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1)

문영찬 | 연구위원장

* 편집자: 연구소에서 철학세미나를 지도하고 있는 문영찬 연구위원장이 그동안의 성과를 정리하여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연재할 예정이다.

[목차]

머리말

 

제 1 장 세계관과 철학의 근본문제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 철학의 근본문제

  3. 세계의 통일성

제 2 장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의 역사

  1. 철학의 발생

  2. 데모크리토스 노선과 플라톤 노선의 투쟁

  3. 아리스토텔레스

  4.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에 의한 고대 원자론의 발전

  5. 토마스 아퀴나스,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

  6. 코페르니쿠스, 브루노, 갈릴레이, 케플러, 뉴턴

  7. 베이컨, 홉스

  8. 데카르트

  9. 스피노자

  10. 로크

  11. 흄

  12. 라이프니쯔

  13. 디드로, 달랑베르, 엘베시우스

  14. 볼테르, 루쏘

  15. 칸트

  16. 피히테, 셸링

  17. 헤겔

  18. 포이에르바하

제 3장 맑스, 엥겔스에 의한 철학에서의 혁명

  1. 맑스, 엥겔스에 의한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의 창시

  2. 변증법적 유물론의 범주들

    1) 물질과 운동

    2) 공간과 시간

    3) 물질과 의식

    4) 원인과 결과

    5) 개별-특수-보편

    6) 필연성과 우연성

    7) 본질과 현상

    8) 가능성과 현실성

    9)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

    10) 모순 혹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내용과 형식)

    11) 부정의 부정

    12) 인식론

  3. 자유와 필연성

  4. 목적의식성

  5. 사적 유물론의 범주들

  6. 레닌, 스탈린, 마오쩌뚱, 그람시에 의한 맑스주의 철학의 발전

제 4 장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사조에 대한 비판

  1. 콩트, 밀

  2. 쇼펜하우어, 니체

  3. 후설

  4. 하이데거

  5. 프로이트

  6.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7. 샤르트르

  8. 하버마스

  9. 알튀세르, 발리바르

  10. 푸코, 들뢰즈, 데리다, 라캉

  11. 지젝

  12. 자율주의

  13. 이진경

  14. 롤즈의 《정의론》, 마이크 샌덜의《정의란 무엇인가》

제 5 장 과학의 발전과 그에 대한 철학적 일반화

제 6 장 철학과 종교

머리말

2008년 세계대공황의 발발 이후 경제위기는 2010년을 전후한 유럽과 일본, 미국 등의 재정위기, 그리고 2012년을 전후한 중국, 러시아, 브라질 등 신흥국의 위기로 점차 심화되고 있다. 쏘련의 붕괴를 필두로 한 20세기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이른바 세계화를 외치며 거칠 것 없던 자본의 질주에 제동이 걸리고 세계는 혼돈으로 빠져들고 있다. 미국 중심의 세계화는 파탄되고 세계질서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으로 재편되고 있고 동아시아와 동지중해를 중심으로 분쟁이 격화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이른바 수출주도의 경제는 세계무역 자체가 침체되는 상황에서 경제위기의 심화를 겪고 있고 이러한 자본주의 재생산의 위기는 박근혜 정권의 반동화를 낳고 있다. 즉, 박근혜 정권의 파쇼화는 한국자본주의의 위기의 산물인 것이다. 또한 2014년의 세월호 참사,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선고는 한국사회를 짓누르고 있고 민주주의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의 운동진영이 광범한 반파쇼 민주주의 전선을 통해 박근혜 정권의 반동적 공세에 맞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쏘련 붕괴 이후 한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퇴조, 노동운동의 개량화라는 조건은 운동의 발전을 제약하고 있다. 사회주의 운동이 퇴조하고 변질됨에 따라 의식적인 투쟁은 찾아보기 힘들고 대부분의 운동은 지배계급의 억압과 수탈에 대한 대중들의 반발, 저항을 지원하는 것으로 귀착되고 있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할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얼음장 밑에서도 물이 흐르듯 8,90년대의 전투적 운동의 맥을 이어오고 있으나 아직 개량주의, 실리주의, 조합주의의 벽을 넘어서고 있지 못하다. 나아가 인간해방을 꿈꾸는 원대한 사회주의 운동, 사회주의 정치는 책 속에만 존재하고 한국에 존재하는 사회주의 운동은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과 왜곡, 자기 합리화 속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렇게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가 왜곡됨에 따라 운동에서 건강한 기풍은 사라지고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원칙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이 되고 있다. 그에 따라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은 수적으로는 광대하지만 이러저러한 정치세력에 몸을 대주는 역할 이상은 하지 못하고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이해는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정치세력들에 의해 왜곡된 형태로 근근이 대변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면서 운동에서 원칙이 사라지고 있는 상황은 운동의 재건을 고민하는 입장에서는 근본적인 자기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운동에서 원칙을 다시 세우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운동의 재건을 이루는 길은 어떤 길인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이제는 답을 내와야 할 때가 되었다. 20세기 사회주의의 붕괴에서 비롯된 거대한 후퇴를 마감하고 21세기를 새롭게 여는 운동의 재건의 깃발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운동의 재건은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청산주의에 기초해서는 불가능하다. 20세기의 거대한 혁명과 운동의 역사를 부정하면 20세기와 21세기의 연속성이 단절되기 때문에 그러한 청산주의에 기초한 운동은 피상적 운동을 넘어설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운동의 재건은 20세기 사회주의를 계승하면서도 21세기의 현실의 관점에서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그에 기초한 운동의 창조적 재건을 요구한다. 이 두 가지, 연속성과 창조성이 통일될 때만 21세기 사회주의 운동의 창출, 운동의 재건은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21세기의 계급투쟁의 조건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하면서 동시에 20세기 사회주의에서 계승할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하는 것 즉, 옥석을 가리는 작업이 같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20세기 사회주의에서, 나아가 기존의 맑스주의에서 왜곡되게 청산된 대표적인 것이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인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현재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이 존재하는가? 현재의 노동운동이 세계관에 기초한 운동인가?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쉽게 답할 수 없다. 온갖 자본의 논리만이, 자본가계급의 세계관만이 난무하고 가끔 소부르주아 관점이 그러한 흐름을 보충한다. 사실 자신의 세계관을 가진 계급세력과 그렇지 못한 계급세력은 현실 사회에서, 현실의 정치에서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세계관을 갖지 못한다면 변혁을 꿈꾸는 것은 불가능하고 현실의 정치세력으로서 유의미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세계관을 위한 투쟁은 변혁운동의 재건을 위한 초석이다.

