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사건, 해방운동의 현주소> 삭제 요청에 대한 반론

—사회주의가 성폭력 문제 앞에 당당하기 위하여

류한수진 |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 서울대분회 평회원,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

《정세와 노동》, 《FOCUS》 등 <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사건, 해방운동의 현주소>라는 나의 글을 실은 매체들에 최근 들어 삭제 압박이 들어오고 있다. 해당 사건의 가해 조직인 노동자연대(당시 다함께)에서 ‘허위사실이고 명예훼손’이라며 글 삭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내용증명을 보내며 소송을 운운하고, 피해자를 지원하는 동지들을 예고도 없이 여러 명이 찾아가 압박하는 등 매우 무례하거나 심지어 위협적인 행동까지 하고 있다. 나에 대해서도 긴 글을 여럿 할애하여 십자포화를 쏟아내는 중이다. 노동자연대가 페이스북에 올린 내 글을 인용하며 반박하고 있기에, ‘인용하며 반박할 거라면 전문을 게재할 권리를 주는 것이 공정하다’고 요청했으나, ‘허위사실이 담긴 글을 다른 매체에 게재한 상태’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노동자연대가 성폭력 및 2차 가해 사건을 ‘중상모략 및 명예훼손 사건’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나와 대책위1) 동지들은 공히 정식 매체의 지면을 얻어 이들의 주장에 대해 사실과 이치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기고글 원필자로서 노동자연대의 주장들을 반박하고 이 문제에 대한 나의 현재 입장을 확인하는 반박글을 기고글을 실었던 두 매체에 보낸다. 이 글은 전에 내 페이스북 계정에 올렸던 글들을 바탕으로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힌다.

1. 사건에 관한 노동자연대의 주장과 나의 반론

노동자연대의 입장은 한 마디로 내가 “노동자연대 낙인찍기를 목적으로” 노동자연대를 “터무니없이 중상 비방” “날조 음해” 해왔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한 문장 한 문장이 사실 왜곡이거나 그릇된 추측, 혹은 거짓말이라 틀린 부분을 전부 반박하려면 책 한 권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책을 읽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니, 여기에서는 사건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주장들만 요약하고 반박하도록 하겠다. 나와 대책위 둘 다가 노동자연대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나에 관한 비난들만 주로 다루도록 하겠다. 이 글은 대책위에서 인준을 받고 쓰는 것이 아니라 내 개인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여기서 책임지고 해명할 수 있는 부분은 나에 관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1-1. 노동자연대를 ‘가해 조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노동자연대가 이 사건을 “불순한 의도로 재구성된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핵심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정황상, 가해자인 이**가 포르노를 보여줄 당시 다함께 회원이었던 정**는 가해에 가담하지 않았다. 정**가 성희롱에 가담했다는 피해자의 진술은 신빙성이 의심스럽다. 따라서 노동자연대는 원사건 가해에 대한 책임이 없다. 2) SNS에서 회원들이 단 덧글은 피해자의 주장에 대한 합리적 의심과 진상에 대한 토론이었고, 조직적 의결에 따른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이 행동은 2차 가해도 아니고 조직적 행위도 아니다.

지지모임과 대책위에서 냈던 숱한 선전물 중에는 이**가 했다고 지목된 행위(평상시 교지 내에서의 성희롱을 했다는 것 등)를 마치 정**가 함께 한 것처럼 표현되거나, 누가 주 가해자고 누가 공범이나 동조자인지 구분되지 않거나, 이**도 다함께 회원인 것으로 오인할 수 있게 서술된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 이런 실수 중 일부는 내 직접적 책임이 있고, 이에 대해 사과한다. 그러나 사건의 전체 흐름을 본 사람이라면 이런 발언들이 일관된 거짓말이 아니라 사건을 매우 압축적으로 서술한 한두 개의 글에서 일어난 말실수였고(지지모임의 입장서와 기고글들은 대부분 이**와 정**의 소속에 대해 정확히 명기하고 있다.) 사건의 핵심도 아니며 지지모임의 입장과도 관련 없다는 것을 너무나 명백히 알 것이다. 피해자와 지지모임이 문제 삼은 것은 이**가 다함께 회원이었는데 다함께가 이**를 징계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다함께가 성폭력 문제 해결에 대한 정치적인 요청을 짓밟았다는 것이다.

사건 초기부터 지금까지 나의 입장은 ‘피해호소인과 가해피의자들이 공히 인정하는 사실만으로도 이 사건은 성폭력이며 다함께의 행동은 2차 가해’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a. 편집장 이**가 포르노 동영상을 틀었고 b. 피해호소인은 싫어했으며 c. 다함께 회원이었던 편집위원 정**는 옆에서 상황을 보고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까지를 확인하고 피해호소인을 실제 ‘피해자’로 판단했다. 그리고 여전히 이것이 판단에 핵심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함께 회원 정**와 다함께의 책임은 어느 정도인가? 피해자의 진술에 따르면 정**는 단순방조자가 아니라 같이 성폭력을 저지른 공범이고 정**의 진술에 따르면 방조자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쪽의 진술이 맞는지는 아직 객관적으로 입증된 바 없다. 법정 판결은 정**측의 진술을 근거로 ‘강제로 야동을 보여준 것을 함께하지는 않았다’고 판정했으나, a. 우선 왜 피해자의 진술이 아니라 가해자의 진술을 채택했는지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고 b. 피해자가 정**를 공범으로 적시한 것은 정**가 포르노가 담긴 휴대폰을 같이 조작했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의 행위에 맞장구를 치고 성희롱적 농담에 동조했다는 이유에서인데, 후자의 행위가 없었다고는 쓰고 있지 않다. 형법 민법적으로는 포르노를 같이 틀지 않았다면 ‘공범’이 아닐지 모르나, 포르노를 같이 틀지 않았어도 피해자에게 포르노를 볼 것을 종용하고 전후로 한 성희롱에 동조했다면 정치적으로는 ‘가담’이라고 보고 그에 맞게 책임을 지우는 것이 당연하다.

무엇보다, 공범인지 방조자인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더라도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은 있다. 그리고 다함께의 책임이 문제되는 한 그 부분만으로도 근거는 족하다. 가담은 더 잘못이고 방조는 덜 잘못이기는 하지만 둘 다 올바른 활동가라면 하지 말아야 될 잘못인 것은 같다. 그러므로 다함께는 정**가 가담을 했든 방조를 했든 회원의 행동을 반성하고 시정토록 할 책임이 있었다. 지지모임이 정**가 공범이라고 강변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지 피해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다.2)

더 중요한 것은, 피해자는 정**가 회원이기 때문에 다함께에 책임을 물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나 역시 정**가 회원이었기 때문에 다함께를 ‘가해 조직’이라고 칭한 것이 아니다. 피해자의 폭로는 다함께 내부에서 성폭력에 대한 문제 제기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내가 피해자의 편을 든 것은 이 폭로에 대해 다함께 회원들이 SNS상의 집단린치로 응답했기 때문이다. 정**가 공범이었든 방조자였든 이 부분은 변하지 않는다.

요컨대, 1) 회원 정**가 성폭력에 직접 가담한 것인지 방조한 것인지는 진술이 갈리지만 어느 쪽이든 잘못한 것에는 틀림이 없고 그렇다면 다함께는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2) 또한 피해자가 다함께에 사건 해결을 요청했으므로 다함께는 사건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회원 정**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이**의 행위를 비판하고, 이**에게 사과와 시정을 요구하는 것 정도가 이 단계에서 적절한 대응이었을 것이다.

이상의 근거에서, 원사건에 관해 이미 다함께가 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다함께 조직 자체를 ‘가해자’라고 부르는 것은 과도하다. 진짜 문제는 피해자가 사건을 폭로한 뒤에 일어났다.

