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용산참사 6주기, 다시 진실 : 기억하고 밝혀야 할 진상규명의 과제

이원호 |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

 

진상규명의 과제 : 무엇을 밝혀야 하나?

 

용산참사의 본질이자 진상규명의 과제는 크게 두 가지의 축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망루 이후”의 진실이고, 다른 하나는 “망루 이전”의 진실이다.

“망루 이후”의 진실은, ‘살인진압’으로 표현된 국가권력의 야만적 폭력성에 대한 규명과 책임의 문제이다. 주거생존권을 요구하며 망루 농성 중인 철거민 30여 명에게, 1600여 명의 경찰병력과 대 테러를 전담하는 경찰특공대까지 투입해,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성급하고 무리한 진압을 감행했다. 이는 국가권력의 야만성을 똑똑히 보여준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왜 그리 성급하고 무리한 진압을 감행했는지, 누구의 지시에 의해서 진압이 이루어졌는지 밝혀야 한다. 용산참사가 보여준 또 하나의 본질이자 규명해야 할 과제는 ‘망루 이전’의 진실이다. 즉 철거민들을 망루에 오르게 한 ‘살인개발’의 야만성에 대한 진상규명이다. 용산4구역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개발이 추진되었는지? 어떻게? 왜? 그토록 폭력적으로 쫓아내려 했는지? 용산의 살인개발을 가능하게 했던 정치적, 정책적 책임의 소재는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고 책임을 물어야 참사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

 

 

용산참사 밝혀야 할 의혹들

 

어떻게 용산 4구역 개발이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진행되었을까?

 

용산참사에 청와대는 개입하지 않았다?

 

“김석기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모든 현장 상황을 총괄하고 있었다”

 

망루 진압 채증영상은 왜 공개하지 않았을까?

 

화재의 원인이 화염병이었을까?

 

망루를 탈출한 고 이성수, 고 윤용헌은 왜 망루 안 사체로 발견되었을까?

 

신원확인 절차도 없이 이례적 방법으로 신속하게 진행한 부검이유는 무엇인가?

 

안전계획은 왜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나?

 

 

어떻게 용산 4구역 개발이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진행되었나?

 

도심을 재개발하는 정비사업인 도시환경정비사업의 경우 정비구역지정부터 관리처분인가까지 보통 3년에서 4년 정도, 심지어 5~6년이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용산4구역은 정비구역지정일로부터 2년 만에 관리처분계획이 인가가 났다. 특히 이 과정에서 철거직전의 마지막 인가 단계인 관리처분인가가, 참사 후인 2010년 11월에 법원으로부터 중대한 하자가 있다며 무효판결을 받았다는 점에서, 얼마나 심각한 절차적 문제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시공사인 삼성물산과 조합, 정비업체와 철거용역의 커넥션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삼성물산은 재개발조합이 철거용역 업체와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이들 업체에 대한 관리 책임을 맡았다. 또한 개발 추진 기간 내내 재개발조합 집행부를 상대로 로비를 벌였던 삼성물산 직원이 2008년 철거용역 업체인 호람건설로 자리를 옮겼다.

 

조합에 전반적인 사업 추진을 컨설팅하는 정비업체는 ㈜파크앤시티였다. 이 회사의 회장은 전직 용산구의원이었다가, 폭력·공갈 등의 혐의로 구속돼 의원직을 잃은 전력이 있으며, 조직폭력배 범서방파 두목인 김태촌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로 알려졌다. 또한 정치권과의 인맥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당시 구청장인 박장규의 선거지원 등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파크앤시티는 용역비 역시 통상 평당 3~5만원인 것에 비해 평당 9만원으로, 총 105억여 원의 높은 용역비로 계약했다.

