이 위에서 나타난 흄의 모습이다. 원인과 결과가 관념적으로 볼 때 독립개념으로써 나누어질 수 있다는 사고가 원인과 결과의 현실적인 분리, 따라서 그것들의 연관성의 부정으로 나아간 것이다. 소위 흄에 의한 인과성 비판의 실체는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인과성이라는 철학의 원리의 부정에 성공했다고 착각한 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모든 사물이 저마다 원인을 가져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타당한 추론에 의하면, 모든 사물이 각각 원인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14) 그리하여 흄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불가지론을 고백한다. “생각건대 감관에서 비롯되는 인상들의 마지막 원인은 인간이성으로는 완전히 밝혀낼 수 없으며, 그 인상이 대상으로부터 직접 비롯되는지 또는 정신의 창조력에 의해 생겨나는지 또는 우리의 조물주로부터 비롯되는지를 확실하게 결정하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15) 만약 이렇게 어떤 현상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현대의 모든 과학은 애시당초 성립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반(反)과학의 입장을 세운 흄은 우연의 문제에서도 비과학적인 입장을 보인다. “우연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으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원인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우연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은 인과성과 반대인 것이다. 다시 말해 우연의 본질적인 점은, 우발적으로 보이는 사물의 존재·비존재를 고찰할 때 상상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일이 전혀 없도록 붙잡아 두는 것이다.”16) 여기서 흄은 우연을 원인에 대한 부정으로 파악한다. 즉, 어떤 현상이 우연적이라는 것은 그 현상의 원인이 없는 것으로 본다. 흄의 이러한 입장은 그가 변증법에 대해 무지하며 또한 비과학적임을 보여준다. 우연은 원인에 대한 반대 개념이 아니다. 우연은 원인에 대한 반대 개념이 아니라 필연에 대한 대립 개념이다. 따라서 우연적 원인이라는 개념도 얼마든지 성립할 수 있다. 현실은 무수한 필연과 우연이 교차하면서 자신의 변화와 운동을 겪는다. 여기서 우연적 원인과 필연적 원인의 차이를 조금 더 살펴보자. 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일한 원인은 언제나 동일한 결과를 낳고 동일한 결과는 동일한 원인을 제외한 어디에서도 발생하지 않는다.”17) 이러한 흄의 말은 일반적으로는 맞다고 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옳지 않다. 동일한 원인은 일반적으로 동일한 결과를 낳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조건이 변동되면 동일한 원인임에도 다른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이렇게 어떤 결과가 있을 때 반드시 일정한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타당하지만 그 원인이 필연적 원인인지 우연적 원인인지는 조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불가지론자인 흄은 외적 세계의 인식가능성을 부정하는데 그것을 우리 감관의 본성의 문제로 돌린다. “감관이 우리 자신과 외부 대상들을 구별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 감관은 자신이 실제로 작용하는 영역 이상으로는 작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감관이 우리에게 지속적인 존재의 견해를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관은 독립적인 존재에 대한 의견도 거의 산출하지 않는다. 감관은 재현된 것이든 근원적인 것이든 간에 독립적 존재를 정신에게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지속적인 존재와 독립적인 존재라는 의견은 결코 감관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8) 이것은 감각에 대한 불신을 보여주는데 감각을 통해서는 우리로부터 독립된 존재, 외적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우리 감각은 외적 세계를 인식할 수 없는가? 우리 감각은 주체와 대상의 분리를 인식할 수 없는가? 이에 대해 흄은 불가능하다고 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왜? 무엇을 통해서? 바로 실천을 통해서다. 실천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감각과 그리고 독립적인 외적 세계의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한다. 우리의 육체적, 감각적, 나아가 사회적 운동은, 그러한 실천은 우리 자신의 감각과 독립되어 있고 우리의 의지와 독립되어 있는 외적 세계를 끊임없이 인식하게 한다. 주관적 관념론자인 흄에게 인간의 실천은 철학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지만, 그리하여 감각의 능력, 감각의 다면성과 풍부함을 부정하지만 실천은 인간의 감각을 최고도로 끌어올리며 외적 세계의 상 그리고 감각과 외적 대상의 분리에 대한 인식을 생생하게 인식 주체에게 가져온다. 그리하여 감각에 대한 이러한 차이에서 관념론과 유물론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흄은 다음과 같이 자신이 주관적 관념론자임을 고백한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지각과 대상이라는 이중존재의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인도해 주는 오성의 원리나 공상의 원리는 전혀 없다. … 우리가 확신하는 유일한 존재는 지각들이다.”19) 우리의 지각만이 존재라는 이 주장! 주관적 관념론의 핵은 바로 이렇게 지각을 넘어서는 존재를 부정하고 지각 자체가 곧 존재라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흄은 필연성의 객관성을 부정하고 필연성은 정신의 지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하나의 대상을 원인이라고 부르고 다른 대상을 결과라고 부를 때, 그 자체로 고려하면 그 모든 대상들은 자연에서의 어떤 두 대상과 마찬가지로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대상들을 아무리 엄밀하게 조사하더라도 결코 한 대상의 존재에서 다른 대상의 존재를 순수하게 이성적으로 추정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그 대상들을 경험하고 관찰할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추정은 상상력에 작용한 습관의 결과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경우 항상 합일된 대상들에서 원인과 결과 따위의 관념이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원인과 결과 따위의 관념은 이 대상들의 관념과 동일하므로, 필연적 연관은 오성의 결론을 통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지각일 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20) 필연적 연관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신의 ‘지각’일 뿐이라는 것은 대상들의 필연적 연관의 객관성을 부정하고 필연성을 주관의 영역으로 돌리는 것이다. 여기서도 흄의 주관적 관념론의 면모가 드러난다. 또한 흄은 원인과 결과 혹은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추정’할 수 없고 단지 ‘상상력에 작용한 습관의 결과’라고 본다. 이성적 추정과 습관의 결과라는 관점은 커다란 차이가 있는데 전자의 ‘이성적 추정’에서는 과학의 지향이 가능하지만 후자의 ‘습관의 결과’에서는 과학적 지향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흄은 반(反)과학의 입장을 명백히 보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자유와 필연에 대한 흄의 입장을 들어보자. “결과적으로 자유는 필연성을 제거함으로써 원인도 제거하고, 우연도 마찬가지이다.”21) 자유가 필연성을 제거한다는 것은 자유와 필연의 관계에 대한 대단히 속류적인 인식이다. 흄의 이러한 사고가 가능한 것은 그가 관념론자이기 때문이다. 유물론자의 입장에서 필연성은 객관적인 것이므로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단지 필연성에 대한 인식에 입각하여 자신의 실천, 자유의 영역의 확대를 추구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흄에게 필연성은 단지 정신적 지각일 뿐이므로 자유를 통해 필연성을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렇게 자유와 필연성의 대립을 속류적으로 부정한 흄은 자유와 우연을 등치시킨다. “자유와 우연이 동의어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내가 앞에서 제시했던 것….”22) 필연적 연관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자유와 우연의 동일성! 이러한 인식은 대단히 속류적인데 필연에 대한 부정으로서 자유는 실제로는 껍데기의 자유에 불과하며 또한 우연을 원인을 갖지 않는 것으로서 되는 대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보아 자유와 동일시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와 실천을 한없이 추락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속류성은 흄의 입장에 흐르는 반(反)과학성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흄의 철학은 18세기 영국 부르주아지의 보수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혁명적 진보가 아니라 소유의 보전이 최대의 관심사였던 당시의 영국 부르주아지로서는 흄의 회의론이 구미에 맞는 것이었다. 흄은 경험론의 입장에 섰으나 베이컨의 경험론이 스콜라학에서 해방되어 과학을 추구하기 위한 무기로서 경험이었다면 흄의 경험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부정하고 반(反)과학의 길을 걸어가기 위한 논거로 ‘습관의 결부’라는 의미로서 경험이었다 할 수 있다. 이렇게 불가지론이 발생하고 체계화된 것은 과학과 진보, 변혁이라는 18세기 유럽 전체의 흐름과 정반대되는 것이었는데 영국의 부르주아지가 이미 17세기의 혁명을 통해 지배계급으로 올라서서 보수화된 상태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흄의 불가지론은 이후 부르주아지의 무기로서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현대에 있어서도 다양한 형태의 불가지론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철학에 있어서 과학적 입장의 해체는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실천을 무력화시키는 토대가 된다. 따라서 불가지론 혹은 과학의 해체에 반대하면서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의 정립과 강화의 길을 걷는 것이 필요하다.

13. 디드로, 엘베시우스, 돌바하

디드로, 엘베시우스, 돌바하는 18세기의 프랑스 유물론자들인데 이들은 직접적으로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구축한 사람들이었다. 계몽사상가인 루쏘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으나 이들 프랑스 유물론자들은 한국사회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들은 직접적으로 혁명을 설파하고 나아가 이후 사회주의의 흐름이 형성되는 원천이 되기도 했다.

맑스는 프랑스 유물론자들의 위상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정확하게 그리고 산문적으로 말하자면’ 18세기의 프랑스 계몽사상과 특히 프랑스 유물론은 현존 정치제도들에 대한, 그리고 현존 종교 및 신학에 대한 투쟁일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17세기 형이상학과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특히 데까르트, 말르브랑슈, 스피노자, 라이프니쯔의 형이상학에 대한 공공연하고도 명백한 투쟁이다.”23) 이는 프랑스 유물론자들이 이전의 철학자들과 달리 직접적으로 기존의 정치체제를 공격하여 혁명을 추구했고 다른 한편으로 기존의 형이상학에 반기를 들면서 의식적으로 유물론 철학을 추구했음을 말한다. 맑스는 프랑스 유물론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정확하게 그리고 산문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프랑스 유물론에는 두 개의 흐름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그 원천을 데까르트에 두고 있고, 다른 하나는 그 원천을 로크에 두고 있다. 후자는 무엇보다도 프랑스적 교양의 일 요소이며, 직접 사회주의로 흘러들어간다.”24)

디드로는 직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프랑스의 유물론과 무신론을 발전시킨 철학자, 사상가, 문인이었다. 그는 백과전서파로 알려져 있는데 백과전서는 당대의 과학적 지식을 총괄하면서 나아가 비판의 영역을 반동적인 정치제도로 확대한 것이었다.