피해자가 다함께에 대해 조치를 촉구하며 사건을 폭로하자, 다함께 회원들, 특히 학생조직 책임자를 비롯한 대학생 회원들은 피해자에게 정신이 이상하다느니 연애결별에 대해 앙갚음하려고 이런다느니 등 온갖 입에 못 담을 인신공격과 언어폭력을 퍼부었다. 그리고 이것은 피해자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몇몇 개인의 사적 감정 분출이 아니라 조직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한 조직원들의 대응이었다. 이는 다함께가 조직 기관지에 이 때의 인격 모독과 언어폭력을 합리화하거나 심지어 반복하고 있다는 데서도 재확인되는 바이다. ‘조직의 의결 절차를 거치지 않은 행동’이라는 이유로 이것이 ‘조직적 가해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노동자연대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군색한 변명”에 불과하다. 그것을 그 자체로 성폭력 가해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이것이 성폭력 2차 가해에 해당하는 행동임은 ‘2차 가해’라는 개념의 사전적 의미를 수용한다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더구나 이 때 다함께 회원들의 언사 중 상당수는 성폭력이라는 맥락을 빼고 봐도 영락없는 언어폭력이었다. 이것이 조직적 가해가 아니면 무엇이 조직적 가해인가? 성폭력을 저지르자고 조직 운영위원회에서 의결이라도 해야 ‘조직적 가해’가 성립하는가?

이 대목에서 노동자연대의 주장은, 여태껏 나왔던 글 중에서도 가히 압권이라 할 만하다. 피해자는 경계선 인격장애 환자이며, 이 사실은 사건이 악의적으로 날조된 것임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하므로 ‘연애결별의 앙갚음’이니 ‘자살시도’ ‘우울증’ 등의 말들은 “진상에 대한 해명”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이 2차 가해라는 피해자 측의 지적을 “구체적인 맥락과 사실관계를 일부러 회피하는” “교활함”이라고 도리어 비난하고 있다. 무오류의 조직의 외견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연대는 도대체 어디까지 전락하고 있는가!

정신과 의사도 아닌 사람들이 만난 적도 없는 사람에 대해 정신병을 진단하며 낙인찍고 그것을 그 사람을 비방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정신병에 대한 부정적 편견에 편승하며 그것을 강화하는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가? 그건 차치하고라도, 이 주장대로라면 다함께는 상황에 대해 얼마나 할 말이 없었기에 말한 사람의 인격을 공격하는 식으로밖에 “진상을 해명”할 수 없었단 말인가? 노동자연대는 지금 진술하는 사람에게 인격장애가 있다면 진술을 악의적 날조라고 가정하고 독해하는 것이 정당화된다고 말하고 있다. 정신질환자들에게서 시민권을 박탈하자는 주장과 다름이 없다. 사회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이런 발언이 나오는 것 자체가 끔찍한 일이다.

게다가 다함께는 가해자로 지목된 정**가 명예훼손 소송에 나서도록 부추기고, 소송에 관해서 보고를 받았으며, 정**가 소송을 그만두려고 하자 그러지 못하도록 압박하였다. 노동자연대는 “노동자연대가 소송에 조직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대책위에서 입수해 공개한 노동자연대 대의원협의회 자료집을 보면, 다함께 학생팀 담당자가 정**와 소송에 대해 상의하였고, 정**가 민사소송을 할 경우 비용은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모금을 하든가 해야지”하며 조직에서 지원할 의사를 비추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노동자연대는 이후 실제로 비용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변호사 선임이나 비용 마련 등을 정**와 그 대리인 이**가 알아서 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정**가 소송에 돌입할 당시 다함께가 이를 종용했다는 사실을 무효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에게 소송을 하라고 해서 총알받이로 내세워놓고, 막상 약속과 달리 부담은 전부 떠넘긴 무책임이라고 비난받을 만한 행동 아닌가?3) 게다가 피해자에게 가장 앞장서서 온갖 인격모독과 인신공격, 비방을 퍼부어온 사람이기도 한 정**의 대리인 이**(필명 D*******)는 사건 직전까지 다함께 회원이었다가 ‘이 사건에 집중하기 위해 잠시 다함께 활동을 중단하겠다’며 다함께를 탈퇴한 인물이다.

게다가 다함께가 소송 이후에 완전히 개입을 중단한 것도 아니다. 이**를 통해 소송에 대해 보고를 받고 있었으며 정**가 소송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여러 차례 비쳤으나 담당자였던 최**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정**를 압박한 사실이 상술한 자료집 글에서 드러나고 있다.4) 또한 한 대학에서는 다함께를 비판하는 대자보가 붙자 다함께 회원들이 자보 인쇄를 해주는 곳에 찾아가 ‘소송을 준비하고 있어서 그러는데, 이 자보를 출력한 사람이 누군지 알려달라’고 요구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들은 심지어 인쇄 담당자가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거절하자 ‘그러면 우리가 CCTV를 돌려볼 테니 자보를 인쇄해 간 시간이라도 알려달라’고 요구하는 집요함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했을 때, 다함께가 소송에 들어간 후 사실상 정**와 이**를 방치해 두었다고 하더라도 배후에서 소송을 압박했다는 점에서 조직적 책임은 분명하고 부정할 수 없다.

1-2. 류한수진은 무조건 피해자 말을 들을 것을 강요하고 있는가?

노동자연대가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또 하나의 입장은 이번 사건이 피해자중심주의와 지나치게 확장된 성폭력 개념, 무분별한 2차 가해 규정 등 잘못된 개념에 의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나와 대책위가 피해자의 말을 무조건 사실로 취급하면서 성폭력이 아닌 것을 무리하게 성폭력이라고 규정하고, 이에 대한 합리적 토론을 2차 가해라는 이름으로 봉쇄하였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노동자연대의 근거는 크게 세 가지다. 1) 원사건은 성폭력이 아니라 성희롱에 불과한데 피해자 측은 성폭력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2) 사건 폭로 후 대책위가 진상조사를 실시하지 않았고 3)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는 사람을 다 2차 가해자로 몰았으며 4) 내가 정**를 단순 방조자가 아니라 공범으로 지목하는 등 진술이 다른 부분에서 피해자의 입장을 사실로 선전했다는 것이다.

첫째 지점에 대해서는 원 기고글에서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하니 길게 말하지 않겠다.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의 자보 한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달은 ‘여성에 대한 폭력’ 일반을 전부 성폭력으로 규정하는 광의의 성폭력 개념이 잘못되었고, 성폭력을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 정의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성폭력이 여성의 ‘정조’에 대한 침해가 아니라 ‘인간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침해라고 말해 온 것은 반성폭력 운동의 정당한 문제의식이자 소중한 성과였다. 이것을 부정하고, 강간만을 성폭력으로 간주하려는 노동자연대의 시도는 명백한 오류이고 퇴보이다. 성폭력이 여성의 ‘정조’에 대한 침해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에 대한 침해라면, 당연히 성폭력 개념은 언어적인 것이든 신체적인 것이든 다른 매개에 의한 것이든 모든 종류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를 포괄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타당하다. 노동자연대처럼 ‘성희롱’이라는 말을 끌고 오는 것은 아무런 운동적 의미도 없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거부하는데도 포르노를 보여주는 행위는 명백한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서, 여기에 성폭력 이외의 이름을 붙이기 어렵다.”

둘째 주장은, 그야말로 적반하장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애초에 진상조사나 문의도 없이 피해자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며 난도질한 것은 바로 다함께였고, 대책위는 이 행위에 충격 받은 활동가들이 피해자 주변으로 결집하면서 만들어진 조직이다. 그리고 결성 직후부터 대책위는 양자 납득할 수 있는 절차에 의한 해결을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반면 다함께는 사건에 대해 피해자에게 진술 한 번 요청하지 않고 사건을 ‘명예훼손’으로 규정하였다. 일방의 말만 듣고 사건에 대해 결론내리고 있는 것은 어느 쪽인가?