또한 철거업체인 현암과 호람이 경비업체로 등록되지 않은 무허가 철거/경비업체임이 드러났다. 용산참사 당시 현장을 누비며 POLICIA라고 적혀 있는 사제 방패를 든 이들 역시, 경찰로 오인되었던 철거용역들이었다. 특히 당시 제3의 용역업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조합의 대의원회의 용역계약 내용에 등장하는 ‘모노에스엔이(S&E)’다. 이 업체는 정비업체인 ㈜파크앤시티의 회장의 아들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로, 실질적으로 현암, 호람을 지휘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용산4구역의 개발은 법적으로는 4구역 조합원들이 주최인 별개의 도시환경 정비사업이다. 이 사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사기극이라고 이야기되는 용산역세권 개발사업을 포함한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의 용산 부도심 개발계획과 함께 거론되어 지적되곤 한다. 서울역에서부터 한강까지 이어지는 ‘서울부도심’ 개발 사업은, 사업비만 총 50조에 달하며, 오세훈 시장의 재선을 넘어 대권도전 핵심 플랜인 ‘한강르네상스’사업과 연계되는 거대한 개발프로젝트의 하나로 배치된 개발 사업이란 평가이다. 이중 핵심인 ‘용산역세권 국제업무지구 개발사업’ 역시, 삼성물산이 대표 컨소시엄을 담당했다. 이러한 거대 개발프로젝트와 연결하여 용산 4구역이 있었고, 이러한 조건 속에서 다른 지역보다 빠른 속도로 각종 개발 인허가가 났으며, 이른 시기부터 용역깡패들이 상주하면서 세입자들을 궁지로 몰았다 할 수 있다. 때문에 용산참사와 관련해 서울시 역시 책임을 규명해야 한다.

 

용산참사에 청와대는 개입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국민적 저항(‘광우병’ 파동)에 부딪힌다. 광우병 파동에 항의하는 대규모 저항을 경찰력을 동원한 강제진압으로 잠재웠다. 그런 이명박 정권은 이후 유난히 법질서 확립을 강조했다. 이른바 불법시위에 대해서는 ‘무관용 원칙’을 천명하고, ‘합법보장․불법필벌’을 강조했다.

이런 과정에서 집권 2년차를 앞둔 이명박 정권은 2009년 1월 18일, 서울경찰청장 김석기를 차기 경찰청장 후보자로 내정하였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인 2009년 1월 19일,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 소속의 용산4구역 철거민들과 전철연 회원들이 한강대로변의 남일당 건물을 점거하고, 옥상에 망루를 지으면서 농성에 들어갔다. 이명박 정권의 법질서 확립이라는 대원칙과 건설경기 활성화라는 정책기조에 대한 정면도전 행위였다.

청와대로서도 이명박 대통령의 원칙에 도전하는 전철연의 농성을 좌시할 수 없었고, 김석기 경찰청장 후보자로서도 이를 조기에 진압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망루 농성 철거민들이 화염병을 던지기 1시간 반 전에 이미 경찰 특공대를 투입하는 조기 강제진압 계획이 마련되었고, 이에 따라 농성 철거민들과 대화나 협상은 추진도 하지 않고 곧바로 경찰력을 투입한 강제진압에 들어갔다. 그에 따라서 진압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매우 서툰 듯한 진압의 전 과정, 경찰의 집회시위진압 매뉴얼에도 어긋나는 진압, 진압 과정에선 윗선에서 계속되는 다그침 등이 있었다. 이런 진압 과정이 과연 김석기 경찰청장 후보자와 경찰 자체의 판단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청와대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개입하지 않았을까? 검찰 수사본부는 청와대의 개입설은 아예 수사대상에도 포함하지 않았다.

특히 2009년 1월 24일, 군포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 강호순이 검거되자 언론은 대대적으로 이 사건의 보도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곧 청와대가 언론사들에 “용산사태를 통해 촛불시위를 확산하려고 하는 반정부단체에 대응하기 위해 ‘군포연쇄살인사건’의 수사내용을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라는 세부 보도 지시를 했음이 드러났다. 이런 사실을 처음에는 청와대가 강력히 부정했으나 ‘보도지침’ 내용이 공개되자, 언론사에 이메일을 보낸 것으로 확인된 청와대 행정관 개인의 책임으로 돌렸고 그 행정관은 해임했다.