디드로는 의식적으로 유물론을 추구하는데 《맹인에 관한 서한》은 디드로의 유물론 사상을잘 보여준다. 시각이 없는 맹인이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에 대한 탐구를 통해 외적 세계의 객관적 실재성과 그 과정에서 감각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우리의 기관과 감각의 상태가 우리의 형이상학과 도덕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 또 이러한 말이 허용된다면, 가장 순수하게 지적인 우리의 사상이 우리 육체의 구조에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25) 형이상학과 도덕이라는 인간의 이성의 측면이 감각의 상태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의 승인은 유물론적 인식론이다. 인간의 도덕은 이성 자체에 의한 것이며 감각은 천하고 더러운 것이라고 보는 관념론적 주장과는 정반대의 입장이다. 또한 우리의 사상이 육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관념이 육체라는 물질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으로서 정신보다 물질을 일차적으로 사고하는 유물론적 인식이다. 그는 관념론자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관념론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각만을 의식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인정하지 않는 철학자들입니다. 그것은 맹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체계이며, 인간정신과 철학에 있어서는, 창피한 말이지만 모든 체계들 중 가장 불합리한데도 공격하기 가장 어려운 체계입니다.”26) 주로 버클리를 염두에 둔 이 비판은 관념론자들이 자신의 감각만을 승인하고 외적 세계의 객관적 실재성을 부인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인데 디드로는 관념론자들의 외적 세계의 부인이 실은 맹인이 외적 세계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조롱하고 있다. 디드로는 맹인이 세계를 인식하는 것에서 외부 세계의 객관적 실재성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는데 외적 세계와 감각을 다음과 같이 분리하여 파악한다. 즉, 그는 맹인이 직사각형과 같은 입방체와 구체를 만지도록 하고 이후 맹인이 수술을 받아 눈을 떴을 때 입방체와 구체에 대해 촉각으로 인식한 것과 시각으로 인식한 것이 일치하는가의 여부를 화두로 던지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그가 구체의 관념을 그의 시각에 부여하는 것은 입방체이고 구체로부터 입방체의 관념을 얻었다고 말한다면 정말 기묘한 사태가 될 것입니다.”27) 맹인이 촉각으로 직사각형의 입방체로 인식한 것을 눈을 뜨고 난 후에 시각으로는 구체라고 파악할 수도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감각과 구분되는 외적 대상의 객관적 실재성을 논증하는 것으로서 관념론자들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인식의 감각적 단계와 이성적 단계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또 사물이 우리를 자극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우리가 사물의 인상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28) 사물이 우리를 자극하는 것은 감성적 인식을 말하며 우리가 사물의 인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것으로서 인식의 이성적 단계를 말한다. 이렇게 디드로는 《맹인에 관한 서한》에서 의식적으로 유물론적 인식론을 수립하고 있다.

디드로는 백과전서의 편찬을 주도했다. 약 20년간에 걸쳐 많은 사람이 참여하여 완성된 백과사전은 이성의 세기라 불리는 18세기의 이정표라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성직자와 기득권자들의 많은 공격이 있었고, 그에 따라 중간에 떨어져 나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디드로는 이를 극복하고 백과사전을 완성한다. 현대에 있어서 백과사전은 매우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지만 18세기 당시에 백과사전을 발간하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더구나 디드로는 단순한 지식의 집합을 넘어서서 종교와 정치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였다. 디드로가 편찬한 백과사전에서는 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철학한다는 것은 사물을 이치에 맞게 설명하거나 이치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보이는 것만 보고, 본 것을 보고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우리는 그저 역사가일 뿐이다. 사물의 균형, 크기, 가치를 계산하고 측정한다면 우리는 수학자이다. 사물을 존재하게 하고 사물이 다른 방식으로가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있게 하는 이치를 발견하는 것으로 그치는 사람이야말로 본래 의미의 철학자이다. … 또 철학을 두 분과로 구분하고 두 가지 관계로 고려할 수 있다. 이론 철학과 실천 철학이 그것이다. 이론 철학 혹은 사변 철학은 사물을 순전하고 단순하게 성찰하는 것으로 그친다. […] 실천 철학은 대상에 작용을 가하기 위해 규칙을 제공하는 철학이다.”29) 이론 철학과 실천 철학을 구분하고 철학의 본질을 사물의 이치를 발견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는 기본적으로 유물론적이라 할 수 있다.

디드로는 예술과 문예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독특한 것은 철학과 문학을 결합하여 철학적 문예작품을 남겼다는 점이다. 《달랑베르의 꿈》은 대화체 형식의 문학인데 철학적, 과학적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디드로는 운동과 감성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활성 감성과 불활성 감성을 나눈다. “그런데 운동과 감성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당신이 활성(活性) 감성과 불활성(不活性) 감성이 있다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 혹시 살아 있는 힘이 있고 죽은 힘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 우리는 불활성 감성이 활성으로 이행하는 사실로 불활성 감성이 존재한다고 단언할 수 있겠지요.”30) 활성 감성은 동물에서 보이는 일반적 감성, 감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불활성 감성은 무기체에도 감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도끼로 나무를 쪼개면 나무조각이 튀는 것, 바위를 망치로 내려치면 돌조각이 튀는 것이 일종의 감성이라 파악되는 것이다. 무기체의 이러한 반응은 작용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인데 엄격히 말하면 감성이라기보다는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유기체의 감성의 본질이 외적 세계의 작용에 대한 유기체의 반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무기체의 그러한 반응과 유기체의 감성은 본질에 있어서는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런데 디드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활성 감성이 활성감성으로 이행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무기체에서 유기체가 생성되었다는 것인데 당시의 과학적 수준을 고려하면 천재적 추측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생명의 탄생이 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발전의 산물이라는 관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무신론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디드로는 생물체의 변이, 나아가 진화론을 추측하고 있다. “진흙탕에서 움직이고 있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벌레가 어쩌면 큰 동물 상태로 변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엄청난 크기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거대한 동물이 어쩌면 작은 벌레 상태로 변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어쩌면 그 거대한 동물은 이 지구상의 일시적이고 특이한 산물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31) 이러한 관점은 생물의 종을 고정되게 보는 시각을 탈피하는 것인데 신에 의한 종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고 아직은 추측이지만 종의 변화를 예측하는 것이다.

디드로는 원자론을 승인하고 있다. “만약 이 우주에 다른 분자와 유사한 분자가 하나도 없고 분자 안에서 하나의 점과 유사한 또 하나의 점이 없다면, 원자 그 자체가 하나의 성질을 가지고 있고 분할 불가능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32) 디드로는 원자의 규정으로서 하나의 성질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분할 불가능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 당시는 고대의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이 재생되던 시기였는데 원자론이 세계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의 초석이 된다는 점에서 디드로도 원자론을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디드로는 세포의 존재를 추측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살아 있는 하나의 점 …. 그 점 위에 또 다른 점이 접합되고, 거기에 또 다른 점이 접합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속적 접합으로 하나의 존재가 탄생한다. … 나는 분명 하나의 집합체, 감각하는 작은 생명체들로 이루어진 조직체를 보고 있어요. 작은 생명체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이건 한 마리 동물이라고요!”33) 하나의 점들의 집합으로서 존재의 탄생 그리고 감각하는 작은 생명체들로 이루어진 조직체, 작은 생명체의 연속으로서 한 마리 동물이라는 인식은 동물이 하나의 점 혹은 작은 생명체의 집합이라는 추측인데 이는 다름 아닌 세포의 개념과 동일한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디드로가 생명체의 본질에 대해 과학적 사고를 한 결과인데 이러한 과학적 접근은 생명체의 탄생에 대한 신학적 사고를 벗어던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디드로는 시간과 물질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이 거대한 물질의 바다에 서로 닮은 분자는 하나도 없지. 그리고 어떤 한 순간에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있는 분자 또한 없는 것이야. 매 순간은 사물의 새로운 시작이다. 그래, 이것이 바로 분자의 영원한 비명(碑銘)이지.”34) ‘매 순간은 사물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관점은 물질과 시간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시간의 본성은 물질의 변화양태에 다름 아니라는 것! 디드로의 이러한 관점은 세계가 분자로 이루어진 물질의 바다라는 것, 그리고 세계 자체는 그러한 물질의 운동에 다름 아니고 시간은 그러한 운동의 한 양태라는 인식이다. 이렇게 디드로의 유물론은 물질과 운동, 시간 등 유물론의 초석이 되는 범주들을 정립하고 있다. 디드로는 또한 물질의 영원성을 인식하면서 그에 기초하여 신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가고 있다. “물질의 영원성과 그 속성에 대해서, 두 가지 실체의 구분에 대해서, 인간의 본성과 동물의 생성에 대해서, 그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지고의 영적 존재에 대해 자신의 태도를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35) 물질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신에 의한 세계 창조를 부정하는 것! 이러한 유물론의 근본원리를 디드로는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물질의 영원성, 불멸성에 대한 인식은 이와 같이 신학적 사고와 대결하면서 지난한 과학적 사고의 과정을 거친 결과이다. 그리하여 물질의 영원성, 불멸성에 기초하여 운동의 영원성과 불멸성으로까지 나아가면 이 세계는 물질의 운동에 다름 아니라는 세계관이 성립하는 것이고 신은 부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에 기초하여 디드로는 만물의 상호연관이라는 변증법적 인식으로 나아간다. “긴 대들보의 한쪽 끝을 아주 살짝 두드려도 내가 귀를 다른 쪽 끝에 대고 있으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지요. 그 들보의 한쪽 끝이 지구에 닿아 있고 다른 쪽 끝이 천랑성에 닿아 있어도 동일한 결과가 발생할 겁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인접해 있는데, 다시 말해서 들보는 실제로 존재하는데, 왜 나는 거기에 귀를 잔뜩 기울여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광대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들을 수 없을까요?”36) 대들보의 한쪽 끝과 다른 쪽 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관찰에 기초하여 디드로는 우주 전체가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으로 나아간다.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 이러한 만물의 상호연관의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세계가 물질의 운동에 다름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물질성으로 인해 만물의 상호연관성이 성립한다는 것! 이러한 인식으로까지 나아가면 그것이 곧 변증법적 유물론의 세계관이 되는 것이다. 디드로는 아직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천재적 직관에 의해 그러한 추측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디드로는 유물론적 관점에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 결정론을 승인하고 자유의지론을 부정한다. “의지란 언제나 내적 또는 외적인 동기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현재의 인상이나 과거의 어슴푸레한 기억, 정열, 아니면 미래에 대한 계획에서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유에 대해서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행위 중에서 마지막 행위는 단 하나의 원인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굉장히 복잡하기는 하지만, 결국 유일한 단 하나의 원인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결과입니다.”37) 우리의 행위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원인과 결과 관계의 필연성이 있다는 것을 디드로는 승인하고 있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 관계는 앞에서 디드로가 만물의 상호연관을 승인한 것에 기초하고 있다. 만물의 무수한 상호연관 관계는 그 내용에서 다양하다. 원인과 결과, 가능성과 현실성, 우연과 필연, 본질과 현상, 내용과 형식, 등등 상호연관성의 종류는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실은 상호연관이라는 관계의 하나일 뿐이라는 점이다. 변증법은 이렇게 하나의 도식이 아니라 관계 혹은 상호연관을 승인하고 그것의 구체적 성질을 파악해 들어가는 것이다.

