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사건, 해방운동의 현주소

「편집자주」

 2014년 12월 14일 <노동자연대(구 다함께)>에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앞으로 공문을 보냈다.

요지는 본 글(2013년 <정세와 노동>제92호 ‘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사건, 해방운동의 현주소’) 이 ‘허위사실’을 담고 있고 <노동자연대>를 비방하며 명예를 훼손하고 있기에 글을 내려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노동사회과학연구소 편집출판위원회에서는 필자 류한수진 동지와 연락하였고 그 외 경로로 사실관계를 파악해보았다. 그 결과 <노동자연대> 측에서 허위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내용 중 단 하나의 항목만이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확인하지 못한 내용이었을 뿐이었다. 또 글 전체의 요지와 사건의 본질에 있어 적실성이 폄하될 글도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필자와 협의를 거쳐 글 내용의 일부를 수정하여 재개시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만약 <노동자연대> 측이 진정으로 노동운동과 여성해방을 위해 헌신하는 조직이라면 다음의 사항을 요청한다.

본 사건의 피해자 동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라.

2차 가해를 중단하라.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

<노동자연대> 측이 주장하는 허위사실 적시 내용은 아래와 같다.

<허위 사실 적시 내용>

1) 지난해 11월, 한 여성활동가가 ‘노동자연대 다함께의 성폭력 방임을 폭로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인터넷에 올리면서 ‘다함께’는 일대 논란에 휩싸였다. 피해자가 다함께 간부들에게 여러 차례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모두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운동에 해가 된다’는 이유로 만류했다고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글을 본 ‘다함께’ 회원들이 집단적으로 덧글이나 SNS로 온갖 인신공격과 비방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2) 그러나 이 일련의 사태에서 진정으로 충격적인 것은 문제를 대하는 ‘다함께’의 태도였다. 문제가 폭로되자마자 ‘다함께’의 회원 수 명이 인터넷에 피해자를 공격하는 글이나 덧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여기에 수십 명의 회원들이 ‘좋아요’를 누르는 등 동조를 표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함께’에서는 예외적으로 피해자에게 동조적이었던 한 회원은 피해자가 SNS에 올린 글을 공유했다는 이유로 규율분쟁조정위에 제소당했다.

3) 게다가 ‘다함께’는 단순히 사건 해결에 소극적이거나 회원들의 악플달기(?)를 방관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가해자 측이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것을 비롯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다함께’의 유명한 여성운동가가 임신출산결정권네트워크 등의 연대체에서 사건 이야기를 꺼내면서 피해자의 사생활에 대한 비방을 퍼뜨리거나, 가해자 대리인을 자처하는 ‘다함께’ 회원1)이 ‘자꾸 까불던데 한 번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내거나 ‘학교 게시판에 글을 올려 스토커로 몰아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등 피해자의 주변 사람들을 위협하는 등, 조직적인 합의가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괴롭힘이 가해자뿐만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에 의해 사건 폭로 이후로 오래 이어졌다.

4) 그런데 ‘다함께’는 사회 주류적 성인식을 비판하고 대안적인 관점을 제공하기 위한 기초적인 교육조차 실시하지 않았으며, 내부에서 성폭력이나 성차별이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하고 시정하기 위한 매뉴얼도 전혀 구비하고 있지 않았다. ‘다함께’가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노선과 배치되는 언행들이 회원들 간에 공공연하게 일어나도 상호비판이나 내부토론, 규율분쟁조정위원회의 개입 등을 통해 평가와 변화를 모색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요컨대 ‘다함께’에 있어 성평등이나 성해방이란 대중을 동원하기 좋은 의제일 수는 있어도, 내부에서 학습하고 실천해야 할 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노동사회과학연구소 편집출판위원회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허위사실이 아니다.

2) 규율분쟁위원회에 제소하겠다는 조직내의 압박으로 구 다함께를 탈퇴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본문을 수정하였다.

3) 이와 관련한 증언이 있으며 허위사실이 아니다.

4) 2011년, 2012년 신입회원 교육 안내문에 반성폭력과 관련한 어떤 내용도 없었으며 수정된 또 2014년 내부문건에 내용으로 볼 때 문제없는 서술로 보인다. 또한 구다함께 출신의 활동가로부터 비슷한 증언을 확인할 수 있었던 바 역시 허위사실로 볼 수 없다.

이하에는 필자 류한수진 동지의 수정된 글을 재게재한다.


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사건, 해방운동의 현주소

다함께성폭력사건피해자지지모임

지난해 11월, 한 여성활동가가 ‘노동자연대 다함께의 성폭력 방임을 폭로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인터넷에 올리면서 ‘다함께’는 일대 논란에 휩싸였다. 피해자가 다함께 간부들에게 여러 차례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모두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운동에 해가 된다’는 이유로 만류했다고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글을 본 ‘다함께’ 회원들이 집단적으로 덧글이나 SNS로 온갖 인신공격과 비방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개중에는 피해자의 사생활을 거론하거나 음해세력 운운하며 정치적 음모론을 제기하는 글들도 여럿 있었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고, 가해자 가운데 ‘다함께’ 회원이 있었다는 것 자체보다 더 많은 충격과 논란을 불러온 것은 사건이 폭로되자 수많은 ‘다함께’ 회원들이 피해자에게 언어폭력을 휘두르는 방식으로 대응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시종 ‘진상이 불분명하다’면서도 사실상 피해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몰아갔으며, ‘진상에 대해 이견이 있다면 공식적으로 진상 조사를 하고 사건을 해결하자’는 제안에는 ‘다함께와 관계없는 사건’이라며 무시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피해자에 대한 비방글을 올리고, 주위 사람을 위협하고, 심지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등 집요한 괴롭힘을 이어갔다. 사건 폭로 후 7개월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진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이른바 ‘자유로운 분위기’와 개방주의의 함정

사태의 발단이 된 사건은 2011년 7월 서울 시립대 교지 ‘대학문화’의 MT에서 일어났다. 피해자가 폭로한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대학문화’의 편집장과 ‘다함께’ 소속 편집위원, 그리고 피해자 셋이 있던 상황에서, 편집장이 피해자에게 ‘자위해본 적이 있느냐’며 희롱하기 시작했다. 피해자가 ‘자위해본 적 없으며, 하고 싶지도 않다’고 대답하자 편집장은 ‘여자도 자위할 수 있다. 보여주겠다’며 자기 휴대폰으로 여성이 자위를 하는 장면을 찍은 동영상을 틀었다. 피해자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자 옆에 있던 ‘다함께’ 소속 편집위원이 ‘성포비아다. 너도 이런 것 좀 알아야 한다’고 나무랐다. 편집장은 계속해서 피해자에게 모욕적인 질문을 던지며 성적으로 희롱했고, 옆에 있던 편집위원은 거기에 맞장구치며 동조하였다. [주: 이 부분은 상술한 내용이 피해자 쪽의 진술이라는 점이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어 보다 잘 드러나도록 정정하였습니다.]

편집장은 이후 ‘평소에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행동을 하고 다녀서 가르치려고 보여준 것이다’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말을 바꾸어 ‘본래 성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농담을 주고받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실제로 피해자는 평소 ‘대학문화’ 편집장이 성적으로 불쾌한 언설을 자주 했고, ‘다함께’ 소속의 편집위원은 여기에 동조했다고 진술했다.