 

김석기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모든 현장 상황을 총괄하고 있었다

 

참사 당시 김석기 당시 경찰청장 내정자는 검찰에 제출한 ‘사실관계 확인서’에서 “사건 당시 서울경찰청 집무실에 있었으며, 진압 작전 전후 휴대전화를 통해 보고받았을 뿐 실시간으로 직접 보고를 받거나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이후 검찰은 서면 질의서를 보내 무전 지시를 들었는지에 대해 “무전기는 있었지만 안 켜 놨다”고 답변서를 받았다. 참사 초기 김석기 내정자가 현장에 있었는지, 현장의 상황을 지휘했는지는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검찰은 김석기 내정자를 단 한 번도 소환조사하지 않았고 결론적으로 “보고만 받았지 승인하지 않았다”(김석기 국회 답변)로 결론 내렸다.

참사 발생 1년이 지난 2010년 2월경 국가인권위는 “용산참사에 대한 경찰력 행사는 위법했다”는 의견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인권위는 “경찰의 조치는 심히 균형을 잃었으며 당·부당의 수준을 넘어 위법의 영역에 이른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경찰 중 어떤 누구도 참사의 책임을 지지 않았다. 사건 초기 무리한 진압으로 참사에 이르게 한 경찰 수뇌부의 책임을 따지지 않은 결과였다. 그래서 김석기 당시 내정자가 참사 당시 상황을 지휘했는지 여부는 아직도 중요한 쟁점일 수밖에 없다.

추가 수사기록의 지휘부 신문사항과 무전녹취 비교를 통해 확인된 상황을 보면, 김석기는 당일 상황실 또는 바로 옆 집무실에서 실시간으로 현장을 지휘했을 가능성이 짙다. 추가 수사기록을 보면 검찰의 경찰지휘부 신문내용과 무전녹취록 교차 비교로 무전 대화를 나눈 이들이 일부 확인된다. 경찰청 상황실 바로 옆방은 김석기의 집무실이었고 상황실 지휘부가 김석기에게 수시보고(구두 대면)하는 내용들도 발견된다. 이는 곧 김석기가 현장 상황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망루 진압 채증영상은 왜 공개하지 않았을까?

 

망루 진압 과정에 대한 동영상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경찰은 용산 망루농성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채증반을 운영했다. 이에 따라서 진압과정은 동영상과 사진으로 채증이 되어 있다. 남일당 건물 진입 과정 전체가 모두 채증이 되어 법정에 자료로 제출되었다.

그런데 유독 망루 진압과정을 담은 동영상은 제출되지 않았다. 남일당 건물의 계단을 통해서 진입하는 과정을 담은 동영상 자료는 망루 앞에서 꺼져 버렸다. 만약 망루 안의 진압과정을 담은 동영상 자료가 있다면 화재의 원인을 비롯해서 사망자들이 망루 안에서 사망하게 된 경위까지 파악할 수 있다.

2009년 1월 20일의 경우 19명의 경찰들은 9조개로 나뉘어, 남일당 건물 진입구, 신용산 빌딩 옥상, 현대자동차 앞 등에서 당시의 상황을 채증하였다. 그러나 애초에 컨테이너에 탑승하여 망루 안으로 진입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경찰은 경찰특공대의 반대에 부딪혀 탑승하지 못하였다. 대신 경찰특공대 채증조가 직접 채증을 하겠다며 컨테이너에 탑승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인터넷 방송 칼라TV가 촬영한 영상에도 분명하게 찍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년 1심 재판당시, 변호인단 측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경찰특공대가 채증한 영상이 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경찰이나 검찰은 주요한 증거인 경찰 특공대 채증영상이 없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제출 증거자료에서는 결정적인 장면을 삭제한 것으로 추측된다. 용산참사 1심 재판 당시, 경찰 측에서 제출한 증거 제63호가 바로 남일당 건물을 통해서 진입하는 과정이 담겨 있는 영상이었다. 그러나 증거 제63호의 경우, 경찰특공대들이 망루 앞까지 진입하기 전까지만 촬영되어 있다. 즉 경찰특공대가 망루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갑자기 ‘뚝’ 끊겼다가, 망루 건너편 옥상에서 화재를 촬영한 영상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하자면 망루 화재를 전후한, 망루 안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들이 없다.

 

화재의 원인이 화염병이었을까?