디드로는 이렇게 철학과 문학을 통일시켜 많은 문학작품 속에 철학적 내용을 담았다. 엥겔스에 의해 변증법의 걸작이라 평가받은 《라모의 조카》또한 일종의 철학 소설이다. 18세기 당시 철학소설은 여러 철학자와 문학가에 의해 시도되었는데 이는 철학적 내용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문학 혹은 소설이라는 형식이 적합했기 때문이다. 디드로는 문학과 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의 예술론은 사실주의, 리얼리즘이라 할 수 있다. “이제까지 희곡에서는 성격이 주요한 대상으로 묘사되었고, 사회적 상황은 단순히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회적 상황이 전면에 나오고 성격은 부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이제까지는 성격 위에서 모든 줄거리가 조립되었다. 통상 성격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장면이 많이 요구되었고, 나중에 이들 장면이 연결되었다. 그러나 작품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사회적 상황이고, 그 의무, 특권, 곤란이어야 한다. 나에게는 이 원천이 성격보다도 보다 풍부하고, 보다 넓고, 보다 유용하다고 생각된다.”38) 성격과 상황이라는 두 범주 사이에서 디드로는 상황에 강조점을 찍고 있다. 성격은 개인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서 예술성을 높이는 데 중요하다. 그러나 디드로는 성격보다도 사회적 상황을 더 중시하고 있는데 이는 현실을 담는 예술, 사상성을 강조하는 리얼리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디드로의 이러한 리얼리즘관 즉, 사상성과 예술성의 통일은 예술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화가에게는 두 가지 자질이 필요하다. 도덕의 감각과 투시의 감각이다.”39) 이러한 디드로의 철학과 문학, 예술, 그리고 정치적 활동은 프랑스 혁명의 직접적인 사상적 지반을 창출하는 것이었고 나아가 이후의 사회주의의 조류로까지 연결된다. 흔히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토대로 루쏘 등이 언급되지만 실은 디드로, 엘베시우스, 돌바하 등의 프랑스 유물론자들이 혁명의 직접적 선구자들이라 할 수 있다.

엘베시우스는 영국의 로크에게서 영향을 받은 유물론자이다. 그는 인간의 정신을 감각의 비교의 산물로 파악한다. “인간 속에서 그 정신을 만들어내는 원리는 무엇인가? 그의 신체적 감성, 기억, 그 중에서도 그의 감각을 서로 결합하는 것에 대해서 갖는 관심이다. 정신은 그러므로 인간 속에서 비교된 그의 감각의 결과에 불과하다.”40)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정신이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감각을 통해 반영되는 외적 세계가 일차적임을 승인하는 것이다. 또 정신과 감각 중에서 감각이 인식의 일차적인 단계임을 승인하는 유물론적 인식론이다. 그런데 엘베시우스의 사회이론은 관념론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인민의 비운이란 언제나 법률의 불완전성, 따라서 도덕적 진리에 대한 그들의 무지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41) 여기에는 인민의 처지를 규정하는 사회경제적 생활에 대한 인식이 빠져 있다. 인민의 삶을 규정하는 경제적 조건, 사회의 물질적 삶이라는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 그는 인간의 전형을 개인의 정념과 사회의 이익의 합치에서 찾는다. “선한 인간이란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자기의 습관과 가장 강렬한 정념을 희생하는 사람이 아니라(그러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 그 사람이 거의 언제나 선할 수밖에 없도록 할 정도까지 그의 강렬한 정념이 사회의 이익에 합치되는 사람이다.”42) 개인의 정념이 사회의 이익에 합치되는 사람이라는 것은 당시 봉건제 사회를 불의의 사회로 보고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합치되는 새로운 사회를 주장하는 사회이론, 도덕적 이론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과 사회의 이익의 일치는 봉건제 극복의 이데올로기로서는 유용했지만 사회 내의 계급대립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부르주아지의 이해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부르주아지의 자본축적이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의 일치라는 기치하에 수행되는 것! 엘베시우스의 사회이론은 이러한 경향에 봉사하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는 사유재산을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옹호했다.

또 한 사람의 프랑스 유물론자인 돌바하는 백과전서의 편찬에 참가했다. 그는 세계의 물질성을 승인한다. “현존하는 모든 것의 광대한 집합체인 우주는 어떤 장소에서도 물질과 운동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전체는 원인과 결과의 광대하고 부단한 하나의 연쇄만을 나타낸다.”43) 세계를 물질과 운동으로 파악하고 그것들의 연관관계로서 원인과 결과를 인식하는 것은 유물론적 인식의 초석이라 할 수 있다. 돌바하는 물질과 운동의 통일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심화된 인식을 보인다. “물질은 어디에서 유래했는가 하고 질문한다면, 물질은 언제나 존재해 왔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운동은 어디에서 와서 물질 가운데서 들어갔는가 하고 질문한다면, 동일한 이유로써 물질은 영원히 그 자체로 운동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운동은 물질의 연장·중량·불가입성·형상과 같이 물질의 존재나 본질 그리고 본원적 특성에서 필연적으로 생긴 결과이기 때문이다. … 운동은 물질의 본능에서 필연적으로 나온 존재방식이다.”44) 물질은 언제나 존재해왔다는 것은 물질의 불멸성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운동을 물질의 존재방식으로 파악하는 것은 물질과 운동의 통일성을 공고하게 정립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질의 본원적 속성 그리고 존재방식으로서 운동이라는 관점은 물질과 운동을 분리시켜 사고하거나 아니면 운동은 외부의 힘을 필요로 한다고 보는 기존의 관념을 뒤집고 물질과 운동의 통일성을 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을 통해서 오늘날까지도 유물론의 가장 근본이 되는 물질과 운동의 통일성이 정립되었다.

돌바하는 다른 프랑스 유물론자와 마찬가지로 종교를 비판한다. “종교는 국왕을 인민 위에 군림시키고 인민을 국왕의 권력 밑에 순종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단지 그것만을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불행하다고 인민이 느끼기 시작하자마자, 그때부터 신의 노여움으로 위협하여 그들을 침묵시킨다. 그래서 그들이 불행의 진정한 원인을 발견하고 그들의 화를 해결하기 위해 자연이 그들에게 부여한 약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위해서, 그들의 눈을 하늘로 돌리게 만든 것이다.”45) 이렇게 프랑스 유물론자들은 철학에서 유물론을 무신론으로까지 철저하게 관철하였고 천상의 비판을 지상의 비판으로 전화시켰다.

한국사회에는 볼테르, 루쏘 등의 계몽사상가들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들 프랑스 유물론자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들 유물론자들은 유물론과 무신론을 철저하게 관철시킨 결과 혁명을 직접 말하고 있고 나아가 사회주의 조류로 발전하는 싹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학의 발전사라는 점에서 보면 이들의 철저한 유물론은 이후 맑스, 엥겔스에 의한 새로운 유물론 창시의 역사적 토대가 되는데, 이들 프랑스 유물론과 독일고전철학의 변증법이 직접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원천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단 프랑스 유물론의 한계, 즉, 기계적 측면, 비변증법적 측면은 맑스와 엥겔스에 의한 현실적인 사회운동의 전개 그리고 유물론적 변증법의 정립에 의해 극복되었다고 할 수 있다.

14. 볼테르, 루쏘

볼테르와 루쏘는 18세기 프랑스 혁명을 사상적으로 준비한 사람들이다. 종교에 대한 비판, 봉건제의 억압에 대한 규탄, 혁명의 이론적 기반이 된 사회계약론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볼테르와 루쏘는 일정한 차이가 있는데 볼테르가 귀족적이며 궁정을 무대로 활동했다면 루쏘는 평민출신으로서 민주주의 사상을 전개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볼테르는 《관용론》으로 유명하다. 종교적 광신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사실은 사회를 억누르고 있던 카톨릭 종교권력을 겨냥하고 있다. 《관용론》은 칼라스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볼테르는 스스로 이 사건에 개입하여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이끌어 내었다.46) 칼라스 가족의 아들이 카톨릭 교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취업이 어려운 것을 비관하여 자살한 사건에 대해 마을 사람들이 아들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려는 것을 아버지가 막고서 살해한 것으로 왜곡하여 몰아가서 부당하게 재판을 통해 아버지가 처형된 것이 사건의 요지였다. 카톨릭과 신교의 대립이 이 사건에 깔려 있고 또한 국가와 종교의 관계가 이 사건에 담겨 있다. 볼테르는 사건의 본질이 종교적 광신의 문제임을 간파하고 여론을 조직하여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이끌어 냈다. 이 사건에는 종교가 국가권력을 좌우하는 현실, 종교적 차이가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 등이 담겨 있는데 바로 이 지점을 볼테르가 비판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종교적 차이가 승인되어야 한다는 것, 국가는 종교적 차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종교적 차이에 대해 관용의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볼테르의 주장의 요지이다.