이렇게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세계관을 위한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과학적이고 혁명적인 세계관이라 일컬어지던 변증법적 유물론이 20세기 사회주의와 함께 청산된 것은 우리에게 뼈아픈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이 청산된 가장 큰 이유는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이겨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적으로 보면 변증법적 유물론을 하나의 도식으로 파악했던 한계, 예를 들면 변증법의 3대 법칙인 양질 전화, 모순, 부정의 부정을 승인하면 변증법적 유물론을 아는 것으로 치부했던 것 등이 또 하나의 이유이다. 이는 결국 세계관을 하나의 도식으로 파악한다는 것인데 그에 따라 20세기 사회주의의 붕괴에 이어서 자신의 철학도 함께 청산되고 부르주아, 소부르주아 세계관으로 건너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관은 하나의 도식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세계관은 먼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인데 세계 자체가 무한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도 하나의 도식으로 국한되지 않고 무한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세계관은 또한 세계에 대한 부분적인 이해를 넘어선 총체적인 이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총체성 때문에 부분적인 지식을 넘어서는 세계관이라는 개념이 성립하는 것이다. 또한 세계관은 계급적인 당파성을 내포한다. 자본가계급의 세계관과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삶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사회적 존재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다. 무산자로서 사적 소유의 부정태인 노동자계급은 기존의 자본주의 질서를 부정하는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고 나아가 그것을 지양하는 변혁적 세계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렇듯 세계관은 하나의 도식이 아니며 노동자계급이 변혁을 꿈꾸고 사회에서 하나의 유의미한 계급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세계관이 필수이고 그것의 획득은 단지 지식의 수립 혹은 습득이 아니라 간고한 투쟁을 요구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이 청산된 현실, 노동자계급은 변혁을 꿈꾸는 것도 어렵고 자신의 정치적 이해를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세력에 의해 왜곡되게 표현하는 현실은 세계관을 위한 투쟁을 요구하는 것이고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변혁적 세계관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복원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 변증법적 유물론의 복원은 기존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교과서의 내용을 반복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우선적으로 지적되어야 하는 것은 변증법과 유물론은 승인하지만 변증법적 유물론은 거부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말로는 세계관을 승인하지만 실제로는 세계관을 거부하는 것이고 세계관을 단순한 지식의 총합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이 나타난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측면을 제외한다면 유물론의 발전의 역사 즉, 형이상학적 유물론을 극복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나아감으로써 철학에서 혁명을 이룩하고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을 완성했던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21세기 지금의 현실에서 복원하는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단지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넘어서 역사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고 인류의 지적 발전, 철학과 과학발전의 합법칙적 산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의 탄생을 논증하는 과정을 요구한다.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복원은 지금 시대의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 사조에 대한 비판을 요구한다. 쏘련 붕괴 후에 밀려들었던 이들 사조는 매우 다양하지만 일관되게 공통적인 것은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에 대한 부정,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부르주아, 소부르주아 철학적 경향의 본질을 까발리고 그들의 계급적 본성을 폭로하고 엉터리 논리를 반박하는 것이 요구된다. 레닌은 비판은 불모의 부정이 아니라 그 내부에 들어가서 내적 논리를 반박할 것을 요구한다고 했고 맑스는 공산주의는 현실을 지양하는 운동이라 했는데 이러한 원칙은 이들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 사조에 대한 비판에서도 견지될 것이다.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은 단지 당파적 철학을 넘어서서 인류의 과학발전의 산물이기도 한데 이는 노동자계급이 이 사회의 미래를 담지하고 있는 점을 철학의 영역에서 가리키는 것이며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이 인류의 지적 발전, 과학발전의 미래의 방향타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심화된 인식은 각각의 역사발전 단계의 과학발전을 철학적으로 일반화하는 과정, 과학발전과 세계관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끝으로 여전히 지배계급의 정신적 무기로 작용하는 종교의 본질에 대한 비판을 통해 정신적 환상의 추구가 아니라 현실의 지양을 자신의 삶의 방향으로 할 필요성을 논증하고자 한다. 한국사회에서 종교는 중세의 기독교 못지않은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따라서 종교의 반동적 영향에 대해 그리고 운동에 미치는 해악에 대해 논하는 것을 기초로 종교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태도 그리고 당적 태도를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세계관을 위한 투쟁은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경향으로부터 독립되어 자신의 운동을 개척하기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한국자본주의는 이미 고도로 발전되어 광범한 노동자계급을 창출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배태하는 계급대립의 발전! 이제는 이러한 계급대립에 의식성을 부여하는 작업, 노동자계급의 사상적, 정치적 기치를 올리는 작업에 착수할 때이다.