 

사법부는 누군지는 모르지만 망루 농성 중인 철거민들 중에서 한 명이 화염병에 불을 붙여 던졌고, 그 화염병에서 불이 붙어 화재가 나서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렇지만 좁은 망루에서 화염병을 던지는 것을 망루 안에 진입한 특공대원들은 보지 못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검찰의 진술조서에서 화염병을 봤다고 한 특공대원들도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했다. 어느 누구도 그 좁은 망루 안에서 불붙은 화염병을 던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사법부는 검찰의 기소 내용대로 농성 중인 철거민들의 화염병이 화재의 원인이라고 추정하여 판단하였고, 그 외에는 다른 화재의 원인은 없다고 못 박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화재의 원인이 화염병일까라는 부분에 대해서 강력한 의문을 갖고 있다. 농성 중인 철거민들의 경우 유증기로 가득 찬 망루 안에서 숨쉬기조차 어려웠던 상황에서 망루 안에서 화염병을 던진다는 것은 자살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유증기가 가득 찬 망루 안에서는 자그마한 불꽃으로도 화재가 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게 발전기였다. 만약 유증기가 가득 찬 망루 안에서 발전기가 돌고 있었다면 발전기가 돌면서 일으키는 스파크는 발화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사건의 현장에서 수거해 간 발전기의 스위치(온-오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스위치)는 국과수에서 분실되었다.

 

망루를 탈출한 고 이성수, 고 윤용헌 씨는 왜 망루 안에서 사체로 발견되었을까?

 

사망한 5인의 망루 농성 철거민들 중 고 윤용헌 씨와 고 이성수 씨의 죽음과 관련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망루 농성 생존자인 지석준 씨는 윤용헌, 이성수와 함께 망루에서 뛰어내려 탈출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지석준 씨는 윤용헌, 지석준, 이성수 순으로 망루에서 뛰어내렸고, 이성수 씨가 지석준 씨의 다리 위로 떨어져 자신이 골절상을 입은 반면 윤용헌 씨와 이성수 씨는 뛰어내린 후에도 활발히 움직일 수 있는 상태였다고 했다. 윤용헌 씨는 망루에서 뛰어내린 후 쓰러져 있는 자신을 흔들었으며, 이성수 씨는 불타는 망루에서 멀어지도록 자신을 부축했다고 했다.

지석준 씨의 일관된 진술은 구체적일 뿐만 아니라 당시 현장을 촬영한 사진과 영상과도 일치했다. 동일 시간에 촬영된 사진과 영상을 통해 망루에서 탈출한 사람들과 이동경로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망루에서 탈출한 사람들 중 고 윤용헌, 이성수 씨로 추정되는 인물이 본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유가족과 지석준 씨는 MBC 촬영 영상 원본을 확인한 결과 지석준 씨와 옥상 난간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이 고 이성수 씨임을 확인했다.

또한 일반인이 아닌 훈련된 경찰특공대도 사망했다. 고 김남훈 경사는 왜 불이 난 망루를 탈출하지 못하고 사망했을까. 경찰특공대조차 피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떠했을까. 동료가 채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경찰은 이에 대한 확인이나 조치를 취했는가. 경찰이 전원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확인도 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농성자들의 안전도 돌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이 얼마나 위급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신원 확인 절차도 없이 이례적인 방법으로 신속하게 진행한 부검의 이유는 무엇인가?

 

검찰은 망루에서 시신을 수습한 뒤에 곧바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시신을 이송했다. 참사가 발생한 1월 20일 밤 9시경 시신을 찾아 헤매던 유가족들은 시신 5구 모두 국과수에서 부검을 완료한 후 순천향 병원에 안치되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때까지 유가족들은 남편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검찰은 이례적으로 유족에게 알리지 않고 사고 당일 성급하게 사망자들의 부검을 실시하도록 지휘했던 것이다. 화재 사건의 부검은 화재 사건의 정황과 남은 증거를 맞추어 보고 진행되는 것인데 당시는 사고 정황에 대한 아무런 규명이 이뤄지지 않은 시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검찰 수사 과정에서 사체 부검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일반적으로 검사는 유족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동의를 받은 후 부검에 착수한다. 형사소송법 제141조 ④항에도 “사체의 해부 또는 분묘의 발굴을 하는 때에는 예를 잊지 아니하도록 주의하고 미리 유족에게 통지하여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검찰은 이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유족들에게 시신 부검에 대해 알리지도 않고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전격적으로 부검을 시행했다. 이런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한편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부검을 시행하는 과정도 매우 이례적이었다. 부검 감정서를 보면 사건 당일 5구의 시신에 대해 5인의 부검의가 거의 동시에 부검을 실시한 것으로 나온다. 이 역시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일반적으로 사건 이후 시신을 수습하고 하루 정도가 경과한 이후 부검은 진행된다. 이 모든 과정은 검찰이‘작전을 치르듯이’속전속결로 끝내려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검사가 부검을 지휘할 때는 관행적으로 “사체를 부검하여 사인 규명을 한 후 사체는 유족에게 인도”하라고 지휘하고 있다. 그래서 부검이 끝난 후에는 지체 없이 유족에게 사체가 인도되고 있다. 그런데 용산참사 사건에서는 부검이 끝난 후에도 장례를 지낼 때까지 한참 동안 유족들에게 사체가 인도되지 않았다. 경찰에서는 검찰 지휘가 없기 때문에 사체를 유족들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검찰은 왜 비윤리적이고 무례한 방식으로 부검을 빨리 해치우려 했는가.