볼테르는 이와 같이 종교적 억압으로 상징되는 봉건제의 질곡에 대해 맞서며 계몽사상을 펼쳤다. 볼테르의 정치적 입장은 계몽적인 군주제였으나 후기에 가면 공화제를 긍정하는 쪽으로 바뀐다. 볼테르의 철학적 입장은 이신론(理神論)이다. 이신론은 신의 본질을 이성으로 파악하는 입장인데 이는 신학과 이성 간의 타협이라 할 수 있다. 볼테르는 신을 우주의 작용원리로 이해한다. “만일 우리에게 모든 결과, 모든 장소, 모든 시간 속에 현존하는 거대한 필연적 작용원인에 대한 관념이 없다면, 우리는 신의 이름을 앵무새처럼 외우는 자가 될 것이다.”47) 즉, 신이라는 개념보다 우주의 작용원인이라는 개념이 일차적이라는 것으로서 이성을 신의 본질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볼테르는 주관적 관념론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우리의 감각은 우리에게 관념을 부여해준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외부에 어떤 대상도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지각을 받아들인다고 말한다.”48) 이는 주관적 관념론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감각뿐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 외부의 대상을 전제하지 않는 감각이라는 것은 오류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볼테르는 의식과 물질이라는 철학의 최고물음에 대해 유물론적 해결의 길을 택한다. “따라서 자연이 나무에 싹을 기르는 것처럼 뇌수에 사상을 기른다는 사실, 우리가 다리의 도움을 빌어 걷는 것처럼 뇌수의 도움을 빌어 사고한다는 사실, 그리고 루크레티우스와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는 사실은 대단히 확실하다. 즉, 나는 단언한다. 정신(우리는 이것을 지능이라고 부른다) 그 속에는 우리의 살아 있는 의식도 이성도 있지만, 그것은 손과 발처럼 인간의 어느 일부에 불과하다.”49) 여기에는 인간의 사고가 뇌수라는 물질의 산물임이 명확히 주장되고 있고, 정신 또한 손과 발처럼 인간의 어느 일부에 불과하다는 유물론적 사상이 제출되고 있다. 이렇게 유물론적 입장을 택한 볼테르는 뉴튼 물리학의 보급을 촉진시키기도 했다. 그리하여 “자연에 있어서 모든 것은 운동 속에 있으며, 또한 모든 것이 작용·반작용하고 있다”50)고 하였다. 또한 볼테르는 원인과 결과 관계의 승인, 결정론적 세계관을 옹호하기도 했다.

볼테르가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이익과 희망을 반영했다면 루쏘의 민주주의적 경향은 평민적 입장을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루쏘는 디종 아카데미에 《학문과 기술의 진보는 습관과 풍속을 순화하는 데 공헌하는가?》라는 논문을 응모하여 당선되었는데 이를 통해 사상가로 등장하였다. 루쏘의 주요 저작은 《인간불평등 기원론》,《사회계약론》,《에밀》등인데 불평등의 기원으로서 사유재산의 문제, 사회와 국가의 구성원리로서 약정, 그리고 당시의 종교적 교육에 반대하는 교육론 등이 담겨 있다.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루쏘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평등하였다고 주장한다. “내가 이같은 원시상태의 가정에 대해서 이처럼 길게 말한 것은 오래된 오류와 뿌리 깊은 편견을 깨뜨려야 하기 때문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뿌리까지 파고들어 우리 작가들이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현실성과 영향력이 이 상태와 얼마나 거리가 먼지 참된 자연상태에서 찾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51) 이는 불평등이 자연적인 것이라는 기존의 주장에 반대하여 자연상태에서는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루쏘는 원시상태에서 불평등, 지배와 복종의 불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지만 심지어 종속과 지배가 무엇인지 이해시키기도 힘들 미개인에게 이것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 따 놓은 과일, 그가 잡아놓은 사냥감, 그의 은신처인 동굴을 가로챌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그 사람을 복종시키는 데 이를 것이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의존의 고리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 세부사항을 더 나열할 필요도 없이 종속관계란 상호의존과 서로를 결합시키는 필요에 의해서만 형성되므로, 한 사람을 다른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태에 미리 놓아두지 않고서 그를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52) 상호의존이 전제되지 않는 원시상태에서 지배와 종속, 불평등은 불가능했다는 것이 루쏘의 논리이다. 이러한 주장은 실증적이라기보다는 논리적 추론에 의한 것인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루쏘의 이러한 주장은 불평등의 기원이 사회의 형성, 문명의 발생과 궤를 같이 했다는 다음 주장의 근거로 삼기 위함이다. “이러한 초기의 진보 덕분에 인간은 빨리 진보했다. … 뒤이어 오두막집에 점토와 진흙을 바를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는 바로 가정의 확립과 구별을 형성하고 일종의 소유개념을 끌어들인 최초의 혁명시대였다.”53) 원시상태에서 자신의 오두막 건축, 그리고 가정의 형성을 통해 소유개념이 생겨났다는 추론이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의 관점에서는 부정확하다. 루쏘는 당시 원시사에 대한 자료의 부족으로 씨족단계의 사회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원시시대에서 문명사회로의 이행 전에 즉, 소유개념의 발생 전에 씨족 단계의 사회가 존재했다. 공동소유, 씨족 중심의 혈연관계가 그 사회의 특징이었는데 당시 부부 중심의 가족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유개념, 사적 소유의 발생 전에 인류는 수천 년에 걸쳐 원시공동체 사회를 거쳐 왔던 것이다.

루쏘는 이렇게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해가 있지만 불평등의 발생을 사유(私有)개념의 발생과 연관시킨다는 점에서는 정확하다. “하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한 사람이 두 사람 몫의 식량을 가지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바로 평등은 사라지고 사유의 개념이 도입되고 일은 꼭 필요한 것이 되며 드넓은 숲은 인간의 땀으로 물을 줘야하는 우스꽝스러운 들판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들판에서 곧 노예제도와 빈곤이 싹텄고 수확과 더불어 더 커져 갔다.”54) 여기서 루쏘는 불평등의 원인을 사유개념의 도입에서 찾고 있는데 이는 추론이지만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다. 또한 루쏘는 사유재산의 발생에서 노예제와 빈곤의 발생을 보았는데 소유가 빈곤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본다는 점은 변증법적 접근이다. 엥겔스는 루쏘의 《인간불평등 기원론》을 변증법의 걸작이라고 했는데 루쏘의 접근방식에 변증법적인 측면이 있다는 평가일 것이다. 루쏘는 소유의 기원에 대해 노동을 들고 있다. “노동 이외에 다른 곳에서 사유의 개념을 생각하기가 불가능한 만큼 이 기원은 더 자연스럽다. … 자신이 애써 일군 땅의 산물에 대해 경작자에게 권리를 주므로 결과적으로 내용물에 대해 그에게 권리를 주는 것은 노동뿐이다. 이런 일이 계속적인 점유를 만들어내고 쉽게 사유권으로 변한다.”55) 최초에는 사유가 아니라 점유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점유는 선점자의 권리로 인정받는 것인데 노동을 통해 경작하면 점유권이 있는 것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점유는 소유와 다른데 소유는 배타성, 항구성이 있는 반면 점유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점유는 그것의 지속을 통해서 소유권으로 전화할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고 루쏘는 이러한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루쏘는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불평등이 자연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비판, 불평등의 원인으로서 사유재산의 문제 등을 제기했고 그 과정에서 역사적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타당한 주장을 했고 사유재산의 신성시와 같은 당시 부르주아들의 주장과는 거리가 있었다.

