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유럽 및 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정치*

* 이 글은 4월 28일 개최된 <민주국제포럼>에서 발표된 글이다.

채만수 | 회원

이 포럼의 주최 측으로부터 유럽 및 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정치에 관해서 발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과연 이 요청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아닌가, 망설이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물론 내가 유럽 정치의 전문가도, 라틴아메리카 정치의 전문가도 아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그렇다고 해서 유럽 정치나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에 대해서 할 말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지난 반세기여(半世紀餘)간의 진보정치, 진보 이데올로기의 지배적 추세에 비추어 나의 발언이, 국내외에서 발제자ㆍ토론자로서 참가하고 있든, 청중으로서 참가하고 있든, 이 포럼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필시 시대착오적인 일종의 정신이상자의 그것으로 들릴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 망설이지 않고 주최 측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한 것은, 형식을 갖추어서는 아니지만 전화상으로 나의 그런 고민(?)을 주최 측에 넌지시 전달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발표를 요청한다는 답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그러한 발언을 해야 하는 것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나의 의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나의 발언으로 내가 시대착오적인 정신이상자의 취급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동안 내가 내뱉어 온 수많은 독설과 악담이 나에게 과(課)하는, 말하자면, 업보(業報)로서, 나는 당연히 그것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도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럽 및 라틴아메리카의 …라고, 그 정치적ㆍ경제적ㆍ문화적 전통과 상황이 참으로 무척 다른 두 지역의 문제를 하나로 묶어서 나에게 발언을 요구했을 때, 이 포럼의 기획자가 혹시 내가 대략 어떤 성격의 발언을 할 것인지를 미리 짐작하고 의도적으로 나를 배치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근거 없고 주제넘은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천기누설? 아니면, 과대망상?)

I

아무튼 이제 주어진 주제에 대해서 얘기를 시작하자면, 유럽 및 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정치? 다시 말하건대, 이 포럼을 기획한 측에서 어떤 의도, 어떤 문제의식에서 유럽 및 라틴아메리카의 … 하고 묶었는지 모르겠지만, 주제 그것이 참으로 기묘한(peculiar) 결합이다! 주지하다시피 유럽(일반)과 라틴아메리카는 그 역사적 전통도, 그 정치적ㆍ경제적ㆍ문화적 상황도 참으로 크게 다른데, 그런데도 이 두 지역을 유럽 및 라틴아메리카의 … 하고 하나로 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 지역은 그 정치적ㆍ경제적ㆍ문화적 전통도 상황도 크게 다르기 때문에 무언가와 관련하여 두 지역을 하나로 묶어 논의하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참으로 기묘할(odd) 것이다. 그러나 진보정치라고 하는 면에서 그 두 지역을 하나로 묶어 논하게 되면, 그것은 그다지 기묘하지(odd) 않다. 그 두 지역의 진보정치는, 그 표면상 여러 현상과 형태의 현저한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에서 서로 참으로 기묘하게(uncannily) 닮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오늘날 모든 대륙의 진보정치 그것들이 묘하게 닮았지만!)

사실, 주지하는 바이지만, 다름이라는 면에서는, 유럽 내부에서의 지역 간, 국가 간의 정치적ㆍ경제적ㆍ문화적 전통과 상황의 다름도, ―우리가 지금 유럽이라고 할 때, 과거의 동유럽을 제외한, 남부 유럽과 북부 유럽을 아우른 서유럽(Western Europe)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특히 남부 유럽과 중부 유럽이나 북부 유럽 간의 그것이나 라틴 유럽과 게르만 유럽 간의 그것도,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간의 그것에 못지않게 큰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물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간의 그것도, 유럽 국가들 간의 그것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는, 진보정치라고 하는 면에서는, 역시 그 국가들ㆍ지역들 간의 그 전통과 그 형태ㆍ현상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각국의 오늘날의 진보정치는 서로 그 본질에서 정말 기묘하게(uncannily) 닮았다. ― 모두가 다 그 본질(nature)에서 현대 사민주의 정치라고 하는 점에서!