셋째 지점에 대해서는, 노동자연대가 말하는 이른바 ‘합리적 의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앞에서 충분히 보았으니 더 말하지 않겠다. 나는 진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행동을 2차 가해라고 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2년이 넘게 입이 부르트도록 반복해 온 말을 여기서 다시 한 번 하자면, 이 사건에서 2차 가해로 지목된 행동은 <피해자의 말을 거짓으로 단정짓고 인신공격과 언어폭력을 퍼부은 것>이다. 정신이상, 연애결별, 정치적 음해를 운운하는 악성 덧글이 ‘합리적 의심’이라면 노동자연대 중앙의 눈에 ‘비합리적’인 의심이란 것이 도시 존재할 수나 있는지 의심스럽다.

넷째 지점에 대해서는, 피해자의 대리인이자 지지모임 회원으로서 피해자의 주장을 선전한 것은 당연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물론 옮기는 과정에서 일방의 주장을 확인된 사실처럼 읽힐 수 있게 쓴 부분은 일부 있고, 그 점에 대한 비판은 기꺼이 인정하고 시정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실수로 그런 문구가 누락된 몇몇 문장들을 제외하면 나는 모든 글에서 일관되게 ‘피해자의 폭로에 따르면’ ‘~라고 했다’ 등의 문구를 넣는 등 이것이 누구의 주장인지를 밝히려고 했으며, 이는 ‘확인되지 않은 주장은 기정사실과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른 것이었다.

노동자연대는 물론 그런 단서와 관계없이 일방의 주장을 선전해준 것 자체가 ‘기정사실화’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입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당시 피해자는 개인으로서 조직과 맞서고 있었고 나는 이 조직에 뭔가를 권고하거나 중재할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누구도 그런 역할을 맡겠다고 나서고 있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그런 입장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이것이 내가 ‘피해자중심주의’를 배격하는 이유다), 그래서 ‘양자 납득할 수 있는 절차를 통한 해결’을 계속 주장했지만, 나는 이 힘의 불균형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우선 피해자의 말을 좀더 신뢰하고 피해자를 지지 지원하는 사람들이 적어도 몇 명은 필요하다고 봤다(이것이 내가 ‘지원자들이 피해자의 편을 드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 이유다). 그게 이 사건에서 내가 택한 역할이었고, 나는 여전히 이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만약 당시에 누구도 어느 쪽에도 힘을 싣지 않고 모두가 중립적인 입장에서 사태를 관망했다면, 피해자의 입장은 그냥 묻히고 사건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그렇게 끝나고 말았을 테니까.

1-3. 류한수진은 거짓말을 하고 다니는가?

노동자연대는 마치 나나 대책위가 주장한 대부분의 내용이 허위사실이고 날조인 것처럼 쓰고 있지만, 실 내용을 들여다보면 ‘허위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은 두 가지 정도다. 1) 다함께 내부에서 여성이 뒷바라지하는 것이나 데이트 강간, 가정폭력 등에 대해 문제의식 없이 용인되는 분위기였다는 서술. 2) 다함께가 여성의 전화 주관 진상조사를 거부했다는 주장.

우선 첫째 지점에 대해서 경위 설명을 좀 해야겠다. 이 부분에 대한 서술은, 다함께 활동 당시 일부 회원들 사이의 연애관계에 대한 다른 회원들의 발언 등 피해자가 경험한 다함께 기풍에 대한 진술을 요약한 것이었다. 피해자는 나에게 성폭력 사건에 대해 회원들끼리 있는 자리에서 ‘숙박업소에 같이 갔으면 성관계에 동의한 것 아니냐’는 발언이 나왔고 아무런 문제제기가 없었으며, 커플 사이에 데이트강간이 있거나 여성이 뒷바라지하는 역할로 떨어지는 경우에도 이를 비판하는 회원이 없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그런 경우가 있어도 비판하지 않고 넘어갈 정도로 분위기가 성인지적이지 못했다는 것이지, 노동자연대의 주장처럼 이런 일이 “횡행했다”고까지 말한 것은 아니다.) 나는 다함께의 내부 문화에 대한 피해자의 이러한 진술이 ‘내규와 교육이 필요하다’는 피해자의 요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것을 글에 집어넣었다. 물론 내가 겪지 않은 사실을 마치 내가 보증할 수 있는 사실인 양 쓴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때문에 노동자연대에서 공문을 받은 후 노사과연 동지들께 부탁드려서 이 부분은 ‘~라고 전해 들었다’는 말을 붙여 수정하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 노동자연대는 “날조도 출처만 대면 비방이 아니라는 강변”이라며,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근거로 고발하는 것은 허위사실 유포”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이 주장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노동자연대의 말이 진실이고 피해자의 말은 거짓이라고 철석같이 믿는다면야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왜 그렇게 믿어야 하는가? 피해자의 증언이 날조라는 주장은 “검증된” 것인가? 누구에게? 노동자연대가 2년간 “개인들끼리 해결하라”라며 대화 자체를 거부해 온 바람에 양측의 주장은 검증될 기회도 없었다. 그러니 노동자연대식 논리대로라면 이 주장도 ‘검증된 적 없고’, 따라서 노동자연대의 주장 역시 ‘허위사실 유포’이다.

잠시 말장난을 용서 바란다. 노동자연대 회원들은 피해자의 말이 거짓이라고 믿고 있으며, 나는 피해자의 말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 이 상황에서 ‘~~는 이렇게 말하고 있고 나는 이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각자의 권리이고, 그것은 성급하거나 잘못된 판단일 수는 있어도 거짓말이 될 수는 없다.

나는 조직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피해자가 이런 고발을 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사실’이며, 이 고발의 내용이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이 아니라 개인의 주장이라는 것을 명시하는 한에서는 이 고발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가는 읽는 사람이 판단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주류 언론에서도 고발이나 비판이 물증을 심사하는 단계를 거치기 전에 그 자체로 뉴스거리가 되는 일이 종종 있다.

이런 류의 선전에 대한 책임은, 그 판단이 검증됨으로써 지게 되는 것이다. 만일 피해자의 고발이 거짓으로 드러난다면, ‘고발이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다함께 내부 문화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추론을 제출한 나의 신뢰성도 당연히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내 잘못은 ‘허위사실 유포’가 아니라 기껏해야 ‘잘못된 고발을 성급하게 신뢰한 것’이 될 것이다.5)

둘째 지점에 대해서도 ‘새빨간 거짓말’ 운운하는 것이 전혀 정당치 않다는 점을 확실히 하고 싶다. 노동자연대의 주장과 달리 내가 지지모임에 있던 당시 지지모임은 계속해서 양자 납득 가능한 사건 해결 절차를 모색하고 있었고, 이에 진상조사와 사건에 대한 토론을 주관할 단위를 계속 찾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때 지지모임을 도와주고 있던 한 여성 활동가분이 있었는데, 이 분이 ‘내가 여성의전화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여성의전화에 의뢰하면 진상조사를 주관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다. 이에 지지모임은 ‘여성의전화 주관 진상조사가 가능할 것 같다. 응하라’는 요구를 노동자연대에 공개적으로 했다.

그런데 글을 올린 후 자신이 여성의전화에서 일을 한다는 사람이 허위사실을 유포하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이에 경위를 설명드리고 필요하다면 공개사과하겠다고 했고 다음날 여성의전화 상근자에게 전화가 와서 진상조사를 주관할 의향이 없음을 확인하였다.