루쏘의 《사회계약론》은 홉스부터 이어지던 사회계약 사상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루쏘는 ‘약정’을 권리의 기초로 삼는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지배할 권한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힘은 어떤 권리도 만들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합법적 권리 전체의 기초로 남는 것은 따라서 약정들이다.”56) 이렇게 약정 혹은 계약을 권리의 기초로 삼는 것은 민주주의적이면서도 부르주아적이다. 이러한 관점은 많은 계몽사상가들의 사회계약사상과 동일하다. 그런데 루쏘의 사회계약사상의 특징은 일반의지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만일 사회적 협정에서 본질적이지 않은 부분을 떼어 내 버린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말로 환원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인격과 자신의 권능 모두를 공통적으로 일반의지라는 지상(至上)의 인도자 아래 위치시킨다. 그리고 우리는 각 구성원을 전체와 불가분한 부분인 한 덩어리로 받아들인다.’”57) 여기서 일반의지는 사회계약을 통해 형성되는 권력을 산출하는 주체, 본질을 의미한다. 여기서 일반의지의 개념을 조금 더 살펴보자. “주권은 양도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이유로, 주권은 분할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지는 일반적이거나 일반적이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58) 일반의지라는 개념을 통해 루쏘는 주권의 양도불가능성, 분할불가능성을 도출하고 있다. 주권의 분할불가능성은 권력분립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루쏘는 국가와 구별되는 부분적 사회를 부정한다. “따라서 일반의지가 잘 표출되기 위해서는 국가 내에 부분적 사회가 없어야 하고, 각 시민이 오직 자기 자신의 의견만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59) 국가 내에 부분적 사회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국가와 구별되는 시민사회의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루쏘가 역사적으로 볼 때 부르주아 혁명의 결과였던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라는 인식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루쏘가 일반의지라는 개념을 통해 국가 혹은 사회의 구성을 규정짓는 것은 국가 혹은 사회의 형성에 대한 역사적 접근과는 배치된다. 그러나 18세기 당시 일반의지라는 개념은 봉건적 질곡에 맞서서 민중들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모든 민중이 사회계약의 주체이고 이들의 일반의지가 국가와 사회의 본질이라는 주장은 혁명의 논거가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루쏘는 다른 사회계약론자와 달리 민중에 대한 고찰에 상당한 부분을 할애한다. “그도 그럴 것이 민중은 단지 야만인의 상태에 있는 한은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지만, 시민적 태엽이 약화된 때에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란들은 민중을 파괴할 수 있다. 혁명들이 민중을 다시 세울 수 없게끔 말이다. 그리고 그 쇠고리들이 깨져버리자마자 민중은 지리멸렬해지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부터 그들에게는 해방자가 아닌 지배자가 있어야만 한다.”60) 여기서 루쏘는 분명히 민중을 혁명의 동력으로는 파악하되 스스로 지배자가 될 수 있는 위치로 보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루쏘의 민중에 대한 입장은 현대 사회주의에서 민중을 바라보는 입장과는 차이가 있다. “어떤 민중이 따라서 입법에 딱 맞는 것일까? 기원, 이해관계 또는 약정의 일치에 의해 이미 연결되어 있지만, 참된 법의 속박을 아직 전혀 짊어지지 않았던 민중, 깊이 뿌리내린 관습이나 미신이 없는 민중, … 다른 민중 없이 지낼 수 있고 다른 민중도 그 민중 없이 지낼 수 있는 민중,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민중, 끝으로 옛 시대의 민중의 꿋꿋함과 새 민중의 순종을 결합하는 민중 등이다.”61) 루쏘의 민중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소부르주아적 민중상을 말하는 것이다. ‘부유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민중, 꿋꿋함과 순종을 결합하는 민중’ 등의 상은 소부르주아를 이상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루쏘 당시에 자본과 노동의 대립, 역사적 계급으로서 노동자계급의 상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고 노동자계급이 역사적으로 등장한 것은 프랑스 혁명 후인 19세기 초, 중엽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일반의지에 따라 주권의 분할불가능성을 주장한 루쏘는 구체적으로 입법권과 행정권의 결합을 주장한다. “법을 만드는 사람은 어떻게 법이 집행되어야 하고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 따라서 행정권이 입법권에 결합된 구성보다 더 나은 구성은 있을 수 없을 듯하다.”62) 이렇게 권력분립을 부정하는 것은 루쏘의 사회계약론이 일반의지라는 개념을 축으로 구성되어 있고 루쏘의 사상이 민주주의에 가까운 측면이 자유주의적인 권력분립을 부정하게 하는 것이다. 루쏘는 이러한 사회계약이 깨질 수도 있고 사회계약이 깨지면 복종의무가 사라지는 것으로 파악한다. “정부가 주권을 찬탈하는 그 순간, 사회협정은 깨지고 자동적으로 자연의 자유를 회복한 모든 보통 시민들은 복종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종을 강제 당한다.”63) 이렇게 사회계약이 깨지면 복종의무가 사라진다는 루쏘의 주장은 홉스 등과 다른데 홉스는 사회계약의 결과 국가가 성립하면 그것은 신성불가침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즉, 루쏘의 사회계약은 민주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홉스는 절대군주제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루쏘는 또한 《에밀》이라는 교육론을 썼는데 이 책은 당시 금서가 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에밀》에서 주장한 교육론은 인간교육, 시민교육으로서 당시 지배적인 종교적 교육과 대립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종교에 대한 교육을 교육의 제일의 목적과 원리로 삼는 것에 대해 루쏘는 과감히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에밀》에서 루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연의 질서 안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면, 인간으로서 성향에 맞게 교육받은 한 어떠한 직업도 가질 수 있고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64) 이렇게 루쏘는 과감하게 평등교육을 선언했는데 이는 당시의 신분제 국가, 신분제에 기초한 종교교육에 대한 반란이었다. 루쏘는 ‘자연의 질서에 따라 아이를 가르쳐라’고 주장했는데 사회가 아닌 자연을 강조했다. “사회가 인간을 약화시킨다. 사회는 개인이 스스로의 힘에 대해 지닌 권리를 빼앗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욕망에 따른 능력 자체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이 능력의 약화가 욕망의 증대를 불러온다. 어른에 비해 아이가 약한 이유도 이와 같다. 어른이 강한 것은 아이보다 힘이 세어서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자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65) 사회가 인간을 약화시킨다는 관점은 교육의 준거로서 사회가 아니라 자연을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상태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것인데 이를 교육론에까지 관철하는 것이다. 루쏘의 교육론은 기본적으로 유물론적인 인식을 기초로 하고 있다. “대상과의 관련에 대한 이해 없이 관념은 형성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소리나 형태, 감각 같은 것들은 기억하지만 관념은 기억하지 못하며, 더구나 그 관념들 간의 관계는 더욱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66) 대상과 관념의 관계에서 대상을 일차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유물론적 인식론인데 루쏘는 교육에서 바로 이러한 유물론적 인식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대상과 관련 없이 관념을 이해 못하는 것은 단지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대상과의 관련을 갖지 않는 관념은 내용 없는 기호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관념론적 인식은 공허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교육에 있어서 루쏘는 유물론적 인식의 필요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고 이는 당시의 종교교육의 원리에 정반대되는 것이기도 했다. 루쏘는 또한 모사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과학적인 것이다. “공간이나 물체의 크기를 판단하기 위해선 그 대상의 생김새를 먼저 알아야 하는데, 그 점을 숙지시키기에는 모사만한 것이 없다.”67) 모사는 유물론적 인식론인 반영론의 핵심개념인데 루쏘는 우리의 인식이 대상의 반영, 모사라는 점에서 모사 개념을 교육에 적극 도입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볼테르와 루쏘의 계몽사상은 18세기 말의 프랑스 혁명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볼테르가 귀족적 입장에서 계몽사상을 펼쳤다면 루쏘의 사상은 평민적인 것이었고 이후 프랑스 혁명에서 자코뱅파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루쏘의 민중에 대한 입장은 소부르주아를 전형으로 한 것이었다. 이는 18세기 당시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사회적으로 첨예화되지 않고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 제 3신분으로 묶여져 있었던 것과 연관이 있다.

15. 칸트

칸트는 18세기에 활동했던 독일의 철학자이다. 칸트는 이성비판으로 유명한데 이는 이성이라는 인식의 도구를 먼저 고찰해야 한다는 이전 시기 철학의 흐름을 이어받은 것이었고 또 18세기가 이성의 세기로 불린 것과 관련이 있다. 칸트는 수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독일의 한 작은 도시였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그 대학에서 강사, 교수, 학장으로 활동했고 그 지방에서 시외로 나가지 않고 평생을 마쳤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으로 비판철학의 시기라 불리어지던 시기 이전에 자연과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조석마찰(潮汐摩擦)에 관한 논문은 조석에 의한 마찰로 인해 지구의 회전이 느려진다는 가설을 제출했는데 이는 지구의 운동, 나아가 천체의 운동이 역사적으로 변화, 발전한다는 사상을 제기하는 것이었고 태양계의 영원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또한 칸트는 칸트-라플라스 가설로 유명한데 태양계가 생성될 때 처음에는 분산된 물질 덩어리에서 인력과 척력의 작용으로 소용돌이 운동이 발생하여 태양계가 생성되었다는 가설을 제출하였다. 이는 뉴튼의 만유인력 이론의 한계, 즉, 태양계의 운동이 처음에 어떻게 생성되었는가라는 의문에 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칸트는 이러한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에서 형이상학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전환하는데 칸트의 철학사상은 이른바 비판철학으로 불리어진다. 칸트의 주요저서에서 《순수이성비판》은 인식론에 해당하고《실천이성비판》은 윤리학에 해당하며 《판단력비판》은 미학과 목적론을 다루고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목적을 형이상학의 혁신에 두고 있다. “이제까지의 형이상학의 수행방법을 바꾸려는 기도, 더욱이 기하학자나 자연과학자의 범례에 따라 형이상학 전반에 혁신을 꾀함으로써 그렇게 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이 사변적 순수이성비판이 할 일이다. 이 순수이성 비판은 하나의 학문의 체계 자체는 아니다.”68) 형이상학의 혁신이라는 칸트의 의도 혹은 목적은 칸트의 비판철학 전체에 관철되는 큰 흐름이다. 칸트의 이러한 의도는 18세기 후반 당시에 기존의 형이상학이 과학과 유물론의 발전에 의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는 사정과 관련된다. “이들 교조적인 형이상학의 모든 요구를 포기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조적 수행방법에서 피할 수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이성의 자기모순들로 인해 이제까지의 모든 형이상학의 권위는 이미 오래전에 박탈되었기 때문이다.”69) 형이상학의 권위가 이렇게 무너진 것은 형이상학적 사고의 뿌리에 해당하는 신학의 권위가 무너지고 있었다는 것과 관련된다. 불변성, 고정성, 영원성을 강조하는 형이상학은 사회의 역사적 발전 자체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고 중세의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는 스콜라학은 송두리째 권위가 부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서 칸트는 형이상학을 혁신함으로써 형이상학을 구원하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했다. 그리하여 칸트의 철학은 형이상학적 사고를 담고 있으면서도 중세의 스콜라적인 내용이 많이 제거되어 있고 또 과학의 발전을 수용하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칸트 철학은 혁신된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

칸트의 철학이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그가 선험성의 개념을 수용한 데서 확인된다. “경험이 개념에 따른다고 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경험 그 자체가 일종의 인식방법으로서 대상이 주어지기 이전, 내 속에 그것의 규칙이 선험적으로 전제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며, 경험의 모든 대상이 필연적으로 그 규칙에 따르고, 일치해야 하는 선험적인 개념에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보다 쉬운 해결방법이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70)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 선험적 관념이 있다는 것인데 이는 이전 철학자들의 생득관념 등과 같은 맥락이다. 이는 경험 이전에 선험적 개념이 있어야만 경험을 통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관념론적인 관점이다. 개념이 없더라도 인간은 무수한 경험을 하고 느끼고 생각한다. 개념 혹은 체계적인 인식은 경험에 의해 자극되고 발전하는 것이 인식의 순서이다. 따라서 칸트의 접근은 앞뒤가 바뀐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칸트의 인식론은 관념론적 인식론이다. “이와는 달리 우리가 사물이 주어지는 대로 표상하고, 또 이 표상이 대상 자체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대상이 현상으로서 우리의 방식에 따른다고 가정한다면 이런 ‘모순은 해소’된다.”71) 우리의 인식의 표상이 대상에 따르지 않고 거꾸로 대상이 우리의 방식에 따른다는 것은 대상보다 우리라는 주관을 일차적으로 사고하는 주관적 관념론의 인식이다. 대상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이 성립한다는 것은 유물론적 인식임에 반해 대상이 우리의 방식에 따른다는 것은 주관적 관념론의 인식이다.

