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우리의 방식으로, 우리의 길을!

<2015년, 노예의 언어로 쓰는 신년사>

채만수 | 소장

 

진보, 거듭나야 산다. 진보, 거듭나야 산다. 진보, 거듭나야 산다. ―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판결을 내린 후 ≪조선일보≫가 대대적으로 벌인 지상(紙上) 캠페인이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코미디라고. 극우 중의 극우 ≪조선일보≫가 진보를 가르치려들고, 충고하려드니 세상 정말 웃긴다고.

그러나 ≪조선일보≫에 물어보라, 당신들 코미디하고 있느냐고. 웃기고 있느냐고. 아니다. 저들은 코미디를 하고 있는 것도, 웃기고 있는 것도 아니다.

≪조선일보≫가 누구인가? 천하의 권부(權府) 검찰총장도 갈아치우는 게 ≪조선일보≫ 아니던가! 그런 그들이 시시한 정치 코미디 따위에 싱겁게 그 넓은 지면을 낭비하고 있겠는가?

오늘날 세상이 험해서 ‘테러’, ‘테러’ 하지만, 저들의 “진보, 거듭나야 산다”는 캠페인이야말로 사실은 캠페인이 아니라 ‘테러’, 즉 공포의 협박이다. 이 사회, 이 땅의 노동자ㆍ민중을 향한 공개적이고 대대적인 테러, 협박이다! “진보, 거듭나야 산다”, ― 즉 자신들이 거듭나라는 대로 거듭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테러, 협박 말이다!

왜?

두말 할 나위 없이, 이 땅의 ‘진보’가 그렇게, 즉 노동자ㆍ민중 자신의 이론ㆍ과학도 버리고, 자신의 정치적ㆍ조직적 원칙도 버리고, 자신의 기백ㆍ혼도 버리고, 자신의 정신적ㆍ물질적 무기를 모두 버리고, 그렇게 뒷결박을 당한 채, 저들 극우 부르주아지가 쳐 놓은 4각 링 안에서, 저들 극우 부르주아지가 정해 놓은 룰대로 싸움 아닌 싸움, 어릿광대춤을 추어야만, 그런 어릿광대로 거듭나야만 자신들의 세상이 영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영원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말 야무진 꿈이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야무진 꿈! 역사의 어떤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세상이 영원하기를 꿈꾸며 잔혹한 억압을 일삼지 않았던가?!

 

2015년 을미년. 통합진보당 해산판결을 내린 헌법재판소장 박한철이 새해 벽두에 의기양양 보무당당히 청와대를 방문하셔서 “을미적거리다가는 병신된다”고 하셨단다.

동학농민들의 비원(悲願)이 그렇게 추잡하게 유린당해도 좋은 것인진 모르겠지만, 상호 간에, 호상 간에, 피차 간에 맞는 말은 맞는 말인 것 같다. ‘선거가 없는 해’라며, 즉 구차하게 말 돌리며 사기 칠 필요도 없이 그냥 막나갈 수 있는 해라며 단단히 벼르고 있는 저들의 ‘태세’로 보나, 벼랑 끝에 몰릴 대로 몰려 싸움을 강요당하고 있는 노동자ㆍ민중의 처지로 보나, 끝 모르고 지속되고 있는 공황ㆍ디플레이션이 더욱 격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정세로 보나, 금년 을미년엔 상호 간에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격돌이 불가피해 보이기 때문이다. 형세가 그러하니 을미적거리다간 을미적거리는 쪽이 대패하며 병신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금년엔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 동지들은 내려와야 한다. 삼보일배ㆍ오체투지를 벌이고 있는 노동자 동지들은 벌떡 일어서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올라가지 않고, 다시는 굴신(屈身)하지 말아야 한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파업을 조직하고, 연대투쟁을 조직하고, 시위를 조직하여 그들이 내려오고 일어설 수 있게 해야 하고, 다시는 올라가지 않고 다시는 굴신하지 않게 해야 한다.

민주노총은 강고한 투쟁을 다짐하는 지도부를 세움으로써 일단 그 채비는 갖춘 것 같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특히 선진노동자ㆍ선진활동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즉 지도부의 의지나 결의만으로는 투쟁다운 투쟁이 쉽지 않을 것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대신 조합원들이, 특히 선진활동가ㆍ선진노동자들이 헌신적으로 노력하기만 한다면, 그 노력은, 노동자ㆍ민중이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을 만큼 벼랑에 몰려 있는 만큼, 저들의 파쇼적 공세가 근래 어느 때보다도 극렬할 것인 만큼, 자본주의 대공황이 노동자ㆍ민중의 삶을 더욱 더 파괴할 것인 만큼, 그만큼 분명 그 노력 이상의 보상을 받을 것이다. 분명 예상 이상의 대대적인 투쟁으로 나타나고 발전할 것이다.

나아가, 약간의 목적의식적인 노력만으로도 그 투쟁은 민주노총을 넘어 널리 노동자 대중 일반의 투쟁으로, 노동자ㆍ민중 일반의 투쟁으로, 방금 말한 정황에 비추어, 어쩌면 폭발적으로 발전해 나아갈 것이다. 선진노동자ㆍ선진활동가라면, 마땅히 목적의식적으로 그러한 노력을 할 터이다.