내가 현대 사민주의 정치라고 말할 때, 그것은 독점자본가계급의 정치, 그 좌파의 정치라는 의미이다.

물론 유럽의 사민주의, 최근 급부상한 남부 유럽의 민중주의적 사민주의를 제외한 그것과 라틴아메리카의 사민주의는 무엇보다도 특히 그 기원(起源, genesis)에서 크게 다르다. 유럽의 사민주의가 제국주의의 성장에 수반한 노동귀족의 발생ㆍ성장 및 그들의 제국주의적 이해에의 동참에서 발생ㆍ성장했다면, 라틴아메리카의 그것은 주로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 지배라고 하는 조건 속에서의 소부르주아적 비과학(非科學)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기원의 차이는 유럽의 사민주의들 간의 차이, 그러니까 전통적인 사민주의와 최근 급부상한 남부 유럽의 민중주의적 그것 간에도 해당된다. 그리고 바로 이 기원의 차이에서 또 다른 차이, 즉 유럽의 전통적 사민주의가 제국주의의 이익의 적극적ㆍ의식적 동참자요 옹호자라면, 라틴아메리카의 그것이나 남부 유럽의 민중주의적인 그것은 제국주의의 이익의 소극적ㆍ무의식적 옹호자요 동참자라는 차이가 생긴다. 그러나 이들은, 제국주의적 이익에의 참여나 그 이익의 옹호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혹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양자(兩者) 모두 객관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이익의 옹호자요 동참자라는 기묘한(uncanny)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II

실제로 유럽의 경우, 진보정치는 사회당, 혹은 사민당, 혹은 노동당 등의 이름을 가진 사민주의 정당들에 의해서 주로 대표되어 왔으며, 부분적으로는 이른바 유로 코뮤니즘을 표방하며 사실상 사민주의 정당화한 공산당들에 의해서 대표되어 왔다. 그리고 2007년 가을 이후, 그러니까 현재에도 진행 중에 있는 새로운 대공황이 발발한 이후, 특히 2010년을 계기로 유럽의 여러 주변 국가들, 특히 그리스와 스페인ㆍ포르투갈 등에서 재정위기가 발발하여 이들 국가와 인민에게 유럽연합ㆍ유럽중앙은행ㆍ국제통화기금이라는 이른바 트로이카에 의한 가혹한 재정긴축 및 개혁이 강요되고 있는 조건하에서 이들 국가에서는 민중주의적 ―물론 본질적으로 사민주의적― 정당인 급진좌파연합(SYRIZA)이나 포데모스(PODEMOS)가 급부상하여 진보정치를 대표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 크게 그 세(勢)를 확장하면서 주목을 받고 있는 독일의 이른바 블록큐파이(Blockupy)도 역시 ―아직 정당으로서 그 형태를 갖추는 데에까지는 나아가지 않았고, 또한 그것이 그리스의 SYRIZA나 스페인의 PODEMOS와 같은 정당의 형태로 발전할지, 아니면 미국의 이른바 오큐파이(Occupy) 운동처럼 그저 비(非)정당적 대중운동의 형태로만 남을지 알 수 없지만― 그러한 민중주의적 진보정치의 한 흐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선, 이번의 대공황ㆍ재정위기 이후 급부상해 온 그리스의 SYRIZA나 스페인의 PODEMOS를 제외한 유럽의 전통적인 진보정치의 대표자들로서의 사민주의 정당들과 그 정치를 보자면, 애초에 노동자계급의 정당으로서 출발하여 성장ㆍ발전해 온 그 역사적 전통 때문에 그들은 그들 각국의 노동자계급을 그들의 정치적 포로로 잡고 있으나, 그들의 정책ㆍ정치 노선은 철저하게 독점자본가계급의 그것이다. 저들 사민주의 정당들의 정치ㆍ정책 노선이 철저히 독점자본의 이해를 반영한 그것들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우리는 굳이 1910년대의, 특히 제1차 대전 발발 이후의 그들에 대한 레닌의 비판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프랑스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Lionel Jospin) 총리 체제(1997-2002), 그리고 특히 이른바 제3의 길(the third way)을 내세운 영국의 토니 블레어(Anthony Blair)의 노동당 정권(1997-2007)이나 소위 신중도(neue Mitte)를 내세운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öder)의 사민당ㆍ녹색당 정권(1998-2005)의 행적이 그것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제2차 대전을 거치면서 확립된 서유럽 국가들에서의 소위 복지국가 체제 자체가 노동자계급을 체제 내에 포섭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억제ㆍ예방하려는 목적을 가진 사민주의적, 즉 독점자본가계급 좌파적 프로젝트였지만, 저들 사민주의 정권이 그 사민주의적 복지국가 체제 자체를 뒤흔들고 약화시키면서 그들 국가에서 어떤 보수주의적 정권들도 해내지 못했던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해냈는가를 보는 것으로써, 그리고 그들 사민주의 정권들이 발칸과 중동에 얼마나 제국주의적인 침략을 일삼았는지를 보는 것으로써 충분하기 때문이다. 토니 블레어의 경우, 오죽했으면 (극우) 부시(George Bush)의 푸들(poodle)1)이라는 조롱을 받았을까!