제 1 장 세계관과 철학의 근본문제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세계관이란 무엇인가를 한 마디로 말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은 스스로 세계관을 정립해 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세계관이라는 개념에 내포되는 내용이 지속적으로 변화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관이 무엇인지는 사람에 따라 무한히 다양할 수 있고 또 결정적으로는 계급적 위치에 따라, 사회적 존재에 따라 각각 갖고 있는 세계관은 천양지차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관이란 무엇인가를 사전적으로 정의내리는 일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철학은 무엇인가? 철학하면 대단히 심오한 어떤 지식 혹은 관점, 방법을 언뜻 떠올리기 쉽고 나아가 현실 세계와는 일정하게 동떨어진 고상한 정신세계를 논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렇게 철학을 어떤 신비한 지식의 체계로 생각하게 된 것은 두 가지 때문인데 이는 철학 자체가 상당한 부분은 현실과 동떨어진 사변적 내용을 자신의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계급이 민중들로 하여금 철학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아 왔기 때문이다. 그 중 첫 번째의 사변적 철학은 현실세계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정신 혹은 현실 너머의 이데아 세계 등을 자신의 탐구대상으로 삼았고 그러한 것을 체계적 논리로 발전시켜왔는데 바로 이러한 점들로 인해 철학하면 떠오르는 어렵고 신비한 것이라는 인식이 발생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지배계급이 오랜 기간에 걸쳐 민중들이 철학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고 민중들에게는 철학이 아닌 종교가 필요하다고 했던 것은 바로 철학 혹은 세계관의 본질과 관련되는 부분이다.

철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사변적 철학도 있지만 동시에 현실을 탐구하고 나아가 현실의 변혁을 꿈꾸는 철학도 상당부분 있어왔다. 또한 철학은 믿음, 신앙이 아닌 지식에 기초하는 것이고 나아가 가장 근원적인 지식, 그리고 체계화된 지식으로서 발전해왔고 그에 따라 세계에 대한 부분적 인식을 넘어서는 총체적인 세계관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배계급은 오랜 기간에 걸쳐 민중들이 철학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왔고 철학에 대한 접근은 지배계급에 국한해야 하며 민중들은 종교만이 필요하다고 말해왔던 것이다.

이렇게 철학은 사변적 철학, 현실적인 철학 등 다양한 갈래로 발전해 왔는데 그것들의 공통점은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제공하거나 주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철학과 세계관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엥겔스가 철학의 발전을 요약한 내용을 살펴보자.