여성의전화 공식 입장을 타진하기 전에 공개제안부터 한 것은 분명 성급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악의적인 거짓말이 아니라 의사소통 과정에서의 착오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이후에 ‘여성의전화에서 진상조사를 하려고 했는데 노동자연대가 거부했다’는 식으로 말한 적은 전혀 없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그런 언급이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보여주기 바란다. 오히려 이걸 가지고 ‘거짓말을 하고 다닌다’고 말하는 쪽이 악의적인 왜곡 아닌가?

내가 이런 글을 올리자 노동자연대는 “다시 말하지만 피해자 지지모임과 대책위는 내가 활동했던 8개월 내내 양자가 납득할 수 있는 절차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자고 요구했고 다함께-지지모임 면담, 대리인 간 면담, 운동 단체들의 테이블, 여성단체에 의한 진상조사 등 구체적인 제안도 여러 가지 했다.”라는 부분이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이게 왜 거짓말인가? 비록 여성의전화가 응할 의지가 없는 상황에서 잘못 들어간 제안이었지만, 지지모임이 이런 방안을 모색하고 제안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공정한 절차로 사건을 해결하려는 지지모임의 노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근거이다. 이를 두고 ‘단체 섭외까지 끝났는데 다함께가 거부해서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니 안 될 말이지만, 그렇다고 ‘여성단체에 의한 해결을 제안했다’는 사실까지 감추고 말하지 말라는 것은 피해자 측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실을 한 마디라도 덜 말하게 만들고 싶은 노동자연대의 억지 요구에 불과하다.

1-4. 류한수진은 피해자를 믿지 못하는가?

다음으로, ‘심지어 류한수진이나 대책위도 피해자를 믿지 못한다’는 주장에 대해 (다시 한 번) 답변하겠다. 노동자연대는 피해자의 입장을 존중하고 지지한다는 류한수진과 대책위 본인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피해자와 지원자들 사이에 모종의 불신이 있다는 추측을 고수하고 있는데, 나에 관해서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내가 법정에서 “사과문”을 쓰고 발을 뺐으며 지지모임을 그만뒀다는 것이다.

나는 법정에서 ‘사과문’을 쓴 적이 없다. 지지모임에 참여하게 된 경위와 입장에 관한 진술서라면 쓴 적 있다. 그 진술서는 내가 왜 사건에 뛰어들게 되었고, 왜 노동자연대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으며, 현재는 어떤 입장인지를 설명하는 글로써, 피해자의 주장을 모두 믿은 것은 아니지만 드러난 것만으로도 노동자연대의 행동에는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내용으로 근거는 1-1과 비슷했다. 다만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일방의 주장을 사실처럼 쓰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피하려고 노력했고, 그런 잘못을 범한 적이 있는 것을 반성하고 사과한다는 내용이 두 페이지짜리 진술서 끄트머리에 딱 두세 줄 들어가 있다. 그것을 거기에 집어넣은 이유는 실제로 잘못한 부분은 인정하는 게 상호 간 소모적인 논쟁과 불필요한 상처를 줄이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내용은 노동자연대가 어떤 잘못이 있고, 여기에 항의하는 게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내 주장으로 채워져 있다.

이것이 노동자연대가 “사과문”이라고 부르는 글이다. 이게 법정에서 도망가기 위한 반성문인가? 이 사건에 대한 내 판단과 입장을 철회하는 것인가? 앞에서도 물었지만, 이거야말로 악의적인 왜곡이고 비방 아닌가?

다음으로 지지모임을 그만두게 된 경위에 대해 설명하겠다. 노동자연대는 당사자들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는데도 계속해서 ‘류한수진도 피해자를 못 믿어 대책위를 나왔다’라는 스토리를 고수하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나는 첫째로 지지모임 성원들 일부와 여성주의에 관한 사상적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둘째로 그 갈등을 감당하기에 감정적으로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에 지지모임을 그만두고 대리인 두 명은 소송에서 빠지라는 판사의 중재를 받아들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나는 피해자중심주의를 폐기하고 성폭력을 성차별이나 성별권력관계의 작용 일반이 아니라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 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 지지모임 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좌절해서 지지모임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사건에 관한 피해자의 입장과 요구를 지지한다는 견해는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이견이나 갈등은 최대한 논쟁하고 설득해서 풀어가는 것이 옳다는 점에서 내 탈퇴는 정신적 심리적 나약함에서 기인한 무책임한 포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내 입장의 변화나 피해자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다는 노동자연대의 해석은 완전히 번지수를 잘못 짚고 있다. 나는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이 사건이 전체 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핵심적인 지점들에서 피해자의 편이며, 노동자연대가 사과하고 재발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은 이유에서, 피해자중심주의나 확장된 성폭력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도 이 사건이 성폭력이고 노동자연대는 조직적 책임이 있다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에서도 이 사실을 소상히 설명하면서 노동자연대를 비판하고 사건 해결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

좀더 일반적인 차원의 논의로 넘어가기 전에, 노동자연대가 글을 읽고 쓰는 태도에 굉장히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노동자연대는 의도적으로 지엽적인 사실들을 핵심인 양 부각시키면서 논점을 흐리고 있으며(가령 여성의전화 차원 진상조사를 제안한 건을 가지고 노동자연대가 사건해결을 거부해왔다는 비판 자체가 날조라는 식으로 일반화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나의 말이나 글을 앞뒤 내용에서 떼어내 전혀 다른 의미로 왜곡시켜 유포하고 있다(가령 노동자연대를 비판하는 내용의 진술서를, 그 과정에서 저지른 몇 가지 실수에 대한 사과가 들어 있다는 이유로 ‘반성문’ ‘사과문’이라고 부르며 내가 입장을 철회하고 도망쳤다는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이래서는 조중동 같은 극우 황색저널과 무엇이 다른지 하나도 모르겠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 동지들이 인신공격과 사생활 침해, 심지어 ‘정신병’ 진단과 낙인찍기 등 언어폭력까지 마다치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운동 사회에서 논쟁의 방법으로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사건에서 성폭력을 대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원칙이 흔들리는 것 못지않게, 노동자 계급 운동 내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는 것이 우려스럽고 불안하다.

분명히 해야 한다.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는 정치세력끼리의 논쟁과 대립은 철저하게 사실과 논리에 기반한 상호 조직화와 설득, 혹은 최소한 대중에게 지금 사태의 핵심 쟁점이 무엇이며, 누가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지 명료하게 드러내는 선전의 과정이지 폭력을 사용해 서로를 공격해 쓰러뜨리는 패싸움이 아니다. 폭력은 적들에게나 쓰는 것이다. 물리적 폭력은 물론이고 인신공격이나 욕설, 인격모독 등의 언어폭력은 그 어떤 경우에도 운동사회 내의 이견과 갈등에 대응하는 올바른 방법으로 인정될 수 없다. 사실 왜곡과 흑색선전도 마찬가지다.

상황의 본질이나 진상을 편집하고 감추고, 동지들의 신상과 인신을 공격해서라도 ‘이기고 보면 된다’라는 정신으로 운동을 한다면, 앞으로 그 폐단과 소모가 얼마나 클 것인가? 운동 내의 갈등이 매번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면 노동자 민중의 단결과 승리가 도대체 가능할 것인가? 이것은 단순한 도의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 투쟁 전체의 성패가 달린 문제다.