편집장의 첫 번째 해명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의 말이 근거없는 비방이었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피해자의 성생활이 어떠했든 그것은 그녀를 성희롱해도 된다는 말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해명에는 보다 주목할 부분이 있다. ‘대학문화’ 내에서 일상적으로 성적인 농담이나 언설이 이루어졌으며 편집장이 장난삼아 동영상을 틀었다는 지점에서는 양측의 진술이 일치하는 바, 결국 이것은 해석의 문제가 되는데, 이 ‘해석’의 차이는 성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다는 사람들이 생각 이상으로 빠지기 쉬운 함정이기 때문이다.

성을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처럼 취급하고, 성적 욕망을 금기시하고, 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고는 성적 억압을 유지하는 기제 가운데 하나이다. 성은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인 영역이며, 성을 둘러싼 감정이나 성적 가치관, 성에 대한 발화나 성적 행위 및 다른 모든 성적 사고와 실천들은 순전히 자연적이거나 개인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다른 모든 실천이 그렇듯 사회적, 역사적 조건에 따라 형성되며 해당 사회의 권력관계를 반영하고 재생산한다. 성을 둘러싼 억압이 철폐되지 않은 해방은 결코 온전한 것이 될 수 없다. 성을 열등하고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 진지한 사고나 비판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거나 성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논의를 봉쇄하는 것은 해방을 단념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성적 보수주의는 실제로 이러한 결과를 낳아왔다.

그러나 이것이 성에 대해 아무 거리낌없이 이야기하거나, 더 나아가 무조건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곧 성적 자유와 해방으로 통한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모두가 동등한 발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조건인지 아니면 권력을 더 많이 가진 자와 종속되고 억압된 자가 존재하는지, 사람들이 가진 성적 욕망이 어떤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그것을 추구하는 말이나 실천이 인간을 더욱 주체화하고 해방시키는지 아니면 파편화시키고 예속시키는지를 따지지 않은 채 금기 타파와 자유만을 외치는 것은 가장 반동적인 자유주의가 성적 영역에 응용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의 실천적 귀결은 사회적 구조를 사상한 자유주의의 폐단을 생각하면 이미 명백해진다. 성은 일견, 특히 공식적 영역에서는, 남녀 모두에게 터부시되는 화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공식적 영역에서 남성은 성에 대해 많이 알고 말하도록 허용되거나 적지 않은 경우에 장려되는 반면, 여성은 성적 욕망을 느끼지 못하거나 그것을 혐오하도록, 혹은 최소한 성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취하도록 압력을 받는다. 과거와 달리 여성들의 성적 욕망이나 언행에 대해 사회가 점점 관대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러한 격차는 존재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실 여성을 성적으로 희롱할 수 있는 능력은 종종 ‘남성다움’을 인정받는 한 가지 방식이 된다. 성적 욕망의 성격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 자체가 남성은 지배적․공격적․주도적, 여성은 피동적․소극적으로 다르게 사회화되는 것이다. 이런 기반에서,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성찰하지 않은 채 성적 욕망을 무비판적으로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전횡을 가능하게 할 위험이 크다.

더구나 인간의 성조차 일상적으로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을 구매하고 소비하는 데 매우 익숙해져 있다. 포르노그라피나 성매매뿐만 아니라, 여성 아이돌이 성적 매력을 어필함으로써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나 여성의 몸을 끼워넣음으로써 구매욕을 촉발시키는 광고 역시 성상품화의 스펙트럼 안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언뜻 이것이 성에 대한 제약 없는 접근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상품으로서 성을 소비하는 것은 한 인간을 (구매력을 가진) 다른 인간의 한낱 소비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인간 소외의 한 양상으로, 편리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해방적이지 않다.

‘여자도 자위할 수 있다. 내가 보여주겠다.’라는 편집장의 짐짓 자신만만한 계도나, 이것을 거부하는 피해자에 대한 ‘성포비아’라는 야유의 배경에 깔려 있는 것은 ‘성적 욕망을 억압하는 것은 모두 답답하고 억압적인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성적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게 하도록 계몽되어야 한다’는, 성적 개방성에 대한 무비판적인 추종이다. 이번 사건에서 그것이 드러난 양상은 누가 봐도 잘못됐다고 생각할 정도로 저열했지만, 욕망의 성격에 대한 고찰은 사상한 채 모든 욕망을 무차별적으로 긍정하는 것이 곧 진보이고 해방이라는 사고방식은 다양하고 세련된 형태로 여기저기에 침투해 있다. 이번 사건을 단순히 문제 있는 개인 몇 명의 실수라고 넘겨버려서는 안 될 한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폭력에 대한 ‘다함께’의 이중잣대: 행동의 원리인가 선전 슬로건인가

그러나 이 일련의 사태에서 진정으로 충격적인 것은 문제를 대하는 ‘다함께’의 태도였다. 문제가 폭로되자마자 ‘다함께’의 회원 수 명이 인터넷에 피해자를 공격하는 글이나 덧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여기에 수십 명의 회원들이 ‘좋아요’를 누르는 등 동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함께’에서는 예외적으로 피해자에게 동조적이었던 한 회원은 피해자가 SNS에 올린 글을 공유했다는 이유로 조직 내에서 계속 압박을 받다가 다함께를 탈퇴하였다. 그러나 정작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필자 주: 사실관계를 잘못 알고 쓴 부분이 있어 정정하였습니다.]

이후 결성된 피해자 지지모임은 ‘다함께’에 진상 조사와 사건 성격 규정에 대한 토론을 거쳐 필요한 조치들에 합의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자고 수차례 공문을 보내 요청하였다. 그러나 ‘다함께’는 시종일관 똑같은 답만 보내왔다. 이 사건은 개인들 간의 일이므로 ‘다함께’와 사건을 관련짓는 것은 명예훼손이며, 법정 소송이 진행 중이므로 진상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진상조사를 하자는 요청에 대해서는 무시로 일관했다. 학교 상담소에서 진상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으나, ‘다함께’ 소속의 가해자는 진술에 응하지 않고 계속해서 절차를 유보할 것만 요청했다. 사유는 소송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비판이 제기되자, 가해자 측에서는 상담소의 절차가 불공정했기 때문에 응하고 싶어도 응할 수 없었다는 적반하장식의 답을 전해왔다. 요컨대, ‘다함께’는 결국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면서 진상을 밝히기 위한 시도는 모두 거부하거나 사보타주해온 것이다.

게다가 ‘다함께’는 단순히 사건 해결에 소극적이거나 회원들의 악플달기(?)를 방관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가해자 측이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것을 비롯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다함께’의 유명한 여성운동가가 임신출산결정권네트워크 등의 연대체에서 사건 이야기를 꺼내면서 피해자의 사생활에 대한 비방을 퍼뜨리거나, 가해자 대리인을 자처하는 ‘다함께’ 회원1)이 ‘자꾸 까불던데 한 번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내거나 ‘학교 게시판에 글을 올려 스토커로 몰아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등 피해자의 주변 사람들을 위협하는 등, 조직적인 합의가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괴롭힘이 가해자뿐만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에 의해 사건 폭로 이후로 오래 이어졌다.