“고대철학은 본원적이고 자연성장적인 유물론이었다. 그러한 유물론인 한에서 고대철학은 물질에 대한 사유의 관계를 분명히 할 수 없었다. 이 점에 관해 똑똑히 알아야 할 필요성으로부터 육체와 분리될 수 있는 영혼에 관한 학설이 나왔고, 이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주장이 나왔으며, 마지막으로 일신론이 나왔다. 이처럼 낡은 유물론은 관념론에 의해 부정되었다. 그러나 철학이 더 발전해 나가면서 이 관념론도 역시 더 유지될 수 없게 되어 현대 유물론에 의해 부정되었다. 부정의 부정인 이 현대 유물론은 낡은 유물론의 복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천 년에 걸친 철학 및 자연과학의 발전에 담겨 있는 사상 내용 전체와 이 이천 년의 역사 자체에 담겨 있는 사상 내용 전체를 이 낡은 유물론의 영속적 기초에 첨가한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철학이 아니라 하나의 단순한 세계관이며, 이 세계관은 과학의 과학이라는 특별한 과학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과학들에서 확증되고 실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철학은 “지양”되었다. 말하자면 ‘극복되는 동시에 보존되었다’; 형식에서 보면 극복되었고, 그 현실적 내용에서 보면 보존되었다.”1)

여기서 엥겔스가 언급한 자연성장적인 고대의 유물론은 세계의 근본요소가 물이니, 흙이니, 공기니, 불이니 하는 고대 그리스 철학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철학들은 세계의 근본요소를 물질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유물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철학들은 세계의 근본요소라는 접근법은 수립했지만 인간 정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신과 물질의 관계는 무엇인지를 해명할 수 없었고 그에 따라 인간 정신이 세계의 근본요소라고 주장하는 관념론에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고대 유물론은 관념론에 의해 부정되었지만 근대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세계에 대한 인식이 한층 풍부화되고 과학화됨에 따라 고대철학의 세계의 근본요소라는 관념은 한층 엄밀하게 정식화된 ‘물질’ 개념을 통해 부활하게 되었고 이 현대 유물론은 인간 정신이 물질의 산물이며 성질이라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갔고 그런 점에서 관념론은 한층 풍부화되고 발전된 유물론에 의해 다시 부정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엥겔스가 “더 이상 철학이 아니라 하나의 단순한 세계관”이라고 언급한 것인데 이는 철학과 세계관의 관계에 대한 뛰어난 묘사이다. 철학이 “지양”되고 하나의 단순한 세계관이 되기 전에 철학은 일종의 지식의 총체였다. 신, 자연, 우주, 사회, 도덕, 정신 등 이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의 총체였고 이러한 지식의 총체를 담는 그릇이 세계관이었던 것이다. 철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고대 그리스에서 ‘지혜에 대한 사랑’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철학의 발생 자체가 인류의 지식이 어느 정도 축적되어서 일목요연한 체계가 발생하면서부터였다는 점에서 철학은 지식의 총체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그러한 상태가 근대과학이 발생하기까지 이천 년 이상이나 이어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역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근대과학이 발전하면서, 그리하여 기존의 지배적 철학이었던 관념론과 형이상학이 무너져가면서 새롭게 맑스, 엥겔스에 의해 정립된 변증법적 유물론은 더 이상 기존의 철학과 같이 과학의 과학, 지식의 제왕이 아니라 단순한 세계관이 되었고 이를 일컬어 엥겔스는 ‘철학의 지양’이라고 파악했던 것이다. 따라서 기존에 철학에 담겨 있던 많은 영역들은 분화되어 발전하는 개별과학의 대상이 되었고 그 영역에서 실증적으로 대상을 탐구하고 법칙을 발견하는 것으로 전화되었고 남아 있는 것은 세계에 대한 총체적 관점을 의미하는 단순한 세계관이 되었다.

이렇게 현대 유물론은 고대 유물론의 관점을 계승하면서도 그와 비교할 수 없이 풍부한 내용을 내포하게 되었고 철학을 지양하고 단순한 세계관으로 자신을 정립한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현대 유물론, 변증법적 유물론이 세계관으로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를 살펴보자.