 

짧은 역사지만 뒤돌아보자면, 쏘련이 해체된 1990년대 이후, 특히 김대중ㆍ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우리의 노동운동은 정치적ㆍ이념적으로, 그리고 그 투쟁의 방식에서도 급격히 약체화되고, 계급적 주체성을 상실해왔다. 제국주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노동운동, 노동자계급운동이, 각국의 조건에 따라 다소 시간적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보아 1950년대 후반 이후 약체화되고 계급적 주체성을 잃어간 것과 사실상 같은 궤를 밟아간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노동귀족이 노동자계급 내부의 계층(階層)과 세력으로서 형성되고,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독점자본의 대중조작, 이데올로기 지배가 강화되어 현대 사민주의, 강단 맑스주의가 득세하면서 소부르주아적 정치의식, 정치형태가 노동자계급을 지배하게 된 탓인데, 이제는 의식적으로 그것을 극복해야 할 때가 되었다.

우선 민주노총은 ‘진보적 경제학자들’, ‘진보적 사회학자들’을, 한마디로 강단의 ‘진보적 명망가들’, 소부르주아 명망가들을 지도위원 등으로 모시는, 지금까지의 관행을 공개적으로 혁파해야 할 것이다! 이 관행을 혁파해야 하는 이유는, 그간 그렇게 민주노총의 지도위원을 지낸 인사들이, 그 명망가들이, 물론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 그리고 오늘날 어디서 무슨 짓을 해왔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들의 행적ㆍ행태에 짐짓 눈감지 말고 그것을 직시하는 것만으로 명백할 것이다! 그들의 상당수가 노사정위원회의 속된 말로 얼굴마담을 해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혁파의 필요성은 명백하지 않은가?

이 관행을 혁파하는 것, 그것은 비록 민주노총 내에서의 그들 소위 ‘지도위원들’, 소부르주아 명망가들의 영향력이 그 이름에 걸맞는 만큼 크지 않더라도, 누가 뭐래도 한국 사회의 선진적 노동자들의 조직으로서의 민주노총이 자신들의 이론적ㆍ정치적 방침은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개척해가겠다는 다짐과 자신감을 내외에 천명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리고 사실 ‘민주노총 지도위원’이라고 하면, 그것만으로도, 비록 직접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정치적ㆍ정서적 영향력이 크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저들 자본 측에서 그들을 불러 커다란 감투를 씌워주며 그토록 대접하겠는가?

실제로 노동자들은, 특히 선진노동자ㆍ선진활동가들은 우리 노동자계급 운동 내부에 알게 모르게 침투되어 있고, 관행처럼 되어 있는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의식ㆍ행태, 방식을 일소하고 노동자계급 자신의 과학ㆍ의식ㆍ조직ㆍ투쟁을 회복하고, 발전시키고, 강화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저들이 쳐 놓은 4각 링에서 뒷결박당한 채 싸움이랍시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것을 이제는 그만두어야 한다.

싸움도 우리가 해야 할 때에 우리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조직도 저들을 흉내 내서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처지와 조건에 맞게 우리의 방식으로, 정치도 노동자계급 자신의 과학과 세계관에 기초하여 노동자계급다운 독자적인 이념과 방식으로 개척해 나아가야 한다! 제국주의와 그 앞잡이들의 폭압에 의해서 좌절된 선배 노동자들의 방식을 상기하고 연구하는 것은 좋은 이정표가 될 것이다. 노동자계급운동은 민주노총을 넘고 넘어서 정치적으로 발전해 나아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하자면, 최근 일부에서 ‘진보’의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 건설을 촉구하는 국민모임’, 약칭 ‘국민모임’은, 그것이 작은 에피소드로 끝나든, 커다란 태풍으로 발전하든, 유감스럽지만 결코 노동자계급이 가야 할 길이 아니다. 눈길을 줄 만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물론 추진주체들의 주관적 의도ㆍ지향이야 결코 그렇지 않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겠지만, 객관적으로는 정확히 저 ≪조선일보≫의 캠페인대로, 노동자ㆍ민중의 혼백(魂魄) 없이, 거듭나고 있는 ‘진보’일 뿐이다. 새민련의 좌파(?), 노무현 자칭 좌파 신자유주의 정권의 기둥들이었던 저 기회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정치모리배들을 도대체 끌어들여 뭘 하겠다는 것인가? ‘종북(주의)’를 발명하여 입에 달고 사는 ‘좌파’ㆍ‘진보’를, 이 사회의 비극의 현대사에 대해 그런 반역사적ㆍ반민중적 관점ㆍ신념을 가진 소부르주아 어릿광대들을 끌어들여 도대체 무얼 하겠다는 건가?

그 동안 야당, 새민련이 보여준 정치행태, 특히 대선 부정이나 세월호 학살 정국에서 보여준 그들의 무력한, 아니, 극우 새누리당ㆍ박근혜 정권의 들러리, 시쳇말로 ‘2중대’로서의 행태를 보고, ‘안 되겠다, 안 되겠어(!),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하다(!)’며 일어선 의기, 그 선의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개나 소나 ‘진보’라고 끌어들여 만드는 ‘야당’이, 예컨대, ―1985년이었던가?― ‘민정당의 2중대’ 민한당을 대체한 신민당과 몇 걸음이나 다른 것이 될까? 설마 조두증후군(鳥頭症候群)? 그렇게 민정당의 2중대 민한당을 대체하면서 만든 선명야당(!) 신민당이, 그리고 거기에 ‘재야’로부터, ‘노동운동’으로부터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 수혈해온 그 ‘새로운 정치세력’이 발전하고 발전하여 다름 아니라 오늘날의 새민련이 된 것을 설마 잊은 것일까? 인적 자원의 원천은 그만두더라도, 저들의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조직ㆍ정치 방식 그것이 그렇게 만드는 것임을 설마 모르는 것일까? 자신들이 지금 또 하나의 장래의 새민련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이제는 바늘 허리매어 못쓴다는 것을 절절히 느낄 때도 되지 않았는가?

소부르주아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일원이라면, 이제는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만난과 싸우면서 기필코 우리의 길을 우리 방식으로 개척해가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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