한편, 남부 유럽 국가들에서의 민중주의적 진보정치에 관하여, 집권에까지 성공한 그리스의 SYRIZA를 들어 간단히 말하자면, 그들 역시 사민주의적 정치세력, 민중주의적 선동을 통해서 노동자ㆍ인민 대중을 정치적 포로로 잡고 있는 독점자본 좌파의 정치세력이요, 그리스 공산당의 표현을 빌리면, 자본주의의 좌파 예비군’”2)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주관적 지향이야 무엇이든, 신자유주의 틀조차 벗어날 수 없는 사민주의 정치세력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급진좌파를 표방하지만, 사실은 지금 그리스의 노동자ㆍ인민에게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강요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와의 절연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전적으로 비(非)급진적인 정치세력이기 때문이다. 뿐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단지, 트로이카가, 그들의 새로운 명명에 의하면 세 기관들(three institutions)이 구제금융(bailout)의 대가로 강제하고 있는 가혹한 긴축 및 개혁들과 그 자금의 상환조건들을 약간 완화함으로써, 분노하고 있는 노동자ㆍ인민 대중을 체제 내로 포섭하고, 그리하여 그리스 자본주의를 연명시키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에서 SYRIZA가 집권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불철저함이나 한계는 인정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그들을 지지ㆍ지원해야 한다는 논조를 펴는 좌파 논객들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러나 그들 순진한 논객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집권과 더불어 이제는 SYRIZA 자체가 그리스 노동자ㆍ인민의 적(敵), 그 투쟁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3)

아무튼 유럽의 진보정치는 이렇게 이제는 신자유주의적이기까지 하면서도 좌파라고 불리는 사민주의 정당들에 의해서 대표되어 왔고 대표되고 있는데, 유럽의 노동자계급이, 노동자ㆍ인민이 그들의 정치적 포로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들을 극복하고 노동자계급 자신의 혁명적인 정치적 지도부를 건설하지 못하는 한, 유럽에 진정한 의미의 진보정치도, 노동자계급의 해방도 결코 있을 수 없다.