한 대학에서는 중앙대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치 탄압을 연상시킬 정도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피해자 지지모임에 속한 회원이 학교 총학생회실에 있는 인쇄 설비를 이용해 ‘다함께’를 규탄하는 대자보를 출력해 붙였는데, 이 대학의 ‘다함께’ 회원들이 총학생회장에게 ‘명예훼손 소송이 진행 중이니 누가 자보를 인쇄해갔는지 알려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총학생회장이 거절하자, 이들은 ‘그러면 인쇄해간 시간을 알려달라. CCTV를 돌려보겠다’고 채근했다. 총학생회장이 ‘그것은 학교 본부에서 본부를 비판하는 자보를 붙인 학생을 징계하겠다고 하는 것과 똑같다. 당신들이 하고 있는 대응에 대해 생각을 좀 해봤으면 좋겠다.’고 강하게 거부하자, ‘다함께’ 회원들은 ‘우리가 하는 것은 아니고 아는 사람이 부탁해서 알아본 것이다’라고 둘러대었다. ‘다함께’가 ‘아는 사람이 부탁하면’ 무엇이든 해주는 생각없는 사람들의 조직이 아니라면 셈이 뻔한 거짓말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다함께’가 정치조직이 아니라 친목회라면, ‘다함께’의 항변은 충분히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다함께’는 해방사회를 말하는 정치조직이며, 조직원의 정치적 행동에 대해 책임지지도 않는 것은 그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가령 ‘다함께’의 조직원이 파업파괴에 가담하거나 기독교의 반동성애 캠페인에 동참했다면, 이는 분명히 조직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다. 성폭력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의 성은 본디 남성이 마음대로 폭력을 가해도 되는 대상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면, 조직원에 의한 성폭력은 조직이 표방하는 기치와 노선에 배치되는 행동으로써 분명히 제재 대상에 해당한다. 하물며 ‘다함께’는 3.8 여성의 날 행사 공동기획단에 소속되어 있으며, 성폭력 문제나 낙태, 피임약 문제 등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안들에 대해 매우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명하고 정치적 행동에 참여해온 단체였다.

dahamgge_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다함께’는 진정 여성 해방을 지지해온 것일까?

사실, 대외적으로는 ‘다함께’ 역시 이런 전제를 인정하고 발언해 왔다. 가령 몇 년 전에 있었던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에 대해, ‘다함께’는 민주노총의 사건 은폐와 2차 가해를 규탄하는 강경한 어조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항의한 바가 있었다. 이 때 ‘다함께’는 성폭력이 개인들 간의 문제라거나, 아직 진상이 가려지지 않았다는 따위의 이유를 들어 비판과 해결 촉구를 유보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함께’의 이런 이중잣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여성의 해방을 소리높여 외치고, 여성의 자유와 성의 평등을 둘러싼 투쟁을 앞장서서 주도해온 단체가, 다른 단체에서 발생한 성폭력 2차 가해에 대해서는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던 단체가, 정작 회원에 의한 성폭력 사건에는 그릇된 조직보위의 전형으로 제시해도 좋을 만큼 무책임하고 기만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다함께’는 진정 여성 해방을 지지해온 것일까? 동기의 순수성이나 감정적 열성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묻는 것은 ‘다함께’가 어떤 차원에서 여성주의를 지지해왔는지이다.

어떤 노선을 지향한다는 것은 그것을 조직 외부의 대상에게 강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변혁은 외부적인 투쟁을 필요로 하듯 또한 내부적인 투쟁을 필요로 한다. ‘다함께’가 표방해온 여성주의의 노선이 아무리 근본적이고 급진적2)이라 해도, 그것이 성적으로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사회에서 평생을 살아온 구성원들의 사고방식과 습성을 저절로 바꾸어주지는 않으며, 그런 점에서 조직이 표방하는 기치와 조직원들의 실천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조직이 이 사실을 인지하고, 이 불일치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때로 지난하고 소모적인 과정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에서의 구체적 실천을 노선에 일치시키려는 부단한 노력이 없이는 어떤 기치도 행동의 원칙이자 새로운 질서의 기초가 아니라 그저 대중에게 도덕적으로 호소하기 위한 선전용 슬로건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런데 ‘다함께’의 회원이었던 피해자의 지적에 따르면 ‘다함께’는 신입회원들을 대상으로 성폭력 예방 교육을 실시하지 않았으며, 내부에서 성폭력이나 성차별이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하고 시정하기 위한 매뉴얼도 전혀 구비하고 있지 않았다. 피해자는 또한 ‘다함께’가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노선과 배치되는 언행들이 회원들 간에 공공연하게 일어나도 상호비판이나 내부토론, 규율분쟁조정위원회의 개입 등을 통해 평가와 변화를 모색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함께’에 있어 성평등이나 성해방이란 대중을 동원하기 좋은 의제일 수는 있어도, 내부에서 학습하고 실천해야 할 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필자주: 이 부분 역시 피해자 쪽의 진술이라는 점을 지적받아 정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2014년 12월에 공개된 다함께의 내부 문건들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진술은 사실인 것으로 보입니다.]

‘용인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지책

그렇다면 ‘다함께’ 이외의 운동사회 성원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다른 조직의 일이니 상관하지 않는 것이 맞는 것일까? 혹은 운동사회 전체의 명예가 더럽혀질 수 있으니 침묵하는 것이 옳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변혁을 표방하는 조직이 정치적인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이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올바른 관점과 실천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제시하며, 지속적으로 잘못을 반복하는 상대에게는 확실하게 선을 긋는 것이 정치조직의 책임이다.

그리고 운동사회 전체적으로 이러한 태도가 자리잡는 것이야말로, 운동사회 내부의 성폭력을 비롯한 폭력이나 차별을 막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일일 것이다. 성폭력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일인 한 어떤 제재도 실효성 있게 집행될 수 없으며, 반대로 운동사회에서 성폭력을 저지르거나 비호하는 행동을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 명확해질 때 이것은 어떤 제재보다도 더 강하게 성폭력이나 2차 가해를 저지르는 것을 막아줄 것이다.

물론 이런 말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고민들이 산적해 있다. 가령, 운동사회에서 아직도 성폭력이나 2차 가해가 용인되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어떤 합의가 부족한가? 여성주의는 왜 ‘다함께’의 내부적인 원칙으로 실천되지 못했는가? ‘다함께’의 구성원들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왜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가? 단순히 ‘다함께’가 유별나게 무책임하고 비민주적인 조직이어서인가, 아니면 ‘다함께’ 한 조직으로 국한할 수 없는 더 넓은 범위의 문제가 존재하는가?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실천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지점까지 들어갔을 때, 우리는 비단 ‘다함께’를 비판하는 데서만 그칠 수 없으며, 운동사회 일반의 문제점들에 대한 질문들까지 던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는 결코 복잡한 문제가 아니다.