먼저 변증법적 유물론은 과학적 세계관이다. 이것은 소극적으로는 변증법적 유물론이 근대와 현대의 과학 발전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즉, 비과학적 내용, 허구적인 내용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적극적인 측면을 보면 변증법적 유물론은 근대, 현대 과학의 성과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끊임없이 발전하는 과학의 내용을 자신의 내부로 포섭하고 과학의 발전을 추동한다. 사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성립 자체가 19세기 근대과학에 기초한 것이었다. 진화론, 세포의 발견, 에너지 보존 및 전화의 법칙이라는 19세기 중반의 3대 발견은 물질과 운동의 불멸성과 상호 전화 등 자연 자체의 변증법적 성격을 말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변증법적 자연관의 성립을 가능하게 했고 그에 따라 세계관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이 성립했던 것이다. 그런데 변증법적 유물론이 이렇게 과학적 세계관으로 성립한 것은 사회에 대해서도 유물론적 관점, 과학적 관점을 추구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관념론의 최후의 도피처인 인간 사회, 인간의 역사에 대해 유물론적 관점이 성립한 것, 물질적 생산이 역사발전의 추동력이라는 점이 정립된 것, 물질적 생산을 둘러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사회적 존재를 규정하고 여기서 비롯되는 계급관계, 계급 상호 간의 투쟁의 역사가 인류 역사의 본질적인 지점이라는 것이 정립된 점, 바로 이러한 점을 기초로 자연, 사회, 정신 등 일체의 부분에 걸친 유물론적 관점의 정립이 가능했고 과학적 세계관이 정립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변증법적 자연관과 인간역사에 대한 유물론, 역사과학이 성립하고 상호 맞물리면서 총체적인 과학적 세계관이 수립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세계관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자연의 탐구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로 작용하고 자연과 사회,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과학적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또 하나의 특징인 혁명적 세계관이라는 점으로 넘어가자. 혁명은 어느 한 계급의 의지와 무관하게 발생하는 것이고 그 사회구성체가 수명이 다하여 필사적인 질적인 비약을 통해 새로운 사회구성체로 이행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혁명은 또한 인간집단의, 계급의 혁명적 실천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혁명적 세계관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두 측면에서 두드러진다. 첫째, 변증법적 유물론은 혁명이 하나의 자연사적 과정임을 인식하게 하여 혁명의 철학적 토대, 세계관적 토대를 제공한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 자신의 목적성을 띠는 실천으로 인해 자연의 역사와 구분되지만 인간 상호 간의 목적을 가진 실천들이 어우러져 이루어지는 역사는 동시에 하나의 자연사라는 것을 변증법적 유물론은 전적으로 승인한다. 이는 사회에 대해 물질적 생산을 기초로 하는 인식, 유물론적인 인식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의 틀인 사회구성체라는 개념이 성립하고 물질적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 토대와 국가권력, 이데올로기 등을 내용으로 하는 상부구조라는 인식틀이 성립하고 사회구성체는 이러한 경제적 토대와 상부구조의 총체로 작동한다는 관점이 성립하는 것이다. 여기서 혁명은 이러한 사회구성체가 자신의 진보적 역할을 다하고 그에 따라 소멸의 길을 걷게 되는 시점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즉, 어느 한 계급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연사적 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질적인 비약을 하는 과정이 곧 혁명인 것이다. 이렇게 혁명의 자연사적 필연성을 승인함에 의해 변증법적 유물론은 이 사회의 혁명적 계급,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이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은 혁명적 실천의 의의를 정확히 드러내준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11번에서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2)고 파악하여 혁명적 실천의 의의를 전면에 드러내었다. 실천, 혁명적 실천을 맑스가 철학의 영역에 끌어들임으로써 맑스주의는 혁명적 실천의 과학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이렇게 혁명적 실천을 철학의 구성요소로 포섭하여 자신의 혁명적 세계관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한다. 인간의 인식에서 실천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실천과 유리된 인식은 관조적 성격에 머무를 수밖에 없고 사변철학, 아카데미즘 혹은 세계의 해석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진리임을 확인하는 것, 진리의 검증기준은 실천이며 인식은 실천과 결부될 때만 구체성과 풍부함, 정확성을 획득할 수 있다. 또한 실천은 인식에 반성의 자료를 제공해주면서 변증법적 부정을 통한 도약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변증법적 유물론이 실천을 자신의 내용에 포섭함에 따라 변증법적 유물론은 생동하는 세계관, 혁명적 세계관으로 자신을 정립하고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실천을 뒷받침하는 이론이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은 자본주의가 산출하는 힘,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계급, 자본주의를 지양함을 통해서만 자신의 해방을 이룰 수 있는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관으로서 성립했다. 이러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성립의 조건은 근대 노동자계급의 출현, 근대 자연과학의 발전과 철학에서 유물론의 발전, 헤겔에 의한 변증법의 완성 등이라 할 수 있다.