III

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정치에 관해서 말하자면, 우선 우리는, 유럽의 진보정치를 얘기할 때에 그들 국가가 이제는 더 이상 인민민주주의(peoples democracy) 체제가 아니지만 그래도 아무튼 동유럽 국가들을 제외했던 것처럼, 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정치를 논할 때에도 우리는 쿠바를 제외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정치는, 그 지형과 형태가 역사적으로도 현상적으로도 유럽의 그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간에도 그 진보정치는, 어느 나라의 그것이든 모두 민중주의적(populistic)이라고 평가되고 있고, 또 실제로도 그러한 공통점을 안고 있긴 하지만, 오늘날에는 특히 제국주의에 대한 태도에서,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에 대한 태도 및 그와의 관계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특히 베네수엘라의 경우, 제국주의,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과 상당히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음에 비해서, 여타 국가의 진보적 정당ㆍ정권들은 대부분 노골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친제국주의적ㆍ친미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적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 21세기 사회주의(의 전형)라고 평가되기도 했던, 베네수엘라의 고(故) 차베스(Hugo Chávez, 1954-2013) 정권(1999-2013)은, 무슨 무슨 미션(xxx mission)이라고 이름 붙여진 저간(這間)의 여러 친인민적 정책들을 통해서 상당한 성과들을 거두었고,4) 그러한 성과야말로 2002년 미국이 조종한 우익에 의한 쿠데타 시도 및 파업을 대중의 지원으로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차베스 정권의 그러한 성과들도, 그 후계자 마두로(Nicolás Maduro) 정권에 의한 그 승계도 과소평가할 의도가 나에게는 조금도 없다.

하지만, 사회주의적 전망이라는 관점에서는 나는 차베스 정권도 그 후계자 마두로 정권도 모두 불모의 정권, 불임성(不姙性)의 정권이요, 차베스나 마두로 등의 주관적 규정이나 지향이야 어떻든, 객관적ㆍ본질적으로는 사민주의적 정권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석유자원을 제외하고는 주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의 폐지와 그 국유화 조치도,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의 필수적 조치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도 그들 정권의 정책에는 사실상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리하여 그 21세기 사회주의의 역할도 결국은, 사회주의로의 길이 아니라, 위기의 자본주의 체제를 연명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국제 유가의 급락에 따른 베네수엘라 경제 사정의 악화와 그 정치정세의 심대한 동요ㆍ불안은 문제의 21세기 사회주의가 얼마나 불안정한 체제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의 정치가 본질에서 이렇게 사민주의적일 때, 다른 나라들의 진보정치의 성격에 대해서는 더 얘기할 필요가 사실상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때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주목을 받았던 브라질 노동당(PT)의 룰라(Luiz Inacio Lula da Silva) 정권(2003.1.1.-2011.1.1.)에 대해서는 한 마디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가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시쳇말로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IV

앞에서, 유럽의 사민주의와 라틴아메리카의 그것의 기원의 차이와 그에 따른 행태의 차이에 대해서 얘기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 차이들을 다시 말하자면, 유럽의 사민주의가 제국주의의 성장에 수반한 노동귀족의 발생ㆍ성장 및 그들의 제국주의적 이해에의 동참과 궤(軌)를 같이했다면, 라틴아메리카의 그것은 주로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 지배라고 하는 조건 속에서의 소부르주아적 비과학(非科學)의 산물이다. 그리고 바로 이 기원의 차이에서 유럽의 사민주의가 제국주의의 이익의 적극적ㆍ의식적 동참자요 옹호자라면, 라틴아메리카의 그것 및 남부 유럽의 민중주의적인 그것은 제국주의의 이익의 소극적ㆍ무의식적 옹호자요 동참자라는 차이가 생긴다.

그런데 이들 차이는 사실은 진보정치ㆍ사민주의를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세력, 결국 그 정당의 발생사와 그 행태의 차이이다. 그 진보정치의 대상, 즉 그 진보정치ㆍ사민주의에 포섭되어 있는 노동자ㆍ인민 대중에 이르면, 그 차이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유럽의 노동자ㆍ인민 대중이든 라틴아메리카의 그들이든, 그들이 사민주의 정당들을 지지하는 것은 그들이 모두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 즉 이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획된 결과이다.