피해자 지지모임에서 현재 내세우는 요구는 사건에 대한 공식적 인정과 사과, 피해자에 대한 비방과 폭력 중지, 반성폭력 내규와 교육 실시, 가해자에 대한 적절한 제재조치이다. 모호할 것도, 비현실적일 것도 없는,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만한 조치들이다. 지난한 싸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운동사회가 성폭력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는 선례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될 시기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을 만드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이 충분한 단호함과 약간의 관심을 보여준다면 말이다. <노사과연>

사건이나 지지모임의 활동에 대한 질의나 의견, 메시지 등은 아래의 경로로 보내주세요.

scatv567@gmail.com

facebook.com/alltogetherSV


1) 정확히 말해, 가해자 대리인을 자처하는 자는 ‘사건에 전념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다함께를 탈퇴한다’고 밝혔으며 현재 ‘다함께’와 사이가 원만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2) 사실 ‘다함께’가 번역·출판해온 소책자나 서적들의 논조를 보면 과연 그러한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만한 부분이 많다.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1개의 댓글

  • [제3증보판] 류한수진이 회피하는 문제들:
    류한수진의 반성폭력 운동은 노동자연대 낙인 찍기가 목적이었음이 드러나다

    [편집자 주 : 이 글은 12월 6일 발표한 글의 제3판(두 차례 증보)이다. 추가 제보를 반영하느라고 그랬다. 앞으로도 추가 제보가 들어오면 그때마다 계속 증보판을 낼 것이다. 이번 증보판에서는 1번과 2번 항목을 중심으로 추가했음을 밝혀 둔다.]

    12월 3일 ‘노동자연대 낙인찍기에 대처하기 위한 TF’는 ‘류한* 씨는 노동자연대 낙인찍기를 시작한 책임을 돌아봐야 한다’라는 제목의 글(이하 ‘책임을 돌아보라’ 글)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류한수진 씨(본인의 희망을 반영해 성뿐 아니라 이름도 밝히고, 이하 호칭 생략)가 자신의 생각을 SNS에 밝혔다(이하 ‘12월 3일 SNS 글’).

    그러나 류한수진은 여전히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들을 못 본 척하고 넘어가거나 회피하고 있다.

    우리는 류한수진이 해 온 일들을 알면 알수록 정말이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아래에서 입증되겠지만, 류한수진은 처음부터 노동자연대 낙인 찍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이를 위해 매우 비도덕적이게도 거짓말, 날조ㆍ왜곡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행태는 결코 좌파 운동 내에서 용인돼서는 안 된다. 이 글은 그가 어떤 거짓말과 날조로 우리 단체를 모함해 왔는지를 낱낱이 밝힐 것이다.

    (덧붙여, 류한수진은 여지껏 자신이 왜 A의 대리인을 그만두게 됐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한 단체를 최전선에서 ‘성폭력 (가해) 조직’으로 매도하고, 잠시 동안의 에피소드로 끝났을지도 모를 사건을 이런 정도로 키워 놓은 장본인이면서, 중간에 아무 설명 없이 슬그머니 발을 빼는 게 자기 활동에 책임지겠다는 태도인가. 류한수진은 A의 주장이 이제 더는 믿기 어려워진 건지 아니면 무엇 때문인지 소상히 밝혀야 할 도의적 의무가 있다.)
    1. 여성단체가 진상조사를 해 주기로 한 걸 다함께가 거부했다는 거짓말

    2013년 4월 24일 류한수진의 A지지모임은 다함께[2014년 2월 28일 이전의 일을 언급하는 경우에는 노동자연대의 이 옛 명칭을 사용할 것임]에 공문을 보내 여성의전화가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책임지고 진행해 줄 의향이 있다는 말을 전해 왔으므로, 다함께가 참여할 의향이 있는지 의사를 알려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이를 지지모임 페이스북 페이지에 공개했다.

    그러나 정아무의 대리인이었던 이** 씨가 여성의전화 측에 사실을 확인해 보니,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여성의전화는 “류한수진이 상담을 받은 적은 있지만, 여성의전화가 이 사건에 대해 진상조사를 해 주겠다고 말한 적은 없고, 류한수진이 여성의전화 이름을 팔고 다닌 점에 대해 항의했다”고 확인해 줬다. 심지어 류한수진은 여성의전화에 “공개 사과라도 할까요?” 하고 물어 봤지만, 여성의전화 측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앞으로 사실이 아닌 얘기를 하고 다니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이 점은 민사소송 재판에서도 쟁점이 됐고, 류한수진은 자신이 여성의전화에 사과해 받아들여졌다고 시인했다.

    그런데 A지지모임은 지난해 4월 25일 이 사건에 대한 공개 포럼 발제문에서 “여성의전화가 진상조사를 맡을 의향이 있다고 했으나 다함께가 답하지 않고 있다”고 썼다. 거짓말에 근거해 우리 단체를 비난하고 다닌 것이다. 류한수진은 여태까지 자신이 허위사실을 공문으로 보낸 것에 대해 우리 단체에 어떠한 사과도 정정도 한 바 없다. 그리고 이 공문은 여태 지지모임 페이스북 페이지에 떠 있다.

    한편, 대책위는 최근 한상균-최종진-이영주 선본에 보낸 문서에서는 같은 포럼 발제문을 첨부하면서 어떤 사실관계 정정 언급도 없이 이 부분을 슬그머니 삭제했다.
    2. 다함께에 대한 악의적 왜곡ㆍ날조

    자신이 다함께에 한 일에 대해서는 사과는커녕 후회도 하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는 류한수진의 활동이 다함께를 낙인 찍는 것이 목적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들을 보자.

    1) 류한수진은 A가 온라인상에서 첫 폭로를 한 지 단 하루만에 ‘피해자 대리인’을 자임했다. 그리고 사흘 뒤인 11월 19일 SNS에 ‘다함께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 성원을 모집하는 글(아래)을 올렸다. 그런데 이 글은 매우 악의적으로 사실관계를 날조하고 있다.

    △류한수진이 11월 19일 페이스북에 ‘다함께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 성원을 모집하는 글. ⓒ출처 류한수진의 페이스북

    이 글에는 이 사건이 다함께와는 아무 관련 없는 한 대학 동아리의 엠티에서 벌어진 일이고, 야동을 직접 보여 준 이는 다함께 회원이 아닌 이정*이라는 사실이 완전히 누락돼 있다!

    이 글은 아예 “노동자연대 다함께 회원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있었다”고 시작해 “인간의 해방을 지향한다는 조직에서 이런 노골적인 성폭력이 저질러”졌다(강조는 나의 것)며 마치 다함께 주요 회원 한 명이 강간이라도 저지르고 단체가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있는 양 씌어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조직 구성원들이 하나같이 침묵하고” 심지어 “피해호소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썼다. 또, 회원 조아무가 SNS상에 올린 개인의 글을 “입장서”라고 표현해 마치 단체가 피해호소인의 사생활을 들춰 내는 공식 성명서를 쓴 양 보이게 했다. 심지어 다함께의 행태를 좌시하지 말자며 당장 행동하자고 선동까지 한다.

    류한수진은 피해호소인의 말을 기정사실화한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객관적 사실 중 핵심 사실(행사 주최 단체와 야한 동영상을 직접 보여 준 사람)을 고의적으로 누락해 사실상 사건을 재창조했다.

    이런 행태는 단순한 경솔함의 문제가 아니다. 류한수진의 이런 행동이 무슨 동기에서 비롯했는지 우리로선 어렴풋이밖에 알 수 없지만, 악의적인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정말이지 이럴 수는 없다.

    2) 류한수진이 2013년 8월 6일에 사회주의노동자신문(이하 사노신)에 기고한 글을 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이 글은 완전히 소설이나 다름 없다.

    여기서도 다함께 회원인 한 여성이 “단체에서 성폭력을 당했”다고 쓴 것은 기본이고(행사 주최 단체와 야한 동영상을 직접 보여 준 사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음), 정아무의 대리인이 다함께를 탈퇴한 후 독자적으로 하는 일을 두고 다함께가 “지능적으로” 대리인을 “배후 지원”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쓰고 있다.