2. 철학의 근본문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인식이 있고 이러한 인식이 체계화되고 총체적 성격을 갖게 되면 자신의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역사상 유명한 철학자들은 대부분 일정한 차이가 있지만 자신의 총체적이고 독자적인 세계관을 가졌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철학자들은 자신만의 고고한 세계 속에서 생활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맑스의 언급은 이들 철학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고대에는 귀족제와 민주주의 당파 간의 투쟁, 중세에는 봉건계급과 농노의 적대적 대립, 근대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대립은 세계관의 문제를 둘러싸고 자신의 당파성을 각인할 수밖에 없었고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되고 철학이 발생하는 시점부터 철학에서의 당파는 갈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철학에서 당파의 성격은 이론적으로 철학의 최고문제, 근본문제가 무엇인가를 둘러싼 대립을 가져왔고 이러한 대립은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가 존재하는 지금도 의연히 존재한다. 그러면 여기서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엥겔스의 고전적인 언급을 들어보자.

“존재에 대한 사유의 관계, 자연에 대한 정신의 관계에 관한 문제, 철학 전체의 최고의 문제는 모든 종교와 마찬가지로 야만적인 상태에서 나타난 편협하고 무지한 표상들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럽 인류가 기독교 중세의 오랜 겨울잠에서 깨어났을 때 비로소 이 문제는 매우 날카롭게 제기될 수 있었고 충분한 의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도 큰 역할을 했던 존재에 대한 사유의 지위에 관한 문제, 다음과 같은 문제: 무엇이 본원적인가, 정신인가 아니면 자연인가? — 이 문제는 교회에 맞서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날카로와졌다: 신이 세계를 창조했는가 아니면 세계는 영원한 옛날부터 거기에 존재하는가?

이 문제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철학자들은 두 개의 큰 진영으로 갈라졌다. 자연에 대해 정신의 본원성을 주장하고 따라서 어떤 종류든 결국 세계의 창조를 받아들인 철학자들 — 그런데 이 창조는 흔히 기독교의 경우보다 예컨대 헤겔 같은 철학자들의 경우 훨씬 더 복잡하고 허황되다 — 은 관념론 진영을 이루었다. 자연을 본원적인 것으로 여긴 그 밖의 철학자들은 유물론의 다양한 학파에 속한다.

관념론과 유물론이라는 두 표현은 본래 이것 말고는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여기서도 다른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 두 표현에 다른 의미를 집어넣으면 어떤 혼란이 생기는지는 아래서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사유와 존재의 관계에 관한 문제에는 또 하나의 측면이 있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사상은 이 세계 자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의 사유는 현실 세계를 인식할 수 있고 우리는 현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표상과 개념으로 현실의 올바른 영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철학 용어로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에 관한 문제라고 불리며, 절대 다수의 철학자들은 이 문제에 긍정적으로 대답한다….”3)