 

왜 진압작전은 안전을 무시한 채 단행되었는가?

 

경찰은 전철연 회원들의 망루 농성을 진압하는 일이 매우 위험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에 따라 안전을 고려한 대책을 진압작전 계획 속에 포함했다. 하지만 이런 계획은 이행되지 않았다. 특히나 현장에 투입되는 특공대원들은 망루 안에 어떤 위험물질들이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접하지 못한 채 현장에 투입되었다. 또 실제 화재도 발생하는 등 진압작전에 문제가 발생했음에도 작전을 변경하거나 중단하지 않았다.

검찰조사에서 백동산 당시 용산경찰서장은 “소방방재청의 국회보고에는 이 사건 이전에 출동한 소방차는 2대 뿐”이라는 검사의 질문에 “실제로 소방차가 얼마나 왔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고, 이송범 당시 서울경찰청 경비부장은 “현장은 확인 못했으나, 용산서장이 모두 준비되었다고 하므로 저희들은 그렇게 알았다”고 대답하는 등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또한 진압 과정에서 1차 화재가 발생했을 때 진압을 왜 중단하지 않았는지 묻는 질문에 이송범 당시 서울경찰청 경비부장은 검찰조사에서“당시 현장 상황을 잘 전달받았으면 중단도 시켰을 것인데, 특공대원들이 어떻게든 작전을 성공시키겠다는 공명심에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특공대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고, 당시 현장 총책임자였던 김수정 차장은 “순조롭게 작전이 진행된다는 것으로 보고를 받고 특별한 보고가 없길래 그냥 잘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는 등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현장 지휘부가 화재 발생의 위험성을 파악하지 못한 경위 또는 위험성을 감수하고 진압을 중단하지 않은 경위와 책임에 대하여 밝혀야 한다.

 

용산, 다시 진실

 

‘용산 학살의 진실이 밝혀질 때 이 땅은 죽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용산참사 현장 재개발 구역의 펜스에 낙서처럼 쓰여 있는 문구이다. 6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용산참사 현장은 말 그대로 죽음의 땅으로 남겨져 있다. 2009년 1월 20일 이후로 시간이 멈춰진 채로 원통한 삶을 살아가는 유가족들이, 멈춰진 그 땅을 바라보며 하는 말을 누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반드시 용산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고, 무리한 진압 책임자들, 그리고 잘못된 개발사업을 밀어붙인 이들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들 책임을 물어야 한다. 용산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필요한 이유는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적인 참사가 되풀이지 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책임을 묻기 위한 싸움을 다시 시작한다. <노사과연>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0개의 댓글

연구소 일정

3월

4월 2024

5월
31
1
2
3
4
5
6
4월 일정

1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3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4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5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6

일정이 없습니다
7
8
9
10
11
12
13
4월 일정

7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8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9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0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1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2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3

일정이 없습니다
14
15
16
17
18
19
20
4월 일정

14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5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6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7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8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9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0

일정이 없습니다
21
22
23
24
25
26
27
4월 일정

21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2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3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4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5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6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7

일정이 없습니다
28
29
30
1
2
3
4
4월 일정

28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9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30

일정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