    가장 경악스러운 것은 이런 서술이다. “[다함께는] ’여자가 숙박시설에 같이 가는 것은 관계에 동의한다는 뜻이므로 숙박시설에 따라갔다가 성폭력을 당한다면 거기엔 피해자의 책임도 있다’는 식의 인식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데이트 강간이나 가정폭력, 아내나 여자친구에게 ‘뒷바라지’ 시키기 등의 불평등한 성역할 구분이 이루어져도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여자가 사회를 봐야 분위기가 좋아진다’는 이유로 여성에게 사회를 시키는 일도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다함께에게 ‘여성차별 반대’는 “단순한 구호나 동원 기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완전히 정신나간 헛소리다. 제정신인가? 다른 단체에 대해 이렇게 근거 없는 비방을 해도 되는 건가?

    우리 단체가 이처럼 나치 깡패 조직 비슷한 곳이라면 어떻게 그토록 많은 여성들이 조직 내에서 주도적인 구실을 할 수 있단 말인가.(우리 조직의 주요 기구에는 여성 활동가들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 정확한 수치는 11월 26일 노동자연대 운영위원회가 발표한 논평 “‘성폭력 가해 단체’라는 명예훼손 모략을 중단하라”를 보시오.) 우리 여성 회원들은 모두 바보, 천치인가? 아니면 ‘명예남성’이라고 할 건가? 거짓말을 진실인 양 스스로 믿는 게 가장 위험하다는데, 정말이지 당신이 무섭다. 류한수진은 우리 단체가 오랫동안 발전시켜 온 마르크스주의적 여성해방론과 실천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은 물론, 우리 단체의 여성(과 남성) 회원들을 완전히 모욕하고 있다. 우리는 이에 매우 분노한다.

    이뿐이 아니다. 류한수진은 우리 조직이 “조직의 입장이라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덮어놓고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전형적인 종파주의”라고 한다. 우리 단체 자체를 ‘강간 집단’으로 몰아간 것도 모자라 조직원 모두가 전혀 스스로 사고할 능력이 없는 ‘무뇌아 집단’ 취급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류한수진은 ‘옳지 못한 일을 하고도 책임 회피하면 더 이상 동지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며 자신의 진짜 목적을 넌지시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은 사노신과 국제코뮤니스트전망, 노사과연 같은 곳에 실렸다.(노사과연 웹사이트에는 거의 비슷한 내용이지만 악의적 날조가 새로 추가된 글이 실렸다.) 주로 다함께를 배척당하도록 만들고 싶어 하는 순도 1백 퍼센트 종파들이었다.

    심지어 사노신은 류한수진의 날조 기사를 실어준 것만으로도 책임을 면할 수 없을 텐데(‘기고 기사의 관점은 사노신의 입장과 다를 수 있다’고 달아 놨다 해서 날조 기사를 게재한 책임을 비켜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노신과 전망은 대책위 참가 단체다), 한술 더 떠 편집자 주에서 야동을 보여 준 이정*이 “다함께 회원”이라고 하는가 하면 우리 단체에 확인도 해보지 않고 “사건 이후 1년 넘게 다함께는 피해자의 문제해결 요구를 묵살해 왔다”고 거짓말하고 있다. 실로 증권가 찌라시만도 못하다!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스스로 믿는 경거망동. 2013년 3.8세계여성의날 집회에서 A지지모임의 팻말 시위. ⓒ사진 출처 다함께, 대학문화 성폭력 사건 대책위원회

    3) 최근 류한수진은 자신의 SNS에 올해 3월 초 노동자연대에서 불명예스럽게 백안시당하며 탈퇴한 전지윤 씨의 글을 링크하며 공감을 표하고 있다. 전지윤은 바로 그 글에서 류한수진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하고 처벌하라고 했던 정아무를 ‘또 다른 피해자’라 하고, 우리 단체가 그를 징계한 것을 문제 삼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전지윤은 탈퇴 직전에 정아무와 함께 분파 활동을 하며 A와 류한수진에게 “정신나간 것들”이라고 하며 정아무의 민사소송 재판을 격려하기도 했다.(전지윤에 대한 좀더 자세한 비판은 ‘[증보판] 노동자연대에 대한 복수심으로 자가당착과 자기기만의 늪에 빠진 전지윤 씨’를 보시오.) 이것은 류한수진이 오로지 다함께를 비방하는 데만 관심이 있음을 스스로 말하는 꼴이다.

    4) 또한 류한수진은 법정 진술에서 이렇게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지지모임’의 활동은 전체적으로 이정* 씨나 정아무 씨 개인을 비난하기보다 ‘다함께’의 이러한 태도를 지적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었습니다.”
    3. ‘방조’와 ‘공범’을 구분하지 않음: 류한수진이 하마터면 명예훼손죄로 찍혔을 쟁점

    2011년 7월 S대 교지 편집부 수련 모임 자리에서 편집장 이정*는 A에게 야동을 보여 줬고, 당시 다함께 회원 정아무는 이를 방관(방조)했다. 그런데 류한수진은 ‘방조’와 ‘공범’(이 사건의 경우 공동정범을 뜻함)을 구분하지 않고 정아무를 “성폭력 공범”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두 행위는 단순한 용어 차이가 아니라 명백히 구분되는 행위이다.

    법적 용어로 ‘공범’이란 “1인이 단독으로도 실행할 수 있는 범죄를 2인 이상이 협력하여 실행하는 경우”를 말하는 한편, ‘방조’란 “실행행위 이외의 행위로써 정범(피방조자)의 실행행위를 용이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강조는 나의 것) 최근 정아무가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에서도 정아무가 공범이라는 A의 주장은 “허위사실”이라고 판결했다(즉, ‘공범’과 ‘방조’를 구분했다). S대 성폭력예방대책위원회 의결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런 법률 용어를 정확히 모르더라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방조’와 ‘공범’을 다른 의미로 쓰고 받아들인다.

    그런데 류한수진은 이 둘을 전혀 구분하지 않고 피해자의 말만 듣고 정아무도 이정*과 함께 야동을 보여 준 ‘공범’이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정아무가 공범이냐 아니냐’가 진상을 둘러싼 공방의 핵심 쟁점이었다. 명예훼손 소송의 핵심 쟁점도 바로 이것이었다.

    류한수진은 S대 교지 조윤* 대표와 우리 단체에 이정*과 정아무 모두를 공범으로(즉, 주 가해자로) 인정하지 않으면 2차가해라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우리 단체는 둘 모두를 “주 가해자”라고 보기에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봤다. 물론 개념 없이 방조한 것도 잘못이라고 여겨 결국 정아무를 징계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류한수진은 이정*에 대해 “주 가해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주 가해자”라는 표현은 ‘부차적 가해자’가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류한수진은 처음에 A의 말만 듣고 성급하게 정아무도 ‘공범’으로 규정했던 오류를 시인하거나 돌아보려 하지는 않고, 은근슬쩍 둘의 행위를 구분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무책임하고 솔직하지 못하다.