칸트는 경험의 대상으로 사물과 사물 자체를 구분한다. “우리의 비판은 경험의 대상으로서 사물과, 사물 자체로서의 사물을 구별했다. 만일 이런 필연적 구별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과성의 법칙과 또한 인과성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 자연의 기계성이 작용인으로서 모든 사물 일반에 전면적으로 타당해야 할 것이다.”72) 경험의 대상으로서 사물과 사물 자체로서의 사물을 구별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사고이다. 즉, 경험의 대상으로서 사물인 현상과 본질인 사물 자체 사이에 형이상학적 단절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현상은 본질적이고 본질은 현상한다고 했다. 현상이 본질적이기 때문에 현상을 통해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고 본질은 현상하기 때문에 본질에 대해 과학적 인식의 가능성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현상과 본질의 이러한 변증법적 연관에 대해 전혀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 칸트의 주관적 관념론에서 인식 가능한 것은 감각에 의해 확보되는 현상일 뿐이고 현상에 내포된 본질은 인식 불가능한 것이 된다. 그리하여 사물자체 혹은 물(物)자체는 인식불가능하다는 칸트의 불가지론이 성립한다. 이렇게 사물 자체가 인식 불가능하다는 칸트의 사고는 형이상학적 사고와 주관적 관념론의 인식론이 결합된 산물이다. 이러한 칸트의 형이상학적 사고는 자연의 인과성과 인간의 자유를 대립시키는 것으로 나아간다. “바로 동일한 의지가 현상(보이는 행위)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자연법칙을 따르는 것이므로 이럴 때에 ‘자유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 자체에 속하는 것으로서 자연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므로 자유라고 생각되고, 여기에 어떤 모순도 나타나지 않는다.”73) 자연 혹은 현상에서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지배하므로 자유의 개념이 성립할 수 없음에 반해 사물 자체는 자연법칙을 따르지 않으므로 자유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물자체 혹은 본질의 영역은 자연의 영역이 아니라 선험성의 영역이고 따라서 자유의 개념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러한 칸트의 사고는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될 수 있다. 첫째, 사물 자체가 객관적 실재 혹은 자연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은 현상과 본질을 부당하게 분리시키는 형이상학적 사고이며 둘째, 이러한 형이상학적 사고로 말미암아 필연의 영역인 자연적 인과성과 자유 개념을 단절적으로 대립시키고 있는 것이고 그에 따라 자유라는 개념은 아무런 현실적 관계, 물적 토대가 없게 되고 단지 인간의 관념의 영역으로서만 규정된다는 점이다. 이는 자유에 대한 관념론적인 사고이며 또 자유와 필연을 단절시킨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 사고이다.

그러나 칸트는 형이상학의 혁신을 꾀하면서 이를 통해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을 넘어설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이성 비판을 통해서만이 일반적으로 유해할 수 있는 ‘유물론’·‘숙명론’·‘무신론’·‘자유사상적 무신앙’·‘광신’·‘미신’과 같은 사상에서부터, 학파에게는 위험하지만 대중에게는 전파되지 않는 ‘관념론’이나 ‘회의론’ 같은 사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근절할 수 있다.”74) 이렇게 칸트는 형이상학의 혁신, 소위 이성비판을 통해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을 넘어서려 했다. 그러나 칸트의 형이상학의 혁신의 결과는 불가지론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감각에 의해 파악되는 현상에 불과하고 본질에 해당하는 사물 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그러하다. 이는 출발점 자체의 오류, 형이상학의 혁신이라는 출발점 자체가 비과학적이기 때문이었다. 칸트의 형이상학의 혁신은 신학의 권위가 무너지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유물론적 인식이 확대되어가던 상황에 대한 일종의 반동이었기 때문에 불가지론이라는 초라한 결과로 귀착될 수밖에 없었다.

칸트는 자신의 체계를 수립하면서 우선적으로 감각, 감성의 이론을 세운다. 여기서 그는 공간과 시간을 객관적 사물의 형식이 아니라 단순한 감성의 형식, 주관이 현상을 인식하는 형식으로 귀착시킨다. “공간이라는 표상은 경험을 통해서 외적 현상의 관계들로부터 빌려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외적 경험 자체가 오로지 그 표상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 하겠다.”75) 공간이 외적 현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관에 있는 공간이라는 관념이 현상의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저 산의 높이가 400m라는 인식은 산이 400m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인식하는 것인가 아니면 산은 아무런 공간적 실체가 없지만 우리의 인식에 공간이라는 선험적 개념이 있기 때문에 산이 400m라는 인식이 가능한 것인가? 여기서 칸트는 후자의 길을 따르고 있는데 이는 공간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칸트 철학의 비과학성은 여기서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공간의 객관성을 인정하면 사물 자체의 객관적 실재성을 승인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사물 자체는 인식될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자신의 주장을 강변하기 위해 공간 개념의 선험성의 근거로 기하학을 들고 있다. “기하학은 공간의 속성들을 종합적으로, 또한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학문이다.”76) 수학과 기하학은 관념론자들이 선험적 인식의 근거로 빈번하게 들고 있는 사례이다. 그러나 수학과 기하학은 인류의 역사에서 농업, 수리, 건축 등의 현실의 삶 속에서 발전한 학문이다. 이 과정에서 숫자라는 개념, 도형이라는 개념은 현실의 무수한 양(量)과 모양에 대한 반복적 인식을 통하여 성립된 것이다. 즉, 수학과 기하학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장구한 경험의 축적의 산물이다. 이렇게 비과학적인 선험성이라는 인식은 관념론자들이 인간의 이성을 신비화시키기 위해 고안한 것이다. 이성만이 인간을 자연, 혹은 동물과 구별을 짓는 표지이고 이러한 인간의 이성의 특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아예 선험적 인식, 혹은 순수이성이라는 관념을 성립시키는 것인데 이는 비과학적, 비역사적인 관념론적 헛소리이다. 인간의 이성, 인식능력은 장구한 역사 발전의 산물이며 선험적 인식은 존재한 적이 없다. 그러면 존재한 적도 없는 선험적 인식이라는 관념은 어떻게 성립했는가? 그것은 인간의 인식을 신비화시켜서 종교적 관념을 이끌어내던 신학적 사고에 의해 조장된 것이다. 예를 들면 신적 관념은 경험이 아닌 선험적인 것이라는 주장이 그렇다. 신을 경험한 사람은 없기 때문에 나오는 주장, 즉, 신에 대한 관념은 선험적인 것이라는 신학적 주장이 전형적으로 그러하다. 이렇게 선험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주장은 신학적 사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고 칸트는 이러한 관념을 극한으로 밀어 부쳐 공간 관념 또한 선험적이라는 헛소리를 한 것이다.