2.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여성주의와 성폭력

지면이 주어진 김에 이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을 포괄적으로 써보려고 한다. 내가 서울대 대책위 사건(이른바 ‘담배 성폭력’ 사건)에서 그 난리를 겪고도 왜 또다시 성폭력 피해자의 편에서 성폭력 사건에 개입했는지, 지지모임에서는 왜 탈퇴했는지, 그런데 왜 여전히 피해자를 지지하는지, 이 글을 읽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2-1. ‘페미니즘’과 ‘여성 해방’에 관해서, 또는 왜 사회주의자는 성폭력을 외면하면 안 되는가

나는 사회주의 활동가가 여성해방과 성평등을 지향해야 한다는 말에는 백번 동감하지만 ‘페미니즘’을 수용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적어도 ‘페미니즘’이 사회주의와 분리된 독자적인 여성해방운동 및 그 운동의 사상(주로 가부장제 이론을 골자로 한)을 말하는 한에서는 그렇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 체제를 세워서 노동자나 농민 등의 피억압 계급과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청소년이 모두 해방될 수 있는 전체 운동이, 지금 사회의 온갖 부조리에 대한 내가 아는 유일한 현실적이고 근본적인 대안이다. 그리고 그 운동의 핵심적 정강은 경제적·정신적 생산 수단을 사회화하여 재화와 용역, 지식과 문화, 그리고 인간의 생산·재생산을 사회적으로 결정하고 수행하는 것, 즉 ‘생산수단의 사회적 통제’이다. 그렇게 되면 생산의 목적에서 이윤 축적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가 우선이 될 수 있고, 절차에서 기업가의 전제 대신에 민주적인 통제가 자리잡을 수 있다. 그런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하루종일 녹초가 될 때까지 일하는 동안 어머니는 집에 갇혀 청소하고 애를 봐야 할 이유가 없고, 실업과 빈곤을 두려워하는 여성이 ‘취집’으로 도피하고 가족에 의존할 필요가 없고, 그래서 여성이 남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어머니 노릇을 (혼자) 감당하는 데 그렇게나 많은 정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투쟁에서 핵심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며, 작업 현장에서 생산수단을 다루고, 매일 직접적으로 계급모순과 맞부딪히고 있는 노동자들이다.

나는 이러한 운동이 사회주의 운동 바깥에서 따로 건설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성 해방을 위해 필요한 변혁이 사회주의라는 기획의 분리불가능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출산, 양육을 사회가 책임지고 남성, 여성 모두에게 육아와 가사노동에 쓸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하는 것은 생산수단이 사적으로 소유되어 무정부적으로 운용되는 이윤 본위의 경제에서는 불가능하다. 역으로, 사회의 성원들이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생산을 계획하고 통제할 것을 요구하는 경제시스템은 사적 가족의 울타리에서 개인과 가족의 안위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이기적 인간들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복리를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애초부터 공동체 속에서 길러진 인간들이 성원이 되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다. 러시아의 혁명가이자 당대의 가장 탁월한 여성해방운동가 중 하나였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공산주의와 가족>에서 이러한 전망을 훌륭하게 정식화했다.

그렇다고 생산 수단의 노동자 통제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성차별이나 성폭력 같은 문제는 뒤로 치우자는 단계론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사회주의자는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의 호민관’이 되어,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청소년 등 사회주의 건설과 이해를 같이하는 모든 사람들의 자기해방에 대한 열망을 고취하고 상승시키며 전체 운동 안에서 그 각각의 열망들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 민중의 단결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의 강령은 모든 부문에서 가장 진전된, 가장 해방적인 요구들을 담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사회주의 운동이 도덕적, 정치적 헤게모니를 전취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또한 유물론이 의식과 문화는 어찌되었든 경제 구조를 바꾸는 게 중요하다는 기계적 환원론이로 이해될 수도 없다. 한 사회는, 경제적인 구조가 먼저 세워지고 거기서 그에 맞는 이념과 사상이 솟아나오는 식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의식적 실천의 성과이고 따라서 이를 올바르게 해내려면 당연히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특히 모든 민중이 주체가 되어서 쟁취하고 건설해야 하는 사회라면, 투쟁 과정에서 의식과 문화를 쇄신하는 이데올로기 투쟁이 없이는 생겨날 수 없다. 경제적 구조는 이데올로기를 규정하지만, 낡은 생산양식을 타파하는 투쟁과 낡은 이데올로기를 타파하는 투쟁은 함께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주의가 사회주의의 일부라는 것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노동자들이 자기 할 일을 하면서 가끔 여성 사회주의자들이 하는 운동에 박수를 쳐주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여성 해방을 위한 요구들이 모든 사회주의자가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한 선전하고 실천해야 하는 사회주의 운동의 강령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거기에는 육아와 가사노동의 사회화, 모든 여성에 대한 양질의 일자리 보장, 남녀 모두에게 유급 육아휴직 보장 같은 내용뿐만 아니라 순결주의나 성녀/창녀 이분법 등 여성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와의 투쟁, 가정 내에서 가사노동의 균분을 위한 노력, 그리고 성차별이나 여성 비하 및 성폭력 사건의 올바른 처리 및 피해자의 권익 회복도 포함된다. 나는 이 점에서, 성폭력 문제에 대한 태도는 단순한 도의가 아니라 사회주의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사회주의를 국가 권력에 대해 사고하게 된 노동자주의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을 핵심 주체로 한 인간 해방의 이념으로 본다면 말이다.

2-2. ‘반성폭력 운동의 전통’에 관해서, 또는 왜 그 운동이 만든 모든 것을 배격할 수 없는가

100인위부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성폭력 특별법 제정 운동 때부터 제창된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성폭력’이나 ‘피해자중심주의’ 개념을 골자로 한 ‘반성폭력 운동’6)의 전통이 이런 이유에서 정당화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것은 실재하는 문제에 기반하고 있었지만 그 운동을 지도하는 사상과 기치는 거기에 대한 올바른 대답이 아니었다. 이 개념들은 사상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전선을 치고 이를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근본 모순으로 규정하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여성/피해자 당사자성을 주장하는 급진페미니즘이나, 그것을 사회주의와 어떻게든 양립시켜보려는 이원론적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근거하고 있다.

나는 이 사조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남성과 여성의 비적대적 모순을 본질적으로 적대적인 모순으로 취급하여 양자의 대립을 당연시하고, 이를 근본 모순으로 취급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남성 지배 사회이며 개별 남성이 지배집단으로서의 권력을 언제나 자기 편으로 동원할 수 있는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키고(실제로 개별 남성은 그러한 위치에 있지 않다), 대안으로 여성/피해자 당사자성을 주장함으로써 당사자의 경험과 느낌을 절대시하는 주관주의로 경도되기 때문이다. 서울대 대책위 사건에서 노출되었던 광의의 성폭력이나 피해자중심주의, 2차 가해 개념 등의 문제는 이러한 사상적 문제가 극단적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일말의 진실도 담고 있지 않은 사상은 세상에 없다. 그렇게 많은 활동가들이 한 가지 문제에 대해 그토록 천착해왔는데 그 문제에 관해 배우고 취할 성과를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았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일 것이다. 중심 원칙을 바로잡는 것을 그런 이유에서 방기하거나 미룰 수는 없지만, 세부적인 부분들로 들어가면 나는 남한의 반성폭력 운동이 발견하고 개척해온 경험들에서 참고하고 가져갈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또다시 억울하게 고통받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서, 여성들을 비롯해 성폭력을 당하기 쉬운 위치에 있는 약자들에게 조직 운동이 안전하기 위해서, 전체 인민 앞에서 운동의 신뢰를 위해서 말이다.

