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 (A History of Indian Freedom Struggle)(25)

 

 

 

 남부디리파드(E. M. S. Namboodiripad)

번역: 이병진(양심수, 회원)

Ⅵ. 힌두-무슬림 갈등의 시작

지배자들은 인도 전체를 휩쓸고 있는 독립 투쟁의 거센 폭풍을 억압적인 조치만으로는 억누를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또 다른 방법을 그중 하나가 독립투쟁 전체에서 무슬림 공동체를 소외시키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전체 무슬림 공동체가 영국과 같은 편이라는 감정을 갖게 하였다.

이런 움직임은 이미 19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국적인 무슬림 정치조직 무슬림 동맹(Muslim League)이 인도 국민회의와 평행하게 결성된 것은 벵골 분할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항의 시위가 일어난 이후였다.

제국주의자들은 벵골 분할 문제뿐만 아니라 이후 독립 투쟁의 역사에서 제기되는 여러 기타 쟁점들에서, 독립 운동의 분열을 위해 이 조직을 활용하였다. 지배자들이 결국 인도를 쫓겨나가자, 그들은 한 나라를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단시켰고 이에 대해 무슬림 공동체의 지지를 얻었다.

민족주의자들은 당연히 영국이 이용한 마키아벨리식 전술과 그 전술을 유효하게끔 조력한 무슬림 동맹의 지도력을 비판하였다. 영국 지배자들이 힌두인과 무슬림인들 간의 분할을 조장하여 인도에서 그들의 지배력을 공고하게 했다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무슬림 지도자들도 이를 묵인했다.

하지만, 이것은 한 세기의 사분의 삼 이상 지배적이었던 인도 정치의 온전한 참모습은 아니다. 중세 인도는 영국 역사가들이 채색한 것처럼 어둠의 시대가 아니었으며 이 시기에는 힌두인과 무슬림 간에 우정과 모순이 공존했다. 그리고 역사는 그런 관점에서 조명되었다. 중세 시대 인도의 인민들이 무슬림 지배자들의 전제적 지배와 자민다르들에게 맞서 싸우는 투쟁을 지배자와 인민 간의 모순에 근거한 현실에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힌두와 무슬림 간의 투쟁의 성격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널리 있다.

예를 들어, 쉬바지(Shivaji)1)의 지도하에 마라따인(Marattas)2)들이 무굴제국의 종말을 위해 전쟁했을 때, 그 성격은 힌두인들과 무슬림 지배자들 간의 싸움이었다. 띨라크의 주도로 쉬바신 축제가 다시 벌어졌을 때 이것은 반무슬림뿐만 아니라 반영 운동으로 해석되었다.

영국이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여 마침내 무굴제국의 수도인 델리의 지배자가 되자, 무슬림 공동체의 대다수가 자신들의 권력을 빼앗겼다고 느꼈다. 바로 그 때문에 무슬림 대중이 1857-9년 대중봉기에서 힌두 대중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였다. 반면에 그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는 무슬림 공동체 구성원들이 영어 학습에 힌두인보다 뒤쳐졌고 그로 인해 근대화도 뒤쳐졌다. 싸예드 아메드 칸을 비롯한 이들이 지도하는 무슬림 공동체에서는 봉기가 실패하고 힌두인들이 급격히 근대화되는 것을 목도한 후에야 근대화를 위해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것의 자연스런 귀결로써, 무슬림은 근대 교육에서 힌두보다 한참 뒤떨어졌고 결과적으로 정부의 고용, 정치, 상업 그리고 산업에서도 뒤쳐졌다. 무슬림 공동체 성원들은 그런 분야에서의 성공을 위해 경쟁으로 내몰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같은 기간 동안, 정부의 일자리와 행정에서 인도인의 몫을 늘리려는 선동이 그 분야에서 앞서 나갔던 힌두인들의 주도하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인도 국민회의는 사실 그런 목적을 위해 결성되었다. 현실 감각이 있는 무슬림 공동체의 성원들은 국민회의 선동이 조직화되어 지도부가 힘을 얻어가면서 정부가 국민회의 슬로건에 양보하게 될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무슬림 엘리트들은 이런 면에서 무슬림 공동체가 뒤쳐졌기에 인도인들이 더 많은 자리와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것이 초창기 국민회의에 대한 싸예드 아메드 칸과 기타 지도자들의 기본적인 태도였다. 당시 아메드 칸의 견해는 반정부 시위에 참여하고 국민회의를 지지하는 게 무슬림의 최선의 이익에 해롭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무슬림 공동체 구성원들이 오직 사회적ㆍ교육적 발전을 위해 전념하도록 조언했다.