    류한수진이 서울북부지법 허명산 판사의 배려로(왜 배려했을까?) 명예훼손 재판의 공동 원고에서 빠지지 않았다면, 그는 명예훼손 유죄판결을 받아 장차 만약 공직선거에 출마한다면 불이익이 됐을 것이다.
    4. 법정에서는 ‘반성문’ 쓰고 노동자연대에는 악의적 비방을 계속함

    류한수진은 “피해자의 말을 기정사실화하는 식의 표현이 많았던 것”(강조는 나의 것)은 당시 자신의 한계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피해자의 말을 기정사실화”한 문제는 단지 일부 “표현”의 문제가 아니었다. 류한수진은 “피해자의 말을 기정사실화”하고, 그런 인식에 기초해 활동을 했고, 피해자의 말을 기정사실화하지 않는 행위를 ‘2차가해’로 몰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후의 모든 활동을 규정하는 결정 요인이자 출발점이었다.

    류한수진이 당시와 달리 지금은 피해호소인의 말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을 경계하고자 한다면, 다함께를 “성폭력 가해 조직”이라 규정한 애초 A의 주장을 지금이라도 검증해 보려 해야 하지 않겠는가.

    ‘홀로 조직에 맞서는 피해호소인을 조력하기 위한’ 피해자 지지모임을 구성하는 것과 그 활동이 올바랐는지 아닌지는 바로 여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만약 다함께가 가해 조직이 아니라면 그런 모임은 있을 이유도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책임을 돌아보라’ 글에서 우리는 ‘과연 류한수진이 정아무가 이정*(사건의 주 가해자)와 함께 강제로 야동을 보여 줬다는 A의 말이 진실인지 검증했는지, A의 말대로 다함께가 A의 호소를 방임했는지 아니면 다함께 중앙은 이 사건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는지’ 제대로 확인이나 해 보았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하지만 류한수진은 이 물음에 답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류한수진은 이미 법정 진술(2014. 4.12)에서는 이렇게 썼다.

    “이전에 제가 썼던 글들 가운데 주장을 사실처럼 쓴 부분이 있거나 신원 보호에 충분히 유의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면 이는 잘못이었다고 생각하며, 이정* 씨와 정아무 씨에게 사과하고 싶습니다. 또한 사건의 진위 여부를 떠나 가해자로 지목당한 입장에서 개인이 느낄 수밖에 없는 중압감과 고통을 충분히 배려하지 못한 것도 후회합니다.”

    문제는 이런 태도를 다함께 낙인찍기를 돌아보는 데는 적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1) “사건의 진위 여부를 떠나 가해자로 지목”한 것을 후회한다면서도, 가해자 또는 가해 단체로 함부로 몰아서는 안 된다며 SNS상 진위 공방을 벌인 다함께 회원들의 태도는 여전히 “2차가해”로 몰고 있는 것이다. “후회”할 짓(“사건의 진위 여부를 떠나 가해자로 지목”하기)에 동참하지 않고 진위를 따지자고 한 게 “2차가해”란 말인가? 이것은 혼자 “후회”는 할망정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것이고 비판도 받지 않겠다는 태도다.

    2) “신원 보호에 충분히 유의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면 이는 잘못”이었다면서도, 우리 단체를 “사건의 진위 여부를 떠나” 성폭력 가해 단체로 지목한 것은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류한수진은 지지모임의 명칭을 “다함께 성폭력 사건”으로 붙임으로써, 마치 다함께 내의, 그것도 핵심 간부가 저지른 강간 사건을 조직 보위를 위해 다함께가 은폐한 것처럼 여겨지도록 만들었다(이것이 다분히 고의적이었다는 점은 뒤에서 다시 설명할 것이다). “사건의 진위 여부를 떠나 가해자로 지목당한 입장에서 개인이 느낄 수밖에 없는 중압감과 고통”에 대해서는 후회한다면서, 한 단체와 그 단체의 회원들이 느끼는 중압감과 고통은 외면해도 되는가?

    3) 또한 류한수진은 다함께를 “성폭력 가해 단체”로 폭로한 A를 옹호하면서, “A의 말이 사실이라고 전제한다면 A의 폭로는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썼다. 다시금 류한수진이 유일하게 의존하는 것은 A의 말이 사실이라는 “전제”일 뿐이다. 그러나 “피해자의 말을 기정사실화”한 한계를 인정한다면, 이 전제를 돌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

    “후회”를 하고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발본적인 돌아보기를 유보하고 있는 탓에 류한수진이 “피해자의 말을 기정사실화”해서 당시 상황을 인식했던 편견은 여전히 뿌리깊게 남아 있다. 12월 3일 SNS 글에서 류한수진은 노동자연대를 “조직원에 의한 인권 침해를 호소하는 개인을 침묵시키고 책임을 회피하려 드는 조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이런 규정에 대한 자세한 논박은 노동자연대가 11월 26일 발표한 글 ‘‘성폭력 가해 단체”라는 명예훼손 모략을 중단하라’를 보라.)

    그러나 A의 말을 “기정사실화”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이제라도 원점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다시 판단해 볼 용기를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지는 않고 도대체 무슨 근거로 “당시에 다함께 회원들은 명백히 문제를 묻어버리려고 하고 있었다”고 여전히 주장하는가? 또다시 A의 “주장을 사실처럼” 쓰는 후회할 일을 반복하는 것인가?

    2차가해 개념

    나는 류한수진이 지지모임을 결성하는 과정과 이후의 활동 전체에서 피해자 절대주의 말고는 어떠한 객관성이나 신중함이 있었는지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와 관련해 노동자연대는 ‘책임을 돌아보라’ 글에서 ‘2차가해’ 개념이 성폭력 개념을 매우 주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일조함으로써 피해자의 말을 절대화하는 데로 이끌기 쉽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류한수진은 이 지적에 대해서도 회피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2차가해’ 개념을 받아들이면 피해자 절대주의를 경계한다는 말과 실제 행동 사이의 불일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5. SNS상의 공방과 법정소송이 조직적 결정이 아니었다는 증거 무시

    류한수진은 SNS상의 공방과 정아무의 법정소송이 다함께의 조직적 결정에 따른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근거들도 한사코 못 본 척하고 있다.

    류한수진은 SNS상에서 공방을 벌인 회원들에 대해 조직 내부에서 “상호비판을 얼마나 했는지”는 몰라도 피해자는 이에 대한 사과를 받아본 바 없으므로 내부 비판은 피해자와 “무관한 얘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조직 내부적으로 비판과 문책이 있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치 않다는 주장은 거의 의도적인 책임 회피다. 다함께가 “조직적”으로 결정한 사항이 SNS상의 모든 공방을 중지하라는 것이었다면, 다함께가 “조직적 2차가해”를 저질렀다는 류한수진과 대책위의 핵심 주장(나아가 활동 자체)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류한수진은 피해호소인에게 사과하지 않은 것을 문제삼는다. 그러나 그가 다함께를 부당하게 “(2차)가해 조직”으로 낙인 찍은 상황에서 이 문제의 해결 없이 다시금 왜 사과하지 않느냐고 하는 것은 다함께가 “2차가해”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밖에 안 될 것이다. 류한수진과 A지지모임이 다함께를 근거없이 낙인 찍은 책임을 먼저 시인하는 것이 사태 해결의 출발점이다. 그런 류한수진은 법원에서는 “사건의 진위 여부를 떠나 가해자로 지목”한 것을 후회한다(법정 진술)고 해 놓고 공개적으로 사과했는가?