2-3. 성폭력의 범위의 확장에 대해서

성폭력의 범위는 시간이 흐르면서 확장되어 왔다. 강간에서 몰래카메라나 성희롱으로, 그 다음으로는 음담 패설이나 여성 비하 등 일상적인 언행들까지로. 나는 이것이 기본적으로 진보적인 경향이라고 생각한다. 이 맥락에서 ‘폭력’은 물리적 강제력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행동을 의미하는 바, 폭력의 범위가 확장되는 것은 곧 사회가 보장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인권의 수준이 향상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물론 감정적 상처에 무한히 민감해진다는 것이 꼭 인권을 향상시킨다는 뜻은 아니다. 폭력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객관적 준거를 갖추고 있을 때, 즉 사회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인정될 수 있는 특정한 권리에 기반한 것일 때 타당하다. 이런 맥락에서 ‘젠더 폭력’ 또는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성폭력’ 개념 즉 ‘어떤 권리가 침해되었는가’가 아니라 ‘성별권력관계에 기반해서 행위가 일어났는가’를 기준으로 하는 성폭력 개념은 아주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성별권력관계는 일상 속에 숨 쉬듯 존재하는 것이고 그래서 사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일어나는 어떤 행위에서나 성별권력관계는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점은, 실천적으로 피해자중심주의와 결합되어 여성이 그렇게 느꼈다면 무엇이든 성폭력이라고 부름으로써 완전히 주관적인 감정을 근거로 사람을 가해자로 만들 수 있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성적 자기결정권’은 객관적 규정이 상당 부분 가능한 개념이고, 따라서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서의 성폭력’에 대해서 이러한 비판은 타당하지 않다.

또한 폭력의 외연을 확장할 경우에 그만큼 ‘폭력’이라는 말 자체의 무게는 좀 줄어들 필요가 있다는 것도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하겠다. 나는 성폭력의 개념을 확장하는 것이 기존에 인정되던, 가령 강간이나 성추행의 무게감을 조금도 더 가볍게 하지 않으며 굳이 따진다면 그 반대일 거라 생각한다. 언어폭력이나 정서적 학대 같은 개념을 인정한다고 해서 폭행이나 납치감금 같은 범죄가 사회적으로 덜 지탄받는 것이 아니듯이. 그러나 성폭력의 외연을 확장한다는 것이 가령 의도치 않은 성적인 코멘트를 강간과 동일시한다는 뜻이라면 이것은 진보가 아니라 드라콘 법전으로의 퇴행이다. 거기에 따르는 응징이 물리적 형벌이든 사회적 지탄이든 마찬가지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악의 없는 언행들까지 폭력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역으로 폭력 자체를 일상에서 의도치 않게 생겨날 수 있는 상황으로 인식하고 또 그렇게 다룬다는 것이다.

성폭력은 분명히 폭력이고, 그에 맞는 비판과 제재가 따라야 한다는 인식은 반성폭력 운동이 확립한 소중한 성과이며, 여전히 유효하고 올바르며 필요하다. 그러나 성폭력의 개념을 확장하려면 모든 성폭력 가해자는 중죄인 취급받고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해야 마땅하다는 사회적 통념에 편승해서는 안 된다. 이는 강간이나 아동성추행 등 어떤 종류의 범죄에 대해서 그러한 통념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에게 욕설을 한 사람도 언어폭력을 저질렀다는 비판을 받고 제재를 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을 살인강도를 저지른 중범죄자처럼 비난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주장을 하면 피해에 경중을 둔다는 비판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첫째, 피해의 경중을 구분하는 것과 가해의 경중을 구분하는 것은 다르다. 즉 어떤 사람에게 사소한 말실수 하나가 폭행 만큼이나 모욕적일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과 그러므로 양자를 똑같이 처벌하자는 것은 다르다. 둘째, 일절의 경중이 없이 모든 잘못이 중범죄로 취급되는 세상 만큼 숨 막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싫다는 사람에게 포르노를 보여주는 행위가 강간과 등치될 수는 없지만, 그것도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폭력인 것은 맞다는 것이다. 그것을 성폭력이 아니라 성희롱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그 본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운동을 주도하는 사람이 그런 일을 하고 다닌다면 비판하고 시정하게 해야 한다. 그 사람이 자기 조직이나 대중 단위의 성원이라면 적절한 교육과 설득을 통해 태도를 고치도록 해야 한다. 잠재적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고칠 때까지 활동을 정지시키거나 배치를 바꿔서 여성들과 활동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사건의 원 가해자가 피해자가 성적으로 문란했다는 식의 말을 떠들고 다니기 전까지 피해자의 애초 요구사항은 그 정도였고, 나는 이 요구가 정당했다고 생각한다.

2-4.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 가해’에 대해서

‘피해자의 진술과 해석을 일차적으로 신뢰한다’는 ‘피해자중심주의’ 원칙이 실천적으로 낳은 폐해에 대해서는 길게 말할 것도 없다. 피해자중심주의는 노동자 계급 당파성의 급진페미니즘적인 대체물이며, 사실 당파성이라는 말 자체를 당사자주의와 혼동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원본보다 조악한 대체물이다. PT독재는 노동자 출신의 인사들에 의한 타 계급에 대한 전제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주도 하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가 농민이나 소상공인보다 선하고 훌륭한 계급이라는 감정적 경외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가 사회주의 건설의 주역을 담당한다는 과학적 분석에 기초한 것이고 그 한에서만 인정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폭력 문제에서 올바르게 당파적이라는 것은 피해자의 요구가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한에서 피해자를 지지한다는 것이지, 전자를 후자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 자체가 ‘올바름’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요소일 뿐이지 제일의 준거일 수는 없다. 그것을 혼동할 때 ‘피해자 권력화’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애당초 이 주장이 나오게 된 사회적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폭력 피해자가 겪는 억압과 무시는 부르주아 여성들이 만들어낸 신화가 아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아직도 많은 경우에 가해자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경기장에 서게 된다. 성폭력은(일상적 성폭력이 아니라 성추행, 성희롱조차도!) 여전히 너무나 자주 무시당하고 외면당하고 별 것 아닌 문제로 취급당하고, ‘피해자가 문란해서’라는 식으로 책임을 전가당하고, 심지어 공동체의 화목을 깬다는 비난을 듣는다. 정성을 다해 사건을 해결해야 할 주체들이 가해자를 옹호하고 보거나, 피해자에게 불필요하게 자세하고 모욕적인 질문을 쏟아붓거나, 혹은 그저 고압적이거나 무심한 자세로 문제제기를 외면해버리는 일은 지금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성폭력이 대부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기도 하고, 성폭력이 그 안에서도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저지르는 권력형 범죄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성폭력 피해 여성의 정조를 심사하려 드는 순결주의나 성폭력 사건을 가십거리로 삼는 비뚤어진 호기심이 여전히 사회에 만연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원인들에 맞는 적절한 조치를 통해 피해호소인에게 무게를 실어주지 않으면 성폭력 사건의 공정한 해결은 요원한 일일 수밖에 없다.

무게를 실어준다는 것이 꼭 피해호소인을 우선 믿고 본다거나 사건의 해결 과정을 피해호소인의 의사에 종속시킨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사건의 공정한 해결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서, 피해호소인을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세세하게 그리고 실효성 있게 노력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게 맞다.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개정학생회칙에서는 이를 ‘피해호소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라고 표현했다. 변혁재장전 그룹의 조형석 동지는 ‘피해자 중심주의’와 더불어 ‘피해자 중심 접근’이라는 표현을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다.

이름을 뭐라 붙이든 그런 조치들의 필요성을 포착하고 매뉴얼을 개발해 온 것은 ‘반성폭력 운동’의 하나의 성과였고, 그 매뉴얼은 핵심 원칙은 틀렸어도 새겨들어야 할 지난 실천의 교훈들을 많이 담고 있었다. 성폭력 사건을 무마하거나 은폐하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행동들을 유형화하고, 이에 대해 특별한 경계를 주문하게 된 것은 거기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

‘2차 가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이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나는 그 일부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피해자에게 재차 상처를 준다’는 이유로 단순히 이견을 제시하거나 피해자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2차 가해로 몰리는 것이 대표적인 폐단이고, 절차를 잘못 밟았거나 충분히 했어야 할 주의를 하지 않은 것이 적극적인 가해와 동치되는 등 과잉 책임을 지울 위험이 다분한 관례들도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밖에 부를 수 없는 행동들이 있고, 그것도 상당히 자주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즉 적극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혹은 미필적 고의로 사건 해결을 방해하거나 피해자를 억압하는 행동들이 있고, 그것은 단순히 ‘실수’나 ‘잘못’보다는 구체적이고 무게감 있는 표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당한 문제제기를 폭력으로 틀어막는 결과를 가져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거나, 그런 결과를 의도하고 피해호소인의 사생활과 성격을 거론하며 인신 공격과 폭언을 퍼부었던 다함께 회원들이나 명예훼손 소송을 걸고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함으로써 사건에 대한 공개 선전을 원천 금지하려 들었던 정**와 그 대리인의 행동은 2차 가해의 명확한 사례다. 다른 예로는 피해호소인에게 조력하는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보고를 차단하고 사건을 은폐하거나, 절차를 고의로 사보타주하는 등의 경우를 들 수 있겠다.