무슬림 대다수가 국민회의에 대해 비협조적인 것이 사실이었고 영국 지배자들은 이들이 국민회의를 적대하게끔 이를 활용하였다. 그러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무슬림 공동체 엘리트 지도자들은 오직 국민회의와의 협력에 대해서만 꺼려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국민회의를 직접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벵골 분할과 이어지는 반대 시위에서 정세의 변화가 일어났다. 정부는 시위를 진정시키기 위해 힌두인들이 지배하는 국민회의가 분할을 반대하는 이유가 새(동부 벵골) 주를 무슬림이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선전했는데, 이는 무슬림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국민회의의 정치적 요구에 관해 일반적으로 지지했던 무슬림 지도자들조차 벵골 분할 쟁점에 관해서는 국민회의를 반대하며 집회를 열었다.

아가 칸(Aga Khan)을 대표로 하는 무슬림 대표단이 쉬믈라(Shimla)3)에 가서 1896년 10월 1일에 총독에게 제안서를 제출했다. 제안서의 내용은 한때 무슬림이 누리던 잃어버린 지위와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 정부로부터 반드시 받아야 할 양보에 관한 것이었다. 이 제안서에 따라서, 전 인도 무슬림 동맹이 그해 12월에 열리는 집회를 조직하였다. 영국 관리들이 쉬믈라에 대표단을 파견하고 또한 무슬림 동맹 결성에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동맹의 반대자들이 그 조직에 영국의 첩자라는 딱지를 붙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만약 그런 주장이 받아들어져야 한다면, 국민회의 설립 초기에도 일부 고위 영국 관리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므로 비슷한 딱지를 붙여야 할 것이다.

사실 이들 두 조직 간에는 차이점이 있다. 국민회의는 비록 영국 관리들의 도움과 협조로 조직되었지만, 점차적으로 반영국적 태도와 정책들을 채택하였다. 권력기관들은 국민회의를 약화시키기 위해 무슬림 동맹을 고무하였다.

하지만, 국민회의 초기에 영국 관리들은 교양 있는 중간 계급 사이에서 정치의식 일반이 발전하고 인민들의 불만이 조직되어 한계를 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민회의 조직에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그 다음 단계에서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교양 있는 무슬림 새 세대의 불만을 조직하여 그들의 불만을 국민회의에 돌리도록 무슬림 동맹을 형성하는 데 관심을 가졌고 이렇게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그래서 이것은 전체 인민들과 교양계급 중에 각성한 이들의 불만이 확대되는 첫 단계에서, 무슬림과 그 조직 무슬림 동맹의 배타적인 정치라는 두 번째 단계로의 전환이라는 전개 과정이 왜 일어났는가에 관한 실질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한 관련 요소는 앞서 지적했다. 힌두인들은 영국 지배로부터 독립을 옛 인도 사회의 힌두 지배 부흥으로 생각하였고, 무슬림은 그것을 무슬림 제국의 재건으로 여겼다. 독립의 의미에 대한 상반된 생각은 갈등을 낳았다. 양쪽 공동체에 속해 있던 정치 지도자들은 이런 전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벵골 분할 이전에도 두 공동체 인민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또 다른 사건이 있었다. 우르드어는 무굴 지배 시대부터 북인도 전체에서 공식어였다. 힌두인들은 우르드어는 그 지역에서 다수 대중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기에, 대중 다수의 언어인 힌디어 또한 반드시 공식어의 지위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00년 4월 8일 통합 주정부(Government of United Provinces)는 우르드어와 힌디어 모두 정부에서 사용해 달라는 청원을 수용하였고 그 이후 정부 고시문들은 두 언어로 출판되었다.

무슬림들은 그 명령에 분개하였다. 그들은 조치에 반대하여 주 전체에서 항의 집회를 조직하였다. 그들은 그 조치가 무슬림 지배 당시의 우르드어의 지위를 주에서 박탈하려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반대편에서 힌두인들이 정부 명령을 지지하는 집회를 조직하였다. 이에 따라서 힌두인들과 무슬림들 간의 관계가 극도로 긴장되었다.