    그런데, 만약 단체가 정말 “조직적”으로 대응했으면, SNS상에서 공방에 나선 회원들의 글에 ‘좋아요’가 고작 30개밖에 안 됐을까? 회원들에게만 촉구해도 순식간에 수백 명, 비회원 지지자들까지 합치면 천여 명은 훌쩍 넘길 것이다. ‘좋아요’ 30개 누른 걸 “조직적” 대응이라고 하는 것은 경솔한 판단이다.

    사실, 그때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은 대체로 A와 잘 지냈던 학생회원들이었다. 그중에는 A를 진지하게 도와주려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와 잘 지냈던 학생회원들이 어느날 갑자기 A가 단체 자체를 ‘성폭력 집단’으로 만들자 배신감에 ‘발끈’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건의 진위 여부를 둘러싼 공방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 아닌가? 류한수진은 한 번만이라도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라.

    그리고 법원 판결도 그렇지만 실제로, A와 류한수진이 정아무를 ‘성폭력 공범’으로 매도한 건 “허위사실”로 드러났지 않은가.

    정아무의 법정소송을 다함께가 “부추겼고”, “배후 종용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점은 이미 여러 글에서 언급하고 있어서(‘책임을 돌아보라’와 ‘노동자연대에 대한 복수심으로 자가당착과 자기기만의 늪에 빠진 전지윤 씨’를 보시오), 이 글에서 반복하지는 않겠다. 다만, 정아무 대리인이 스스로 “다함께 측에서는 소송에 반대했다”고 증언한 사실을 류한수진은 못 본 척하지 말라.
    6. 인과관계의 전도: 다함께에 뒤집어씌우기

    A는 처음 폭로부터 다함께를 “성폭력 2차가해” 단체로 낙인찍었다. 류한수진은 이것이 없었던 일인 양 무시하면 안 된다.

    류한수진의 글만 보면, 마치 갑자기 다함께 회원들이 온라인상에서 피해호소인을 ‘린치’하려고 달려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책임을 돌아보라’ 글에서 우리는 A가 이미 첫 폭로 때부터 다함께를 “성폭력 방임”한 “2차가해 단체”라고 규정했고(A의 첫 폭로 글을 확인해 보라), 사실 이 때문에 당시 학생조직자의 경솔하고 부적절한 온라인 대응이 시작됐다고 지적했다. 즉, 처음부터 단체 자체를 2차가해로 규정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발로서 온라인상의 (잘못된) 공방이 시작됐던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류한수진은 이 점을 인정하는 것이 불리하다고 봐서인지 계속해서 인과관계를 전도시키고 있다. “유체이탈 화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류한수진이다.
    7. 무분별한 폭로에 대한 성찰 없음

    류한수진은 이런 폭로 방식이 사건 해결에 목적이 있는지, 아니면 비방 자체에 목적이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는 방식이라는 점을 조금도 돌아보려 하지 않고 있다.

    류한수진은 12월 3일 SNS 글을 시작하며 누군가가 노동자연대의 글에 자신을 태그하고 간 것에 대해 “처음 보는 사람이 다짜고짜 얼굴에다 성명서를 던지고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라고 썼다. 그러나 처음 보는 사람이 다짜고짜 사실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우리를 “성폭력 단체”로 낙인찍었을 때 우리가 느낀 심정만 하겠는가.

    류한수진은 다함께에 여러 차례 사건 해결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는 걸 ‘증거’로 들면서, 자신과 A지지모임은 문제 해결을 바랐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A지지모임이 다함께에 첫 공문을 보낸 것은 A의 온라인 폭로 2주 뒤인 12월 2일이었다. 그 사이에 류한수진은 이미 “다함께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을 만들고 지지자들을 모집했으며 11월 28일에 지지모임의 명의로 다함께가 “2차가해로 ‘대동단결’”해 있다는 내용의 입장서까지 발표했다! A지지모임은 이 입장서에 “영화 같은 현실”이라는 선정적인 제목을 달아 노동조합 게시판 등 온갖 곳에 올렸다. 우리를 강간하는 조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미 바깥에서 “성폭력 가해 단체”로 낙인찍어서 동네방네 떠들어 놓고 그 뒤에 공문 보내서 사건 해결하자고 하면 대체 누가 그걸 진상 조사가 가능한 절차로 받아들이겠는가? 실제로 A지지모임은 “가해 사실 자체를 부정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상조사 절차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다함께ㆍ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에 대한 평가와 해결 방안’).

    류한수진은 다함께에 공문을 보내기 전에 자신이 한 일은 쏙 빼놓고 마치 지지모임이 처음부터 “양자가 납득할 수 있는 절차를 통해 해결하자고 요구”했는데도 이를 다함께가 걷어찬 것처럼 서술해 인과관계를 뒤바꾸고 있다.

    류한수진의 A지지모임은 1차 공문을 보낸 직후에도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같은 주요 단체들에 A의 말을 기정사실화하고 노동자연대를 ‘성폭력 (가해) 단체’로 규정해 공문을 보냈다.

    다함께의 사과와 반성을 전제한 대화

    게다가 류한수진은 지지모임이 처음부터 전제조건을 내걸었다는 점을 완전히 모른 척하고 있다. 류한수진과 A지지모임은 첫 공문에서부터 이미 이 사건을 “다함께 성폭력 사건”으로 규정해 놨고, “2차가해로 명명되는 행위”에는 “피해 사실을 부정하는 표현” 등이 포함된다고 명시해 뒀다. 두 번째 공문에서는 우리 단체가 정아무를 성폭력 가해자로 인정하지 않으면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지지모임은 심지어 페이스북에서 단순히 ‘좋아요’를 누른 것까지 “2차가해”라고 말한다!

    이렇게 류한수진과 지지모임에게 정아무는 “성폭력 가해자”이고 다함께는 “성폭력 가해 조직”이라는 점은 이미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사건 해결”은 가해 사실을 ‘다함께가 인정하고 사과ㆍ반성’하는 것을 뜻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함께가 지지모임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다함께가 아닌 그 어떤 단체라도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긴 어려웠을 것이다.

    다함께의 이런 판단이 옳았음은 S대 교지 조윤* 대표의 사례를 통해 입증됐다. 류한수진의 A지지모임은 조윤* 대표가 사건의 진상을 진술이 엇갈려 알기 어렵다고 했는데도, 조 대표의 사과문에 “명백한 성폭력이었다”는 문구 추가를 강요하고 윤문까지 해 보냈다. 이런 방식으로 다함께가 가해 사실 자체에 의문을 표하는 순간 2차가해로 취급받는 일이 똑같이 반복됐을 텐데, 이게 과연 “양자가 납득할 수 있는” 방식인가?
    8. 추진위와 자신을 구분하면서 다함께 중앙과 회원 개인은 구분하지 않음

    결국 류한수진에게 남는 논리는 “조직의 정치성은 조직원들의 실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로 류한수진은 아주 손쉽게 회원 개인이 한 일에 대한 책임을 노동자연대에 묻고 있다.

    그러나 조직적 결정에 따른 것도 아닌 조직원의 행동에 왜 조직 전체가 책임이 있다고 하는가? 다시 묻건대, 민주노총 조합원이 동호회 모임에 가서 성희롱 방관을 저지르면 그것은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이 되는가?