이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 지배는 20세기 후반의 대중매체의 거대한 발전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강화되었고, 특히 동유럽 및 쏘련에서의 20세기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와 붕괴를 계기로 더욱 크게 강화되었다.

그런데 어떤 사회혁명이든,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대중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한, 불가능하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리하여 유럽에서든 라틴아메리카에서든, 혹은 다른 어느 곳에서든, 독점자본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대중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한, 노동자계급의 해방혁명, 노동자ㆍ인민의 혁명이 불가능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 지배 이데올로기의 극복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지배과정 그것은 동시에 이데올로기의 투쟁과정이다. 오늘날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 지배과정 그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 지배과정은 교육과 거대한 대중매체를 장악한 독점자본의 허위 이데올로기가 실업과 빈곤, 피착취라는 생활상의 조건 때문에 아래로부터, 즉 노동자ㆍ인민 속에서 끊임없이 발생ㆍ성장하는 변혁 지향적 이데올로기를 압도해 가는 과정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자들이 극소수 독점자본에 의한 부(富)의 집적ㆍ집중과 그 집적ㆍ집중의 극대화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얼토당토않게도 부의 적수효과(滴水效果, trickle-down effect)라는 것을 내세우고 있지만, 지배 이데올로기의 극복과정에서야말로 이데올로기의 적수효과가 일을 하는 것이다. 즉, 노동자ㆍ인민을 해방의 길로 안내할 선진 노동자들의 과학적 이론에 의한 무장과 정치 지도부에 의한 그 이론의 조직적 전파ㆍ확산이 독점자본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대중적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문제는 그 선진 노동자들의 대다수, 바로 진보정치의 담당자들이,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이론, 해방의 이데올로기로 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거꾸로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사민주의로 무장되어 있고, 그것을 전파하고 있는 데에, 그것도 노동자계급의 해방의 이데올로기, 과학적 이론에 적대하여 전투적으로 전파하고 있는 데에 있다.

그러면, 극복해야 할 독점자본의 오늘날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요체(要諦)는 무엇인가?

그 지배 이데올로기가 예컨대 신자유주의 같은 노골적인 극우 이데올로기이든, 아니면 우리의 주제인 진보정치, 즉 사민주의든, 그 요체는 반공주의ㆍ반쏘주의이다! 특히 쓰딸린주의 비판을 내세운 반공주의ㆍ반쏘주의이다!

그러나 사실은 쓰딸린주의는 이중의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하나, 저들이 떠드는 쓰딸린주의는,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처럼, 저들이 악의적으로 조작하고 발명해 낸 그것, 즉 허구의 그것이고, 굳이 말하자면, 다른 하나는 맑스-레닌주의(Marxism-Leninism)이다. 그리하여 저들이 악의적으로 조작한 허구의 쓰딸린주의 비판을 통해서 쓰딸린을, 그리고 쏘련을 악마화할 때, 거기에는 당연히 레닌주의의 부정(否定)이 포함되어 있고, 사실은 맑스주의의 부정이 아주 부정직한 형태로 포함되어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들 사상ㆍ이론이 모두 반(反)자본주의적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에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폭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저들이 왜 특히 쓰딸린과 그의 쏘련을 그토록 집요하고 악랄하게 악마화하는가를 생각해 내지(perceive) 않으면 안 된다.

나로서는 좀 비겁할 수밖에 없는 비유지만, 수만 명의 자국민을 학살한 장개석이나 수십만 명인지 수백만 명인지 모를 자국민을 학살한 수하르토는 악마가 아니지만, 막사이사이는 심지어 위인(偉人)의 반열에까지 올라 있지만, 이라크의 후쎄인이나 리비아의 카다피는 악마화되어 있다. 이것이 제국주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한 면목(face)이다.

여기에서 악마와 비(非)악마ㆍ위인을 가른 기준은 무엇일까?

제국주의에 대한, 특히 미국에 대한 태도 이외의 다른 기준이 있을까?