무슬림들이 선동의 명분으로 이용한 그 쟁점은 정당치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당시 무슬림 엘리트의 싸움은 훗날 그들 자손들이 또 민주적 의식을 가진 인민들이 소수자의 언어로써의 우르드어의 권리를 찾으려 투쟁했던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을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그들의 요구는 그와 반대로 다수가 쓰는 힌디어를 사용할 권리를 주지 않으려는 고집이었다.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힌두-무슬림 분쟁이 무슬림 엘리트들의 정당하지 못한 요구로 일어났다는 것은 그럼에도 사실이 아니다. 국민회의가 결성되기 전후, 또 국민회의 급진파의 부상 이후에도 국민회의 내에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힌두 부흥주의의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벵골의 유명 작가 반낌 챠떼르지(Bankim Chatterjee)의 작품들과 띨라크, 라즈빠뜨 라이, 아우로빈도 고쉬, 비삔 찬드라 빨과 같은 급진주의 지도자들의 글과 연설에서 힌두 세계관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급진파 중 가장 존경받았던 띨라크조차 모든 인도인들이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4) 마하바라따(Mahabharata)5), 라마야나(Ramayana)6) 앞에서 반드시 진실해야 되고 그것들은 모든 인도인들의 공동 재산이라고 언급하였다.

한편 비삔 찬드라 빨과 기타 벵골 급진주의자들은 나라에 봉사하는 일을 데비(Devi)7)를 숭배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들의 정치 활동을 그런 조건을 형성하려고 노정하였다. 그중 유명 인사인 아우로빈도 고쉬는 정치와 역사를 종교에 기초한 세계관에 종속시켰다. (이것은 그가 나중에 정치를 포기하는 동기였고 그는 사냐신8)이 되었다.) 라즈빠뜨 라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자적인 힌두 정치조직 결성을 위해 노력했다. 간단히 말해서, 힌두 마하사바(Hindu Mahasabha)9) 그리고 라쉬뜨리야 스와얌 세바끄 상(Rashtriya Swayam Sevak Sangh: R. S. S.)10)의 출현을 도와준 힌두 정치의 기원은 이런 급진파 혁명 지도자들의 정치 세계관에도 분명하게 보인다.

이것은 반영 운동 내에 급진파 지도자들의 주요한 역할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들이 존경받고 있고 인민의 지도자로 숭배받고 있는 것은 반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반제국주의, 애국주의로 나가려는 모든 노력과 나라의 자유에 대한 열망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힌두세계관의 틀 안에서였다. 그 때문에 그들의 정치활동이 힌두 대중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매료시킬 수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 비힌두 특히 무슬림 대중들이 독립운동에 반대하거나 혹은 최소한 그것과 다르게 만들었다. 이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힌두 부흥주의자들의 세계관에 기초한 반제국주의 물결의 성장과 더불어, 무슬림 공동체의 교양 있는 세대들이 이슬람 부흥주의 세계관을 흡수하기 시작하였다. 영국 지배자들이 벵골 분할 계획을 고안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이것의 직접적인 결과는 무슬림과 힌두 사이의 격한 갈등이었다. 힌두 대중들은 벵골 분할이 나라의 공동 이익과 똑같이 그들 자신의 공동체 이익에도 위험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무슬림들은 일반적인 힌두 지도자들 그리고 특히 국민회의 지도자들이 그들로부터 그들의 합법적 권리들을 빼앗을 것이라 보았다. 영국 지배자들은 이 상황을 독립운동의 단결을 깨기 위해 두 공동체 간의 갈등을 형성할 절호의 기회로 활용하였다.

벵골 분할이 이루어지면서 훗날 1947년 독립 시에 인도의 분단을 이끌게 될 불화의 씨앗이 그 즉시 뿌려지게 된 것이다.  노사과연


1) [역자 주] 쉬바지 본슬레(Shivaji Bhonsle)는 마라따족의 시조이다. 쉬바지는 군사를 일으켜 1650년대 인도 서부 데칸 고원 지대의 맹주가 되었다. 1664년에는 아라비아 해를 연결하는 무굴제국의 중심 항구 지역인 수라뜨(Surat)까지 지배하였다. 1674년에는 쉬바지 자신을 인도왕(dharmic* king)으로 부르고 무굴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였다.

* [편집자 주] 다르마(dharma)는 힌두교, 불교, 시크교, 자이나교 교리의 핵심이다.