여기서 엥겔스는 자연과 정신의 관계, 존재에 대한 사유의 관계가 철학자들을 양대 진영으로 갈라놓은 철학의 근본물음이라고 정식화하고 있다. 자연과 존재, 물질을 일차적으로 보는 철학자들은 유물론의 진영으로, 정신, 사유, 의식을 일차적으로 보는 철학자들은 관념론의 진영으로 나뉘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엥겔스의 정의는 논리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타당하다. 먼저, 존재와 사유, 물질과 의식의 문제는 논리적으로 철학의 근본물음이다. 인간의 정신, 의식과 그를 둘러싼 세계의 관계에서 다양한 철학적 범주들이 존재하지만 부차적인 것을 쳐내고 추상화하는 과정을 거치면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한편으로 의식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세계 혹은 자연, 물질이다. 그러나 고대철학에서 이러한 물음이 정확하게 정식화된 것은 아니었다. 자연과 정신이라는 개념보다 물질과 의식이라는 개념이 한층 엄밀한 것이며 철학과 과학의 발전을 담고 있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대립, 데모크리토스 노선과 플라톤 노선의 대립으로부터 시작하여 중세의 유명론과 실재론의 대립, 근대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에 이르기까지 이 물음, 정신이 일차적인가, 자연이 일차적인가는 철학자들을 가르는 물음이었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이 세계가 정신의 산물인가 아니면 정신이 물질의 산물인가는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세계관의 근본적 차이를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이러한 철학의 근본물음의 역사는 종교를 집어넣고 이해하면 수긍이 간다. 강력한 종교의 권력은 신에 의한 세계의 창조, 지배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종교는 정신이 이 세계, 자연, 물질보다 선차적이라는 관념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중세 유럽에서 카톨릭의 지배는 이러한 관념론적 인식의 풍부한 토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유럽에서 과학의 발전, 유물론의 발전은 종교 권력과의 피어린 투쟁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고대 유물론은 그러나 이 세계, 자연을 근원적으로 보았지만 당시 과학의 발전의 한계로 인하여 인간의 정신을 해명할 수 없었다. 인간의 정신은 어떻게 발생하고 존재하고 변화하는지, 정신과 자연과의 관계는 무엇인지에 대해 고대 유물론은 답을 할 수 없었고 부동의 정신, 현실 세계 너머의 이데아의 세계를 주장하는 관념론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근대 과학과 철학의 여명이 시작되는 17세기, 자본주의의 발생기에 와서야 다시금 유물론이 등장하고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 유물론은 당시 과학이 뉴턴의 역학을 기초로 하여 형이상학적 발전을 걸었던 측면으로 인해 기계적, 형이상학적 유물론으로 발전했고 운동과 변화의 과학이라 할 변증법은 유물론의 토대가 아니라 독일의 관념론을 기반으로 완성되게 된다. 그리하여 17,18세기 유물론의 형이상학적, 기계론적 측면을 극복하고 변증법과 유물론을 통일시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나아간 것은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을 개척하는 길을 걸은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서였다. 맑스와 엥겔스에 의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창시는 이렇게 인류의 지적 발전, 철학과 과학발전의 합법칙적 산물이라는 점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철학의 근본물음은 자연과 정신, 물질과 의식 중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의 물음이지만 거기에서 파생되는 이차적인 물음은 우리가 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가,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진리 혹은 진리에 가까운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여기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우리 자신의 이 세계에 대한 인식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철학자들도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흄과 칸트인데 이들은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라고 불린다. 한자를 풀어 말하면 아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이론이다. 흄의 경우 이러한 불가지론을 밀고 나가기 위해 인과성 즉, 이 세계에 원인과 결과의 관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라는 속담은 민중들이 의식하는 인과관계를 말하는 것인데 흄은 이러한 기본적인 지점을 부정함으로써 불가지론에 빠진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 인과성을 둘러싼 논쟁은 철학의 역사에서 상당한 비중을 가지는데 인과성을 승인하는가 아닌가가 한때 철학자들을 양대 진영으로 나누었을 정도였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세계의 인식가능성을 전적으로 승인하고 있고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이 세계에 존재함을 완전히 승인한다. 이러한 견해는 물질, 자연이 일차적이고 정신은 이차적이라고 보는 점에 근거하는데 정신은 이차적인 것으로서 근본적으로 현실 세계, 자연의 반영으로서의 성질을 지니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은 세계에 대해 거의 정확하게 인식가능하다는 점을 주장한다. 이것은 거울의 상이 대상을 훌륭히 반영하고 또 카메라의 필름에 맺히는 상이 피사체를 근사하게 묘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단 인간의 인식이 이들 기계적 반영과 다른 점은 판단과 추리, 분석과 종합, 목적성에 따른 복잡한 기획 등의 과정을 거쳐서 반영된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인식의 반영이라는 본질은 고수되는 것이다. 또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의 승인여부는 인간의 인식과 실천에서 많은 차이를 낳는다. 어떤 현상이 있을 때 그것의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과학적 인식의 가장 기본적인 초석이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승인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관계의 객관성을 승인하는 것은 과학의 발전과 과학적 실천의 근본토대인 것이다.

물질과 의식이라는 철학의 최고 물음, 근본물음은 사회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는 물질과 의식, 존재와 사유라는 범주는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 중 어느 것이 선차적인가라는 문제로 변형된다. 생산에서의 지위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적 존재가 일차적인가, 아니면 사회적으로 획득한 의식이 일차적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맑스주의는 사회적 존재의 일차성을 주장한다. 물론 사회적 의식은 사회적 존재에 대해 반작용을 하는 능동적인 요소이지만 궁극적 선차성이라는 점에서는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의 최고물음은 세계관을 규정하는 결정적 요소라는 점에서 사회적 인식과 실천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 객관적 실재를 일차적으로 고려하고 주체를 고려하는가, 아니면 주관적 관념론과 같이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무모한 실천에 뛰어드는가는 실천의 결과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낳을 수밖에 없다. 나아가 그러한 실천이 역사적 실천이고 수많은 대중의 삶과 현실과 관련된 실천일 때는 어떠한 세계관을 갖고 실천을 하는가가 결정적 차이를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세계의 통일성