    사실 류한수진의 이런 주장은 근본적으로 당이 운동을 표현한다는 그릇된 당 개념을 보여 주는 것이다. “조직의 정치성은 조직원들의 실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면, 그 정치조직은 자발성 원칙이 리더십 원칙을 압도한다는 뜻이다. 이런 조직에서 중앙 지도부는 사실상 조정 기관일 뿐이다. 그냥 조직원들이 알아서 활동하고 중앙 지도부는 그 활동들을 조율할 뿐이다. 이런 조직관 때문에 추진위 회원인 류한수진이 그토록 개인주의적일 수 있는 것인가?

    개인주의적 조직관에 친화적이어서인지, 류한수진은 레닌주의 조직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 그러나 류한수진이 가정하듯 개인들의 돌출적ㆍ일탈적 행동 없는 그런 획일적이고 융통성 없는 조직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 같은 단체의 회원이라도 개인들이 살아온 경험이 다르고, 그래서 같은 걸 보고도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 레닌주의 조직원들이 로봇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우리 단체는 회원들 간의 의식의 불균등성을 극복하고 이데올로기적 동질성을 높여나가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은 동질적이지 않다는 점을 말해 주는 것이다.

    외눈박이

    설사 “조직의 정치성은 조직원들의 실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는 류한수진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해도 이를 통해 다함께를 ‘성폭력 가해 조직’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왜냐하면 A가 회원일 당시 다함께 회원들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어떤 회원은 A에게 S대 교지에서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라고 권유했기 때문이다. 2012년 11월에 지지모임이 민주노총 여성위원회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심지어 A가 첫 폭로 글에서 주로 분노를 드러내는 옛 연인인 다함께 회원 조아무도 A에게 “직접 폭로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해” 줬다. 그러나 A 스스로 쓰고 있듯, “용기가 없어서” 공개적 문제제기를 해보라는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다. 이렇게 본인이 제기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누군가가 폭로를 대신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뒤에도 또 다른 회원이 ‘강제로 동영상을 보여 준 사건에 회원이 관여돼 있느냐. 그렇다면 징계 절차에 들어가야 하니 알려 달라’고 했지만, A는 “회원이 아니다”, “웃어 넘길 일이다” 하며 이를 거절했다. 이 일은 A의 온라인상 첫 폭로 불과 보름 전의 일이다.(그 보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A의 태도가 돌변했을까 하는 물음은 합리적 의심 아닌가. 이 의심을 2차가해라고 억누르는 건 비민주적이고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류한수진은 외눈박이처럼, A를 도와주려 했던 이런 회원들은 보지 않고, SNS상에서 공방을 벌인 회원들만 보고 조직 전체를 매도하고 있다. 매우 불공정하다.
    9. 기호 2번 한상균 후보조 선본도 지지할 가치가 없는가?

    류한수진은 ‘성폭력 가해 조직(이 포함된) 선본이 당선된다 한들 그렇게 세워진 지도부가 여성해방의 쟁점들에 대해 계급 대중에게 어떤 지도력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심지어 “하자 있는 상품을 과대포장해 팔아먹”는 것이라고 말한다. 류한수진은 자기 단체인 추진위가 한상균 후보조 선본에서 활동하고 있는데도, 노동자연대가 속해 있다는 이유로 이 선본은 지지할 가치가 별로 없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백번 천번 양보해, 노동자연대가 류한수진의 말마따나 “성폭력 2차가해 조직”이라 해도, 그렇다고 선본도 지지할 가치가 없는 것일까?

    현재 선본 활동은 강령과 원칙을 달리하는 이질적 집단들이, 좌파적 지도부가 세워지면 노동자들의 투쟁에 더 유리할 것이라는 목표 하에 일시적으로 연합한 것이다. 선본이 곧 노동자연대는 아닌 것이다. 설사 노동자연대가 문제가 있다손치더라도 그걸 이유로 선본 전체를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은 완전한 비약이다.

    사실 류한수진의 이런 태도는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성폭력 문제에 가장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문제점은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마치 노동자연대가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다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발현으로 치부한다는 식으로 왜곡하지 말라), 성폭력 문제를 모든 문제보다 우선시하고, 거기에 모든 걸 종속시킨다는 점이다.

    게다가 구정물에는 발도 담그지 않겠다는 이런 순수주의적(초좌파적) 태도는 스스로를 운동의 언저리로 물러나 있게 하는 태도임을 류한수진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번 글(‘책임을 돌라보라’)에서 류한수진의 입장을 노동계급정당추진위의 공식 입장으로 치부해도 좋겠는가에 관해 물었다. 류한수진의 입장이 추진위의 공식 입장이 아님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다시금 류한수진은 추진위와 자신을 구분하듯이 다함께 중앙과 회원 개인을 구분해야 한다.
    10. 절충적인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모순과 동요

    마지막으로, (역시 류한수진은 한사코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이 문제에서 전선은 분리주의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에 그어져 있다고 본다. 무릇 말보다 실천이 중요한 것인데, 앞서 설명했듯이 류한수진이 이 문제에 관한 실천에서 사용해 온 수단들 – 피해자 절대주의, 2차가해 개념, 성적으로 부적절한 상이한 구체적 행위들을 구분 않기, 성폭력 문제를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기 – 은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류한수진이 사회주의자를 자처한다는 점에서 그를 “분리주의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류한수진은 성폭력 문제에서는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언어ㆍ개념을 차용하고, 계급투쟁이나 노동운동 문제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언어ㆍ개념을 사용하는 절충적인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모순과 동요를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계급투쟁에 더 친화적이라는 점에서 계급투쟁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분리주의 페미니즘보다 마르크스주의와 공통점이 더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절충할 수 없는 두 가지(분리주의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의 절충을 시도하다 보니, 실천에서는 중간주의적 특징(중간에서 동요하기)을 보였다.

    예컨대, 영국에서 계급투쟁 수위가 낮아지고 사회적으로 반노동계급 사상이 우세해지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도 여성 차별의 문제가 많은 부분 남성들 – 특히 노동계급 남성 – 의 책임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이런 생각은 계급투쟁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초계급적 페미니즘에 찬성하는 주장을 강화하는 구실을 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80년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우경화하고 있던 노동당으로 향했다.

    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마르크스주의와 반노동계급적 분리주의 페미니즘을 모두 받아들이면 모순에 빠지는 건 필연적이다. 그리고 결국 여성 차별을 끝내기 위해서 무엇에 맞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류한수진이 진중한 사회주의자로 살고자 한다면 그동안 자신이 한 일을 솔직하게 돌아보고, 그와 관련된 이론적 쟁점들도 천착해 보길 바란다. 자기 오류를 돌아보려 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활동가는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이현주 기자

    http://wspaper.org/

연구소 일정

2월

3월 2024

4월
25
26
27
28
29
1
2
3월 일정

1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

일정이 없습니다
3
4
5
6
7
8
9
3월 일정

3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4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5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6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7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8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9

일정이 없습니다
10
11
12
13
14
15
16
3월 일정

10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1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2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3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4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5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6

일정이 없습니다
17
18
19
20
21
22
23
3월 일정

17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8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9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0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1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2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3

일정이 없습니다
24
25
26
27
28
29
30
3월 일정

24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5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6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7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8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9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30

일정이 없습니다
31
1
2
3
4
5
6
3월 일정

31

일정이 없습니다