2) [역자 주] 인도 서부 데칸 고원을 중심으로 목축과 농경 생활을 하던 집단이었다. 17세기 중엽 쉬바지의 지도로 마라따국이 건설되었다. 마라따족은 주변 소왕국들과 군사동맹을 맺고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여 무굴제국을 전율케 하였다.

3) [역자 주] 현재는 히마찰 프라데시(Himachal Pradesh)의 주도이다. 히말라야 산맥의 고산지대에 위치하여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휴양지이다. 델리에서 가깝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이곳을 여름철 수도로 이용하였다.

4) [역자 주] 마하바라따 전쟁을 배경으로 크리쉬나와 아르주나(Arjuna)가 주고받는 이야기가 중심인 시집이다. 이 시집은 기원전 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마하바라따 전쟁을 앞두고 아르주나는 자신의 동족을 죽이는 전쟁에 회의가 들어 전쟁 개시를 주저하였다. 이때 아르주나가 타는 전차의 마부이자 힌두신의 화신인 크리쉬나와 논쟁을 한다. 크리쉬나는 정의인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힌두 가치체계에 전혀 위배되지 않다며 아르주나를 설득한다. 아르주나는 크리쉬나의 조언을 듣고 전쟁에 참가하여 승리한다.

5) [역자 주] 마하바라따는 바라따족의 전쟁 이야기라는 뜻으로 18일간의 대전쟁을 기록한 대사서시다. 이 장편 서사시는 기원전 5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기원전 10세기경 인도 중북부 지역의 두 원시 국가 부족들이 실제로 벌인 큰 전쟁을 토대로 오랜 기간 구두로 전해 내려오다가 ≪마하라바따≫라는 대서사시로 만들어졌다고 본다.

주요 내용은 18일 간 벌어진 대전쟁, 즉 마하바라따 전쟁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야기 내용의 많은 비중을 인도의 신화, 전설, 종교, 철학, 도덕, 법규, 경제, 사회제도를 담고 있어서 이야기의 보물창고 같은 대서사시이다. 인도인들이 반드시 읽는 고전의 으뜸이다.

6) [역자 주] 기원전 500-300년경 구두로 전해지던 라마왕의 전설을 기원후 2세기 말경에 책으로 정리한 대서사시이다. 이야기의 중심 내용은 온갖 고난과 시련을 이겨낸 라마가 마왕 라바나로부터 그의 부인 시타를 구출하여 왕이 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온갖 종류의 무용담과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인도인들은 이 이야기를 오늘날까지도 사랑하면서 다왈리 축제로 성대하게 보낸다. 힌두인들의 정서와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7) [편집자 주] 여신을 뜻하는 산스끄리뜨어. 샤끄띠(Shakti)와 동의어. 샤끄띠는 최고의 여신이라고도 하며 혹은 남신(쉬바)의 배우자라고도 한다. 샤끄띠는 비쉬누파ㆍ쉬바파와 함께 현대 힌두교를 특징짓는 주요종파로서 특히 벵골ㆍ아삼 지역에 신도가 많다. 일부 문헌에서는 힌두교 대부분의 여신들이 샤끄띠의 다양한 화신이라고 보았다. 샤크띠의 자애로운 모습은 우마, 빠르바띠, 앙비까 등으로 알려져 있다. 거칠고 파괴적인 모습으로는 검은 칼리, 악마를 파멸시키는 두르가, 천연두의 여신 시딸라로 나타난다. 샤끄띠 여신은 비쉬누의 배우자인 자비로운 락슈미로서 숭배되기도 한다.

8) [편집자 주] 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18), ≪정세와 노동≫ 제94호(2013. 10.), p. 46의 각주 11)을 참조하라.

9) [편집자 주] 힌두 우익당. 제국주의 영국을 증오하면서 폭력적인 수단을 마다하지 않는 호전적인 민족주의 당. 대표적인 인물은 영국유학파 사바르까르(V. D. Savrakar, 1883-1966)가 있다.

10) [역자 주] 국가자조협회(National Self-help Association)이라고 부른다. RSS는 극우 힌두 근본주의 정치의 근원이다. 이 단체는 무슬림과 화해를 주장한 간디를 테러로 살해할 정도로 힌두 근본주의에 치우쳐 있다. 이 단체는 간디 살해 후 비합법화되었지만, 1992년 아요디아 사원 사태를 일으켜 인도 정치에서 부활하였다. RSS는 인도국민당(BJP)의 배후 세력으로써 극우 힌두정치의 최전선에서 행동대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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