그러면 시간에 대한 칸트의 주장을 들어보자. “시간은 모든 직관의 기초에 놓여 있는 필연적인 표상이다. 우리는 현상을 시간으로부터 제거하는 데에는 아무런 곤란이 없을지 몰라도 시간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 시간은 따라서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전적으로 시간에서만 현상의 현실성이 가능하다.”77) 시간에서만 현실성이 가능하다는 것은 옳은 주장이지만 시간 자체를 제거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선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변화의 흐름, 계기성을 가리키는 시간 개념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외적 세계에 대한 무수한 관찰의 결과 성립한 개념이다. 현실적으로 지구가 계절의 변화를 하기 때문에 일년이라는 시간 개념이 성립하는 것이지 일년이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에 지구가 계절변화를 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가 이렇게 시간에 대해서, 그리고 공간에 대해서 그것의 객관성을 부정하고 단순한 선험적 관념으로서 주관의 인식의 형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현상과 사물 자체를 형이상학적으로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사물 자체에 대한 인식불가능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사물 자체의 객관성을 부정해야만 하고 따라서 공간과 시간이 사물 자체의 형식이 아니라 주관이 현상을 인식하는 주관적 틀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의 이런 주장은 주관적 관념론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공간과 시간에 대해 주관적 관념론의 인식을 보이는 칸트는 진리의 개념에 대해서도 기존의 인식을 전복시킨다. 기존에 진리의 개념은 ‘인식과 대상의 일치’였고 이는 유물론적 개념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만일 진리가 인식과 그 대상과의 일치에 있다고 하면, 그로써 이 대상은 다른 대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인식이 설사 다른 대상에 대해 충분히 타당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인식은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보편적 기준은 그 대상의 구별에 관계없이 모든 인식에 타당해야 할 것이다.”78) 즉, 인식과 대상의 일치를 진리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진리는 모든 대상에 타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듯 보기에 그럴듯하다. 진리라고 한다면 언제나, 어디에서나 타당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것이 보편적 진리가 아닌가? 그러나 이렇게 진리의 개념에 보편성을 포함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정반대로 주장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진리 개념은 ‘진리는 구체적이다’는 것이다.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성립하는 진리 개념은 없고 인식과 대상의 일치를 구체적으로 정립하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과연 대상에 관계없이 언제나 올바른 것이 진리인가, 아니면 구체적으로 대상에 일치하는 인식이 진리인가? 신학에서는 종교적 교리는 신의 말씀이므로 항상 올바르다고 주장한다. 즉, 형이상학에서 진리의 개념은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진리는 무엇인가? 어떤 대상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본질까지 파고들어서 법칙성을 발견할 때 진리를 획득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러한 법칙성도 언제나 타당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조건 속에서만 타당한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점에서 진리는 대상과 인식의 일치이며 또 구체적인 것이다. 칸트가 이렇게 보편적 진리의 기준을 주장하는 것은 선험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사고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칸트의 형이상학이 중세의 형이상학과 다른 점은 혁신된 형이상학이라는 점이다. 즉, 칸트는 당시까지 발전한 과학과 철학의 성과를 반영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범주의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정립된 10여 가지의 범주들이 칸트에게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칸트는 범주의 종류를 분량, 성질, 관계, 양상으로 나누고 각각의 범주에 하위 범주로 세 가지를 담고 있다. 분량의 범주에는 하위범주로서 단일성, 다수성, 전체성이 있고 성질의 범주에는 하위범주로서 실재성, 부정성, 제한성이 있고 관계의 범주에는 속성과 실체, 원인성과 의존성, 상호성이 있고 양상의 범주에는 가능성-불가능성, 현존성-비존재, 필연성-우연성이 있다. 이러한 칸트의 범주론은 변증법의 전제가 되는 것들이다. 이러한 범주 자체가 변증법은 아니지만 그 범주들을 상호 연관시킨다면 변증법의 법칙과 개념들로 발전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렇게 범주론을 제기했지만 형이상학적 사고의 제약 때문에 범주들의 상호관계에 대한 전면적인 분석과 범주들의 발전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따라서 변증법의 완성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단지 변증법의 추측만을 하고 있다. “변화를 그 시간적 형식 면에서 본다면, 변화의 법칙을 선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명백해진다.”79) 여기서 변화의 법칙은 곧 변증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변화의 법칙이라는 개념에는 도달했지만 변증법에 대해서는 궤변 혹은 가상이라고 본다. “이 변증론은 인간 이성에 고착되어 있어서 도저히 제거할 수 없고, 우리가 그 환영을 폭로한 후에도 그 기만을 멈추지 않고 인간의 이성을 끊임없이 순간적인 혼란에 빠뜨리므로, 그때마다 이것을 제거할 필요가 있는 그런 것이다.”80) 이렇게 칸트는 변증법의 전제가 되는 범주를 제기하고 변증법을 추측하고 있지만 변증법을 인간 이성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으로서 제거의 대상으로 본다. 선험적 인식, 순수이성을 으뜸으로 치는 칸트에게서 변화의 법칙, 상호연관, 모순 등의 개념은 혼란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즉, 철학의 역사에서 객관적으로 변증법으로 나아가고 있던 칸트는 형이상학의 장벽으로 인해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칸트의 비변증법적 사고는 모순을 부정하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가능성의 도식이란 각종 표상들의 종합을 시간의 제약 일반에 일치시키는 것을 말하며(예컨대 상호 대립된 것은 하나의 사물 속에서 공존할 수 없으며 단지 서로 잇따라 있을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한 사물의 표상을 어떤 시간에 한정하는 것을 말한다.”81) 상호 대립된 것의 한 사물 내에서의 공존이야말로 변증법적 모순개념인데 칸트는 이를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변화의 원인, 동력으로서 모순을 부정하고 변화의 원인은 불변하는 것에 있다는 형이상학적 주장을 한다. “변화의 원인은 불변적인 것에서 찾아야 하므로, 변화는 오로지 현상의 어떤 규정을 따른 것이며, 또한 현상의 규정을 가르쳐 주는 것은 경험뿐이기 때문이다.”82) 이러한 주장은 전형적으로 형이상학적 주장인데 불변적인 것 즉, 형이상학적 개념인 실체는 불변적인 것으로서 변화의 원인은 실체에 있다는 주장이다.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모순 개념을 부정하여 변화의 동력을 파악하는 데 실패하고서는 이렇게 실체, 불변적인 것이 변화의 원인이라는 주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실체를 규정한다. “실체의 고정불변성의 원칙. 현상이 어떻게 변화하더라도 실체는 고정불변하며, 자연에서 실체의 분량은 증대되지도 감소되지도 않는다.”83) 이렇게 칸트는 형이상학의 초석이 되는 실체 개념을 전면적으로 긍정하고 있다. 로크가 실체 개념을 신, 자연, 정신으로 분해하여 실체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에 비추어보면 실로 철학사에서의 반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체의 분량이 증대, 감소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과학발전의 성과를 반영하는 것이다. 즉, 데카르트 등이 주장했던 물질과 운동의 통일성, 운동량 보존의 사상이 물질의 불멸성에 대한 관념을 조장했는데 이러한 점이 칸트에게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이렇게 실체 관념을 승인한 결과 칸트는 변화의 관념을 매우 협소하게 파악한다. “이런 고정불변성에 의거해서 또한 ‘변화’의 개념도 수정된다. 생성과 소멸은 생성하거나 또는 소멸하는 것의 변화가 아니다. 변화란 동일한 대상의 한 실재적 존재 방식에 뒤이어서 따라오는 또 다른 실재적 존재방식이다. 그러므로 변화하는 것은 모두 ‘항존적이며 바뀌는 것은 상태’ 뿐이다.”84) 생성과 소멸이 변화가 아니라는 것은 실체라는 관념 때문이다. 실체는 생성, 소멸하는 것이 아니고 변화는 실체의 변화이므로 따라서 생성과 소멸은 변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계와 물질을 고정 불변의 것으로 파악하는 개념인 실체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유래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인데 칸트가 형이상학적 실체 개념을 승인함에 따라 변화의 개념 자체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과 변증법 간의 이러한 긴장관계는 칸트의 이율배반(二律背反)이라는 인식에서 정점에 달한다. 칸트는 이율배반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순론은 결코 일면적 주장에는 관여하지 않으며, 이성의 일반적 원칙을 다만 그 상호모순과 그 원인의 면에서만 고찰한다. 선험적 모순론이란, 순수이성의 이율배반 및 그 원인과 결과에 관한 연구다. 우리가 우리의 이성을 지성의 원칙을 사용하기 위해 경험의 대상들에 적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확대하고자 할 때 궤변적인 명제가 생겨난다.”85) 칸트는 모순 혹은 이율배반을 서로 대립되는 두 주장을 양립시켜서 모순에 빠뜨리는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그것은 궤변이라고 보는 것이다. 칸트가 이율배반의 예로 들고 있는 것은 다음의 네 가지이다. 첫째, 이 세계, 우주는 무한한가, 아니면 유한한가, 둘째, 세계는 단순체(예를 들면 원자)의 합성물인가 아닌가, 셋째, 세계에는 인과성만 존재하는가 아니면 자유의지도 존재하는가, 넷째, 세계에는 단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즉, 신)이 존재하는가 아닌가. 이렇게 상호대립하는 주장을 양립시키고서 칸트는 각각의 주장에 대해 정립과 반정립으로 나누면서 그 근거를 들고 있고 정립과 반정립의 각각의 주장이 모두 성립한다고 보아 결국에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주, 세계는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무한한가, 아니면 시간적으로 처음이 있고 공간적으로 유한한가? 이러한 주장에 대한 답변의 과정은 곧 세계관의 문제가 되는데 이를 칸트는 우주론적 이율배반이라 한다. 이러한 문제의 양립을 이율배반이라고 보는 칸트는 결국은 그 진실 여부를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아 불가지론에 귀착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칸트가 모순은 곧 이율배반 혹은 궤변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칸트는 대립하는 두 주장을 양립시켰다. 그리고 그러한 양립을 가리켜 모순이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칸트의 모순론은 헤겔의 모순 개념과는 다르다. 헤겔은 대립물의 통일을 모순이라고 보았는데 칸트의 모순 개념은 대립의 양립만 있지 통일은 없다. 통일이 없기 때문에 대립만 있고 결국은 이율배반이고 궤변이라는 주장에 귀착하는 것이다. 칸트 철학과 헤겔 철학의 근본적 차이는 바로 이 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칸트는 변증법의 전제를 마련하고 완성의 직전 단계에 도달했지만 멈추어 버렸다면 헤겔은 ‘개념의 자기운동’으로서 관념론적이었지만 ‘운동’을 사고하고 운동, 변화의 법칙으로서 변증법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칸트는 이율배반이 철학적 문제제기였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율배반의) “물음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이성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라고 겸손하게 고백하고, 그 범위가 좁은 것을 한탄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과해진 이런 이성의 문제들을 어쨌든 비판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86) 이율배반의 물음을 해결하는 것이 우리의 이성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불가지론을 말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해결의 책임을 말하는 것은 칸트 자신이 한 것은 문제제기였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칸트는 철학사에서 획을 긋는 문제제기를 했으며 이것을 해결하는 것은 이후에 이어지는 헤겔, 맑스 등의 몫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계는 시간적으로 영원한가 아닌가, 공간적으로 유한한가, 무한한가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율배반이 아니며 인류의 역사적 발전 속에서 서서히 해결되어가는 문제이다. 예를 들면 현대 과학에서 쏘련이 무너지고 난후 빅뱅이론이 득세했다. 우주가 어느 시점에서 한 점이 폭발하여 발생했고 지금도 여전히 팽창하고 있다는 빅뱅이론은 비과학적이고 신학적이다. 쏘련은 당시에 공간적 무한성과 시간적 영원성을 주장했었다. 유물론의 입장에서 빅뱅이론의 반박은 가능한데 그것은 공간과 시간을 물질의 존재형식으로 보는 것을 기초로 한다. 에너지 보존 및 전화의 법칙에 의해 확증되고 있는 물질의 불멸성은 빅뱅이전에도 물질이 존재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고, 따라서 물질의 존재형식인 시간이 존재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우주의 생성을 말하는 한 점의 폭발 이전에도 시간은 존재했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런 입장에 서면 우주의 나이가 어떻느니 하는 주장은 허황된 것이다. 이와 같이 칸트의 문제제기는 이율배반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 속에서 서서히 극복되어가는 문제제기라 볼 수 있다.