물론 ‘2차 가해’로 명명되는 행동의 대부분은 성폭력 피해호소인이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 해도 잘못이다. 하지만 이미 성폭력으로 인해 심리적인 외상을 입은 사람에게, 바로 그 사건에 관해 문제제기를 방해하거나 억압하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하는 데는 그냥 인격권이나 발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가 있다. 피해호소인에게 그것은 ‘네 고통을 말하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겠다’ ‘네가 폭력을 당해도 공동체는 관심이 없다’는 메시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시나 많은 경우에, 피해호소인에게는 폭언이나 발언권 제약이나 일처리가 제대로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메시지가 결정적인 상처가 된다. 그 상처는 원 사건으로 인한 상처보다 더 클 수도 있다. ‘자신의 피해에 대해 항변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부당한 피해를 입었을 경우 공동체가 이를 바로잡아줄 거라는 신뢰’가 인간 존엄과 얼마나 직결되는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나는 이러한 감정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각별히 조심해야 할 의무가 모든 사람에게 있고, 그렇지 못했을 때에는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누군가에게 폭력을 저질렀음을 인정하고 그에 맞게 책임을 지는 것이 맞다고도 생각한다.

앞에서와 같이 여기에서도, 피해호소인이 이러한 고통을 느꼈다고 해서 무조건 누군가가 가해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2차 가해’라는 말은 사건을 무마하고 피해자를 억압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에 대해서, 그것이 객관적으로 그러한 행동임을 논증할 수 있을 때만 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가령 문제제기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일이 밀려서 절차를 지연시켰다면, 피해호소인이 ‘나를 부차화했다’고 느껴 상처를 받는다고 해도 이것을 2차 가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그 일에 좀더 우선을 둘 여지가 없었는지, 일들을 미리미리 처리할 수는 없었는지 따져야 하고, 만약 이런 점에서 잘못이 있었다면 그 잘못으로 인해 피해호소인에게 상처를 주는 결과가 생겼다는 것을 감안해서 책임을 따질 필요는 있다. (정치적 책임이란 의도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과 결과에 따르는 것이니, 이건 사실 어느 경우에나 마찬가지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 행위를 폭력으로 규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비롯해서, 나쁜 결과를 낳지만 폭력은 아닌 행동들이 무척 많고, 거기에 대해 처벌이나 제재는 아니더라도 비판이나 경계는 가능하고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피해자에 대한 비방이나 인격 모욕을 퍼뜨렸거나 절차를 지연할 것을 모의한 경우 등이 아니라면, 피해자에게 직접 건넨 말이 아니라 사건에 관해 토론하는 과정에서 나온 단순한 이견이나 의문을 ‘2차 가해’라는 잣대로 검열하는 것은 반대한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와 관련된 일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든,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감안해달라고 요구할 사회적인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설령 대다수 구성원들의 보수적 견해로 인해 피해호소인이 이야기하기 힘든 상황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보수적 견해가 피해호소인에 대한 책임 전가나 비방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상 그것은 설득과 교육과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처벌과 제재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더 세밀하게 들어가면 아직 명료하게 하지 못한 부분들이 많이 있지만 나는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이론적 난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폭력이니, 피해자중심주의니, 2차 가해니 하는 원칙과 개념을 물신화하지만 않는다면, 원칙적인 대안은 간단하고 명확하다. 그리고 그 대안을 어떤 언어로 표현할지에 대해서는 굉장히 유연하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세하고 복잡한 지점들도 거기에 입각해서 하나하나 풀어가면 된다.

2-5. 성폭력 사건 해결의 원칙은 어떠해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성폭력 사건 해결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동은 성폭력으로 규정하는 것이 맞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성폭력 가해자를 중죄인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성폭력 사건은 공정한 해결 절차를 밟아야 한다. 한 쪽의 진술과 해석을 기정사실화하고 사건에 접근해서는 안 되며, 물증이나 진술의 일관성, 개연성 등 객관화될 수 있는 근거를 토대로 진상을 판단하고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사건의 성격을 평가하는 절차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동시에, 피해호소인에 대한 배려와 보호가 필요하다. 단, 가해피의자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신원 보호, 대리인 제도, 불필요한 질문에 대한 거부권 등 피해호소인이 안심하고 발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서, 사건을 은폐하고 문제제기를 묻어버리려는 경향을 적극 예방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해결을 방해하거나 피해호소인을 억압하는 행동은 폭력으로 규정하고 그에 맞게 조치해야 한다.

내가 피해자를 지지하는 까닭은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봤을 때 피해자의 요구는 정당하고 노동자연대의 입장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싫다고 고개를 돌리는 사람에게 포르노를 보여주는 행동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기 때문에 성폭력이고, 운동을 주도하는 사람이 이에 대해 반성이 없다면 이에 대해 비판하라는 요구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SNS상의 악플 테러는 단순히 부적절한 행동이나 합리적 논쟁이 아닌 명백한 ‘폭력’이었으며, 이것이 노동자연대 스스로 시인하듯이 조직의 명예를 위해서 조직원들 다수가 집단적으로 저지른 일인 이상 조직은 여기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할 책임이 있다.

나는 최근에 노동자연대가 보이는 행보가 너무나 안타깝다. 단순히 노동자연대라는 한 조직이 안타까운 것만이 아니라, 사회주의가 여성 문제에 관한 후진적 의식을 정당화하는 면죄부로 불려나오는 것이, 그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된 바람에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여성 문제 앞에서는 늘 위축되고 자신감 없어지거나 대중에게 불신을 받는 상황이 안타까운 것이다.

실제로 대오 내부에서 벌어지는 여성 억압에 대해 손을 놓고 있으면서,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선진 대중보다도 후진적인 의식을 고수하면서, 주류 페미니즘을 부르주아적이라고 욕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사회주의가 여성해방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의제와 운동들을 아우르는 헤게모니를 구축할 수 있는 방법은, 사회주의의 원칙 위에서 가장 선진적인 실천을 보여줌으로써 올바름을 입증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급진페미니즘의 사상을 받아들이거나 주류 페미니즘의 여론에 굴복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러한 운동을 극복하는 방법은, 그 운동 뒤에 있는 대중의 열망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해하고 조직하는 것뿐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나는 사회주의 운동이 그렇게 할 수 있기를 원한다. 2012년의 서울대 대책위 사건에서도, 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에서도 내가 가장 간절하게 바란 것이 그것이었다.