이러한 철학의 근본물음과 관련하여 주요한 범주로서 세계의 통일성이라는 범주가 있다. 이 세계는 무수히 연관되어 있는 하나의 통일적인 전체인가, 아니면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로 나뉘어진 여러 세계인가는 고대로부터 중세, 근대로 이어지기까지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는 물음이었다. 이러한 물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종교를 믿는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 세계 어딘가에 천상의 세계가 있다고 믿는 것이 현실이다. 종교적 세계관이 지배적이었던 중세 유럽에 있어서는 전형적으로 성직자들은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나누고 있었고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라 설교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동설을 발표했는데 이는 종교적 세계관을 뒤엎는 것이었고 세계관의 혁명이었다. 이리하여 세계를 천상과 지상으로 나누는 세계관은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세계는 무수한 상호연관의 질서가 지배하는 하나의 통일적인 전체라는 관념이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은 태양계와 우주에 존재하는 많은 행성과 별들에도 상호 간에 끌어당기는 인력, 만유인력이 존재함을 주장하여 이 세계의 상호연관성이라는 관념이 성립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세계관의 붕괴와 과학적 세계관의 성립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는데 브루노는 자신의 과학적 세계관을 굽히지 않아 종교법정에 의해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18세기, 19세기 근대과학의 발전은 이 세계의 상호연관과 그것의 통일성을 가리키는 많은 자료를 축적하였다. 스펙트럼을 통해 지구에 들어오는 빛의 성질을 분석한 결과 우주의 물질과 지구의 물질이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지구에 떨어지는 운석에 대한 분석을 통해 지상과 우주는 통일적인 세계라는 인식이 구축되었다. 또한 화학과 물리학의 발전으로 원자와 분자 개념이 성립하여 생물계와 무생물계의 구성원리가 같다는 점이 확인되었고 진화론을 통해 인간은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동물과의 통일성이 존재한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이 세계가 상호연관된 하나의 전체라는 개념, 세계의 통일성이라는 개념은 오랜 기간에 걸친 철학과 과학발전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세계의 통일성에 대한 엥겔스의 정식화를 살펴보자.

“세계가 하나일 수 있기 전에 먼저 그것이 존재해야 하므로 세계의 존재가 그 통일체의 전제이기는 하지만, 세계의 통일체의 요체가 그 존재에 있는 것은 아니다. 정말이지, 우리의 시야를 넘어서는 지점부터는 존재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세계의 진정한 통일체의 요체는 그 물질성에 있으며, 이 물질성은 요술쟁이의 두세 마디 공문구가 아니라 철학과 자연과학의 장기간에 걸친 지속적 발전에 의해 증명된 것이다.”4)

고대부터 많은 철학자들은 이 세계의 통일성의 문제를 탐구해왔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이 이 세계의 근본요소가 물이니, 불이니, 공기니, 흙이니 하면서 논해왔던 것은 이 세계의 통일성을 전제로 하고 통일성의 내용을 파악하려 한 것이다. 이들 철학자들은 과학이 아니라 직관에 근거한 논리적 추리에 의해 그러한 근본요소를 탐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철학자들의 건강한 문제의식은 관념론과 종교에 의해 밀려나고 다시금 세계의 통일성이 논의되고 탐구되고 정립되게 되었던 것은 엥겔스의 말대로 장구한 자연과학 발전, 철학 발전의 결과였던 것이다. 여기서 엥겔스가 말한 세계의 통일성은 그 존재가 아니라 물질성에 있다는 것을 음미해 보자. 이 세계가 하나의 통일체라는 것은 관념론에 의해서도 가능하다. 헤겔의 경우 자연과 이 세계는 절대정신의 외화(外化)이다. 따라서 절대정신에 의해 이 세계의 통일성은 담보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의 통일성은 허구이다. 또 존재라는 개념은 정신적 존재에 대해서도 가능하며 따라서 반드시 현실적인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것만 갖고 세계의 상호연관성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세계의 통일성의 내용인 세계 만물의 상호연관성은 엥겔스의 말대로 바로 그 물질성에 의해 담보되는 것이다. 이 세계가 물질적 세계이고 그러한 물질적 구성원리가 세계의 근본법칙이고 물질성에 의해 만물의 상호연관이 규정된다는 것을 인식할 때만 그것을 철학적으로 표현하는 세계의 통일성 개념이 과학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의 통일성 개념은 탈레스가 세계의 근본요소가 물이라고 말한 것,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뉴턴의 만유인력, 화학과 물리학에서 원자와 분자의 발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한 공간과 시간개념의 과학화 등에 의해서 점차적으로 점점 더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던 것이고 이 과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통일성에 대한 관념은 하나의 세계관이 형성되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세계의 통일성 개념에 의해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 과학적으로 뒷받침되는 것이고 일체의 허황된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천상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지상의 삶이 가장 현실적인 가치를 갖는다는 것, 중요한 것은 천상의 세계라는 정신적 환상을 좇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삶이라는 것 등이 바로 세계의 통일성이라는 개념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다. <노사과연>


1) 엥겔스, <반듀링론>,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5권, 박종철 출판사, p. 154-155.

2) 맑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권, 박종철 출판사, p. 189.

3) 엥겔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6권, 박종철 출판사, p. 254-255.

4) 엥겔스, 반듀링론,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5권, 박종철 출판사,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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