《순수이성비판》이 인식론의 문제였다면 《실천이성비판》은 윤리학의 문제이다. 칸트는 윤리학의 문제에서 자유의 개념을 주춧돌로 삼는다. “자유의 개념은, 그 실재성이 실천이성의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증명되는 한, 순수이성의, 그리고 사변이성까지도 포함한 모든 체계의 주춧돌이다.”87) 칸트가 이렇게 자유의 개념을 윤리문제의 초석으로 삼는 것은 자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윤리적 책임성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불가항력의 강요에 의해 사람을 죽이거나 물건을 훔쳤다고 했을 때 그 사람에게 윤리적 책임성을 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윤리성에 대한 근대 부르주아지의 인식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선험성, 순수이성을 인식론의 초석으로 삼았던 칸트는 윤리의 문제, 실천의 문제에서도 선험성의 우위를 주장한다. “실천 법칙들은 전적으로 객관적 필연성을 가질 뿐이지 주관적인 필연성을 가지지 않으며, 또 반드시 선험적인 이성에 의해 인식될 뿐이지 경험에 의해 인식되지는 않는다.”88) 여기서 실천법칙은 실천의 문제를 결정하는 법칙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으며 이는 다름 아닌 윤리의 문제를 결정하는 법칙이 선험적으로 인식된다는 주장이다. 즉, 윤리의 문제는 현실의 삶에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선험적 인식에 의해 주어진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격언으로 나아간다.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인 법칙 수립이라는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89) 인간 자신의 실천을 결정하는 준거가 인류 보편적인 법칙, 입법의 원리로서도 타당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실천의 준거는 선험적 이성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여기서 우리의 윤리의 문제의 본질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윤리의 문제에서 칸트적 접근은 전형적인 관념론적인 접근이다. 선험적으로 결정되는 윤리의 잣대에 따라 인간이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형적으로 지배계급의 논리이다. 현존하는 윤리의 잣대는 선험적으로, 인간의 순수이성에 의해 결정된 것이므로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기득권 보호의 논리가 되는 것이다. 윤리는 선험적으로 결정되는 것인가, 아니면 역사적 조건, 역사적 단계에 의해 형성되는 것인가? 예를 들면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것은 중요한 윤리이지만 사유재산제도가 없는 상태에서는 도둑질 자체가 불가능하다. 원시공동체에서 도둑질이라는 관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사적 소유가 완전히 폐지되면 도둑질이라는 관념은 사라질 것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에 노예제도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지금 현대 자본주의에서 노예제도는 혐오스런 것이고 인종차별도 금지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도덕관념, 윤리의 역사적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현대 부르주아 사회에서 자유, 평등의 관념이 헌법에 의해 보장되고 있다. 그러나 이전의 봉건제 사회에서는 신분질서, 봉건적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윤리적이었다. 이와 같이 윤리적 관념, 기준은 역사적 발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지 결코 선험적 이성에 의해 결정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칸트의 선험적 이성에 의한 윤리준칙의 결정 주장은 독단적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 부르주아 형법에서 형벌권의 행사의 근거로서, 형법을 근거지우는 법철학으로서 칸트의 사상이 상당한 영향을 발휘한다. 자유의지, 책임성 등이 그러한 관념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념은 그것이 선험적이기에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부르주아적 발전 단계에 적합하기 때문에 작동하는 것이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미학과 목적론에 대해 서술하는데 칸트의 미학은 흔히 말하는 순수예술 관념의 원형을 보여준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순수한 취미판단을 말한다. “자극과 감동의 영향을 받지 않는 (비록 자극과 감동이 미에 관한 만족과 결합될 수 있을지라도) 취미판단, 따라서 단지 형식의 합목적성만을 규정 근거로 갖는 취미판단이 곧 순수한 취미판단이다.”90) 형식의 합목적성만을 근거로 하는 것이 순수한 취미판단, 즉 순수한 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화나 조각에 있어서, 아니 모든 조형 예술에 있어서, 따라서 건축예술과 조경예술에 있어서도 그것이 미적 예술인 한, 본질적인 것은 도안이다.”91) 도안, 즉 형식이 본질적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칸트의 인식은 “취미판단은 인식판단이 아니”92)며 “미는 개념 없이 보편적으로 만족을 주는 것”93)이라는 인식에 기초한다. 이러한 칸트의 미학은 미 혹은 예술에 대해 내용을 제거하고 형식만을 추구하는 것인데 사회주의 리얼리즘(현실주의)이 사상성, 인민성,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것과는 상반된다. 사상성, 인민성이라는 내용적 측면이 칸트의 미학에서는 허용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칸트 미학의 정점은 이른바 ‘숭고’에 대한 것이다. 인식론에서 지성과 이성을 구분하는 칸트는 그러한 구분을 미학에도 적용한다. 지성은 감각의 자료를 받아 인식하고 사고하는 단계이며 이성은 감각과 무관한 인식 단계로 칸트는 파악한다. 숭고에 대해 칸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미는 비규정적 지성 개념의 현시지만, 숭고는 비규정적 이성 개념의 현시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 같다. … 후자(미)는 직접적으로 생을 촉진하는 감정을 수반하며 그 때문에 자극이나 유희하는 상상력과 결합될 수 있지만, 전자(숭고)는 오직 간접적으로만 일어나는 쾌감이다. … 비록 우리가 자연의 많은 대상들을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이 매우 정당할지라도, 자연의 어떤 대상을 숭고하다고 부르는 것은 전혀 정당한 표현이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숭고란 감각적 형식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성의 이념들에만 관계하기 때문이다.”94) 이렇게 칸트는 인식론에서 감각과 관련되는 지성과 감각과 관련되지 않는 이성으로 인위적으로 나누는 것을 기초로 미학에서도 미는 지성에, 숭고는 이성에 대응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숭고의 개념이야말로 미학의 최고봉으로 치고 있는 것이다.

칸트의 철학은 난파위기에 처한 형이상학의 혁신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칸트의 인식론은 근본적으로 주관적 관념론의 인식론의 재탕이고 현상과 본질을 단절적으로 나누어 사물자체에 대한 인식불가능성을 주장하는 불가지론에 빠졌다. 그러나 당시의 철학과 과학발전을 반영하여 변증법의 전제가 되는 범주들을 제기하고 이율배반의 형식이지만 철학의 주요 문제를 제기한 것은 그의 성과이다. 그러나 칸트는 형이상학의 혁신이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변증법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실천, 윤리와 관련하여 칸트는 윤리적 준칙의 선험성을 주장하여 윤리의 역사적 성격을 도외시했으나 당대 부르주아지의 요구를 반영하여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미학에서는 순수이성관념을 적용하여 숭고의 개념을 제기하고 순수예술의 근거가 되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칸트의 철학은 18세기 말의 독일 부르주아지의 유약성을 반영하는데 프랑스의 부르주아지의 사상적 경향이 유물론의 경향을 띠었던 것과는 대비된다. <노사과연>


1) 흄, ≪인간이란 무엇인가≫, 동서문화사, p. 677.

2)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연구소, ≪세계철학사≫ 2권, 중원문화사, p. 286.

3) 흄, ≪인간이란 무엇인가≫, 동서문화사, p. 18.

4) 흄, 앞의 책, p. 38-40.

5) 흄, 앞의 책, p. 42.

6) 흄, 앞의 책, p. 85-86.

7) 흄, 앞의 책, p. 88-89.

8) 흄, 앞의 책, p. 91.

9) 흄, 앞의 책, p. 96.

10) 흄, 앞의 책, p. 98.

11) 흄, 앞의 책, p. 99.

12) 흄, 앞의 책, p. 101.

13) 흄, 앞의 책, p. 102.

14) 흄, 앞의 책, p. 104.

15) 흄, 앞의 책, p. 107-108.

16) 흄, 앞의 책, p. 150-151.

17) 흄, 앞의 책, p. 196.

18) 흄, 앞의 책, p. 213-215.

19) 흄, 앞의 책, p. 232.

20) 흄, 앞의 책, p. 440-441.

21) 흄, 앞의 책, p. 442.

22) 흄, 앞의 책, p. 448-449.

23) 맑스, “신성가족”, ≪맑스·엥겔스 저작선집≫1권, 박종철 출판사, p. 115.

24) 맑스, 앞의 책, p. 115.

25) 디드로, ≪맹인에 관한 서한≫, 지만지, p. 42.

26) 디드로, 앞의 책, p. 76.

27) 디드로, 앞의 책, p. 100.

28) 디드로, 앞의 책, p. 108.

29) 디드로, 백과사전, 도서출판 b, p. 43-44.

30) 디드로, ≪달랑베르의 꿈≫, 한길사, p. 47.

31) 디드로, 앞의 책, p. 57.

32) 디드로, 앞의 책, p. 69-70.

33) 디드로, 앞의 책, p. 85.

34) 디드로, 앞의 책, p. 100-101.

35) 디드로, 앞의 책, p. 108.

36) 디드로, 앞의 책, p. 121.

37) 디드로, 앞의 책, p. 184.

38)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세계철학사≫ 3권, 중원문화사, p. 82-83에서 재인용.

39) 앞의 책, p. 84에서 재인용.

40) 엘베시우스, ≪세계철학사≫ 3권, 중원문화사, p. 89에서 재인용.

41) 엘베시우스, 앞의 책, p. 91에서 재인용.

42) 엘베시우스, 앞의 책, p. 92에서 재인용.

43) 돌바하, 앞의 책, p. 99에서 재인용.

44) 돌바하, 앞의 책, p. 100-101에서 재인용.

45) 돌바하, 앞의 책, p. 106에서 재인용.

46) 볼테르, ≪관용론≫, 한길사.

47)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세계철학사≫ 3권, 중원문화, p. 43.

48) 앞의 책, p. 44.

49) 앞의 책, p. 49.

50) 앞의 책, p. 50.

51) 루쏘, ≪인간불평등 기원론≫, 부북스, p. 78.

52) 루쏘, 앞의 책, p. 80-81.

53) 루쏘, 앞의 책, p. 88.

54) 루쏘, 앞의 책, p. 94.

55) 루쏘, 앞의 책, p. 96-97.

56) 루쏘, ≪사회계약론≫, 부북스, p. 19-20.

57) 루쏘, 앞의 책, p. 29-30.

58) 루쏘, 앞의 책, p. 43.

59) 루쏘, 앞의 책, p. 47.

60) 루쏘, 앞의 책, p. 67.

61) 루쏘, 앞의 책, p. 74-75.

62) 루쏘, 앞의 책, p. 94.

63) 루쏘, 앞의 책, p. 120.

64) 루쏘, ≪에밀≫, 돋을 새김, p. 18.

65) 루쏘, 앞의 책, p. 69.

66) 루쏘, 앞의 책, p. 104.

67) 루쏘, 앞의 책, p. 143.

68) 칸트, ≪순수이성비판≫, 동서문화사, p. 28.

69) 칸트, 앞의 책, p. 53.

70) 칸트, 앞의 책, p. 25.

71) 칸트, 앞의 책, p. 27.

72) 칸트, 앞의 책, p. 30.

73) 칸트, 앞의 책, p. 31.

74) 칸트, 앞의 책, p. 34.

75) 칸트, 앞의 책, p. 62.

76) 칸트, 앞의 책, p. 63.

77) 칸트, 앞의 책, p. 66.

78) 칸트, 앞의 책, p. 88.

79) 칸트, 앞의 책, p. 189.

80) 칸트, 앞의 책, p. 248.

81) 칸트, 앞의 책, p. 146.

82) 칸트, 앞의 책, p. 163.

83) 칸트, 앞의 책, p. 170.

84) 칸트, 앞의 책, p. 174.

85) 칸트, 앞의 책, p. 302.

86) 칸트, 앞의 책, p. 338.

87) 칸트, ≪실천이성비판≫, 동서문화사, p. 569.

88) 칸트, 앞의 책, p. 594.

89) 칸트, 앞의 책, p. 599.

90) 칸트, ≪판단력 비판≫, 책세상, p. 46.

91) 칸트, 앞의 책, p. 49.

92) 칸트, 앞의 책, p. 24.

93) 칸트, 앞의 책, p. 40.

94) 칸트, 앞의 책, p. 8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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