결론

노동자연대가 끊임없이 그러한 인상을 심어주려고 애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문제에서 전선은 분리주의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사이가 아니라 조직원에 의한 인권 침해를 호소하는 개인과 이를 침묵시키고 책임을 회피하려 드는 조직 사이에 그어져 있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름으로 후자를 비호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는 반여성적이고 몰성적이다’라는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오도된 비판을 마치 진실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점에서 운동의 대의와 결속을 해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성폭력에 대한 모든 문제제기가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발현도 아니거니와, 분리주의 페미니즘과 투쟁한다는 것은 성폭력을 비롯해서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여성해방의 올바른 전망으로 대중을 견인함으로써 그 운동을 대체한다는 것이지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편승하여 그 운동의 문제제기를 짓밟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 주체가 설령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조직이라 해도, 분리주의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누군가가 전자가 아닌 후자의 방식으로 투쟁할 경우 나는 분리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을 조금도 중단하지 않으면서도 전선의 이 편에 설 것이다. 그 운동이 그런 방식으로 패퇴했을 때, 민중들의 삶은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조금도 더 좋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연대의, 나아가 사회주의 운동 전체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는 것은 대책위나 나의 선전이 아니다. 지금 노동자연대가 쏟아내는 입장과 노동자연대가 하고 있는 실천적 대응이야말로 그 어떤 선전물보다도 많은 경악과 불신을 불러들이고 있다.

노동자연대에 다시금 부탁한다. 조직이 신뢰를 얻는 것은 무오류의 존재라는 표상을 방어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런 조직은 없다) 오히려 과오를 빠르게 고쳐나가면서 올바른 원칙을 정립하고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2차 가해를 중지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라. 그리고 공정한 사건 해결 절차를 마련하는 데 적극적이고 진정성 있는 자세로 뛰어들라. 그것이 노동자연대 조직에도 가장 나은 길이다.

사회주의 운동 전체에도 부탁한다. 이 사건에 대한 판단은 곧 성폭력 문제를 대하는 사회주의적 방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입장과 떨어질 수 없다. 피해자를 이런 식으로 린치하고 사회주의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동원해서 성폭력에 관한 문제제기를 봉쇄할 수 있다는 것이 선례로 남게 되면, 머지않아 수많은 이들이 그 선례를 따르려 할 것이다. ‘반성폭력 운동’의 폐단은 올바른 대안으로 대체되지 못해 온존되는 한편 그 성과는 전부는 아니라도 일부에서 상당 부분 침식되어갈 것이다. 잘못된 행동으로 각인되었던 피해자 비난하기나 조직 보존주의가 슬금슬금 부활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미 성폭력에 관한 사회적 인식은 한참 진전된 상황에서 사회주의 운동 내에 그러한 경향이 생겼을 때 운동이 얼마나 많은 신뢰를 잃고 대중적 입지가 얼마나 훼손될지, 아니 사회주의 운동 전체가 얼마나 비난받고 희화화될지, 사회주의에서 전망을 보고 사회주의 운동 안에서 복무하기를 원하는 여성 활동가들이 불필요한 고통과 갈등을 얼마나 겪어야 할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성폭력 피해자의 문제제기에 진지하게 귀 기울인다’는 식의 추상적인 이야기는 구체적 사안에 대한 판단에 적용되지 않으면 공문구에 지나지 않는다. 성폭력 문제를 둘러싼 혼란과 소모가 그 얼마이던가!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이 문제에 대한 사회주의의 원칙을 올바르게 정립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부디, 모호함 없는 판단을 제출해주시라! <노사과연>


1) 편집자주: ‘노동자연대·대학문화성폭력대책위원회’를 말한다. 다함께·대학문화성폭력대책위원회로 활동했었으나 다함께가 노동자연대로 조직명을 바꾸면서 대책위의 이름도 바뀌게 되었다.

2) 이에 대해 다함께는 이렇게 주장한다. “당시 다함께가 정아무를 ‘방관’ 혐의로 곧바로 징계하지 않은 것은 다함께가 정아무를 ‘비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반대로 정아무의 진술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다함께 중앙은 사건이 온통 의문투성이어서 정아무가 ‘공범’이라는 A의 말이든, ‘방관’만 했다는 정아무의 말이든 아무것도 믿지 못해 재판 결과를 기다려 보기로 한 것이다.”

다함께가 당시에 주장한 바가 “방관인지 공범인지 등 먼저 밝혀야 할 쟁점들이 있으니 진상조사를 거쳐 조치하자.”였다면 이렇게 쓰는 것이 타당했겠지만 실제로 다함께의 회원들이 한 일은 피해자의 말을 일방적으로 거짓으로 단정하고, 피해자를 “다함께를 음해하려는 세력”, “여기저기 꼽사리나 끼는” 사람, 정신이상자 등으로 매도한 것이다. 재판은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의 말이 거짓이라고 단정 지은 상황에서 피해자를 압박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노동자연대는 이것을 자신들의 신중함을 입증하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

3) “더 안 좋은 것은, 이후 우리의 대응이 조직 전체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B 개인을 통한 대응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사건 직후 @@@는 B, 이**(이 자리에는 나도 있었다) 와 만난 자리에서 B에게 법적대응을 권하며 변호사 선임을 하라고 권하였고, 이**와 B가 변호사 수임에 따른 비용부담을 누가 할것인지에 대해 묻자 “모금을 하든지 해야죠”라며 마치 단체에서 일정부분이라도 어떤 형식으로든 지원해줄 것처럼 대답했다. 이 말을 믿고 이**는 B가 학생임을 감안하여 수임료 500만원을 개인 대출까지 해가며 감당했으나 이후 단체는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았다. 전술했다시피 이 자리에는 나도 있었으므로, 이후 몇차례 @@@ 동지에게 모금계획이 있는지 등을 물어봤으나 나중에 확인해주겠다는 답만 들었을 뿐이다.“ – <“페미니즘에 대한 엘리트주의를 경계한다—성폭력 추문을 돌아보며” 에 더하여>, 노동자연대 다함께 대의원협의회 자료집 중에서

4) “그러나 ***의 글에도 이미 나와 있듯이, 민사재판 변호인 선임, 그 비용 마련, 증거 수집, 증언 확보, 정당성 주장, A지지모임의 온·오프라인 상의 음해에 대한 대처, 심지어 우리 단체에 하는 보고조차 B가 직접 하는게 거의 없었다. 위의 행위는 압도적으로 대리인인 이** 씨(신문사 이** 기자와 동명 이인)를 통해 이뤄졌다. 이게 행위 주체는 온데 간 데 없는 대리주의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 <한 성추문 사건에 대한 *** 동지의 글을 읽고>, 노동자연대 다함께 대의원협의회 자료집 중에서

“내가 B에게 행위 주체로서 분명히 의식하며 행동하라고 논쟁한 또 다른 이유는 B가 여러 차례 스스로 소송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비쳤기 때문이다. 나는 B가 정말 본인이 진실하다고 주장한다면 자신을 변호할 마지막 수단인 소송을 포기하는 것은 본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송 포기는 곧 자신이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다는 뜻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 위의 글.

5) 이에 대한 노동자연대의 한 마디. “류한수진이 중상모략의 책임을 모면하려고 A[피해자] 핑계를 댈수록 우리로서는 A 주장의 진위 여부와 그의 동기, 의도 등을 캘 수밖에 없다.” 진위 여부야 논쟁하는 것이 당연하겠으나 동기, 의도는 뭘 말하는 것이고 그건 왜 필요한 것인가? ‘경계선 인격장애’나 ‘연애결별’ 같은 말이 진상을 설명하는 데 필요했다는 주장의 연장선에 있는 것인가? 나는 이 말이 피해자에 대한 조직적 차원의 (정말로 조직 의결을 거쳤다는 의미에서 ‘조직적 차원’의!) 악성루머 유포를 내 탓으로 돌리면서, ‘네가 피해자의 말을 듣고 그랬다고 하면 우리는 더더욱 피해자에 대한 인신공격을 하겠다’고 협박하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6) 성폭력에 맞서는 운동을 하면서도 이 운동의 전통을 계승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2000년대 이후의 특정한 운동 조류를 반성폭력 운동이라는 일반 명사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아 따옴표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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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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