하물며, 그것을 완전히 허물어 해체ㆍ붕괴시키는 데에 1956년 제20차 당 대회 이후 30년 이상이나 걸린 쏘련의 사회주의 체제를 쏘련의 노동자ㆍ인민을 이끌며 현실적으로 건설하고, 전통적인 대국 프랑스조차 사실상 순식간에 휩쓸어 버린 나찌와의 전쟁을 쏘련의 노동자ㆍ인민과 더불어 실질적으로 승리로 이끈, 그리고 식민지 민족해방전쟁을 진지하게 지원해 온, 그리하여 제국주의는 물론 자본주의 일반의 심각한 위협으로 등장한 쓰딸린과 그의 쏘련이야!

유럽에서든 라틴아메리카에서든, 혹은 기타 어디에서든, 노동자ㆍ인민이, 사이비 진보정치가 아니라, 노동자계급 자신의 진정한 진보정치를 건설하고 발전시키려면, 그리하여 평화와 해방의 도정(道程)으로 진군하려면, 독점자본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부ㆍ분쇄하고 노동자계급 자신의 과학과 사상을 다시 찾아 무장하고, 그렇게 과학으로 무장된 정치 지도부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반쏘ㆍ반공주의적인 현대 사민주의를 거부하고 맑스-레닌주의를 재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수 외에, 다른 길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한편, 2007년 가을 이후 현재 지속 중인 새로운 대공황, 클린턴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전형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자 썸머스(Lawrence Summers)조차 영속적인 침체(secular stagnation) 운운하고, 제국주의의 국제기구 IMF조차 불확실성(uncertainty)이니 저락(decline)이니 하는 말들로 점철된 ≪세계경제전망(World Economic Outlook )≫을 내놓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대공황을 고려하면, 자신의 과학과 사상으로 무장된 자신의 정치 지도부를 획득해야 하는 노동자계급의 사업은 유럽에서도 라틴아메리카에서도, 다른 지역과 국가들에서도 결코 마냥 늑장을 부릴 수 있는 한가로운 일일 수 없다. 뉴딜이 어떠했느니, 케인즈주의 혁명이 어떠했느니, 등등 한가한 잠꼬대가 더 이상은 들리지 않지만, 아무튼 제2차 대전이라는 대살육과 대파괴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던 1930년대의 대공황을 상기해 보라. 핵병기 시대인 21세기의 이 대공황은, 이 21세기 전반기가 인류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없는 보다 고도의 사회로 인도하는 세계 대혁명의 시대이든가, 아니면 인류의 사실상의 절멸의 시대일 수밖에 없을 것임을 예고하는 징후 아니겠는가? 그리고 인류의 새로운 사회로의 도약인가, 아니면 그 절멸인가를 가름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힘 바로 그것 아니겠는가?


1) poodle은 털이 복슬복슬한 애완견의 일종이지만, 앞잡이부하라는 뜻도 있고, 사람들이 토니 블레어를 가리켜 부시의 푸들이라고 조롱했을 때, 그 조롱은 당연히 그 두 가지 뜻을 모두 담고 있다.

2) Elisseos Vagenas, SYRIZA: the left reserve force of capitalism. (http://inter.kke.gr/en/articles/SYRIZA-the-left-reserve-force-of-capitalism)

3) 채만수, 그리스 급진좌파연합의 집권―특히 그 평가에 대한 단상, ≪정세와 노동≫ 제109호(2015. 2.), pp. 43-52 참조.

4) 무엇보다도, 이들 성과가 결코 모든 나라가 누릴 수 없는 대량의 석유자원이라는 조건에 힘입은 것들임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21세기 사회주의(의 전형) 운운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차베스 정권하에서의 성과 및 그 전망에 대한 비판적 평가에 대해서는, 채만수,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 혁명―그 배경과 경과, 성격, 그리고 전망, ≪정세와 노동≫ 제15호(2006. 7/8.), pp. 10-4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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